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16
평양교외의 길은 밤이 되면 인적이 뜸해진다. 현철이와 설미는 조용한 길을 웃으며 걸어갔다.
현철이는 건설자의 한사람으로 현장에서 살았는데 설미는 상업관리소에서의 일이 끝나면 렬사릉건설장에 찾아와 자기의 지성을 바치고 돌아가군 하였다. 현철은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설미를 바래주고있었다.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서 훤한 빛을 뿌려주고 길옆에 펼쳐진 논에서는 개구리들이 소란스럽게 울어대고있었다.
사람의 감정이란 이상한것이다. 지금까지 현철이와 설미는 서로 가까이 어울리면서도 조금도 꺼리끼는것이 없이 자연스러웠는데 이날 오후 김일에게서 의미심장한 놀림을 당하고 이상한 당부를 들은 이후로 어쩐지 어색함을 느끼게 된것이였다. 현철은 이전처럼 마음대로 말이 잘 나오지 않았고 설미 또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어졌다.
그래도 현철이 인차 마음을 다잡고 어언간에 둘사이에 배회하는 야릇하고 숨가쁜 분위기를 털어버리려고 웃었다.
《내 오늘 총리동지를 다시 보게 되누만. 엄숙한분으로만 생각했는데 롱담을 곧잘 하시더란 말이야. 설미, 네 생각엔 어때?》
《나도 그래요. 총리동진 참 능청스러운분이야.》
설미도 입술을 쭝긋 내밀며 웃음을 머금었다.
《그런데 오빠가 잘못 말했지 뭐예요. 의형제라는건 또 무슨 말이예요?》
《내가 그만 실수를 했지. 그럴듯하게 말한다는게 그만 그런 말이 튀여나왔거던.》
《그래도 그런 생뚱같은 단어를 생각해낸걸 보면 오빤 수재는 수재예요.》
《넌 날 놀리니?》
《놀리긴요. 사실 오빠야 수재이지요 뭐. 난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는걸요.》
《듣기 싫다. 난 평범한 사람이야.》
갑자기 설미가 돌부리를 걷어차면서 비칠거리였다. 현철이가 제꺽 설미를 부축하였다.
《아이고…》
설미는 한쪽발을 붙들며 주저앉았다.
《아프니?》
《응.》
설미는 머리를 까닥거렸다.
《어떻게 할가? 내가 업어줄가?》
《응.》
《자, 그럼 업혀.》
현철이가 주저앉은 설미에게 등을 돌려댔다.
설미는 깔깔 웃어대며 현철의 등을 밀어냈다. 현철은 무릎방아를 찧었다.《됐어요. 이젠 일없어요.》
《정말 일없니?》
설미는 일어섰다.
《내가 업혔다간 오빠 그 약한 몸에 비틀거리다가 쓰러지고말걸, 흥―》
설미는 살룩거리며 걸어갔다.
《넌 정말 날 놀리는거니?》
현철이가 설미의 손을 잡았다.
《놀리긴? 사실이 그렇지요 뭐.》
설미는 살그머니 현철의 손에서 자기 손을 뽑아냈다. 현철은 다시금 어색함을 느끼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인적드문 길은 달빛속으로 휘연하게 뻗어갔는데 개구리들의 울음소리는 더욱더 청아하게 고요한 밤공기를 울리였다.
잠시후 설미가 입을 열었다. 처녀의 목소리는 어쩐지 쓸쓸한 애상을 담고 울리는것만 같았다.
《오빠에게 알려줄 말이 있어요.》
《무슨 말?》
《우리 아버지가 인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배치를 받았어요.》
《어디에 배치되였니?》
현철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긴장되여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지방도시의 기계공장 지배인으로 임명받았어요.》
《잘되였구만. 이젠 됐어.》
현철은 한시름이 놓이는듯 가쯘한 흰이를 드러내보이며 웃음을 지었다.
《꼭 높은 자리에 다시 올라가야만 제대로 되는것도 아니지. 그렇지 않아?》
《오빠가 그렇게 생각하니 고마와요. 하지만 아버지는 지방에 나가 생소한 공장일을 하시느라 고생이 많을거예요.》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치밀어오르는지 설미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럼 설미는 어떻게 하니? 부모들을 따라가야 하니?》
《부모들과 함께 가야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 그건… 응당 그래야지.》
현철은 가슴이 허전해짐을 느끼였다.
(그러니 이젠 설미와 헤여져야 한단 말인가. 언제까지…)
《언제 떠나니?》
《래일 저녁차로 평양을 떠나요.》
《그렇게 빨리?》
현철은 놀라서 눈이 커다래졌다.
설미는 머리를 까닥이였다.
《그런데 넌 어쩌면 그렇게 태연하니?》
《태연하지 않으면 울겠어요?》
설미가 정말 강의하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현철의 가슴을 쳤다. 그런 괴로움을 안고있으면서도 이 처녀는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있었구나. 그것도 모르고
그리고 설미와 함께 걷는 길도 이밤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콱 막히는것만 같았다. 언제나 설미와 붙어다니라고 하던 김일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는 붙어다닐래야 붙어다닐수가 없게 되였구나. 아참, 일도…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플가. 정말 견디기가 힘들구나.)
현철은 걸음을 멈추고 길옆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오빠,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야. 여기 좀 앉았다가 가자.》
설미가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현철은 머리를 푹 수그리고있다가 말하였다.
《난 정말 섭섭하구나. 넌 아무렇지도 않니?》
《나도 섭섭해요.》
《그러니 넌 평양을 떠나고 우린 마지막으로 함께 있게 되누나.》
현철은 저도 모르게 설미의 손을 잡았다. 설미는 손을 뽑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다만 가느다랗게 한숨을 쉴뿐이였다.
《정말 이렇게 끝이 나는걸가?》
《앞으로 만날 날이 있겠지요 뭐.》
현철은 눈물이 고여오르는것을 느끼면서 심호흡을 하였다.
《지금까지 늘 함께 있으면서 일을 했는데… 내가 왜 이럴가. 난 너와 헤여지는것이 이렇게 힘들줄은 몰랐댔어.》
《나도 정말 힘들어요.》
설미는 한손으로 눈물을 씻어냈다.
《다른 방법이 없을가? 네가 꼭 부모님들을 따라가야 할가?》
《따라가야 해요.》
현철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래, 물론 그래야지. 하지만 난 우리가 이렇게 헤여질줄은 몰랐어. 너무 뜻밖이야.》
현철은 일어섰다.
《가자, 이제 막차가 올 시간이 됐어.》
설미가 눈물을 씻고 일어섰다. 그들은 다시 걸어갔다.
건설장에서 뻐스정류소까지 가자면 30분나마 걸어야 하였다. 그런데 어느새 정류소까지 왔다. 정류소에는 시내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줄을 서있었다.
작별의 시각이 다가왔다. 현철이는 이제 현장으로 돌아가야 하였다.
현철이네 건설자들은 현장에 꾸린 림시건물에서 숙식하면서 일하고있다.
현철은 설미를 따라 뻐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고싶었는데 작업복바지주머니속의 공구창고열쇠가 그를 제지하였다. 그는 현장에서 작업공구들을 관리하고있었다. 건설자들은 이제 야간작업도 하고 새벽작업도 해야 하는데 그가 작업공구들을 내주어야 한다. 이런 정황에 부닥칠줄은 모르고 기껏 한시간정도 설미와 함께 있다가 현장에 돌아갈것으로 타산했던것이다.
현철과 설미는 뻐스정류소가 바라보이는 뽀뿌라나무밑에 섰다. 현철은 팔목시계를 보았다. 이제는 더 시간이 없다. 시내에서 들어오는 마지막뻐스가 나타날 시간이다.
《설미, 내가 래일 역에 나가겠어. 너도 바래주고 설미 부모님들을 바래드리겠어.》 하고 현철은 성급하게 말하였다.
현철은 설미의 손을 더듬어잡았다. 설미는 말없이 현철의 손을 꼭 잡고있을뿐이였다.
마침내 뻐스가 나타나 달려오고있었다.
(제기랄, 무슨 차가 이리도 빠르담.) 하고 현철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뻐스가 태우고 온 사람들을 다 내려놓고 기다리던 사람들을 태우기 시작하였다.
《이젠 헤여져야겠구나.》 현철은 아쉬움을 금치 못하며 말하였다.
현철은 설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가슴이 뭉클하니 젖어들었다. 훤한 달빛에 설미의 볼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보이였다. 설미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현철을 바라보고있었다.
뻐스에 마지막사람이 오른다. 별안간 현철이가 큰소리로 뻐스쪽을 향해 웨치였다.
《같이 갑시다!》
현철은 설미의 손을 잡고 뻐스를 향해 뛰여갔다. 설미를 뻐스에 태우고 손을 흔들었다. 현철의 눈앞은 뿌옇게 흐려졌다. 그는 멍히 서서 어둠속에 사라지는 뻐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이렇게 갑자기 헤여질줄은 몰랐어.) 하고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였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도 설미를 사랑하고있는줄 정말 몰랐어.)
×
그 시각에 김일은 집무실에서 자기를 찾아온 한영덕과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한영덕은 대학을 졸업하고 새 일터로 떠나기 전에 김일을 만나보고싶어 찾아온것이였다.
《기계공장 지배인이라…》 하고 김일은 영덕의 새 배치지를 두고 혼자말처럼 뇌이였다.
《자그마한 기업소입니다.
《은근히 걱정스럽습니다. 지금까지 군인으로 살았는데 제대로 지배인사업을 해내겠는지.》
《인민경제대학에서 많이 배웠겠는데 뭘 그러오. 한영덕이야 한영덕이겠지. 일을 잘해서 한영덕의 새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오.》
《알겠습니다.》
김일은 담배를 한대 붙여물고 연기를 내뿜다가 말을 이었다.
《내 오늘 대성산혁명렬사릉건설장에 나갔다가 설미를 만났댔소. 기특한 애요. 현철이와 함께 혁신자사진을 찍더구만.》
《그렇습니까?》
《영덕동무생각엔 어떻소? 그 애들이 앞으로 부부로 결합되면 좋을것 같은데…》
《나도 현철이가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그거야 어디 제 마음대로 되는 일입니까?》
《옆에서 부채질을 자꾸 해야지. 헌데 설미는 어떻게 하려오?》
《사실 설미는 계속 부모들을 따라 함께 가겠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평양에 떨구어야 할것 같습니다. 그 애는 도리상 부모들을 따라가야 한다는건데 그 애가 우리를 따라 지방에 가선 뭘 하겠습니까.》
《나도 설미가 부모들을 따라가는건 반대요. 설미도 이젠 대학을 졸업하고 당당한 사회성원이 되였는데 무엇때문에 부모들에게 수족이 얽매이겠소. 그럼 설미를 설복해서 집에 남겨놓도록 합시다. 그 애 걱정은 마오, 내가 우리 딸처럼 돌봐줄테니까.》
《고맙습니다.》
영덕은 머리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총리동지, 전 평양을 떠나기 전에 빨찌산시절의 동무들을 다 만났댔습니다. 전 동지들에게 내가 일을 바로 하지 못하여
정말 좋은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면도를 말끔히 하여 구레나룻터가 푸릿해진 영덕의 얼굴에는 심각하면서도 간절한 빛이 어려있었다. 김일은 물끄러미 영덕을 바라보며 다음말을 기다렸다. 영덕은 마음을 가다듬듯 앞상을 내려다보고있다가 눈길을 들었다.
《총리동지, 우리는 모두 총리동지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일에서 총리동지의 위치가 누구보다 크지 않겠습니까.》
김일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동무가 날 비판하는것 같구만.》
《비판이야 뭐… 그저 너무 그런 생각이 간절해지니…》
영덕은 면구스러운듯 얼굴을 돌리였다.
이윽고 김일은 《동무 말이 옳소!》 하고 크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천천히 집무실안을 거닐었다.
《그렇지 않아도 영덕동무처럼 그런 제의를 하는 사람들이 한두명이 아니요. 며칠전에도 최현, 오진우, 림춘추동무랑 한자리에 모여앉을 기회가 있었는데 우린
김일은 잠시 생각에 잠기였다가 동을 달았다.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