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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11


한설미는 머리를 푹 숙이고 대학청사를 나섰다. 그리고 정처없이 걸음을 옮기였다.

(아, 정말 이다지도 괴로울줄은 몰랐구나. 앞으로 어떻게 대학을 계속 다니나? 동무들의 얼굴은 또 어떻게 보고…)

찬바람이 쌩쌩 불면서 그의 외투자락을 쑤시고들었다. 오늘따라 몸이 오슬오슬 추워났다.

(왜 이렇게 추울가? 감기에 걸렸을가? 아니야, 고민이 심하면 이렇게 육체적으로도 불편해지는 모양이야.)

좀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해볼수록 설미는 더욱더 몸이 떨리였다.

오후에 학급 사로청(당시)초급단체위원장이 월사업계획을 발표하고 분공을 주었었다. 초급단체위원장은 한설미에게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중의 한제목을 연구발표할 분공을 주었다. 그런데 그가 연구하고 발표하여야 할 회상기의 필자는 아버지 한영덕이였다.

설미가 난처하고 딱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제대군인출신의 엄격한 초급단체위원장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아버지에게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동무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오. 준비를 잘해야겠소.》

이때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미 아버지야 철직되지 않았니?》

《그게 정말이야?》

《큰 과오를 범했어. 초급단체위원장동지가 아직 모르는가봐.》

설미는 모닥불을 들쓴것처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온몸의 피가 머리꼭대기로 올리뻗치는것만 같았다. 그다음엔 심장이 막 아파났다.

딸기빛으로 새빨갛게 물들었던 얼굴은 점차 피기가 가시듯 해쓱해졌다. 설미는 더는 그 자리에 있을수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뛰쳐나왔다. 세면장에 들어가서 한참 울고나서 다시 교실에 들어서니 초급단체위원장이 조용히 말하였다.

《설미동무, 안됐소. 너무 속쓰지 마오.》

《…》

설미는 학급 사로청원들의 눈길이 모두 자기에게 집중되고있음을 느끼였다. 그 눈빛들중에는 동정이 어린 눈빛들이 있는가 하면 마치 반동의 딸을 보듯 랭혹한 멸시의 눈빛들도 있었다. 그것이 그의 과민한 정신상태로 인한 과장된 느낌일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설미는 참을수 없는 정신적압박감을 느끼면서 가방을 싸들고 교실을 나섰고 또 제정신없이 대학구내를 빠져나왔던것이다.

그는 습관적으로 집으로 가는 뻐스를 탔다. 그러나 뻐스에서 내리자 집으로 가고싶은 생각이 없어져 다시 걸음을 옮기였다. 그의 발걸음은 모란봉기슭의 어느 조용한 숲에서 멎어섰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우거진 숲은 이불을 포근히 덮은것처럼 두터운 흰눈을 들쓰고 청신한 공기와 깊은 안정감으로 설미를 맞이하였다.

설미는 공원의자우의 눈을 쓸어내고 앉았다. 조용히 혼자서 울고싶었다.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곁에 아무 사람도 없기에 그는 마음껏 목을 놓아 울었다. 그렇게 울고나니 가슴이 좀 후련해지는것만 같았다.

모란봉기슭의 이 숲은 설미에게 정이 든 곳이였다.

그가 고민을 안고 여기 처음 왔던 때는 그 언제였던가.

숲속의 공원의자와 나무들이 추억을 불러일으켜주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설미는 상업대학입학시험을 치게 되였었다. 그런데 첫날 입학시험에서 그는 문제에 대한 답을 제대로 쓰지 못하였다.

(이젠 다구나, 대학에 입학하기는 코집이 글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절망감에 사로잡히게 되였다. 그는 대학에서 돌아오던 길에 이 모란봉기슭에서 쿨적거리며 울었다. 그때 한 대학생이 가까운 곳에서 공부를 하고있었는데 설미는 그를 보지 못하였다. 그 대학생이 울고있는 설미를 보다가 종이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대학생은 그림을 그린 종이를 가지고 천천히 다가왔다. 인기척소리에 놀란 설미는 눈물을 훔쳐내며 쳐다보았다. 그리고 대학생의 모습을 알아보았다.

그 대학생은 설미가 어렸을 때부터 알고있는 청년이였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자기 집에 몇번인가 찾아온적이 있었던 소년, 아버지 한영덕과 친근한 관계에 있는 사람의 아들이였다. 아버지들이 이야기하는 때면 소년은 설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었다.

《난 장현철이라고 해. 네 이름은 뭐니?》

《한설미…》

그리고 설미는 더 말을 하지 않고 달아나버렸다. 그후에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찾아왔으나 곁을 주지 않는 설미와는 더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설미를 두고 한영덕은 말하였다.

《저건 좀 모자라는 애야. 남자애들만 보면 저렇게 달아나지 않나.》

소년은 설미보다 서너살우인것 같았는데 어느새 대학생이 된것이였다.

현철은 어리둥절한 눈길로 바라보는 설미에게 다가와 말없이 그림을 주었다. 설미가 그림을 보니 자기의 모습이 신통하게 그려져있었다. 그 그림 웃면에는 《울고있는 처녀애의 모습》이라고 씌여져있고 밑에는 《용기를 내, 언제든지 희망을 잃어서는 안돼.》라고 씌여져있었다.

《고마워요.》

설미는 저도 모르게 현철에게 말하였다.

《왜 우니? 내가 뭘 도와줄게 없니?》

설미는 설레설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현철이 싱긋이 웃으며 그림을 가리켰다.

《명심해, 희망을 잃으면 안돼.》

설미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리고 그림을 손에 들고 그 자리를 떴다. 그는 자꾸 그림을 보며 생각하였다.

(그림재간이 보통이 아니야. 언제든지 희망을 잃어서는 안된다지. 희망이란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후 설미는 용기를 내여 대학입학시험을 계속 치르었다. 그 다음날시험부터는 계속 우수한 점수를 맞아 그는 성과적으로 대학에 입학할수가 있었다.

현철이의 그림과 그의 별치 않은 말이 왜 그렇게 설미에게 힘을 주었는지는 그자신에게도 똑똑치 않았다. 아마 그것은 리치로는 해명할수 없는 이 인간세계의 오묘한 감정의 작용이라고 봐야 할것이다.

그후 설미는 자주 이곳을 찾아 공부도 하고 산보도 하군 하였다.

한번은 설미가 공원의자에 앉아 외국어문장을 암송하느라 골을 썩이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한손에 책을 든 대학생을 알아본 설미는 탄성을 질렀다.

《현철오빠로구나…》

현철은 싱그레 웃으며 눈을 끔뻑했다.

《한설미… 넌 또 여기 나왔니?》

《난 여기 자주 와요. 오빠도 자주 오는것 같군요.》

《그래, 왜 그런지 난 여기가 좋거던.》

《나도 그래요.》

《넌 여기서 뭘 공부하니?》

《시험공부를 해요. 외국어시험을 치거던요. 오빠네도 학년말시험기간이 아니예요?》

《그래, 나도 시험공부하려고 왔어. 우리 함께 공부할가?》

《좋아요.》

하여 그들은 나란히 앉아 시험공부를 하였다. 현철이 건설건재대학 학생이여서 학과목에서는 차이가 많았으나 함께 공부하는데는 지장이 되지 않았다. 설미는 현철에게 자주 모를것을 물었는데 현철은 별로 막히는데가 없이 척척 대답해주군 하여 처녀의 경탄을 자아냈다.

《오빠는 수재로군요.》

《수재야 무슨… 그저 열성스레 공부를 할따름이야.》

그것이 작년도 여름에 있은 일이였다.

지금 설미는 지난날을 추억하면서 현철의 말을 다시금 입속으로 외웠다.

(용기를 내, 언제든지 희망을 잃으면 안돼.)

설미는 어쩐지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였다. 온몸이 와들와들 떨리면서 골이 아프고 뼈마디가 쑤시였다.

(이젠 집에 가자. 용기를 내, 희망을 잃지 말고.)

설미는 회전그네를 탄것처럼 눈앞이 빙빙 돌아갔다. 정신을 차리자고 안깐힘을 다하는데 한 대학생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그 대학생은 현철의 모습을 하고있었다. 설미는 자기가 허깨비를 보고있다고 생각하였다.

《너 설미로구나. 또 여기 왔니?》

하고 현철이가 묻는데 설미는 그저 멍하니 쳐다볼뿐이였다.

《너 왜 그러고있니?》

현철이가 한손으로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자 설미는 소스라치듯 놀랐다. 그리고 자기가 허깨비를 보는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오빠, 어떻게 여기 왔어요?》

《공부하려고 왔지 뭐. 넌?》

《나도 공부하려고…》

순간 설미의 발깃해진 볼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너 왜 우니? 무슨 일이 있었니?》

설미는 현철이가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있다고 생각하였다.

(차라리 다행이야.)

설미는 만약 자기 아버지에 대한 말을 하면 그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것인가를 상상해보았다.

녀자처럼 희고 매끈한 얼굴, 윤기도는 검은 머리칼을 왼쪽으로 빗어 넘겼는데 이 머리칼의 일부가 훤한 이마의 한절반을 가리우며 오른쪽에서 왼쪽눈섭우로 사선으로 내리드리웠다. 총명해보이는 눈이 예리하게 빛나고 얄팍한 입술의 량귀를 그 어떤 점으로 찍어놓은듯 움푹 들어간감이 있는 현철의 어쩐지 애티가 어린 그 얼굴이 왜서인지 두려움을 자아냈다.

이제라도 아버지에 대한 말을 듣는다면 저 얼굴이 소태라도 씹은것처럼 찌프러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당황하여 눈길을 어디에 줄지 몰라 허둥거릴것인가? 혹은 얼음이 낀것처럼 찬서리를 풍기게 될수도 있다. 왜서인지 생각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만 달리였다.

대학에서 동무들이 뭐라고 수군거리면서 자기를 쳐다보던 그 이상야릇한 눈길들이 다시금 떠오른다.

설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런데 괴로운 이 시각 현철에게 모든 사정을 다 털어놓고 위안을 받고싶고 의지하고싶은 갈망이 아프도록 온몸을 들쑤셔대는것이 무슨 까닭인지 설미는 알수 없었다.

설미의 피로감이 짙게 어린 해쓱한 얼굴에는 알릴듯말듯 한 조소가 떠올랐다. 그 조소는 다름아닌 자기자신에게 보내는것이였다.

(필요없어, 다 필요없어. 설미, 용기를 내.)

《아무 일도 아니예요. 그저 눈물이 나와요. 난 집에 가겠어요. 막 추워요.》

설미는 공원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는 걸음을 옮기려다가 쓰러질듯 비칠거렸다. 현철이가 옆에서 설미를 부축하였다.

《너 무슨 병이 생겼구나.》

《아니예요, 그저 감기가 좀 온것 같애요.》

설미는 현철이를 물리치고 안깐힘을 다해 걸음을 옮기였다. 그러나 현철은 다시금 다가들어 설미를 붙들었다.

《병원에 가야 하지 않겠어?》

《아니, 집에 가겠어요.》

《그럼 내가 집까지 데려다주겠어.》

《일없어요.》

《고집쓰지 마.》

현철은 조심스럽게 설미를 부축하고 걸음을 옮기였다.

그들은 겨우 숲을 벗어나 거리로 나왔다. 얼마쯤 더 걷자 설미는 오금을 꺾고 주저앉았다.

《설미야, 좀 기다려. 내가 차를 잡을테야.》

현철이가 차도로에 나섰는데 한대의 승용차가 달려오다가 멎어섰다.

승용차의 문이 열리더니 김일이 얼굴을 내밀었다. 김일이 아래단위에 대한 지도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였다.

《무슨 일이냐?》

현철은 김일에게 꾸벅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나서 다급히 말하였다.

《저기 설미가 급병이 온것 같습니다.》

김일이 부관에게 눈짓을 하며 함께 내리였다.

설미는 김일을 알아보고 웃어보인다는것이 얼굴을 이그러뜨리였을뿐이였다. 주저앉은 설미를 림병욱부관과 장현철이 부축하여 차에 태웠다. 현철이도 차에 올라탔다.

림병욱이 설미의 이마에 손을 짚어보며 말하였다.

《열이 심합니다.》

《일없습니다.》 설미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하였다.

김일은 설미의 얼음덩어리처럼 찬 손을 꼭 쥐였다.

《네가 어디 갔다가 이렇게 얼었니? 운전사, 차를 돌려 병원으로 가자.》

《난 일없습니다. 집으로 가겠습니다.》 설미는 도리머리를 저으며 말하였다. 《감기가 온것 같애요.》

《하여튼 병원에 가서 알아보자.》

김일의 승용차는 병원을 향해 달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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