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6
진성봉은
그런데 이 자랑할만 한 혁명학원이 진성봉에게는 마음에 붙지 않았다. 우선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소년들과 함께 공부하기가 창피하였다.
그는 나이가 많았지만 학업기초가 없었기때문에 낮은 학년에서 공부하게 했던것이였다. 다음은 중국에서 살 때 누이의 손에서 제멋대로 자라면서 방랑생활을 많이 한 성봉이로서는 학원의 강한 규률생활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입학한지 한주일만에 성봉은 학원을 뛰쳐나왔다. 한밤중에 일어난 성봉은 학원복을 벗어놓고 자기가 입고 들어왔던 옷을 입고서 남몰래 학원을 벗어났다. 그러나 그는 갈 곳이 없었다.
김일의 집으로 가기는 싫었다. 그는 허창숙이 자기가 젖먹이때 업어키웠고 친자식처럼 사랑한다는것을 알고있었으나 오래동안 떨어져 살아오다나니 별로 정을 느끼지도 못하였다.
하여 성봉은 가루개시장부근을 떠돌면서 때로는 빌어먹고 때로는 훔치기도 하면서 살아갔다. 잠은 당시 모란봉에 많이 널려있던 방공호에 들어가 잤다.
허창숙의 속이 타서 재가 된다는것도 생각지 않았고 김일의 부관들이 자기를 찾아 안타깝게 평양시내를 훑고있다는것도 알리 없었다.
저녁녘 림산호는 대학에서 집으로 돌아오고있었다. 그는 인민군대에서 제대되면서 김책공업대학(당시)에 추천받아 입학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전쟁의 불길속에서 살아돌아왔을뿐아니라 제대되여 대학생이 된 아들을 더없이 자랑스럽게 여기였으며 아들의 대학공부를 뒤받침해주어야겠다고 하면서 부득부득 이사짐을 싸들고 평양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모란봉근처의 빈집을 꾸리고 살림을 차려놓았다.
어머니는 산호의 성공과 행복에서 여생의 락을 찾으려는듯 산호에게 있는 정성을 다한다. 산호가 대학에서 집에 돌아오면 공부하느라 힘들었겠다고 가방을 받아주었으며 가마속에 넣어 따끈히 덥혀놓은 밥과 국을 차려 저녁상을 들여와서는 옆에 앉아 아들이 하는 이야기를 미소를 짓고 들어주군 한다. 때로 산호는 피곤하여 잠을 자다가 깨여나는적이 있었는데 그때면 어머니가 곁에서 잠도 안자고 자기를 사랑스럽고 대견스러운 눈길로 지켜보고있는것을 알아차리고 가슴이 찌르르해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산호는 아직 어머니에게 전쟁시기 수안보로 가는 길에서 있은 적패잔병들과의 전투후에 형 림의호의 죽음을 목격한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였다. 어머니에게 너무나 큰 타격을 주게 될것이 두려웠고 또 어머니가 자기를 원망하지나 않겠는가 무섭기도 했다. 어머니는 맏이 의호가 남조선으로 도망쳐 생사운명을 알수 없는것으로 생각하고있었지만 어쨌든 어머니에게는 이젠 잃은 자식이였다. 어머니는 맏이를 잃은 상실의 슬픔을 산호에게 사랑을 쏟아붓는것으로 메꾸려는듯싶었다.
산호는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에 접할 때면 언제건 말하지 않으면 안될 형의 죽음에 대한 사실을 여전히 숨기고있는데 대한 죄의식과 자격지심을 느끼고있었다.
(후날에 기회를 보아 털어놓자.)
오늘도 산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야 오느냐?》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문밖으로 달려나오며 산호의 가방을 받아들었다.
《어머니, 잘있었어요?》
산호는 방안으로 들어서자 낯모를 소년이 자리를 펴고 누워있는것을 보았다.
《누구예요?》
《응, 불쌍한 애란다. 내 너무 동정이 가서…》
산호의 어머니는 료리솜씨도 있고 국수집을 운영해본 경험이 있는지라 평양에 와서 음식을 만들어 팔았다.
이날 장보러 나갔다가 돌아오던 산호의 어머니는 문밖에 한 소년이 쓰러져있는것을 발견하였다. 허약한 소년은 신음소리를 내고있었다. 머리를 짚어보니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인정많은 녀인은 소년을 데리고 들어와 방에 눕히고 약을 먹이였다.
《어쩌겠니. 열이나 좀 떨어지면 보내자꾸나.》
어머니는 산호에게 승인을 받지 않고 소년을 들인것이 안됐다고 생각하는지 소심한 어조로 말하였다.
《어머니, 잘했어요. 불쌍한 애인데 돌봐주는거야 응당한거지요. 참 잘했어요.》
산호가 칭찬하자 어머니의 얼굴에는 금시 환한 웃음이 피여오른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마음이 가볍구나. 난 혹시 네 공부에 지장을 주지 않겠는가 걱정스럽더구나. 배고프겠는데 어서 밥이나 먹자.》
어머니는 제꺽 상을 차려들여왔다. 앓는 소년까지 세명이 둥글상에 앉았다.
《넌 이름이 뭐냐?》
산호는 어려워하는 소년의 마음을 눙쳐주려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성봉이예요.》
《어서 먹어라.》
진성봉은 배가 고픈듯 허겁지겁 먹어대였다. 그 모양을 마음이 아릿하여 동정어린 눈길로 바라보던 산호가 다시금 물었다.
《넌 집이 어디 있니?》
《…》
《아버지, 어머니는 있느냐?》
성봉은 숟가락질을 멈추고 굳어졌는데 무엇인가 선뜻 말하기를 주저하고있었다.
산호는 어쩐지 이 애가 전쟁통에 부모를 다 잃은 고아가 아니겠는가 하는데 생각이 미치였다.
《됐다, 어서 마저 먹으렴.》
산호는 후에 구체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진성봉은 하루밤 산호의 집에서 자면서 병구완을 받았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대학으로 갈 준비를 하던 산호는 성봉이 잠자리에 누운채 어떤 사진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면서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성봉은 이미 열이 떨어져 몸이 한결 가벼워진것 같았다.
《넌 무슨 사진을 그렇게 들여다보니?》
성봉이 흠칫 놀랐다가 사진을 산호에게 내밀었다.
《어머니 사진이예요.》
산호는 두 녀인이 찍힌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성봉이가 친어머니를 가리켜보이였다.
《그리고 이쪽은 허창숙어머님이예요.》
산호는 사진에서 허창숙의 처녀시절 모습을 알아보았다.
산호는 형 의호가 피해를 입힌 그 녀자를 똑똑히 기억하고있었다. 김일을 처음 알게 되던 날 저녁 그의 집에 갔을 때 살뜰한 정을 받아안게 해준 녀인이였다. 그후 형 의호가 던진 수류탄에 의해 허창숙과 아들애가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제정신없이 찾아갔던 곳은 병원이였다. 그는 허창숙이 입원했다는 호실을 찾아들어갔었다. 문을 빠끔히 열어보니 김일이 등을 돌리고 앉아있었고 허창숙이 반쯤 누운 상태로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그때 산호의 눈에 안겨온 슬픔에 잠긴 그 녀자의 모습은 세월이 가도 잊혀질것 같지 않았다. 바로 그때 산호는 자기가 더는 이 세상에 살아갈 길이 없다는것을 뼈저리게 깨달으며 슬며시 문을 닫고 돌아섰던것이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이 소년은 허창숙과 무슨 인연을 맺었단 말인가.
《넌 허창숙어머니를 어떻게 알고있니?》
《허창숙어머님은 내 엄마가 되여주겠다고 했어요. 김일아버지는 아빠가 되고요.》
산호는 대학에 갈 생각도 잊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디 네 이야기를 좀 듣자. 그걸 듣기 전엔 내가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할것 같지 않구나.》
잠시후 산호는 성봉이의 운명에 깃든 모든 사연을 알게 되였다.
산호는 어머니에게 성봉이를 집에 두고 잘 돌봐줄데 대해 부탁하고 대학으로 갔다.
김책공업대학은 평북도 피현군에서 1953년 9월 평양으로 이전하였으나 전쟁전의 교사가 폭격으로 파괴된 상태여서 수도건설자들이 맨처음으로 복구한 전쟁전 로어대학(현재
산호는 로어대학교사에서 강의를 받았다. 교실에 앉아 학습장을 펴놓고 교원들의 강의에 열중하려 했으나 생각은 자꾸만 김일과 허창숙에게로 달려가고있었다.
(그들은 분명 진성봉이 혁명학원에서 달아난것을 알것이다. 지금 얼마나 성봉이를 찾고있을것인가. 그런데 성봉이는 학원은 물론 집으로도 갈념을 하지 않는다. 어찌할것인가. 김일동지부부에게 성봉이가 우리 집에 와있는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산호는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면 김일의 집을 찾아 떠날것을 결심하였다. 인차 평양시 륜환선도로건설공사에 동원될것이 예견되기때문에 대학생들은 오전오후에 걸쳐 집중적으로 강의를 받았으므로 산호는 저녁이 되여서야 김일의 집에 도착하였다.
그때 허창숙은 집에서 한영덕과 마주앉아 애타는 심정을 토로하고있었다. 한영덕은 인민군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하고있었는데 평양에 오면 꼭 김일의 집에 들려 하루밤 자고가군 하였다.
《창숙동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애가 평양에서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제 찾게 될겁니다.》
영덕은 행방불명된 성봉이때문에 속을 태우느라 며칠새에 할끔하게 여윈 허창숙을 위로하였다.
《그 애가 무슨 생각으로 학원을 뛰쳐나갔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창숙의 두눈에는 눈물이 글썽하였다.
《먹을 걱정이 있길 한가, 입을 걱정이 있길 한가. 도대체 무엇이 불만스러워 달아났을가?》
《갓 중국에서 나왔으니 모든게 마음에 붙질 않겠지요.》
그들이 이런 말을 나누고있을 때 림산호가 들어섰다. 한영덕은 오래간만에 만난 산호를 붙들고 반가운 소리를 질렀다.
《아니, 산호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소? 이게 얼마만인가?》
산호는 한영덕과 허창숙에게 인사하였다.
《그간 안녕들 하셨습니까?》
허창숙은 재빨리 손수건으로 눈을 닦고 웃음을 지어보이였다.
《산호동무, 오래간만이로군요. 내 동무에 대한 말을 애아버지에게서 많이 들었어요.》
산호는 지난날의 일이 되살아나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언제까지 자기 감정에 포로되여있을수는 없었다. 그는 창숙의 어색한 웃음과 한영덕의 우선우선한 웃음밑에 감추어진 불안의 빛을 어렵지 않게 가려볼수 있었다. 그는 단도직입으로 말을 꺼냈다.
《진성봉이를 찾고있지 않습니까?》
허창숙과 한영덕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말없이 의혹의 눈길을 주고받더니 다시 산호에게로 눈길을 돌리였다.
《자네가 어떻게 진성봉이를 아는가?》
영덕의 물음에 창숙이 말꼬리를 이어 숨찬 소리로 재우쳤다.
《우리 성봉이가 어디 있어요?》
《성봉이가 지금 우리 집에 있습니다.》
산호는 허창숙과 한영덕에게 성봉이를 알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그 애가 미쳤구나, 미쳤어.》
허창숙이 눈물이 글썽해서 뇌이다가 벌떡 일어섰다.
《산호동무, 빨리 집으로 가자요.》
영덕이 덤벼치는 창숙의 팔을 잡아당겼다.
《좀 진정하십시오. 우선 부수상동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지금 부수상동지가 성봉이때문에 얼마나 걱정하고있겠습니까.》
영덕은 아직 내각에서 퇴근하지 않은 김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성봉이를 찾았다구?》
송수화기에서 김일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산호의 집에 가있다? 허, 그거 산호가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나타났구만. 알겠소. 이젠 한시름이 놓이누만. 내 차를 보내겠으니 제꺽 가서 그 방랑자를 모셔오오.》
잠시후 창숙과 영덕, 산호는 김일이 보내준 승용차를 타고 달리였다.
창숙은 산호의 집에 도착하여 어리둥절해 앉아있는 진성봉을 무작정 끌어안았다.
《성봉아, 너 왜 그러니? 응? 왜 그래?》
창숙의 두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였다. 성봉은 말없이 머리를 숙이고있었다.
《에이, 이 애군같으니…》
영덕이가 성봉의 머리를 가볍게 툭 쳤다. 성봉이 얼떠름한 눈길로 보자 영덕은 웃으며 말하였다.
《넌 날 모르지만 난 널 잘 안다. 나로 말하면 너에게 아저씨가 되는 사람이야.》
그리고 영덕은 산호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였다.
《산호 어머니, 이 애를 돌봐주어 감사합니다.》
《뭘요, 그런데 애가 퍽 약합니다. 몸조리를 잘해야 할것 같습니다.》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어디선가 본듯 한감을 느꼈으나 그 누구도 해방전 중국동북에서 살 때 토비부대에서 만났던 그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하였다. 이윽고 창숙과 영덕은 산호네와 다시 만날것을 약속하면서 성봉이를 차에 태우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