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적항전의 조직자적역할을 한 흥료국

발해유민들의 고국수복을 위한 반거란항전은 세기가 바뀔수록 그 열의가 식어져간것이 아니라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10세기에는 정안국과 오사성발해국이 발해유민들의 투쟁거점으로서 조직적항전의 주도적역할을 맡아수행하였다면 11세기에 들어와서는 흥료국이 대중적항전의 조직자적역할을 담당수행하였다.

흥료국…

어둠을 헤가르며 준마가 나는듯이 달려왔다.

복면한 중키의 사나이가 두명의 파수가 극을 쥐고 서있는 사리군상온사군막앞에서 말고삐를 챘다. 놀란 말이 뒤다리로 땅을 벋디디고 앞발을 쳐들었다.

가쁜숨을 몰아쉬는 말에서 뛰여내린 사나이가 급히 마중나온 말심부름군에게 고삐를 넘겨주고 군막으로 다가갔다. 파수들이 극을 엇가르어 제지하자 사나이는 얼굴을 가리웠던 쓰개를 벗어보였다. 그러자 이내 파수들이 극을 거두고 길을 열어주었다.

사나이는 풍을 제끼고 들어섰다.

군막안에 정좌하고있던 대여섯사람이 땀을 훔치며 들어서는 사나이를 의문이 실린 눈길로 응시하였다.

《그래, 어떻게 됐는가?》 상좌에 틀스럽게 앉아있던 우람찬 체구의 사나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갔던 일은 다 잘됐겠지?》

《장군, 한발 늦었소이다. 그자는 벌써 달아났소이다.》

우람찬 체구의 사나이가 떡메같은 주먹으로 서안을 두들기며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군막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였다.

《너절한 자식, 의리도 신의도 없는놈!

앞에서는 협력을 약속하고서는 몰래 도망을 쳐?! 가족까지 버리고, 그래 황편이는?…》

《함께 도망쳤소이다.》

《개자식!》 사나이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의 이름은 대연림.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자들은 과연 어떤자들이였는가.

대연림은 폭동을 일으키기 전에 동경의 반료세력을 규합함과 동시에 한인세력을 끌어당기기 위한 준비사업도 하였다.

황룡부의 군장으로 있던 황편이나 그를 끌고 달아난 동경부류수 왕도평은 다같이 한인으로서 거란의 종족차별대우에 대해 일정하게 불만을 품고있던자들이였다.

때문에 대연림은 그들과 친분관계를 맺고 유사시에 서로 협력할것을 약속하였던것이다.

봉기준비를 완료한 대연림은 동경통치배들에 대한 원한이 절정에 오른 기회를 타서 폭동을 일으킬것을 결심하였다.

원래 료동지방에서는 료나라(거란) 태조인 야률아보기때부터 다른 지방들에서와는 달리 소금이나 술을 국가에서 전매하는 일이 없었고 시장의 각종 세들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한인출신관료 풍연휴와 한소훈 등이 호부사가 되면서 연경(남경) 한인들이 지방에서 하는것과 꼭같이 소금, 술 등에 대하여 국가가 전매를 실시하고 또 시장의 각종 세들도 훨씬 호되게 받아내였으므로 백성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게 되였다. 또 이해에 연경지방에서 큰 기근이 있은것을 기화로 호부부사 왕가는 거란임금에게 건의하여 료동지방에서 많은 배들을 만들어 료동의 곡식을 연경으로 운반하여가도록 하였는데 그때 배길이 험하여 배들은 많이 파손되고 사람들까지 죽었다. 료동인민들은 량곡운반을 중지할것을 거듭 요청하였으나 왕가는 듣지 않고 계속 인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그것을 강제집행하였다.

더는 견딜수 없게 된 인민들은 폭동에 일어설 기세를 보였다.

옛 발해국을 수복할 웅지를 품고 동료들과 그 준비를 하여오던 대연림은 인민들의 폭동을 단지 악질관료 몇놈을 죽이는데 국한시킬것이 아니라 고국수복투쟁과 밀접히 결부시켜 더욱 확대발전시킬 면밀한 계획을 추진시켰다. 이와 함께 한인들과 녀진인들을 폭동에 인입시키기 위한 유세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대연림은 황룡부의 군장인 황편과 동경 87개 주, 현의 관리를 맡아보는 부류수로서 한인들속에 영향력이 있던 왕도평을 비밀리에 만났다.

왕도평은 동경의 민심이 이미 반료항전에로 기울어졌음을 포착하였다. 만약 거절하는 경우 비밀보장과 관련하여 자기가 어떻게 처리되리라는것을 모를리 없는 그였다. 하여 왕도평은 앞에서는 협력에 기꺼이 응하였다.

그러나 밤이 되자 왕도평은 가족들까지 내버리고 성에 바줄을 드리워 타고 내려 뺑소니를 쳤다.

대연림에게 불리워와 성밖에 대기하고있던 황편을 만난 왕도평은 그에게 반란소식을 전해주면서 함께 뛰자고 설유하였다.

황편 역시 생각이 달라져 왕도평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거란임금 성종이 가있는 흑령으로 말을 몰아갔다.

왕도평과 황편을 놓쳤다는 보고를 받은 대연림은 으스러지게 주먹을 틀어쥐였다.

이제 북쪽 황룡부의 응원을 기대할수는 없다.

거사계획도 로출되였다. 지체할수 없다.

제장들이 긴장한 눈빛으로 대연림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불타는 눈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고있었다.

때는 왔다. 헛되이 앉아 죽음을 기다리겠는가, 한평생 노예로 살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고국수복을 위한 성스러운 제단에 희생이 되겠는가.

대연림은 칼을 뽑아들었다.

제장들이 약속이나 한듯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모두 들으라, 기회는 두번다시 오지 않는다. 래일은 기축일, 거사는 래일로 앞당긴다. 제장들은 곧 자기 임지로 갈것이며 방포소리와 함께 일제히 료양성으로 진입할것이다.》

억센 기상이 차넘치는 대연림의 너부죽한 얼굴.

사기에는 대연림이 옛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의 7대손이라고 전하고있다. 그래서인지 모든데서 그를 그대로 닮은듯싶은 대연림이였다.

제장들은 그의 지휘밑에 구적 거란을 치고 대발해국을 다시 세울 결의를 가다듬으며 임지를 향해 군막을 나섰다.

1029년 8월 3일, 거란 동경도안의 발해유민들은 대연림의 지휘밑에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군은 거란의 동경류수 부마도위 소효선(자 연녕)과 그의 처인 남양공주 최팔, 그의 누이동생을 잡아가두고 호부사 한소훈, 호부부사 왕가, 사첩군도지휘사 소파득 등 악질관료들을 잡아죽이였다.

동경일대의 모든 권력을 틀어쥔 발해유민폭동군은 오래전부터 품어오던 소망대로 발해의 계승국인 흥료국을 세웠으며 그 왕으로 대연림을 내세웠다.

대연림은 년호를 《천경》으로 정하고 즉시 봉건왕국의 제반관료기구를 갖추었다.

한편 행재소에서 도망쳐온 왕도평과 황편으로부터 변란소식을 전해들은 거란왕 성종은 즉시 여러 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동경으로 진출하도록 명령하였다.

동경과 제일 가까운 곳에 있던 국구상온 소필적(오늘의 료서, 흑산현일대를 다스리고있었다.)은 본주의 군대와 가병들을 거느리고 료하도하점의 길목을 차단하였다.

적들의 료하도하점차단으로 하여 계획되였던 흥료국군의 서쪽으로의 진출은 실현불가능하게 되였다.

대연림은 각주 발해유민들의 공고한 단결과 급속한 집결을 위해 애쓰면서 보주(오늘의 조선경내 의주에 설치되였던 거란침략자들의 전초기지)에 급히 사람을 보내였다.

보주에는 발해사람 하행미가 있었는데 그는 주안의 발해군을 통솔하고있던 장수였으며 대연림과도 친교가 있었다.

사신은 하행미에게 대연림의 편지를 전달하였다.

편지에는 흥료국의 건국소식과 모든 발해사람들이 힘을 합쳐 원쑤 거란을 칠데 대한 내용이 담겨져있었다.

그러나 정복자 거란인들의 겨드랑이밑에서 오랜 기간 부귀영화에 물젖어있던 하행미는 침략자를 몰아내고 자기 나라를 되찾으려는 전체 발해유민들의 항전에 뛰여들지 않았다. 도리여 그는 대연림이 보낸 사절을 잡아 거란의 동경통군사 야률포고에게 넘기였을뿐아니라 대연림과 손을 잡고 유사시에 폭동을 일으키려고 하던 발해사람 백명을 거사하자고 꾀여내여 모두 죽여버렸다. 이것도 모자라 이자는 수백명의 발해군사들을 끌어내여 처형하였다. 이리하여 보주에서는 800명의 발해사람들이 고국수복을 위한 항전에 나서보지도 못한채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하행미는 성문을 굳게 닫고 흥료국의 진격에 대처할 준비까지 갖추어놓고 증원군을 기다렸다.

야률포고는 하행미의 보고를 받고 증원군을 거느리고 보주에 들어갔으며 수하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흥료국의 통로를 차단하였다.

황룡부 황편의 배반과 소필적의 료하도하점차단, 야률포고, 하행미 등의 통로차단으로 흥료국군은 린접한 지역들에로 진출할수 있는 모든 길들을 차단당하게 되였다.

하지만 대연림은 주저앉지 않고 심주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였다.

성을 지키던 심주절도부사 장걸은 흥료국군의 강력한 공성전에 넋을 잃고 전전긍긍하다가 교활하게 항복을 제기하였다.

이자의 간계를 간파하지 못한 흥료국군은 공격을 중지하는 돌이킬수 없는 과오를 범하였다.

질질 시간을 끌며 수비대책을 세우는것을 보고서야 적들이 제기한 항복이 거짓임을 알게 된 흥료국군은 다시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적들이 수비대책을 완료한 뒤라 흥료국군은 성을 점령하지 못한채 되돌아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좌절과 실패는 계속되였지만 대연림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흥료국의 드높은 항전기세에 기가 질리운 여러 도의 거란군은 임금의 명령을 받은 후에도 감히 진격하지 못하였다.

바빠맞은 료나라봉건정부는 그해 10월초에 남경류수 연왕 소효목을 도통(총사령)으로, 국구상온 소필적을 부통(부사령)으로, 해륙부대왕 소포노를 도감으로 임명하고 전국적인 《토벌》군을 조직하여 흥료국을 공격하게 하였다.

한편 발해사람들과 한인들이 흥료국에 붙지 않도록 회유하기 위하여 그해 11월에 《공》으로 보주를 지키던 하행미에게는 평장사를, 심주절도부사 장걸에게는 절도사벼슬을 각각 주었다.

《토벌》군은 세길로 나누어 중군 소효목은 가운데길로, 좌군 소필적은 좌익으로, 우군 소포노는 우익으로 각각 쳐들어갔다.

대연림은 즉시 흥료국군에 적을 성으로 접근시키지 말고 맞받아나가 격멸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흥료국군과 거란《토벌》군사이에 포수(혼하)전투가 벌어지게 되였다.

흥료국군의 주력은 거란의 기본지휘부가 자리잡은 적의 중군을 맹렬히 공격하였고 좌우익에서는 흥료국을 지원하여 료양전선에 와있던 고려군과 남, 북 녀진군이 각각 공격하였다.

주로 남원병으로 이루어져있던 거란의 중군은 흥료국군의 불같은 공격에 심대한 타격을 받고 뒤로 물러서게 되였다.

포수전투는 흥료국군의 영용성을 과시한 큰 전투였다.

그러나 력량상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들은 계속 밀려들었다.

한편 좌익의 소필적과 우익의 소포노는 상대한 고려군과 남, 북 녀진군이 력량이 약하고 림전자세가 매우 소극적이라는것을 간파하고 좌우익에서 공격의 도수를 높였다.

먼저 고려군과 녀진군의 진격로를 일단 차단시켜놓고 중군을 공격하는 흥료국군을 량익측에서 끼고 쳤다.

불리한 정황에 놓이게 된 흥료국군은 부득이 물러서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고 적의 중군은 위기에서 구출되게 되였다.

발해군은 전술적으로 후퇴하여 수산북쪽에 진을 쳤다.

옛 문헌들에는 수산이 옛 주필산이며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여러날 머물렀던 산이라고 전하고있다.

령마루에 평평한 돌이 있는데 손바닥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속칭 수산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또 어떤 책에서는 령마루가 머리같이 생겼다고 하여 수산으로 불리운다고도 하였다.

주필산에서 당태종은 고(구)려군의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장검을 높이 추켜들었던 선조들의 억센 숨결을 느끼며 흥료국군은 뒤따라온 거란군과 또다시 대전하였다.

력사에서는 이 싸움을 《수산전투》라고 한다.

흥료국군은 멸적의 기세드높이 거란군에 타격을 가하였다.

급해맞은 적의 장수 발라라는자는 북원과 남원의 기치와 북을 서로 바꾸게 하고 공포에 질려있던 거란군을 공격에로 내몰았다.

수적우세를 믿고 끊임없이 달려드는 적들의 악착하고 검질긴 공격으로 흥료국군은 수산을 포기하고 료양성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대연림은 흥료국군민들로 하여금 성두리의 해자를 더 깊이 파고 성벽을 수축하며 수성무기들을 더 잘 갖추는 등 방비대책을 면밀히 세우게 하였다.

금성탕지의 료양성은 적들의 발악적인 공세를 걸음마다 짓부셔버리며 거연히 서있었다.

수성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새해에 접어들어 대연림은 새로운 군사적대책들을 강구함과 동시에 수부원외랑 고길덕을 동족의 나라인 고려에 파견하여 군사적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흥료국건국초기 대부승으로 있던 고길덕은 사신으로 임명되여 9월에 고려에 갔다.

그는 대조영의 7대손인 대연림에 의해 발해의 계승국인 흥료국이 섰다는것을 통보해주면서 지원을 해줄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흥료국에 대한 고려군의 지원은 매우 소극적이였다.

고려봉건정부의 소극적인 태도에 흥료국의 통치자들은 어지간히 실망하였으나 형세가 불리해지므로 12월에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때 고려에 간 사신은 대연림과 형제벌되는 대연정이 파견한자였다. 대연정은 흥료국의 대사라는 직위에 있으면서 주로 녀진인들을 거느리고 료나라를 공격하고있었다.

그러나 고려임금 현종은 지원요구를 거절하였으며 《흥료가 군사원조를 청하여왔으니 국경에 무슨 사고가 생길지 알수 없다.》고 하면서 상중에 있던 서북면판병마사 류소를 급히 임지로 떠나보내기까지 하였다.

이런 조건에서 흥료국에서는 고길덕을 또다시 고려에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하게 되였던것이다.

하지만 고려는 이번에도 흥료국의 지원요청을 거절하였다.

아무러한 외부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조건에서도 흥료국의 항전은 계속되였다.

1030년 봄에 들어서며 힘으로는 료양성을 점령할수 없음을 깨달은 적들은 멀리서 성을 사면으로 포위하는 전술을 쓰면서 장기전을 준비하였다. 적들은 성에서 사방 5리쯤 떨어진 곳에 성보를 수축하여 외부와의 련계를 단절시키고 료양성을 고립무원한 상태에 빠지게 하였다.

한편 흥료국에 의하여 갇혔던 동경류수 부마도위 연녕(소효선)은 땅굴을 파고 누이동생과 함께 도망쳤고 그의 처인 남양공주 최팔만이 수비병에게 발각되여 다시 감금되였다.

7월에 이르러 대연림의 위임을 받은 흥료국의 행영도부서 류충정은 영주자사 대경한을 시켜 편지를 가지고 고려에 가서 원병을 청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원군요청마저 거절당하였다.

포위가 지속되자 일부 나약한 사람들속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굶주림으로 하여 사람들이 쓰러져갔다.

대연림의 심중은 착잡하였다.

이대로 투항한단 말인가, 투항하면 목숨을 구할수 있다. 그러나 지하에 돌아가 무슨 면목으로 선대들을 뵈운단 말인가, 나를 임금으로 내세워주며 《흥료국 만세!》를 부르던 저 백성들이 우선 용서치 않을것이요, 후손들이 내 묘지에 침을 뱉을것이다.

싸우다 죽을지언정 투항할수 없다.

그는 부하장수들을 시켜 끝까지 항전할 자기의 결심을 각 군영과 백성들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주린 창자를 더욱 졸라매며 흐려지는 정신을 가다듬고 군민들은 장검에 의지하여 몸을 일으켰다. 다시 넘어지지 않으려고 성가퀴에 몸을 기대고 서서 눈도 못감은채 그대로 운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연림은 영주자사 리광록을 자기의 처소로 불렀다.

지친 다리를 무겁게 끌며 들어선 광록의 눈가에 1년전의 름름한 자태를 찾아볼길이 없는 꺼칠한 대연림의 모습이 안겨왔다. 얼굴에는 주근깨가 많아지고 눈과 볼이 푹 꺼져들어갔으며 관골이 두드러져나왔다. 여위여서인지 키도 더 커보이였다.

《페하, 이 어찌된 일이오니까?》

《우리가 오늘을 각오하지 못하고 거사한것이야 아니였지.》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이까?》

《끝까지 항거하다 죽는길뿐이다. 사나이 한번 뜻을 세워 몸은 꺾일지언정 뜻은 굽히지 말아야 한다. 비록 오늘에 죽는대도 래일에 후손들이 다시 일어나 우리의 뜻을 반드시 성사시켜줄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꺼질수 없는것이 바로 발해사람들의 애국의 불길인가 하노라.》

《페하!》 리광록은 잠시나마 나약해쳤던 자신을 뉘우치는듯 깊이 머리를 숙여보였다.

《그대의 충정을 짐이 잘 아노라. 그대를 부른것도 실은 그 애국충정을 믿고 사신의 임무를 맡기고저 해서이다.》

《조서를 받들겠소이다.》

《그대는 무슨 방법으로든 사선을 헤치고 나가 고려에 가도록 하라.》

광록의 부리부리한 두눈이 놀라움과 분노로 하여 일순 커졌다.

《또 고려에 간단 말이오이까. 그렇게도 도와달라는 우리의 청을 거절한 그들이 이제 다시 청을 들어주겠소이까. 고려에 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페하와 함께 순국하겠나이다.》

《그대의 말도 옳다. 그러나 동족의 나라인 고려밖에 더 믿을데가 있겠느냐. 그리고 혹 그대가 떠나간 사이에 성이 함락될수도 있다.》

《페하, 절대 그리되여서는 아니되옵니다.》

《아니다. 벌써 어떤놈들이 거란에 가서 항서를 바쳤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내응이 있을수 있다.》

대연림은 리광록을 잡아일으키며 미소어린 눈길로 그의 꺼칠한 두볼을 어루쓸었다.

《짐은 각오가 되여있다. 고려에 도착하여 성이 함락되였다는 소식이 이르거들랑 거기에 떨어져 뒤일을 도모하라. 그대로 물러서서는 안된다. 다만 불타는 성안에 짐이 있고 백관들과 백성들이 있다는것만 잊지 말아다오. 몸은 재가 되여도 애국의 넋만은 그대로 타번지고있음을 꼭 명심하라.》

《페하-》 광록은 울음을 터뜨리며 대연림의 발밑에 꿇어앉았다. 그의 갑옷우에 방울방울 떨어져내리는 뜨거운 눈물.

사선을 헤지며 10여일만에 리광록은 흥료국의 마지막사신으로 고려에 도착하였다.

피눈물을 쏟아가며 애타게 원병을 호소하였지만 고려의 통치배들은 거란과의 관계악화를 구실로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후에 흥료국의 멸망소식을 듣고 리광록은 복수를 다짐하며 그대로 고려에 눌러앉고말았다.

리광록을 떠나보낸 후 대연림은 최후를 각오하고 마지막결사전에 나섰다.

행여나 하여 고려가 있던 남쪽을 자주 돌아보았을 대연림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적들의 료양성봉쇄로 하여 통일적인 지휘를 받지 못한 흥료국산하의 여러 군읍들은 하나둘 거란군에 의해 격파당하였다.

후산에서 기세를 올리며 대연림의 흥료국군을 후원하던 봉기군도 모두 격파되였다.

이제는 흥료국의 본거지가 있는 료양성만이 남게 되였다.

남문의 경비를 맡고있던 장군 양상세라는자는 몰래 거란군의 도통 소효목에게 사람을 보내여 항서를 바쳤다. 그리고 거란군이 공격하는 경우 내응하기로 밀약하였다.

8월 25일 밤, 양상세는 남문을 열고 거란군을 끌어들이였으며 싸움을 지휘하던 대연림을 불의에 기습하여 사로잡는 배신행위를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발해국멸망 100여년후에 흥료국을 세우고 고국을 수복하려던 발해유민들의 투쟁은 1년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비록 실패하였지만 그들의 투쟁은 고구려, 발해인민들의 오랜 애국전통을 유감없이 시위하였다.

거란강점자들은 발해사람들이 또다시 일어나는것이 두려워 일련의 회유책과 양보책을 실시하는 한편 투쟁에 적극 참가한 사람들을 여러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거란통치배들은 자기 인민을 배반하고 적들과 내통한 소위 《공로자》들을 등용하는 한편 료동지방에서 실시하던 소금, 술에 대한 전매제도를 페지하고 세금제도를 부분적으로 완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발해사람들의 상무기풍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한때 금지하였던 격구도 다시 하도록 허용하였다. 동시에 폭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래주(오늘의 료녕성 수중현 북쪽), 습주(오늘의 수중현 남쪽), 천주(오늘의 하북성 무녕현 동쪽), 윤주(오늘의 하북성 림유현 서쪽) 등지에 강제이주시켰다.

그러나 거란의 강제이주책동을 반대하여 이번에도 수많은 발해유민들이 고려에로 들어갔다. 흥료국멸망직전부터 3~4년동안 이주한 사람들의 수는 기록에 남아있는것만 해도 대략 740명인데 실제로는 좀 더 많았다고 보인다.

흥료국은 겨우 1년밖에 존재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투쟁은 심각한 교훈을 남기고있다.

자기 인민의 힘을 믿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옳바른 전략과 전술에 의거하여 대중의 힘을 최대한으로 발양시킬 때에만 승리가 가능하다는것을.

그리고 소극적인 방어에만 매여달리는것은 자멸을 촉진하는 길이라는 교훈도 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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