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과 대답
원래 《우리》라는 표현은 자기와 함께 자기와 관련되는 여러 사람을 다같이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그러나 공화국에서는 《우리》라는 말속에 모든 사람들이 서로 믿고 사랑하는 사회의 참모습과 함께 서로 돕고 이끌어주는 사람들사이의 관계속에서 가장 고귀하고 영예로운 칭호라는 새로운 의미도 반영되여있습니다.
《우리》라는 호칭은 그 어떤 관직이나 명예칭호가 아니라 대중이 일군들에게 주는 가장 값높은 표창이며 존경과 사랑, 믿음과 친근감의 대명사입니다.
주체91(2002)년 1월
부대의 여러곳을 돌아보시던
한 일군이 이곳 부대지휘관들이 부대를 잘 꾸리고 튼튼한 생활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였다고 보고드리자
이렇듯 우리 공화국에서 널리 불리워지는 《우리》라는 호칭은
김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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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상업이라고 할 때 그것은 상품을 팔고사는 활동이 전문적으로 수행되는 경제분야 또는 그러한 경제활동을 말합니다.
사회주의사회에서 국가와 협동단체가 진행하는 인민들에 대한 공급사업인 사회주의상업과 자본주의적사적소유에 기초하여 리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상업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회주의상업은 자본주의상업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회주의사회에서 상업의 본질은 인민들에 대한 공급사업입니다.》
사회주의상업과 자본주의상업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볼수 있습니다.
ㅡ 첫째로 자본주의상업의 목적이 인민대중을 기만하고 착취하는데 있다면 사회주의상업의 목적은 인민대중의 복리증진과 생활상편의보장에 복무하는데 있습니다.
ㅡ 둘째로 자본주의상업이 도시와 농촌간의 대립과 차이를 심화시킨다면 사회주의상업은 도시와 농촌간의 차이를 없애는데 이바지합니다.
ㅡ 셋째로 자본주의상업이 자연발생성, 무정부성속에서 이루어진다면 사회주의상업은 고도의 조직성과 계획성을 띱니다.
ㅡ 넷째로 자본주의상업의 리윤이 전적으로 자본가들의 치부에 돌려진다면 사회주의상업의 리윤은 전체 인민의 복리증진과 사회주의적확대재생산을 위한 축적에 돌려집니다.
박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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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는 본질에 있어서 민족의 자주성을 옹호하고 실현하는 문제입니다.
자주성을 민족의 생명으로 보고 온 민족이 단결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옹호하고 실현하며 민족공동의 번영을 이룩하여야 한다는것이 우리의 주체적민족관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민족자주의 원칙은 민족의 운명개척을 위한 모든 투쟁을 민족공동의 요구와 리익에 맞게 민족자체의 힘으로 벌려나가기 위한 원칙입니다.
민족대단결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도 민족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인것만큼 민족의 대단결은 철저히 민족자주의 원칙에 기초하여야 합니다. 오직 민족자주의 원칙에 기초하여 전민족대단결을 이룩할 때에만 우리 민족이 자기 운명의 참다운 주인으로 될수 있고 조국통일과 민족번영의
그러므로 민족자주의 원칙이야말로 민족문제해결의 핵이며 전민족대단결의 기초의 기초로 됩니다.
허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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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개 민족은 각이한 계급과 계층으로 이루어지며 민족안에서 계급, 계층의 요구와 리해관계는 서로 대립될수도 있고 일정한 차이를 가질수도 있습니다.
사상과 제도가 서로 다른 북과 남으로 갈라져있고 해외에도 수많은 동포들이 있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계급, 계층의 요구와 리해관계는 서로 다릅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계급, 계층의 요구와 리해관계는 결코 민족대단결의 기초로 될수 없습니다. 민족이 북과 남으로 갈라져 서로 다른 사상과 제도를 가지고있고 계급구성이 복잡한 우리 나라에서 민족대단결의 기초로 될수 있는것은 결국 민족의 공통된 리해관계입니다.
오늘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계급과 계층을 초월하여 모두가 공감하고 바라는 공통된 리해관계는 조국통일입니다. 나라의 분렬로 하여 우리 민족이 당하는 불행과 고통은 민족의 모든 성원들에게 다 미치고있습니다.
조국통일을 실현하는것은 민족의 매 성원들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는 사활적인 리해관계로 되고있습니다. 그러므로 조국통일은 우리 민족의 공통된 리해관계이며 계급적리해관계와 대립되지 않으면서도 우리 민족을 사상과 제도, 정견과 신앙의 차이를 초월하여 서로 단합할수 있게 하는 민족대단결의 기초로 됩니다.
허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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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싶이 우리 공화국에서 청년들은 시대의 선구자이며
새것에 민감하고 진취성이 강하며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고 그것을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희생적으로 투쟁하는것은 청년들의 특질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런 특질을 가지고있는것으로 하여 우리 청년들은
사회의 가장 활력있는 부대인 청년들이 앞장에서 기세를 올리고 혁신의 불길을 일으켜야 온 나라가 들끓고 모든 전선에서
전후 재가루만 날리던 이 땅에 천리마의 기상이 세차게 나래쳐 우리 조국이 세기를 도약하며 공업화의 력사적위업을 단 14년동안에 이룩하는 기적을 창조할수 있은것도, 천리마에 속도전을 가한 기세로 사회주의건설의 일대 앙양기를 펼쳐놓을수 있은것도, 웅장한 현대적도시들과 거리들, 공장과 발전소들을 비롯하여 로동당시대를 빛내이는 대기념비적창조물들을 수많이 일떠세울수 있은것도 당의 부름따라 가장 어렵고 힘든 전선에서 진격의 돌파구를 열어나간 전세대 청년들의 영웅성과 헌신성, 견인불발의 투지를 떠나서 생각할수 없습니다.
오늘
《청년들의 힘찬 발걸음에 의해 강성할 래일은 더욱 앞당겨지게 될것이다.
언제나 곧바로,
당을 따라 앞으로!
2012 1. 26》
청년들을 시대의 주인공으로 총진군대오의 전렬에 내세워 사회주의강국의 문패를 남먼저 달게 하고 청년들의 힘찬 발걸음으로 우리
오늘 우리 청년들은 당의 부름이라면 단숨에 산도 허물고 바다도 메우며 불멸의 위훈을 창조하던 전세대 청년들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이어 당의 믿음이면 지구도 든다는 결사의 각오로 심장을 불태우며 백두의 칼바람에 돛을 달고 조선혁명의 침로따라 폭풍쳐내달리려는 담대한 배짱을 지니고 이르는곳마다에서 기적과 혁신을 창조하고있습니다.
우리 청년들은 시대의 주인공으로 내세워준 당의 크나큰 믿음을 심장깊이 간직하고 사회주의강국건설을 위한 오늘의 대격전장마다에서 영웅청년의 슬기와 용맹을 남김없이 떨쳐나갈것입니다.
차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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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공화국의 건축력사에 뚜렷한 자욱을 새기며 발전해온 주체의 사회주의건축이 오늘날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있는것은 바로 인민대중이 건축의 창조자, 향유자로서 높은 책임성을 가지고 건축창조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기때문입니다.
건축은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전면모를 직관적으로, 종합적으로 보여주기때문에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례외없이 건축창조사업에 커다란 의의를 부여하며 큰 힘을 넣어왔습니다. 하지만 그 발전속도는 시대마다, 사회마다 같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사회에서 인민대중은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며 사회의 물질적부를 더 많이 창조하여 문명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 건축창조사업에 자각적으로 참가할뿐아니라 온갖 창조적적극성과
주체의 사회주의인 우리 공화국에서 인민들은 사회의 주인, 건축의 주인으로서 건축에 직접적이며 사활적인 리해관계를 가지고있기때문에 건축창조사업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것을 창조자로서의 임무인 동시에 향유자로서의 의무로 간주하고있습니다.
하기에 우리 인민은 1950년대에는 세인을 놀래우는 《평양속도》를 창조하며
이렇게 일떠선 기념비적건축물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오늘도 우리 인민은 단 몇달동안에 하나의 거리를 일떠세우고 행복한 삶의 터전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면서 주체조선의 발전면모를 남김없이 과시해나가고있습니다.
바로 이것은 인민대중을 국가와 사회의 당당한 주인으로 내세워주시고 그들의 무궁무진한 힘에 의거하여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주체의 사회주의조선을 건설하고 강화발전시켜오신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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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민족들사이의 관계인 국제관계가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공정한 관계로 되여야 하는것은 너무나도 응당하고 자연스러운것입니다. 일부 나라들에 특권이 부여되는 현존 낡은 국제관계를 하루빨리 허물어버리고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 독자적이며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공정한 국제관계를 수립하자면 철저히 자주성에 기초하여야 합니다.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이 자주성을 지키고 자주성을 서로 존중할 때 공정한 국제관계를 발전시킬수 있으며 진실로 자주적이고 평화적이고 친선적인 새 세계를 건설할수 있다.》
자주성은 공정한 국제관계의 기초입니다.
모든 나라와 민족이 자주성을 지키고 자주성을 서로 존중할 때 공정한 국제관계가 이루어지고 유지되며 발전할수 있습니다.
ㅡ 공정한 국제관계는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이 자주성을 지킬 때 이루어지고 유지되며 발전합니다.
나라와 민족들이 자주독립국가, 자주적인 민족으로서의
ㅡ 공정한 국제관계는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이 서로 자주성을 존중할 때 이루어지고 유지되며 발전합니다.
국제관계는 어느 한 나라, 한 민족과의 관계인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와 민족들사이의 호상관계이며 그 수립과 발전은 철저히 호상성의 원칙에서 공동으로 노력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와 민족은 령토의 크기와 인구수, 경제 및 문화발전의 차이 등 온갖 차이에 관계없이 자주적이고 평등한 국제관계의 당사자입니다.
쌍무적이든 다무적이든 국제관계에서는 당사자모두의 자주적권리와 리익이 다같이 중요합니다. 어느 일방의 권리가 더 우위에 놓이고 타방의 권리가 무시되거나 어느 일방의 리익만이 중시되고 타방의 리익이 경시되여서는 공정한 국제관계가 수립될수 없으며 그 발전에 대해서는 더욱 생각할수 없습니다. 그 어느 나라나 민족도 자기의
박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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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도방법문제는 자주성을 위한 인민대중의
령도방법은
옳바른 지도사상, 지도리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실현에로 근로인민대중을 능숙하게 조직동원하는 령도방법이 없이는
그러므로
그러므로 령도방법은
이로부터
박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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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문제는 우리 나라가 어느때부터 통일국가를 이루고 발전되여왔으며 우리 나라 력사의 흐름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고려시기에 편찬된 도서 《삼국사기》에서는 우리 나라 력사발전에서 신라가 매우 큰 역할을 한것으로 보고있었으며 7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우리 나라 력사를 신라를 중심으로 서술하고있었습니다.
그것은 천하에는 오직 한 황제가 있고 한 나라에는 하나의 중심왕조가 있어야 한다고 한 유교의 정통사상, 종법사상의 립장에 선 저자의 계급적제한성과 시대적제한성 그리고 외세에 대한 사대주의적립장으로부터 력사적사실이 외곡서술되였기때문입니다.
신라는 외세와 결탁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는 하였으나 우리 나라에 하나의 통일적인 주권국가를 세우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였다고 하는것은 부당한 리치가 아닐수 없습니다.
- 우선 신라가 하나의 통일국가를 세우지 못하였다는것입니다.
신라가 외세와 결탁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는 하였으나 하나의 통일국가를 세우지 못하였고 대동강이북의 옛 고구려땅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국가가 200여년이나 존재해있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차지하고있던 령토에 두개의 서로 다른 주권국가인 발해와 신라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였다고 말할수 없다는것을 보여주고있습니다.
-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우리 나라를 강력한 통일국가로 만들려는 지향을 가지고있지 않았으며 그것을 실현할만 한 힘도 없었다는것입니다.
신라가 우리 나라를 강력한 통일국가로 만들려는 지향도 힘도 가지고있지 못하였다는것은 외세와 맺은 비밀협약내용을 보아도 알수 있습니다.
당시 신라통치배들의 대표자였던 김춘추는 외세와 련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대동강이남지역은 신라가 차지하고 대동강이북지역의 넓은 고구려땅은 외세가 차지하는것으로 흥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외세가 애초의 《약속》을 줴버리고 고구려와 백제땅을 모두 독차지하고 신라마저 강점하려고 하자 신라와 외세사이의 련합은 파괴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라통치배들은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리지 않을수 없게 되였습니다. 당시 세나라인민들이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곳곳에서 힘찬 투쟁을 벌린것만큼 신라통치배들이 삼국의 통일을 진심으로 원하였다면 그들의 투쟁을 옳게 이끌어 외래침략자들을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고 삼국을 하나로 통일할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라통치배들은 외래침략자들을 대동강이남지역에서만 몰아내고 그곳에서 자기의 통치를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에 의하여 삼국이 통일되지 않았다는것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이처럼
김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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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리윤경제에 비한 사회주의계획경제의 우월성은 개인주의에 비한 집단주의의 우월성입니다. 자본주의리윤경제가 개인주의에 기초하고있다면 사회주의계획경제는 집단주의에 기초하고있습니다.》
ㅡ 사회주의계획경제의 우월성은 경제가 생산의 직접적담당자인 근로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한다는데 있습니다.
사회주의사회에서는 근로인민대중이 생산의 주인이며 경제는 근로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합니다. 경제가 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한다는것은 착취가 없고 근로인민대중자신이 물질적부의 향유자로 된다는것을 말합니다.
원래 로동하는 사람에게 로동의 결과가 차례지게 하는 사회가 공정하고 우월한 사회입니다. 자본주의리윤경제에서는 일하지 않는 자본가들에게 창조된 재부가 점유되지만 사회주의계획경제에서는 로동의 열매가 그것을 직접 창조하는 인민대중에게 차례집니다. 사회주의사회에서 생산이 근로자들의 복리증진에 복종되고 인민생활을 높이기 위한 여러가지 시책이 실시되고있는것은 사회주의계획경제의 인민적성격을 뚜렷이 보여주고있으며 바로 여기에 사회주의계획경제의 우월성이 있습니다.
ㅡ 사회주의계획경제의 우월성은 생산을 높은 속도로 장성시키고 인민생활을 빨리 향상시킬수 있게 한다는데 있습니다.
사회주의계획경제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일적지도에 의하여 경제의 균형을 합리적으로 설정하고 축적을 우선적으로 장성시켜 생산을 늘이기 위한 밑천을 확대합니다. 사회주의사회에서는 자본주의사회에서처럼 기형적인 소비로 하여 축적원천이 줄어들고 생산과 소비를 비롯한 여러 경제분야의 불균형으로 하여 많은 자원이 랑비되고 재생산과정이 중단되는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날수 없습니다. 사회주의계획경제에서는 축적의 빠른 장성과 자원의 효과적인 리용이 계획적으로 진행됨으로써 생산이 높은 속도로 발전합니다.
사회주의계획경제의 우월성은 인민생활이 빨리 높아지는데서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축적이 빨리 늘어나고 경제가 발전하여 물질적부가 장성하는 한편 생활비수준의 제고, 가격의 체계적인하, 상품공급 및 봉사사업의 개선 등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져 인민생활이 체계적으로 향상됩니다.
계획적으로 발전하는 경제라는데 사회주의경제의 특징과 우월성, 사회주의경제건설성과의 담보가 있습니다.
ㅡ 사회주의계획경제의 우월성은 집단주의에 기초하고있다는데 있습니다.
사회주의의 사상적기초는 집단주의입니다. 집단주의는 사회주의사회의 기초이며 사회주의사상은 본질에 있어서 집단주의사상입니다. 사회적존재인 사람의 자주적요구는 집단주의를 통해서만 실현될수 있으며 사회주의사회는 집단주의를 구현한 사회입니다.
집단주의의 기본요구는 집단의 리익을 우위에 놓고 집단의 리익과 개인의 리익을 일치시키며 집단의 리익속에서 개인의 리익을 실현하는것입니다.
사회주의사회에서 집단주의는 사회주의경제의 전반에 구현되여있으며 사회주의경제는 집단주의사상에 기초하여 건설되고 발전해나갑니다. 사회주의사회에서 경제관계의 중요내용을 이루는 소유관계는 집단주의적소유로 되여있으며 분배관계 역시 로동에 의한 분배로서 집단의 요구를 반영하고있습니다. 뿐만아니라 경제발전의 기본추동력도 단결된 근로자들의
사회주의경제의 이러한 집단주의적성격은 자본주의경제와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며 사회주의경제의 우월성, 생활력의 기초로 됩니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는 근본적으로 대립됩니다. 사회주의경제냐 자본주의경제냐 하는것도 결국 집단주의경제냐 개인주의경제냐 하는 문제에 귀착됩니다. 사회주의경제는 집단주의를 기초로 함으로써 자본주의경제와 다른 본질적특징을 가지며 여기에 자본주의경제가 가질수도 흉내낼수도 없는 사회주의경제의 절대적우월성이 있습니다.
박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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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은 1555년에 일본해적떼가 전라도남쪽지방에 침입하였던 사건을 말합니다.
그해가 을묘년이였으므로 그렇게 부릅니다. 명나라 연해일대에서 해적행위를 하다가 돌아가던 일본해적떼의 한 집단이 1555년 5월 11일 70여척의 배를 타고 전라도 령암군 달량포에 침입하였습니다. 적들은 성밖에 사는 주민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략탈을 감행한 후 달량성을 포위공격해왔습니다. 달량성의 군인들과 인민들은 수량상 우세한 적들과 맞서 3일간이나 용감히 싸웠습니다. 우세한 력량으로 달량성을 강점한 적들은 한동안 이곳에서 로략질을 감행한 다음 5월 21일에는 전라도병영에, 이튿날에는 장흥부에 침입하고 24일 령암성을 공격해왔습니다. 령암성의 군인들과 인민들은 25일 적들과 치렬한 싸움을 벌리였습니다. 날래고 용감한 군인들로 무어진 습격조는 향교에 있는 적지휘부를 들이쳤습니다. 아군의 일제사격에 적장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심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령암성방위자들은 불화살을 쏘아대면서 적진지에 맹렬한 공격을 들이댔습니다. 불화살은 때마침 서풍을 타고 날아가 적들에게 불벼락을 들씌웠습니다. 바빠맞은 적들은 도망쳐 저들의 지휘부가 있는 향교안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방어군은 숨돌릴 틈을 주지 않고 왜적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들이대였습니다. 기가 꺾인 적들은 변변히 대항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향교전투에서 령암성의 군인들과 인민들은 왜적 104명의 목을 자르고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하여 무리로 쓸어눕혔습니다.
령암성전투에서 군인들과 인민들은 모두 200여명의 왜적들을 소멸하는 커다란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령암성전투에서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적들은 그후 가리포, 회령포, 록도 등지에 또다시 침입해왔습니다. 이어 왜적들은 금당도에도 기여들었다가 전라도수군의 강력한 타격을 받고 패주하였습니다. 6월 27일에는 1 000명의 왜적이 제주도에 침입하였다가 애국적인 군인들과 인민들의 강한 반격을 받고 쫓겨갔습니다. 5월 중순부터 6월 하순까지 조선남해지방의 섬들과 연해에 기여들어 살인과 방화, 략탈을 감행하던 왜적의 무리들은 애국적인 군인들과 인민들의 줄기찬 투쟁에 의하여 무리죽음을 당하고 쫓겨갔습니다.
을묘왜변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은 왜적들은 그후 수십년동안 큰 규모의 해적행위와 략탈행위를 감히 도발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김국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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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무대로 될수 있는 대지는 로야령이남의 동만땅과 남만지방에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인민혁명군이 왜 자기의 발상지이고 보금자리인 동만을 떠나 유격구해산후의 첫 원정후보지를 북만으로 정하였는가 하는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그것은 우선 북만주일대에서 활동하고있던 조선공산주의자들과의 련대성을 강화하고 그들과의 전면적인 협조, 협동, 협력의 길을 열어놓기 위해서였습니다.
동만에서 공산주의운동을 개척한 선구자, 령솔자,주창자의 대부분이 조선사람들이였던것처럼 북부만주지방에서 공산주의운동을 개척한 주동인물들의 대부분도 다름아닌 조선사람들이였습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북만의 유격운동을 개척하는데서도 선구적이며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이런 북만의 동지들이 조선인민혁명군과의 상면을 그처럼 절절하게 갈구하고있었던것입니다. 우리와의 협력을 위하여서뿐아니라 국제당과의 관계, 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관계, 중국인민과의 관계, 중국인반일부대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에게는 해명을 기다리는 문제들이 많았고 풀어야 할 고충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북만에서 그들대로의 문제때문에 남모르는 고통을 겪고있었습니다.
이런 사정으로부터
또한 1차 북만원정을 통하여 이미 그 시초를 열어놓은 북만중국공산주의자들과의 전투적동맹을 공고히 하고 새로운 시대적요구에 맞게 그들과의 공동투쟁을 더 잘하려는데 있었습니다.
반제반전을 지향하는 진보적인류와 사회주의력량의 진출앞에서 당황망조한 제국주의자들은 1930년대중엽에 들어서면서 세계의 자주력량을 반대하는 국제적련합을 강화하고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세에서
이런 정세의 요구로부터
박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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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파》나 《엠엘파》는 모두 1920년대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안에 발생한 종파들로서 맑스-레닌주의가 전파되고 로동운동이 급속히 앙양되는 당시의 시대적추세에 따라 공산주의운동에 기여든 행세식맑스주의자들, 소부르죠아인테리들로 이루어진 파쟁집단이였습니다. 이들이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과 반일민족해방투쟁에 끼친 해독은 매우 큽니다.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과 반일민족해방투쟁에서 종파주의자들이 끼친 해독은 매우 크다.》
일반적으로
특히 종파들은
일부 유격구역에서는
일제의 간계에 놀아나 반《민생단》투쟁을 극좌적으로 벌려 수많은
하기에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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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정치는 음악에 대한 깊은 조예와 독특한 철학적견해를 가지고 래일에 대한
《음악을 중시하고 음악을 정치의 위력한 수단으로 하여
음악정치는
지난날에는 음악정치라는 말자체가 없었으며 또 음악을 정치와 결합시켜본 정치가,
지난 시기 정치사에 그 말자체가 없었던
오늘 우리의 음악정치는 주체의 사회주의강국건설을 정서적으로 안받침하고있으며 전체 인민들을 문명국건설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키는데서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고있습니다.
이처럼
김국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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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필가들에 의하여
인민대중을 사상적으로 각성시키고 영웅적투쟁에로 고무추동하기 위하여서는 붓대를 중시하고 그 역할을 높여야 합니다.
이처럼
김국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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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력사》는
일찌기 열네살 어리신 나이에
하기에 우리 인민들과 세계 진보적인류는
그리하여 《불멸의 력사》라는 총 표제밑에 우리
총서 《불멸의 력사》의 첫 작품은 장편소설 《1932년》입니다.
이를 출발점으로 하여 우리
총서 《불멸의 력사》의 창작은 로동계급의
우리 나라에서 총서 《불멸의 력사》의 창작은 소설문학에서 새로운 총서형식을 개척한것으로 하여 인류문예사에 뚜렷한 자욱을 남기였으며 거대한 업적을 이룩한것으로 됩니다.
김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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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전민항쟁로선을 내놓으시고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치공작원들을 전국도처에 파견하신
함경남도 허천일대에서 수전공사장 로동자들과 많은 애국자들이 반일투쟁에 떨쳐나섰는데 그 앞장에는
청진일대의 중요공장 로동자들도 《로동자들은 단결하라!》, 《로동자는 전민항쟁의 주력》 등의 구호를 들고 일제의 군수생산을 지연시키거나 공장설비를 파괴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렸습니다.
또한 일제와 지주들의 량곡공출을 거부하는 농민들의 항쟁이 계속되였습니다.
백암 곽지봉목재소 로동자들의 폭동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로동자들과 이 지구의 수많은 화전민들이 합세하여 벌린 투쟁과 개천지방 인민들의 무장폭동, 서흥인민들의 폭동은 괄목할만 한것이였습니다.
백암의 곽지봉목재소 로동자들은 주체34(1945)년 8월 12일
주체34(1945)년 8월 15일 오전 폭동을 일으킨 함경남도 문천군 명구면(당시)일대의 수백명인민들은 파출소와 경찰관주재소에 육박하여 건물들을 들부시고 인민들을 억압하던 일제경찰들을 징벌하였으며 8월 13일 일철광산(당시) 로동자들을 비롯한 수백명의 인민들도 당소조의 지도밑에 군청과 면사무소를 들이쳐 악질주구들을 처단하고 놈들이 작성한 각종 문서들을 압수소각하였습니다.
이밖에도 평양, 함흥, 원산, 서울, 대구, 부산, 진주 등 전국도처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에 합세한 인민들의 대중적인 반일폭동이 벌어졌습니다.
전국의 여러 도시들과 농촌, 어촌들에서 일어난 인민들의 격렬한 대중적폭동에 의하여 일제침략자들은 심대한 타격을 받았으며 조국해방의 력사적시각은 더욱 앞당겨졌습니다.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광범한 인민들은 대중적폭동을 통하여 일제를 쳐부시고 조국해방의 력사적위업을 반드시 이룩하려는 조선인민의 굳센 의지와 불굴의 기상을 남김없이 떨치였습니다.
조국해방을 위한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에 합세하기 위한 반일항쟁은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들속에서도 힘있게 전개되였습니다.
그들은 공장과 광산, 탄광, 농촌들에서 태업과 파업, 집단도주 등을 대대적으로 일으켜 일제의 군수생산에 커다란 타격을 가하였으며 각지에서 격렬한 시위투쟁을 벌려 적들을 전률케 하였습니다.
이렇듯 우리 인민은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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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공화국에서는 지난 전쟁시기와 평화시기 군사임무수행중 부상을 당하고 제대된 사람들을 《상이군인》이라고 하지 않고 《영예군인》이라는 고귀한 칭호로 부르며 사회적으로 적극 내세우고 우대하는 시책을 실시하고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에는
법에는 또한 국가가 영예군인들의 건강관리에 더 특별한 관심을 돌리며 그들의 자녀들까지 특별히 보호하고 보육교양에 깊은 배려를 돌린다고 규제되여있습니다.
우리 공화국에서는 법으로 제정된데 맞게 영예군인들을 사회적으로 적극 우대하고 존경해줍니다.
영예군인들이 려행할 때에는 차표를 우선권으로 보장해주고 편의봉사기관과 렬차, 뻐스, 식당들에서는 그들의 좌석을 따로 보장하고 친절하게 봉사해주며 시내려객운수수단들은 무료로 리용하게 합니다.
뿐만아니라 영예군인학원과 영예군인공장이 있어 그들이 자기의 취미와 능력에 맞게 배우거나 일할수 있게 해줌으로써
이와 같이 자본주의나라들같으면 길가의 막돌처럼 사회의 버림을 받고있을 전상자들이 나라의 귀중한 보배로, 영예군인으로 떠받들리우고있는것이 바로 인민대중중심의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입니다.
백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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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적경영이 우월한가, 아니면 봉건적경영이 우월한가 하는 식으로 고찰해서는 옳게 풀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시 조선의 구체적인 사회력사적조건에서 어느것이 일제의 식민지지배와 략탈에 더 유리하였겠는가 하는 관점에서 풀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제국주의자들은 많은 경우 농촌에서 자본주의적경영방법을 통하여 농민들을 착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후 우리 나라에서 자본주의적경영방법이 아니라 봉건적방법으로 인민들을 착취하였습니다.
일제가 봉건적방법으로 우리 나라를 착취하게 된데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주요하게 제기되는것은 계급적지반문제였습니다.
제국주의자들이 다른 나라에 대한 식민지통치에서 가장 큰 관심을 돌리는 문제는 식민지지배의 계급적지반을 어떻게 꾸리겠는가 하는것입니다.
일제는 우리 나라에 대한 식민지지배에서 봉건지주를 중요한 계급적지반으로 삼았습니다.
일제강점전에 우리 나라에는 봉건적착취관계가 지배하였는데 이 시기에 봉건지주는 사회의 기본적인 착취자, 략탈자로서 자기 리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매국반역행위도 서슴지 않는 가장 반동적인 계급이였습니다. 일제는 지주와 같은 반동계급을 그대로 유지하고 그에 의거하여 식민지통치를 하는것이 어느모로 보나 유리하다고 타산하였습니다.
당시 우리 나라 농촌에서 지주들이 거두어들이는 소작료는 보통 수확고의 절반이상에 달하였으며 70~80%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자본을 많이 들여 현대적기술수단을 도입하는것과 같은 자본주의적경영방법을 실시하는것보다 봉건지주들을 리용하여 고률의 소작료를 통한 착취를 하는것이 저들에게 더 많은 리득을 가져다줄수 있었습니다. 또한 식민지를 뒤떨어진 농업지대로 전락시켜야 필요한 원료와 식량을 헐값으로 강탈하고 저들의 공업상품을 비싼 값으로 팔아넘길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제는 지주의 경제적지반인 봉건적토지소유관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지주들로 하여금 농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할수 있는 조건을 보장해주면서 그들을 식민지통치의 계급적지반으로 리용하였던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제가 우리 나라에서 봉건적착취관계를 유지한것은 조선의 사회발전을 억제하고 인민들을 몽매한 상태에 얽어매놓음으로써 식민지적착취와 억압을 더욱 용이하게 하려는 음흉하고 교활한 목적과 관련되여있었습니다.
김국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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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는
하나는 배타주의적경향을 가진 일부 사람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의 그릇된 책동과 관련되여있다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도적지위에 있는 일부 사람들이 일제의 간계에 넘어간것과도 관련되여있다는데 대하여 밝혀주시였습니다. 그러시면서 모든 력량을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로 집중시켜야 하며 우리 대렬내에서 일체 배타주의적이며 종파주의적인 경향을 극복하고
하기에
박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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