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다 실패한 리이

리이(1536-1584)는 조선봉건왕조시기의 관료이며 학자였다. 자는 숙헌, 호는 률곡, 시호는 문성, 본은 덕수이다. 1564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대사간, 리조판서, 우의정 등의 벼슬을 하였다.

리이가 부제학으로 있을 때 사림들은 리조정랑의 관리임명권을 놓고 서로 싸우면서 동인과 서인이라는 당파로 갈라져 서로 권력쟁탈싸움을 벌렸다.

이때 리이는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동인과 서인의 주요인물인 심의겸을 개성류수로, 김효원을 삼척부사로 내려보냈다.

이 두사람을 평하여 리이는 일찌기 다음과 같이 말한바가 있다.

《의겸은 앞서 선비출신관료를 구원한 일이 있어 선배의 관료들이 많이 이를 존경하였고 효원은 즐겨 신진선비들을 많이 이끌어주고 일을 정직하게 처리하니 후배관료들이 매우 숭배하였다.》

이것은 다 같은 사림파출신관료이나 심의겸은 기성관료, 김효원은 신진관료의 중심인물이라는것을 말하여준다.

심의겸과 김효원이 중앙정계에서 쫓겨내려갔으나 조정의 당파는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싸움은 계속되였다.

서인은 리이가 동인을 치지 않는다고 불평을 가졌고 동인은 리이가 김효원을 등용하지 않는다고 공격하였다.

리이는 마침내 1576년(선조 9년)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파주 률곡으로 내려갔다.

이제는 봉건정부안에서 동, 서 량파간의 싸움이 더욱 번창하여 관료들은 어느 한 당파에 속하지 않은자가 없었다.

얼마후에 리이가 봉건정부에 다시 돌아와 대사간이 되여 당파싸움을 다시 조정하려고 하였으나 좀처럼 싸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리이는 시종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으나 그의 제자, 친구들중에는 서인파에 속한 관료들이 많았으므로 리이가 중요관직에 있는것은 사실상 서인에게 크게 리로웠다.

리이는 병조판서로 있을 때 녀진의 니탕개가 침입한 사건을 잘못 처리하여 동인의 공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동인과 서인과의 관계를 조절하며 당파를 없애려고 노력하던 리이는 끝내 서인파에로 기울어지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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