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수광(1563-1628)​

조선봉건왕조시기의 관료, 실학의 선구자.

자는 유경, 호는 지봉, 본은 전주이다. 1585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은 홍문관제학, 좌참찬 등을 지냈다. 임진조국전쟁시기 경상방어사 조경의 부대에서 싸웠으며 함경도에서 의병들의 투쟁도 지원하였다. 그후에도 도체찰사 류성룡(1542-1607)의 종사관이 되여 계속 전쟁에 참가하였다. 봉건정부에서 높은 벼슬을 하면서 임진조국전쟁도 직접 겪었고 또 사신으로 다른 나라에도 여러번 다녀왔다. 이 과정에 자신의 체험과 보고들은것을 통하여 당시 봉건제도의 약점을 점차 알게 되였으며 다른 나라들의 사정과 문화에 대해서도 일정한 지식을 가지게 되였다. 이로부터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면 현행제도를 일정하게 변경하여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게 되였다. 그는 현실과 떨어진 공리공담을 반대하고 학문을 쓸모있게 연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천문, 력학, 지리, 의학, 동식물 등 자연과학과 정치, 경제, 력사, 어학, 문학, 제도, 풍속, 종교, 철학 등 사회과학의 여러분야에 대한 연구사업을 널리 진행하였다. 자연과학분야에서 그는 시대적제한성을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대상들에 대하여 깊은 주목을 돌리고 연구를 거듭하는 진지한 학구적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학풍은 새로운것이였고 또 적지 않은 성과도 가져왔다. 사회관계학문에서도 종래의 고루한 학자들과는 달리 학문연구를 현행제도의 변경에 대한 의견과 결부하여 진행하는 새로운 학풍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전부터 일정하게 알려져있던 중국, 일본, 녀진, 몽골, 류꾸와 같은 나라와 지역은 물론 알려져있지 않던 그 서쪽과 남쪽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연구성과들도 내놓았다. 이것은 16세기 말엽이후 국내에 소개된 새로운 지식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나라의 정치, 경제, 과학, 문화의 제반사실들을 다시 새로운 각도에서 볼수 있게 하는 계기로 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실학학풍은 그후 일부 진보적인 학자들에 의하여 계승되였다. 그는 임진조국전쟁때의 의병들의 활동과 리순신(1545-1598)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해외통상을 발전시킬것과 다른 나라의 일부 앞선 문화적측면들을 받아들일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인민들에 대한 무질서하고 가혹한 착취를 조절하는것이 곧 부국강병책으로 된다고 주장하였다. 실학학풍을 처음으로 내세우고 자신의 학문연구를 통하여 적지 않은 공적을 남긴 그의 업적은 봉건말기 실학발전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기초는 여전히 봉건유교관념론이였으며 제도변경에 대한 그의 립장은 어디까지나 봉건제도를 유지공고화하려는데로부터 출발한것이였다.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