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조선의 정통국가(2)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조선의 정통국가라는것은 셋째로, 제사의식을 통하여 잘 알수 있다.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였기때문에 고구려시조왕을 제사지내였다. 물론 동시에 동족의 나라들인 백제와 신라의 시조왕들도 제사지내였다.

고려사람들이 고주몽을 제사지낸것은 두가지 측면에서 볼수 있다. 하나는 평양의 동명왕릉과 동명왕사당에 제사지낸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도인 개경의 왕궁 및 왕궁주변에 고주몽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봄, 가을 제사를 지낸것이다.

고려에서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왕의 릉묘들을 각기 장소들에서 잘 수축관리하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면서도 같은 동족의 나라들인 백제와 신라의 땅을 차지하고 그 후손들을 수용한 사정과 관계될것이다. 다시말하여 고구려뿐아니라 백제와 신라를 포섭망라한 첫 통일국가였기때문에 백제와 신라왕의 릉묘들도 잘 관리하도록 하였던것이다. 그러한 조치로서 이 릉묘들 주변에서 벌초를 하거나 사냥하는것을 금지하였으며 릉묘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상하를 막론하고 의례히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도록 하였다.(《고려사》 권4 세가 현종 8년 12월) 이것은 명실공히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명백한 증거로 되며 나아가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우리 나라의 주요한 구성국가였다는것을 잘 보여주는것이다.

동명왕릉과 동명왕사당에 대한 제사의식의 계승은 고려사람들의 고구려계승의식을 직접적으로 잘 보여준다.

우선 평양에 있는 동명왕릉과 동명왕사당에 제사지낸 내용을 보면 《고려사》에서는 《동명왕묘는 부(평양)의 동남 중화지방의 룡산골에 있는데 진주묘라고 부른다. 또 인리방에 사당이 있는데 고려에서 때때로 어암(임금의 수표가 있는 지시문)을 내려보내여 제사를 지냈고 초하루와 보름날에 역시 지방관리에게 명령하여 제사지내게 하였다. 고을사람들은 지금도 무슨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제를 지낸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동명성제사>라고 한다.》고 하였다.(《고려사》 권58 지리지 서경)

고려사람들은 고주몽을 동명왕이라고 하지 않고 동방의 성인이라는 의미에서 격을 올려 성왕이 아니라 성제(聖帝)라고 높이 존칭하였다.

고려사람들은 정부의 높은 관리들을 수시로 동명왕사당에 파견하여 제시지내였다. 1108년(예종 3년)과 1278년(경효왕 4년), 1293년(경효왕 19년) 등 고려정부가 동명왕사당에 고위급관리를 파견하여 제사지낸것은 그러한 대표적실례들이다. 이러한 제사는 전쟁을 비롯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봄, 가을에 진행되였다.

또한 수도인 개성에 있었던 고구려시조 동명왕관련 사당에 대하여 보면 《선화봉사고려도경》(권17 사우)에 선인문안에 동신사가 있는데 랑하(복도)가 30간이나 되며 천우(천각)의 정전에는 《동신성모의 당》이라는 방을 붙였다고 하였다. 막을 가려서 신상을 보지 못하게 하고 나무로 된 녀인상이라고 하면서 부여의 하신(하백)의 딸로서 그가 고려(고구려)시조인 주몽을 낳았기때문에 제사지낸다고 하였다. 그리고 관례적으로는 사자(외국사신)가 오면 관리를 보내여 제사를 차리는데 짐승을 잡고 술을 바치는것이 숭산의 신과 같은 례식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동신사란 고주몽의 어머니 하백의 딸 류화를 제사지낸 사당이였고 류화가 주몽을 낳고 주몽이 고구려를 창건한 시조가 되였기때문에 이렇게 제사당을 만들고 력대로 제사지내왔다고 하였다.

여기서 중시하게 되는것은 제사상을 올리는 통신사의 례식이 숭산신 즉 송악산의 신과 《제사지내는 식이 같다.》고 밝힌데 있다.

그렇다면 숭산신과 제사지내는 격식이 같다는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숭산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것이다.

통신사의 례식이 송악산의 례식과 같다는것은 량자가 다같이 동격의 제사신, 하나의 제사신이라는것을 시사해준다고 보아진다. 그리고 숭산(崧山)이란 송악산을 가리키는 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4 개성부 상 산천)에 의하면 송악산은 개성의 진산으로서 처음 이름은 부소라고 하였는데 혹은 곡령이라고 불렀다. 왕건의 조상의 하나인 강충이 후에 고을의 읍을 산의 남쪽(남양)에 옮기며 소나무를 산에 많이 심었다. 그것은 소나무를 많이 심어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한다면 삼한(조선)을 통합할 인물이 나올것이라는 풍수쟁이 팔원의 말을 듣고 한 처사였다. 그후로부터 산이름을 송악(松嶽, 松岳) 또는 숭산(嵩山) 또는 신숭(神嵩)이라고 불렀다. 팔원의 말은 도선의 말과 서로 어슷비슷하다.

 

송악산에 있는 신을 숭산신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송악산에서 제사지내는 신이란 어떤것인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송악산에는 성황사, 대왕사, 국사사, 고녀사, 부녀사의 5개 사당이 있는데 이것들이 무슨 신인지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중경지》(권5 사단)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권5 개성부 하 사묘, 송악산사)의 기사라면서 《송악에는 다섯개의 신당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중경지》(권5 사단)에 의하면 송악산 신당에는 대왕부인의 나무상이 있다고 하였는데 대왕부인의 나무상이란 류화사당의 나무상일것이다. 그렇다면 류화사당은 고녀사 또는 부녀사에 해당될것이다.

이렇게 놓고보면 대왕사란 댕왕으로 불리웠던 단군이나 동명왕사당이라고 볼수 있다. 이것을 론증해주는것이 해방전 간행된 《개성군면지》이다. 여기에는 직경이 9m나 되는 커다란 바위(일명 북바위)옆에 단군사가 있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해방전까지 송악산꼭대기에 있던 5신당의 하나로서 단군사가 있어 대대로 제사지내여왔던것이다. 바로 단군사가 15세기에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된 대왕사, 대왕신당이였다고 보아진다.

이렇게 송악산에는 5개의 신당이 있었기때문에 곡령, 숭산 등의 이름이 붙는 한편 신숭(神嵩)이라는 이름도 붙은것이라고 보아진다. 여기서 숭이란 높다는 뜻과 함께 숭(崧)과 통하는 말로서 숭산 즉 송악산을 가리켰다. 따라서 신숭이란 신성한 송악산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수도 황도의 성읍을 굽어보며 그것을 옹위하듯 거연히 틀고앉은 송악산은 국도(國都)를 지키는것으로 인정되여왔다. 이런데로부터 송악산신이 거란침략자를 물리쳤다는 전설이 생겼고 이 이야기는 숭산(송악산)이 조상의 가호신으로 고려를 지켜준다고 하는 조상숭배사상으로부터 생긴 전설로 보아진다. 이것은 고구려에서 주몽사당과 녀신(류화)사당이 있어 그것이 무사하면 싸움에서 이기고 나라가 무사하다는 고구려이래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다.(《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3년)

겸해말하면 송악산 5신당과 결부되여 이야기되여야 할것이 팔선궁(八仙宮)의 존재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팔선궁을 팔선주처(八仙住處)라고 하면서 송악산꼭대기에 있는데 8명의 선인이 사는 곳이라고 하였으며 이것은 김관의의 《편년통목》에도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5 개성부 하 사묘) 즉 《곡령(송악산)에 올라 남쪽을 바라다보고서는 이 땅은 반드시 도읍을 이룩할 곳이다.》고 하였더니 뒤따르던 사람이 《이곳은 진짜 여덟신선이 사는 장소이다.》라고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4 개성부 상 형승)

문제는 8명의 선인이 살았다는 팔선궁의 실체가 무엇이며 어떤것이였는가 하는데 있다.

그것은 고려의 조상인 고구려를 제사지내는 8명의 선인당이라는것이다. 이것을 증명해주는것이 력사에 유명한 묘청의 란때에 나오는 팔성당자료이다.

묘청은 임금 인종에게 림원궁성을 짓고 팔성당을 궁중안에 설치할것을 권유하였다.

《고려사》에 실린 팔성당의 내용을 보면 《호국 백두악 태백선인 실덕 문수사리보살》, 《룡위악 륙통존자 실덕 석가불》, 《월성악 천선 실덕 대변(관)천신》, 《구려 평양선인 실덕 연등불》, 《구려(고구려) 목멱선인 실덕 비파시불》, 《실덕금강색보살》, 《중성악 신인 실덕 륵차천왕》, 《녀실덕 부동우파이》이다.(《고려사》 권127 렬전 반역 묘청)

팔성당(八聖堂)은 팔선당(八仙堂)과 같은 뜻으로서 량자는 서로 통한다. 왜냐하면 성(聖)은 선(仙)으로서 성인은 선인(仙人)이였기때문이다. 여기서 실덕은 불교에서 말하는 여래보살이라는 뜻이라고 《고려사》에서 해석하고있는것처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토착적인 조상숭배심에 불교적착상이 가미된것으로 보아지는데 기본은 구려(고구려)와 백두산, 평양이다. 모름지기 고려초창기때부터 이러한 건국관련인식이 강하게 남아있은데로부터 묘청이 평양천도를 주장하면서 천도의 당위성을 강조한것이라고 본다. 다시말하여 묘청이 평양에 팔성당을 짓고 수도옮김을 단행하려는데에는 이미 개성의 송악산에 그의 원형으로 될수 있던 팔선당이 있었다는것을 시사해준다.

이렇게 고려는 일찍부터 나라의 창건을 백두산과 결부시켰고 백두산은 필연적으로 고구려와 관련된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발상지는 백두산이라는 인식이 력대적으로 강하게 작용하였기때문이다.

이렇게 놓고볼 때 송악산 팔선당(팔성당)이 무엇을 제사지내왔는가 하는것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이상 간단하게 고려의 수도 개경에 설치된 사당과 제사의식을 살펴보았다. 요컨대 고려의 수도 개경에는 동명성왕인 고주몽의 어머니의 류화사당이 있고 고주몽을 제사지내는 사당, 백두산과 고구려를 제사지내는 5신당, 팔성당 등이 있었다. 이러한 사당들은 건국초기에 나라의 창건과 더불어 세워졌다고 보아진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가 명실공히 고구려의 계승국이였기때문에 고구려시조왕을 제사지냈을뿐아니라 동명왕의 어머니 류화까지도 성모라고 하면서 극진히 받들어 해마다 봄,가을에 제사지냈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마지막으로 고려국가의 정통성문제에 대하여 다시한번 강조하기로 한다.

우에서 말한바와 같이 고려사람들은 고구려와 고려를 하나의 국가로 보았다.

고려사람들은 자기들을 하늘이 낳은 천자의 나라의 후예로 여겼다. 지어는 고구려뿐아니라 좀더 거슬러올라 단군의 후손으로까지 보았다. 일연이 《삼국유사》(왕력편)에서 《동명왕,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 …단군의 아들이다.》고 한것은 그러한 대표적자료이다.

고조선의 단군과 고주몽의 사이에는 수천년의 시공간적차이가 있다. 그것을 알면서도 일연을 비롯한 고려사람들의 일반적인식으로서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일뿐아니라 단군조선의 계승국이기도 하다는것을 강조하기 위한데 있었다고 인정된다.

 

일연(1206-1289)과 리규보(1168-1241), 리승휴(1224-1300)는 나이차이는 있으나 동시대에 함께 살았다고 할수 있다. 따라서 고려가 단군에 이어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고구려계승인식에서는 공통되여있었다고 볼수 있다.

 

문제는 일연이 자기의 저서에서 고주몽이 단군의 아들이라고 명백히 밝히면서 자기 나라 고려가 고조선-고구려-고려에 이어지는 정통국가였다는것을 강조한것이다.

이밖에도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였다는 사실은 많다. 15세기까지만 해도 개성에는 왕씨보다도 오히려 고씨다 더 많았다는 사실, 수도성인 만월대가 북으로 큰 산(송악산)을 등지고 남으로 궁성을 지은것이 고구려궁성인 대성산성과 안학궁과의 관계를 방불케 한다는 사실 등 그 실례를 들면 끝이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4 개성부 상 성씨)에 의하면 개성(본부)에는 성씨로서 제일 많은것이 첫째로 고씨이고 그 다음이 김씨, 다음이 왕씨와 강씨, 전씨, 리씨의 순서로 많다고 하였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권4 개성부 상 군명)에는 《대성산에 의거하여 궁실을 짓고 성벽을 세웠다. 그 산을 신숭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다시말하여 궁궐형성을 고구려에서 대성산과 안학궁과의 관계처럼 북(대산)으로부터 남(궁실)으로 직선으로 뻗게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조선의 정통국가로 근 500년력사를 빛내여왔다. 고구려를 계승한 이와 같은 고려의 전통적계승의식은 조선봉건왕조에도 면면히 계승되여 존재 전기간 해마다 동명왕을 제사지내여왔다.(《세종실록》 권 34 8년 11월 갑오, 권 35 9년 3월 신축, 《세조실록》 권22 6년 10월 기미, 《명조실록》 권 106 41년 기유, 《순조실록》 권27 25년 9월 을미)

후보원사 교수 박사 조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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