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에로 이어진 집안싸움​

뭉치면 이기고 흩어지면 진다는것은 오랜 력사적과정에 검증된 진리이다.

력사에는 단합과 분렬의 갈림길에서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단맛과 쓴맛을 체험한 나라와 민족들이 수많이 기록되여있다.

그 많은 사실들가운데서 집안의 단합도 이루지 못하여 나라의 멸망까지 초래한 비극적인 력사의 한 대목을 여기서 펼쳐보려고 한다.

666년(보장왕 25년) 초봄의 어느날이였다.

평양성안에 자리잡은 어느 한 집의 지붕아래에는 운명을 눈앞에 둔 사람이 누워있었다. 그가 바로 고구려말기에 혁혁한 활동으로 명성을 떨친 애국명장 연개소문이였다. 갑자기 덮쳐든 원인모를 병마가 당나라백만대군을 벌벌 떨게 하던 그를 침상에 쓰러눕혔던것이다.

비단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따뜻한 해볕이 비쳐드는 창너머로 푸른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연개소문의 눈앞에는 자신이 헤쳐온 지난 세월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무예를 닦으며 성장하던 소년시절과 북부변방방위를 위한 장성축성공사를 감독하던 일, 영류왕을 비롯하여 비굴하기 짝이 없는 대신들을 한칼에 제거해버리고 막리지가 되여 권력을 틀어잡은 정변이며 검질긴 당나라의 간섭과 침략책동을 맞받아 쳐갈기며 고구려의 존엄과 영예를 고수해온 나날들,

돌이켜보건대 자신의 한생은 대고구려의 번영과 더불어 흘러온 긍지로운 한생이였다. 떳떳한 한생을 보람있게 보냈으니 당장 눈을 감더라도 여한이 없을것이였다.

연개소문의 생각은 어느덧 자기의 세 아들한테로 미쳤다. 뭐니뭐니해도 자식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나가는것은 인간살이의 정해진 리치이다.

그에게는 남생, 남건, 남산이라고 부르는 세 아들이 있었다.

남생은 연개소문의 맏아들인 연고로 15살때부터 벼슬을 시작하여 지금은 높은 관직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아버지와는 판 다르게 주견과 대가 부족하고 지나칠 정도로 온화한 성격을 가지고있었다. 그러다나니 동생들을 자기 손에 걷어쥐지도 못하였다. 하나 해도 독자적으로 하는 때가 별반 없었고 대체로는 아버지인 연개소문에게 많이 의존하였다.

그와는 반대로 둘째인 남건은 무술에 능하고 호협하고 분방한 기질을 소유하고있었다.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남건이 남생보다 나았다. 그렇더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남생의 아우였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안해의 관계에 일관되여있는 륜리도덕은 형제사이에도 례외가 없었다. 막내인 남산은 또 그대로 의지가 나약하고 매사에 좌왕우왕하였다. 나이가 어린탓이라고 해야 할지.

《남생, 남건, 남산을 모두 불러들이라고 일러라.》

연개소문은 자기를 시중들고있는 하인에게 말했다.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하인이 나간지 얼마 안있어 세 형제가 차례로 들어와 아버지의 침상앞에 꿇어앉았다.

《아버님, 옥체는 좀 어떠하오이까?》라고 하는 그들의 문안에 머리를 약간 끄덕이는것으로 응대한 연개소문은 한동안 아무 말없이 세 아들의 얼굴을 번갈아 둘러보고나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근심스러운것은 이 나라 대고구려사직의 안녕이다. 우리가 수차 강포한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긴 했다만 이 땅에 태평성세가 도래한것은 아니다. 봐라. 수년전엔 남쪽의 백제가 멸망하지 않았니. 당나라는 이에만 한하지 않고 우리 고구려까지 탐내고있다. 게다가 신라것들이 노는 꼴도 범상칠 않아.》

연개소문은 잠시 숨을 돌리고나서 말을 이었다.

《내가 이제 하는 말을 명심해 듣거라. 내가 죽은 다음 이 나라의 대업은 너희들의 소행에 달려있다. 그러니 너희들 삼형제는 물고기와 물사이처럼 서로 화합하여 벼슬자리나 물건을 가지고 다투어서는 안된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이웃의 웃음거리가 될지니라. 남건과 남산은 형을 잘 받들고 남생은 동생들을 위해주면서 합심하여 나라일에 헌신해야 하느니라. 이게 내가 너희들에게 하고싶은 말이다. 알겠느냐.》

《알았소이다.》

세 아들의 힘찬 대답소리를 들은 연개소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이튿날 새벽 연개소문은 조용히 세상을 하직하였다. 고요하던 평양성의 대기를 가르며 곡성이 터져올랐다.

우리 민족사와 중세동방사에 깊은 자욱을 남긴 고구려의 애국명장 연개소문은 이렇게 갔다. 아마도 그때 연개소문은 고구려가 강대국으로 길이 위용 떨칠것을 바랬을것이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바라던것처럼 영원할줄 알았던 고구려는 그가 죽은지 2년만에 자기의 존재마저 유지하지 못하고 종말을 고하는 비참한 운명을 면치 못하였다.

연개소문의 장례를 치른 후 남생, 남건, 남산 세 형제는 한자리에 모여앉아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자고 서로 언약하며 맹약의 술을 들었다.

그런데 어찌 알았으랴. 이것이 한갖 유명무실한 빈 약속으로 끝날줄이야.

연개소문이 죽자 맏아들 남생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국정전반을 도맡아보게 되였다. 그리고는 자기의 첫 사업으로 지방의 여러 성들에 대한 순시를 진행하면서 아우들인 남건과 남산더러 조정에 머물러있으면서 뒤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일은 여기서부터 생겨났다.

당시 고구려지배층속에서는 저마다 연개소문의 아들들을 끼고 권력을 잡기 위한 암투가 벌어지고있었다. 연개소문이 살아있을 때에는 그래도 그의 권력에 위압되여 겉으로는 나타내지 못했던것인데 그가 죽자 통치배들내부의 알륵과 분렬은 급격히 격화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에는 심각한 정치적혼란과 위기가 조성되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남생이 지방순시를 떠난것이다.

남생이 수도를 떠나자 남건과 남산에게 붙어먹던자들은 이때라고 생각하고 남생을 헐뜯기 시작하였다. 남생은 우유부단하고 지략이 부족하여 막리지자격이 없다느니, 막리지로는 응당 무술에 능하고 지용을 겸비한 남건이 가당하다느니 하며 온갖 비방을 늘어놓았다. 나중에는 남건과 남산에게 남생은 두 아우를 미워하여 장차 그들을 제거해버리려고 한다, 그의 이번 순시도 필경 뜻하는바가 거기에 있다, 그러니 선손을 써서 계책을 도모해야 한다고 귀띔하는자도 있었다.

남건과 남산은 아버지의 유언도 있고 또 형제들사이의 약속도 있고 하여 처음에는 도리머리를 저으며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한편 어떤자들은 지방순시중인 남생에게 《당신의 두 아우가 형이 돌아오면 자기들의 권세를 빼앗을가 두려워하며 형이 돌아오지 못하게 막으려고 한다.》고 하며 둔장질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평시에 우유부단한 남생은 이 말을 듣고는 기연가미연가 하며 결심을 못내리고있다가 방법을 생각해냈다는것이 자기의 심복을 몰래 평양성으로 보내여 사실여부를 엿보게 하는것이였다.

그런데 일이 안될 때라 그 심복은 성안에 들어서자마자 수비병들에게 붙잡히고말았다. 이것 역시 리간군들의 소행이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 사실은 즉시에 남건형제에게 알려졌다. 물론 외곡되고 보태진것이였다.

그들은 펄쩍 뛰였다. 격한 심정은 분노로 번져졌고 분별마저 잃게 했다.

남건은 즉시에 임금의 어명을 꾸며가지고 남생을 불렀다.

얼마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된 남생은 사태를 직감하고 두려워서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주저주저하였다.

이렇게 되자 남건형제는 도성에 남아있던 그의 아들 헌충을 붙잡아다가 인질로 삼았다가 끝내는 죽여버렸다. 그리고 남건은 스스로 막리지자리에 올라앉아 군사를 풀어 남생을 치게 하였다.

급전직하의 이 갑작스러운 변고에 당황한 남생은 한때 수도였고 지금은 별도로 된 국내성으로 달아나 그곳에 있는 자기의 지지자들에게 의지하였다.

홀로 성우에 올라 멀리 어둠이 짙어가는 남녘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심중은 복잡했다.

(어쩌다 이런 궁지에 몰렸는가. 저 무례하기 이를데 없는 동생이란것들이 이 형마저 해치려고 하니 하늘도 무심하고나. 장차 내 운명은 어찌될가. 이대로 앉아있다가는 십상 목이 떨어질건 뻔해. 그럴바치고는 차라리…)

한참만에야 성을 내려서는 남생의 얼굴에는 무서운 결심이 비껴있었다.

그날밤 여러필의 말들이 성문을 빠져나와 서쪽을 향하여 질주해갔다. 남생의 아들인 헌성일행이였다.

남생이 좀전에 다진 결심이 실행에 옮겨진것이다. 그 결심이란 바로 당나라에 빌붙어 권력과 목숨을 부지하는것이였다. 이로써 남생은 천추만대를 두고 씻을수 없는 반역의 길, 매국배족의 길을 걷게 되였다.

헌성은 지금 애비의 사신격으로 구원요청의 사명을 안고 당나라의 고종을 찾아가고있는중이였다.

헌성을 맞이한 당나라조정은 부쩍 끓었다. 그러지 않아도 20여년전 태종때 고구려한테서 당한 패배의 쓴맛으로 하여 이를 갈고 속을 썩이던 고종에게 있어서 이것은 맹호가 제발로 함정에 뛰여든것과 같은 다시 없을 횡재가 아닐수 없었다.

당고종은 헌성을 우무위장군으로 임명하고 자기가 타던 말과 얼마간의 《례물》을 주어 돌려보내는 한편 설필하력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남생을 데려오게 했다.

헌성을 먼저 보내고 소식을 기다리던 남생은 그가 돌아오기 바쁘게 자기도 당나라로 뺑소니를 쳤다.

이때가 666년 6월이였다.

당고종은 그해 말 리세적을 우두머리로 하는 침략군을 고구려에 대한 총공격에로 내몰고 이전 백제땅에 주둔하고있던 저들의 군대와 신라로 하여금 남쪽에서 고구려를 치게 했다.

고구려에 엄중한 위기가 닥쳐온 이때 연개소문의 아우인 연정토는 적군이 북상하자 자기 관할밑에 있던 12개 성의 관리와 백성 수천명을 데리고 신라에 투항하는 배신행위를 저질렀다.

고구려지배층안에서 일어난 정치적혼란은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있던 고구려를 걷잡을수 없이 무너뜨리기 시작하였고 국가통수체계와 방위체계를 마비시켰다.

이렇게 고구려가 혼란된 틈을 리용하여 당나라침략자들은 투항변절한 남생을 길잡이로 내세워 고구려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감행하였으며 신라가 이에 합세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668년 9월 자기의 존재를 끝마쳤다.

결국 고구려는 집안싸움으로 망했다고 할수 있다. 만약 연개소문이 바라던대로 되였더라면 고구려는 멸망하지 않았을것이고 우리 민족의 력사는 그렇듯 파란만장의 로정을 걷지 않았을것이다.

고구려말기의 력사는 나라의 통수체계와 방위체계가 마비되고 국내의 단합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아무리 강대한 국력을 가진 나라라고 하더라도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할수 없으며 나라를 망쳐먹게 할수 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이것은 고구려의 비극적인 종말이 력사에 남긴 심각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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