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조선의 정통국가 (1)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려라는 이름도 고구려에서 유래한것이다.》

고려는 918년에 왕건에 의하여 성립되여 1392년까지 존재한 봉건국가이며 동방의 강대국이였던 고구려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조선의 정통국가이다.

고금동서의 력사에는 외래침략자들에 의해 강점되고 지배된것으로 하여 일관된 계승성과 정통성이 없는 나라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정통국가로 존재하면서 력사에 그 위용을 떨쳐왔다.

지난 시기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였다는데 대해서는 여러 론문들이 발표되였다.[《고구려는 조선의 천년강대국》 사회과학출판사 주체97(2008)년 47~52페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조선의 정통국가라는것은 첫째로, 고려사람들자신이 자기 나라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주장한 사실을 통하여 알수 있다.

무엇보다도 국호의 계승에서 두드러지게 표현되였다.

고려라는 국호자체가 고구려라는 뜻으로서 량자는 음과 뜻, 글자가 똑같다.

고려라는 국호는 고구려라는 국호의 줄임말이라고 할수 있다. 본시 고구려라는 국호가 창시자 주몽의 성씨와 구려국의 국호와 합치여 생긴 국호였다고 보아지고있다.[《고구려이야기》 사회과학원출판사 주체99(2010)년 22~24페지]

우리 나라 력사책들인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중국의 력사책들인 《삼국지》, 《송사》, 《량서》, 《수서》, 《북사》, 《위서》, 《신당서》 등을 보면 고구려와 고려를 하나의 국가, 하나의 대상으로 인정하고 고구려 또는 고려라고 썼다. 다만 중국에서는 고구려라는 국호가 조선의 독자적인 국호인데다가 하나의 한자로 국호를 나타내는 중국식과는 다른데로부터 표기에 편리하다고 여겨지는 국호-고려를 많이 사용하였다고 보아진다.

요컨대 고려라는 국호는 고구려의 줄임말로서 고구려나 고려는 똑같은 의미로 고구려 존재 전기간과 후시기의 사람들에 의해 그대로 쓰이게 되였다. 후시기 사람들은 고려라는 국호의 의미를 《산이 높고 물이 맑다는 의미를 취》한것으로 해석하군 하였다. (《지봉류설》 권2 지리부 우물)

고대일본에서는 기본적으로 고구려를 고려라고 쓰고 고마라고 읽었고 그것을 《고사기》와 《일본서기》 등에 반영하였으며 그이후의 조선도 고마(고려)로 부르는 관습은 일본의 중세 전기간 통용되였다.

다음으로 고려사람들이 쓰고 조선봉건왕조의 사가들이 편찬한 《고려사》를 비롯한 여러 문헌들을 통하여 표현되였다.

《고려사》에는 《우리 해동(조선)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있고 한 모퉁이가 뭍과 련결되여있는데 폭의 넓이가 거의 만리에 달한다. 고려태조가 고구려땅에서 일떠서서 신라를 투항시키고 후백제를 멸망시켜 수도를 개경으로 정하여 삼한땅을 통일하였다.》라고 고려국가의 지위를 규정하였다.(《고려사》 권56 지리지)

《고려사》에서 보는바와 같이 삼한은 시기적으로 서로 각이한 개념으로 쓰이지만 아무튼 고려는 고구려땅에서 일떠서서 신라를 귀순시키고 후백제를 멸망시켜 삼한(전체 조선)을 통합하였다.[《력사과학》 과학백과사전출판사 주체101(2012)년 3호, 4호] 다시말하여 삼한을 통합한 주체가 고려이지 신라가 아니였다는 여기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 이것은 993년 거란침략자들이 수십만의 대군으로 쳐들어왔을 때 거란침략자들의 우두머리 소손녕과 고려측 담판사신인 서희장군과의 담판과정에도 명백히 밝혀져있다.

리규보(1168-1241) 역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음을 명백히 밝히였다. 그는 고구려시조 동명왕을 고려의 시조왕으로 여기고 동명왕시편의 서문에서 그것을 쓰게 된 경위에 대하여 《세상에는 동명왕의 신기한 일들이 많이 이야기되여온다. 지어 보통농부나 동네아녀자들도 자못 동명왕의 신기한 이야기들을 말하군 한다. 그래서 <위서>, <통전> 등의 기사를 읽었는데 소략해서 상세하지 못하더라. 그런데 계축년(1193년) 4월에 <구삼국사>를 얻어 동명왕본기를 보게 되였다. 대를 이어 전해오는 신기한 사적들에 대하여 처음에는 믿으려고 하지 않았고 괴이하고 이상한 도깨비이야기로만 알고있었다. 그런데 삼복탐미를 거듭한 끝에 점점 그 심원한 근원을 알게 되니 도깨비나 환영이 아니라 거룩하고 신성한것이였더니 하물며 국사(國史)직필의 책이니 어찌 망명된것을 전하겠는가.》고 하면서 《동명왕의 력사는 신기한 일들이지만 실은 국가창건의 신성한 력사이니 이것을 서술하지 않는다면 후대들은 장차 무엇을 본단 말인가. 때문에 시를 지어 새기는것이니 그 까닭은 천하로 하여금 우리 나라가 본시부터 성인의 나라였음을 밝히려고 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동국리상국집》 권3 (동명왕편)]

이와 같이 고려사람들은 자기들을 고구려의 후손으로, 고려를 고구려와 같은 나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여기고 그것을 긍지로 여겼다. 따라서 시기적으로 볼 때 후기신라사람들이 편찬한것으로 보아지는 《구삼국사》이래로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에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력사가 밝혀지게 되였다.

리승휴(1224-1300)도 《제왕운기》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력사를 시로 서술하였다.(《제왕운기》 권하 동국군왕개국년대병서)

한편 봉건시기 중국사람들도 《송사》에 《왕건이 고씨의 자리를 계승하였다.》고 하였고 서긍 역시《선화봉사고려도경》의 왕씨편에서 《왕씨의 조상은 대대로 고려(고구려)의 대족이다. 고씨의 정치가 쇠해지면서 나라사람들이 어진 사람을 내세워 드디여 군장이 되였다.》고 하였다. 《구오대사》의 내용 역시 마찬가지이다.(《송사》 권 487 외국3 고려,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 왕씨, 《구오대사》 권138 외국렬전 고려)

고구려와 고려는 존재한 력사적시기가 서로 다르다. 고구려는 668년에 멸망하고 고려는 918년에 성립되여 250년간의 시공간적차이를 가지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과 《송사》(고려전)는 하나의 동일한 나라안에서 고씨와 왕씨가 교체된것처럼 써놓았다. 이렇게 된것은 바로 고구려와 고려가 한개 나라로 인식되고 그렇게 인정되여왔기때문이다.

물론 외국사람들이 이와 같은 기록을 남기게 된것은 고려사람들을 통한 견문에 기초한것이다.

따라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송사》 등에서는 《고려는 주몽의 옛 풍속을 계승하였다.》고 하였던것이지 결코 신라의 풍속을 따랐다고 하지 않았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4 개성부 상 풍속)

고려사람들은 어디까지나 고구려를 자기의 조상국으로 여긴데로부터 고구려의 건국시조 고주몽을 동명성제로 높이 받들면서 해마다 봄과 가을에 지성을 다하여 제사지냈던것이다.(《삼국유사》 권1 기이2 말갈, 발해, 《고려사》 권63 례지 장사, 숙종 10년 2월 계축)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조선의 정통국가라는것은 둘째로, 고려의 창건자 왕건의 조상계보를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고려사》에 실린 고려세계에는 김관의의 《편년통목》과 민치의 《편년강목》이 있다. 그에 의하면 고려태조 왕건의 조상은 호경으로서 성골장군이라고 불렀다. 호경은 백두산에서 내려와 부소산(송악산) 좌골에 와서 그곳 토배기녀자에게 장가들었다. 호경은 활을 아주 잘 쏘았는데 그가 무술훈련을 한 장소가 유적으로 남아있다. 호경의 자손인 작제건 역시 활을 잘 쏘았는데 그 솜씨는 백발백중이였다. 문제는 고려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을 두고 사람들은 고려인(고구려인)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한편 작제건은 룡건(왕룡-세조)을 낳고 부소악으로 불리우던 송악에서 살았다. 한번은 이름난 풍수가였던 도선이 백두산에 오른 다음 남하하여 곡령(송악산)까지 왔다. 도선이 룡건(혹은 강충)을 보고 집을 송악산남쪽에 옮겨지으면 삼한(전체 조선)을 통합할 인물이 나온다고 하였다.

작제건의 설화는 고구려시조왕 주몽이 그의 맏아들 유류와 만나는 이야기의 복사판이라고 말할수 있다. 다시말하여 고구려시조왕전설을 고려태조의 조상유래기에 갖다붙인것이다.

한편 중국의 력사자료에도 고려태조 왕건이 고구려의 후손(유민)이라는것을 밝혀놓았다.

그러한 대표적자료로서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을 들수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권1 건국)에는 부여왕이 하신(하백)의 딸을 얻었는데 그 녀자가 해빛에 임신되여 알을 낳고 그 알에서 까나온 아이가 커서 활을 잘 쏘아 그래서 주몽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그러한 주몽전설에서 고려건국의 시작을 뗀 다음 대조영이 무리 40만을 거느려 계루부(고구려)에 의거하여 발해국을 창건한 내용을 서술한 다음 왕건이 나라를 세웠다고 결론지었다. 계속하여 《선화봉사고려도경》(권2 세차 왕씨)은 《시조왕 왕씨의 선조는 대개 고려(고구려)의 대족이다.》고 규정한 다음《고씨의 정치가 쇠한 다음 나라사람들이 어진 사람을 내세워 드디여 군장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송사》를 비롯한 《구오대사》의 기록들도 《선화봉사고려도경》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것은 대개 서긍이 고려에 와서 고려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견문에 기초한 내용에 의거하여 쓴것을 리용하였기때문이다.

그리하여 고려에 관한 내외사서들에 반영된 고려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발상지로 상징되는 백두산에서 내려온 고구려유민(후손)이며 명백히 고려인(작제건)이라고 밝히였다. 고려태조 왕건이 남긴 《10훈요》가운데 다섯번째가 《짐이 삼한산천의 도움을 받아 대업을 이룩하였는데 서경(평양)은 수덕이 순조로와 우리 나라 지맥의 근본이요 대업만대의 땅이다. 마땅히 100일이상 머무르면서 안녕을 도모하라.》였다. 이것 역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중시한 고구려의 후손만이 남길수 있었던 발언이였다고(《고려사》 권2 세가 태조 26년) 보아진다.

 

후보원사 교수 박사 조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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