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장군의 분사​

아무런 대책없이 앉아서 어쩔가어쩔가 하는 사이에 백제왕정에는 신라군이 탄현을 넘었고 당나라군사들은 백강에 들어섰다는 소식이 날아들어왔다.

급기야 백제왕정에서는 방어를 한다 어쩐다고 아우성치며 덤벼쳤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싸워보겠다고 나선것이 바로 계백장군이였다.

애국심이 강하였던 그는 나라에 존망의 위기가 닥쳐오자 어떻게 하나 라당련합군을 막아보려고 분연히 떨쳐나섰다.

계백장군은 백제군사들가운데서 가장 용감하고 날랜 사람들 5천명을 뽑아 결사대를 무었다.

결사대를 뭇던날 계백장군은 《일국의 군사로서 당나라와 신라의 대병과 부딪치게 되였으니 나라의 존망은 기약할수 없다. 만약 나라가 망하면 내 처자가 기필코 사로잡혀서 노비가 되여 치욕을 당하게 될것인즉 살아서 욕을 보느니 시원하게 죽는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면서 자기의 처자들을 모두 제손으로 죽여버렸다.

독한 마음을 먹은 계백장군은 그 길로 황산벌(충청남도 련산)에 나가 험준한 지세를 등지고 세개의 진을 쳤다.

드디여 신라의 5만대군이 나타났다. 신라군의 총지휘자는 금관가야국왕의 후손인 김유신이였다.

계백장군은 출전하기에 앞서 결사대원들앞에서 장검을 짚고 웨쳤다.

《옛날에 중국의 월왕인 구천이 5천명 결사대로 오나라의 70만대군을 격파하였으니 오늘날 우리들은 각자가 용맹을 떨치여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꼭 보답하여야 한다!》

계백장군의 호소에 모두가 떨쳐나 하나가 천, 만을 당하는 기세로 악전고투하여 싸우니 그만 신라군사가 물러났다. 이렇게 백제군은 네 차례나 신라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사상자가 늘어나고 힘이 진하여 결국 백제군은 계백장군이하 모두 전사하고말았다.

황산벌싸움은 조선력사에 오래동안 전설처럼 전해지면서 후대들이 충신으로서의 계백장군을 높이 찬양하게 만들었다. 실례로 리곡(1298년-1351년)은 자기의 문집 《가정집》에서 《황산가》라는 노래를 지어 수적으로 우세한 라당련합군의 공격을 맞받아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싸운 계백장군과 백제군사들의 투쟁이야기를 높이 칭송하였다.

계백장군의 5천명 결사대를 가까스로 격파하고 뚫고들어온 신라군은 당나라군과 합세하여 사비성을 에워쌌다.

당나라군대는 백강어귀에서부터 백제의 군인들과 인민들의 완강한 방어에 부딪쳤다. 백제군사들은 당나라군대의 침입을 막아보려고 완강하게 싸웠으나 돌파당하고말았다. 수도 사비성밖 20리지점에서 백제군인들은 다시한번 당나라군대를 맞받아 싸웠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나고말았다.

사태가 이와 같이 위급해지자 나라와 인민의 운명은 어떻게 되든 제 한목숨만 건져보려고 꾀하던 의자왕과 태자 륭을 비롯한 봉건통치배들은 제2의 수도인 웅진으로 달아났다. 통치층안에서는 심한 동요와 분렬이 일어나고 적들에게 투항하는 배신자가 생겨났다. 백제의 내부가 혼란되고 지휘체계가 마비된 기회를 리용하여 침략군은 비교적 손쉽게 수도를 강점할수 있었다.

660년 7월 13일 사비성이 적들에게 함락되자 무능하고 비굴한 의자왕은 7월 18일 공주로부터 다시 사비성에 돌아와 적들에게 항복하고말았다.

이로써 백제봉건왕조는 종말을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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