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권회복을 위해 싸운 복신과 도침​

660년 7월 백제봉건국가는 멸망하였다. 령토팽창야욕에 미쳐 돌아치던 신라의 무렬왕(재위 654년-661년)은 신성한 우리 강토에 당나라침략세력을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키는 천추에 용납못할 반민족적행위를 서슴지 않고 감행하였다. 백제의 마지막임금인 의자왕은 포로되고 사치와 호화로움을 자랑하던 수도 사비성은 살륙과 략탈의 지옥으로 변하였다.

나라는 비록 망했어도 인민들은 죽지 않고 강점자들을 반대하여 결연히 일떠섰다. 심심산골에서 나무나 하며 근근히 살아가던 이름없는 초부들도, 살생을 금하라고 념불을 외우던 승려들도 손에 병쟁기를 들고 떨쳐나섰다.

그들속에는 백제 무왕의 조카이며 장군이였던 복신과 승려 도침도 있었다. 평소에 친분관계가 두터웠던 이들은 국권회복을 위한 간고한 길에서 생사운명을 같이 할것을 굳게 약속하고 임존성(충청남도 례산군 대흥면)으로 들어갔다. 비록 승려이기는 하지만 학식이 뛰여났던 도침은 만사람의 심장에 불을 지피는 훌륭한 격문을 써서 각지에 내돌렸다. 임존성에서 항쟁부대가 조직된다는 소식을 듣고 애국적인 군인들과 백성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찾아와 대오는 보름도 못되는 사이에 수백명으로부터 3만명으로 늘어났다.

복신은 부대편성을 다그치는 한편 당나라강점자들을 공격하여 병쟁기들을 빼앗아 무장장비를 갖추어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적들의 동향을 알아보려고 사비성에 들여보냈던 사람이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리며 복신과 도침앞에 나타났다. 그가 하는 말이 당나라침략자들이 백제의 전지역에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개 도독부를 설치하고 군정을 실시한다는것을 선포하였으나 백제인민들의 항거에 부딪쳐 하는수 없이 저들의 군대가 주둔하고있던 사비성과 웅진성을 비롯한 웅진강(금강)우안의 일부 지역들을 관할하는 《웅진도독부》 하나만을 설치하였다는것이다. 그리고 백제와의 전쟁을 총지휘한 당나라의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이 반항의 싹은 시초부터 짓뭉개버려야 한다고 떠벌이며 조만간에 수만명의 군대를 임존성으로 파하려고 꾀하고있다는것이였다.

그의 보고를 심중하게 듣던 복신과 도침의 얼굴에는 긴장한 빛이 떠돌았다. 이제 치르게 될 첫 싸움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부대의 운명이 결정되기때문이였다. 그들은 성방어상태에 빈틈이 없는가를 구체적으로 따져보고 필요한 대책들을 제때에 세웠다.

660년 8월 26일 수만명의 당나라침략군은 임존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적들에 대한 치솟는 적개심과 분노로 온몸을 불태우던 항쟁군인들은 복신과 도침의 지휘밑에 지세가 험한 임존산의 유리한 자연지리적조건과 든든한 성방어시설물들을 능숙하게 리용하면서 미친듯이 기여드는 적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하루종일 계속된 치렬한 전투에서 엄청난 손실만 당하고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당나라강점군은 황급히 저들의 시체들을 긁어모아가지고 사비성으로 도망치고말았다. 임존성방어전투에서 큰 승리를 이룩한 항쟁부대는 점차 전과를 확대해나가면서 짧은 시일안에 웅진강이북의 수많은 성들을 회복하였다.

복신과 도침은 이어 적들의 아성이며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을 수복하는데 공격의 화살을 돌리였다.

당나라 고종은 고구려에 대한 새로운 침략전쟁을 위하여 이해 9월에 소정방으로 하여금 의자왕을 비롯하여 포로한 백제왕족들과 1만 2 000명의 백제인민들과 함께 주력부대를 끌고 본국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군정을 무력으로 뒤받침하기 위하여 랑장 류인원이 거느린 1만명의 군대를 사비성에 남겨놓았다.

복신과 도침은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자 지체없이 사비성공격작전을 개시하였다. 임존성항쟁부대는 당나라군대가 사비성밖에 설치한 목책을 격파하고 군수물자들을 탈취한 다음 사비성을 포위하고 맹렬한 공격을 들이댔다. 이들의 투쟁에 호응하여 20여개 성의 군대와 인민들이 강점자들을 반대하여 들고일어남으로써 항쟁부대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바빠맞은 류인원은 본국에 증원부대를 보내줄것을 요청하는 한편 신라에 군사적지원을 줄것을 요구하였다. 신라봉건통치배들은 당나라의 힘을 빌어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는 야망을 끝까지 실현해보려고 책동하면서 백제유민들의 투쟁을 진압하는데 군대를 내몰았다.

사비성탈환전투는 신라군대의 개입으로 일시 중지되게 되였다. 그후 검교대방주 자사 류인궤가 거느린 당나라 증원군이 백제땅에 도착함으로써 투쟁은 더욱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였다.

복신과 도침은 지휘관들과 앞으로의 행동방향을 놓고 심중한 토의를 벌렸다. 어떤 사람들은 당분간 싸움을 중지하고 군력을 키우자고 주장하였고 또 다른 사람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비성공격을 그만두어서는 안된다고 피대를 돋구어가며 력설하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있던 복신은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지휘관들을 진정시키고 자기의 결심을 말하였다.

《지금 적들이 우리를 없애치우겠다고 미친듯이 달려드는 판에 싸움을 중지한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소. 또 우리의 목표는 백제국을 재건하는것이지 무모하게 싸우다가 전멸당하는데 있지 않소. 내 결심을 먼저 말한다면 우리의 본거지를 임존성에서 남쪽의 주류성으로 옮기자는것이요.

지금 웅진강이남지역은 적들의 더러운 발길이 미치지 못한 지역으로 남아있소. 적들은 우리의 공격에 겁을 먹고 웅진도독부관할지역밖으로 나갈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하고있고 신라는 당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고있소.

그런것만큼 우리가 먼저 곡창지대인 이 지역을 가로 타고앉는다면 앞으로의 투쟁에 매우 유리할것이요. 그리고 주류성은 북부와 남부를 련결하는 중간지대에 위치하고있는 전략적요충지로서 임존성보다 훨씬 큰 천험의 요새요. 그렇기때문에 나는 주류성으로 옮겨가기로 작정하였소.》

그의 주장은 모든 사람들의 찬동을 받았으며 부대는 661년초에 주류성(전라북도 정읍군 고부면)으로 자리를 옮겼다.

복신의 부대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백제남부지역의 거의 모든 성들이 들고일어나 그들과 합세하였다. 대오를 빠른 시일안에 급속히 확대한 복신 등은 웅진도독부에 대한 공격을 한층 강화하였다.

661년에 들어와서 더욱 활발해진 백제유민들의 반침략투쟁에 질겁한 당 고종은 백제지역에 남아있는 저들의 군대를 도와줄것을 신라에 거듭 요구하였다. 신라봉건통치배들은 이에 응해나서면서 수만명의 군대를 편성하여 백제땅으로 파견하였다.

661년 3월에 신라의 선두부대는 먼저 백제땅에 도착하여 주류성남쪽에 진을 쳤다.

주류성항쟁군은 적들의 진지가 채 정리되지 않은 틈을 리용하여 불의에 성문을 열고나가 습격함으로써 대부분의 적들을 소멸하였다.

뒤미처 당도한 다른 신라부대들은 곧 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해왔다. 항쟁용사들은 사방으로부터 미친듯이 달려드는 적들에게 화살을 날리고 큰 돌들을 떨구며 용감히 싸웠다. 그들은 주류산의 험한 지세들을 능숙하게 리용하면서 적들을 이 골짜기, 저 골짜기로 유인하여 끌고다니며 족치기도 하고 밤에는 부단한 기습전을 벌려 적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한달 엿새동안의 싸움에서 막대한 손실을 당한 신라군대는 총퇴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주류성항쟁군은 지체없이 추격전으로 넘어가 적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어버렸다. 이 싸움에서 얼마나 혼이 났던지 신라는 그후 한동안 머리를 내밀지 못하였다.

복신과 도침은 주류성전투에서 대승리를 이룩하고 남부의 전 지역과 웅진강동쪽의 일부 지역을 확고히 장악한 기초우에서 백제국의 재건을 선포하였다. 그들은 일본에 가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백제의 국왕으로 내세웠다.

당시 일본 야마또국가의 실권은 백제계통의 사람들이 쥐고있었으며 백제는 이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의자왕은 친백제적성격이 강한 야마또국가를 자기의 정책수행에 리용하기 위하여 부여풍을 파견하였던것이다. 복신과 도침은 이미 여러차례 사람을 일본에 파견하여 부여풍을 빨리 되돌려보낼것을 요구하였었다.

하지만 그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아 그들은 부득불 부여풍이 없는 상태에서 백제국의 재건을 선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복신은 자기를 상잠장군으로, 도침은 령군장군으로 부르게 하고 이전의 통치제도를 그대로 되살려놓았다.

백제국의 재건은 백제유민들의 반침략투쟁에서 거둔 커다란 승리였다. 그러나 백제국이 재건된 후 그 내부에서는 분렬과 암투가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백제국을 재건하자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혈로를 함께 헤쳐온 복신과 도침은 군사지휘권을 장악하기 위한 치렬한 암투를 벌리게 되였다. 그들은 제나름대로 자기의 지지자들을 모색하며 상대방을 타도하기 위한 기회만을 노렸다. 복신은 자기의 심복을 야밤삼경에 몰래 도침의 집으로 보내여 그를 죽인 다음 병권을 장악하였다.

복신은 백제국의 실권을 틀어쥔 다음 웅진도독부와 신라사이의 교통로를 완전히 끊어버리고 당나라군대를 기아와 질병에 허덕이게 하였다. 당나라군사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그러나 그의 운명도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662년 5월에 부여풍이 본국으로 돌아와 정식 임금이 되였다. 아무러한 실제적인 권한도 없었던 그는 제사같은 하찮은 일이나 주관하였을뿐이고 모든 일은 복신이 독단적으로 처리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부여풍은 자기 주위에 은밀히 사람들을 끌어당기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눈치챈 복신은 먼저 선손을 쓰기로 하였다. 그는 거짓으로 몸이 아프다고 소문을 낸 다음 자기 집으로 병문안을 오는 부여풍을 잡아죽이려고 획책하였다. 복신의 측근에 박아넣었던 심복으로부터 이것을 알아낸 부여풍은 그의 계책을 역리용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힘이 세고 날파람있는 장수 10여명을 거느리고 복신의 집으로 찾아갔다.

임금이 왔다는 소리를 들은 복신은 이불밑에 칼을 감추고 누워서 신음소리를 냈다.

《아니 장군이 이렇게 앓아누우면 이 나라는 어찌하라는거요.》

임금은 그의 이마를 짚어보며 저으기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하였다.

《소신이 중병에 단단히 들어 앞으로 살날이 얼마남지 않은것 같소이다. 그래서 죽기전에 대왕께 조용히 아뢸 말이 있사오니 다른 사람들은 물러가게 하여주었으면 좋겠소이다.》

그가 말을 끝내기 바쁘게 부여풍은 어처구니가 없어 한바탕 웃고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싸움만 잘하는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병신흉내도 곧잘 내누나. 여봐라 임금을 조롱한 이자의 목을 쳐라.》

복신은 벌떡 일어나 이불을 헤치고 칼을 쥐려고 하였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서슬 푸른 칼들이 사방에서 날아와 그의 몸을 순식간에 여러 토막으로 동강내였다. 이때가 바로 663년 6월이였다.

적들은 백제국의 명장 복신이 죽고 군사에 무능한 부여풍이 권력을 틀어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쾌재를 불렀다.

당나라강점군과 신라군대는 련합하여 그해 8월에 백제국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싸움을 지휘할 변변한 지휘관이 없었던 백제군대는 적들의 발악적인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였고 주류성은 함락되였다. 그리하여 백제국은 9월에 종말을 고하고말았다.

3년간에 걸쳐 진행된 백제유민들의 구국항전은 지휘부가 단합되지 않으면 그 투쟁은 반드시 실패를 면치 못한다는 피의 교훈을 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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