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결, 여결의 적발로 성과를 본 량전사업

1400년 11월 방원(조선봉건왕조 3대왕 태종)은 자기의 형 정종의 양위를 받아 임금으로 되였으나 어쩐지 떳떳하지 못하고 어색한 감이 드는것을 금할수 없었다. 부왕에게 불효불충하고 더구나 태상왕(리성계)이 아들을 보기 싫어 함흥에 내려가 있어 더더욱 태종의 마음은 불안하였다.

(정사를 잘 펴서 나라와 백성을 편안케 하자. 그러자면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어느날 임금은 령삼사사(재정을 맡은 관청의 책임자) 하륜을 조용히 불렀다. 하륜은 1398년 태종이 정도전, 방석을 꺼꾸러뜨리고 정치적실권을 장악하는데서 총참모의 역할을 한 사람이므로 태종이 바른팔과 같이 믿는 존재였다.

《과인이 갓 임금이 된터이라 어떻게 정사를 폈으면 좋을지 경은 고견을 내여보오.》

하륜은 한참 생각하는듯 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소신이 생각컨대 나라의 급선무는 량전을 실시하여 국가가 조세를 부과할수 있는 땅을 량안(토지대장)에 많이 등록하는것인줄 아옵니다.

아직도 량반관료와 토호들은 은결, 여결을 많이 가지고있어 국고수입을 늘일수 없게 하고있으며 국고수입이 많지 않고서는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를 부강케 할수 없는줄로 아옵니다.》

임금은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다시 물었다.

《은결, 여결이란 무엇이요?》

《은결과 여결은 량안에 올라있지 않은 토지를 의미하는데 여결은 량전할 때 실지 토지면적보다 줄여서 사정한 그 차이를 말하는것입니다. 례를 들면 10결의 토지를 7결로 사정하여 량안에 등록하고 나머지 3결은 여결이라 하여 관리들이 중간에서 횡취합니다. 은결은 조세부과대상에서 고의적으로 루락시키여 면세되는 토지를 말합니다. 토지소유자가 은결하는 경우, 경작자가 은결하는 경우 그리고 조세를 징수하는 관리들이 은결하여 중간에서 착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것이나 다 국고수입을 늘이지 못하게 하고 관리들의 배만 불리게 하는것입니다.》

하륜의 상세한 대답에 임금은 경탄하면서 물었다.

《경은 어떻게 그렇게 량전의 페단을 자세히 아오?》

《신이 일찌기 여러 도의 관찰사와 고을원을 한바있는고로 량전의 페단과 관리들의 부정행위를 익히 알게 된줄 아뢰옵니다.》

이에 갑자기 깨달은바있는 태종은 곧 명령을 내려 경차관을 각도에 파견하여 량전을 실시케 하였다.

이리하여 봉건정부는 1401년부터 본격적으로 량전사업을 실시하여 1404년에는 전국적으로 93만여결의 토지를 조세수탈대상으로 장악통제하게 되였다. 1405년에는 충청, 경상, 전라 3도에서, 다음해에는 경기, 강원, 풍해(황해) 3도에서 다시 량전이 진행되여 여기에서 새로 등록된 논밭만 하여도 30여만결이나 되였다.

이 30여만결의 토지는 적지 않은 부분이 은결, 여결의 적발에 의하여 얻어진것이였다.

량전사업을 통하여 청주에서 5 070결, 충주에서 4 570결을 더 얻어냈다.

그전에 왜구들이 쳐들어오지 않은 청주와 충주의 두 고을에서 한번의 량전으로 약 1만결의 논밭을 새로 얻어내였다는것은 이 시기의 량전이 은결, 여결의 적발이 기본이였다는것을 말하여준다.

태종은 마음이 흡족하였다. 량전을 하여 불과 몇년도 못되여 30만결의 토지를 얻었으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각도에 경차관을 파견하여 량전을 더 엄격히 실시할것을 촉구하였다.

그런데 1407년 의정부 지사 김승주에게서 신소가 들어왔다.

《신의 종이 강원도 평강현에 살고있는데 5결밖에 안되는 토지를 25결로 사정해놓았으니 억울하오이다.》

태종은 성이 나서 지시하였다.

《사실이 이렇다면 량전을 실시한 경차관을 용서할수 없다. 곧 감찰 유면을 현지에 파견하여 사실여부를 알아보도록 하라.》

며칠후 유면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승주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헌부에서 들고일어났다.

《김승주는 25결의 토지를 5결로 량안에 등록하여 20결을 여결로 가지고있었으며 경차관이 이 사실을 밝히자 임금을 속이는 글을 올렸으니 그를 죄주시기 바라나이다.》

사헌부에서는 여러번 김승주의 죄를 청하였으나 임금은 그가 공신이라 하여 특별히 용서해주었다.

태종은 여결, 은결이 그렇게도 많은데 대하여 놀랐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등록된 토지보다도 더 많은 여결을 가지고있다니, 공신들이 권력을 등대고 그따위짓을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한 임금은 량전을 더욱 힘있게 밀고나가도록 하였다.

1413년에는 처음으로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량전사업을 하게 하고 동시에 제주도에서도 그것이 진행되였다. 그리하여 량전사업은 15세기 20년대에 일단락짓게 되였는데 그 과정에 토지대장에 루락되였던 수많은 토지를 적발하여 량안에 등록하였다.

15세기 30년대에는 팔도의 논밭 총 결수가 약 172만결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조선봉건국가의 최고전결수로서 그만큼 국가조세를 수탈할수 있는 토지면적이 많이 지배하였다는것을 의미하며 봉건적중앙집권제의 물질적토대가 강화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15세기 봉건문화의 급속한 개화발전은 이러한 물질적토대에 기초하여 이루어질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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