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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1    

 

밤이면 날씨가 더 을씨년스러워졌다. 군영에서 좀 늦어 집으로 돌아온 곽주호는 돼지우리와 개우리안에 짚덤불을 푹신하게 깔아주고는 정주간으로 들어가 박씨부인이 차려주는 저녁상을 받았다.

식성이 좋은 그는 입소리를 쩝쩝 내며 음식들을 맛스럽게 들면서 흡족한 얼굴로 안해한테 고향 관북땅에는 서리가 내렸을것이라면서 래일부터 돼지우리에 새 벼짚으로 지붕을 이여주자고 하였다. 그러다가 그만 재수없이 돌을 씹었다. 박씨부인이 깜짝 놀라 제가 돌을 씹기라도 한듯 오만상을 찌프리며 쌀을 잘 일었는데 웬일이냐고 푸념질을 하였다. 그런 일에 텁텁한 위인인 화포대장은 씹은 돌을 뱉아버리고는 그냥 수걱수걱 수저를 놀렸다.

이윽고 그는 편안히 잠자보려고 이부자리속에 드러누워서야 남이장군한테 심부름보낸 구떡쇠가 생각났다. 지금쯤 그가 군영에 돌아왔을가 아니면 푸접이 좋은 그 녀석이 장군의 호의를 그냥 받아들여 그 댁 대청마루나 행랑방에서 자고오지 않을가 하고 생각했다.

그날 주호는 산에서 터밭으로 날아내린 꿩들중에서 두마리를 활로 잡고 입이 헤써해졌었다.

그러자 남이장군이 생각나 그 두마리를 꼴망태에 고스란히 넣어 구떡쇠를 파발로 띄워 장군한테로 보냈었다.

그밤 곽주호는 인차 깊은 잠에 들었다.

자정이 훨씬 지나 울바자문이 덜커덕거리는 소리가 나는듯 했다. 주호는 잠결에 바람질이 심해 널문쪽에서 나는 소리려니 하고 생각했는데 잠귀가 빠른 아낙네가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것 같았다. 아낙네는 눈이 화등잔처럼 되여 돌아와 밖에 구떡쇠가 왔는데 세상에 무슨 변이 생겼다고 다급히 말했다.

주호는 자신이 어떻게 밖으로 뛰여나갔는지 몰랐다.

어스름속에서 구떡쇠가 앞으로 다가서서 부들부들 떨다가 소리쳤다.

《장군을 잡아갔소이다. 의금부에서…》

그 목소리가 쇠바람처럼 주호의 얼굴을 후려치는듯 했으나 군졸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됐대도 믿겠지만 그 말만은 믿어지지 않았다.

《이눔, 네 눈으로 봤느냐?!》 불호령이였다.

《봤수다! 그 집을 군사들이 둘러싸는거랑 다… 다 봤소!

《그럴수 없다! 헛갈렸어. 다른 집이겠지…》

《아니요. 그 집이요!

《네놈이 밤이 돼서 헛갈렸어.

그러자 구떡쇠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울음섞인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나리, 아니믄 … 아니믄 내 목을 치시우!

《야-너 과연 정말이냐?!》 하고 화포대장도 가슴을 두드렸다.

《나리, 아니라면 얼마나 좋겠소! 군사들이 물러간 뒤 그 집안에서 마님의 통곡소리가 났소. 대문밖에 파수병이 서있어 들어가지 못했소. 내가 마님목소리를 모르겠소. 이 사람아- 애아비야- 하며 통곡했지요. 에- 참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그리고 구떡쇠는 그 복새통에 꿩이 든 꼴망태를 어디 떨궜는지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주호는 그 소리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에 들어오니 박씨부인이 이게 무슨 벼락이냐고 하며 남정네 손을 잡아비틀었다.

화포대장은 꽥 소리쳐서 아낙네를 눌러놓고는 웃방으로 올라가 자리에 쓰러져 딩굴었다. 그러다가 자리에 퍼더버리고 앉으니 울화와 비분으로 눈앞에 안개바다가 사품치는듯 하며 지나간 일들이 언뜻언뜻 떠올랐다. 녀진정벌때 남이가 군사들과 어깨나란히 화살이 비발치는 속으로 화포들을 끌어내던 일이며 녀진추장을 쓸어눕히던 일 그리고 말에 올라 천군만마를 이끌고 적진으로 날아들던 일이며 백병전에로 부르던 그 우렁찬 함성이 귀전에 쟁쟁히 울려오는듯 했다. 병조판서의 벼슬에 올라서도 화포대군영에 직접 나와 화포들의 사거리를 늘이자고 고심하던 일이며 화포안에 불이 일자 구리, 동때문에 애쓰던 일…

주호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아, 이런 충신을 의금부로 끌어가다니?!… 하는 불같은 속삭임이 새여나왔다.

(의금부에야 왕위찬탈을 꾀한 역신음모가들을 끌어가지 않는가. 어-장군이 그런 모략을 꾸몄단 말인가, 아니, 아니다. 장군은 젊었지만 기개가 높고 뜻이 깊고 심령이 투명한 장군이다. 절대 음험한이가 아니야. 헌데 무슨 언질로 오라를 지웠느냐? , 모를 일이로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데 혹시? 저이가 그토록 발호한건… 그건…자신의 시꺼먼 속내를 가리우려는 계책이였는가? 아니면 젊은 혈기와 인품이 미숙해서…? 왕가의 외손인 장군이 왕권을 뒤엎자고 할수 있느냐. 관북에서 지은 시가 한수에도 얼마나 뜨거운 충의가 어려있어? 시는 마음이라는데 진심이 없이 순 거짓으로 그렇게… 백두산석은 마도진이요… 아-)

문득 놀라운 생각이 뇌리를 스쳐 괴롭게 눈을 내리감았다가 방구석에서 타오르는 초불을 지켜보았다.

그의 크게 뜬 눈동자속에서도 작은 초불이 바르르 떨고있었다.

(혹시… 어느 악귀가 모해하지 않았을가? 거짓을 꾸며 밀고하지 않았을가?)

화포대장은 북벌전장의 고우들중에서 누구나 장군과 막역한 사이인이를 찾아가 흉금을 터놓고 의논하고싶었다. 제일 처음 떠오르는것이 강순과 어유소였으며 그리고 장군의 종사관과 류자광이였다. 강순과 어유소는 지체가 너무 높아 스스럼없이 대하기 어려운것이고 그때 종사관은 명나라로 가는 사신을 따라가서 부재중이였다.

병조참지로 벼락출세한 류자광은 만나기 좀 헐할것 같았으나 어쩐지 탐탁치 않게 여겨졌다. 자광이 종6품 벼슬자리에 오른 다음부터 화포대장을 만나도 이전처럼 반기지 않았던것이다. 곽주호는 한숨을 조용히 내쉬였다.

(그런 작자 힘은 안 빌어도 돼. 강순령상을 직접 찾아가자! 령상은 장군과 자별한 사이가 아닌가. 아니… 아니…  이 정신 봐라. 내가 왜 한명회대감을 생각하지 못했을가?

임금은 대감의 사위가 아니였던가. 색시가 귀하면 가시집 소말뚝 보고도 절한다는데… 한대감만 움직이면 된다.)

화포대장은 한명회를 움직이면 장군을 구출할 길이 열릴수 있다고 타산했다. 일이 이쯤 되자 그는 속이 넓어지고 담이 커져 류자광도 외면할것이 아니라 써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그는 한성장안의 병조를 향해 말을 달렸다. 덩지가 크고 용마루가 높은 합각지붕의 기와집들이 주런이 앉아있는 중앙관청들의 앞길에 이른 그는 느닷없이 속이 켕기고 울렁거려 말을 멈춰세우게 되였다.

썰렁한 바람이 불어왔다.

기와지붕들우의 하늘은 트레트레 흐렸고 관청들에 드나드는 관리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긴장한 빛이 어려있어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거나 웃으며 지나가는 량반들이 보이지 않았다.

곽주호는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며 망설이다가 병조로 찾아 들어갔다. 마침 류자광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새 비단관복차림에 사모까지 쓰고있던 자광은 허리를 구부정하고 방안에 들어서는 옛 화포대장을 보자 뜻밖에도 반겨 웃으며 뛰여일어나 떠들썩하게 인사말을 늘어놓았다. 그새 모두 잘 있는가, 어떻게 예까지 다 왔는가,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일이 바빠 찾아가 뵙지 못해 죄송하노라고 했다.

곽주호는 좀 어정쩡해졌으나 자리에 앉자 진중한 얼굴로 남이장군 일이 걱정되여 찾아왔노라고 했다.

《허- 벌써 게까지 소문이 갔는가유?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휴- 소인도 발편잠을 자지 못해요.

《어-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이보게, 어떤 악당이 거짓을 꾸며가지고 밀고한게 아닐가?

《그런 속내야 귀신이나 알겠는지… 휴-》

곽주호는 그한테서 방관적인 기색을 느끼자 속이 울컥해졌다.

《자네 뉘덕에 병조참지로까지 영전했나? 세상이 다 아네. 장군덕을 입은이들이 이런 때 선봉에 나서 구출해내야 하네. 나나 자네같은 사람들이…》

《구출하다니요?

《자네는 그럼 좀 도와만 주게. 내가 다하겠어. 강순령상과 한명회대감을 만날 작정이네.

《네?! 아니!

《내 생각을… 장군이 어떤 충신인가 내가 본대로 다 죄다 말하겠어. 죽으나 사나… 만날수 있게 도와만 주게!

《아아 이러지 마시오. 이런 판국에 두둔해나섰다간 참을 당하오!

《죽어도 좋네!

《몰라서 그러는데 의금부에서 알아볼대로 다 알아보고 옥에 가두었소. 생각해보시우. 왕가의 외손을 누가 감히… 확실한 근거도 없이…!

그러자 화포대장은 고개를 푹 숙이고 무릎을 쳤다.

《아, 화포대도 망했구나! 우리 화포대를 추세우자고 얼마나 고생하고 애썼다고…?!

류자광은 갑자기 그 소리에 귀가 솔깃해진듯 알릴듯말듯 고개를 끄덕이였다.

《나리, 거야 나도 좀 알지요…》

《외적이 쳐들어오면 화포들의 불소나기를 퍼부어 격멸하자고 했소…》

《참 그랬지요!

《화포들 사거리를 늘여야 한다고 했소. 사거리…!

《얼마나 늘이자고 했는가유, ?!

《적어도 개경 경덕궁까지는…》

《아니, 그 먼데까지?

곽주호는 그런것이 아니라 외적이 쳐들어와 개경 경덕궁을 점거할 때 우리 화포대는 적어도 림진강이나 그 건너 장단현까지 나가 불소나기를 퍼부어야 한다, 이것이 남이장군의 계략이였다고 했다.

《아하, 그래서 구리도 요긴해졌군요!

곽주호는 자광이 호응해나서는 기색을 보이자 더 열이 올랐다.

《그럼 그렇지! 이런 충신을 역적으로 몰다니?! 충신들을 역적으로 몰기 시작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어. 자광이, 령상하고 한대감을 만나야겠어. 자네야 병조에 있지 않나. 만날수 있도록 힘써달라구. 만날수 있는 밀로가 있을거네.

웬일인지 자광이 그를 흘깃 치떠보더니 고개를 수굿하고 턱수염을 쓰다듬었는데 그 손끝이 떨리는듯 했다.

류자광은 잠간 동안을 두었다가 갑자기 얼굴빛이 사나와지며 씹어뱉았다.

《화포대장, 참을 당하겠으면 경거망동하시오!

《참지, 내가 왜…?

《첫째로, 당신은 저 역신하고 자별한 사이겠다…》

《엉?!

《둘째로, 공모했어!

《뭐라고?

《남이가 화포대로 뻔질나게 드나든건 세상이 다 아는데 불똥이 튀여가지 않을고?

곽주호는 얼굴이 수수떡처럼 되여 자리를 차고 뛰여일어났다.

그날부터 화포대장은 밤에 눈을 붙이지 못하고 끙끙 앓음소리를 내며 이런 때 곁에 동생 주선이가 있으면 하고 속을 태웠다.

 

 2

 

남이에게 치욕적인 운명이 닥치고있을 때 경신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괴석산골안 산적들의 소굴로 들어갔다.

그곳은 해빛조차 겨우 스며드는 울울창창한 원시림지대로서 인간세상과 동떨어진 깊은 계곡인데 해가 나는 날에 수백리 수해우에 우뚝 솟아있는 괴석산꼭대기에 기여올라가면 저  멀리로 연무에 가리워진 한성쪽이 보인다고 했다.

괴석산중턱에 태조이래 배척을 당해온 불교도승들의 암자자리가 두군데 있었다. 예전에는 서울 방화폭동의 한 주모자 장원만과 그를 따랐던 몇명의 방화자들이 군사들의 추적을 피해 그 암자들에 숨어 살았는데 그후에는 세상을 등진 산적들이 사처에서 숨어들어 은둔자들의 인총이 좀 늘어났다.

밤이 이슥해서야 경신이는 구떡쇠를 따라 인왕산골안치기까지 당도했다.

이때 불쑥 아름드리나무뒤에서 두 괴한이 뛰쳐나와 앞을 막아섰다.

(산적들이구나!)

산적들 소굴로 간다는 불안감, 항간에서 떠돌던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통해 산적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있던 구떡쇠와 경신이는 화들짝 놀라 머리털이 곤두섰다.

본능적으로 앞가슴에 손을 가져가던 경신이는 품속에서 군영장이 써준 소개신이 감촉되자 얼른 그것을 꺼내 넘겨주었다. 구떡쇠는 《인삼》이요, 《도라지》요 하는 알지 못할 은어들을 내뱉으며 두사람의 신분을 설명하였다.

한참이나 두사람의 행색을 뜯어보며 이것저것 물어보던 산적들은 비로소 안심이 되였는지 긴장을 풀더니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가며 특이한 소리를 홱- 냈다.

그러자 저쪽 어둠속에서 세명의 그림자가 또 나타났다.

경신이는 공포를 느꼈다.

자기를 둘러싸고있는 이 산중 어디어디에나 이런 무서운 무리가 숨어있어 제발로 들어갈수는 있으되 마음대로 나갈수는 절대로 없으리라는, 한번 빠지면 다시는 헤여나올수 없는 미궁으로 들어선 느낌이였다.

세명의 그림자중 하나가 구떡쇠와 경신이를 호송하게끔 된것 같았다. 그들일행은 길아닌 길을 따라 잡관목들을 헤치며 울창한 수림속으로 이끌려갔다.

《퉤- 제법인데…》

구떡쇠의 두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새도록 걸어서야 목적지에 도착한 경신은 괴석산밑의 어느 한 암자로 안내되였다.

로독에 지칠대로 지친 경신은 남정네처럼 억세게 생긴 아낙네가 반겨맞아주며 밤새껏 걸어왔겠는데 누워서 빨리 쉬라며 펴주는 이부자리에 별로 사양도 못한채 쓰러지고말았다.

잠결에 문밖에서 구떡쇠와 그 아낙네가 주고받는 말마디들이 점점 멀어져갔다.

모기쑥냄새와 무슨 초약냄새가 콱 배인 아담한 방에는 어디서 난것인지 헐어빠진 삿자리가 깔려있어 구들바닥이 차지 않았다.

경신은 의식을 잃은듯 깊은 꿈나락으로 떨어졌다.

하루종일 자다가 해질녘에야 정신을 차린 경신은 멍하니 천정만 올려다보고있었다.

자기 신상에 닥쳐왔던 수많은 재난과 남이와의 남다른 사연, 인젠 구떡쇠도 가고 이 산중에 나 홀로 있다는 외로움, 착잡한 심경에 헤매이던 처녀의 눈가엔 어느덧 맑은 눈물이 피여오르기 시작했다.

암자에 홀로 있어서인지 무서운 적막감이 엄습해들었다. 바람소리, 원시림이 설레이는 소리… 나무가지들이 서로 쓸리며 내는 괴이한 삐걱소리들사이로 옛 도승들의 목탁소리며 융얼융얼 경을 읽는 소리들이 들려오는듯 했다.

이때 문지방이 벌컥 열리더니 야인들처럼 얼굴이 볕에 타서 시꺼멓게 그을린 그 아낙네가 벙글거리며 들어섰다.

경신이는 재빨리 눈물을 닦으며 일어나앉았다.

《아씨, 편안히 쉬였나요? ? 아-유- 정말 이쁘겐 생겼네. … 우리 애들이 아씨를 한번 보면 막 지랄들을 하겠네…》

《…?!

《뭐 무서워할건 없어유. 여기 있는 녀석들도 지내놓고 보면 다 좋아요, 인정두 있구… 장난이 심한 녀석들도 더러 있지만… 이 산중에 녀자라군 나 하나 있으니 적적했는데 서로 마음의지해 살면 얼마나 좋을가! 아씨! 여기 사람들은 산적이라지만 도적질만 일삼는 무리는 아니예요. 여기 장대손대장만 놓고보더라도…》

《장대손? 그인 어떤분인가요?

《뜻이 큰 사람이죠…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한테 찾아와요.

경신이는 아낙네가 뜻이란 소리를 하자 속으로 웃었다.

뜻이 높은 사람이라 자기 대장을 하늘처럼 여기는 이 녀인이 남이장군을 직접 만나보았더라면 뭐라고 할가?

《헌데 그 미남이… 글쎄 외팔이라오! 어렸을 때 돌산에서 굴러 그렇게 됐다던데… 한팔을 쓰지 못하니 외팔이지 뭐요?

아낙네는 갑자기 얘기를 중둥무이하고 문쪽을 돌아보았다. 누가 엿듣지 않나 바깥동정을 살피는것 같았다.

《외팔이란 이 말이 새나가면 큰일이요, 절대 말하지 마오.

《네…》

《대장은 지금 어디 가고 없는데 인품이 의젓하고 사람이 좋아요. 저아래 화포대 군영장하고도 자별한 사이지요.

보매 녀인은 자기 대장에 대한 긍지가 상당한 모양이였다.

비록 그의 생김새는 사내같았지만 다정다감하고 수다스러운 녀인의 훌륭한 품성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고스란히 지니고있는듯 했다.

밖에서 무슨 인기척이 난것이 이때였다. 수다쟁이 아낙네가 황황히 바깥으로 나갔다.

한참만에야 아낙네가 들어왔는데 상당히 풀이 죽은 기색이였다.

경신이는 돌변한 아낙네의 태도에 의아해졌다.

《쳇- 내 량반놈새끼들은 그저…》

누구보고 하는 소린지 아낙네는 지독한 욕질을 저 혼자소리로 부지런히 해댔다.

한참만에야 기분이 풀린 아낙네는 소곤소곤 경신이에게 말했다.

아까 비장이 아씨를 만나러 오다가 내가 하는 소리를 싹 다 엿듣고는 노발대발해서 산중비밀을 로출시켜 숱한 사람들을 잡아먹고야 속이 씨원해할 년이라고 욕질했다는것이였다.

처음이여서 용서하노라며 다시한번 그럴적엔 혀를 자르겠다는것이였다.

경신은 이 산중에 그 누군가가 세워놓은 질서, 그것도 매우 치밀하게 째인 질서가 사람들사이로 바느질하며 지나가 일단 여기에 들어온 사람은 좋든싫든 그 질서에 따라야 한다는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였다.

 … 어느덧 깊은 밤이다.

경신이네 두 녀자는 나란히 누워 이것저것 한담을 나누었다.

《아주머닌 어떻게 되여 이런델 오게 되였어요?

《여기가 어때서?

녀인은 덜퉁스레 물었다.

《아씨에겐 어떨런지… 내겐 여기가 지상천국이요!

잠시후 녀인은 자기의 인생사를 풀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미영이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경신은 저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녀인의 얼굴을 다시금 보니 이름과는 너무도 큰 대조가 느껴졌기때문이다.

녀인도 그것을 느꼈는지 하긴 여기 녀석들도 날보고 《미영아줌마》라 하지 않고 《미운 아줌마》라고 한다며 웃음을 지었다.

미영의 아버진 대장쟁이였는데 재간이 신통치 못해서인지 그들의 살림은 나날이 쪼들리기만 했다. 그럭저럭 나이를 먹어 20살이 다된 로처녀였지만 재산도 없고 인물도 못난 미영이를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겨우겨우 이웃고을에 혼처가 생겨 시아버지될 사람을 청해놓고 닭을 잡수오- 술을 드시오- 기껏 취하게 만든 다음 그날로 결혼날자까지 받아 저보다 5살 아래인 사람과 결혼을 하였는데 첫날밤 신랑이 신부의 얼굴을 보자 혼비백산해서 그달음으로 어디론가 달아나버렸다.

시집살림은 자기네 집보다 더 구차했고 시아버지는 지독한 술고래였지만 인정은 있는분이였다.

시아버지는 아들에게 소박당한 며느리의 그 문제거리얼굴을 보며 자주 한숨을 내쉬였다.

하루이틀이 지나면 들어오겠지 하고 앉아만 있던 시부모들이 나흘이 지나도록 아들녀석이 들어오지 않자 더럭 겁이 나 그제서야 수소문하면서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신랑이 집을 뛰쳐나간지 꼭 열흘이 되는 날 그날도 시부모들은 아들을 찾으러 나가고 미영이 혼자 집에서 동자질을 하다가 좀 피곤하여 방 한가운데 드러누워 잠을 자기 시작했다.

얼굴덕에 웬간한 새색시들 같으면 감히 엄두도 못낼 이렇듯 편안하고 한가한 생활을 하게 된것이다.

잠결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져 깨여보니 도망갔던 신랑이 곁에 쪼그리고앉아 자기의 젖가슴을 만져보는것이였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 앉는데 신랑은 면구스러워하며 배고프니 밥을 빨리 달라는것이였다.

어린게 어디 가서 촐촐 굶다가 왔구나 하는 불쌍한 생각이 들어 얼른 부엌에 가서 성의껏 밥상을 차려주었다.

썩 후에 가서야 그때 왜 내 몸을 만져보았느냐 물어보았더니 남편이 웃으며 하는 말이 방안에 드러누워 정신없이 자는 당신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야 이렇게 생긴것이 과연 녀자가 맞긴 맞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을 헤쳐보았다는것이였다.

그후 미영은 남편을 성심껏 섬겼고 남편도 더는 달아나지 않았다.

그들사이엔 아들이 태여났는데 이놈이 보통놈이 아니였다.

누구를 닮아서인지 체격도 제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더 컸고 얼굴은 마치 세도댁 귀공자처럼 준수하게 생겨 시부모들은 개천에서 룡이 났다고 무릎을 치며 좋아했고 미영이 역시 아들덕에 시부모나 남편앞에 떳떳하게 나설수 있게 되였다.

아들이 6살 잡히던 해, 어느 중앙관청의 고관이 이 고을을 지나다 밖에서 놀고있는 아들애를 보게 되였다.

아들의 영특한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고관은 아들애를 가까이 부르고 이름, 나이 등 필요한것을 다 물어본 다음 즉시 말을 돌려 고을원을 만났다.

고관은 자기에게 후대가 없어 늘 울적해있는데 이 고을 아무개의 아들을 양자로 삼고싶으니 데려가게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고을원으로서도 중앙정계에 줄을 뻗칠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쾌재를 부르며 제꺽 이에 응하고 당장에 애아비를 불러들였다.

아무리 무던하고 평범한 백성일지라도, 무지렁이 농사군일지라도 아들을 내놓으라는 이것만은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었다.

고을원은 위협도 해보고 구슬리기도 하면서 온갖 감언리설을 다했지만 끝내 애아비를 돌려세울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고을원은 량반에게 불손하다는 터무니없는 죄명을 씌워 남편을 옥에 가두고 매일 곤장을 안기며 날뛰였다.

옥바라지에 지칠대로 지친 미영이가 어느날 다 죽게 된 남편의 정상을 차마 볼수가 없어 차라리 애를 주고말가요? 하고 한마디 했다가 남편에게서 귀뺨을 얻어맞는 눈물겨운 참상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들애의 목을 그러안고 넌 왜 이 에미처럼 편안한 얼굴로 태여나지 못했느냐며 부모들을 죽을 구멍에 빠뜨리는 덜된 놈이라 욕절반 신세타령절반 하였다.

그날 새벽 집에 갑자기 달려든 괴한들이 아이를 둘쳐업고 달아난 뒤 미영이는 다시는 사랑하는 아들을 볼수 없었다.

집안의 보배며 기쁨인 손자녀석을 하루밤새 잃은 시부모들은 심화병에 걸려 돌아가고 옥에서 간신히 풀려나온 남편도 얼마 살지 못하고 부모들곁으로 갔다.

욕심많은 량반님네들은 결국 미영이에게서 소중한 모든것, 남편도, 아이도, 시부모도 다 앗아가고 못생긴 그 녀자의 얼굴만 그대로 둬두고 갔다.

그후 미영은 갈곳 없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 여기로 흘러들어왔다.

… 경신의 눈가에도 미영의 눈가에도 물기가 어렸다. 미영은 아까 어슬녘에 왔던 비장도 량반출신인데 그래서 자기는 그자를 바로 안 본다는것이였다. 경신은 속으로 나도 량반가문인데… 하고 생각하다가 관노로 내쳐진 일이며 지금 이 산중의 처지가 미쳐오자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이 시각 산채의 주인인 장대손이 돌아왔다.

곽주선이 그새 산채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와 공녀로 가게 되였던 처녀가 형의 소개신을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장대손은 화포대장의 소개로 들어온 처녀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두루 물어보다가 인차 화제를 기본문제에로 돌렸다.

사실 장대손의 산채는 요즈음 사람이 갑자기 불어나 여러가지 고충을 겪고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난사가 산채를 받들만 한 골간이 아직 준비되지 않은것이였다.

여기 산채에 있는자들은 대부분 농쟁기밖에 쥐여보지 못했던 농군들이였으므로 검술이나 궁술에 능한자가 별로 없었다.

이들을 훈련시키고 강한 군률을 세우자면 장대손이나 곽주선의 힘만으로는 안되겠기에 이미 앞일을 내다보고 의형제들인 건상, 해송, 석쇠를 광문스님에게 맡겨 무예를 닦게 하였던것인데 어언 이제는 1년이 되여와 그들을 데리러 장대손이 이번걸음을 한것이다.

허나 해송이 불문에 몸을 담그고 광문스님슬하에 남겠노라 해서 그를 남겨두고 건상과 석쇠만을 데리고 돌아왔다.

광문스님이 하는 말이 건상과 석쇠의 무예는 자신의 이름을 욕되이 하지 않을 경지에 있다 하니 장대손의 기쁨은 한량 없었다.

이들을 데리고서라면 무서울것이 그 무엇이랴!

장대손은 기회가 생기면 동생들의 무예를 직접 시험해보리라 마음먹었다.

… 다음날 한식경이 지나 경신은 대장한테로 불리워갔다.

그는 《사필귀정》이요 《병귀신속》이요 하는 족자가 걸린 대장채에 들어가다가 서넛의 사내들이 줄줄이 앉아있는 모양을 띄여보자 흠칫 놀라 머뭇거렸다.

장대손은 그러한 경신에게 손짓하여 들어서게 하였다.

장대손은 수염을 맞춤하게 길렀고 준수한 얼굴에 기개가 높아보이는 30대의 남아였다.

《아씨, 우리는 남이장군이 실각됐다는 소식에 이어 의금부에 끌려갔다는걸 알려주자고 불렀소.

《네…?!》 경신은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숨이 탁 막혔다.

《지금 항간에서는 온통 남이장군 이야기뿐이요.

경신이와 남이와의 관계를 대강 알고있는 장대손이 측은한 눈길로 경신이를 바라보았다.

《혹시… 랑설은 아닐가요…?

《글쎄 사실인것 같소. 그렇다쳐도 왕가의 외손을 소홀히야 처분하겠소?

경신이는 온몸이 굳어져 아무 말도 못하였다.

방안의 분위기가 삽시에 어두워지고 침묵이 흐르자 장대손은 화제를 바꾸어 산채에서의 생활이 힘들지 않는가, 불편한점이 있으면 나를 찾아오라고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경신은 순간에 벙어리가 된듯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다가 간신히 말귀를 알아듣고 머리만 다소곳이 숙여 고맙다는 의향을 표시했다.

사실 경신에게는 대장의 말소리가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던것이다. 경신은 허탈상태에 빠진듯 비청거리며 문밖을 나섰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애처롭던지 옆사람들이 다 후- 하고 긴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

《경국지색이라더니…》(나라가 기울어져도 모를 정도의 녀인의 아름다움을 이르는 말.)

누군가의 입에서 이런 동에 닿지 않는 말이 불쑥 튀여나왔다. 아름다운 처녀가 참 안됐다는 소린지 뭔지 분명치 않은 소리였다.

여느때 같으면 대장의 사나운 눈총을 열백번 받았을 푼수없는 말이였지만 이상하게도 대장의 얼굴에서는 힐난의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3

 

남이가 의금부에 끌려간 후 한성장안에서는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다.

나이 일흔이 넘은 한 량반은 이렇게 탄식했다.

《허, 하늘에는 살별이 뜨고 땅에선 이런 변이니 과시 망국의 흉조로다…》

그런가 하면 백성들은 제나름으로 개탄했다.

《쳇, 한때는 애국충신이라 떠들더니 이 무슨 개판인가!

《이 세상은 뒤죽박죽이 됐어. 선왕은 병조판서벼슬에 말까지 하사하더니 후왕은 역적이라… 흐흐흐…》

《이보게, 못 먹고 못살아도 우리 백성들이 제일일세. 저런 격란은 모르고 살거든, 허허허…》

병조와 의정부의 관리들은 언행이 다 저마끔이였다. 열을 내여 《역적》을 저주하거나 공연히 겁을 먹고 전에없이 나리들에게 고분거리는가 하면 혹은 입을 굳게 다물고있거나 일부러 방심한척 했다.

령의정 강순은 남이가 의금부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다음 차례는 자기일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 불똥이 튀여올가봐 신경을 곤두세우고있었다. 피를 말리는 번민속에 눈을 감으면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남이를 선봉장으로 내세우고 리시애란을 평정하고 야인정벌에로 내달렸던 일, 그후 자기는 령의정, 남이는 병조판서로 승진했던 일… 실로 강순이 하면 남이였고 남이 하면 강순이였다… 헌데 이거 어찌된 일이냐, 의금부라니? 언제나 세상에 두려운것 없이 하고싶은 소리를 텅텅 던지며 발호하더니 입덕을 본게 아닌가? 자신한테까지 루가 미치게 한 그가 야속하고 괘씸도 했다. 문득 생일잔치상이 떠오르고 방망이 같은것이 들이친듯 머리가 뗑해지며 귀안에 윙- 하는 비명까지 울렸다. 그 잔치에서 마감에 훈구파대감들을 비난하고 장영실의 죽음을 두고 의분을 나누었던 일까지 떠올랐다. , 왜 그런 잔치놀이에 갔던가.

다음날 오후 옆방의 한 관리가 방에 들어와 바깥뜨락에 웬 군사들이 밀려들었노라고 알렸다.

소스라쳐 놀라 문을 빠금히 열고 밖을 내다보니 열댓은 넘어보이는 군사들이 둘러서서 수군거리는데 한 군사가 이쪽을 빤히 지켜보고있었다.

강순은 얼른 피해 벽에 붙어서서 눈을 감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등골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때 방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한명회가 들어섰다.

강순은 인사하는것도 잊고 얼이 나간 눈으로 대감만 지켜보는데 한명회는 그 이름난 사팔뜨기눈을 사납게 번뜩이며 앉지도 않고 그냥 버티고서서 말없이 그만 쏘아봤다.

방안에 서늘한 바람이 몰아치는듯 했다.

강순은 엎드려 절하고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어떤 경우에도 의젓하게 처신하리라 마음을 다잡고 쌀쌀하게 물었다.

《어떻게 오시였소?

《몰라서 묻는거요?!

《예…?!

《저 역신하고 공모한 죄… 자복하오!

《뭐라고…?

《저 역신이 연회를 차리고… 남이하고 둘이 무슨 밀담을 했는가? 다-안-다-》

《그건 내 생일잔치였소.

《흠, 생일잔치라 흐흐흐…》

그 시까스르는 웃음소리에 강순은 정신없이 소리쳤다.

《야- 이눔-이 망둥이같은 자식아- 강순이 그만한 대접도 못 받을 허깨비야-?

그 피를 내뿜는듯 한 고함소리에 방안이 떠나가는것 같았고 옆방들에서 놀란 관리들이 달려들어와보니 강순은 서리가 내린 숱진 눈섭을 치켜올리고 험한 기상의 얼굴로 우들우들 떨고있는데 한명회는 웬일인지 흔연한 얼굴로 방에서 나갔다.

 

 ×

 

왕실의 그 모사는 아까 위엄을 풍기도록 군사들을 뜨락에 먼저 들이밀고 강순을 찾아들어갔었다.

그가 남이와 역모를 했는가, 했으면 어느 정도 깊이 들어갔는가 가늠해보자는 심산이였다.

한데 급소를 찌르니 그 로신은 미친듯이 발광했다. 자부와 자존이 강한 강순이 자기 명예를 건드리자 얼이 나갈수도 있고 실지 그 역모에 깊이 관여했을수도 있었다.

한명회는 쾌재를 올리며 광화문과 홍예문을 지나 경회루로 나가서 시원한 공기속에 몸을 잠그고 해빛이 부서지는 련못의 잔물결을 즐기였다.

이윽고 그는 평소에 임금이 거처하는 편전으로 찾아들어갔다.

예종은 간밤에 꿈자리가 사나왔거나 잠자리가 불편했던지 그다지 밝지 못한 뚝한 얼굴로 그를 맞았다.

그는 언제나와 다름없이 임금앞에 엎드려 상감마마, 밤새 옥체 안녕하시나이까 하고 절하며 문안드리였다.

《대감, 그놈이 의금부로 순순히 끌려왔는가?

《그놈이 칼을 빼들고 접어드는걸 군사들이 겨우 때려엎고 묶었소이다.

이 말을 하는 순간 그렇게 모략에 능한 한명회의 눈빛도 떨리였다.

19살의 임금은 대뜸 얼굴이 불그락푸르락 해졌다.

《그놈이… 그자가 임금이 보낸 명소패를 보고도 칼을 빼든걸 보면 역적이 분명하도다!

예종은 발을 탕 구르며 어좌에서 뛰여일어났다.

《당장 목을 치라! 국문(심문)이고 뭐고 다 필요없엇!

《전하마마의 어지를 거역한 놈이어니 그렇게 처형함이 마땅하오나 큰 도량으로 진중하시옵기를 비나이다.

《뭐-?! 뉘한테 삿대질인고?!

한명회는 엎드린채 머리를 조아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간했다.

《릉지처참해도 무방한 저… 간신은 한때 선왕의 사랑을 받았던 놈이 아니오니까. 특히 저 함길도 리시애란과 북부변경 야인들을 정벌한, 이런 인물인 장군을 국문도 없이 참형한다면 입만 깐 간사한 무리들이 뒤에서 헛된 소문을 돌리고 그를 따랐던 수만군사들이 과연 어떻게 나올지 우려되나이다.

턱에 보슴털이 보르르한 예종은 눈살이 꼿꼿해서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럼 어쩌자는건가?

《공명정대하게 국문도 하고 죄행의 사실여부를 확인하여 만인의 저주를 불러일으킨 다음 처형해야 후환이 없을줄로 아오이다.

《후환? 그건 어인 소리인고? 군주가 아니라면 아니지 이 나라에 군주의 어지를 따르지 않을자 어디 있느뇨?!

《전하마마, 지당한 말씀이오이다! 하나 병조판서로 된 후 저 역신은 숱한 음모가, 야심가들을 저희네 패당에 끌어들였을테니 저 역적에 대한 심문과정에 그 련루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도록 해야 하겠나이다.

《음, 과인도 그렇게 생각하노라. 암 그래야지. 하지만 빨리 처형하고 나라를 안정시켜야 하오…》

그리고 임금은 문득 승전내시 안경준이 생각나 이렇게 물었다.

《대감은 내가 곁에 데리고있던 안씨 내시를 아나?

《예, 그저 그렇게 좀 알지요.

《그놈이 렴탐군이 아닌지 알아보자고 의금부에 처넣었어.

《예?

《그놈이 궁실안에만 배겨있는 놈이 남이반역건을 어떻게 알아? 조화거든…》

그것은 한명회자신의 계략에 따라 자광이 내시를 움직여 생긴 일이다. 그러나 한명회는 아닌보살하고 느슨하게 웃어보였다.

《내시들이야 고관들이나 궁녀들을 늘 만나니까 좀 귀동냥으로 뭘 얻어들을수도 있고… 우연이 아니오이까?

《아니야 이상해!

한명회는 속이 바싹 켕기였다. 어린 임금이 내시건을 자꾸 캐고 들다가 자기 계책이 드러나는 날에는 무슨 벼락이 떨어질지도 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빨리 화제를 돌리고싶었으나 철딱서니 없는 임금은 그냥 내시건에 매달렸다.

《내시 저놈들이 진짜 고자인가 아닌가 의원들을 시켜 알아봐야겠어.

《상감마마, 남이보다 더 큰 역신이 있는것 같소이다.

《뭐? 더 큰 놈이?!

예종은 순간에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한명회는 령의정 강순, 그와 남이와의 관계를 죄다 이야기했다.

《이번통에 다 쓸어버리자!

그리고 임금은 국문을 언제부터 시작하느냐고 물었다.

《잡도리를 잘하고 인차 할가 하옵니다.

《잡아다가 옥에 처넣었으면 다지 잡도리는 무슨 잡도리인고? 과인이 나가 국문할테다, 직접… 오늘부터 시작할지어다!

예종은 천하에 저밖에 없는것처럼 우쭐렁대던 남이가 형장에 얻어맞으며 국문을 당하는 꼴을 보면 속이 후련해질것 같아 조급증이 났던것이다.

 

 4

 

의금부의 옥에 끌려온 후 남이는 내내 어머니와 딸애에 대한 걱정과 함께 무슨 죄로 이런 옥으로 굴러떨어졌는가 하는 의혹에 끝없이 시달렸다.

아무리 생각해봐야 알수 없었다. 자신이 여태 해온 일들과 상종했던 인물들을 더듬고 또 더듬어봤다. 모두 나라를 위한 일들이였고 나라일때문에 만난 사람들이였다. 리시애란, 야인들의 횡포한 준동을 진압하기 위한 전장, 병조판서로서 국방을 추켜세우려고 뛰여다닌 일…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의금부나 형조관리들의 오해가 아닐가… 문득 경신의 얼굴도 떠올랐다.

명나라황실에 가게 됐던 경신이가 한확대감집에서 도망쳐 나와 실종이 된것때문에 한확이 그전에 경신이가 우리 집에 다녀갔던 일을 언질로 삼아 의금부에 고발한것이 아닐가. 아니면 저 방랑시인을 만난것때문에 시비에 올랐는가? 아니면 채방별감 장영실을 살려내려 한것이 왕실의 노여움을 샀는가? 다 그런 건들이라면 할말이 있어. 내가 정당했다! 아니 아니여, 송나라 악비장군도 진희의 모해로 참을 당하지 않았더냐. 악비도 외적들의 침입을 거듭 물리치고 나라를 지켜낸 명장이 아니였던가. 아 나는 과연 누가, 어떤 놈이 모해했느냐…?!

남이는 그 모해자가 누군인가 그냥 피를 태우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도무지 알수 없었다.

이틀후 남이는 감옥의 높다란 뙤창에 살별의 하얀 꼬리끝이 걸려있는것을 띄여보고 놀랐다.

소름이 끼쳤다.

그 새벽녘에 옥리 둘이 들어와서 초불을 켜더니 남이를 일으켜앉혔다. 철여의에 맞아서인지 온몸이 지끈지끈 쑤셔났다. 두 옥리는 옆으로 가서 누구에게인가 전하의 은총으로 칼을 벗게 되였으니 한대감에게 인사를 올리라고 수군수군 일렀다.

남이는 비로소 옥안에 다른 죄수도 있었다는것을 깨달았다.

두 옥리는 그 죄수한테서 칼을 벗겨가지고 그것을 남이에게 씌워주고는 허리 굽혀 인사하고 나갔다.

칼을 쓴 남이는 량어깨에 천근무게가 실리는듯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였다.

칼이란 한발가량 되는 널판대기의 한끝에 구멍을 뚫어 죄수의 목을 끼우게 만든 형틀로서 수인의 요동을 억제하기 위한 형구이다.

남이가 칼에서 벗어난 수인쪽을 돌아보는데 키가 훤칠하고 얼굴이 희멀쑥한 그 사람이 웬일인지 눈길이 마주치는것을 피하는듯 외면하며 창황히 옥에서 나갔다. 도무지 알수 없는 일이였다.

칼의 눅눅한 널판대기에서 피고름같은것이 썩는듯 한 퀴퀴한 냄새가 알릴듯말듯 풍기였다.

남이는 가슴이 서늘해져 어스름이 흐르는 옥안의 벽을 둘러보았다.

(, 예서 얼마나 많은이들이 죽어갔겠는가. 죄없이… 죄가 있어… 성삼문, 하위지, 박팽년…)

그이들의 망령이 담벽들의 어스름속에서 무엇이라고 끝없이 하소하면서 어른거리는듯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지. 의금부의 라장들이 옥으로 들어와 남이를 어디로인가 끌어갔다.

그는 눈앞이 돌아가고 칼이 무릎에 걸리고 그 무게가 어깨며 뒤덜미를 아프게 파고들어 걸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 비청거렸다. 그러자 두 옥리가 량옆에서 칼의 밑둥을 약간 쳐들어주니 걷기가 한결 헐해지는듯 했다. 상투가 풀려내려 머리칼들이 이마를 내리덮고 눈앞을 가리웠다. 그러나 두손이 칼밑에 묶여있어 그 머리칼을 쓸어올릴수 없었다. 그래서 멎어서며 이 머리칼을 좀 쓸어올려줄수 없느냐고 했으나 응대를 안했다.

그 칠흑같은 절망의 어둠속에서 눈부신 빛발이 망막을 찔렀다.

그제사 남이는 자신이 밝고 넓은 방에 들어섰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는 옥리가 이끄는대로 그 방복판에 들어가 칼을 쓴채로 앉았다. 서서히 걷히는 안개속에 앞쪽 단상에 꾸려진 임금의 어좌, 한쪽 벽밑에 주런이 앉아있는 으리으리한 관복차림의 고관들, 그들속에 앉아있는 사간원의 대간, 승정원의 도승지, 형조판서, 리조판서 그리고 령의정 강순, 한명회, 한확, 이전 병조판서 박중선 등의 얼굴들이 어렴풋이 알렸다.

그이들이 두렵지 않고 못내 반가왔으며 하나같이 자기를 저승에서 끌어내줄 은인들로 느껴졌다.

이윽고 곤룡포를 떨쳐입은 임금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와 어좌에 앉았다.

방안공기가 술렁거리는 속에 고관들이 모두 일어나 임금한테 절을 한 다음 한대감이 단상밑으로 걸어나가 무엇이라고 여쭈는것 같더니 임금이 고관들쪽이며 《죄수》쪽을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오늘 첫 국문은 과인이 할가 하노라…!

임금의 목소리가 방안에 쩌렁쩌렁 울리고 남이는 그 울림에 머리가 찡- 저려들며 온몸이 얼음덩이로 굳어지는듯 했다.

《남이- 고개를 들라- 네눔 상판을 보자.-》

《…》

남이는 의젓하게 얼굴을 쳐들어 이마살을 찌프리고 임금을 지켜보았다.

《네눔이 감히 낡은것은 물러가고 새것이, 새 왕조가 선다고 지껄였다는데 역모한 그 공모자들을 밝힐지어다.-》

《…?!

《네놈이 저 왕건이나 리성계태조와 같은 왕업의 시조가 된다고?! 흐아 흐아 흐아…!!

《홧하하…》

남이도 임금에 못지 않은 큰소리로 웃어댔다.

속이 텅 빈 허세가 아니라 진정으로 기쁘고 배가 터지도록 우스워서였다. 어제와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경신이와 방랑시인 김시습, 장영실별감때문에 가슴을 재로 채우며 번민했던 남이는 그런 건들이 아닌것이 다행스럽고 무등 기뻤으며 새 왕조… 이런 허황한것이라면 얼마든지 무찌르며 자신을 립증할 자신이 있었던것이다.

《상감마마, 신이 감히 시왕이 되기를 꿈꾸었다니 천만부당한 고발인줄 아오!

《이눔 천만부당하다? 이… 이 요사스러운 놈아!

《너무 터무니없어 할말이 없소이다. 나를 그렇게 죽이고싶으면 긴말 말고 어서 신의 목을 쳐주사이다.

《에키 간악한 놈, 그럼 과인이 그걸 밝혀주마. 너는 일찌기 자작 한시에서 릉지처참해도 시원치 않을 집정야망을 드러냈다.

《상감마마, 신은 세상에 태여나 시 한두수만 남겼나이다. 거기에는 그런 소리 한마디 없소이다.

《있으면 어쩔테냐?

《있으면 그 시구 하나로써 신을 대역죄인으로 처형해주오!

《좋다- 들어라- 똑똑히 들어- 너는 그 한시 세번째 행에 이렇게 썼다. 남아 이십에 미득국한다면…》

《…?!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하랴… 생각나느냐? 미득국… 미득국… 득() 얻을 득… 득… 나라를 얻지 못하면…》

그 순간 벽밑에 앉아있던 고관들이 뛰여일어나 의분을 참지 못해 주먹을 흔들어대고 발을 구르며 목이 터질듯이 소리소리 내질렀다. 저놈 목을 치라, 때려죽이라, 찢어죽이라 하고… 그 바람에 어느 고관의 관모가 날아떨어져 방바닥에 딩굴고 늙은 정승은 의분을 참지 못해 털썩 주저앉아 으흑 하고 흐느꼈다.

웬일인지 그 시를 제일 칭찬했던 강순령상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잠자코 있었다. 숨도 쉬는것 같지 않았다.

어좌의 임금은 울부짖는 고관들쪽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네들의 충의에 저으기 감동된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남이쪽을 보며 나직이 일렀다.

《이제는 약속한대로 네 목을 쳐야겠다…》

《전하마마, 잠간만… 그 시 원본을 어머니가 깊이 간수해 두었소이다. 원본이니까 제가 쓴 그대로입니다. 그 원전에는 나라 평정이지 득국이란 시구는 없소이다.

《원본이 있다? 원전이…?》 남이는 칼을 쓴채로 거의 웨치다싶이 부르짖었다.

《전하, 그 시는 야인정벌에 나갔던 군사들속에 널리 퍼져 모두 알고있소이다. 그 이상 원전이 없으니 그 군사들을 다 불러 문초함이 어떠하오?

벽밑에 주런이 앉아있는 고관들이 서로 돌아보며 수군거리는데 남이의 격한 웨침이 방안에 메아리쳤다.

《전하마마- 분명코 어떤 간사한 개자식이 내 시에 득국이란 험구를 조작해넣었소이다!》 그리고는 우들우들 떨며 고관들쪽을 일별하다가 그 조작자는 여기에 앉아있을수도 있다. 누구냐, 나서라고 무서운 함성을 터뜨렸다.

어좌에 앉아있던 임금이 죄인이 무슨 호령이냐고 소리쳤다.

그때 고관들속에서 허리가 꼬부장한 로신이 발딱 일어나서 사시나무떨듯이 호돌호돌 떨었다.

임금은 그쪽을 보며 할말이 있으면 어서 하라는듯이 손짓하였다.

그 로신은 목에 피대를 세우고 맵짠 소리로 뇌까렸다.

《상감마마, 보는바와 같이 저… 저… 남이는 방자하기 이를데 없는 불한당이오이다. 이전에 서울 올라와 신을 만난 평안도관찰사어른이 한 얘기인데 저 역신은 군졸들 무덤을 량반묘와 나란히 쓰게 했소이다. 그걸 시비한다고 행패질하고… 그 량반의 묘소인즉 관서 유학의 거성 송암어른이 고이 잠들어있는 곳인데… 그뿐… 그뿐이 아니오이다. 도관찰사어른이 명월루에서 산천경개를 탄상하는데 강물로 군졸들과 말들을 내몰아 맑은 강물, 신선한 공기를 다 흐려놓았소이다. 그리고 글쎄 임금의 은총으로 정해진 <체아직>을 심히 모독했소이다…》 남이는 그때 일이 떠오르자 참을수 없어 칼을 쓴채로 움쭉 일어섰다.

《문관나리, 공은 군사로서 행군이란걸 해봤소이까? 나라를 지켜싸운 군사들이나 갈증에 시달린 말들이 제 나라 강물에 맘대로 들어서지도 못한단 말인가, 아무리 문존무비라 해도…》

예종이 듣다못해 방안이 떠나가도록 불호령을 내렸다.

《여봐라- 저놈… 저 역적놈을 쳐라- 매우- 쳐라-》

두 의금부 라장이 형장을 휘두르며 달려나와 어기치기로 《역신》을 내리쳤다. 매가 내려질 때마다 남이는 칼을 쓴채로 무서운 함성을 내지르며 뛰여오르기도 하고 형틀에 쓰러진채로 몸을 꿈틀거렸다. 형틀이 부서져나갈듯이 삐걱삐걱 찌꾹찌꾹… 매를 치는 형리들의 단말마적인 야성과 그 매에 항거하는 남이의 위혁적인 함성이 방안에 메아리쳤다.

약-아-악

으-아-악

소리만 들어서는 누가 매를 치고 누가 매를 맞는지 분간할수 없었다. 어느덧 살이 찢기고 피가 터지고 형틀이며 방바닥에도 피방울이 뿌려져 방안에 피비린내가 떠돌았다.

남이는 졸도해서 칼우에 머리를 맥없이 떨어뜨렸으며 그의 터진 이마에서 떨어지는 피방울이 칼의 경사면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

어좌에 앉아 이윽토록 그를 내려다보던 임금이 낯빛이 흐려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무슨 기운에서인지 졸도했던 남이가 고개를 무섭게 들었는데 그의 이마에서 코마루로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불이 황황 이는 눈으로 임금쪽을 쏘아보며 속이 곪아터지는듯한 통곡을 하였다.

예종은 그쪽을 흘깃 돌아보았으나 인차 얼굴을 외로 돌리고 황황히 단상밖으로 나갔다.

 

×

 

편전으로 돌아온 임금은 궁녀가 들여온 따끈한 차물을 마시고는 침울한 얼굴로 어좌에 앉아있었다.

예종은 남이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형장에 얻어맞은것을 보자 평소의 감정이 사그라지며 속이 후련하게 내려가는듯 했다. 그리고 그 《역신》이 좀 측은하게도 여겨지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그러자 남이를 총애한 부왕의 인자한 눈길이 떠올랐다. 만약 부왕이 승하하지 않고 생존해있어 이 일을 안다면 대노할것이다. 오늘 부왕이 그처럼 아끼고 사랑한 남이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내 후왕으로서 이 무슨 효심이고 효도인고…? 남이는 오늘 첫 친국(심문)에서 모든 죄를 다 아니라고 항변하지 않았는가, 저 항변이 지당한거라면 고발자들은…?

그때 한명회는 임금을 따라 편전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얼굴이 험하게 이그러져 문밖에 서있었다.

한명회는 오늘 첫 심문이 그르쳐진것은 전적으로 진중하지 못하고 원숙하지 못한 나머지 임금이 조급증으로 서두른탓이라고 생각하고있었다. 우선 심문의 첫머리에 제일 중대한   《새 왕조건》부터 드러낼것이 아니였다. 그래 놓으면 피의자가 미리부터 빠져나갈 계략을 찾아놓을것이 아니냐? 처음에는 낮은 급의 잘다란 건들을 하나하나 까밝히며 점점 중대건으로 톺아올라가서 나중에 목적한 중대건, 《새 왕조건》으로 들이닥쳐야 할것이였다.

한명회는 이런 리치도 모르는 임금을 섬기자면 앞으로 속상한 일들이 얼마나 많으랴싶었다.

문밖으로 내시가 나와 그에게 상감마마가 찾는다고 조용히 알렸다.

한명회가 편전안으로 들어갔을 때 어린 군주는 전에없이 진중하고 근엄한 얼굴로 숙연히 앉아있었는데 그를 흘깃 치떠보는 눈길에 사나운 빛이 번뜩였다.

한명회는 가슴이 선뜩 얼어들어 엎드려 절하고는 상감이 노성을 터칠가봐 앞질러 입을 열었다.

《상감마마, 로신이 불충하고 어리석어 오늘 일이 이렇게 되였소이다. 이 늙은이를 가긍히 여겨 노여움을 잦혀주사이다. 신이 채심하고 분발해 전하의 뜻대로 이 일을 인차 마무리짓겠나이다.

《무-어-?!》 그 격한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호협하고 현명하고 문명한 상감마마… 예로부터 거목을 통채로 쓰러뜨리자면 잔뿌리부터 찍어들어가야 한다는 속담도 있사온데 저 역적놈 본색을 알아내자면 집에 자주 드나든 기생년을…》

《아니다-》

《예…?!

《오늘 남이는 사사건건 다 부정하고 항변했어. 그 말들이 다 그른데 없고 사리에 맞아!

《예?!… 아- 니…!!

《대감, 이번 일은 훈구고관들이 남이가 받는 은총과 그 높은 명성을 시기해서… 그래서 생기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과인도 승정원을 통해 좀 들은바도 있어!

죽은듯이 엎드려있는 한명회는 식은땀이 등골로 흘렀으며 진정을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상감마마, 목숨 걸고 간하나이다. 남이는 역신이오이다. 한번… 한번만 말미를 주시면 죄다 밝혀내겠소이다!

《그렇다-? 어디 보자!

 

×

 

그날 한명회는 임금의 편전에서 돌아오자바람으로 류자광을 의금부의 밀실로 불러들였다.

자광은 숨이 턱에 닿아 달려왔다.

한명회는 그 밀고자에게 전하가 역신쪽으로 기울어지는데 그렇게만 되는 날에는 너도 죽고 나도 망한다고 되게 오금을 박았다.

그리고는 남이의 시를 놓고 따져물었다.

《네 눈으로 그 시를 봤느냐?

《녜, 처음 박달나무에 새긴걸 봤지요.

《거기에 <득국>으로 돼있느냐? <>자가 있어?

《챠- 그러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고… 그걸 누가 기억한대유?

《군사들이 다 봤다는데. 바보…》

한대감의 철퇴같은 주먹이 참지의 뺨으로 날아들었으며 그는 쓰러질듯이 비칠거렸다.

한명회는 그 시에 《미평국》이라는 시구가 있다는것을 알았을 때 하늘의 계시와도 같은 꾀가 뇌리에 번개쳤었다.

남이가 간의대에서 내려와 젊은 관리들에게 지껄인 《새것이 온다》 이 소리만으로는 대역죄인으로 만들기 어려웠다. 《새것》을 《새 왕조》로 바꾼다면… 그렇게 하자면 《새 왕조》로 실수없이 건너뛸수 있는 징검다리, 발판이 필요했다.

그래서 시행 《나라 평정 못한다면…》을 《나라를 얻지 못한다면》으로,(《미평국》을 《미득국》으로) 《평》을 《득》으로 한자만 살짝 고쳐놓았었다.

그리고는 일확천금이나 한듯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허나 오늘 임금이 친국할 때 남이는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득》을 필사적으로 부인했다.

한명회는 사팔뜨기눈을 희번뜩이며 자광에게 이젠 무슨 수로도 군사들속에 다 퍼진 그 시 원전을 없애버릴수 없다고 하며 다른 술수를 내놓았다.

《이봐, 옥에도 티가 있는데 남이네… 그 집이라고 어찌 흠이 없겠냐? 그 집 속내를 잘 아는… 아-그렇지. 이번에 잡아들인 기생년을 잘 구슬리면 고양이뿔같은걸 쥘수 있다.

《그 기생년을…》

《그년이 공주마님한테 거문고를 배워준다고 그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지?

자네같은 대장부 궁냥에 그깟년 속 하나 후벼내지 못할고?

《…》

그날 밤 류자광은 한명회가 옥에서 내놓은 탁문아를 넘겨받았다.

한강가의 으슥한 별당에 영문 모르게 끌려온 탁문아는 의금부의 피비린맛을 한번 보더니 얼혼이 빠져 아직도 오돌오돌 떨고있었다.

(이 계집이 잔뜩 겁을 먹었구나. 잘 주무르기만 하면 주리를 틀 필요도 없겠는걸.)

《소녀를 아주 내보낸것이나이까?

탁문아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이러한 거동을 주시해보는 류자광에게는 이미 수많은 올가미들이 준비되여있었다.

어느 올가미를 선택해 어떻게 조이겠는가를 결심만 하면 된다.

《만고역적 남이가 오라를 받기 직전까지 함께 있은게 바로 자넨데 전하의 령이 없이 누가 감히 자넬 내놓겠나? 의금부엔 좋든 싫든 또 가야겠네. 거기 이꾸러기형리녀석들은 인물고운 자네가 빨리 돌아왔으면 할거네.

탁문아는 스산한 비명이 련발하는 의금부 밀실이 악몽처럼 떠오르자 전신의 맥이 쑥 빠진듯 폴싹 주저앉았다.

류자광은 허탈상태의 녀인의 입에서 안 갈래 안 갈래요 하는 소리가 신음처럼 흘러나오는것을 놓치지 않았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래기라도 잡는다고 녀인은 소름끼치는 그곳에만은 제발 가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이때를 노린듯 하였다.

음모가는 무방비의 녀인을 슬그머니 그러안고 그의 몸깊은곳까지 손을 밀어넣었다.

자기의 목적한바를 위해 듣고싶은 말이 나오는 순간까지 녀인의 약한 곳을 꽉 움켜쥐고 사정없이 사정없이 힘을 가하는 야비하고 치사한 이밤의 죄악은 말그대로 몸서리쳐지는것이였다.

그것은 련인의 애무도 아니요, 한 녀성에게 매혹된 뭇사내의 단순한 겁탈도 아니였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가져온 인간아닌 인간의 타락이였다.

한편 한명회는 의금부에서 잡아들인 남이의 친지들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문효량을 취조실로 끌어들였다.

눈이 크고 겁이 많은 효량은 방에 들어오면서 벽에 걸려있는 형구들을 띄여보고 벌써부터 어리쳤는지 한명회앞에 엎드려서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한명회는 위혁적인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사복시에서 일한다는 문효량인고?!

《예… 예… 그렇소이다.

《남이, 저 역적놈은 제놈이 강순령의정과 공모해 새 왕조를 세우자고 했노라 자복했다.

《예-? 아- 니?

《이눔!! 아닌보살하지 말랏!

한명회는 방안이 떠나가는듯 소리쳤다. 그 바람에 문효량은 눈이 뒤집혀서 사색이 되여 화들화들 떨었다.

《소인은 아무것도 몰랐사와요.

《이눔, 뉘앞이라고 속엿!

《정말… 정말 감감 몰랐어요.

《네눔이 남이하고 그렇게 가까이 지냈다면서 몰라? 네눔이 나오는걸 보고 죄를 다스리겠다.

문효량은 너무 억이 막혀 엎드려 엉엉 울었다.

그러거나말거나 한명회는 자정이 가까와질 때까지 그냥 주리를 틀었는데 치켜뜬 그의 두눈에는 광적인 야성이 꿈틀거리고있었다.

문효량이 졸경을 치르고있을 때 뜻밖에 류자광이 헐레벌떡 뛰여들었다.

한명회는 그의 거동이 거슬리는듯 눈살을 찌프리고 자광의 팔소매를 슬쩍 잡아끌었다.

이윽고 외따로 떨어진 행랑에서 한명회와 마주선 류자광은 아직도 턱에 닿은 숨이 가라앉지 않는듯 헐썩이며 고양이뿔을 잡았다고 생색을 냈다.

《남이네가 전하께서 승하하신 바로 그날에 고기를 먹었대유!

한명회는 류자광의 말을 듣고도 무표정하고 흐리멍텅한 눈으로 한곳을 응시하다가 무엇인가 짐작이 가는듯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과시 … 괭이뿔이로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써하게 뜨고 덤덤히 서있었다.

쾌재를 올릴줄 알았던 한명회가 너무도 무표정이고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자 류자광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며 어쩔바를 몰라했다.

권세라는 벼랑끝에 오르기 위해 사람의 목숨을 칼끝으로 희롱하면서 저렇듯 태연할수 있단 말인가.

한명회의 발뒤꿈치를 겨우 따르기 시작한 류자광은 그의 태연하고도 고즈넉한 미소와 자태속에 숨은 소스라칠 모략의 깊이를 다는 헤아릴수 없었다.

이윽고 서늘한 미소를 띠우며 한명회가 물었다.

《흠- 그래 그년이 순순히 불더냐?

뜻밖의 물음을 받은 류자광은 순간 저도 모르게 얼굴이 벌개졌다.

자기에게서 풍기는 탁문아의 냄새를 애써 감추려는듯 류자광은 고개를 숙였다.

그 모양이 더 우스운지 한명회는 《허-》 린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년이 그렇게도 재미있더냐?

《저 … 대감!

류자광은 보이지 말았어야 할것을 보인것처럼 지지벌개진 얼굴을 어떻게 건사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다.

《일석이조라더니… 괭이뿔이라 홧하하!

야성에 가까운 한명회의 웃음소리에 류자광은 전률했다.

지독한 야욕과 서리발같은 무자비성이 그 웃음소리에서 느껴져서였다.

바깥 하늘에서 우뢰소리가 은은하게 울리는것 같더니 가을비가 음산하게 내리였다.

 

5

 

의금부의 감옥안에 괴괴한 정적이 흘렀다. 안개가 부옇게 서린듯 한 뙤창으로 한가닥 별빛이 어스름속으로 흘러들었다. 어디에서인가 쥐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오는듯 했다.

야밤이경이 지났으나 남이는 칼을 쓴채로 형틀에 앉아 온몸이 지끈지끈 쑤셔났지만 자신에게 들씌워진 혐의를 두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남아 스물에 득국 못하면…》 《새 왕조가 선다》 …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하고 분하여 의금부 옥이 떠나가도록 웃어대고싶었으며 다른편으로는 도대체 누가 이렇듯 터무니없이 꾸며서 밀고했을가 하고 생각하면 가슴이 뒤번져지기도 했다.

(내가 꿋꿋이 주장하면 진위가 백일하에 밝혀진다. 전하는 왕가의 외손인 내 말을 더 믿을것이고…)

그는 자기가 기껏해야 입덕으로 사복장의 관직을 내놓게 되거나 경상도나 전라도 어느 시골에 한두해 류배살이 갔다오면 되리라 생각했다.

(, 남아장부 한생에 요쯤한 풍파가 없으랴…)

28살의 그는 아직도 자기 앞길이 구만리 같다고 여겼으며 류배살이를 갔다와서도 추어설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나는 태종임금의 외손이고 의산군과 정선공주의 아들이며 선왕이 총애한 신하이다. 밀고자들은 사람을 잘못 알았어…)

어딘가 가까이에서 야밤삼경을 알리는 고루의 북소리가  의금부 옥에까지 은은히 울려왔다.

둥- 덩-

그 소리를 들으며 남이는 배포가 유해져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누구인지 검스름한 그림자가 옥으로 들어와 허리를 구부정하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흘러드는 별빛으로 얼굴의 준수한 륜곽을 간신히 알아볼수 있었다. 일전에 옥에서 풀려나간 내시 안경준인것 같았다. 그는 의금부에서 아주 풀려나간것이 아니라 당분간 여기 잔일을 돕게 되였노라고 했다.

《판서나리, 칼이 어깨를 아프게 누르지요? 소인은 한대감덕에 풀려났는데 무슨 은총인지…?

《…》

《칼을 좀 들어줄가요? 무겁겠는데…》

《괜찮소.

《제가 도와드릴수 있는 일이 없을가요…?

《고맙소. 집에 어머님과 딸애가 있는데… 휴- 어찌고있는지…?

《판서님은 이런데 처음이겠지요?

그리고 내시는 몇해전 여기서는 명나라 황제가 보낸 홍보석꽃송이를 도난당해 여러 궁녀들이 갇힌 일도 있었노라고 했다.

《… 후에 어린 왕자가 가졌다는것이 판명되여 무사했지만… 있는자들은 흔히 없는자들이 재물을 도적질하지 않는가 해서 공연히 의심하고 멸시하지요. 궁궐안이나 궁궐밖이나 같고 같지요. 소인은 렴탐군이 아닌가 의심을 받아 들어왔댔지요…》

내시 안경준은 고향이 개경이라면서 어려서 고을의 이름난 백정이 어머니의 부탁으로 자기 고환을 까냈고 3, 4년이 지나 궁중에 내시로 들어왔노라고 했다.

《그때 어린 나이에도 사내도 아니요, 계집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고자로 된것을 뒤늦게 깨닫고 어찌나 억울하고 분하고 섧은지 발버둥치며 울었지요. 어머니는 굶어죽기보다 낫다고… 내시로 왕궁에 들어가면 굶어죽어가는 동생들이 살아나고 너도 잘 먹고 잘 입고 팔자를 고친다고, 임금도 매일같이 보게 된다고 하며 저를 안고 울었어요. 인물덕에 임금의 분부를 전하는 승전내시로까지 되였지만…》

그는 한숨을 조용히 내쉬며 지난 십여년동안 항간에서는 볼수도 들을수도 없는 별의별 일을 다 보았노라고 했다. 그리고 세상에는 신성시되여있지만 알고 보면 여기서는 군주의 룡상을 노리는 역모사건, 왕의 총애를 더 받으려는 높고낮은 신하들의 끊임없는 암투, 왕후와 후궁, 궁녀들의 소름끼치는 시기질투가 란무하다고 했다.

《알고 보면 왕궁이란 지독한 의심과 질시와 암투의 소굴이 아닌가싶은 생각도 문득 들지요.

남이가 눈을 지그시 내리감으며 그런 소리하면 못쓴다고 꾸짖는데 내시는 갑자기 그의 발밑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였다.

《장군, 용서하사이다. 이 못난이 상판에 침을 뱉아주오!

《…?!

《장군을 전하한테 밀고한건 사실은 소인이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리고 조용히 흐느꼈다.

《내시지만… 장군이 어떤 혐의를 받고있다는걸 알게 되였어요.… 내 어떻게나 속죄하겠어요.…》

그리고 옥밖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그날 밤 남이는 내시가 한 이야기를 더듬어보며 그를 동정하다가 혹시 의금부나 한명회가 자기 진속을 떠보려고 들여보낸 끄나불이 아닐가 하는 의혹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인차 진정을 터놓은 불쌍한걸 의심했다고 자신을 뉘우쳤다.

 

6

 

다음날도 남이는 형리들에게 부축되여 취조실로 절뚝거리며 들어갔다.

전날과 다름없이 칼을 쓰고있는 그는 얼굴에 피멍이 들어 퉁퉁 부어오르고 살갗이 찢겨져 이전 모색이란 찾아보기 어려웠으나 눈은 생기에 넘친듯 유난히 번들거렸다.

그는 형리들에게 끌려 어제처럼 방복판의 자리에 앉았다.

어제 임금이 친국할 때처럼 벽밑에 빙 둘러앉아있는 고관들옆에 새 얼굴들이 앉아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문효량과 탁문아 그리고 몇몇 관리들이였다.

남이는 문효량과 탁문아를 알아보자 안도감이 들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상좌쪽에 앉아있던 한명회가 움쭉 일어나 엄엄한 얼굴로 고관들쪽을 둘러보더니 문효량을 내보내고는 남이쪽을 지켜보며 짐짓 살뜰한 목소리로 일렀다.

《전하마마 어명으로 남이 너에게 함구령이 내렸다. 그러니 어제처럼 경거망동하지 말고 진중하게 앉아 듣기만 하면 되겠어.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두명의 의금부 라장이 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형장을 들고 바삐 들어와 남이의 량옆에 버티고 섰다. 어제처럼 나오면 몽둥이맛을 본다는 로골적인 공갈이였다.

남이는 저으기 놀랐으나 형리들을 돌아보지 않고 한명회만 똑바로 지켜보았다.

한명회는 그 눈총을 피하기라도 하듯 비여있는 어좌쪽으로 총총히 나가 거기에 공손하게 절하고는 그옆에 틀지게 앉아 근엄한 얼굴로 선언했다.

《하늘의 뜻에 따라 오늘도 상감마마가 친국하노라!

그리고 기생 탁문아를 불러내였다. 남이는 자신과 같은 고관을 심문하는 어마어마한 자리에 비천한 기생을 불러내는것이 놀랍기도 하고 수치스럽게도 여겨져 이 루추한짓을 그만두라고 분노를 터치고싶었으나 가까스로 자신을 다잡고는 고개를 수굿하고있었다. 남이는 물론이요, 고관대작들과 임금도 지난밤 한명회가 어떤 간계를 꾸몄는지 감감 모르고있었던것이다.

탁문아가 조심스럽게 걸어나와 임금의 어좌를 향해 곱게 절하고 한명회에게도 절하고는 그 자리에 엎드려있었다.

곧 임금이 나오고 심문이 시작되였다.

군주-너는 몇살이냐?

기생-상감마마, 소녀는 스물한살이오이다.

군주-너는 아녀자로서 어이하야 저 역신의 집에 그토록 자주 드나들었느뇨?

기생-예? 아니오이다. 소녀는 정선공주마님한테 거문고를 배워주었사와요.

군주-흠, 고명한 량반가문의 부녀로서 예기처럼 음률에 몸을 적신것부터가 방정치 못한 소행이로다.

기생-녜… 소녀의 잘못이 크오이다.

군주-수치로다. 남이, 저 역신의 집에 드나들면서 느낀바를 죄다 실토하라.

기생-…

남이는 모진 모욕감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연약한 아녀자, 그것도 기생의 입을 빌어 자신을 단죄하게 하려는 비렬한 기도에 분노했으나 참았다.

그가 고개를 외로 틀고있는데 한명회가 사팔뜨기눈을 번뜩이며 기생을 이윽토록 노려보다가 버럭 소리쳤다.

《이년 왜 대답이 없느냐?

《…》

《저 남이는 이젠 판서도 고관도 아니니 무서워말라. 짐승보다 못한 대역죄인이야!

《…》

《네가 고발 안하면 내가 하마. 우리는 저 역적의 사람됨됨을 잘 알어. 너 저놈하고 몇번이나 동침했냐?

《대감님, 그런 일은 없사와요.

《이년, 예가 어디라고 거짓을 꾸며대?!

《증말 그런 일은 없어요.

《죽고싶어 엉?! 여기는 의금부다! 네년은 인물맵시 고운 기생이겠다, 남이 저 짐승은 상처한지 몇해 되는 홀아비겠다, 아무 일도 없을수 있느냐?…》

《어느 랑자하고는 어쩐다는 소문이 좀 있는것 같은데 소녀하고는… 대감님, 증말이예요.

남이는 분격이 치밀어 주먹을 으스러지게 틀어잡고 우들우들 떨었다.

한명회가 소리쳤다.

《좋다- 한가지 더 묻겠는데 또 거짓을 꾸며대면 그때엔 형장맛을 봐!

기생은 질겁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감님, 제발… 있었던 일은 죄다 실토하리다.

《선왕께서 승하하야 나라에 큰 초상이 나고 민심이 흉흉한 때 저 역신이 칼과 활을 가지고 밤마다 집에서 나갔다가 늦게 들어왔다는건 사실이지?

한명회와 고관대작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가운데 탁문아는 눈을 꼭 내리감고 울먹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녜…》

《네 눈으로 봤느냐?

《마님한테 늦게까지 거문고를 배워줄 때 몇번…》

《그런 때엔 그 집에서 잤지?

《잔 일은 없사와요.

《없다…? 흐흐… 없기는 왜 없어. 사실 건 큰 죄도 아니여. 밤이면 남녀간에 정이 쉽게 오가고 그러노라면 흐흐… 정분이 나서 재미도 볼수 있지 않어 응? 이 세상에 고기맛을 마다할 사내나 계집이 어디 있어?

예종임금이 듣다못해 별안간 한명회한테 닥치라고 역증을 터뜨렸다. 그러나 한명회는 상감이 그러거나말거나 하던 소리를 그냥 늘어놓았다.

《나라에 초상이 났을 때 저 집에서 고기를 사다먹은걸 보면 정 고기맛이 그리웠던게지. 무슨 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 기생은 그 집요한 물음에 질겁하여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오돌오돌 떨었다.

《사슴고기? ?

기생은 울먹이며 소고기라고 겨우 대답했다.

그러자 임금이 주먹으로 어좌를 내리치며 뛰여일어나 불이 황황 이는 눈으로 남이쪽을 쏘아보며 노성을 내질렀다.

《너- 이눔- 그런 주제에 어제는 충신이라고-? 충의를 지킨 무신이라-?! 이 짐승보다 못한 놈아- 너 그걸 먹을 때 뉘 고기를 씹는다고 생각했냐-?!

그러자 벽밑의 고관대작들이 일제히 뛰여일어나 주먹을 내흔들고 발을 구르며 정신없이 소리소리 내질렀다. 그 미친듯한 저주와 지탄의 함성에 방안이 떠나가는듯 했다. 터져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허물어져내리는듯이 주저앉아 주먹으로 방바닥을 내리치며 오열을 터치는 고관도 있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생겼다. 기생이 별안간 팔을 쳐들어 흔들며 아니, 아니라고, 자기는 고기를 사다놓은것만 보고 먹는것은 보지 못했노라고 피타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던것이다. 아마 그때 기생은 자기한테 사람대접을 한 정선공주와 남이의 인정미, 인품을 생각한것 같았다.

한명회는 너무 경악하여 저년을 족치라고 소리쳤고 남이 를 지키던 두 라장이 야악- 하는 야성과 함께 형장을 휘두르며 달려나가 머리를 싸쥐고 주저앉은 기생한테 뭇매를 안기기 시작했다.

남이는 함구령이고 무엇이고 다 박차고 뛰여일어나며 섬약한 계집을 치지 말라, 치겠으면 날 치라- 하고 사납게 호령했다. 허나 탁문아는 벌써 피거품을 물고 땅바닥에 쓰러졌으며 두 라장이 달려들어 기생을 방에서 끌어내갔다.

한명회가 흔연한 얼굴로 문효량을 불러들였다.

끌려나가는 기생을 띄여본 문효량이 어리친 얼굴로 들어와 임금쪽을 향해 절하고는 죽은듯이 그냥 엎드려있었다.

군주-경이 문효량인고?

문효량-예-이-

군주-경은 남이와 가깝게 지냈다지?

문효량-녜. 한고을에 살았으니까 아이적부터 섭쓸려 돌아치며 팽이치기도 같이 하고 연띄우기도…

군주-이눔 누가 그따위 소릴 듣자냐?!

문효량-상감마마, 황송…

군주-너 저 역신이 살별을 보고 새 왕조가 선다고 지껄일 때 그 자리에 있었느냐 없었느냐?

문효량-있었소이다. 그날 밤 남이는 간의대로 올라갔지만 소인은 파수병이 불허해서 돌아서 내려오는데 대여섯명 관리들이 몰켜서서 쟁론하고있었소이다. 하늘에 뜬 저 살별이 길조냐 흉조냐 하고… 헌데 이슥해서 간의대에서 내려온 남이가 그옆으로 지나가다가 길조도 흉조도 아니다, 새것이 온다는 하늘의 계시이다, 이렇게 흰소리를 던졌소이다.

군주-뭐 흰소리… 새것이? 이눔 똑똑히… 똑바로 말햇. 칼로 목대를 치기 전에…! 새것이라 했냐, 새 왕조라 했냐?

문효량-아니… 아니오이다! 소인은 그때 건숭으로 들어 새것이라 했던지 새 왕조라 했던지 잘 생각나지 않소이다.

군주-이 요사스러운 놈. 한달이나 한해전도 아니요, 며칠전에 들은 소린데 생각나지 않어? 이눔, 예가 어디라고 요설질이냐?

문효량-상감마마, 신은 원래 머리가 아둔해서… 새것이라 했던지, 새 왕조라 했던지 생각나지… 새… 생각나지…

군주-이눔-!! 형장 쉰대를 쳐랏-!

남이곁에 서있던 의금부의 두 라장이 야성을 지르며 달려나와 어기치기로 25대씩 쳤다. 문효량은 비명을 지르며 늘어졌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군주-살겠으면 실토하라.

문효량-(울먹이며) 신이 10월 초이레날 겸사복으로서 번을 섰는데 남이도 사복장으로 수직을 섰소이다. 밤이 되여 신이 남이의 숙소로 갔더니 《고려사》를 읽다가 혜성이 지금도 그냥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있다고 하니 하늘의 변고란 헛된것이 아닌데 어째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가고 했습니다. 그때 운수군 효성이 오위장으로서 수직을 서게 되여 남이와 벽을 사이에 두고있었는데 남이는 그가 들을가봐 걱정되는지 세번이나 불러봤습니다. 벽 저쪽에서 대답이 없자 남이는 그가 깊이 잠들었다는것을 알고 신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하늘의 변고가 이러하니 반란을 음모하는 간악한 신하가 꼭 있다고 했습니다. 그 간악한 신하가 누구냐고 물으니 대답을 못하다가 한명회가 어린 임금을 끼고 권세를 독차지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숨을 지으면서 《나는 나라의 은혜를 후하게 입었고 너도 또한 섬속사람으로서 겸-사복까지 됐으니 어찌 나라에 보은하려는 마음이 없겠는가》고 하기에 신은 대답하기를 《나는 본래 공로도 없이 겸-사복까지 되였으니 보답하고싶은 마음 범연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닌데 누구와 함께 보은하려는가》고 물으니 강순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강순은 남이에게 《우리들이 나라의 은혜를 후하게 입었지만 나는 이미 늙었고 자네는 바로 한창때니 변란을 평정하는 일을 맡으라.》고 했답니다. 신이 초열흘날 번을 서고 나가다가 남이의 집에 가서 만나보고 나오는데 남이가 좀 의논할 일이 있다면서 절 붙잡았습니다. 남이는 저한테 《아무리 옳은 사람이라도 권세를 잃으면 해를 당하는것이요, 아무리 간사한자라도 권세를 잡으면 기세를 부리는것이다. 만일 이번 일을 은밀히 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한다. 비록 안해나 아들에게라도 부디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이 그 사람들이 언제 일을 일으키는가고 물으니 남이는 돌아간 임금을 장사지내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신이 《지금 미리 보고해야지 그 시기에 가서 어떻게 갑작스레 사변에 대처하는가》고 물었더니 남이는 《그 시기에 가서 먼저 우두머리들을 제거한 다음 보고한다》고 했습니다. 신이 재차 《무엇때문에 즉시 보고하지 못하는가》고 했더니 남이가 《형적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무엇을 근거로 삼아 보고하겠는가》고 했습니다. 신은 이상해서 또다시 자네가 거사날자까지 알고있는데 형적이 드러나지 않았다니 무슨 소린가고 하니 남이는 《날자는 정해도 저것들이 부인하면 나 혼자로서는 해명할 근거가 없다》고 했습니다.

군주-음, 요사스러운 놈들! 계속하라!

문효량-열아흐레날 신이 번을 나가다가 사복장청에 들리니 거기에 문천군 류사, 신종군 효백, 정승로… 그리고 남이가 있었습니다.

군주-그래서?

문효량-남이가 그이들로부터 김국광이 병조판서를 겸하다가 파면당했다는 소리를 듣고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군주-…?

문효량-남이는 기뻐하면서 《전하처럼 거룩하고 현명한 임금은 몇천년에 한번 보겠다. 그의 행실을 어떻게 알고 교체시켰을가?》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류사가 《동료에 대한 문제를 어찌 그렇게 말할수 있느냐》고 하면서 분개했습니다. 남이는 그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이다. 임금과 동료가 어떻게 같을수 있겠는가!》…

군주-이놈, 이 요사스럽고 고약한 놈! 역적을 슬그머니 두둔해? 그런 얼림수에 속아넘어갈 군주가 아니다. 라장- 저놈한테 형장을 쳐랏- 매우 쳐라.

문효량-아이고, 죽이더라도 제 말을 더 듣고…!

군주-너 이놈, 효량아-

문효량-아이고 전하, 제발 목숨만… 실… 실토하겠나이다

군주-실토하면 산다, 살아…

문효량은 이때까지 어떻게나 친구를 살려내자고 꾀했지만 저력이 풍기는 임금의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자기가 사느냐 남이를 죽이느냐 하는 갈림길에 섰다는것을 느꼈다. 그리고 남이는 한명회한테 걸렸으니 어차피 살아날수 없는 신수이지만 자기는 살아날수도 있는 처지이고 또 자기라도 살아남아야 공주마님과 구을금이도 보살필수 있지 않느냐고 생각했다.

그는 모진 가책에 속이 후들후들 떨리고 가슴이 못견디게 쓰려났지만 자기쪽을 쏘아보는 임금을 마주보며 이를 악물고 의금부의 밀실에서 한명회가 시켜준대로 말할수밖에 없었다.

그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방안공기를 흔들었다.

《전하마마, 남이는… 그는… 그는 세조임금을 장사지내러 갈 때 도중에서 한명회와 같은 우두머리들과 왕자들을 사살… 다음에는 전하까지 제거하고 제가 들어서겠노라고 했소이다…》

그 순간 방안공기가 쩡 얼어붙고 쥐죽은듯 한 괴괴한 정적이 깃들었다. 군주는 치를 떨다가 하늘쪽 천정을 바라보며 이를 갈고 한명회는 화들화들 떨며 사위였던 임금만 지켜보았으며 벽밑의 고관대작들은 뛰여일어나지도 함성을 내지르지도 못하고 어리쳐버린듯 임금과 한명회며 남이쪽을 바라보았다. 마치도 뢰성벽력전의 정적이 흐르는듯 했다.

남이는 식은땀에 젖어 증오도 적의도 아닌 망연자실한듯 한 눈매로 아이적 송아지동무, 효량을 지켜보았다. 측은한 눈매였으나 머리속에서는 태풍이 몰아치는듯 했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함구령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의젓하게 일어나 군주를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신은 저 효량이를 불쌍히 여기오이다. 분명코 저 가련한 인간은 누구 강박에 못이겨 거짓을 꾸며댔소이다!

예종은 그런 소리는 귀등으로 들으며 문효량쪽을 돌아보았다.

군주-효량이 이눔, 재상들가운데서 이 역모에 가담한자 또 누구냐?

문효량-령의정… 강순이…

군주-흠, 령상에게 고랑을 채우라!

강순-(라장들이 달려들어 팔목에 고랑을 채우자 엉엉 소리를 내여 울면서) 원래 갑사이던 소인이 임금의 은덕을 분에 넘치게 입어 제일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고 공신까지 되였는데 무엇이 모자라 고령나이에 반역을 꾀하겠나이까, 상감마마…!

군주-(잠시 생각하다가) 어- 그래… 그래… 설마한들 그 나이에 반역을 꾀하겠느뇨… 불쌍하도다… 고랑을 벗겨 제자리에 앉혀주라!

그러자 강순은 너무 고마와 이마가 방바닥에 닿도록 두번 세번 절하는데 훈구파의 고관들이 용서하면 안된다고 임금에게 간하며 악에 받쳐 부르짖었다. 그 바람에 강순은 그들쪽으로 돌아앉아 절하며 용서를 빌면서 흐느꼈다.

존경해온 로장의 그런 몰골을 지켜보던 남이는 의분과 혐오감을 누를길 없어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몸부림쳤다. , 강순도원수가 언제 어느새 저런 추물로 되였는가, 옛 총대장의 그 용용한 기개는 다 어디로 갔는가?

의금부에 잡혀온 후 참기 어려운 문초를 받으면서도 그는 저 로장이 자기를 두둔하여 기염을 토하기를 이제나저제나 하고 얼마나 기다려왔었던가. ,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남이는 가슴에서 돌사태가 허물어지는듯 싶어 입술을 피터지게 깨물고 치를 떨었다.

방안에 증오와 적의의 광풍이 몰아치고 훈구파의 고관들이 허연 수염발을 날리며 뛰여일어나 남이와 함께 강순이도 쳐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그 바람을 타고 류자광이 뛰여일어나 악에 받쳐 미친듯이 소리쳤다.

《전하, 상감마마- 남이 이눔은 병란에 화포들을 쓰자고 했소이다. 그 차비를 하느라고 우리 화포대로 들락날락하고…저… 저… 장단에서 외적이 쳐들어온 개경을 불사르자면 화포사거리를 늘여야 한다면서 다른 나라에서 구리까지 사들이자고 했소이다… 저… 저… 역적은 하늘에 살별이 뜨자 새 왕조가 설 계시라고 떠들며 병란을 꾀했소이다!!

그 고발자를 쏘아보는 남이의 눈에 불꽃이 날리는듯 했다. 그는 이런 엄청난 모해의 장본인이 바로 저놈이라는것을 비로소 깨달았던것이다.

여태 저런 악귀를 불쌍히 여겨 돕자고 왼심을 썼던 일들이 뇌리에 번개치며 머리가 터져나가는듯 하늘땅이 뒤번져지는듯 했다.

그는 너무 억이 막혀 헉하고 흐느낄뿐 분격의 폭발도 광기도 없는 랭랭한 얼굴로 그자를 쏴보다가 일어나서 소리쳤다.

《야 자광이, 날 보라- 너였구나. 네놈이 나를 모해했고나! 이 악귀같은 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그리고는 임금쪽을 돌아보며 격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저놈 말은 다 거짓이오이다!

그때 고관들속에 여태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박중선이 일어선것은 실로 뜻밖의 일이였다.

《상감마마, 류참지 증언이 죄다 옳소이다. 신이 병조판서로 있어 잘 아오이다. 화포대와 경복궁, 장단과 개경 경덕 궁은 사거리가 같소이다. 남이는 화포대로 경복궁을 불사르고 반란을 일으키자고 했음이 분명하오이다!

남이전에 병조판서를 지낸 그의 증언에 예종이 머리를 끄덕이자 고관대작들이 뛰여일어나며 저주의 함성을 터치였다.

《아니-다-》

심문과 뭇매질에 몸이 찢기고 피투성이 된 남이는 이 한마디 소리만 남기고 그만 졸도하여 비틀거리다가 방바닥에 쓰러지고말았다.

갑작스러운 소요에 얼떠름해진 예종이 어좌에서 일어나 쓰러진 남이쪽에 손가락총질을 하며 저 역적놈을 매우 치라고 호령했다.

의금부의 라장들이 형장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날 남이의 왼쪽 다리뼈가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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