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 조선에서 감행된 일본침략자들의 금광리권강탈책동과 그 침략적본질

 

2. 본론

 

2. 2. 일본침략자들이 조선에서 감행한 금광리권강탈책동의 시점 및 단계

 

우리 나라의 금광리권을 강탈하기 위한 일본침략자들의 책동을 세 단계로 나누어볼수 있다.

일본침략자들의 금광리권강탈책동은 1880년대초 단천금광리권강탈로부터 시작되였는데 이것을 그 책동의 첫단계로 볼수 있다. 일본침략자들이 우리 나라 금광에 대한 저들의 략탈적야욕을 드러낸것은 이미 1879년부터였다.

1879년 우리 나라에 또다시 기여든 하나부사는 조선봉건정부에 원산을 개항할것을 강박하였다. 그리고 그 전해에 우리 나라가 부산세관에서 일본상품에 관세를 붙인것으로 하여 저들이 입은 《손해배상》의 대가로 일본인들에게 광산채굴권을 허가하고 일본공사와 령사, 그 수행원, 고용인들이 조선의 내륙지방의 각곳을 돌아보는것을 승인해줄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조선봉건정부의 거절로 목적을 달성할수 없게 되자 일본반동정부는 1879년 7월에 원산개항을 내용으로 한 《원산진개항예약》을 강요하고 미국인광산학자인 코완을 초청하여 부산으로부터 원산에 이르는 지역에 대하여 면밀한 지질조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1880년 3월부터는 원산항이 개항된것을 계기로 원산에서 일본인들이 자유로이 다닐수 있는 거리를 사방 10리로 해놓았다.

일본침략자들은 우리 나라의 금광리권강탈에 필요한 사전준비를 면밀히 한데 기초하여 제일먼저 단천금광리권강탈에 달라붙었다. 임오군인폭동때 입은 《피해》보상을 받아내야 한다는 구실밑에 일본외무경 이노우에는 정부의 사촉밑에 하나부사에게 《사변처리에 관한 재훈령의 건》을 주었는데 여기에는 단천금광리권과 관련한 일련의 대책적문제들이 중요하게 언급되여있었다.

이노우에가 하나부사에게 내놓은 단천금광리권과 관련한 제안을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일본인 관리를 파견하여 사금도태(사금을 골라서 정선하는것)공업을 감독하게 할것.

둘째로, 도태법은 유미렬강의 가장 새로운 방법을 사용할것.

셋째로, 매일 얻는 순리익가운데서 8/10을 배상금으로 돌리고 채굴비용은 조선봉건정부가 부담할것.

넷째로, 금의 량을 방부에 기록하고 두 나라 정부관리의 립회밑에 검사하여 봉인한 다음 창고에 저장할것.

다섯째로, 사금도태사업에 관해서는 매일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공포할것.

여섯째로, 배상금지불이 끝날 때까지 단천사금장의 일정한 구역을 외국인에게 허용하지 말것.

배상금지불에 있어서 만약 단천의 사금만으로 모자랄 때에는 다른 사금장으로 대치하며 그래도 모자랄 때에는 은, 동, 철, 석, 연의 채굴에 의하여 보충한다.

이노우에는 우에서 언급한 내용외에도 하나부사에게 금, 은, 동의 화페를 조페하며 한성, 부산, 원산, 인천 등지에 전선을 가설할데 대해서와 양화진, 대구, 단천, 함흥, 덕원, 안변 등지를 개발할것 등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

 

* 《일본외교문서》(일문) 15권 235페지

 

우의 자료들은 일본침략자들이 임오군인폭동을 좋은 구실로 삼아 종래의 개항장을 통한 사금략탈의 범위를 벗어나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조선의 풍부한 지하자원에 대한 독점적채굴권을 탈취하려고 하였다는것을 실증해준다.

그러면 일본침략자들이 왜 조선의 많은 사금장가운데서 단천금광리권을 획득하려고 하였는가 하는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당시 원산항에 집결된 사금가운데서 제일 품질이 좋은 사금이 단천산 사금이였고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때문이였다. 원산항에 집결한 사금은 주로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채굴된것으로서 그중에서도 단천산 사금은 북부조선일대에서도 가장 품질이 높은것으로 유명하였다.

이로부터 이노우에는 하나부사가 조선으로 건너오기 전에 벌써 단천금광의 채굴권을 강탈할것을 지시하였으며 이어 단천금광리권강탈을 위한 보고서에서 다른 나라에 내정간섭이라는것이 보이지 않게 별지로 첨부할것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 《일본외교문서》(일문) 15권 239페지

 

이것은 일본이 아직까지 청나라세력을 조선에서 밀어내지 못한 당시의 조건에서 금광리권문제가 청일 두 나라 관계를 악화시킬수 있다는것을 고려한데로부터 출발한것이였다.

일본외무경 이노우에의 지령에 따라 하나부사는 조선봉건정부측 대표인 김홍집에게 55만원의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광산개발이 절실히 필요함을 력설하였다. 그러면서 만약 조선봉건정부가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경우 원래 액수에서 10만원을 감액하는 조건에서 광산담보설정권, 전신가설권 및 함흥, 대구의 행상리권 등을 일본측에 양여한다는것을 조약에 명시할것을 요구하였다.

일본반동정부의 이 강도적요구는 매해 10만원씩 절약하면 능히 배상금을 물수 있다는 김홍집의 제안에 의해 거절당하고말았다.

그후 1882년 9월 조선봉건정부가 김옥균, 박영효 등 11명의 수신사들을 일본에 파견한적이 있었다. 이때 일본반동정부는 이를 좋은 기회로 삼아 17만원의 차관을 요꼬하마은행을 통하여 조선봉건정부에 제공하는 대가로 단천금광리권을 빼앗는데 성공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은 요꼬하마은행에서 파견된 일본인이 조선봉건정부의 관리와 협동하여 단천금광을 개설하며 여기에 드는 일체 비용을 조선봉건정부가 부담할것 그리고 채집한 금괴 혹은 사금을 요꼬하마은행에 보낼데 대해서와 단천지역에서의 금광채굴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허용하지 말데 대한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일본침략자들의 강도적인 단천금광리권강탈책동은 실제적인 채굴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하지만 일본침략자들은 조선의 금광리권강탈목적달성을 위해 그 이후에도 보다 교활하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일본침략자들의 금광리권강탈책동은 1880년대 중엽이후에 들어와 《합영》, 《합자》의 간판밑에 일본민간인 및 회사들을 내세워 여러 금광리권을 강탈하는 방법으로 본격화되였다. 이것을 그 책동의 둘째 단계로 볼수 있다.

광범한 애국적인민들의 적극적인 투쟁에 의해 단천금광리권을 강탈해내려던 일본침략자들의 책동은 실패하고말았다. 하지만 일본침략자들은 오히려 단천금광 하나의 리권강탈이라는 소극적인 범위에서 벗어나 부산, 원산 등 개항장들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영흥금광, 창원금광 등 금매장량이 풍부한 여러 금광리권강탈에 달라붙었다.

일본외무경 이노우에는 단천금광리권강탈에서 당한 참패를 만회하기 위하여 1886년 10월 4일 한성주재 림시대리공사 다까히라에게 비밀훈령을 보내였다. 훈령은 한마디로 말하여 빠른 시일내에 조선의 광산전반에 대한 독점적채굴권을 탈취하라는것이였다.

7개 항으로 된 이노우에의 비밀훈령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로, 조선봉건정부가 일본인에게 50년이상의 기한부로 광산채굴의 권한을 주도록 교섭할것, 둘째로, 조선봉건정부는 일정한 조세를 받는 조건에서 일본광산기업가들에게 필요한 국유지 또는 민유지를 대부해주고 일본인의 채광업을 보호하며 이를 방해하는자들을 단속하게 할것, 셋째로, 일본정부가 상당한 수의 일본인광산기사들을 조선에 파견하여 광산개발에 유리한 장소를 탐사할수 있게 할것을 조선봉건정부와 교섭할것 등이였다.*

 

* 《일본외교문서》(일문) 20권 236~237페지

 

이 훈령은 모든 조항들이 다 일본인이나 일본회사가 조선에서 독점적인 광산채굴권을 소유하기 매우 유리하게 작성되여있었다.

우의 자료는 일본반동정부가 1886년에 벌써 우리 나라의 광산리권을 독점할 면밀한 계획을 작성하고 강행적으로 내밀었다는것을 잘 보여준다.

일본공사 다까히라는 본국의 비밀지령에 따라 우리 나라 광산들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에 달라붙었다.

다까히라는 우선 《일본국 공사, 령사 및 그 수행원이 조선국내를 답사하는것을 허가한다.》는 규정을 내휘두르며 우리 나라 내륙지방의 금광 등 여러 광산들에 대한 조사를 맹렬히 진행하였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금광을 독점하려던 일본침략자들의 탐욕적행위는 인민들의 강력한 반항에 부딪쳐 파탄되고말았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갑오농민전쟁을 계기로 나라의 근대화의 절박성을 그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절감한 혁신관료들에 의해 개혁사업이 힘있게 추진되고있었다. 혁신관료들은 외래침략자들의 침해로부터 민족산업을 고수하기 위한 사업을 활발히 벌려나갔다. 조선봉건정부내에는 광산개발 및 경영사업을 직접 맡아하는 광무국이 설치되고 광산운영에 필요한 자금 및 기술자들을 미국을 비롯한 외국과의 교섭으로 해결하기 위한 계획이 작성되였다. 이런 조건에서 일본이 추구하는 조선에서의 광산독점기도는 실현될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시의 형편에서 일본침략자들은 《배상금》을 턱대고 광산리권을 강탈해내려던 초기의 계획을 바꾸어 《두 나라의 공동경영》이라는 보다 교활한 술책에 매달리게 되였다.

《두 나라의 공동경영》안이란 한마디로 말하여 일본민간인 및 회사들을 내세워 조선사람의 이름을 빌려 광산채굴권을 얻게 한 다음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투하하여 광산개발을 진행하되 거기서 나오는 리득금을 자본의 투자액에 비례하여 《분배》한다는 매우 교활하고 기만적인 략탈안이였다.

《두 나라의 공동경영》안은 1887년 4월에 일본외무경 이노우에가 조선인 또는 조선봉건정부와 일본인사이에 자본을 합자하여 공동경영식으로 광산을 개발하며 그 분배를 자본투자액에 따라 하자는 제안을 내놓은것을 발단으로 하여 더욱 구체화되였다. 이노우에가 제기한 《합영》, 《합자》의 간판을 내건 광산개발안은 일본정부가 조선에서 저들의 광산채굴을 통리기무아문의 정식승인을 받아내여 보다 안전하게 진행하며 점차 광산채굴리권을 완전히 독점하자는데 그 진목적이 있었다.

당시 이노우에는 조선봉건정부의 형편으로서는 광산개발에 필요한 자금은 물론 기술자도 제대로 댈수 없으며 따라서 외국의 자본 및 기술자고용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것을 면밀히 타산하였다. 이것은 이노우에가 한성주재 일본공사에게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에서 초래될수 있는 여러가지 난점들을 피하면서 조선에 체류한 일본인가운데서 신용을 얻은자를 선정하여 조선봉건정부 또는 개인회사들과 계약을 맺도록 하라는 비밀지령을 보낸 사실이 잘 실증해준다.*

 

* 《일본외교문서》(일문) 20권 236~237페지

 

광산리권강탈을 노린 《합영》, 《합자》라는 일본정부의 새로운 제안은 부산, 원산주재 령사들에게도 전달되였고 그 이후 일본자본가들이 조선으로 물밀듯이 쓸어들어왔다.

이처럼 1880년대 중엽이후에 들어서면서 일본침략자들의 금광리권강탈책동은 단천금광이라는 한개 광산만의 리권강탈을 위한 조약체결강요의 범위에서 벗어나 개항장들에서 가깝고 또 품질이 높은 영흥금광과 창원금광 등 여러 금광채굴권강탈에로 확대되였다.

김일성종합대학 박사 부교수 오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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