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에 대한 실학자들의 견해분석

 

1. 서 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조선은 우리 민족의 시조국가이며 우리 나라의 첫 노예소유자국가입니다.》

고조선은 우리 민족의 시조국가로서 B.C.30세기초에 단군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였다.

우리 민족의 첫 페지를 장식한 고조선의 력사는 지난 시기 봉건대국주의사가들과 사대주의사가들에 의하여 《기자조선》, 《위만조선》 등으로 심히 외곡되여있었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력사에 대한 연구는 력사를 외곡하는 행위에 학술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중요한 사업이다.

지난 시기 우리 나라 력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력사에 대한 연구에서 많은 성과들이 이룩되였다.

고조선력사연구에서는 봉건대국주의사가들과 사대주의사가들에 의하여 심히 외곡되여있던 고조선의 력사를 바로 정립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제기되였던 조건에서 그러한 문제들을 해명하는 방향에서 연구사업이 진행되였다.

고조선의 력사에 대한 실학자들의 연구성과와 관련한 도서와 글들로서는 《17세기이후 우리 나라 봉건사회의 몇개 부문 학문유산》(1, 2)과 《력사과학》에 실린 여러 론문들을 들수 있다. 여기에서는 실학자들이 쓴 저서에 기초하여 고조선의 력사와 관련한 자료들을 소개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한해서만 일련의 분석을 진행하였고 그들의 견해를 종합화하여 분석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선행연구성과에 토대하여 고조선의 력사에 대한 실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화하여 분석하려고 한다.

 

2. 본 론

2. 1. 실학자들의 력사저서에 대한 일반적개괄

 

17세기에 이르러 우리 나라에서는 진보적인 사상으로서 실학이 발생하였다. 실학자들은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한 방도로서 실지 쓸모있는 학문을 연구하는 기풍을 세워나갔다.

실학자들의 저서가운데서 고조선의 력사연구와 관련한 대표적인 도서로서는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허목의 《동사》, 신경준의 《강계고》, 안정복의 《동사강목》,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등을 들수 있다.

《동국지리지》는 고조선시기부터 고려시기까지의 력사와 지리를 서술한 력사지리책으로서 실학자의 한사람이며 이름난 력사학자였던 구암 한백겸(1552-1615)에 의하여 1615년에 편찬되였고 1640년에 출판되였다.

한백겸은 임진조국전쟁이후 우리 나라 력사연구에서 새로운 학풍을 일으킨 개척자의 한사람이며 그의 저서 《동국지리지》는 당시 력사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성과의 하나였다.

그는 《우리 나라의 크기는 동서가 600여리 미만이고 남북은 겨우 수천리여서 전국 8도를 두루 답사한 사람도 한두명이 아니였겠는데 그 력사지리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 못하니 어떻게 나라의 력사를 알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하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에서 17세기 이전의 많은 력사책들이 각 시대의 력사지리변천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보면서 새롭게 력사지리를 고증해명하려고 하였다.

허목(1595-1682)은 1673년에 단군조선으로부터 신라말기의 력사를 담은 5권으로 된 통사형식의 력사책 《동사》를 편찬하였다.

그는 고대력사에 관한 선행한 력사책들을 참고하면서 조국력사에 대한 자기의 견해에 따라 사료들을 취사선택하고 분석하여 일정한 통사체계를 만들었다.

신경준(1712-1781)이 편찬한 《려암전서》에는 1756년에 쓴 《강계고》라는 력사지리책이 포함되여있다. 그는 《강계고》의 서문에서 우리 나라의 력사지리를 연구하는데서 애로가 많은데 그것은 주로 옛 문헌의 기록들이 매우 간략되고 혼탁된것들이 많기때문이며 그것들을 고려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 책의 력대국계(歷代國界)에서 우리 나라의 력사지리를 우선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 주로 북쪽에 있던 나라들을 존재한 순서로 서술하고 그다음에 진국, 삼한, 백제, 신라 등 남쪽에 존재한 나라들을 서술하였으며 그다음에야 통일국가로 된 고려와 조선봉건왕조를 순서대로 서술하였다.

신경준이 당시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북쪽의 나라들을 먼저 서술하였는지는 알수 없지만 생각해보면 고조선, 고구려, 발해는 서로 계승관계에 있던 우리 민족의 정통국가들이였다. 그러니 그자신도 그 계승관계에 대하여, 우리 민족의 정통국가들에 대하여 어느정도 정확히 인식하고있지 않았겠는가고 생각된다. 하여튼 이 문제는 좀 더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경준은 1770년에 여러 학자, 관료들과 함께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하였는데 이 책에서는 고조선으로부터 당시까지의 력사적사실들을 국내외문헌들을 참고하여 력사적으로 고증하면서 서술하였다.

안정복(1712-1791)은 18세기 중엽에 고조선으로부터 고려말에 이르는 시기의 력사를 서술한 《동사강목》을 집필하였다.

그는 《삼국사기》(1145년 편찬)로부터 《동국통감》(1484년 편찬)에 이르는 력사책들에는 고증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결함들이 있고 《동사찬요》(1614년 편찬)이후부터 《동사회강》(18세기초 편찬)에 이르는 력사책들에서는 이러한 결함들이 극복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력사적사실들의 정확성이 담보되지 못하였기때문에 그 부족점들을 시정하기 위하여 많은 국내외자료들을 참고하여 고증하면서 이 책을 서술하였다고 하였다.

정약용(1762-1836)은 1811년에 귀양지에서 《아방강역고》를 집필하였는데 이 책에서 고조선으로부터 고려에 이르는 기간 력사지리적인 문제들을 중요한것만 몇가지 묶어서 고증하였다.

우에서 본바와 같이 실학자들은 당시까지의 력사연구에서 잘못 평가된 문제들을 바로잡는데 힘을 넣었으며 그 과정에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룩하였다.

 

2. 2. 실학자들의 견해와 그에 대한 분석

 

우리 민족의 첫 국가인 고조선은 단군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3개 왕조로 구성되여있었다.

고조선은 우리 민족사의 첫 페지를 차지하고있는것만큼 그에 대한 연구는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정확히 인식하는데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고조선에 대한 실학자들의 견해를 종합분석함으로써 고조선은 우리 민족의 시조국가였으며 그 이후에 존재한 모든 나라들이 다 단군조선의 후예국들이였다는것을 다시금 강조하려고 한다.

실학자들은 우선 고조선이 우리 민족사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밝혔다.

실학자인 허목과 리종휘(1731-?)는 고조선이 우리 민족의 시조국가였다는것을 밝혔다.

허목은 자기의 저서 《동사》에서 우리 나라에 단군조선으로부터 신라까지의 기간에 존재한 대국이 6개였고 그 부용소국들이 10여개에 달하였는데 그 6개 대국이란 곧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고구려, 신라, 백제이고 나머지 부용소국들이란 숙신, 부여로부터 탐라에 이르는 나라들이라고 하면서 6개 대국에 대해서는 세가편을, 나머지 10여개의 부용소국들에 대하여서는 각기 해당 렬전편을 설정하고 서술하였다.

허목이 서술한 6개 대국가운데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우리 나라 력사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그 시기에 우리 나라에는 단군조선을 계승한 후조선과 만조선만이 존재하였다.

허목은 6개 대국들과 부용소국들을 호상 떨어진 나라들로 서술한것이 아니라 그것들간에는 긴밀한 련관 특히는 혈연적련관이 있다는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단군은 이 땅의 최초의 대국 고조선의 시조로서 아들 해부루를 낳았는데 해부루는 북부여국의 시조로 되였고 해부루는 아들 금와를 낳았는데 금와는 동부여국의 시조로 되였다. 동부여왕 금와는 우발수의 하백의 딸과 혼인하여 주몽(동명왕)을 낳았는데 주몽은 고구려국의 시조가 되였으며 주몽은 온조를 낳았는데 온조는 백제국의 시조로 되였고 동부여는 후에 고구려에 의하여 통합되였다. 그러니 결국 고조선,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백제국들이 다 단군과 그 후예들에 의하여 다스려진 나라들이다.》*라고 하였다.

   

*《동사》 단군세가

 

우의 자료들에서 허목은 우리 나라 고대국가들뿐아니라 삼국시기에 존재한 나라들까지 혈연적으로 련결시켜놓았다.

물론 자료에서 고주몽을 동부여의 왕이였던 금와의 아들이라고 한것은 잘못된것이지만 그것을 통하여 부여와 고구려가 같은 민족의 나라였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우리 민족의 나라들의 계승관계는 허목이 처음으로 밝혀놓은것은 아니였다. 고려시기에 편찬된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서 우리 나라 력사에 존재한 국가들이 단군조선의 후예국들이라는 자료들이 전해오고있으며 다만 허목은 그것을 다시한번 강조하였을뿐이다.

허목의 주장 즉 우리 나라의 고대국가들과 삼국시기에 존재한 나라들을 혈연적으로 련결시켜놓은것은 그 나라들이 모두 조선민족의 나라들이였다는것을 강조한것으로서 긍정적이라고 할수 있다.

다음의 자료들이 그것을 뚜렷이 증명해주고있다.

《옛날에 시조 추모왕(주몽왕)이 나라의 터전을 처음 닦을 때 북부여에서 나왔다.》*1, 《후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남쪽으로 달아나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나라이름을 고구려라고 하였다.》*2, 《온조집단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로부터 나왔다.》*3 라는 자료들은 고구려가 부여에서, 백제가 고구려에서 갈라져나온 사람들이였거나 그 후손들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였다는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1 《광개토왕릉비》 1면

*2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3 《삼국유사》 권2 기이 제2

부여가 고조선에서 갈라져나왔다는것은 이미 학계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부여는 고조선의 후국으로 존재하여오다가 B.C.15세기 중엽에 독자적인 고대국가로 등장한 나라였다.

《제왕운기》(하권 동국군왕개국년대)에는 《본기에 이르기를 단군이 조선지역에 의거하여 왕이 되였는데 시라(신라), 고례(고구려),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와 맥이 모두 단군의 통치령역이였다.》, 《각기 서로 나라로 칭하며 병탄하니 그 수는 70여개이다. 그중 어느것이 대국인가 하니 먼저는 부여요, 그다음은 시라, 고례 …모두 단군을 이은것이다.》라고 기록되여있다. 이것은 부여가 고조선의 후국으로 존재하였으며 부여에서 갈라져나온 고구려도 고조선에 뿌리를 둔 같은 겨레의 나라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이처럼 고조선과 부여의 계승관계, 부여와 고구려의 계승관계를 통하여 부여나 고구려가 고조선에 뿌리를 둔 조선민족의 나라이며 나아가서 고구려는 고조선의 계승국이였다는것을 명백히 보여주고있다.

허목이 6개 대국을 렬거한것은 우리 나라가 옛날에는 매우 강한 대국이였고 그것들은 력대로 분리, 통합의 복잡한 과정을 거쳤지만 결국은 하나의 피줄을 이어온 나라였다는것을 강조하자는데 있었다.

한편 리종휘도 《단군은 처음 태백산(묘향산-저자)으로 내려와서 평양에 수도를 정하고 조선국을 창건하였고 후에 장당경(구월산일대)으로 옮겨갔다. 또 단군의 아들 부루는 멀리 북쪽 개원(오늘의 료동지역)지방으로 가서 새 나라 북부여를 창건하였으니 …》라고 하였으며 《대개 고조선의 령토는 단군으로부터 시작하여 기씨조선이 그것을 계승하고 다시 위만에게 전하여졌는데 한나라는 이 위만의 후예로부터 그것을 탈취하였다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고구려에게 돌려주었다.》*라고 서술하였다.

 

* 《수산집》 권6 고사 3국 직방고론

 

리종휘의 이 주장은 고조선이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나라였으며 부여도 고조선의 후손들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였다는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리종휘도 허목과 마찬가지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인정하였다. 그렇기때문에 단군조선을 기씨조선이 계승하고 다시 위만에게 전하여졌다고 표현하였는데 이것도 잘못된 견해이다.

홍만종은 《동국력대총목》(1705년 편찬)에서 우리 민족의 시조가 단군이라는 자기의 견해를 밝혔다. 특히 다른 문헌들에서 찾아볼수 없는 자료를 서술하였다.

그는 《단군이 백성들에게 머리채를 땋고 상투를 쪽지는 법을 가르쳤고 군신, 남녀, 옷, 음식, 살림집 등 제도들을 마련하였다.》라고 서술함으로써 단군에 의하여 우리 나라 문화의 시초가 시작되였다고 하였다.

홍만종의 이러한 견해는 일부 실학자들이 말하는 은나라의 기자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설보다 훨씬 독자성이 있고 정당한 견해였으며 특히는 기자에 앞서 단군에 의하여 조선의 문화가 개척되였다고 함으로써 우리 나라 문화의 기원이 오래였다는것을 밝힌것으로 된다. 그후 이 자료는 여러 력사책들에 리용되였다. 이것은 그만큼 이 책이 당시로서는 력사연구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신경준은 자기의 저서 《강계고》에서 단군조선의 성립과 그 존재시기에 대한 옛 문헌기록자료들을 언급하고 서로 어긋나는것들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구체적으로 밝혔다.

신경준은 《강계고》에서 《단군의 이름은 왕검이고 그가 처음에 태백산정점 신단수아래에 내려왔으므로 나라사람들이 임금으로 삼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였으니 기간은 무진으로부터 기묘까지로서 1221년이였다. 류형원의 <여지지>에 이르기를 <태백산은 지금의 평안도 녕변부 동쪽 120리로서 오늘의 묘향산이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신경준은 이 사료를 《삼국유사》의 기록을 들어 론증하면서 《<삼국유사>에서 신단(神檀)을 신단(神壇)이라고 하였고 단군(檀君)이라고 하였는데 대개 <삼국유사>가 동방에서 가장 오랜 력사기록으로서 신(神)자를 쓴것으로 보아 단(壇)으로 보는것이 비교적 옳을것이다.》라고 자기의 견해를 밝혔다. 이어 우리 나라에는 박달나무라고 부르는 나무종류가 두가지인데 《하나는 자단(紫檀)으로서 향기가 류달라 항간에서는 박달목(朴達木)으로 부른다. 이 나무는 줄기가 세서 목재로도 널리 쓰인다. 태백산에 바로 이 자단이 많아서 산이름을 묘향산이라고 한다.》라고 하면서 신화적외피를 쓰고있던 단군조선성립의 력사를 사실적인것으로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강동현의 진산을 대박산이라고 부르는데 그아래에 하나의 큰 무덤이 있어 력대로 단군묘라고 불러왔다. 이때문에 단군묘의 이름도 실린것이다.》라고 하면서 강동현의 단군릉이 단군유적이였다는것을 밝히려고 하였다.

신경준이 서술한 단군조선의 성립과 관련한 자료는 비록 초보적인것에 지나지 않지만 단군이 민족의 시조로 태여났고 강동땅에 그의 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력사지리적유래로 론증하자고 한것은 력사적사실과 부합될뿐아니라 조선력사의 첫 시작점에 대한 견해가 비교적 옳게 세워져있었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신경준은 단군의 출생과 고조선성립을 력사적으로 실재한 사실이라고 본데 근거하여 단군조선의 존재기간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구체화하려고 밝혔다.

《<고기>에 이르기를 단군은… 무진년에 나라를 세우고 … 을미년에 아사달로 들어가 신으로 되였으며 그 수명이 1048년이였다고 한다. 또 <동국통감>에 이르기를 1048년을 단군이 대를 물려주면서 나라가 존재해온 기간이지 단군의 나이는 아니였다고 하였다.》*

 

* 《강계고》 권1 고대국가

 

《고기》와 《동국통감》에서 언급한 단군의 수명, 단군조선의 왕조년대를 놓고 후자의 견해를 긍정하면서 그것을 권근의 견해를 인용하여 론증하였다.

《양촌 권근이 명나라에 갔을 때에 … 시를 지었는데 <그 몇해 력사가 흘렀는지 알길 없지만 아마도 1048년이 흘렀으리>라고 함으로써 1048년이 단군조선의 력대 왕조년대임을 알게 하였다. 이로써 보아 <고기>의 기록은 황당한 측면이였다는것을 알수 있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단군조선의 존재를 실재한 력사적사실로 인정한데 기초하여 력대로 내려오는 단군의 나이 1048년이라는 수자를 바로 단군조선의 존재기간이라고 한것은 당시로서는 단군조선의 력사연구에서 진보적인 견해였다.

최근년간 우리 력사학계에서는 단군과 고조선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킨 결과 단군이 실재한 인물이며 지금으로부터 5 000여년전에 출생하여 활동하였다는것을 과학적으로 밝혔다.

이처럼 실학자들은 고조선이 우리 민족의 시조국가였으며 그 이후에 세워진 고대국가들이 단군의 후예들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였다는것을 명백히 밝혀놓았다.

고조선의 력사적지위와 관련한 실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첫째로, 허목이나 리종휘, 신경준은 우리 민족의 첫 국가인 고조선이 단군에 의하여 세워지고 그 후손들에 의하여 왕위가 대대로 이어졌다는것을 밝혔으며

둘째로, 허목과 리종휘는 우리 나라에 존재한 부여, 고구려, 백제도 다 고조선을 계승한 우리 민족의 나라였다는것을 밝혔으며

셋째로, 홍만종은 단군에 의하여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가 시작되였다는것을 밝혔다.

그러나 허목과 리종휘가 이전시기의 그릇된 《기자조선》설과 《위만조선》설을 그대로 받아들여 마치도 그것이 우리 나라에 존재한 나라였던것처럼 인식하고있은것은 잘못된 견해였다.

실학자들은 다음으로 우리 민족의 첫 국가인 조선이라는 국호의 연원을 밝히려고 하였다.

우리 민족의 첫 국가인 조선이라는 국호를 론의한 실학자는 안정복과 정약용 등이였다.

지난 시기 국호 조선의 의미에 대하여서는 여러가지 견해들이 제기되였다. 그 견해를 해석방법에 따라 크게 《조선》이라는 말을 한문식으로 해석하려는것과 고유조선어의 반영으로 해석하려는 두가지 견해로 나누어볼수 있다.

한문식으로 해석한 견해를 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동쪽의 해뜨는 땅에서 살았기때문에 조선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51 평양부 군명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국조보감》의 설과 《고이》의 설을 들고 그와는 다른 자기의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국조보감》에서는 《조선(朝鮮) 음은 조선(漸汕)인데 강이름으로부터 된것이다. 또 이르기를 선(鮮)은 밝다는 뜻이다. 땅이 동쪽에 있어 해빛이 밝기때문에 조선이라고 한다.》라고 썼으며 《고이》에서는 《선(鮮)은 밝다는 뜻이다. 땅이 동방에 있어 아침해가 선명하기때문에 조선이라고 하였다.*》고 썼다고 하였다.

 

* 《동사강목》 본권 1 상 조선

 

그러면서 안정복은 순수 한문식해석과는 견해를 달리하여 《기자가 료하류역의 땅 태반을 봉지로 받았는데 선비의 동쪽이였기때문에 조선으로 되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한문식해석의 변종이라고도 할수 있는데 국호제정의 시기도 아무런 근거가 없이 이른바 《기자조선》시기로 보았으며 더구나 기원전후시기에나 비로소 등장하는 선비라는 명칭을 가지고 그 이전시기의 명칭을 억지로 가져다 맞추려고 한 잘못된 해석이였다. 특히 《기자조선》은 우리 나라 력사에 존재하지도 않은 나라였으며 그에 앞서 우리 나라는 단군조선시기에 벌써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정약용은 《사기》에 기록된 조선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 부정하였다. 《사기》에는 조선에 습수, 렬수, 선수가 있는데 3개 강이 합쳐서 렬수가 되였으며 조선이라는 이름이 여기로부터 생겼다고 기록되여있다.*

 

* 《사기》 권115 렬전55 조선

 

정약용은 이러한 견해를 부정하고 자기의 새로운 립장을 밝히였다.

정약용은 자기의 저서 《아방강역고》에서 《우리 나라 력사에서 가장 오랜 나라의 이름은 <조선>(고조선)이다.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서는 국내외의 여러 문헌들에 몇가지 설명이 있는데 그것은 대개 이 나라가 처음에 발생한 지방의 이름에서 나온것일것이다. 이 나라가 강대한 국가로 확대발전한 이후에도 나라이름은 여전히 처음과 같이 <조선>으로 통용되였다.》*고 하였다.

 

* 《아방강역고》 권1 조선고

 

정약용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설명을 들었다.

정약용은 고조선이 망한 다음에 그 옛 중심지역에 한나라의 《락랑군》이 설치되였는데 그 락랑군의 많은 속현들가운데서 수현(소재지)의 이름이 《조선현》으로 불리웠다고 하였다.

저자의 이 견해는 락랑군의 위치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것이지만 국호를 지역의 이름과 결부시키려는것은 새로운 시도였다.

또한 나라의 발상지이름이 국호로 되는 실례를 들면서 조선이 지역의 이름일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였다.

정약용은 나라의 발상지이름이 곧 나라이름으로 되는것은 후날 고구려의 고구려현, 신라의 서라벌, 백제(百濟)의 백제(伯濟) 등과 같이 후세의 조선에도 있고 또 기타 고금의 동, 서방나라들에도 많다고 하였다.

정약용이 고구려라는 국호를 한나라의 고구려현과 결부시킨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기록에서 나오는 고구려현은 한나라의 현도군에 속한 현이였다. 현도군은 한나라가 고조선을 무너뜨린 다음에 설치한 4개 군중의 하나로서 그 설치년대는 B.C.2세기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B.C.3세기초에 세워진 나라로서 처음부터 고구려라는 국호를 사용해왔다.

이것은 고구려라는 국호를 한나라의 고구려현과 련결시켜보려는 정약용의 견해가 잘못되였다는것을 명백히 말해주고있다.

《조선》이라는 국호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이 나라에 습수, 렬수, 선수 등이 있기때문에 그것들에 의하여 《조선》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하는 《사기》를 비롯한 다른 설들보다 설득력이 있는것으로 볼수 있을것이다.

국호와 관련한 실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안정복이나 정약용은 조선이라는 국호의 연원에 대하여 해명하려고 노력은 하였지만 정확한 결론은 내리지 못하였다. 다만 정약용이 국호의 연원을 지역명칭과 결부시켜보려고 한것이 진보적이다.

실학자들은 다음으로 고조선이 강대한 나라로 이름을 떨쳤다는데 대하여 밝혔다. 그 대표적인 실학자는 리종휘이다.

그는 《전조선(고조선)의 전성시에는 그 령토가 매우 광대하고 국력이 강하였으나 평화를 귀중히 여기며 구태여 강한 외적과 맞서 무의미한 분쟁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았다. 전조선의 이러한 립장과 태도는 특히 이웃나라들과의 관계에서 잘 표현되였다. 이리하여 나라는 계속 륭성, 번영하고 문화가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으며 백성들은 오래도록 안착된 생활을 누릴수가 있었다. 그것은 이 나라의 정책이 옳았다는것을 말하는것이다.》*라고 하였다.

 

* 《수산집》 권6 전조선론 상하

 

리종휘가 쓴바와 같이 고조선은 전조선(단군조선)시기에 벌써 광대한 령토를 가진 강대한 나라로 위용을 떨치였으며 그렇기때문에 나라가 번성하고 백성들이 안착된 생활을 하였던것이다.

이것은 리종휘자체도 당시 문란해지고 약해진 나라를 볼 때 우리 나라 력사에서 강대하였던 시기는 과연 어느때였던가 하는것을 생각해보면서 자기의 립장을 밝혔던것이라고 할수 있다.

실학자들은 다음으로 고조선의 수도문제를 해명하는데서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고조선의 수도문제와 관련한 실학자들의 견해는 두가지였다. 하나는 고조선의 수도를 평양으로 보는 견해였고 다른 하나는 료동을 고조선의 수도로 보는 견해였다.

고조선의 수도를 평양으로 주장한 실학자들은 신경준, 리종휘였다.

신경준을 비롯한 여러 실학자들은 고조선의 첫 정치문화의 중심지인 수도를 평양으로 생각하였다. 

신경준은 《동국통감》의 기록을 인용하여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이였다는것을 론증하였다.

그는 《단군이 처음에는 도읍을 평양으로 삼았다가 그후 도읍을 백악(구월산)으로 옮기였다.》라고 한 《동국통감》의 기록을 그대로 전하면서 《평양은 지금의 평안도 평양부이다. 성안에는 단군사가 있어 매해 봄, 가을이면 향불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군 한다.》라고 함으로써 단군조선의 옛 도읍으로서의 평양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단군조선의 첫 도읍인 평양에 대한 견해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평양지명의 력사적유래에 대한 연구에 집중되여있다.

《강계고》에는 《평양은 옛 이름이 아니다. 만조선에서 평양을 도읍으로 하였지만 시기를 보면 만조선의 도읍을 왕검성이라고 하였다. 왕검이란 곧 단군의 이름이다. 대개 평양이 단군의 첫 도읍이였으므로 후조선이나 만조선때에도 단군의 이름을 그대로 도읍이름으로 삼았던것이다. 단군때에는 평양을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알길이 없다. 력대의 기록을 보면 후조선이나 만조선이전에 평양이라는 이름은 고구려때에 붙은것 같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을 통하여 평양은 고조선의 첫 수도였을뿐아니라 고조선이 존재하여온 전기간 도읍으로 존재하였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사실 평양이 단군의 도읍지, 고조선의 수도였다는것을 보여주는 옛 문헌기록들은 《강계고》 이전에도 수없이 많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인용된 《고기》에서도 단군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울 때 도읍한것이 평양이라고 명백히 밝혀놓았다.

일연은 《고기》에 나오는 평양이 바로 고려당시의 이름난 서경이였다는것을 강조하였다.

오늘의 평양이 단군조선의 수도였다는것은 고구려 동천왕때인 247년에 있은 천도기사를 통해서도 밝혀지고있다.

신경준은 바로 이러한 력사적견해를 긍정한데 기초하여 평양은 단군조선뿐아니라 후조선, 만조선시기에도 수도였다는것을 강조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원시조인 단군의 넋이 깃든 민족의 발상지로서의 평양의 지위를 보다 뚜렷이 하였던것이다.

리종휘도 신경준과 마찬가지로 고조선의 수도를 평양으로 인정하였다. 그는 단군이 처음 태백산으로 내려와서 평양에 수도를 정하고 조선국을 세웠다고 하였다.

정약용은 《아방강역고》에서 《조선이란 이름은 평양에서 시작된것이다.》*라고 함으로써 그 중심지를 평양으로 보고있다.

 

* 《아방강역고》 권1 조선고

 

이처럼 실학자 신경준과 리종휘, 정약용은 고조선의 수도를 평양으로 확고히 인식하고있었고 그로부터 정확히 서술해놓았다.

다른편으로 고조선초기의 수도를 오늘의 평양이 아니라 멀리 서북 료동지방 또는 훨씬 더 서쪽지역으로 생각하는 견해들도 있었다.

고조선의 수도를 료동지역으로 보는 견해는 1980년대까지만 하여도 하나의 정설처럼 되여있었다.

그것은 당시 료동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결과 이 지역에서 고조선시기의 유적유물이 많이 나왔기때문이다.

그와 반면에 평양일대에 대한 발굴은 료동지역보다 매우 적게 진행되였으며 그러다보니 여기에서는 고조선시기에 해당한 유적유물이 상대적으로 적게 나오게 되였다.

결국 평양일대에서 발굴된 유적유물을 가지고 당시로서는 이 지역이 고조선의 수도였다고 말할수가 없었다. 그런데로부터 고조선의 수도는 평양이 아니라 료동지역으로 되여있었다.

고조선의 수도가 료동지역이 아니라 평양이였다는것은 이미 우리 력사학계에서 밝혀놓았다. 그런데 료동지역에서 고조선시기의 유적유물이 많이 나온 사실은 이 지역이 수도의 지위와 거의 맞먹는 부수도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실학자들은 다음으로 고조선의 령역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였다.

실학자들은 고조선의 령토문제를 해명함으로써 나라의 강대성을 밝히려고 하였다. 그들은 여러차례에 걸친 외래침략자들과의 전쟁으로 하여 나라의 형편이 한심해지고 날이 갈수록 무능한 봉건통치배들때문에 국력이 약해져가고있던 당시의 형편에서 강대성의 요인을 령토의 넓이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런데로부터 고조선의 령역에 대한 연구를 많이 진행하였다.

실학자들은 고조선의 첫 왕조인 단군조선의 령역을 밝히는데 중요한 관심을 돌리였다.

리종휘는 《…단군 부자의 나라인 고조선과 북부여의 판도는 남쪽은 오늘의 림진강에 이르고 동, 서, 북은 지금의 만주전역을 포괄하는 광대한것이였다.》*라고 하였다.

 

* 《수산집》 권6 고사 3국 직방고론

 

우의 자료에서 본것처럼 단군조선은 그 강성기에 료하를 계선으로 하여 그 이동의 넓은 지역을 다 차지하고있었다.

이것은 우리 나라가 광대한 령역을 차지하고있었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신경준도 《강계고》에서 단군조선의 령역문제를 론하였다.

그는 단군조선의 령역을 고조선의 마지막시기 령역과의 대비속에서 비교적 깊이있게 론하였다.

물론 《강계고》에서는 이러한 측면에 응당한 주의를 돌리면서도 고대국가의 력사지리연구에서 령토문제는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는 립장에 서서 이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밝혔다.

신경준은 《강계고》에서 《전조선의 령토에 대해서는 크게 밝혀진 문헌이 없다.… 하지만 그 폭의 정확성에 대하여서는 후조선과 꼭같으리라는것을 단정하기 어렵다.》라고 하면서 단군조선의 령토문제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것을 밝힌 다음 그에 대한 견해를 전개하였다.

《그 서쪽으로는 바다에 닿았고 그 남쪽으로는 한산 하남의 북부지역과 진국땅과 린접해있었다고 보아진다. 또 강화도 마니산에 참성단이 있어서 단군이 하늘과 별에 제사지낸 땅으로 전해지고 그곳에 삼랑성이 있어서 단군의 세 아들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것으로 보아 단군이 다스린 령토가 바다와 한나라지역과 린접해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 동북쪽경계는 더우기 알기 어려운데 <한서> 식화지에 <팽오가 예, 맥을 지나고 조선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고조선의 령역에 대한 신경준의 견해에는 주목할만 한 측면들이 있다.

신경준은 고조선은 원래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세워진 나라이지만 점차 서쪽으로 령토를 확장하여 연나라와 서로 린접하고있으면서 그것을 치려고까지 하였다는것이 중국의 고문헌들에 기록되여있으니 당시 조선이 얼마나 강성했는가를 알수 있다. 그리고 그후 조선이 약해지면서 연나라가 장수 진개를 보내여 서쪽을 공격하여 땅 2 000리를 빼앗았으므로 조선과 연나라가 린접하였고 한나라때에 와서는 조선과 한나라가 패수(대릉하)를 경계로 삼게 되였으므로 이때부터 조선은 료하에서 옛 강토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가장 쇠약해진것이라고 하였다.

신경준의 이러한 견해는 고조선령역의 범위를 단군조선시기부터 시작하여 시대에 따라 부단히 달라진것으로 본것으로서 고조선의 령역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고정불변한것으로 본 선행견해와 대립되는것이였다.

이러한 사실은 단군조선의 령역으로부터 시작하여 고조선 전기간의 령역에 대한 해당 사료들을 심중히 검토하고 그와 관련한 견해를 제기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단군이 평양을 수도로 정하고 나라를 세운 후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하여 령역을 확대하여나갔으며 후조선때에는 서쪽으로 만리장성계선까지 령역을 넓혀나갔다는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놓고볼 때 단군조선과 그후 고조선의 령역에 대한 신경준의 견해는 력사적사실에 부합되는 비교적 과학적인 견해였으며 또 그만큼 고조선의 력사지리에 대한 연구가 매우 심화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고조선의 령역을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시대로 나누어 따로따로 서술하였다.

그는 단군시대의 강역은 료동과 료동북쪽 1 000여리에 있다는 후부여를 포함한 지역이고 《기자시대》의 조선은 진개에 의하여 서쪽 1 000여리를 잃었다는것을 고려하여 료수(료하)동쪽 즉 료동지방이며 《위만시대》의 조선은 만반한 동쪽에 국한하여 동북새외와 함경도 및 령동지방이라고 하였다.

 

* 《동사강목》 부권 하 지리고 단군강역고, 기자강역고, 위씨강역고

 

안정복은 여기에서 진개의 공격으로 서쪽 1 000여리를 잃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신경준의 기록과 차이나는 점이다. 신경준은 2 000여리를 잃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현재 력사학계의 견해와 일치하다.

그리고 삼조선의 남쪽경계선은 모두 한수(한강)라고 인정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주로 《한서》 지리지에 의거한것으로서 옥저, 부여, 예맥, 읍루까지 고조선에 포함시킨것이다.

안정복이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령역을 론한것은 잘못이지만 이것은 고조선의 삼왕조인 단군조선, 후조선, 만조선시기의 령역이 시기에 따라 변화되였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 《동사강목》 부권 하 지리고 료동고

 

정약용은 단군조선의 령역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조선일대였다고 하였다.*

 

* 《아방강역고》 권1 조선고

 

정약용의 이 견해는 단군조선초기의 령역에 관한 견해였다. 이미 앞에서도 론했지만 단군조선은 건국초기에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조선일대였지만 강성기에는 우리 나라 전령역을 포함하여 연해주일대, 료동일대, 대릉하일대 등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있었다.

고조선의 령역과 관련한 실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첫째로, 리종휘는 고조선의 령역을 시기별로 구분하지 않고 강성기의 령역만을 론하였고

둘째로, 신경준은 리종휘보다 더 세분화하여 령역을 론하였는데 특히 고조선말기의 령역이 패수를 경계로 한나라와 린접해있었다고 찍어서 밝혔으며

셋째로, 정약용은 고조선초기의 령역만을 밝혔으며

넷째로, 안정복은 다른 실학자들보다 좀더 많은 연구를 진행하여 고조선의 령역을 단군조선, 후조선, 만조선 등 삼왕조시기로 구분하여 밝혔다.

이처럼 실학자들은 고조선의 력사적지위문제, 국호문제, 수도문제, 고조선의 령역문제 등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켜 당시 고조선에 대한 력사연구에서 미해명으로 남아있던 문제들과 모호한 문제들을 해명하는데서 일정한 성과를 달성하였다.

 

3. 결 론

 

실학자들은 우리 민족의 첫 국가였던 고조선에 대하여 일정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실학자들은 고조선이 우리 민족의 첫 국가였으며 그후에 세워진 나라들은 모두 단군의 후손들에 의하여 세워진 나라였다고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나라들은 하나의 피줄을 이은 단일민족의 나라였다는것을 밝혔다.

실학자들은 고조선이 처음부터 수도를 평양으로 정하였고 나라이름을 조선이라고 불렀으며 광대한 령토를 가진 강대한 나라였다는것을 자료적으로 밝혔다.

물론 실학자들이 우리 나라 력사에 존재하지도 않은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 조선현문제 등 봉건대국주의사가들에 의하여 외곡된 견해들을 인정한것 같은 제한성은 있지만 우리 민족의 시조국가인 고조선의 력사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연구해명하려고 노력한것은 당시로서는 진보적이였다고 할수 있다.

 

김일성종합대학 최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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