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신성한 령토 독도

1. 서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독도는 그 누구도 침해할수 없는 우리 나라의 신성한 령토입니다.》

우리 나라는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국이며 바다진출력사가 오랜 해양국이다. 울릉도와 함께 그 부속섬인 독도가 일찌기 조선민족에 의하여 발견되고 개척, 령유되여오고있는 삼천리강토의 한 부분이라는것은 동방에 대한 초보적인 력사지리적개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상식으로 되여있다.

그러나 일본반동들은 《독도는 일본령토》라는 얼토당토않은 억지주장을 펴며 지난 2월 18일 시마네현에서 벌려놓던 《다께시마의 날》행사라는것을 일본국회에 가져가 《도꾜 다께시마의 날》대집회를 벌려놓았다. 여기에서 일본령토의원련맹회장이라는 자는 《일본의 소중한 국가중 일부가 다른 나라에 의해 침해당하고 불법점거되고있으니 이를 해결하는것은 국가의 책임》이라고 하면서 독도강탈책동을 로골적으로 드러내놓았다. 그리고 22일에는 시마네현에서 진행된 《다께시마의 날》행사에 정부고위인사를 비롯한 150명의 일본인과 일본국회 의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독도강탈책동의 열을 더욱 고취하였다.

독도가 우리 민족의 신성한 령토라는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일본의 진보적인 학자들속에서는 독도가 우리 나라의 땅이라는데 대하여 인정도 하고 과학적으로 론증도 하였다.

실례로 일본의 어느 한 학자는 옛날 조선에서 일본으로 가는 항로의 하나가 조선의 울릉도-독도를 거친다고 하면서 독도가 우리 나라의 령토라는데 대하여 밝히였다. 이것은 고구려, 신라사람들이 울릉도, 독도를 차지하고 고시지방, 이즈모지방에 진출하였다는 우리 학계의 견해와 같다.

학자들뿐아니라 일본의 어업가들, 관리들중에도 독도가 조선의 령토라는것을 명백히 밝히거나 론의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지어 일본정부와 일본의 현행법들도 독도가 조선의 령토라는것을 인정하였다.

이 글에서는 독도가 그 누구도 침해할수 없는 조선의 신성한 령토라는것을 인정한 일본인들과 정부관리들, 일본정부와 일본의 현행법들의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조선의 섬 독도의 령유권에 대하여 론증하려고 한다.

 

2. 본론

 

무엇보다도 일본의 어업가들과 정부관리들이 독도가 조선의 신성한 령토라는것을 스스로 인정하였다.

1660년 9월 5일 어업가인 오다니가 《송도(독도)도해면허》를 신청하기에 앞서 동료인 무라가와에게 보낸 편지에서 《죽도지내송도》(울릉도안의 독도)라고 표현하였다.(일본도서 《죽도의 력사지리학적연구》) 이것은 당시 울릉도가 조선의 땅인 조건에서 독도가 조선의 섬이라는것을 인정한것이다.

시마네현의 물개잡이어업가인 나까이 요사부로는 독도주변에 물개가 많다는것을 알고 1903년부터 이곳에 와서 물개를 략탈해갔는데 그 이듬해에만도 2 760여마리나 도적질해가서 막대한 리윤을 얻었다.

그는 이것도 성차지 않아 독도주변에서 물개잡이독점권을 얻기 위해 1904년 9월 일본농상무성에 《리양꼬섬(독도)차용에 관한 청원》을 제출하였다. 여기서 그는 독도를 10년 기한으로 차용하여 물개잡이독점권을 얻을수 있도록 조선봉건정부와 교섭해줄것을 제기하였다. 그가 독도를 차용 즉 빌려줄것을 제기한것은 자기 땅이 아니라 조선땅이라는것을 전제로 한것이였다.

나까이자신도 후에 《독도가 울릉도에 속한 조선의 령유라고 생각했다.》고 명백히 밝혔는데 그때문에 《상경하여 농상무성을 통해 조선봉건정부에 차용을 하려고 하였다.》고 증언하였다. (1910년도에 쓴 나까이의 《리력서》, 1906년에 출판한 《력사지리》 8권 6호)

나까이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후에 일본의 여러 책들에서는 긍정을 표시하였다.

《… 나까이는 이 섬(독도)을 조선령토로 생각하고 상경하여 농상무성에 설명하여 동정부(조선봉건정부)에 임대청원하려 하였다.》(1923년 7월 시마네현 교육회에서 출판한 《시마네현지》)

《나까이는 리양꼬섬(독도)을 조선령토로 믿고있었으며 동정부(조선봉건정부)에 임대청원을 하기로 결심하였다.》(1933년 2월에 간행된 《오끼도지》)

1667년 이즈모의 관리 사이또가 번주의 명령으로 일본의 서북경계를 현지답사하고 제출한 보고서인 《은주시청합기》는 독도가 나오는 최초의 고문헌이다. 여기에 울릉도와 독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여있다.

《두섬(울릉도와 독도)은 무인도인데 고려(조선)를 보는것이 마치 은주(이즈모)에서 오끼도를 보는것과 같다. 그런즉 일본의 서북경계는 이 주로서 한계를 삼는다.》

이것은 당시 독도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밝은 사이또자신도 일본의 서북경계가 오끼도(오끼노시마)이며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령토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쓴 글이였다는것을 보여준다.

1878년 12월 일본외무성 기록국장 다나베는 명치정부가 요구한 독도에 대한 의견서 《송도지의》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송도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명명한 섬이름으로서 실은 조선의 울릉도에 속한 우산도이다. 울릉도의 조선에 속함은 구정부(막부정부)시기에 갈등을 일으켜 문서왕복끝에 영구히 우리 소유로 하지 않겠다고 약정하였다. 이것은 량국의 력사에 올라있다. 이제 리유없이 사람을 파견하여 순시한다는것은 남의 보물을 탐내는것과 같다. 하물며 린접국경을 침범함에 있어서랴.》

이 기록을 통하여 다나베가 당시 명치정부의 《권위》있는 외무성관리로서 대외관계 특히 조선의 내정과 지형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인물이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는 구정부시기인 에도막부시기에 독도가 조선의 섬이며 따라서 일본이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조선과 일본정부사이의 약정(1699년)을 계속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명치정부시기에도 외무성관리들속에서 같은 인식이였다.

이것을 통해서도 당시 일본인들이 독도가 조선의 령토라는것을 인정하고있었다는것을 명백히 알수 있다.

다음으로 일본의 력대 봉건정부들이 독도가 조선의 신성한 령토라는것을 거듭 인정하였다.

일본은 력대적으로 독도가 일본의것이 아니라 조선의 신성한 령토임을 인정하고 확인하였다.

물고기잡이에 종사한 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가문은 울릉도와 독도주변에 물고기가 많다는것을 알고 남의 나라 바다로 건너가서 물고기잡이를 하도록 해줄것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의 도꾸가와막부는 1618년과 1661년에 각기 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가문에 《죽도도해면허》와 《송도도해면허》라는 다른 나라 바다로 넘어갈수 있는 확인서를 해주었다. 도해란 해상월경을 의미하는것으로서 자기 령해내의 고기잡이에는 이런 허가가 전혀 필요없는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국경을 넘어 외국의 령토인 조선의 울릉도와 독도에로의 항행을 허용한다는 증서로 된다.

따라서 《죽도도해면허》와 《송도도해면허》는 일본정부가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조선의 령유권을 인정했다는것을 반증해주는 공식확인서로서 이보다 더 위력한 증거는 없다.

1692년 조선의 열혈청년 안룡복을 비롯한 애국적인 어민들의 완강한 투쟁에 의해 울릉도와 독도에 침입했던 일본인들이 쫓겨나고 오끼시마도주와 호끼번주도 궁지에 빠져 독도가 조선령토라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고 이 문제는 결국 일본의 당시 실권자인 관백(막부의 《쇼궁》)에게 제기되였다.

이리하여 도꾸가와막부는 1696년 1월 《죽도와 그밖의 한섬(독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정을 내리였다. 《그 땅의 지리를 헤아려보건대 죽도는 조선이 일본보다 더 가까우니 일찌기 그 나라땅이라는것이 의심할바 없을것 같다. 요나꼬의 어민들이 그 섬에 고기잡이를 가겠다고 청원하기에 허락된것이지 〈당초에 이 섬을 저 나라에서 빼앗은것이 아니〉다. 앞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이 고기잡이를 하는것을 금지해야 할뿐이다.〉 이에 대하여 조선정부에 알려줄것이다.》(일본 《조선통교대기》8, 일본 《공문록》 내무성의 부1)

이 결정서에 보이는 《죽도와 한섬》은 명백히 울릉도와 독도로 볼수 있다. 우의 《공문록》에서 《죽도(울릉도) 다음의 한섬이 있는데 송도(독도)라고 부른다.》라고 기록된것이 이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도꾸가와막부정부도 17세기말에 울릉도, 독도 두섬이 조선의 섬이라는것을 최종적으로 인정하였으며 이때문에 종전에 비법적으로 발급했던 죽도와 송도의 도해면허는 자동적으로 철회되였다.

련이어 막부정부는 일본인들이 울릉도수역에서 어업과 목재채벌을 못하게 하는 명령을 내리였으며 1698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1도 2명(한섬의 두 이름)》이라는것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1699년에 쌍방 두 나라사이에 문서가 교환됨으로써 일본인들의 울릉도, 독도에로의 출입이 금지되였다.

이것은 17세기말 일본의 막부정부가 독도가 저들의 령토가 아니라 조선의 령토임을 명백히 인정하고 조선정부에 확약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1868년 막부가 전복되고 명치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일본정부는 울릉도와 함께 독도의 조선령유권을 재삼 명백히 인정하였다. 명치유신 다음해인 1869년 12월 일본의 외무성은 사다, 모리야마, 사이또 등 3명의 외무성관리들을 조선에 보내여 실태를 조사한바 있다. 그런데 그들은 조사후 제출한 보고서인 《조선국 교제시말 내탐서》에서 《죽도(울릉도), 송도(독도)가 조선의 부속으로 되여있는 경위》에 대해 보고하면서 그것을 긍정하였다.(《일본외교문서》 권3)

이 보고서는 일본외무성의 정식파견원들의 공식문건으로서 일본외무성이 대외관계에서 독도가 울릉도의 《린도》이며 울릉도와 함께 조선의 령토임을 인정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1877년에 일본내무성은 전국적인 지적조사(땅을 조사하여 등록하는것)와 관련하여 시마네현에서 제기된 《죽도(울릉도)》와 그밖의 한섬(독도)에 대하여 5개월동안 검토, 조사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태정관(최고정부기관)에게 보고하였다. 우대신(태정대신대리) 이와꾸리 도모미는 이에 기초하여 심중히 검토하고 3월 20일 《죽도(울릉도)와 그밖의 한섬(송도, 독도)은 본방(일본)과 관계없는것으로 할것》이라는 지령서를 내무성과 시마네현에 하달하여 확인시켰다.(일본 《공문록》 내무성의 부1, 《일본국립공문서관》 소장자료)

일본명치정부가 이 시기 울릉도와 함께 독도를 조선의 령토로 인정하고 내무성은 물론 지방관청인 시마네현에까지 두섬을 일본지경에서 제외시키라고 하달한것은 독도가 조선의 령토라는것을 보여주는 위력한 자료로 된다. 일본정부가 근대시기 독도의 조선령유권을 이처럼 인정한 문건은 없다. 일본은 당시까지도 이것을 부정할 아무런 근거도 없었으므로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1878년 8월 일본정부의 관리들인 나가사끼현의 시모무라와 지바현의 사이또가 일본명치정부에 《송도개척원》을 제기하였다. 송도(독도)에 대한 개척은 곧 침략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때 조선에 대한 침략준비를 채 갖추지 못했기때문에 명치정부는 이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심중한 토의끝에 그 청원을 기각하였다. 명치정부는 전해에 울릉도, 독도가 조선의 령토임을 인정하고 지령을 하달한 조건에서 기각시키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다음으로 일본의 력대 군부와 일본학계, 출판계도 독도가 조선의 신성한 령토라는것을 거듭 인정하였다.

우선 일본의 력대 군부가 독도의 조선령유권을 인정하였다.

1876년에 일본해군성이 만든 《조선동해안도》에서는 조선의 섬으로 독도가 그림으로 표시되여있었다. 그리고 그후에 나온 여러 판본들도 1903년까지는 조선령토안에 독도를 모두 포함시키고있었다. 한편 일본수로국이 편찬한 《환영수로지》와 《조선수로지》에서도 독도가 조선의 섬으로 명기되여있었다. 바다싸움을 전문 지휘하는 일본해군성의 지도와 수로사업을 맡은 수로국의 지리책에 독도가 조선령토로 되여있은것이 주목된다.

일본의 륙군을 지휘하는 륙군성도 독도가 조선의 령토임을 인정하였다.

1875년 일본륙군성 참모부는 《조선전도》를 발행하면서 조선의 령토안에 울릉도와 독도를 그려서 표기하였다. 《지도구역일람표》는 1936년에 일본륙군 참모본부가 편찬한것인데 여기에도 독도가 조선의것으로 기록되여있다.

령토침략을 맡은 일본륙군성이 지도와 일람표에서 독도를 조선의 령토로 인정한것은 그것을 부인할 아무런 근거도 없었기때문이였다.

중세, 근대까지 일본정부가 독도를 침략하고 략탈하면서도 조선의 령토로 인정한것은 자기 땅이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있는것이다.

또한 일본학계, 출판계가 독도의 조선령유권을 인정하였다.

1960년 일본의 소학관(小學館)에서 낸 《일본대백과사전》에는 《독도》란에 《일본에서는 다께시마(죽도-竹島)라고 부르지만 조선에서는 독도라고 부르며 유럽-아메리카인들에게는 리앙쿠르(프랑스인들이 독도를 발견할 당시 리용한 배의 이름)바위로 알려져있다. 조선에서는 15세기(1481년)의 〈동국여지승람〉에서부터 우산도라는 이름으로 무릉도(울릉도)와 함께 강원도 울진현에 소속시켜 령토로서 인식되여왔다. 일본에서는 에도시대(1603~1867년)에 어업가들에 의하여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였지만 자국령토라고 생각하지 않고있었다.》라고 기록되였다. 《일본대백과사전》은 일본학계의 의사를 반영한것으로서 이것이 가장 큰 신빙성을 가진다고 볼 때 1960년까지 일본은 독도가 조선의 령토라는것을 크게 인정하였다.

1985년에 오사까외국어대학 조선어연구실의 교수들이 편찬하고 가도까와 호뗑이라는 출판사에서 출판한 《조선어대사전》의 3권 670페지 《독도》라는 올림말에는 《경상북도 울릉군에 속하는 무인도》라고 명백히 씌여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다께시마라고 부르는데 그 귀속을 두고 문제가 제기되고있다. 옛이름은 우산도》라고 덧붙여 썼다. 《조선어대사전》이 일본의 일류급 어학자들이 모여 쓴것으로서 그들의 종합적인 견해를 반영한것이라고 볼 때 이것은 독도가 조선의 령토임을 인정한것이다.

다음으로 일본은 현행법들에서 독도가 조선의 신성한 령토라는것을 명백히 인정하였다.

태평양전쟁이후 일본이 제정한 각종 법령중 독도가 일본땅이 아니라는 내용을 담은 법이 28개 있고 그중에서 25개는 개정 또는 페지되였으나 3개 법령이 일본법무성이 발간한 《현행일본법규》에 실려있다.

28개 법령중 5개가 독도를 《외국》으로 규정했고 23개 법령은 독도를 일본의 부속섬에서 《제외》한다고 명시했다.

일본은 독도령유권을 놓고 1951년 9월 8일 미국의 쌘프랜씨스코에서 조작된 강화조약(대일강화조약이라고도 불리우는 쌘프랜씨스코강화조약은 일본의 주권회복과 부속도서 등 령토범위를 담고있다.) 이후 이 《조약의 세부조항을 보면 일본이 조선에 여러 섬을 되돌려주어야 할것들이 명시돼있는데 여기에 독도는 없다. 따라서 독도는 여전히 일본의 부속섬》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쌘프랜씨스코강화조약 이후 작성된 일본법규에서 독도를 《외국》으로 규정하거나 일본의 부속섬에서 《제외》한다고 밝힌것은 독도가 일본의 부속섬이 아니라 철두철미 우리 나라의 신성한 령토라는것을 실증해주는 결정적증거이다.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한데 따라 미국은 1946년 1월 SCAPIN (련합국 최고사령부 지령) 677호를 발표하고 집행단계에 들어갔다. SCAPIN 제677호 제3조에는 《일본은 4개의 본도와 약 1 000개의 작은 린접섬을 포함한다. 1 000개의 작은 린접섬에 포함되는것은 대마도 및 북위 30° 이북의 류뀨렬도이다. 제외되는것은 울릉도, 리앙쿠르암(독도), 제주도 …등이다.》라고 되여있다.

쌘프랜씨스코강화조약은 SCAPIN 제677호의 결정과 유지, 존속을 재확인하였다.

 

독도가 일본의 령토에 속하지 않는 《외국》 또는 《일본의 부속섬에서 제외》한다고 확인된 28개 법령은 정령, 성령, 고시형태로 되여있다. 

28개 법령중 현재 《현행일본법규》에 올라있는 3개의 법령으로는 1946년 8월 27일 제정된 사법성령 제77호, 1951년 2월 13일 제정된 후 1968년 대장성령 37호에 의해 개정된 대장성령 제4호, 1951년 6월 6일 공포된 후 1960년 7월 8일 대장성령 43호로 개정된 총리부령 제24호를 들수 있다.

《현행일본법규》는 효력을 가진 현행법규들을 빠짐없이 수록하는 일본정부의 공식 법령집이며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있다. 이러한 3개의 법령에 독도가 일본의 부속섬에서 제외한다고 밝혀져있다.

우선 1946년 8월 27일 제정된 사법성령 제77호에서 독도를 일본의 부속섬에서 제외하였다.

1946년 일본법률 11호에 따라 만들어진 이 법령은 일본의 령토로 본주(本州), 북해도(北海道), 사국(四國), 구주(九州)의 부속도서로 규정하고있는데 여기서 《독도는 제외한다》고 명시하고있다. 사법성령 제77호는 현재 실효된 상태이지만 《현행일본법규》에 올라있다. 그 리유는 경과조치에 의해 법령의 일부가 여전히 효력을 가지고있기때문이다.

또한 1951년 2월 13일에 작성된 대장성령 제4호를 들수 있다.

이 법령은 일본의 부속섬의 범위를 정한 성령으로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의 부속섬에서 제외하고있다.

다음은 1951년 6월 6일 제정된 총리부령 제24호를 들수 있는데 제2조에서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일본의 부속섬에서 제외하였다.

이외에도 일본이 1954년에 제정한 법률 제165호와 자위대법 제84조에서도 독도의 령공을 일본의 령공에서 제외하고있다.

이 모든 자료들에서 볼수 있는것처럼 개별적인 일본인들과 일본의 정부관리들, 학자들과 출판물들, 현행 일본법에서 독도를 우리 나라의 신성한 령토로 명백히 인정하고있다.

 

3. 결론

 

독도는 조선의 불가분리의 령토이며 그 령유권은 철저히 조선민족에게 있다.

그런데도 일본반동들이 그 누구에게도 통하지 않는 독도에 대한 《령유권》을 주장하며 열을 올리는데는 불순한 목적이 있다.

그들은 바로 끈질긴 주입으로 자국민들이 독도가 《빼앗긴 땅》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함으로써 과거범죄를 찬미하도록 만들고 재침의 돌격대로 내몰아 과거에 이루지 못한 《대동아공영권》의 옛꿈을 기어이 실현해보려 하고있다.

일본이 력사를 부정하는것은 침략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는것이며 이것은 곧 과거범죄를 되풀이하겠다는것이나 같다.

실지 일본에서는 수상을 위시로 한 정객들이 성노예범죄를 비롯한 과거죄악을 로골적으로 부정하고있으며 언론계, 교육계도 한동아리가 되여 일본사회에 복수주의감정을 심어주고있다. 헌법을 개악하여 전쟁을 할수 있는 나라로 만들기 위한 책동이 더욱 발광적으로 감행되고 군사대국화에 박차가 가해지고있다.

일본은 과거에 그러하였던것처럼 우리 나라를 침략하고 대륙으로 진출하려 하고있다. 바로 그래서 조선재침의 구실을 찾기 위해 독도가 《일본고유의 령토》라는 얼토당토않은 궤변을 집요하게 외워대고있다.

일본이 남의 나라 땅을 제땅이라고 우겨대며 히스테리적인 광기를 부려대도 독도는 과거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영원히 조선민족의 신성한 령토로 남아있을것이다.

리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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