률곡 리이와 련시조 《고산구곡가》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뛰여난 슬기와 재능으로 력사에 이름을 남긴 수많은 명인들을 배출하여왔다.

우리 나라의 명인들을 널리 소개선전하는것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더욱 높이 발양시키고 우리의 민족사를 발전풍부화시키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지난 시대의 작가와 작품을 문학사나 예술사에서 취급하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작가, 예술인들과 자라나는 새 세대들에게 우리 문학사와 예술사에도 당대 문학예술발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 작가와 작품이 있었다는것을 알려줌으로써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는 동시에 지난날의 력사에서 경험과 교훈을 찾게 하자는데 있다.》

우리 나라의 명인들가운데는 조선봉건왕조시기 《10만양병설》의 주장으로 하여 우리 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진 리이(1536ㅡ1584, 자; 숙헌, 호; 률곡)도 있다.

황해도 해주에서 사헌부 감찰의 낮은 벼슬을 지낸 아버지 리원수와 우리 나라 중세사에서 녀류화가, 녀류시인으로서 이름을 날린 어머니 신사임당의 셋째아들로 태여난 리이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이름을 떨치였다.

신사임당이 리이를 임신하였을 때 꿈에 룡을 보았다고 하여 처음 그의 이름을 현룡이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리이의 집은 《몽룡집》(꿈에 룡을 본 집이라는 뜻)이라고 전해온다.

리이가 3살 나던 해 외할머니 리씨가 석류를 따주면서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고 물은적이 있었다. 이에 리이는 《석류피리쇄홍주》(석류껍질안에 부서진 붉은 구슬)라는 한자시를 지어 대답하였다.

4살 나던 해에는 《사략》 첫권을 배우다가 마을선생이 잘못 가르친 곳을 지적하여 바로잡아주었다. 그리고 7살때에는 경서를 통달하고 글을 지었으며 10살때에는 

 

서리바람 땅을 흔들매 일만군마의 칼휘두르는 소리울리듯

눈꽃이 하늘에 흩뿌릴제 천섬의 구슬알 흩어지는듯

 

이라는 유명한 《경포대부》를 지은것으로 사람들속에서 전해졌다.

29살때 진사시와 명경과에 급제한 리이는 뛰여난 재능과 인격으로 하여 빠른 승급의 일로를 걷게 되였다. 그는 벼슬길에 올라 좌랑, 정랑, 정언, 지평, 교리, 검상, 사인, 목사, 응교, 사간, 승지, 직제학, 대사간, 관찰사 등 중앙과 지방의 각종 벼슬을 력임하였다.

그후 그는 벼슬을 그만두고 정계에서 물러나 해주에서 《소현서원》을 차려놓고 후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다. 

률곡 리이는 비록 성리학자였지만 사회정치적견해에서는 비교적 진보적이고 애국적인 사상관점을 가지고있었다. 률곡 리이는 벼슬길에 나선 첫 시기부터 봉건사회의 뒤떨어진 생활풍조와 각종 페단들을 없애고 나라의 발전을 주장한 애국적인 인물이였다.

그것은 명종과 선조의 집권시기에 활동하면서 많은 진보적인 개혁안들을 제기한데서도 잘 알수 있는데 특히 1574년 선조에게 올린 1만자의 건의서는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그는 건의서에서 관리임명에 대한 페단을 지적하고 정사에서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것은 실지 공력을 들이지 않았기때문이라고 하면서 그 원인을 일곱가지로 밝히였다. 그것은 첫째로, 웃사람과 아래사람사이에 서로 믿어주는데서 실속이 없는것이고 둘째로, 신하들에게 일을 맡겨주는데서 실속이 없는것이며 셋째로, 경연에서 임금이 덕망을 지니도록 이끌어주는데서 실속이 없는것이고 넷째로, 어진 사람을 불러들여 등용하는데서 실속이 없는것이며 다섯째로, 재변을 당하고도 하늘에 보답하는데서 실속이 없는것이며 여섯째로, 여러 신하들이 올린 대책에 백성을 구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도가 없는것이며 일곱째로, 사람들의 마음이 착한데로 지향되도록 하는데서 실속이 없는것이라고 한것이다.

그는 애국적인 관점에서 나라의 군사력을 더욱 강화할데 대하여서도 진보적인 주장을 제기하였다. 

그는 병조판서로서 나라의 군사력을 강화할데 대한 많은 대책안들을 제기하였으며 그중 일부가 실현됨으로써 나라의 방위력강화에서 일정한 효과를 보았다.

리이는 어느때인가 진행한 경연석상에서 의견을 올리면서 10만의 군사를 미리 양성하여 가지고 앞날에 있을수 있는 뜻밖의 변란에 대처할데 대하여 건의하였다. 비록 그때 당시로서는 군사를 키우는것이 재난을 키우는것이라는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그가 죽은 후 1592년 임진조국전쟁이 일어나서야 사람들은 그의 뛰여난 선견지명에 대하여 다시금 감탄하게 되였다고 한다.​

리이가 현실문제에 주의를 돌린 점을 비롯한 일련의 진보적인 측면들은 이후 실학자들에 의하여 이어졌다.

이로부터 당시 사람들은 리이에 대하여 평하면서 정치가들은 그를 충의롭고 능력있는 정치인으로, 군사가들은 선견지명한 군사전략가로, 철학가들은 《리기이원론》을 제창한 철학자로 내세웠다.

그러나 률곡 리이의 활동을 살펴보면 정치와 군사, 철학분야뿐아니라 문학분야에서도 뛰여난 재능을 가지고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그의 문학적재능이 집중적으로 반영되여있는 작품은 황해도 해주시의 고산구곡(현재 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에서 지은 련시조 《고산구곡가》이다.

《해동가요》에 실려있는 《고산구곡가》는 주자성리학자로서의 리이의 사상감정을 노래한 10수의 시조를 묶은 련시조형식의 작품이다. 이 련시조는 리이가 선조 10년(1577)에 벼슬을 그만두고 해주에 돌아와 고산구곡담의 5곡에 집을 짓고 주자학을 연구하며 후진양성에 힘쓰던 때에 지은것이다. 이에 대한 기록으로는 그의 련시조 《고산구곡가》에 대하여 론한 최립의 《고산구곡담기》가 있다.

최립은 이 글의 첫머리에서 《고산구곡담기》를 쓰게 된 연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률곡선생은 내가 젊었을 때의 스승이며 벗이였다. 공은 이미 세상이 받드는 큰 선비로서 조정에 높이 등용되였으나 불행하게도 할 일을 다하지 못한채 돌아간지 이제 25년이 된다. 돌이켜보건대 나는 쓸모없는 사람일뿐으로 늙어서도 죽지 않아 우연히 공의 아들 경림생을 서경에서 만났다. 우리는 지나간 이야기들을 더듬다가 말을 다하지 못한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률곡선생이 전에 살고있던 해주의 고산구곡담에 대하여 써달라고 청하였다.》

이 글을 통하여 률곡 리이가 최립의 스승이고 벗이였으며 1609년경에 최립이 《고산구곡담기》를 썼다는것을 알수 있다.

계속하여 최립은 매 곡의 위치와 그곳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 자상히 설명하면서 5곡(은병)에 대한 글에서 《공이 처음에 자리잡을 때에는 다만 거처할 곳으로만 정하였었다. 그러나 제자가 점점 많아지며 선배를 높이 받드는것이나 후진을 친절히 가르치는것을 그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수 없는것이라 서로 상의하여 쓸만하게 설비를 갖추었다. 이것이 <은병정사>인데 차차 정사를 빛내기 위하여 얼마간씩 갖추어 이룩된것이다.》라고 서술하였다.

이 글에서 보는바와 같이 률곡은 고산구곡담의 5곡에 거처를 마련하고 《은병정사》를 열어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옆에 사당을 지어 정암 조광조, 퇴계 리황을 제사지내면서 도학자의 생활을 꾸려나갔다는것을 알수 있다.

률곡 리이의 련시조 《고산구곡가》는 고산구곡의 아름다운 자연풍경과 그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감정이 째인 시적구조와 세련된 언어표현으로 훌륭히 노래한것으로 하여 이 시기 국문시가문학에서 주목되는 작품의 하나로 되고있다.

《고산구곡가》는 외적구조로 볼 때 한수의 머리시와 9수의 시조들로 되여있다.

시인은 머리시에서 고산구곡담에 자리를 잡고 부지런히 주자학을 연구할 뜻을 밝히고 1곡(관암)으로부터 9곡(문산)에 이르기까지 매 계곡의 경치를 각각 한수씩의 시조로써 노래하였다.

련시조 《고산구곡가》에서는 무엇보다도 조국산천의 아름다움에 대한 긍지를 노래하고있는것으로 하여 시인의 애국적인 사상감정을 잘 보여주고있다.

작품은 시종일관하게 고산구곡의 아름다운 자연경치를 보고 느낀 시인의 풍만한 감정정서를 형상적으로 펼쳐보이고있다.

 

사곡은 어듸메오 송애에 해 넘는다

담심암영은 온갖 빛이 잠겨세라

림천이 깊도록 좋으니 흥을 겨워하노라

                                                 

4곡(송애)을 노래한 시조에서는 어느새 소나무 한그루 솟아있는 아아한 절벽에 해가 넘어가고 물에 비낀 바위에 온갖 빛이 감돌아 절로 흥이 나는 시인의 감정정서를 노래함으로써 고산구곡의 아름다운 경치를 생동한 형상적화폭으로 펼쳐보이고있다.

그런가 하면 8곡(금탄)을 노래한 시에서는 여울물소리가 맑아 거문고를 뜯는 소리가 방불하게 울린다는 금탄에서 밝은 달을 바라보며 거문고로 옛 곡을 즐기는 광경을 펼쳐보이고있다.

 

팔곡은 어듸메오 금탄에 달이 밝다

옥진금휘로 수삼곡을 노래하니

고조를 알이 없으니 혼자 즐겨하노라

 

시에서 이처럼 고산구곡의 아름다운 자연경치를 소재로 잡고 형상으로 펼친것은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지닌 시인의 뜨거운 조국애와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련시조 《고산구곡가》에서는 다음으로 특색있는 시적형상을 펼치고있는것으로 하여 작가의 뛰여난 시적재능을 잘 보여주고있다.

문학예술작품의 사상적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을 정서적으로 펼쳐보여주는 예술적형상이 따라서지 못하면 그 작품은 생명력을 잃게 된다. 련시조 《고산구곡가》는 조국산천의 아름다움에 대한 긍지와 례찬의 사상감정을 훌륭한 시적형상으로 펼쳐보여주고있다.

우선 다양한 시적계기를 설정하고 예술적형상을 펼침으로써 고산구곡의 아름다움을 보다 뚜렷하게 보여주고있다. 2곡(화암)의 경치를 노래한 시조에서는 꽃이 만발한 봄계절을 시적계기로 설정하고 아름다운 봄경치를 그림처럼 아름다운 산들과 푸른 물결에 떠가는 꽃에 대한 형상으로 펼쳐지고있다.

 

이곡은 어듸메오 화암에 춘만커다

벽파에 꽃을 띄워 야외로 보내노라

사람이 승지를 모르니 알게 한들 어떠하리

 

그런가 하면 3곡(취병)의 경치를 노래한 시조에서는 바위에 이끼들이 덮여 푸른 병풍을 펼친것과도 같은 취병에 봄새들이 날아예고 푸르른 소나무에 바람결 스치는 아름다운 여름경치를 소리높이 자랑하고싶은 자기의 감정정서를 소박하면서도 진실하게 노래하고있다.

 

삼곡은 어듸메오 취병이 잎 퍼졌다

록수에 춘조는 하상기음하는데

반송이 바람을 받으니 여름 경이 없애라

 

7곡(풍암)을 노래한 시조에서는 풍암에 가을빛이 짙고 여기에 깨끗한 서리까지 약하게 내려 단풍든 절벽이 비단같이 아름답게 단장된 정경에 빠져 찬 바위에 홀로 앉아 집생각까지 잊고 산천을 부감하는 시인의 감정세계를 노래하고있다.

 

칠곡은 어듸메오 풍암에 추색 좋다

청상이 엷게 치니 절벽이 금수로다

한암에 혼자 앉아 집을 잊고있노라

 

련시조의 마지막련인 9곡의 시조에서는 고산구곡담의 겨울경치 또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면서 눈속에 묻힌 기괴한 바위들을 찾아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볼것이 없다고 억측하는 풍류객들의 처사에 대한 비판의 감정이 노래되여있다.

 

구곡은 어듸메오 문산에 세모커다

기암괴석이 눈속에 묻혔에라

유인은 오지 아니하고 볼것 없다 하더라

 

이처럼 리이는 고산구곡담의 사계절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함과 동시에 매 계곡의 경치를 노래함에 있어서도 시간적으로 서로 각이한 정황을 제시하고 형상적으로 노래하고있다.

실례로 1곡을 노래한 시조에서는 거칠은 평야에 연기가 걷혀 먼산도 그림처럼 아름답게 보이는 아침을, 4곡을 노래한 시조에서는 소나무 솟아있는 절벽에 해가 넘어가는 초저녁을, 6곡과 8곡을 노래한 시조에서는 낚시터에서 달빛을 지고 돌아와 거문고를 타는 밤의 정경을 노래하고있다.

이러한 형상적특성으로 하여 련시조 《고산구곡가》는 고산구곡담의 경치에 대하여 아침과 저녁, 낮과 밤만이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 할것없이 그 어느때 보아도 다 아름답다는 느낌을 형상적으로 펼쳐보여준다. 이것은 자연현상 하나를 놓고도 인식적효과성을 보다 높이는 방향에서 시형상을 창조할줄 아는 시인의 뛰여난 예술적감수력과 형상능력을 떠나서 생각할수 없다.

련시조 《고산구곡가》에서는 수사학적수법과 대구법을 잘 활용하여 련시조의 감정정서를 더욱 돋구어주고있다.

시조에서는 초장의 1구에서 《일곡은 어듸메오》로 시작하고 다음 련들에서도 1곡으르 노래한 시조에서와 마차가지로 《이곡은 어듸메오》, 《삼곡은 어듸메오》와 같은 식의 수사학적물음으로 서두를 떼고있으며 머리시를 내놓은 9개 련의 시조들이 모두 대구를 이루고있다.

작품에서는 매 곡에서 특징적이라고 할수 있는 대상들을 초장의 2구에 제시하고있으며 중장, 종장들에서 그것을 보다 심화시킴으로써 시조의 형상적특성에 맞게 정서를 기승전결이 명백하게 펼쳐보이고있다.

시조의 초장들에 제시된 수사학적물음과 대구법은 시조의 음수률을 잘 보장하면서도 시적견인력을 보다 높이고있으며 중요하게는 시의 사상정서를 강조하는데 효과적으로 이바지하고있는것으로 하여 다른 련시조들과 구별되는 특성을 띠고있다.

이러한 언어형상수법의 탐구는 시의 인식적효과성을 보다 높이고 민족시가형식의 발전을 위한 시인의 고심어린 노력과 예술적재능의 필연적인 산물이라고 볼수 있다.

비록 련시조에는 고산구곡담의 경치를 즐기는 유학자의 감정을 토로하는것이 위주로 되여있어 당대 봉건사회현실을 《태평세월》로 구가하는 은일적인 시풍이 농후하게 배겨있으나 조국산천의 아름다움을 고유한 민족시가형식에 담아 노래한것으로 하여 우리 나라 중세시문학사에서 의의를 가진다.

온 겨레는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잘 알고 민족의 고유한 문화전통을 적극 살려나가야 할것이다.

김일성종합대학 박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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