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압록강에로​

압록강을 계선으로 중국과의 국경이 정하여진것은 대체로 고려 말엽이지만 그 이전에 벌써 고려인민은 착취와 압박이 덜 미치는 초산, 창성, 벽동, 만포, 갑산 등지에로 활발히 진출하였다.

조선봉건왕조 초에 들어와 봉건정부가 압록강, 두만강을 계선으로 군현을 설치하고 통치령역을 늘일수 있은것도 그 이전시기에 이미 그 지방에로의 인민들의 활발한 진출이 있었기때문이다.

조선봉건왕조시기 나라의 국경을 압록강에로 진출시킨것과 관련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있다.

조선봉건정부는 1416년(태종 16년) 갑산군이 너무 광대하여 갑산의 서쪽지방을 떼내여 려연군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압록강이서에 있던 녀진인들이 때때로 압록강을 건너와 우리 지경에 침입하여 사람들을 랍치하고 재물을 마구 략탈하였다.

1432년(세종 14년) 파저강에 둥지를 틀고있던 녀진족 추장 리만주가 400여명의 병력으로 려연군에 쳐들어와 략탈을 감행하므로 강계절제사 박초가 반격하였으나 적의 소굴을 완전히 소탕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실태를 보고받은 세종은 대노하여 가장 신임하던 최윤덕장군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하여 평안도의 군사 1만명, 황해도의 군사 5 000명을 징발하여 녀진을 정벌할것을 명령하였다.

최윤덕이 군사를 이끌고 일곱개의 길로 나누어 사면팔방에서 공격하니 녀진족은 변변히 대항도 못하고 꺼꾸러졌다. 이 전투에서 적 263명을 사로잡고 170여명을 목베였으며 우마 170여마리를 로획하는 등 혁혁한 성과를 거두고 개선하였다. 

임금은 개선한 최윤덕을 불러 야인의 침범을 막을 차후대책을 물었다.

《적들은 우리 나라를 멸망시키려고 목적하는 대적이 아니올시다. 변방에 침입하여 인마와 재물을 략취하려는 소적이오니 우리가 방비를 굳게 하면 감히 침범하지 못할것입니다. 그런데 려연과 강계사이가 너무 비였으니 그 중간에 한개 군을 더 설치하고 군사를 머물게 하면 적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할것으로 아뢰옵니다.》

임금은 기뻐서 말하였다.

《경의 제기가 과인의 생각과 꼭 맞으니 기쁘오.》

이렇게 되여 려연과 강계의 중간지점인 자작리에 자성군이 설치되게 되였다.

그후에도 최윤덕은 우리 나라지경을 침범하여 로략질을 일삼는 녀진족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세종은 녀진을 정벌한 공로로 최윤덕을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

최윤덕은 임금에게 《녀진을 정벌한 다음에는 방어를 충실히 해야 합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입니다. 녀진이 추서기 전에 한번 더 정벌하여 후환을 없애는것이 상책인줄 아뢰옵니다.》

세종은 그 의견을 받아들여 1437년(세종 19년) 평안도 도절제사 리천을 시켜 군사 8 000명으로 재차 리만주녀진을 정벌케 하였다.

원정군은 압록강을 건너 오라산성의 적소굴을 소탕하고 개선하였다.

조선봉건정부는 이 성과에 토대하여 1440년(세종 22년) 려연군 동쪽 압록강연안에 무창군을 설치하고 3년후에는 려연, 자성의 중간지대에 우예군을 두었는데 이 려연, 무창, 자성, 우예를 4군이라고 한다.

4군의 설치는 조선봉건정부의 압록강계선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