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등록 |  학생가입 
개화혁신을 지지하게 된 고종

밀려오는 자본주의침략의 파도속에 날로 어지러워지는 정국을 목격하면서 이미 30대에 들어선 국왕 고종도 국정을 종래와는 달리해야 하겠다는것을 느끼고있었다. 그러나 봉건군주로서 그자신이 새 길에 들어서는것은 힘든것이였다. 그가 개화혁신에 눈을 트게 하는데서 개화파와 혁신관리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개화파와 혁신관리들은 다같이 상층개혁방법을 전략으로 삼고있었으므로 근대화의 목적을 실현하자면 국왕의 지지와 승인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로부터 그들은 고종이 근대화의 필요성을 인정하도록 그를 설복하는 활동을 각방으로 벌리였다.

혁신관리 어윤중은 시독관으로서 국왕과 자주 접촉하는 기회를 리용하여 고종에게 근대화의 필요성을 설복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어느날 그는 고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국가란 다스리지 않으면 어지러워지고 성하지 않으면 쇠하는 법입니다. 반드시 상하가 맹세하여 낡은 유습을 일신하는 정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또 다른 어느날에 그는 고종에게 이렇게 설복하였다.

《나라가 비록 작고 힘이 약하다 할지라도 만약 상하가 한마음이 되여 백성을 보양하는 정치를 더하고 국가를 지키는 정책을 잘한다면 대국이라 할지라도 어찌 두려울것이 있겠나이까.》

그의 주장은 자수자강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면 그 어떤 대국도 두려울것이 없다는것이였다.

혁신관료인 김홍집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종에게 근대화와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설복하였다.

1880년 8월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김홍집은 고종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우리 나라의 4분의 1밖에 안되는 네데를란드가 어떻게 되여 일본에 군사기술을 배워줄수 있었는가?》

이 물음은 일본방문의 나날에 조선도 하루빨리 문명개화의 길로 나아가야 하겠다는것을 절실히 느낀 김홍집으로서도 어느때인가 고종에게 말해주고싶었던 문제였다.

《나라가 크고작은데 관계없이 무기를 정예하게 하고 나라자체의 힘을 키우기 위한 실제적인 대책을 세우는데 달려있다고 보오이다. 바로 소국인 네데를란드가 그렇게 할수 있은것도 자수자강에 각별히 힘쓴 까닭이오이다.》

김홍집은 산업을 발전시키고 정예한 무기도 자체로 생산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한다면 작은 나라도 큰 나라에 기술문명을 배워주면서 호통을 치고 살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개화파들과 혁신관리들의 꾸준한 설복에 의하여 마침내 고종은 그에 동감하게 되였고 개화혁신에 큰 기대를 걸고 개화파들의 개화활동을 은근히 지지하게 되였던것이다.

원래 조선봉건왕조의 법에 의빈(왕의 사위)들은 국가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여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이런 관례를 깨고 철종의 사위이며 개화파였던 박영효를 1882년에 전권대신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했으며 귀국후에는 그를 한성판윤, 광주류수 등으로 임명하였다.

이와 함께 개화파청년관리들인 홍영식, 서광범 등이 박영효와 함께 유럽과 미국을 방문하게 하였고 귀국한 후에는 홍영식을 가선대부(종2품)로, 서광범은 대교로부터 특별히 올려 동부승지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때 개화파의 지휘자인 김옥균을 참판으로 임명하였다.

이것은 곧 고종이 개화파들의 활동에 공명하고 지지한다는 표현이였다.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