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수도로 된 평양​

918년 9월 왕건은 만조백관을 궁궐로 불러들였다.

《웬일일가?》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는 문제겠지. 래년에는 철원에서 도읍지를 옮긴다고 하였으니.》

신하들은 이렇게 수군거리며 왕이 정사를 보는 포정전으로 모여들었다.

이윽고 신하들이 모이자 왕건은 입을 열었다.

《평양은 고구려의 옛수도로서 황페화된지 오랬으나 아직 그터는 남아있다. 잡초들이 무성하여 녀진인들이 수렵을 하고 변방에 침노하여 그 화가 매우 크다. 마땅히 주민들을 이주시켜 변방을 강화하여 국가의 영원한 리익을 도모해야 하겠다.》

모임에 참가했던 대신들은 깜짝 놀랐다. 나라가 선지 석달밖에 안되여 해야 할 일이 태산같은데 평양을 강화할데 대한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급선무같지는 않았다.

《소신이 한가지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송악으로 도읍지를 옮기는 문제도 실현되지 못하였고 국토통합의 대업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평양에 민호를 옮기는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시기상조임을 아뢰나이다.》

왕건은 그 말을 듣고 부드러운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짐이 경의 뜻하는바를 생각못해본바는 아니요. 국토를 통합못했기에 평양의 경략이 필요한것이요. 2년전에 나라를 세운 거란이 급속히 세력을 남으로 뻗치고있는데 만일 발해가 그들에게 망하는 날이면 그 동란의 파도는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밀려올 판이니 어떻게 그 세력을 멈춰세우겠소. 미리 북방경략의 정치군사적거점을 마련해놓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는 국토통일도 못하고 고구려의 옛땅을 수복하는 사업도 못하게 되오. 평양은 바로 이러한 거점으로 우리에게 사활적리해관계를 가지는것이요.》

여러 신하들은 임금의 멀리 내다보는 심원한 궁냥에 깊이 경복하였다.

이어 조정에서는 평양을 대도호부로 승격시키고 황주, 봉산, 연백 등지의 주민들을 평양으로 이주시켰으며 왕건은 사촌동생 왕식렴과 광평시랑 렬평으로 하여금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지키게 하였다.

919년에는 평양성을 수축하였고 920년이후 왕건은 자주 평양을 순찰하였다. 921년부터는 평양을 서쪽지방의 수도라는 뜻에서 서경이라고 불렀다.

왕건이 서경을 더욱 충실히 하고저 군현의 주민들을 서경으로 이사시키고 또 거기에 자주 가서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배치하자 말하기 좋아하는 신하들이 또 들고일어났다.

《견훤의 후백제와의 격렬한 대결이 예상되는데 북방에 힘을 넣는것은 아무리해도 타당치 않은것으로 생각되오이다.》

《근자에 서경을 복구하고 백성들을 옮기여 거기를 충실히 한것은 그 지방 력량에 의거하여 나라를 통일하고 장차 그곳에 수도를 정하려고 하는것이다.》 왕건은 장차 서경을 수도로 삼으려는 뜻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자 신하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켰으나 그 주민의 저항을 억누르는데 골몰한 형편이니 압록강을 건너 세력을 남으로 뻗친다는것은 믿기 어려운줄로 아뢰오.》

왕건은 문신배들의 머리통은 아녀자들의 궁냥보다도 작단 말이냐라고 생각하면서도 또다시 알아듣게 타일렀다.

《옛말에도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는것을 믿지 말고 침략을 막기에 준비되여있음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더냐. 우리가 준비되지 않았다는것을 알고나면 반드시 거란이 쳐들어올것이니 후백제와 거란을 남쪽과 북쪽에서 대적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승산을 얻기가 어려운 노릇이 아니겠느냐.》

신하들은 왕건의 멀리 내다보는 식견에 다시한번 탄복하였다.

943년 왕건은 그 자손들에게 남긴 유언 《10훈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 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는 곳이고 대업만대의 땅이므로 마땅히 해마다 이곳에 와서 100일을 머물러있어야 나라가 편안하다.》

이로써도 태조 왕건이 서경을 얼마나 중시했으며 그것을 꾸리는데 노력하였는가를 알수 있다.

왕건의 유언은 그 후손들에 의하여 대체로 지켜졌다.

945년 9월 혜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왕건의 둘째 아들 정종은 947년에 서경에 왕이 있게 되는 성이라는 뜻에서 왕성을 쌓았고 수도를 서경으로 옮길것을 결심하였다.

그러자 개경에 사는 개국공신계렬의 장수와 대신들이 맹렬히 반대하였다.

《안되오, 개경은 태조 왕건이 정해준 도읍지인데 부왕이 붕어하신지 5년이 못되여 갑자기 수도를 옮긴다는것은 그릇된 처사라고 아뢰나이다.》

《천도의 시기로 보아도 불가하다고 아뢰오. 거란군이 쳐들어온다고 하여 광군사를 내오고 수십만 군정을 징집하였는데 또 천도공사를 벌리는것은 나라를 소란스럽게 하는 그릇된 처사라고 생각되나이다.》

임금이 둘러보니 개경에 뿌리를 내린지 오랜 장사들이 동감하는 눈치이다.

(서경으로 천도를 하면 자기의 세력지반이 없어질가보아 찬동하지 않는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외척 왕규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왕식렴의 립장은 달랐다.

그는 서경에 진주해있은지 20여년이요. 서경출신병사들을 이끌고와서 왕규의 반란을 진압한터이므로 발언권이 강하였다.

《장차 서경을 도읍으로 한다는것은 태조의 뜻이므로 태조의 유훈에 어긋날것은 없고 개경의 장사들은 자기의 권력지반이 약화될가보아 반대하는것인데 일단 단군조선, 고구려의 옛수도에 도읍을 정하고 볼말이면 강대하던 옛국가들의 위력을 시위할수 있는것이며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강토를 넓혀나가는데 도움이 될줄 아뢰오.》

왕은 왕식렴의 주장을 받아들이여 천도를 결재하고 평양에 왕궁을 건설하는 공사를 크게 벌리였다. 이 공사는 국가적인 큰 공사였으므로 최고관리인 시중 전직에게 책임지웠다.

장차 수도를 서경으로 옮기게 되면 개경사람들이 많이 와서 살게 될것이므로 개성에서 주민들을 뽑아 이곳으로 이주시키였다.

그러나 949년 거의 같은 시기에 왕식렴과 정종이 사망한것을 계기로 왕궁건설공사는 중단되고 천도계획이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서경은 여전히 고려의 제2수도로서 중요시되였고 력대 왕들이 순수하는 곳으로 되였다.

고려는 960년에 개경을 황제의 수도라는 뜻에서 황도라고 고치면서 서경은 서쪽의 수도라는 의미에서 서도라고 고쳐부르게 되였다.

고려는 거란이 쳐들어오기 수십년전에 이미 평양을 제2수도답게 정치군사적으로 튼튼히 꾸려놓았다.

나라의 서북쪽에 이러한 정치군사적거점이 마련되여있었기에 청천강을 넘어 북쪽으로 령토를 확대하고 축성사업을 다그칠수 있었고 배후의 안전을 믿음직하게 보장하는 거점이 있었기에 고려는 후백제와의 자웅을 겨루는 싸움을 성과적으로 진행하면서 국토통일을 다그쳐나갈수 있었다.

왕건은 예견성있게 평양을 건설하고 정치군사적으로 강화한것으로 보아 선견지명이 있는 임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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