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나라시기 언어의 단일성 연구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는 우리 나라는 중세사회에 이르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나라시기를 거치게 되였으나 고대로부터 하나의 피줄을 이어받아온 세나라의 주민들은 언어와 문화를 같이하는 하나의 겨레로서 서로 이웃하며 살아왔다.

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그것을 엄연한 력사적사실로 인정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정사와 야사를 서술하였고 중국의 옛 력사책들인 《삼국지》, 《후한서》, 《량서》에서도 이러한 점에서는 대체로 서술의 일치성을 보이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날 일부 사람들은 불순한 목적에서 이러한 력사적사실을 외면하고 고구려와 신라를 대치시키는 그릇된 주장을 하였다.

해방전 일본어용학자 이마니시류는 조선민족의 단일성을 부정하면서 신라만이 조선민족의 조상이고 고구려는 북방의 퉁구스계통으로서 조선민족과 무관계한것처럼 력사적사실을 제멋대로 외곡하였다.*¹ 그리고 노로꾸로는 이것을 언어사적으로 《론증》한다고 하면서 《부여-고구려의 말》을 퉁구스-만주어계통으로 몰아붙이고 조선어와는 직접적관계가 없는듯이 주장함으로써 고구려를 우리 말 력사의 시야밖으로 몰아내려고 하였다.*²

 

*1 《백제사연구》 (일문) 1934년, 64~65 페지

*2 《조선방언학시고》 (일문) 1945년, 161~171페지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언어의 단일성문제를 당시 사람들이 쓴 말과 글의 공통성을 놓고 고구려사람들이 조선민족이 아니라고 하는자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의 허황성을 론증하려고 한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민족은 하나의 민족으로서 하나의 말과 글자를 가지고있으며 같은 력사와 문화의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세나라시기 언어의 단일성은 무엇보다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말이 같았다는 력사적사실을 통하여 잘 알수 있다.

단군조선에서는 이미 《신지글자》라는 고유한 민족글자가 있었다. 이것은 조선반도의 북쪽지역에서부터 남쪽의 남해지역에 이르기까지, 압록강, 두만강이북의 고조선령토전역에 이르기까지의 넓은 지역에서 쓰이여왔으며 고대시기에 벌써 우리 나라의 언어가 공통적인 연원에 기원을 두고있었다는것을 말하여준다.

세나라시기에 와서 우리 나라의 말은 단일민족으로서의 체모에 맞게 더욱 공통성을 띠게 되였다.

기록에 의하면 《불, 물, 달, 글, 구슬, 나무, 돌, 비, 실, 머리, 벌》 등을 비롯한 많은 어휘들과 말소리들은 세나라가 완전히 같았다.

세나라시기 어휘들과 말소리들이 같았다는것은 우선 이 시기에 사용한 우리 말 어휘의 리두식표기에 집중적으로 반영되여있는 사실을 통하여 잘 알수 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에는 리두식표기로 된 인명, 지명, 관직명 등이 약 120개 반영되여있으며 신라의 마운령비(568년)에도 근 50개의 리두식표기가 나오고있다.

세나라시기의 인명은 그 어휘적의미나 단어조성수법에서 공통적이였고 그 시대적계승관계에서도 공통적이였다.

례를 들어 왕명의 경우에 《누치》는 고구려의 7대왕에도, 신라의 12대왕에도 붙였으며 인명의 경우에 《옷쇠》는 2세기 고구려사람의 이름에도, 3세기중엽 백제사람의 이름에도, 7세기전반기의 신라사람의 이름에도 붙였다. 인명에서는 흔히 《옷, 길, 불, 새, 쇠, 돌, 굿, 마리, 수리, 누리》 등의 단어들이 쓰이였는데 그것은 세나라가 공통적이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쓰이던 지명의 분포정형을 분석해보면 이 시기에 쓰인 지명류형 18개가운데서 두나라이상 공통적으로 쓰이던것은 《거므나, 부르나, 쇠나》의 《~나(壞)》, 《두름나, 고을나, 살나》의 《~나(川)》, 《수리골, 보골, 조골》의 《~골(邑)》, 《달수리, 아수리, 무수리》의 《~수리(峯)》, 《우드르, 나드르, 매드르》의 《~드르(野)》를 비롯하여 15개에 달한다.

그리고 리두식표기로 된 옛지명자료에는 근 100개의 고구려단어가 반영되여있는데 그중 중복을 빼고 약 60개를 분석해보면 70%가량이 15세기 조선말과 같거나 류사성을 보이고있다.

세나라시기 어휘들과 말소리들이 같았다는것은 또한 세나라사람들이 서로 말을 자연스럽게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집중적으로 반영되여있는것을 통하여 설명할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642년에 당시 신라의 실권자 김춘추가 고구려에 찾아왔을 때 고구려대신 선도해는 그와 《토끼와 거부기》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신라의 거칠부가 자기 정체를 숨기고 고구려땅에 가서 어느 한 사찰에서 불경을 강의하던중 혜랑과 단둘이서 누구도 알아서는 안될 비밀이야기를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있다. 백제사람들과 신라사람들사이에도 말을 자연스럽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장수가 군사들에게 한 말을 백제의 첩자가 엿듣고 돌아가서 그대로 보고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공통된 말을 사용하면서 살아온 우리 민족의 국가였다는것을 실증하여준다.

 

세나라시기 언어의 단일성은 다음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리두라는 우리 민족특유의 글체계를 공통적으로 쓰고 함께 발전시켜온 력사적사실을 통하여 잘 알수 있다.

리두서사체계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서 우리 말을 표기하는 서사방식으로서 문법구조와 기본어휘, 어음체계가 같아야만 그것을 공통적으로 쓸수 있으며 인명, 지명, 관직명과 일반어휘의 표기에서는 표기수단인 한자의 음과 뜻에 대한 공통적인 인식에 기초해서만 호상 교류가 가능하다.

우선 금석문유산을 통하여 알수 있는바와 같이 리두어순의 표기에서 세나라가 공통성을 나타내고있다.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에는 《王於忽本東崗黃龍負昇天》(왕을 홀본동강에서 황룡이 업고 하늘로 올라갔다.)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는 우리 말 어순이 섞여있다. 여기서 《王於忽本東崗》의 《王》을 주어로 인정하여서는 《黃龍負昇天》의 다음말과 전혀 련결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한문어순을 완전히 버리고 우리 말의 어순으로 해석해야만 되는데 이처럼 우리 말 어순으로 된것이 바로 리두어순이다. 이러한 리두표기는 5세기 후반기 《중원고구려비》의 《建立處用者》(건립처를 사용자에게)나 《太位諸位上下衣服來受敎》(태위와 제위의 상하들은 의복을 와서 받으라고)의 표기, 신라의 《임신맹세돌》(512년)의 《今自三年以後忠道執持過失先誓》(이제부터 3년이후 충성의 도리를 붙잡아서 과실이 없도록 맹세한다.)나 《若此事先天大罪得誓》(만약 이 일을 잃으면 하늘에 큰 죄를 얻으리라고 맹세한다.), 신라의 중초사돌기둥(827년)의 《一石分二得》(한 돌을 쪼개여 둘을 얻는다.)과 같이 보어가 술어의 앞에 놓이는 문법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있는데 이것은 철저한 우리 말어순으로서 고구려와 신라의 리두가 같았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또한 세나라의 리두사용에서 리두적인 형태인 《지》의 용법상특징이 세나라가 동일성을 보이고있는것을 통해서도 설명할수 있다.

광개토왕릉비의 《其有違令賣者刑之 買人制令守基之》(그의 령을 어기고 관자는 형벌을 준다. 사들인 사람은 수묘를 하도록 한다.)에서 《刑之》 즉 《之》의 용법은 한문법에 어긋남이 없으나 《守基之》의 《之》는 한문문법에 어긋나는것으로서 문장의 종결사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있다. 

그런데 이러한 《之》의 용법이 신라의 리두에 그대로 나타나고있다. 신라무술오작(578년)에 나오는 《戊戌年四月朔十四日 □冬里村高□塢作記之》(무술년 4월에 시작하여 14일에 □동리촌의 고□오를 지은 기록이다.)에서 《作記之》의 《之》는 문장의 종결사로 쓰인것인데 그것은 신라남산신성비(591년)의 《罪敎事爲聞令誓事之》(죄 수실 일로 삼아 여쭈어보라는 교령에 따라 맹세하는 일이다.)에서 《誓事之》와 같이 《之》의 용법이 상당히 보편화되여있음을 알수 있다.

이러한 표현이 현재 신라의 금석문들에서 많이 나오고있는데 이것은 우리 말의 종결토 《다》에 해당되는것으로서 리두의 형태적특징의 하나로 된다.

또한 리두에서 독특하게 쓰는 어휘적표현인 《節》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가 있다.

리두는 비록 한자로 쓰인것이지만 한문에서 쓰지 않는 독특한 어휘적표현을 가지고있는데 그 대표적인것이 《節》의 의미와 관련한것이다.

《節》은 한문에서 《마디, 단락, 절조, 표식》 등의 여러가지의 의미로 쓰이는것이지만 리두에서는 《담당자, 제작자》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돌에 있는 《小兄文達節…》(소형 문달이라는 담당자가…)(제1호)와 《物省小兄俳百頭節》(물성 소형 배백두가 담당자이다.)(제2호)에서 보이는데 이 용법은 신라의 무진사 쇠종(745년)에서도 《節維乃秋長幢主》(담당자는 유내 추장당주)와 같이 그대로 되풀이되고있다.

리두에서 《節》은 《이때》 또는 《림하여》의 뜻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그러한 용법은 중원고구려비에도 나오고 신라 남산신성비에도 나오며 그 뜻도 역시 같다.

리두의 형태적특징을 보여주는 《之, 中, 節》외에 《事, 白, 耶》도 있는데 이것은 우리 말의 여격토인 《에, 에게, 께》와 같은 토로 쓰이는 용법으로서 이것이 고구려의 리두와 신라의 리두에서 함께 쓰이고있는것은 그 형태구조상 동일성에 의해서만 설명되는 문제이다.

리두의 발생, 발달과 보급의 과정을 보면 언제나 고구려가 선구자의 역할을 하여 앞장서나가고 신라가 그에 뒤따르면서 일층 발전시키였는데 이것은 언어구조의 단일성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일이였다.

이 모든 사실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서 서로 다른 말과 글을 쓴것이 아니라 조선민족의 언어적공통성에 토대하여 리두문화를 함께 발전시키고 같은 언어생활을 하였음을 말해주고있다.

리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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