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의 참된 충복으로 키워준 은혜로운 품

전 전천군상업관리소 소장 정춘실동지가 받아안은 고귀한 은정에 대한 이야기

 

위대한 로동당시대는 절세위인들의 슬하에서 자라난 무수한 혁명가들이 인민을 정히 받들고 인민의 커가는 행복과 더불어 보람찬 삶을 빛내이는 인민대중제일주의의 시대이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일군들은 인민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인민들을 위하여 한몸바쳐 투쟁하는 인민의 참된 충복이 되여야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17살 애어린 처녀시절부터 크나큰 품에 안아 극진한 정을 다해 키워주시였고 오늘은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께서 값높은 영생의 언덕에 내세워주신 전 전천군상업관리소 소장 정춘실동지,

나라없던 세월 두메산골 처서군의 딸로 태여난 그의 한생에 끝없이 아로새겨진 영광에 대한 이야기는 오직 인민을 하늘처럼 떠받드시는 절세위인들의 품속에서만 엮어질수 있는 전설적인 서사시이며 인민을 위하여 멸사복무하는 조선로동당이 있기에 영원한 메아리로 울려퍼지는 우리 식 사회주의찬가이다.

 

인민의 충복이 태여난 품

 

지금으로부터 7년전인 주체102(2013)년 10월 10일 혁명의 수도 평양에서는 경애하는 원수님을 모시고 조선로동당창건 68돐을 경축하는 뜻깊은 예술공연이 진행되였다.

이날 공연장소에서는 참으로 가슴뜨거운 화폭이 펼쳐졌다. 우렁찬 만세의 환호를 올리는 관람자들속에서 자강도의 녀성공로자들을 알아보신 경애하는 원수님께서 그들을 손저어 불러주시였던것이다.

자나깨나 못 견디게 뵙고싶던 경애하는 원수님께로 한달음에 달려가 안기며 감격의 눈물을 쏟던 그 녀성들속에 정춘실동지도 있었다.

환하게 웃으시며 그들 한사람한사람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는 경애하는 원수님, 저저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바를 몰라하는 녀성공로자들…

정춘실동지는 꼭 꿈을 꾸는것만 같았다. 너무도 뜻밖에 차례진 영광의 순간이여서 미처 인사말도 제대로 올리지 못한 그였다.

그날 그는 베개잇을 눈물로 적시며 온밤 잠들지 못하였다. 경애하는 원수님의 해빛같이 환하신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어려오고 일찌기 10대의 처녀시절에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을 몸가까이 뵈옵던 그날에 다시 선것만 같아 마음을 진정할길 없었다.

주체47(1958)년 8월 5일, 한생토록 잊지 못할 영광의 그날도 이렇게 꿈만같이 찾아왔었다. 자강도인민들을 잘살게 하시려 로고의 길을 이으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 전천군의 자그마한 상점에까지 찾아오실줄 그때 누군들 생각이나 해보았던가.

지난날 자강도지방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뒤떨어진 산골이였으며 이곳 인민들은 제일 어렵게 살았다. 공화국이 창건된 해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한 농가의 구차한 살림살이에 보탬을 주시려 집주인들이 기르고있던 여섯마리의 메새를 많은 돈을 주고 사가신 이야기가 바로 자강땅에서 태여났으며 1960년대 초엽의 어느날 한 농업협동조합을 찾으신 수령님께 그곳 당위원장이 《수상님, 우리 산골사람들이 살아갈수 있도록 무슨 대책을 세워주십시오.》라고 외람된 말씀을 올린 이야기도 여기 자강땅에서 생겨났다.

언제나 심중에 저려오는 자강도인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시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정춘실동지를 처음으로 만나시기 몇시간전에 어느 한 회의를 지도하시면서 상업일군들의 역할을 높일데 대하여서도 간곡히 교시하시였다.

무거운 마음을 안으시고 회의장을 나서신 길로 자강도의 여러 단위를 현지지도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전천련합직장상점(당시)을 찾으신 때는 날이 저물기 시작한 저녁녘이였다. 인민들의 살림살이에 보탬을 주는것이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상점에 진렬된 상품들을 세세히 여겨보시고 상업일군들의 수고도 따뜻이 헤아려주시였다.

바로 그속에 17살 처녀판매원인 정춘실동지도 있었다. 나이는 몇인가, 부모는 무슨 일을 하는가, 애로되는것은 없는가 하나하나 물어주시며 인민들에게 더 잘 복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차근차근 일깨워주신 어버이수령님.

당과 국가의 전반사업을 놓고볼 때 두메산골의 한 처녀판매원이 하는 일이란 사실 반디불같이 작은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작은 불빛들이 합쳐지고 커져서 자강도인민들의 생활에 윤택을 주고 따뜻한 온기를 보태주기 바라시는 마음이 간절하시여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서 귀중한 시간을 바쳐가시며 인민을 위한 복무의 참뜻을 깊이 새겨주신것이였다.

그때로부터 3년이 지나 수도 평양에서는 전국상업일군열성자대회가 열리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진행된 그 대회에서 정춘실동지는 첫 토론을 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높이 받들고 주문대장을 만들어 수만명이나 되는 군내청년들의 시집, 장가가는 날자를 적어두었다가 그들에게 필요한 상품을 다 해결해준 이야기, 《상점에 오는 손님들에게 없다는 말을 하지 말자.》, 《직장에 진출하는 가정부인들이 바늘을 들지 않게 하자.》는 결의를 다지고 자체로 상품들을 만들기도 하고 홀로 밤길도 수백번이나 걸으면서 상품들을 구해다 공급한 이야기, 그 과정에 상점이 천리마작업반칭호를 수여받은 자랑 등 그간 사업정형을 정춘실동지는 아버지앞에 아뢰는 딸의 심정으로 토론하였다.

그가 토론을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서려고 할 때였다.

《춘실동무, 이리 오오. 여기 와서 앉소.》라고 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우렁우렁하신 음성이 대회장에 울리였다. 그가 잠시 주저하다가 곁에 와앉자 《춘실동무에 대하여 좀 이야기하겠소.》라고 하시며 자리에서 일어서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정춘실동무는 인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치는 좋은 상업일군이라고 분에 넘친 평가를 하여주시였다. 상업부문에서 그의 모범을 일반화하며 인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복무하는 기풍을 확립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석단에 앉은 당중앙위원회 일군들에게 《나는 춘실동무를 정당원으로 받아들일것을 제기하오.》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대회장에 우뢰같은 박수소리가 울리고 경탄과 부러움에 넘친 모두의 시선이 온몸에 닿을 때까지도 정춘실동지는 눈앞의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위대한 수령님의 보증으로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원의 영예를 지닌 20살의 꽃나이처녀는 이제 또 얼마나 꿈만같은 행복이 다가오고있는지 미처 다 알수 없었다.

그해 5. 1절을 맞으며 평양시경축대회가 진행될 때 동무와 같은 우리 시대의 혁신자들이 주석단에 올라가야 인민들이 좋아한다고 하시며 영광의 자리에 정춘실동지를 손잡아 이끌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9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4차대회에도 그를 대표로 불러주시는 하늘같은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나날이 한계를 모르고 커지면서 그 무엇에도 비길수없이 뜨거워진 정춘실동지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어버이사랑은 《우리 가정수첩》과 깊은 련관이 있다. 《우리 가정수첩》은 상점일군들이 인민을 위하여 진심으로 복무하자면 매 가정에 어떤 상품이 얼마나 요구되는가, 그들의 살림살이형편은 어떠한가 하는것을 구체적으로 알아가지고 그에 맞게 상품공급을 하여야 한다고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현지교시를 관철하는 과정에 정춘실동지가 판매원들과 함께 착상하여 만든것이다.

주체53(1964)년 4월 몸소 그가 일하는 상점에 또다시 찾아오시여 《우리 가정수첩》이 나오게 된 경위와 그 리용실태에 대하여 자세히 들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곳 판매원들은 주민들의 세간살이를 자기 집일처럼 돌보고있다고, 모든 상업일군들이 이 동무들처럼 일하면 인민들을 고르롭게 다 잘살게 할수 있다고 하시며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자신께서는 현지지도를 하다가도 인민들을 더 잘살게 하기 위하여 애쓰는 일군들을 만나면 제일 기쁘다고 하시면서 언제인가 농장원들의 밥사발을 좀 해결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제기하는 한 농촌일군을 두고서도 못내 대견해하신 우리 수령님께서 군내주민들의 살림살이를 빠짐없이 장악하여 돌보는 정춘실동지의 일본새를 놓고 얼마나 만족이 크시였으랴.

그로부터 얼마후 자강도에서는 강계청년발전소조업을 경축하는 강계시군중대회가 성대히 진행되였다. 몸소 군중대회에 참석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강도에서 주석단에 앉힐 녀성영웅이 없다고 하는데 성간군 외서중학교 교원과 전천공업품상점 2중천리마작업반장과 같은 사람들은 영웅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입니다, 영웅이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런 동무들이 영웅입니다라고 하시면서 정춘실동지를 또다시 시대의 단상에 내세워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정춘실동지가 무랍없이 올리는 청도 나무람하지 않으시고 다 들어주시였다. 공부를 못해 힘들다고 그가 말씀올리던 일을 잊지 않고계시다가 외국에 참관단의 한 성원으로 보내여 안목을 틔워주기도 하시고 전국상업일군열성자대회때 하신 약속을 지켜 전천공업품상점에 다시 오신 그날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식료품상점에도 가주셨으면 하는 그의 청을 들으시고 바쁘신 걸음을 돌려 또다시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였다.

주체80(1991)년 9월 26일 고령에 이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 전천공업품상점을 또다시 찾아주신데도 감동없이 들을수 없는 사연이 있다. 그 시기 자강도에 대한 현지지도길에 계시던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정춘실동지는 부업밭에서 생산한 두 이삭짜리 강냉이와 누에고치를 가지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가 가져온 강냉이와 누에고치를 받아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냉이이삭이 얼마나 큰지 오사리가 모자란다고, 누에고치도 뽕밭 한정보에서 1t 200㎏씩 생산하였으면 대단하다고 하시면서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시였다.

다심한 어버이사랑을 부어주시며 뜻깊은 기념사진까지 찍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 그날 정춘실동지는 여러해전에 크게 지은 전천공업품상점에 꼭 들려주실것을 간청올리였다. 부모에게 응석을 부리는 어린애심정이 되여 그것이 어떤 로고의 길로 이어질것인가를 미처 생각 못하고 올린 청이였으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금도 탓하지 않으시고 《아무렴, 가야지. 인민의 충복이 부탁하는건데 꼭 가겠소.》라고 자애로운 음성으로 약속해주시였다.

그때 평양에서는 중요한 대회가 곧 열리게 되여있었고 외국대표단들까지 수령님을 만나뵈올 시각을 기다리고있었다. 그런 바쁜 일정으로 하여 며칠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강도당위원회 전원회의 확대회의까지 지도하여주신 다음 평양으로 떠나는 렬차에 오르시게 되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위대한 수령님께서 렬차에서 다시 내려서시는것이였다. 영문을 몰라하는 일군들에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내가 전천공업품상점을 돌아볼것을 정춘실동무와 약속했는데 하마트면 잊을번 했소라고 하시면서 평양에서 기다리는 외국대표단을 강계로 데려오도록 하시였다. 인민의 복무자와 하신 약속을 위해 떠나던 길도 되돌아서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르며 일군들은 가슴뜨거워짐을 금할수 없었다.

이렇게 전천공업품상점을 또다시 찾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체로 번 돈으로 군내주민세대들에 질좋은 이불과 모포를 공급한 정춘실동지와 전천군상업관리소 일군들에게 대단히 고맙다고, 정말 훌륭하고 장한 일을 하였다고 거듭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인민이 하늘처럼 귀중하시고 인민에게 기쁨과 행복만을 안겨주고싶은 그 마음이 정녕 끝이 없으시기에 우리 수령님께서는 인민을 위해 아글타글 애쓰는 정춘실동지를 그처럼 기특해하시며 애지중지 보살펴주신것이였다.

위대한 어버이사랑속에서 인민의 충복으로 자라난 사람이 어찌 정춘실동지 한사람뿐이랴.

조국과 인민을 열렬히 사랑하는 참다운 혁명가의 전형들을 키워 인민이라는 바다에서 영원히 빛을 뿌리도록 하신것은 우리 수령님께서 쌓아올리신 또 하나의 위대한 업적이다.

 

동무를 전당은 적극 지지할것이라고 하시며

 

주체80(1991)년 12월 당보에는 정춘실동지가 위대한 장군님께 삼가 올린 편지가 실리여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5살때 올감자 다섯말에 잘사는 놈의 종살이로 팔려갔던 자기를 품에 안아 키워주고 내세워주신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은덕을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잊지 못한다고 하면서 정춘실동지는 편지에서 이렇게 자기 심정을 아뢰였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언제나 이 정춘실에게 힘과 용기가 모자랄 때에는 힘과 용기를 주시고 지혜가 부족할 때에는 지혜를 주시며 첫걸음마를 아이의 손목을 잡아 이끌어주는 어머니심정으로 보살펴주셨기에 힘든줄 모르고 일해오고있습니다.》

온 나라를 커다란 감동과 수령흠모의 열기로 끓어번지게 한 그의 편지에서 이 한 대목이 얼마나 하많은 사연을 안고있는가에 대하여 그때 사람들은 다 알지 못하였다.

하늘높이 자라 무성한 잎새를 펼친 아름드리거목우에는 사시장철 빛과 열을 주는 태양이 있듯이 위대한 수령님께서 베풀어주신 은덕을 순간도 잊지 않고 인민을 위하여 충실히 복무하도록 정춘실동지를 걸음걸음 이끌어주신분은 우리 장군님이시였다. 하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생전에 일군들에게 정춘실동무는 자신께서 보증을 서서 입당시켰지만 그를 참다운 인민의 충복으로 키운것은 당중앙위원회 김정일조직비서라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처음으로 정춘실동지를 만나주신 그날 주민들이 요구하는 상품이 무엇인가를 제때에 알고 그것을 가져다 팔아주는것이 상업일군들의 임무라고 하시며 인민의 충복이 지녀야 할 일본새를 가르쳐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 가정수첩》을 보아주신 날에는 사회주의상업의 좋은 본보기라고 하시면서 전국에 일반화하도록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인민의 참된 봉사일군답게 계속 일을 잘해서 위대한 수령님께 더 큰 기쁨을 드릴것을 약속하자고 하시며 정춘실동지의 손을 꼭 잡아주시던 날로부터 우리 장군님께서는 그 은혜로운 손길을 언제한번 떼여놓은적이 없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몸소 《우리 가정수첩》을 보아주신 때로부터 20돐이 되는 주체73(1984)년 4월 24일을 맞이하면서 정춘실동지와 종업원들은 자체로 생산한 누에고치로 비단이불을 만들어 군내주민세대들에 공급할 목표를 내세우게 되였다. 두해 남짓한 기간에 그 많은 량의 비단이불감을 해결할수 있는 누에고치를 생산한다는것은 사실 아름찬 과제가 아닐수 없었다. 정춘실동지와 상업관리소 종업원들은 하루에도 산을 몇개씩 넘으며 뽕을 따면서 당앞에 다진 결의를 지키기 위해 결사전을 벌리였다. 이슬과 찬비에 마를새없이 젖어있는 옷을 계속 입고 다니느라 몸에 물집이 생겨 운신하기조차 힘든 속에서 비내리는 뽕밭에 다시 들어설 때도 있었다. 쉴새없이 떨어지는 수억만개 비방울이 모두 뽕잎으로 되여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런 기적은 바랄수 없는것이였다.

하지만 하늘도 이루어줄수 없는 그 소원을 헤아려 풀어주신분은 우리 장군님이시였다. 인민들에게 비단이불을 공급하려고 정춘실동지와 종업원들이 그처럼 애쓰고있다는것을 아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전천군내 모든 세대들에 고급담요와 비단이불을 선물로 보내주신것이였다. 한날한시에 큰 경사를 맞이한 전천군인민들이 감격에 겨워 만세를 부를 때 정춘실동지를 비롯한 복무자들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며칠도 아니고 몇달도 아니고 기나긴 한생을 정춘실동지는 이런 사랑과 믿음속에서 살았다. 최고인민회의 제6기 제1차회의가 열리게 되였을 때에는 외국에 친선참관단의 한 성원으로 가있는 정춘실동지를 데려오시려 은정어린 특별비행기를 보내주시고 그가 회의에서 읽을 토론문까지 하나하나 보살펴주시며 위대한 수령님앞에 내세워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80(1991)년 12월에는 평양에 올라온 정춘실동지가 생일을 맞게 되였다는것을 아시고 은정깊은 생일상까지 차려주시였다.

그로부터 두해가 지나 위대한 장군님의 각별한 은정속에 평양에서 병치료를 받게 된 정춘실동지는 끓어오르는 격정을 담아 한자두자 쓴 편지를 위대한 장군님께 삼가 올리였다.

《…저를 친자식처럼 맡아서 키워주시고 온 나라에 영웅으로 내세워주신 어버이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영상이 계속 눈앞에 떠올라 눈물만 납니다.…》

자그마한 가식도 없이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아뢰여올린 소박한 편지였으나 그것은 이 세상의 수백수천마디 아름다운 어휘로써도 대신할수 없는 뜨거운 경의였고 충성의 맹세였으며 축복받은 인생의 아름다운 노래였다.

이렇듯 자애로운 사랑과 하늘같은 믿음속에서 성장한 정춘실동지의 삶은 지난 1990년대초 위대한 장군님께서 발기하신 정춘실운동과 더불어 영광의 절정에서 빛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꼭 맞는 방침이라고 하시면서 적극 지지해주신 이 운동이 발단된 당시로 말하면 동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수십년간 존재하여온 사회주의가 련이어 무너진 시기였다. 행성의 곳곳에서 인민이라는 말이 점차 사라져가던 그때 위대한 장군님께서 발기하신 정춘실운동은 조선은 사회주의를 끝까지 지킬것이라는, 조선로동당은 영원히 인민과 운명을 함께 할것이라는 우리 당의 립장에 대한 엄숙한 천명과도 같았다. 반동과 배신이 몰아온 검은구름이 인류의 머리우에 무겁게 드리우고 세계의 초점이 조선의 선택에로 집중되고있던 때에 우리 당의 립장이 다시한번 힘있게 표명되는 대중운동의 전형으로 상업일군에 불과한 자기를 내세워주시였으니 정춘실동지는 위대한 장군님의 대해같은 믿음에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우리 인민이 민족의 대국상을 당한 피눈물의 해에 정춘실운동선구자대회를 열도록 해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대회에 참가했던 정춘실동지가 불타는 맹세를 담아 삼가 편지를 올렸을 때에는 다음과 같은 친필서한을 보내주시였다.

《나는 동무를 믿습니다.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나라와 인민의 충복으로 사업하고있는 동무를 전당은 적극 지지할것입니다

1994. 12. 14

김 정 일

하늘처럼 믿고 살아온 위대한 수령님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찾고 부르던 정춘실동지에게 있어서 위대한 장군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믿음은 정녕 단 한시라도 떨어져서는 삶을 이어갈수 없는 은혜로운 생명소였다.

주체96(2007)년 8월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혁명령도의 그 바쁘신 속에서도 전천군상업관리소를 또다시 찾으시여 정춘실동지를 만나주시였다. 삼복철강행군길을 이어가시느라 겹쌓인 피로는 그 얼마이시랴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오히려 그의 건강부터 념려해주시면서 그간 해놓은 일들을 구체적으로 료해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당의 령도업적을 길이 빛내이려고 정성다해 일떠세운 혁명사적비를 보아주시며 형식도 좋고 내용도 좋다고 치하해주시고 전천공업품상점의 매대들을 돌아보시면서는 소장동무가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애를 쓰고있다는것이 알린다고, 사회주의의 본태가 살아있다고 거듭 만족을 표시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날 정춘실동지에게 열렬한 애국자, 불굴의 녀성혁명가, 참된 인민의 충복이라는 값높은 평가를 안겨주시였다. 한생 베풀어주신 사랑과 믿음은 산처럼 높고높건만 비단우에 꽃수를 덧놓아주시듯, 아름답게 활짝 피우신 꽃나무에 탐스러운 열매를 주렁지우시듯 하늘같은 은정을 주고 또 주시는 어버이장군님.

로동당시대가 정춘실동지와 같은 혁명가들이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의 삶을 구가하는 광활한 무대라면 그 아름다운 자욱자욱들을 비쳐주는 눈부신 빛발은 이렇듯 위대하신 어버이의 사랑과 믿음이였다.

 

충복의 삶은 영원히 빛난다

 

정춘실동지는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 못다한 충성까지 합쳐 경애하는 원수님을 더 잘 받들어모시려던 소원을 채 이루지 못하고 주체104(2015)년 7월 7일 우리곁을 떠나갔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정춘실동지가 서거하였다는 비보를 받으시고 못내 애석해하시면서 그의 령전에 화환을 보내주시였으며 애국렬사릉에 그의 유해를 안치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그리고 정춘실동지의 장례식을 그의 한생이 흘러간 전천군에서 진행하도록 세심히 보살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들과 우리 당의 뜻을 받들어 애오라지 인민을 위해 헌신해온 충복을 맞이하는 전천군사람들의 마음은 뜨거웠다. 둘러보면 크고작은 산봉우리밖에 눈에 차는것이 별로 없는 자그마한 산간벽촌에서 그처럼 절세위인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우리 당과 국가의 력사에 지울수 없는 흔적을 남긴 영웅이 배출되였다는것은 실로 가슴벅찬 일이 아닐수 없었다.

어린시절 제비다리같이 가냘픈 자기의 두다리를 감싸줄 온전한 치마 한벌 줄수 없었던 그 고장에 위대한 수령님의 뜻대로 인민의 행복을 주렁지우려 정춘실동지는 자신의 모든것을 아낌없이 바치였다. 심한 호흡부전으로 말조차 제대로 할수 없는 상태에서 평양에 있는 큰 병원으로 실려가게 되였을 때 정춘실동지는 부축하는 사람들을 물리치며 《나는 못 간다. 난 전천땅을 못 떠난다!》고 소리치다가 의식을 잃었다.

일생을 같이하여온 남편도 한해전에 세상을 떠나고 당의 배려로 평양에서 대학을 다닌 자식들도 슬하를 떠난지 오래되였지만 그가 마지막까지 기어코 전천을 떠나지 않으려고 한데는 사연이 있다.

주체80(1991)년 9월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만나주신 자리에서 지난 기간 우리 일군들이 정춘실동무가 일을 잘한다고 하면서 간부로 등용하여 평양으로 소환하겠다고 하는것을 자신께서 그만두게 하였다고 하시면서 정춘실동무는 그냥 전천군에 있으면서 영웅으로서의 역할을 계속 잘해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신 이 교시를 영원히 전천군인민들이 사랑하는 충복으로 살기를 바라시는 자애로운 어버이의 당부로 새겨안은 정춘실동지였다. 하기에 그는 언제인가 위대한 장군님께 삼가 올린 편지에서도 자기의 소원은 병원이나 료양소가 아니라 인민의 충복답게 일하다 일터에서 숨지는것이라고 진정을 아뢰였다.

전천땅 그 어디에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있었던가. 한 손님이 요구하는 상품을 구입하러 하루밤에 산짐승들이 어슬렁거리는 80리길도 서슴없이 다녀오던 처녀시절의 모습이 그 땅에 간직되여있고 판매원들과 함께 집집의 문을 두드리며 주민들의 생활에 부족되는것은 무엇인가, 새로 더 차려줄 살림도구들은 어떤것인가를 《우리 가정수첩》에 또박또박 적어가던 정깊은 얼굴도 그 땅에 속속들이 어려있다.

한번 외우기만 해보아도 우리 식 사회주의의 참모습이 후덥게 안겨오는 《우리 가정수첩》은 정춘실동지가 위대한 수령님들의 높으신 뜻을 받들어 창조한 사회주의상업의 대발명이고 영원한 본보기이다. 매 세대 가족성원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직장직위와 함께 그들의 세간살이실태가 자세히 적혀있고 돌생일, 결혼식을 비롯한 의의있는 날들과 월수입상태, 앞으로 어떤 집세간을 갖추어줄것인가를 타산한 계획까지 반영된 그 수첩을 보면 봉사구역안의 매 가정의 현재 살림살이형편과 생활향상계획을 환히 꿰들수 있었다. 주민들의 상품수요를 충족시키는것은 물론 인민생활을 고르로우면서도 계획적으로 높일수 있게 하는 《우리 가정수첩》은 당정책을 진심으로 받드는 충신, 인민을 위하여서는 그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 참된 충복들만이 착상할수 있고 스스로 떠맡아 끝까지 지켜갈수 있는 멸사복무의 기록장이다.

주체68(1979)년 10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느 한 회의를 지도하시면서 자강도인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도의 하나로서 뽕나무를 많이 심어 누에고치생산을 늘일데 대하여 다시금 간곡히 교시하시였다. 그 회의에 참가하여 자강도인민들의 생활문제때문에 그토록 심려하시는 수령님의 교시를 눈물속에 받아안은 정춘실동지는 회의장을 나서는 길로 뽕나무를 잘 키우는 어느 한 농장으로 달려갔다. 농업부문 일군도 아니고 경제지도일군도 아닌 상업일군이 제일먼저 달려온것을 보고 의아해하는 그곳 농장 일군들에게 정춘실동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받드는 일은 인민의 봉사자들인 우리 상업부문 일군들의 의무이기도 하다고 말해주었다.

애써 마련한 뽕나무모를 화차에 싣고 온 그가 종업원들과 함께 뽕나무밭으로 개간한것이 전천군 읍에서 시오리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장풍덕이다. 옛날부터 바람이 잦을새없다 하여 장풍덕이라 불리워온 그곳에 그해따라 눈이 얼마나 많이 왔던지 상품공급사업밖에 해본것이 없는 상업일군들을 데리고 무릎치는 눈을 헤치며 개간전투를 벌리자니 여간만 어렵지 않았다. 새벽부터 밤늦도록 종업원들과 함께 잡관목을 베여버리고 뿌리를 들추어내며 개간작업을 하고 밤에는 또 밤대로 뽕나무기르기, 누에치기와 관련한 기술학습을 하느라 정춘실동지는 이를 악물고 일하였다. 그런 간난신고끝에 첫해에 개간한 5정보의 땅이 후에는 수십정보로까지 늘어났다. 여기에서 해마다 뽕나무도 키우고 정보당 12t이상씩 강냉이도 생산하여 군내인민들의 생활에 보탬하였으며 나라살림에도 적지 않게 기여하였다. 일년내내 수수한 작업복차림으로 거름을 나르고 수십년전 찬비를 맞으시며 자기들의 상점을 찾아주시였던 어버이수령님을 생각하며 폭우속에서도 밭머리를 떠나지 못하던 정춘실동지를 겉모습만 보고서는 누구도 그가 김일성훈장수훈자이며 2중로력영웅,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라고 선뜻 믿지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나무에서 나오는 당으로 사탕을 만들데 대하여 가르쳐주시면 온 산판을 샅샅이 훑으며 뼈심을 들여 얻어낸 당으로 여러가지 식료품을 생산하여 인민들이 맛보도록 하였고 전군중적운동으로 외화를 많이 벌어 인민생활을 향상시킬데 대하여 강조하시면 난생처음 해보는 해리서, 은흑색여우사육에도 대담하게 달라붙어 기어이 성공시키였다.

당정책이 열가지이건, 백가지이건 끝까지 이악하게 관철하면서 정춘실동지가 이렇게 인민들의 생활을 돌보고있다는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계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는 참다운 인민의 충복이고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어느해 11월 당, 국가, 경제지도일군협의회를 지도하실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정춘실동지에 대한 기사가 한면이나 되게 실린 신문을 전체 참가자들앞에서 독보하게 하시고 신문에 실린 기사내용은 그가 해놓은 일의 몇분의 1도 안된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나는 그와 같은 인민의 충복이 매개 군에 한명씩만 있어도 정말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매개 군에 그와 같은 인민의 충복이 한명씩만 있으면 인민생활문제가 적지 않게 풀릴수 있을것입니다. 그와 같이 일 잘하는 일군이 한 200명 있으면 나라의 모든 일이 잘될것이며 사회주의건설도 더욱 앞당겨질것입니다.》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정춘실동지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키워주신 조선로동당원답게, 우리 당이 제일로 아끼고 사랑하는 인민의 충복답게 맹세와 실천을 일치시키였다. 나라가 준엄한 시련을 겪던 고난의 시기에도 변함없이 《우리 가정수첩》에 의한 봉사활동을 벌려온 그를 치하하시면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의 전사, 제자의 자세와 립장은 정춘실동무와 같이 시작과 끝이 한결같아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정춘실동지가 전천군인민들과 영결하고 경애하는 원수님의 크나큰 은정속에 애국렬사릉으로 향하던 길, 그것은 진정 떳떳한 전사의 길이였다. 인민에게 한생의 피와 땀, 넋과 량심을 깡그리 바치고 위대한 수령님들의 품, 우리 당의 품속에 영원히 안긴 혁명가의 행복한 길이였다.

그에게 있어서 인민은 곧 위대한 수령님이시였고 위대한 장군님이시였으며 경애하는 원수님이시였다. 힘들 때마다 품속에서 소중히 꺼내보던 수령님의 존함을 입당보증인란에 정중히 모신 당원증이 정춘실동지에게는 곧 인민의 얼굴이였고 장군님을 모시고싶은 간절한 소원안고 몸에 침대가 꽂힌것도 잊은채 오래도록 서있던 눈보라길이 그에게는 인민에게로 닿는 길이였다. 《장군님 뵙고싶어 죽을번 했습니다.》라고 산같이 쌓아온 그리움을 터치며 몸이 불편하던것이 어떤가에 대하여 물어보시는 위대한 장군님께 지금은 일없다고 다리를 들어 힘차게 굴러보이던 그 순결한 마음, 운명하기 며칠전까지도 일터로 향하던 그 백옥같은 진정이 한생 인민의 행복을 가꾸어온 정춘실동지의 신념이였다.

인민을 하늘처럼 떠받드시는 또 한분의 절세위인을 높이 모신것은 우리 인민과 함께 정춘실동지와 같은 충복들이 받아안은 최상최대의 행운이고 영광이다.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안겨주시던 사랑을 이어주시며 몸소 정춘실동지가 삼가 올린 편지에 은정어린 친필서한도 보내주시고 피눈물의 12월에 일흔번째 생일을 맞이한 그를 잊지 않고계시다가 은정어린 생일상도 보내주신 경애하는 원수님.

그이께서 높이 추켜드신 인민대중제일주의의 기치는 그대로 위대한 수령님들을 따라 인민의 충복들이 걸어온 길에 얹어주시는 숭고한 경의이고 그이께서 앞장에서 헤쳐가시는 위대한 멸사복무의 려정우에는 참다운 애국자, 혁명가들의 대오가 더욱 무성하게 자라나고있다.

인민이라는 성스러운 그 이름과 더불어 조선로동당이 영원하듯이 위대한 인민의 태양이 빛나는 내 나라의 무궁번영속에서 혁명가의 빛나는 전형-인민의 충복들은 영생할것이다.

주체109(2020)년 9월 3일 《로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