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왕의 결단성​

고구려가 1000년가까이 중세동방의 강국으로 위용을 떨칠수 있은것은 강력한 군사력, 국력에 기초하여 모든 대외관계에서 독자성을 견지하고 결단성있게 모든 문제를 처리해나갔기때문이였다.

6세기 말-7세기 초에 이르러 조성된 정세는 고구려로 하여금 대외정책에서 그 어느때보다도 결단성있는 립장을 취할것을 요구하였다. 바로 이러한 시기인 590년 10월에 고구려에서는 경원왕이 죽고 그의 맏아들인 태자 대원이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영양왕이였다.

이때로 말하면 고구려가 대성산의 안학궁성으로부터 평양의 장안성(오늘의 평양시 중심부)으로 새로 수도를 옮겨온지 5년째 되는 해였다.

영양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주변정세의 변화를 예리하게 살피였다.

남쪽에서는 오래전부터 진척되여오던 국토통일위업이 백제와 신라의 완강한 저항으로 크게 성과를 보지 못하고있었다. 게다가 고구려의 서쪽정세도 심상치 않았다. 581년에 성립된 수나라는 처음부터 주변나라들 특히 고구려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성립이후 몇해사이에 돌궐과 거란을 비롯한 여러 세력들을 제압하여 자기 편으로 끌어당긴 수나라는 589년에 진나라(557년-589년 중국 남쪽나라들중의 하나)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중국대륙을 통일하였다.

이렇게 되자 수나라통치자들의 눈길은 동북방의 강국 고구려에로 돌려졌다. 중국을 통일하고 수나라를 세운 문제는 이제 와서 고구려까지도 예속시키는것을 기본적인 대외정책으로 내세우고 그 준비를 다그쳐나갔다. 그리고 료서지방에 영주를 새로 설치함으로써 고구려의 서변에 직접 압력을 가해나섰다.

대륙정세가 이렇게 변화되는 형편에서 고구려는 제때에 정세를 포착하고 해당한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을수 없었다.

영양왕은 수나라의 침공기도가 명백해진 조건에서 남방진출을 계속 밀고나가면서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곡식을 저축하여 국방력을 강화하는데 보다 더 큰 힘을 넣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나라에 대하여 강경정책을 썼다.

이와 함께 사절단의 명목으로 수나라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그의 내정을 탐지하게 하는 한편 수나라의 무기기술자들을 매수하여 그 나라의 무장장비수준을 알아내였으며 수나라를 고립시키기 위한 외교전을 힘있게 전개하였다.

이렇게 몇해가 지난 597년 수나라 문제는 저들의 내부가 안정되고 이제는 고구려를 제압할수 있다고 여겨지자 고구려의 영양왕앞으로 국서라는것을 보내여왔다.

그는 글에서 오만하게도 고구려가 저들에 대하여 성의와 례절이 극진하지 못하다느니, 고구려왕을 내쫓고 저들의 관리를 보내겠다느니, 자기의 신하가 되라는 등 고구려의 자주권을 심히 침해하는 주제넘은 소리를 한바탕 늘어놓았다. 그리고 《료수(료하)의 너비가 장강에 비하여 어떠하다고 생각하며 고구려의 인구가 진나라에 비하여 어떻다고 보는가.》라고 하면서 진나라를 멸망시킨 자기들의 《강대성》을 시위하는것으로써 영양왕을 위협하려 들었다.

이것은 사실상 고구려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영양왕은 분기가 치밀어 올라 손아귀에 그 종이장을 움켜쥐였다.

(무엄하기 그지없도다. 나라라고 생긴지 기껏해야 십몇년, 중국을 통일한지 8~9년밖에 안되는것들이 900년력사를 자랑하는 우리 대고구려를 얕잡아보고 덤비다니. 이것이야말로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는 격이로다. 고구려의 본때를 보여줄테다! 사태가 위급한데 결단을 못하면 재앙이 그칠새 없다.)

이렇게 결심한 영양왕은 598년 정월에 자신이 직접 말갈인부대 1만여명을 이끌고 료서지방의 영주(료녕성 조양부근)를 들이쳐 무력시위를 단행하였다.

그러자 수나라 문제는 그래도 중국을 통일한 여세가 있다고 여겼던지 이해 여름에 100만의 대군을 내몰아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한갖 객기에 불과한것이였다.

수나라군대는 고구려의 료하방어선을 돌파해보려고 여러차례 공격해왔으나 용감한 고구려군사들의 완강한 방어에 부딪쳐 료하동쪽의 고구려땅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였다. 그러는사이에 장마철에 접어들어 수나라군대는 후방수송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아 식량이 떨어져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였다.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퍼져 수많은 군사들이 병들어 죽었다. 한편 바다길로 쳐들어오려고 하던 적수군은 도중에 풍랑을 만나 숱한 함선들이 파손침몰되고 거기에 탔던자들이 수없이 물에 빠져죽었으며 더러는 고구려수군의 반격을 받고 쫓겨가고말았다. 더는 견딜수 없게 된 적들은 줄행랑을 놓기 시작하였다.

고구려군은 퇴각하는 적들을 추격하여 또다시 섬멸적타격을 주었다.

이 전쟁에서 수나라군대가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빠졌는가 하는데 대하여 당시 전쟁상황을 기록한 그들의 문헌들에서조차 그해 수나라군대가 고구려에 쳐들어왔다가 죽은자는 열에 여덟, 아홉이였다고 썼다.

이것은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르며 분수없이 날뛰던자들에게 차례진 응당한 귀결이였다.

결국 문제자신도 604년 제 아들 양광에 의해 독살되고말았다.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고 양광(수양제)은 문제보다도 더한 호전광이였다.

598년 전쟁에서 제 애비가 당한 참패를 교훈으로 삼을 대신 놈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한 전쟁준비에 더욱 혈안이 되여 미쳐날뛰였다. 전쟁에 충당할 군마를 바치지 못하면 참형에 처하도록 하고 그때문에 군마의 한필값이 10만전으로 껑충 뛰여오른 사실과 수많은 인민들을 함선건조에 내몰아 밤낮이 따로없이 물속에 들어가 일하도록 강요한것으로 하여 허리아래에 구데기가 쓸어 부역에 끌려나온 사람들중 죽은 사람이 열에 3~4명씩 되였다는 사실 등은 다 이때 있었던 일들이다.

이렇게 만단의 준비를 갖춘 다음 612년에 또다시 300만대군을 내몰아 고구려를 건드려보았으나 이것 역시 맨발로 바위를 차는 격이 되고말았다.

고구려는 명실공히 강대국이였던것이다.

물론 이 전쟁에서 고구려의 군민이 단합된 힘으로, 열렬한 애국심과 불굴의 기개, 용감성으로 침략자들을 쳐물리쳤다는것은 두말할것도 없다.

바로 여기에는 고구려인민들의 높은 애국심과 상무기풍에 바탕을 둔 강대한 군사력이 안받침되였다. 예나 지금이나 국력은 곧 군사력에 의하여 담보되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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