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신라의 평화적투항​

927년 견훤이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수도 경주에 쳐들어와 왕을 살해하고 재물을 략탈하여가지고 물러가자 경순왕(김부)은 경애왕의 시신을 안장하고 목놓아 울었다.

《이 원한을 어떻게 풀고, 씹어먹어도 씨원지 않을 견훤 이놈!》 경순왕은 하늘을 우러러 통분해하였으나 신라의 국력으로는 도저히 원쑤를 갚을수 없었다.

당시 신라의 령토는 불과 100여리, 조정의 명령이 미치는 곳은 겨우 경주부근의 몇개 고을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나 후백제가 신라를 병합하자면 순식간에 할수 있었다. 신라는 왕건과 견훤이 격렬한 싸움을 벌리고있는 틈바구니에 끼워 겨우 잔명을 유지하고있었다. 경순왕 자신도 이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그리하여 왕위는 고사하고 목숨을 온전히 보존하자면 그 어느 한쪽에 붙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것은 경순왕 개인의 생각일뿐아니라 당시 조정에 틀고앉은 신라의 귀족들의 념원이기도 하였다.

견훤의 후백제에게 접근할수 없다는것은 불을 보듯 환하였다. 견훤이 결단코 신라의 투항을 용납하지 않으리라는것은 포석정의 참극이 그대로 보여주는것이였다.

그렇다고 하여 고려에 항복하자니 왕건이 너그럽게 받아주겠는가가 의문이며 왕건과 견훤의 싸움이 누구의 승리로 결말이 나겠는가를 가늠할수 없는 때에 서뿔리 어느 일방에 투항한다는것은 부질없는 노릇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때인 930년 1월 고창군(경상북도 안동군) 병산에서 왕건이 거느린 고려군과 견훤이 이끈 후백제군과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격전에서 견훤은 8 000명의 전사자를 내는 대참패를 당하고 도망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신라 조정과 신라의 많은 군현들은 고려의 군사적우세를 똑똑히 깨달았으며 나라가 고려에 의하여 통일될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였다.

병산싸움이후 그 주변 30여개의 군현과 강릉으로부터 울산에 이르는 동해안의 110여개 성이 차례로 고려에 투항하였다. 뿐만아니라 후백제의 많은 성의 장관들이 고려에 귀순해오고있었다. 또한 926년 거란에 의하여 발해가 멸망하자 그 유민들이 속속 고려로 넘어오고있었으며 왕건은 그들을 너그러이 받아들여 안착시키였다.

경순왕은 931년 2월 겸용을 보내여 왕건과 만날것을 간절히 요청하였다. 왕건은 이 요정을 쾌히 응락하였다.

이리하여 931년 2월 왕건은 신라를 방문하게 되였다. 

그런데 왕건이 50명의 호위병만을 거느리고 신라수도 경주로 들어가는데 대해서는 고려조정의 대부분의 신하들이 반대하였다.

《그렇게 적은 병력으로 호위하여 들어갔다가 경주에서 불의지변이 생기면 후회막급이로소이다.》

《수천의 병력으로 경주에 들어가 고려군의 위용을 보이는것이 좋으리라고 생각되오이다.》

그러나 왕건은 이 모든 주장을 반대하고 호위병을 50명으로 정하였다.

《나도 호위병 50명이 적은바를 모르는것은 아니다. 50명으로 신라를 공격할수 없다는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한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나라를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우리의 의지가 표시되여있는것이다. 4년전 후백제군 수천명이 경주를 들이치고 파괴, 살인을 일삼았으므로 고려군이 이와 같이 적은 병력으로 신라수도를 방문하면 그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것은 물론 그들에게 부담도 적게 끼칠수 있는것이니 경들은 여러말 말도록 하라.》

조정의 신하들은 왕건의 넓은 궁냥과 멀리 앞을 내다보는 생각에 대해 깊이 감복하였다.

고려왕의 행차가 경주가까이에 이르자 그것을 구경하러나온 백성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천지는 환호하는 북소리, 징소리로 가득찼다.

신라 천년력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다른 나라의 왕이 신라의 수도를 친선방문한적은 그 어느때도 없었다. 더구나 방문하는 주인공인 왕건이 신라의 골품귀족이 아니고 송악군의 사찬벼슬에 있던 평민의 아들이요. 신라의 역적 궁예의 부하였던것을 생각하면 신라조정의 귀족들의 가슴은 언짢았다. 늙은 왕족과 원로대신들은 신라의 국운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작 왕건을 가까이하여서는 서로 앞을 다투어 인사를 하였다.

《신라 아무벼슬 아무개 문안드리오.》하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못들을세라 큰소리로 웨쳐댔다.

궁전에 이르자 경순왕의 안내를 받으며 신라 문무백관의 인사를 받은 다음 왕건은 륭숭하고 성대한 연회에 초대되였다.

술이 여러 순배 돌자 취기가 오른 경순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왕건에게 호소하였다.

《신라가 쇠약해져 4년전 짐승같은 견훤의 침습을 당하여 경애왕이 비명에 횡사를 하고 왕후와 궁녀들이 욕을 보았으니 구천에 사무친 이 원한을 어떻게 풀수 있겠소이까? 내 운수가 불길하여 약한 나라의 왕위에 있으나 좌불안석하여 도무지 밥을 먹어도 모래를 씹는것 같고 비단금침에 누워도 오히려 편안치 않소이다.》

왕건은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위로하였으며 신라를 고려편에 끌어당기기 위한 말마디를 고르고 또 골랐다.

《옛말에 강하지 못한 나라는 나라가 아니요, 지키지 못하면 나라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능히 강하지도 못하고 능히 지키지도 못하면서 사직을 붙들고있으니 이것은 부질없이 백성을 전화의 구덩이에 몰아넣는것이니 마치 순한 양떼를 몰아 범의 아가리에 가져다 바치는것과 무엇이 다르리오. 만일 신라가 고려에 귀순하고보면 아래로는 수많은 전란의 피해로부터 백성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우로는 왕족과 문무백관의 재산과 직위를 온전히 할수 있을것이요. 시간은 항상 우리를 위하여 기다려주는것은 아니니 한번 때를 놓치고 볼말이면 영원히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것이니 왕은 세번 생각하여보소서.》

왕건의 말은 하도 진실하고 설득력있어서 누구도 그의 말이 겉발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왕건은 부하들과 병사들을 엄하게 단속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털끝 하나라도 침해하지 못하게 하고 겸손하고 례절바르게 행동하게 하였다.

그 결과 많은 신라사람들이 왕건에 대한 친근감을 가지게 되고 민심은 고려편으로 기울어졌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전날 견훤이 왔을 때에는 승냥이나 범을 만난것 같더니 지금 왕공이 오심에는 부모를 뵈운것과 다름없다.》고 하였다.

왕건은 경주에 머물러있는 수개월동안 세치 혀끝을 놀려 신라백성들의 마음을 고려편으로 한껏 돌려세워놓으려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고 유유히 귀국하였다.

이후 경순왕은 고려에 의탁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확고히 가지게 되였다.

《신라는 어차피 나라를 오래 지탱해내지는 못할것이다. 아무래도 망할바에는 차라리 일찌감치 먼저 항복하느니만 못하고 백제에게 망하느니 고려에 의탁함만 같지 못하다.》

신라가 나갈 방향은 명백하였으나 경순왕에게는 왕건이 어느 정도 너그럽게 신라를 받아줄것인가가 문제였다. 왕족들과 조정의 문무백관, 그들의 가족까지 합하면 수천수만명을 헤아리는데 이들을 다 포섭하여줄것인가?

그런데 935년 6월 아들 신검의 반란으로 금산사에 감금되였던 견훤이 탈출하여 고려로 귀순하였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신라에 전하여졌다.

그 소식을 들은 경순왕은 깜짝 놀라 룡상에서 일어나며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래 왕건이 지금까지 원쑤지간이였던 견훤의 귀순을 받아들였다더냐?》

《고려의 임금은 40여척의 배를 보내여 견훤을 성대하게 맞이하고 <상보>라고 존중하면서 벼슬은 백관의 우에 있게 하였을뿐아니라 많은 식읍과 록봉을 주어 대우가 아주 륭숭하다고 하옵니다.》

경순왕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왕건과 견훤은 지금까지 네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 하면서 싸우던 사이였고 후백제는 고려가 나라를 통일하는데 기본장애로 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나라 왕의 귀순을 그토록 너그러이 받아주고 륭숭한 대접을 해주어 편히 살게 하는 왕건의 도량은 얼마나 넓으냐. 신라가 의탁할 곳은 고려이고 내가 안길 품은 왕건의 품이다.》

935년 10월 어느날 경순왕은 만조백관을 궁전에 모이게 하였다.

화려한 대청에는 이 구석 저 기둥에 금빛이 번쩍거렸으며 신라의 오랜 문화를 보여주는듯 정교한 조각품들이 찬란한 빛발을 뿌려주고있었다. 그러나 왕의 얼굴과 신하들의 얼굴에는 모두다 침울한 표정이 사라질줄 몰랐다.

《과인이 경들을 부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제 신라사직은 더 지탱해낼수 없게 되였소. 국토는 날로 좁아지고 왕명은 수도 경주밖을 벗어나지도 못하는 형편이요. 나라는 벌써 망한것이나 다름이 없소. 과인은 신라의 백성을 더 괴롭히지 않기 위해서 부득이 고려에 귀순하기로 결심하였소.》

왕은 말을 잠간 멈추고 소매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이제 후백제가 고려에 의하여 망하는것도 시간문제로 되였소. 견훤이 고려에 귀순하여버렸으니 신검따위는 100명 있어도 왕건의 적수가 못되오. 이제 백제가 망하는 날이 바로 신라가 망하는 날로 될것이요.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바에는 덕이 넓고 천품이 인후하여 왕자의 기상을 갖추고있는 왕건에게 일찌감치 나라를 바치여 구차한 목숨을 보존하는것이 상책이라 생각하오.》

경순왕은 침통한 표정을 짓고 말을 마치였다.

넓은 궁전은 물을 뿌린듯이 조용하다. 그 누구도 이토록 중대한 문제를 두고 서뿔리 먼저 입을 열려하지 않는다.

한동안이 지나서 태자가 서글픈 음성으로 입을 뗐다.

《부왕이시여, 그것은 안될 말씀이오이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하늘의 운수에 달렸거늘 어찌 경솔히 천년사직을 남에게 바치오리까? 부왕께서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나라의 충의지사들을 널리 불러모으고 풀어진 민심을 어서 수습하여 끝까지 나라를 지켜냄이 옳은줄로 아뢰오이다.》

태자의 두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흐른다.

경순왕도 눈물을 흘리면서 조용히 타일렀다.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태자의 마음은 실로 갸륵하다 아니할수 없다. 그러나 사방 백리땅과 흩어진 민심으로 나라를 지켜낸다는것은 그야말로 닭알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무고한 백성들만 참혹한 고통을 당하게 하는것이니 과인은 차마 그럴수가 없다. 과인이라고 어찌 망국의 왕이 되여 후세의 비웃음을 당하기가 좋겠냐마는 사세부득이하여 이미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기로 결심하였으니 그대는 더 말하지 말라.》

경순왕의 이 한마디로 신라의 운명은 결정되고 곧 시랑 김봉휴를 왕건에게 보내여 고려에 귀순함을 알리였다.

망국의 임금 경순왕은 침전에서 장밤 잠못이루며 번민하고있었는데 태자가 와서 하직을 고하였다.

《부왕마마, 불초자식은 슬하를 떠나 멀리 가버리려 하오니 부디 옥체건강하옵소서. 소자는 죽어도 고려의 신하는 되지 못하겠나이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 망국신라를 끝까지 조상하겠나이다.》

태자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에서는 비오듯 눈물이 쏟아졌다.

경순왕은 아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을수 없었다.

《내 이제 구차한 몸을 고려에 의탁하려는 마당에서 굳이 너를 붙잡을수 없으니 차라리 너 가고싶은데로 가도록 하라.》

경순왕은 눈물을 뿌리면서 태자와 작별하였다.

태자는 그날로 궁궐을 나와 개골산(금강산)의 깊고깊은 골안에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로 연명하면서 일생을 마치였으니 후세사람들은 그를 《마의태자》라고 하였다.

경순왕의 귀순을 간청하는 편지를 받아본 왕건은 무등 기뻤다.

(신라를 평화적으로 통일할 날이 기어이 왔구나. 피를 흘리지 않고 겨레를 합치는것이 얼마나 좋으냐.)

왕건은 곧 신하를 경주에 파견하여 신라왕의 요청에 동의한다는 뜻을 알리였다.

11월초 어느날이였다. 경순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송도를 향해 먼길을 떠나게 되였다. 향나무로 꾸민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리에 뻗쳐 길이 메였고 구경군들이 담벽처럼 늘어섰으며 연도의 고을과 마을들에서 경순왕일행을 정성껏 접대하였다.

왕건은 친히 의장병을 갖추고 교외에 나가 신라왕을 영접하였으며 대궐의 류화궁을 내여 경순왕일행을 머물게 하였다.

경순왕이 왕건에게 요청하였다. 《신라의 국력이 쇠잔하여 왕실을 보존할수 없으니 신하의 례절로써 대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왕건은 겸손하게 신라왕의 요청을 승낙하지 않았으나 신하들이 하늘에 두개의 태양이 없고 나라에는 두 임금이 없는 법이라고 우기여 마지못해 승낙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왕건은 경순왕을 정승으로 임명하여 그 직위를 태자의 우에 있게 하고 신라국을 페지하고 그 수도를 경주로 하였으며 김부의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또한 맏딸 락랑공주를 김부의 안해로 삼아 친선관계를 영원토록하는 뜻을 나타냈다.

경순왕을 따라온 대신 왕족들은 모두 엎드려 절하며 왕건에게 감사를 표시하였다.

이리하여 신라의 마지막왕인 김부는 고려의 신하로, 왕건의 사위로 되였으며 천년의 오랜 력사를 가진 신라는 력사무대에서 마침내 사라졌다.

왕건은 기쁨에 겨워 어찌할줄 몰랐다. 드디여 나라가 하나로 될 그 시각이 각일각 다가왔던것이다. 신라를 평화적으로 통합하였으니 이제 남은것은 신검의 후백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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