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948-1031​)

고려의 애국명장.

본래 이름은 은천. 본은 금주이다.

983년(성종 2년)에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하여 례부시랑, 중추사, 한림학사 등을 거쳐 최고벼슬인 문하시중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지략이 있었으며 청백하고 검소한 성품에 사리사욕이 없었다고 한다.

강감찬은 비록 체소하고 용모도 못생겼으나 결단성이 있었고 매사에 엄격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질은 그가 거란군대의 침입을 반대하는 고려인민들의 투쟁을 지휘하는 과정에 잘 나타났다.

강감찬은 1010년 11월 40만대군에 의한 거란의 제2차침입당시 무능한 고려봉건통치배들의 투항주의적제기를 단호히 반대하고 력량을 재정비하여 싸우면 승리할수 있다는 주장을 실현시킴으로써 전쟁승리에 기여하였다. 거란의 제2차침입을 물리친후 서경류수로 있던 강감찬은 1018년 10월 거란의 새로운 침공에 대처하여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임명되였다.

이해 12월 거란은 제3차로 고려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였다. 이렇게 되자 상원수로 된 강감찬은 20만 8 300여명의 고려군을 총지휘하여 지휘부는 녕주에, 방어군의 기본주력은 녕주와 그 이북지대에 배치하고 적을 타격할 면밀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의 지휘밑에 고려의 기병 1만 2 000명은 압록강의 흥화진계선에서 미리 매복하였다가 적의 주력이 그곳으로 밀려들자 준비하였던 물막이를 터쳐 적들을 일대 혼란속에 빠뜨린 다음 총공격으로 놈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다. 첫 타격에서 심대한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장 소배압은 빨리 개경에 이르러 고려국왕을 항복시키겠다는 기도밑에 무모하게 계속 기여들었다.

강감찬은 거란군의 이러한 기도를 제때에 포착하고 부원수 강민첨(?- 1021)으로 하여금 녕주에 대기시켰던 기동무력인 기병대를 이끌고 적을 맹렬히 추격하면서 유리한 계선마다에서 놈들에게 강력한 타격을 안기게 하는 한편 병마판관 김종현에게는 1만명의 군사를 주어 지름길로 적을 앞질러 개경방어군에 합세하도록 하였으며 동북면병마사가 보낸 3 300명의 응원군도 개경방어에 가담하게 하였다. 또한 개경주변 100리안팎의 인민들을 성안에 옮기고 들판을 비우게 하였으며 우물을 메우고 짚이나 새초 같은것도 모조리 불태워 없애버리도록 하였다.

적들은 된타격을 받으면서 겨우 신은현(신계)까지는 기여들수 있었으나 그사이에 당한 거듭되는 참패와 식량난, 음료수난 등으로 하여 더는 견디여낼수 없게 되였으며 드디여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고려군은 강감찬장군의 전략적계획에 따라 총반격에로 넘어가 련주(개천)와 위주(녕변)계선에서 500여명의 적을 소탕하고 청천강계선으로 육박하였다. 고려군은 1019년 2월 대포위작전으로 거란군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준 구주전투를 벌리였다. 력사는 이 전투를 가리켜 《구주대첩》이라고 전해온다.

거란군은 제3차침입에서 전멸되다싶이 되였으며 10만가운데서 겨우 수천명만 살아 돌아갔다고 한다.

강감찬은 그후 1020년(현종 11년)에 수도방위를 위하여 개경에 라성을 쌓을것을 제기하였다.

고려봉건정부는 그의 공로를 표창하여 여러번 공신칭호와 식읍을 주었으며 수태사 겸 중서령의 벼슬을 추중하였다.

저서로는 《락도교거집》, 《구선집》이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는것은 없다.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