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임금 대인선​

926년 초가을의 어느날 밤.

가고있었다. 가고싶지 않은 길을 마지 못해 끌려가듯 몹시도 삐거덕거리며.

힘겨웁게 굴러가는 수레를 끌고있는 락타도 지친듯 걸음이 더디였다. 마치 무슨 고기덩어리가 그리도 무겁느냐고 힐책하듯 이따금 긴목을 수레쪽으로 휘둘렀다.

수레안에는 비대한 사나이가 처진 볼을 가슴우에 드리운채 조을고있었다.

그의 이름은 대인선, 발해의 마지막임금.

상경의 주작대가를 메우며 위세좋게 달리던 금은주옥으로 장식된 거가는 어디에 두고 그는 지금 풍을 친 자그마한 수레우에 몸을 싣고 황량한 들판으로 정처없이 가고 또 가는가.

10세기에 들어서면서 발해와 린접한 나라들의 정치정세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남쪽 겨레의 나라 후기신라에서는 9세기말 대농민전쟁의 동란속에서 후삼국이 분립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892년에 량길농민군에 가담하여 자기의 정치적목적달성의 첫 걸음마를 뗀 애꾸눈이 궁예는 옛 고구려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901년에 《고려》라는 나라를 세웠다. 904년에는 나라이름을 《마진》으로 고치고 후에는 태봉이라고 불렀다. 한편 옛 백제지역에서는 정지적야심가인 견훤이 《백제》라는 나라를 세웠다. 그리하여 후기신라, 태봉, 후백제가 병립하는 후삼국시대가 펼쳐지게 되였다.

중국본토에서도 9세기말 대농민전쟁의 불길이 세자게 타번졌다. 정지적야심가들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칠리 없었다. 황소봉기군의 군장이였던 주온은 당나라에 투항하여 변주자사, 선무절도사를 제수받고 진종건, 손유, 주선, 주근, 시박 등 번진세력들과 부단히 쟁탈전을 벌려 자기의 세력범위를 넓혀나갔다. 903년 리무정을 격파하고 환관들을 제거하였으며 소종을 제마음대로 롱락하게까지 되였다. 905년에 이르러서는 《독안룡》 리극용(856~908 한눈이 실명당한것으로 하여 《독안룡》이라고 불리움)이 공제하는 하동지구를 제외하고는 중원의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게 되였다.

당시 발해의 가장 위험한 세력으로 등장한것은 거란이였다.

거란침략자들은 린접한 나라들에 조성된 정세를 리용하여 대대적인 령토팽창을 감행하고있었다. 901년에 실위와 우궐, 해를 공략하고 그 주민들을 략탈하여 끌어갔으며 902년에는 40만의 군사로 당나라의 하동지구를 치고 9개 군을 항복시킴으로써 9만 5천의 호구와 많은 군마, 소, 양들을 략취하였다. 903년에는 녀진을 치고 다시 하동, 회원 등 군을 쳤다.

해마다 계속된 략탈적인 공격작전으로 거란의 령토는 넓어지고 부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어수선한 정세하에서 906년에 대인선이 마지막 발해의 왕좌에 올랐다.

거의 같은 시기인 907년에 주온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세웠다.

거란에서도 흔덕근극한이 죽고 군사가로서 두각을 나타낸 야심가 야률아보기가 907년에 왕좌에 올랐다.

극도의 불안감이 대인선을 휘감았다.

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야률아보기는 발해에 대한 침공의 도수를 높이기 시작했다.

엎친데덮친격으로 발해북쪽의 흑수말갈까지 소란을 피웠다. 그들의 한 무리는 이미 그전에 남하하여 신라와의 접경지역에까지 내려갔다.

대인선은 동족의 나라들에 구원의 손길을 뻗쳤다. 고려와 혼인관계를 맺고 신라와도 친선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고려는 아직 청소한 나라였고(고려는 개성출신 장군이였던 왕건에 의하여 918년에 태봉국왕 궁예를 몰아내고 세워진 나라이다. 건국후 곧 발해와 혼인관계를 맺었다고 보인다.) 국토통일을 위한 전쟁에 주력하고있는 형편에서 발해를 적극 지원해줄수 없었다. 신라는 고려와 후백제의 틈에 끼워 겨우 잔명을 유지해가고있었다.

대인선은 당나라가 멸망한 후에 선 후량(907~923), 후당(923~936)과 같은 나라들에는 물론 지어 거란에까지 사신을 보내여 외교적방법으로 나라에 닥쳐온 위기를 해소해보려고 하였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세는 더욱더 발해에 불리해졌다. 거란의 침략이 일층 강화되고 흑수가 발해에서 떨어져나와 단독으로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료양일대를 방어하고있던 발해의 애국적장병들은 거란이 료주일대에 대규모병력을 집결시키고있는 조건에서 선손을 써서 놈들의 침략기도를 분쇄하였다. 924년 5월 발해군은 거란이 설치한 료주에 대한 강력한 타격전을 전개하여 자사 장수실을 잡아죽이고 놈들에게 끌리워갔던 백성들을 되찾아왔다.

야률아보기는 대신 야률탁진의 권고로 서쪽의 해족 여러 부에 대한 원정을 떠나면서 한편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다.

거란침략군은 924년 7월부터 9월까지 근 석달동안 검질긴 공격을 하였으나 발해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아무런 전과도 없이 퇴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925년 4월 원정에서 돌아온 야률아보기는 부하들로부터 그 소식을 듣고 발해를 멸망시키기 위한 군사적준비에 총력을 기울였다.

바로 침략의 검은 구름이 시시각각으로 밀려들고있을 때 발해의 정국은 큰 혼란에 빠져있었다. 통치배들사이에 정권쟁탈전이 격화되고 저마끔 자파세력확장에 날뛰였으며 이를 기회로 여러 세력의 우두머리들은 할거기운을 농후하게 드러내면서 조정과 엇서나갔다. 이러한 행위들로 하여 결국 나라의 통수체계는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였다.

무능한 대인선에게는 혼란된 정국을 휘여잡을만 한 그 어떠한 방책도 정치적결단성도 없었다.

신라 등 여러 나라들에 사신을 파견하여 지원이나 요청하는것이 고작이였고 그것도 불가능해지자 모든것을 포기한듯 부화타락한 생활에 더욱더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옛 문헌에 의하면 발해의 민심이 뒤숭숭하고 봉건적통치질서에 크게 금이 간 기회를 리용하였기때문에 거란이 발해를 쉽게 정복할수 있었다고 전하고있다.

925년 12월 16일 아보기는 모략에 능한 황후, 군사에 능한 태자 돌욕, 용맹하다고 하는 둘째아들 요골(후의 태종), 동생들인 안단, 소 그리고 장수들인 야률사녈적, 야률해리, 강묵기, 조사온 등을 대동하고 수십만의 정예기병을 발해침략에로 내몰았다.

발해서변의 여러 성, 진의 애국적장병들은 거란침략군에 타격을 안기면서 영용하게 싸웠다. 그러나 수적으로 엄청나게 우세한 적들의 공격을 막아낼수 없었다. 거란군은 진군을 계속하여 부여성에 이르렀다. 어둠이 깃들자 거란의 대군은 부여성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발해서변의 강력한 요새인 부여성은 외부의 그 어떤 원조도 기대할수 없는 속에서 거란의 대병과 힘겨운 싸움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활시위가 쉼없이 울고 창과 칼의 맞부딪치는 아츠러운 소리가 련사흘 그칠사이없었다.

적들은 주검으로 더미를 쌓으면서도 그것을 타고넘어 계속 공격하여왔다.

거란군의 맹장이라고 자처하던 조사온도 발해군사에 의해 여러군데 창을 맞고 싸움터에서 물러났다. 떨어진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려고 아보기는 제가 직접 약을 제제하여 조사온을 치료해주는 추태까지 부렸다.

부여성의 애국적장병들은 한사람같이 일떠나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끝내 성은 함락되고 마지막까지 항전을 이끌던 지휘자도 피살되고말았다.

비록 부여성은 함락되였으나 그들의 투쟁은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아보기는 발해를 정복하려던 초기의 목적과는 달리 부여성의 호구나 《모아》가지고(아마 략탈해가려고 하였을것이다.) 돌아가려 하였다. 이것은 그가 자기의 패배를 인정한것이였다.

그런데 발해의 정치정세를 예리하게 주시하고있던 황태자 돌욕은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이때를 타서 파죽지세로 지름길을 따라 공격하면 능히 발해를 멸망시킬수 있다고 제기하였다.

그 의견을 옳게 여긴 야률아보기는 동생 인저석과 야률적렬을 남겨 부여성을 지키게 하고 자기는 군사를 거느리고 계속 홀한성(상경룡천부성)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적들은 교통요충지들에 배치된 발해성들과의 교전을 피하면서 지름길로 곧추 수도성을 향해 쳐들어왔다. 이것은 거란침략군의 상투적인 침략수법이였다. 주요 병종이 기병이였던 거란군은 좋은 기동력을 리용하여 해당 나라의 수도를 일거에 점령하고 그 임금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아내는 전술을 많이 썼던것이다.

발해군은 적들에 대한 추격전을 벌렸다. 아보기는 척은 안단과 전 북부재상 소아고지 등을 선봉으로 하여 1만의 기병으로 먼저 홀한성에 진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주력을 거느리고 후위를 맡았다.

거란선봉부대는 부여성에서 떠나 근 한주일만에 홀한하에 이르렀으며 강을 사이에 두고 로상이 거느리고 나온 3만의 발해군과 맞다들게 되였다. 그때 발해군은 수적으로 우세하였으나 급작스레 징발하였으므로 훈련이 부족하고 장비가 불충분하였으며 지휘관들 또한 비겁하고 무능하였다.

발해군의 약점을 포착한 거란선봉군의 장수들은 아고지가 거느린 정예기병 500명을 앞선에 세우고 일제히 공격에로 넘어갔다.

로상을 비롯한 발해군의 장수들은 얼마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버렸으며 옳은 지휘를 받지 못한 발해군은 흩어지고말았다.

거란선봉군은 뒤미처 당도한 태자 돌욕, 둘째아들 요골, 남부재상 소, 북원이리근 사널적, 남원이리근 질리 등이 거느린 후원군과 함께 밤에 홀한성을 포위하였다.

얼마후 아보기가 거느린 주력도 당도하여 합류하였다.

닷새동안 발해수성군과 거란침략군사이에는 치렬한 공방전이 계속되였다.

대인선을 비롯한 부패무능한 발해통치배들은 인민들의 투쟁기세에 의거하여 항전을 지휘할 대신 일신의 안전을 위해 거란군에 투항하려고 하였다.

눈물을 뿌리며 앞을 가로막는 홀한성의 군민들을 밀어제끼고 대인선은 끝내 백관 300여명을 거느리고 나와 거란군에 항복하고말았다.

야률아보기는 발해군민들의 감정을 고려하여 그를 우대해주고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엿새되는 날에 근시 강말단 등 13명을 성에 들여보내여 병기고를 수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순라하던 발해군사들에게 붙잡혀 죽고말았다.

성안의 군민들은 대인선에게 다시 반기를 들것을 청원하였다.

군민들의 애국적투쟁기세에 위압되여 대인선은 다시 반기를 들었다.

아보기는 거란군에 홀한성을 공격하여 점령할것을 명령하였다.

아침부터 적들은 발악적으로 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북치고 고함지르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치렬한 공방전이 계속되였다.

성안의 군민들은 한마음이 되여 결사전을 벌렸다.

그런데 비겁한 대인선은 적들이 성안에 기여들자 인민들의 애국적열의에 찬물을 끼얹으며 또다시 거란군에 투항해버리고말았다.

아보기는 자기의 시위군사들에게 대인선과 그의 일가족속들을 끌어내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2백수십년간의 력사를 자랑하던 해동성국 발해는 926년에 멸망하고말았다.

아보기는 발해땅에 《동단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세우고 그 왕으로 태자인 야률배(돌욕)를 임명하였으며 자기의 동생 질라를 좌대상으로, 투항한 발해 로상을 우대상으로, 발해사도 대소현을 좌차상으로, 야률우지를 우차상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놈들이 투항한 발해관료들을 동단국의 관리로 임명한것은 발해사람들에게 일정한 환상을 조성하여 그들의 투쟁기세를 무마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망국의 비운을 그대로 감수할수 없어 발해의 군민들은 도처에서 반거란투쟁에 궐기하였다. 926년 3월에는 안변, 막힐, 정리 등 여러 부의 군민들이 일떠섰다.

발해군민들의 투쟁에 겁을 집어먹고 많은 사상자를 낸 거란군은 서쪽으로 철수하고 일부 병력만 홀한성수비를 위하여 남겨두었다.

대인선은 철수하는 거란군과 동행하게 되였다.

발해유민들은 이에 머무르지 않고 투쟁을 계속 확대해나갔다.

926년 5월에 남해부, 정리부의 군민들이, 7월에는 자사 위균의 지휘하에 철주의 군민들이 반거란항전을 전개하였다.

야률아보기는 그들의 투쟁을 진압하도록 하는 한편 대인선과 그의 일족을 속히 거란의 황도로 보내게 하였다.…

삐걱거리며 무던히도 힘들게 굴러가던 수레바퀴가 조약돌을 타고넘으며 수레를 들추는바람에 대인선은 훔칫 놀라며 악몽에서 깨여났다.

가련한 저의 몰골을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화려했던 상경의 류리궁전, 울긋불긋 비단휘장들이 드리우고 등촉이 환한 사이로 연지곤지 붉고푸른 궁녀들에게 이끌려 거나하게 취하여 침전으로 가던 일, 산해진미 그득한 연회장에서 궁녀들의 권주가와 뭇신하들의 태평성가속에 지내던 나날들과 《페하 만세》를 목터지라 웨쳐대는 백관들의 비굴한 모양속에 웅위롭던 틀거지… 모든것을 제 마음대로 할수 있었던 지나간 그 나날들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그날은 어디 가고 눈물의 이 길만을 하염없이 가느냐.

황공무지를 말끝마다 떠벌이던 《고굉지신》들은 어디에 숨어버리고 낯짝에 양의 피를 게바르고 피와 땀내에 절은 가죽옷을 걸치고 이새로 피방울만 내튕기는 추악한 무리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있단 말인가. 거룩한 천손의 말로가 이것이란 말인가.

그는 며칠전 자기를 버리고 달아나던 시종과 다투던 그밤이 생각났다.

(그 종놈은 거란의 임금앞에 스스로 종의 몰골을 하고 투항한 나 대인선과 자기의 처지가 다른바가 무엇이냐고 시까슬렀지…)

《이보시오 어른, 말씀을 낮추시오. 종이 큰소리로 고아대는것을 본적이 있소이까. 항차 여기야 발해지경도 아니요, 거란의 황도 서루아근이 아니웨까. 남의 궁전에 종으로 호적을 올렸으면 공손해얍지요.》

그때 대인선은 억이 막혀 반박은 못하고 턱만 덜덜 떨었다.

종은 준렬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예까지 끌려오면서 많은것을 생각했소이다. 한평생 종으로 사는 처지에 고국인들 어떻고 외지인들 어떠랴.

그러나 갈수록 더해지는것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였소이다. 비록 군마에 짓밟히고 무지한 불장난에 해동성국의 거취는 간데 없고 페허우에 재만 흩날려도 소인의 태가 묻힌 땅, 조상의 무덤이 있고 초동시절 소꿉동무들의 장한 기개가 배회하는 땅, 그 땅에서 살고싶소이다.

이놈이 즐겨 읊던 시 한수가 있사오니 들어주소서. 일본에 사신갔던 왕사두의 시올시다. <남풍부는 바다길 돌아갈 생각 재촉하고 북에서 오는 기러기떼 나그네의 정을 이끄네.>

나도 가고싶소이다. 기러기는 남으로, 이 몸은 고향에, 고향에!》

《짓밟힌 고국에 간들 무엇하랴.》

《가서 싸우겠소이다. 지금 온 발해땅이 벌둥지 쑤셔놓은것 같다고 하옵니다. 동궁전하께서 거란놈들을 계속 족치고 왕제께옵서 대군을 거느리고 홀한성수복전을 벌리고있다 하옵니다.

이 몸도 더러운 놈들의 노예로 사느니 발해의 사내답게 애국에 한몸 던지여 죽기를 원하오이다.

잘 가시오이다. 소인은 고국으로 가오이다.》

모두가 그를 버렸다. 지어 한평생 머저리취급을 당하던 종들마저 그를 버리고 줄지어 달아나버린다.

나라를 팔아 구한 일신의 안전과 영달의 대가가 바로 버림이란 말인가.

온 민족의 버림을 받아 비록 개, 돼지가 될지언정 주인의 피묻은 장화를 핥아주는 노복이 될지언정 살고싶었다.

승산없는 싸움에 고국수복이요 뭐요 하다가 머리없는 귀신이 되기보다는 지옥에 가더라도 온전한 귀신이 되여 가고싶었다.

덜컹거리며 힘겹게 굴러가는 수레우에 몸을 싣고 대인선은 거란의 수도 황도를 향해 지옥에로의 길을 가고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발해가 멸망하고 그 임금 대인선이 거란에 끌려가게 되였다는 소식에 접한 고려의 임금 왕건은 몹시 서글퍼하면서 그를 구원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왕건은 고려와 발해는 혼인관계에 있는 친척의 나라라고 하면서 발해의 멸망에 대하여 애석해하고 강점자 거란침략자들에 대해 극도의 증오를 퍼부었으며 대인선을 어떻게 하면 구원해내겠는가에 대하여 몹시 신경을 썼다고 한다. 당시 고려는 청소한 나라인데다가 후삼국을 하나로 합치기 위한 전역에 고전하고있는 형편에서 혼자의 힘으로서는 강대한 적인 거란과 정면충돌할수 없었다. 그리하여 왕건은 서역의 중인 멸라라는자를 내세워 역시 거란의 위협을 받고있던 중국의 여러 나라들과 련합하여 대인선구출작전을 벌리려고 하였던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계획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실현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야률아보기는 대인선일행이 당도하자 황도 서쪽에 성을 쌓고 대인선의 족속들이 거주하게 하였다. 말이 성이지 하나의 커다란 감옥이였다.

아보기는 또한 대인선과 그의 처에게서 발해의 성과 이름을 빼앗고 각각 오로고, 아리지라는 거란의 성과 이름을 주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발해의 마지막임금 대인선은 민족사에서 영원히 제거되고 거란인의 력사속에 사라져가게 되였다.

력사는 너절한 목숨을 부지하려고 넋을 판자들의 운명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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