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의 정변​

7세기 중엽에 이르러 고구려는 서쪽에 새로 대두한 당나라침략세력과의 치렬한 대결장으로 화하였다.

고구려를 침공하였다가 종내 멸망하고만 수나라를 대신하여 일어난 당나라통치배들은 국내정세가 좀 안정되자 동방의 강국 고구려에로 침략의 창끝을 돌렸다.

고구려인민들은 또다시 반침략조국방위의 성전에 떨쳐일어났다. 이 투쟁의 앞장에는 고구려의 애국명장 연개소문이 서있었다.

온 천지가 새하얀 옷을 입고 은빛으로 단장한 642년 정월초 어느날이였다.

새해의 설명절을 맞이한 기쁨과 즐거움이 채 사그러지지 않은 평양성을 뒤에 남겨놓고 연개소문은 멀리 북방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는 지금 임금의 어명을 받고 서북국경지대에서 벌어지고있는 축성공사의 감독으로 부임되여가는 길이였다.

그 축성공사로 말하면 1 000여리가 넘는 장성을 쌓는 일로서 시작된지 10년이 넘었지만 워낙 규모가 방대한데다가 로력과 자재의 부족 등 여러가지 어려운 조건들로 하여 아직도 끝을 맺지 못하고있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에서는 공사를 감독하고 진척시킬 관리를 새로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그 소임을 연개소문에게 맡겼던것이다.

축성감독으로 연개소문을 잡은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618년에 당나라가 일어난것과 때를 같이하여 고구려에서는 강경대외정책을 실시하던 영양왕(재위 590년-618년)이 죽고 그의 아우인 영류왕(재위 618년-642년)이 즉위하였다. 그런데 시일이 지남에 따라 영류왕을 비롯한 일부 귀족관료들속에서는 당나라에 대한 립장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은 당나라통치배들이 내부수습과 돌궐족의 침공을 방어하기에 급급하면서 622년에 고구려와 평화적관계를 맺자고 하자 그에 각성을 가지고 대할 대신 그들이 제기한 고구려-수전쟁때의 포로교환에 응해나섰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나라와 맞서면 다시 전란이 일어날수 있다는것을 우려하면서 대외정책에서 나약성을 나타내였다. 영류왕은 628년에 나라의 지형략도를 그린 봉역도를 당나라에 보내였다. 631년에는 당나라 사신이 와서 고구려-수전쟁때 죽은 수나라군사들의 해골을 걷어모아 제사를 지낼수 있게 해주었고 또 전승기념물인 경관(수나라침략자들의 시체를 산더미처럼 쌓아 흙을 덮어둔것)을 헐어버리는 비굴한 태도를 취하였다.

고구려통치층의 이와 같은 양보정책은 당나라로 하여금 더욱 오만한 태도를 취하게 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내정을 렴탐할 목적으로 641년에 진대덕이라는자를 사신으로 보내왔는데 이자는 고구려에 들어와 경치좋은 곳을 구경시켜달라고 하면서 고구려의 관리들에게 후한 뢰물을 주고 중요한 곳들을 다 돌아보았다. 그래도 고구려통치배들은 그가 하자는대로 방임해두었다.

임금과 그 측근자들의 거듭되는 대당양보정책은 고구려인민들을 분격하게 하였으며 대바른 귀족관료들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그가운데서 가장 견결하고 유력한 사람이 바로 연개소문이였다.

연개소문은 900여년의 오랜 력사를 가진 고구려가 생겨난지 20여년밖에 되지 않는 당나라따위에 굽신거리는것은 대고구려의 수치이며 수나라의 수백만대군도 쳐물리친 강국 고구려가 당나라를 당해내지 못하겠는가고 하며 임금에게 극구 간언하였다.

하지만 국왕과 집권관료들은 종래의 태도를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도리여 연개소문이 저들의 정책집행에 훼방을 논다고 생각하면서 그를 따돌리고 배척하였다.

그러다가 마침 축성공사를 감독할 관리파견이 제기되자 제꺽 연개소문에게 그 일을 맡겼던것이다.

결국 연개소문은 중요직책에 임명되여가는 명색을 띠였으나 사실 쫓겨가는 격이 되였다.

몇달이 흘러갔다.

그동안 연개소문은 축성공사를 현지에서 감독하는 한편 평양과 긴밀한 련계를 가지고 조정의 내부형편을 정상적으로 료해하였다. 그리고 여러 기회에 상주문을 올려 투항굴종적인 정책을 바꿀것을 요청하였으나 매번 헛탕을 쳤다. 오히려 그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만이 커갈뿐이였다. 상주문을 올리고 간언하는 방법으로는 통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할수 있는것은 무엇이겠는가. 지금 임금에게 더는 기대할바가 없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의 생각은 착잡하였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시일이 지남에 따라 그의 마음속에는 마침내 굳은 결심이 들어앉게 되였다.

그는 남몰래 뜻을 같이할수 있는 사람들을 끌어당겨 자기의 든든한 지반을 마련해나갔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평양성에서도 암암리에 진행되였다. 몇달 어간에 그의 주위에는 현 국왕과 그 정책의 추종자들을 반대하는 세력이 집결되게 되였다.

게다가 그의 수하에는 적지 않은 군사들도 있었다.

그해 10월에 연개소문은 축성정형을 조정에 보고하고 그동안 진척시켜온 일도 알아볼겸 하여 수도로 돌아왔다.

연개소문이 수도에 올라와 며칠이 지난 어느날 밤이였다.

그가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찰나에 임금의 측근에 박아놓았던 심복이 그의 집으로 급하게 뛰여들었다.

그가 하는 말이 그날 저녁 임금과 측근신하 몇명이 모여 연개소문을 제거할 모의를 꾸몄다는것이였다.

심복의 이야기를 다 듣고난 연개소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오락가락하였다.

(내 짐작은 했으되 이토록 빨리 닥칠줄은 몰랐구나. 일이 이왕 이렇게 된바에는 당장 거사를 해야 한다. 내 이날을 바라고 차비를 하지 않았던가.)

마침내 그는 심복을 돌아보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사람들을 부르게, 이제 당장.》

얼마 안있어 방에는 연개소문의 부하장수 몇이 들어왔다.

《일이 급하게 됐소.》

연개소문은 좀전에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통고한 다음 이렇게 말을 이었다.

《본시 좀 더 기다려 때를 보자고 하던건데 더는 지체할수 없게 되였소. 사세가 막급하여 부득이하게 거사를 래일로 앞당기자고 하오. 그러니 모두들 실수가 없도록 조처하오.》

《분부대로 하겠소이다.》

연개소문은 정변시간과 장소, 행동방향 등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구체적인 분담까지 주었다.

다음날 아침 해가 한발이나 솟아올라 평양성안을 따뜻한 해살로 감싸안아주고있을 때 성에서 남쪽으로 얼마간 떨어진 넓다란 공지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창과 칼을 번쩍거리며 군사들이 렬을 지어 모여드는가 하면 한켠에서는 차일을 친다 자리들을 깐다 법석대고있었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는 음식을 지지고 볶는 사람들이 분주스레 돌아치고있었다.

이무렵 성안에 있는 한다하는 대신들의 집으로는 연개소문이 연회를 베풀고 군사들이 열병식을 벌리는데 거기에 초청한다는것을 전하려고 심부름군들이 부리나케 달려가고 달려왔다.

얼마후 열병식과 연회가 벌어지게 될 장소로 숱한 고관대작들이 모여들었다.

그가운데는 국왕의 투항주의적정책에 추종하는 대신들도 있었고 그 반대파들도 있었다. 연개소문을 해칠 모의에 참가했던 대신들은 좀 속이 켕겼으나 설마하니 엊저녁에 있은 밀담내용을 그가 알수 있겠는가고 생각하고 마음을 놓았다. 어떤 대신들은 멋진 구경거리를 만났다고 생각하였고 연개소문이 오래간만에 상경하더니 한턱 쓰는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대신들도 있었으며 혹 궁금하던터에 좋은 먹자판이 생겼다고 내심 기뻐하는자들도 더러 있었다.

오늘의 이 잔치판이 어떤 결말을 가져오리라는것을 예측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오직 연개소문과 몇몇 사람만이 그 내막을 알고있었던것이다.

해가 중천에 떠올라 정오를 가리키자 연회는 시작되였다. 때를 기다리기라도 한것처럼 술잔들이 연방 오가고 갖가지 음식들이 연해연송 들어왔다.

풍악소리가 울리고 춤판이 펼쳐졌다. 연회는 바야흐로 고조를 이루었다. 이제는 태반이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다.

바로 이때였다.

연개소문의 눈길이 곁에 서있던 군사의 눈과 마주치고 그의 손이 한번 허공을 내리그었다.

그러자 열병식을 한다고 대기시켜놓았던 군사들이 일순 돌변하여 갑작스럽게 연회장으로 뛰여들었다. 그리고는 미리 정해놓은대로 투항파대신들의 목을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연회가 시작되기 조금전에야 구체적인 행동방안을 들었던것이다.

연회장은 삽시간에 수라장으로 변하였다.

순식간에 100여명의 대신급 귀족관료들이 시체로 화하여 연회장바닥을 덮었다.

그들모두가 투항주의정책의 대변자, 추종자들이였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정변의 서막인 연회장에서의 거사가 뜻대로 진행되자 연개소문은 곧 자신이 직접 날랜 군사들을 이끌고 왕궁으로 달려갔다. 궁전안으로 들어간 그는 낮잠을 청하다가 소란한 왁자지껄소리에 놀라 깨여나 영문도 모르고 어안이 벙벙해있는 영류왕에게 칼세례를 안겼다. 바닥에는 피가 랑자하게 흘렀다.

정변은 성공하였다.

연개소문은 뒤이어 영류왕의 조카벌되는 보장을 왕위에 올려놓고 고구려의 최고관직인 막리지가 되여 나라의 정치, 군사적실권을 모두 자기 손아귀에 틀어쥐고 이전과는 다른 강경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친당적인 투항주의에서 벗어나 강대국으로서의 당당한 체모를 과시하게 되였다.

연개소문의 정변은 당시 평화유지의 명목밑에 외부의 침략세력에게 굴복하면서 사대주의적경향에로 기울어지던 투항분자들을 단호히 제거하고 고구려인민들의 지향에 맞게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존엄을 지키는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는 점에서 력사적으로 긍정적이며 진보적인 정변이였다고 평가할수 있다.

《이제는 누구도 감히 대고구려를 어쩌지 못한다.》

그때 연개소문은 아마도 이렇게 웨쳤을것이다.

사실상 그후 연개소문이 실권을 잡고있은 20여년간의 력사는 고구려가 자기의 강대성을 남김없이 과시한 빛나는 력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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