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국과 오사성발해국

옛 발해국이 멸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땅에는 정안국과 오사성발해국이라는 명칭을 가진 두 계승국이 병립하여 거란강점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줄기차게 벌렸다.

이제 여기서 파란만장의 세월속에 잔존한 력사의 토막토막을 재조명하여 칭칭 휘감은 노예의 사슬을 끊어버리려고 모지름을 쓰며 항거하던 인간들의 불굴의 모습을 재현하여보기로 하자.

때는 10세기중엽이후.

이야기는 정안국과 오사성발해국이 자리잡고있던 옛 발해국의 서쪽지역(장령부와 압록부 등)과 중서부(상경룡천부, 막힐부, 동경부 등)지역을 무대로 하여 펼쳐진다.

타오르는 봉화가 밝혀주는 불빛으로 환해진 오사성(일명 올야성),

잠에서 깨여난 사람들이 밖에 몰려나와 의문과 분노가 실린 눈길들을 봉수대의 불길에 모으고있었다.

날이 밝자 오사성발해국의 왕성에서는 국경을 침범하고 략탈행위를 자행하고있던 철리를 징벌하기 위한 대책이 론의되였다.

철리는 옛 발해때 철리부의 관할통제밑에 있었다. 그러던것이 발해가 멸망하자 제일먼저 떨어져나가 새로운 주인인 거란의 턱밑에 붙어 아부하였다. 그후 거란의 철저한 앞잡이가 되여 발해수복을 위하여 투쟁하는 그 유민들의 앞길을 음으로양으로 가로막아나서고있었다.

《용서할수 없다. 국경의 안전을 위해서도 옛 발해땅을 되찾기 위해서도 원정군을 보내야 한다.》

오사성발해국 상층의 의견은 이렇게 합치되였다.

활활 타오르는 봉화로 가슴속 애국의 불길을 지피던 사람들, 어유등잔을 돋구며 밤새워 활시위를 조이고 장검의 날을 벼리던 사람들이 다투어 정의의 원정에 뛰여들었다.

오사성발해국의 강력한 타격앞에 질겁한 철리의 통치배들은 항복서를 바쳤다.

그리하여 954년경부터 40여년간 철리는 오사성발해국의 일부분으로 되였다.

정안국의 활동과 관련하여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것은 송(북송)과의 군사적제휴를 목적으로 진행된 서신거래자료들이다.

970년에 정안국의 왕이였던 렬만화는 녀진사신들이 송나라에 가는 편에 편지를 보내였다.

렬만화는 편지에서 두 나라가 서로 래왕하며 물자교역도 진행하자고 하였다. 이 제의는 장차 중국땅에서 새로운 통일세력으로 등장한 북송(960~1127)과의 련계를 긴밀히 함으로써 그를 통하여 거란침략세력을 견제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보아진다.

정안국과 오사성발해국 통치자들의 최대의 관심은 옛 발해국때 서변의 강력한 요새였던 부여부일대를 장악하는데 있었다.

거란 역시 옛 발해땅에 다시 일떠선 그의 계승국들을 견제하는데서 부여부(거란이 황룡부로 개칭하였다.)의 위치를 중시하고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발해측으로서는 부여부에 대한 정면공격은 무모한짓이였다.

발해측에서는 성안에 있는 발해출신 군장들의 반거란감정을 리용하는데 관심을 돌렸다.

975년 7월 부여성의 발해출신 위장 연파는 자기의 동료들을 규합하여 도감 장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거란통치배들은 즉시 야률하로불(야률갈리필이라고도 하였다.)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토벌》군을 급파하였다.

연파와 그의 반란세력은 적들의 대규모적인 《토벌》에 대처하여 주동적으로 철수하였다.

량측은 압록강(기록에는 치하라고 한곳도 있다.)에서 한차례의 큰 전투를 벌리였다.

연파가 거느린 발해유민세력은 배수진을 치고 죽기로 거란군과 싸웠으며 거란 강점자들에게 커다란 손실을 안겨주었다.

거란측기록에 의하면 《압록강싸움》때 거란군총지휘관 야률하로불이 직접 추격하지 않음으로써 회군하여 곤장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력사의 진실이 아니다. 그의 죄는 싸움에서 큰 손실을 낸것이며 그것으로 하여 응당한 벌을 받았던것이다.

싸움에서 승리한 연파의 반란세력은 강을 도하하여 오사성발해국으로 향하였다. 혼쌀이 난 야률하로불은 동생인 야률안박을 시켜 형식상의 《추격》을 하게 하였다.

오사성발해국의 올야성에 들어간 연파의 세력은 성안의 군민들과 함께 추격하는 놈들에게 타격을 주었다.

마지 못해 뒤쫓아오던 야률안박은 겁에 질려 거란군에 퇴군명령을 내리고 뺑소니쳤다.

정안국과 오사성발해국측에서는 거란상층의 불평분자들을 사촉하여 그 내부를 분렬리간시키기 위한 사업들도 벌렸다.

기록에는 《진가가 발해관속들과 음모하여 그 아버지를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반변하였다.》라고 전하고있다.

진가라는자는 할아버지가 료나라 태조 야률아보기의 맏아들인 야률배이고 할머니는 발해왕실의 딸인 대씨로서 발해사람의 피도 가지고있는자였다.

그는 자기의 사촌형인 경종(세종의 둘째아들)이 대권을 쥐고있는데 몹시 불만을 품고 앙앙불락하고있었다.

발해측이 노린것은 바로 이 점이였다. 그들은 진가와 함께 일하는 발해인 관속들을 통하여 진가와 련계를 맺었으며 그를 도와줄것을 맹약하고 반란에로 부추겼던것이다.

하지만 9월에 반란은 진압당하고 진가는 체포되여 처형당하였다.

성공과 실패가 엇바뀌는 속에 정안국과 오사성발해국사이에는 불미스러운 일들이 벌어졌다.

서로 자기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더 많은 지역과 주민을 차지하고 발해유민들의 고국수복항전에서 주도권을 쥐려던 두 발해계승국의 기도가 대립을 낳고 나중에는 충돌을 야기시켰던것이다.

정안국과 오사성발해국이 노린것은 부여부에 대한 통제권이였다.

부여부는 고구려와 한갈래인 부여의 후손임을 강조하군 하던 발해왕족의 조상의 땅, 유서깊은 곳이였다.

부여부는 거란과 잇닿아있던 옛 발해국서변의 군사중진으로서 특별히 힘을 넣어 꾸린 곳이였다. 거란이 발해를 침략할 때에도 처음으로 공격의 예봉을 돌린 곳이 바로 부여부였던것이다.

부여부가 거란침략자들에 의해 강점당한 후 발해유민들은 그것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줄기차게 벌렸다. 특히 975년 발해출신 군장 연파의 반란후 거란측은 부여부를 포기해버리고말았다.

정안국과 오사성발해국사이에는 거란이 포기한 부여성에 대한 소유권을 둘러싸고 여러차례 충돌이 일어났다.

《이제 그 무엇을 기대할수 있겠는가?》

실망감에 머리젓는 사람들,

배신감에 침을 뱉고 돌아서는 사람들,

고국수복의 큰 뜻을 품고 따라나섰건만, 목숨도 초개와 같이 바치며 대를 이어 성스런 제단에 희생이 되였었건만.

《어리석었다. 속았다!》

권력욕에 넋빠진자들, 세력권쟁탈에 미친자들에게 그 무슨 기대를 걸고 따라나선것부터가 잘못이였다. 힘을 하나로 하여 구적 거란강점자들과 싸울념을 하지 않고 자파세력확장에만 광분하는 위정자들을 따라다니며 얻을것은 없고 헛되이 잃는것뿐이다.

《모여라, 정안국의 군민이여, 오너라, 오사성발해국의 형제들이여.》

환멸감에 사로잡힌 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두고가는 고국산천에 피눈물을 뿌려가며 너도나도 하직인사를 올렸다. 엄마의 등에 업힌 아기들조차 무엇이 서러운지 누구를 타매하는지 무엇을 말못해서인지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우는 아기 달래며 발버둥치는 아이들을 잡아끌며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며 수만명의 군중은 남쪽으로 향해갔다.

우리가 살길은 하나이다. 고구려, 발해의 넋을 이어 강한 나라, 통일된 힘으로 위용떨치는 나라, 그 품에 안길 때만이 우리의 삶이 있다.

《가자, 형제여, 고려로 가자!》

옛 기록에 의하면 979년 한해동안에 고려로 이주해간 발해유민수는 다해서 수만명에 이른다고 하였다.

발해유민 수만명의 고려에로의 이주, 이것은 결국 두 발해계승국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하였다.

하지만 정안국과 오사성발해국의 통치자들은 응당한 교훈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세력권쟁탈을 계속하였다. 981년말에 부여부가 정안국에 넘어가는것으로 쟁탈전의 막은 일단 내려졌다.

정안국은 송나라와의 군사적제휴에 기대를 걸고 981년에 또다시 왕자의 명의로 녀진사신이 가는 편에 편지를 보내였다.

두 나라는 서로 힘을 합쳐 거란에 공동대처하자고 약속하였지만 그것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미 앞서 진행된 여러 전투들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은 송나라는 거란에 대해 매우 두려워하고있었으며 발해유민세력들을 내세워 먼저 맥을 뽑게 한 다음에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하면서 적극성을 보여주지 않았던것이다.

송나라의 이러한 립장은 994년에 오사성발해국에 협공을 제기하고도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벌리지 않은데서도 찾아볼수 있다.

발해유민세력들은 나약한 송나라에 더는 기대를 걸지 않고 거란을 반대하는 주동적인 공격작전들을 단행하였다.

오사성발해국의 오소도와 연파 등은 995년에 또다시 발해에서 떨어져나가 거란에 가붙은 철리를 공격하였다.

거란통치배들은 해왕 화삭노, 부마도위 소항덕(자 손녕) 등에게 명령하여 오사성발해국을 《토벌》하게 하였다.

올야성군민들의 투쟁기세가 높은데 질겁한 《토벌》군 장수들은 부대를 철리의 한 지역에 주둔시키고 여러달동안 준비를 갖춘 후에야 진공하였다. 그 기간 성안에서도 만단의 수비대책을 강구하였다.

적들의 방대한 《토벌》력량이 당도하자 어지간히 공포를 느낀 일부 통치배들속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그들은 몰래 거란측에 항복을 제기하였다.

일부 비겁한자들의 공포의식을 성안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오판한 화삭노와 소항덕은 성을 점령하여 포로를 략탈하려고 획책하였다. 그리하여 비겁분자들의 항복요구를 거절하고 자기의 군졸들로 하여금 사면으로 성을 에워싸고 급히 공격하게 하였다.

이것은 오히려 마음의 동요를 가졌던자들까지도 자신과 자기 가족의 명예와 존엄, 운명을 지키기 위하여 항전에 떨쳐나서지 않으면 안되게끔 하는 결과만을 초래하였다. 성안의 모든 사람들은 한마음이 되여 적들의 검질긴 공격에 맞서 싸웠다.

올야성군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 적들은 막대한 손실을 당하고 퇴각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비참한 패전상을 보고받은 거란의 임금 성종은 여러 장수들의 벼슬을 떼고 공신의 호까지 박탈하였다.

애국적군민들은 고국수복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용감히 일떠나 싸웠으나 통치배들은 계속되는 권력다툼으로 그 성과를 말아먹었다.

오사성발해국안에서 분렬이 일어나 997년 그의 한 군장이였던 무주가 거란에 항복하였고 999년에는 실권자였던 오소경이 항복하였는데 거란측은 발해유민들의 반료감정을 무마하기 위하여 그를 놓아보내게 하였다.

그후 오소경은 다시 반거란투쟁을 벌렸다.

거란강점자들의 부추김을 받은 녀진인들은 오소경의 처자를 랍치하여 거란에 바치면서 오사성발해국의 내부를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995년에 오사성발해국의 타격을 받고 기가 죽었던 철리까지 다시 부활되여 배후를 위협하였다.

철리족의 두령 나사는 1012년에 오사성발해국의 주민 100여호를 랍치하여 거란에 바치고 상으로 비단을 받았으며 1022년에도 16호를 사로잡아 거란에 보내였다.

오사성발해국만이 아니라 정안국도 시련을 겪고있었다.

거란강점자들의 검질긴 침략과 녀진인들의 부단한 랍치 및 략탈행위들, 그러한 속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통치배들사이의 추악한 권력쟁탈전은 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키고 통수체계를 마비시켰다.

1018년에 들어서면서 정안국에 대한 거란의 침략이 더욱 본격화되였다.

생사기로에 처한 나라를 건져보려고 안깐힘을 썼으나 이미 약해질대로 약해진 국력으로는 어쩌는수가 없었다.

정안국의 통치자들은 급히 동족의 나라인 고려에 골수를 파견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오사성발해국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자기의 주권적지위를 유지하면서 12세기초까지 항전을 계속하였다.

10세기 발해유민들의 반거란투쟁을 빛나게 장식한 정안국과 오사성발해국의 투쟁은 승리는 오직 단결에 있다는 심각한 교훈을 주고있다.

그때 만약 정안국과 오사성발해국이 서로 힘을 합쳐 단합된 력량으로 거란과 맞섰더라면 력사는 달리 흘렀을수도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자기의 정통성만을 내세우며 지어 다툼질로 수만명의 군중을 잃는 결과까지 초래하였다.

비극적운명으로 슬프고 교훈적내용으로 생각깊어지는 이야기는 여기서 막을 내린다.

매 손가락으로 두드리느니 차라리 주먹으로 한번 쳐라!

facebook로 보내기
twitter로 보내기
cyworld
Reddit로 보내기
linkedin로 보내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