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손발을 얽어맨 료동성​

612년 고구려땅에 침략의 더러운 발을 들이밀었던 수나라의 수백만 대군은 무주고혼이 된 숱한 시체만을 고구려의 들판에 너저분히 남겨놓은채 도망치고말았다. 이 전쟁에서 적 9군을 전멸시킨 살수전투는 침략자들로 하여금 고구려와의 전쟁을 포기하고 퇴각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로 되였다.

료동성전투도 그에 못지 않게 전쟁국면에 큰 영향을 준 싸움의 하나였다. 수양제는 바로 여기서 발목이 잡혀 고구려침략의 야욕을 채우지 못했던것이다.

수나라침략자들이 료수(료하)계선에서 고구려군의 완강한 방어에 부딪쳐 한달동안이나 간난신고하던 끝에 겨우 그것을 건너섰는데 또 이번에는 료동성이라는 거대한 성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오늘의 중국 료녕성 료양에 있었던 료동성은 태자하(당시의 오렬수)를 동쪽과 북쪽의 자연적인 해자로 삼고 서쪽과 남쪽은 해자를 파서 태자하의 물을 끌어들여 채워놓았으므로 문자그대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해자라고 하는것은 평지에 건설한 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그 둘레에 깊은 도랑을 파고 물을 채워놓은것을 말하는데 강물을 해자로 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료동성은 군사적견지에서 볼 때 비교적 많은 군사들과 인민들이 살고있던 고구려서북방의 큰 중심지의 하나로서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성이였다. 료동성이 함락되면 고구려의 전방방위체계는 중간지탱점을 잃고 허리가 잘리워 두 동강이 날수 있었다.

이런데로부터 고구려는 여기에 많은 군사들을 배치하고 그 주변성들의 군사들과 협동하여 적들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수양제도 이것을 모르지 않았다. 료동성을 에돌아 고구려의 도읍으로 뚫고들어가자니 앞뒤에서 고구려군의 협격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수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가지고 료동성쯤이야 삼키지 못하겠는가 하는 타산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그 타산이 닭알로 바위를 치는 격으로 될줄이야.

수양제는 거의 70~80만에 달하는 기본전투부대의 대부분을 내몰아 료동성을 몇십겹으로 포위하고 온갖 공격수단들을 다 동원하여 집중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하지만 용감한 고구려의 군민은 성이 파괴되면 지체없이 그것을 보수하고 달려드는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겼다. 그리고 밤이면 날랜 정예군사들을 성밖으로 내보내여 적의 숙영지를 들이쳐 적들을 소멸하고 피로케 만들었다.

그리하여 적아간의 공방전은 한달나마 지속되였다. 싸움이 장기화됨에 따라 적들은 막대한 손실을 당하였다.

이렇게 되자 적군졸들은 물론이고 적장들속에서는 공포증에 사로잡혀 싸울 의욕을 잃고 싸움을 회피하는자들까지 나타났다.

숱한 병력을 료동성공격에 들이밀고 료수가에 설치한 장막안에 앉아 고구려의 항복을 받아내는 환각에 빠져 료동성에서의 승전보고를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고있던 수양제에게 뜻밖에도 련전련패의 패보만이 잇달아 날아들었다. 그는 속이 뒤틀렸다.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현지의 장수들로부터 멀지 않아 료동성을 함락할수 있다는 희소식을 받아오던 그였던것이다. 그렇지만 열흘이 가고 스무날이 지나고 한달이 넘도록 아무런 소득이 없게 되자 적장들은 더는 거짓보고로써 패전의 실상을 감출수 없었다.

료동성함락이 당초의 계획대로 진척되지 못하고 또 부하들한테서 이제껏 속히운것에 부아가 치민 양제는 자기가 직접 료동성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진영에 출두하였다. 제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성의 남쪽에 이르러 성의 형세와 전장을 둘러보는 수양제의 눈이 경련으로 푸들거렸다.

성은 몇군데인가 파괴되였던 흔적이 있을뿐 성벽우에는 고구려군의 기발들이 펄럭이고 창들이 삐죽삐죽 나와있었다. 성벽아래로 눈길을 돌리니 거기에는 저희네 군사들의 시체와 병쟁기들이 너저분하였다.

(어디 이럴 법이 있는가. 수십만이나 되는 군사들이 저렇게 되다니. 저 료동성이 과연 옛말에 나오는 금성탕지라도 된단 말인가.)

밸이 울컥거린 수양제는 몸을 돌려 부릅뜬 눈으로 장수들을 쏘아보았다.

그 시야에 든 적장들은 속이 섬찍하여 목을 움츠렸다. 이제 저 입에서 어떤 불호령이 터져나올지 모른다.

아니나다를가 수양제의 이즈러진 입술이 벙긋하고 열렸다.

《공들은 자기들의 벼슬이 높은줄 아는가. 또 가문의 세도를 믿고 이토록 나를 암둔하고 나약한 놈으로 대하려 드는거냐. 그러니 전일 장안에 있을 때 공들이 모두 내가 오는걸 원치 않은것은 이렇게 패전당하는걸 두려워 한 까닭이였도다. 내가 지금 여기로 온것은 바로 공들이 하는것을 보아서 목을 칠것은 치자는것이다.

공들이 죽음이 무서워 힘을 다하려고 하지 않는데 형벌은 두렵지 않은가. 그래 내가 공들을 죽이지 못할줄 아는가.》

적장들은 모두 낯색이 시꺼매졌다. 지어 공포로 하여 사지를 덜덜 떠는 놈들도 있었다.

그러는 그들에게 양제는 마지막엄포를 놓았다.

《누구든 금후 다시 명령을 어길 때는 참형을 면치 못하리라.》

그는 장수들을 엄하게 신칙하여 또다시 료동성공격에로 내몰았다. 지휘는 제가 직접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형세가 호전된것은 아니였다.

료동성의 인민들과 군인들은 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에 더욱 분발하여 떨쳐나섰다.

이렇게 되자 수양제는 6월말 9개 군으로 편성된 30만의 정예군사들을 뽑아 고구려의 후방깊이에 들이밀었다. 고구려의 임금이라도 잡아 항복을 받아내자는 심산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이 궁여지책은 9군이 고구려의 유인매복전술에 걸려 살수계선에서 섬멸적타격을 받음으로써 물거품처럼 산산이 흩어지고말았다.

9군의 패보에 접한 수양제는 료동성공격을 포기하고 총퇴각명령을 내리지 않을수 없었다.

결국 수나라침략자들은 료동성이라는 견고한 요새에 석달씩이나 손발이 잡혀 수치스러운 참패의 쓴맛을 보았던것이다.

료동성군민의 영웅적인 항전은 612년 고구려-수전쟁에서 고구려가 종국적승리를 이룩하는데 큰 작용을 하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고구려군민의 영웅적인 항전내용은 전해지지 않고있다. 하지만 구태여 기록에 올라있지 않아도 그때의 싸움마당을 그려보는것은 어렵지 않을것이다.

료동성의 애국적인 군사들과 인민들은 613년 또다시 쳐들어온 수나라침략자들을 쳐부시는데서도 무비의 용감성을 발휘하였다.

이때에도 료동성은 적들에게 겹겹이 포위되였다.

수양제는 한해전에 당한 수치를 만회해보려고 처음부터 필사적으로 발악하였다.

적들은 비루(성을 우에서 공격하기 위하여 높은 다락을 설치한 성공격기재), 충차(성벽을 치는 기구가 설치된 수레), 운제(높은 사닥다리)로 공격하기도 하고 땅속굴을 파서 쳐들어오려고 하는 등 별의별 수단과 방법을 리용하여 사면에서 동시에 달려들었다. 여기에는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군민은 적들의 기도를 제때에 간파하고 림기응변의 방어대책을 세움으로써 성을 굳건히 고수하였다.

20여일이 지나도록 성이 끄떡하지 않자 수양제는 이번에는 전술을 바꾸어 100여만개나 되는 자루에 흙을 채우고 그것으로 너비 30보(약 50m)에 높이가 성벽높이와 가지런히 큰 뚝같은것을 쌓아올리게 한 다음 군사들을 올려보내여 공격하게 하는 한편 높이가 성보다 높고 바퀴가 8개나 달린 높은 다락수레를 만들어 뚝의 좌우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면서 화살을 쏘게 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무렵 수나라의 본국내부에서 례부상서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수양제는 대경실색하였다. 고구려정복은 고사하고 제놈의 황제자리마저 위태롭게 된것이였다. 그런데다가 이번에는 양현감과 그전부터 친밀한 사이였던 병부시랑 곡사정이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것이 두려워 고구려측에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수양제는 하는수 없이 군수물자, 기자재 등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천막, 진지들도 그대로 둔채 밤중에 은밀히 퇴각하고말았다.

이처럼 료동성은 7세기 초엽 이른바 대국의 행세를 하며 고구려를 깔보고 덤벼든 수나라침략자들에게 호된 타격을 주고 고구려의 자주권과 존엄을 고수하는데서 믿음직한 요새로 남아있었다.

물론 여기에 고구려의 군민이 발휘한 열렬한 애국심과 용맹성이 안받침되였다는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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