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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살별… 혜성은 당시의 력법으로 보면 무자년(1468)년 계해일부터 병술일까지 사이에 밤하늘에 나타났다.

하루이틀도 아니요 열여드레동안이나 밤하늘에 계속 나타나는 그 살별은 임금이 사망하여 시신이 아직 수강궁의 빈전에 누워있는 때에 나타난것으로 하여, 기이하게도 희부연 꼬리를 길게 혹은 짧게 끌며 날아 신비감과 공포감을 자아내고 어망처망한 재난을 예고하는듯 하여 민심을 뒤숭숭하게 흔들어놓았다.

항간에는 흉흉한 소문들이 나돌았다. 이제 례년에 없던 대홍수가 터지고 십년동안 흉년이 든다, 어디서는 산속에 숨어있던 산적들이 벌방으로 밀려내려와 관가의 고간을 털어 농량 수백수천섬을 략탈해갔으며 또 어디서는 문둥병자들이 아이들의 간을 빼먹고 새색시들을 업고 제놈들의 소굴로 도망쳤다, 이제 민란이 터질것이다.

하늘에 살별이 뜨기 시작한지 아흐레째 되는 날 밤 한강기슭의 모래불에 수수한 도포차림의 한 그림자가 서서 하늘을 넋없이 쳐다보며 시름겨운 한숨만 내쉬고있었다.

한명회였다.

어슴푸레한 하늘에는 희부연 꼬리를 길게 날리며 살별이 그린듯이 떠있고 한강의 유유한 흐름도, 괴괴한 정적속에 숨을 죽이고있는듯 싶었다.

한명회는 요새 무거운 시름이 한두가지 아니여서 얼굴에 번뇌의 어둑한 그늘이 짙게 비꼈고 도포자락도 후줄근하게 내리처졌다. 그것도 그럴것이 살별이 처음 나타났던 날 밤 년소한 임금이 승정원 도승지로부터 하늘의 옥황상제가 대노하면 저런 살별이 뜬다는 소리를 듣고는 빈전으로 달려들어가 부왕의 시신앞에 쓰러져 방바닥을 치며 통곡하였던것이다.

이처럼 세상이 어수선하고 민심이 흉흉할 때 만백성이 쳐다보는 군주가 저렇게 울며불며 돌아치면 어이 하는고? 한명회는 자기 사위였던 어린 임금이 못내 측은하면서도 풋내기군주로 얕보이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어제그제는 간의대에 올라가서 관상관한테서 무슨 소리를 듣고 왔는지 끼니도 들지 않았다고 했다.

한명회는 살별을 쳐다보며 이러한 때 무슨 신통한 방략이 없겠는가 머리를 짜며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옥황상제가 대노해 이런 성변이 일었다면… 그렇다면 옥황상제가 무엇에 대노했는지 그 까닭을 알아야 한다. 고명한 복술들을 데려다가 알아보고 관용을 비는 제사를 크게 지내야 하지 않을가. 민심이 흉흉한건 나라에서 여태 백성들이 한을 품을수 있게 정사를 했기때문이다. 어- 얼마나 많은 선비들과 량인, 백성들을 옥에 가두고 류배살이를 보냈는고… 그 원한이 하늘에 사무친게 아니냐? 어떻게 그 한을 푸느냐!… 가만있자… 은사를 내려 다 풀어놓으면…? 대사령… 대사령!

그때 뒤쪽에서 모래불을 사뿐사뿐 밟는 소리가 들려와 돌아보니 류자광이였다.

그 작자는 밤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다가왔다.

《대감님, 요새 남이행동거지가 수상하오이다.

《음?

《판서벼슬에서 물러난 뒤 강순령상한테 자주 찾아다니오이다.

《건 나도 안다. 무슨 수작을 하는지 듣지 못했냐?

《따라들어가지 못해…》

《어떻게나 엿들어야 한다. 바싹 따라 냄새를 맡으라. 그래가지고야 웬 소득이…?

별안간 하늘이 허물어져내리는듯 한 굉음이 울려퍼짐과 함께 살별이 은백색빛발을 뒤쪽으로 내뿜으며 전률하는듯 했다. 하늘땅이 진감하고 질풍같은 기운이 몰아쳐오며 옥황상제의 노성이 만리대공에 메아리치는듯 했다.

류자광이 기겁하여 모래불에 납작 엎드렸으나 한명회는 그냥 버티고 서서 하늘만 쳐다보는데 살별의 빛발이 얼굴에 언뜻거렸다.

《앗- 엎드려요-》 자광이 덴겁하여 소리쳤다.

《일없다-하늘도- 나를 알아본다-》

그날 밤 한명회는 류자광에게 여러모로 오금을 박아서 돌려보낸 다음 자기 안식처인 별당으로 들어왔다.

그가 숨을 돌리고 자리에 누우려는데 왕실에서 웬 예쁘장한 궁녀가 찾아왔다.

머리에 검스름한 쓰개를 쓴 궁녀는 왕후마마가 대감이 입궁하기를 바란다고 전하였다.

그날 밤 한명회가 어전으로 들어가니 군주가 정사를 두고 사색하는 법전이라는 사정전에만 초불들이 환하게 켜져있는데 임금이 누구인가를 격해서 꾸짖는 소리가 밖에까지 흘러나왔다.

《불이나 콱 질러라!

그가 저으기 놀라 왕후를 돌아보며 무엇에 불을 지르라고 저 야단이냐고 물으니 왕후는 눈물을 지으며 애절하게 속삭이였다.

《승정원 도승지인데… 천문에 참봉인 량반들이 함부로 오르내리게 해서 세상에 요언만 퍼뜨리는 간의대를 불살라버리라고 하시는데 막 안타깝나이다. 대감께서 들어가셔야 진정이 될것 같나이다.》 왕후는 가벼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때 사정전문으로 도승지가 쫓겨나와 그들곁을 바람처럼 지나갔는데 상투머리에서 사모가 벗겨져 바닥에 딩굴었다.

한명회의 발치까지 굴러온 관모에서 호랑나비날개와 같은 사모뿔이 바르르 떨렸다.

《으흠…》

한명회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사정전안으로 들어갔는데 임금은 어좌에 엇비스듬히 쓰러져 분노를 묵새기다가 그를 보자 창백한 얼굴에 알릴듯말듯 반색을 띠였다.

한명회는 여전히 임금앞에 엎드려 절하며 상감마마앞에 간할 요건이 생겨 대령했으니 용서하라고 머리를 조아렸다.

임금은 머리를 끄덕이며 일어나 앉아 말하라고 일렀다. 그리하여 한명회는 임금의 눈치를 보아가며 품고 온 생각을 조금씩 털어놓게 되였다.

《상감마마, 신이 간하는 말씀이 미숙하고 외람된거라도 너그럽게 생각하여 마감까지 들어주시옵기를 바라나이다.

《허, 마음을 터놓고 말하시오.

《요새는 저 하늘에 살별이 떠 세상이 어수선해지고 민심도 말이 아니오이다.

《민심이…?

《나라는 지금 나라의 지주요 반석인 전하께 든든히 의지하고있소이다. 이런 때일수록 더 자중하고 의젓하고 름름해지기를 신은 충의를 담아 바라나이다.

《음…》

그리고 한명회는 천문관상관들이 부실한것은 사실이오나 간의대는 불사르지 말고 살별과 그 움직임을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남겨두는것이 어떠냐고 조심스럽게 문의했다.

《대감, 과인이 없애버리자고 한것은 량반, 그 잡놈들이 함부로 오르내리며 헛소문을 퍼뜨리기때문이오.

《지당한 우려오이다. 때문에 상감마마외에 승정원 도승지와 몇몇 고관들만 오르게 하고는 일체 차단함이 어떠하오리까?

《음… 그렇게 할수도 있지…》

《상감마마, 이 성변은 하늘의 옥황상제가 대노하야 생긴것 같소이다.

《엉? 옥황상제가? 대감이 그걸 어떻게 아는가?

《서울의 고명한 복술들이 다 그렇게 증언하옵니다.

《복술들이?… 그게 사실이면 어찌한다?

《나라에서 큰 제사를 지내 관용을 빌어야 하오이다.

《그런 제사는 어떻게 지내는고…?

《그건 도교경전에 다 있소이다.

《아- 그러면 됐군!

《제사만 지내서는 안될줄로 아오이다.

《…?

《나라정사를 바로잡는걸 보여줘야 하오이다.

《어떻게 …?

《지금 서울과 지방들 감옥마다 죄인들이 차고넘쳤는데 임금의 어지로 은사를 내려 다 풀어놔야 하오이다.

《그런다고 고맙게 여길것 같은고? 풀려나간 놈들이 바깥의 폭도들과 합세해서 민란을 터치지 않을가?

《그래서 상감마마, 신은 한꺼번에 풀어주지 말고 처음에 조금씩 내놔주면서 동정을 살피다가 무탈하면 조금씩… 또 조금씩 내놓는게 어떨가 하오이다.

여기서 임금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별안간 눈길이 사나와지고 얄팍한 입술이 바르르 떨더니 이렇게 물었다.

《제사라는걸 하면 모두 옥황상제한테 절을 하겠지?

《상감마마, 그렇소이다.

《과인도 절을?!

《부왕께서도 옥황상제한테만은 엎드려 절했소이다.

《나는 부왕이 아니다. 리황이다-》

《아 아 이러지 … 고정하시오이다.

《어째서 발바닥 핥으란 소린 못하는고-?!

그 격노한 부르짖음소리가 방안에 메아리치고 밖에서 엿듣던 왕후가 기겁해 뛰여들어와 방바닥에 주저앉은 한명회를 안아일으키고 궁녀며 내시가 따라들어왔다.

임금은 얼굴이 불그락푸르락해서 눈을 내리뜨고 앉아있었지만 인차 뉘우치기 시작했다. 림종을 앞두고 자기를 기대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부왕의 얼굴이 떠올랐던것이다. 그는 자신이 즉위한 다음 인차 살별이 떠서 성변이 일고 나라안이 뒤숭숭해지자 근심걱정에 휩싸이며 태평세월이 아닌 이러한 때 군주로 즉위하게 된 신세를 두고 한탄하였다. 만약 부왕이 이 무시무시한 성변까지 치르고 왕위를 넘겨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문무백관들과 신하들이 자기가 년소하다고 얕보는것 같아 지나치게 마음을 쓰다나니 왕실의 기둥격이며 이전 가시아비인 한명회에게까지도 호령이 나갔는데 그것이 게면쩍어지기도 했다.

한명회는 임금앞에 공손하게 엎드려 절하고는 돌아서나가며 주눅이 좋게 싱그레 웃었다. 어린 군주가 앞에서는 저래도 뒤에서는 자기 의사를 괜찮게 따른다는것을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2

 

이튿날 아침 군주이하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근정전 뜨락에 다 모여 하늘에 관용을 빌고 태평세월이 오기를 기원하여 허리가 부러지도록 절을 하고 또 하였다.

겸사복장으로 일하게 된 남이는 제일 뒤쪽에서 임금을 따라 절했는데 그도 항간을 휩쓰는 풍설들에 마음을 쓰며 착잡한 근심걱정에 깊이 잠기게 되였다. 온 하루 일손이 손에 잡히지 않아 침울한 기분에 싸여있던 남이는 그날 밤 경비를 서다가 경회루련못 저쪽에 자리잡고있는 간의대로 가보았다.

간의대는 별들이며 천상의 갖가지 현상들을 관측하는 기구인 간의를 설치하여 높이 쌓아올린 화강석대였다.

간의대로 올라가는 화강석층계밑에서는 파수병이 사람들의 출입을 단속하고있었는데 언제 왔는지 문효량이 좀 올라가보자고 사정하고있었다. 파수병은 전하의 어명이라면서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게 했으나 어떻게 남이의 지체를 알아봤던지 군소리없이 올려보냈다.

남이는 호기심에 끌려 화강석층계를 따라 우쪽으로 뛰여올라갔다.

그때 저쪽 어둠속에서 뛰여나온 류자광이 뒤따르려다가 파수병한테 걸렸다.

한편 간의대우에 올라선 남이는 좀 어리둥절해졌다. 간의대는 당대의 천문대로서는 결코 낮다고 볼수 없는것으로서 오늘의 척도로는 높이 6.2m, 길이 9.4m, 폭이 6.4m인 탐탁한 구조물이였다.

그는 이전에 천문관상관들이 낮이나 밤이나 하늘을 쳐다보는것을 보고는 저들이 나라의 국록을 타먹고 무얼하느냐고 우습게 여겨왔는데 이밤에는 그렇지 않았다. 여태 땅바닥에서만 돌아치다가 천상의 세계에 오른듯 한 놀라움과 환희 그리고 호기심에 가슴이 한껏 부풀어 두리번거리게 되였다.

간의대의 네귀에는 궁성들에서만 쓰는 사초롱불들이 걸려있고 다섯명의 천문관상관들이 밤하늘을 넋없이 쳐다보고있었다.

희푸르스름하고 둥그렇게 쳐다보이는 하늘에 그 수를 헤아릴수 없는 별무리들의 세계가 가없이 펼쳐졌는데 모두 홍보석, 청보석, 혹은 록보석처럼 반짝이며 끝없는 이야기를 속삭이는듯 했다.

그냥 쳐다보니 그것들한테도 제나름의 빛갈과 표정이 있고 숨결이 있는듯 싶었다. 이름할수 없는 희열에 넘쳐 하늘을 쳐다보던 그는 문득 저 별들을 몽땅 한품에 걷어안고 온 누리가 들썩하도록 환성을 터치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남이는 울렁이는 가슴으로 간의대의 복판에 설치된 간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갔다. 간의는 장정의 키보다 더 커뵈는 직경의 원형구리테안에 그보다 좀 작은 원형구리테 두개가 직각으로 사귀여있는 기구인데 아무리 살펴봐야 그 속내를 알수 없었다.

그가 머리를 기웃거리는데 등뒤에서 기침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하늘의 신선처럼 머리며 수염발이 허옇게 드리운 관복차림의 로인이 다가왔다.

그 로관상관은 남이를 알아보고 공손히 인사를 하며 살별을 보러 왔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밤하늘에 희부옇게 가로 비낀 은하수의 흐름을 가리켰다.

《저기… 저기 은하수밑에 꼬리가 달린 큰 별이 보여유? 저것이 살별인데 어떤 땐 저 허연 꼬리가 서른발이상이나 늘어나지요.

《녜…》

《오늘 밤은 은하수의 흐름이 훤하게 밝아지면서 무슨 조화인지 저 살별의 꼬리가 퍽 짧아졌소이다.

《꼬리가 길어졌다 짧아졌다 한다… 그럼 저 살별은 실체가 도대체 뭔가요?

《글쎄요…》

《보석인가요, 막돌인가요? 보석이나 돌이면 무거워 땅에 떨어지겠는데? 무슨 구멍이 아닌가요?

《구멍이라니? 허…》

《예전에 우리 마을에 빈집이 있었는데 천정에 구멍이 숭숭 나있었지요. 어릴적에 여름철이면 장난질을 하다가 그  빈집에 들어가 시원한데 척 누워 땀을 들였지요. 그때 천정을 쳐다보면 잔구멍들이 많이 보였지요. 헌데 그 구멍들로 새여드는 해빛이 빛살처럼 퍼지며 비쳐들었어요. 저 별들도 다 그런 구멍들이 아닌가요?

《허- 나리, 천문을 했대도 대성했겠소이다. 옛날 중원이나 아라비아에 그 비슷하게 생각한 학자들이 있었소이다. 그네들은 하늘을 세상의 지붕처럼 본데로부터 밤하늘의 별을 지붕의 구멍들로 새여드는것이 빛이라고 생각했지요. 허-구멍이야 아니지요.

《그걸 어떻게 알아유?

《구멍이 저절로 움직이는가요? 별들은 움직이지요. 저 살별도 며칠전에는 은하수 건너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이쪽으로 건너왔소이다.

《허 정말… 무슨 기운으로 움직일가? 꼬리가 있는걸 보면 저 살별이란 무슨 영악한 짐승의 유령이 아닐가요?

로관상관은 아무런 응대도 없이 간의의 테를 주먹으로 뚝뚝 두드리며 가슴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였다.

《휴- 우리는 아직도 저 살별의 실체가 뭔지 모르오이다.

그리고는 어제 전하마마까지 친히 여기로 오르시여 이제 홍수가 일고 민란이 터진다는게 사실이냐고 물었으나 여기 관상관들이 똑똑한 대답을 못하자 대노해 돌아갔노라고 했다.

로인은 우들우들 떨며 이제 우리는 다 역적으로 몰려 의금부에 잡혀갈지도 모른다고 하소연했다.

《… 살별의 실체가 무언지도 모르는것들이 어찌 홍수요, 민란이요 하는것까지 예상할수 있소이까? , 이런 때 장영실별감님만 생존해계셔도…!

그리고는 이 간의대며 홍천의,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력서 등을 착안하고 손수 만들어낸 별감의 공적을 렬거하였다.

《주자성리학때문에 명나라에 류학한이는 많았지만 실학때문에 류학갔다온이는 별감님 혼자였지요. 그것도 앞날을 내다볼줄 안 세종임금이 친히 천거해서… 예서 우리 사는 땅덩이가 네모났는가 둥근가 쟁론이 많았을 때 별감님은 하늘의 해와 달, 별들이 다 둥근것으로 보아 이 땅덩어리도 둥글거다 이런 탁견을 내놓았지요. 어-기막힌 일도… 지금 별감님만 계셔도 저 살별의 실체가 무언지 벌써 알아냈지요.

그 로관상관은 그새 조정에서는 살별의 실체를 당장 알아내라 독촉이 불같은데 우리 천문 관상관들은 음양의 조화이다, 옥황상제의 천벌이다 쟁론만 하고있다고 개탄하였다.

남이는 그럼 관상관어른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하늘의 성변이 인간세상에 재난을 들씌운다… 꼭 그렇 게 단정할수는 없지만 무슨 일이 생길수도 있지 않을가 근심도 들어요. 소인은 임금이 승하하고 새 임금이 즉위했은즉 저 살별은 낡은것이 물러가고 새것이 등극한다는 하늘의 계시가 아닐가 생각하오이다.

《녜…》

남이는 간의대의 층계를 내려오다가 왕궁에서 옥황상제에게 제를 지낸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추었다. 만일 장영실이 살아있다면 살별의 실체를 알았을것이니 그런 놀음이 필요하랴. 조정의 본을 따라 온 나라 관가들에서도 제를 지냈을것이니 몇천, 몇만섬의 미곡이 소모되였으랴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못내 쓰려났다.

 

×

 

그날 남이는 침울한 기분으로 화강석층계를 내려와서 몇발자욱 걸어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간의대를 우러렀다. 캄캄한 밤하늘, 가없이 펼쳐진 별들의 바다, 은하수의 희부연 흐름… 그밑에서 움직이는 관상관들의 그림자… 그들이 돋보이고 우주를 탄상하면서 자기 가슴도 커졌는지 리유임금의 죽음까지도 흔히 있을수 있는 일상사로 여겨졌다.

그가 경비실쪽으로 돌아가는데 호분위군사들이 든 기와집모퉁이에 대여섯명의 그림자들이 둘러서서 왁작 떠들고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여 그리로 다가가는데 류자광이 나서며 살별이 나타나는 이 성변이 길조냐 흉조냐 하고 쟁론하는중이라고 했다.

남이는 그들옆으로 그냥 지나치려다가 별생각없이 걸음을 멈추고 한두마디 던졌다.

《여보게, 이 불쌍한 중생들아… 길조도 흉조도 아무것도 아니여.

젊은 관리들이 입을 모아 그럼 뭐냐고 물었다.

남이는 싱그레 웃었다.

《저 살별은 낡은건 물러가고 새것이 왔다는, 말하자면 새 시기가 온다는걸 이 나라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별이야. 저 혜성은 옥황상제의 사도이지. 선왕이 승하하고 새 임금이 즉위하지 않았나.

그러자 젊은 관리들이 한마디씩 했다.

《모르겠는걸, 아니 나으리, 선왕이 승하하면 왕세자가 즉위한다는거야 누구나 다 아는 일이 아닌가요. 그런걸 알리자고 옥황상제가 사도까지 파하는가요?

《허허허…》

《하하하…》

《누구나 다 아는걸 알리자고 사도를 파한다. 하하하…》

《웃을 일이 아니요. 옥황상제가 대노했어. 새 시기가 왔는데도 이 나라 량반들이나 백성들이나 다 정신을 못 차리니 대노했소.

《일전에 부친묘를 이장하러 경상도에 가보니 말이 아니요. 문둥병자들이 새색시를 업어간다, 산적들이 관가의 쌀을 털어간다 말이 아니야. 이런게 자라면 민란이지 다른게 민란인가.

《휴- 길조도 흉조도 아니란건 너무 태평스런 생각이 아닐가?

남이는 태평스럽다는 소리에 은근히 부아가 돋았으나 어디 실컷 떠들어보라고 개의치 않으며 그 자리를 떴다.

그는 인차 흥그러운 마음으로 경비실쪽으로 걸어갔다.

그밤 병조참지 류자광은 길조냐 흉조냐 하고 입씨름하던 관리들이 제풀에 맥이 진해 흩어진 다음 어깨가 축 처져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3

 

류자광은 청계천기슭의 빈민부락곁에 있는 낡아빠진 세칸짜리 외통기와집에서 살았다. 명색이 기와집이라지만 지붕에 쑥대들이 자라오르고 흙벽이 뒤쪽으로 약간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통나무 덧기둥까지 받치고있었다.

류자광은 전에는 그런대로 살아왔으나 이름높은 명복술 홍계관에게 사주팔자를 보인 다음부터는 집뜨락에 들어서기만 하면 기분이 잡쳐졌다.

나같은 인걸이 이런 집에서 살아야 하나 하는 울분때문이였다.

게다가 눈이 두꺼비눈처럼 불거져나온 처를 보면 구역질이 났다. 그는 저도 모르게 밤재미를 기생들한테서 보는 놈팽이로 되여갔다.

그날 밤 류자광이 집에 돌아오니 처가 그 역겨운 두꺼비눈을 흘기였으나 못 본척 하고 차려주는 밥이나 대충 먹고는 잠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남이가 간의대에서 내려와서 한 아리숭한 소리가 귀안에 뱅글뱅글 맴돌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포단속에서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들었는데 밤중에 기이한 꿈을 꾸었다.

한명회가 파리가 윙윙 날아다니는 자기네 집 방으로 들어와 무섭게 쏘아보며 꾸짖었다.

《너 이눔, 남이가 간의대에서 내려와서 역적모의를 했다고? 고약한 놈, 남이는 태종임금의 외손이고 그 애 충의는 나도 잘 알어…》

그리고는 자욱히 흘러드는 안개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자광이 오싹 몸서리치며 눈을 뜨니 꿈이였다. 그는 가슴이 서늘해져 일어나 한동안 앉아있다가 번듯이 누웠다. 온몸에 식은땀이 내배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용히 눈을 내리감고 왜 이런 꿈을 꾸었을가 하고 생각하는데 문득 어느 성현인가 꿈이란 반대로 풀이를 해야 한다고 한 소리가 떠올랐다. 그러자 지난밤 남이가 간의대에서 내려와 관리들에게 던진 말들이 미심쩍게 느껴졌다.

그는 벌렁 드러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가 다시 남이가 한 말들을 더듬어나가며 그 말귀들을 씹어보고 냄새도 맡아보았다. 천정을 쳐다보며 생각을 굴리는 그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불꽃이 이릉거리는듯 했다. 꿈에 한대감이 그자의 충의를 안다고 했지? 아니야 꿈은 반대로 풀어야 한다고 했어, 어디 어디서 역적의 냄새가 나는가? 남이는 지껄였어. 저 살별은 낡은것은 물러가고 새것이 온다는 하늘의 계시를 알려주는 별, 옥황상제의 사도라고… 낡은것은 물러가고… 음… 리유임금이 승하했으니 물러가고 새 임금이 즉위했으니 새것이 온다… 한데 무슨 소리를 더 지껄였는데…? 뭐라고 했드라… 뭐라고? 잘 쓰지 않는 유식한 소리를 한것 같은데?!… 옳지 그래 그래 시기라고 했어. 새 임금이 즉위했으니까. 새 시기야 새 시기지. 원 그런 응당한 소리는 무엇때문에 해? 여기서 무슨 냄새가 나지 않아? 무얼가? , 옳지 옳아, 새… 이 말귀에 무언가 냄새가 나!

누군가 가까이에서 자기를 빤히 여겨보는듯 한 느낌이 들어 얼결에 돌아보았다.

벽에 걸렸다가 떨어진 동판거울이 바로 머리맡 벽밑에 기대여 서있는데 그 거울속에서 웬 사나이가 그를 빤히 내다보고있었다.

자광은 맹금의 눈처럼 독기를 뿜는 그 눈동자를 보자 자기자신을 알아보았다. 그는 망설이고 또 망설이고 열번백번 곱씹어 생각한 끝에 며칠뒤 야밤삼경이 지나 관복을 주어입고 집밖으로 조용히 나섰다.

그는 경복궁쪽에 있는 한명회의 집을 향해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턱에 닿아 헐썩거리며 뛰여가는 그의 눈앞에 어느덧 출세와 영달의 신기루가 언뜻거리는듯 했다.

그는 도중에 요란스런 가마 한대가 마주오는것을 보고 화닥 놀라 몸을 날려 길가의 정자나무뒤에 숨었다. 나무밑에 붙어 내다보니 빈 가마인것 같았다. 뒤따라 순라병들이 말을 타고 뚜꺽거리며 지나가고 그 말발굽소리가 괴괴한 정적을 흔들었다. 등골로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는 다시 길로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아 고목뒤에 맥없이 주저앉고말았다.

문득 남이가 태종왕의 외손이고 정선공주의 아들이란 생각이 뇌리를 쳤다. 일단 의금부에 상정되면 나라님이 적자중의 적자인 남이를 더 믿지 서자인 나를 믿겠는가, 뒤집혀지면 나는 그날로 목이 날아난다.

이렇게 생각한 자광은 엉거주춤 서있다가 돌아서 집쪽으로 맥없이 걸음을 옮겨갔다.

벌써 동녘이 희붐하게 밝아왔다. 가련하고 비겁한 자광은 집가까이에 거의 와서 무엇엔가 흠칫 놀라 멎어섰다. 이전에 명복 홍계관이 한 예언이 떠올라서였다. 그 복술로인은 이제 《귀인》이 나타나 그대를 도와준다고 했겠다. 만약 한대감이 《귀인》이라면 남이보다 내편에 설것이 아닌가…? 아니, 그러나 모른다. 남이야 왕가의 외손이고 나는 서자… 멸시당하고 차별을 당한 비천한 서자가 아닌가, 모른다 몰라…

자광은 식은땀에 젖어 오래동안 망설이다가 죽기를 각오하고 돌아섰다.

새벽녘에 한명회는 숨이 턱에 닿아 자기 집으로 찾아든 자광에게 나직이 물었다.

《오다가 누굴 만났지?

《예? 어느 대감이… 빈 가마였소이다!

로회한 한명회는 류자광의 서툰 행동거지에 혐오를 느꼈다.

《그대와는 큰일을 도모하지 못하겠군… 무슨 큰일이 났다고 새벽에 뛰여다니나…?

《대감님, 잘못 처신했소이다.

한명회는 그가 찾아온 사연을 다 듣고는 흐뭇한 미소를 짓는것 같더니 눈을 내리뜨며 입을 꾹 다물었다.

류자광은 웬일인가싶어 숨을 죽였는데 방안에 괴괴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한명회가 입을 열었다.

《새것이 온다는 소리밖에 더한것이 없나?

《녜?

《새 왕조가 선다는 소리는 없었냐?

한명회는 거의 위혁적으로 물었다.

자광은 비로소 그도 자기와 같은것을 바란다는것을 꿰뚫어봤으며 그 모진 큰 충격에 목이 꺽 메여 입도 열리지 않았다. 귀에서 윙- 소리가 나고 온몸에 검은 피가 굽이쳤다.

한명회는 사팔뜨기눈을 사납게 번뜩였으나 예상외로 그의 목소리는 은근하게 고무하듯 들리였다.

《왜 말을 못하나?

《대감님, 했…했소이다!

《새 왕조라고?

《예…》

《적실하냐?

《목숨걸고… 새 왕조가 선다고 지껄였소이다. 목숨을 걸고…》

《좋아. 한손으로는 손벽을 못 쳐. 두손으로 쳐야 소리가 크게 나니 다른 한 관리한테도 은밀히 밀고하라.

그날 오전 류자광은 승정원 승지 리극중의 도움으로 편전문밖에까지 들어가서 승전내시 안경준을 만나 전하에게 남 이의 역모를 고발하도록 사촉했다.

그 소리를 듣자 내시는 너무 놀라 숨을 헉 들이그으며 손으로 입을 싸쥐였다.

 

4

 

궁궐안에는 수천길 바다밑과 같이 괴괴한 정숙이 깃들어 있었다.

임금은 침전에서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나서 따끈하게 덥혀온 보신용탕약을 후- 후- 불며 마시였다. 속앓이를 한다고 왕실의원이 권하는 보약이였다.

인차 속이 훈훈해지고 이마에 더운 땀이 내배는듯 하면서 배가 편안해졌다.

예종은 마음이 개운해져 한껏 기지개를 켜다가 이마살을 찌프렸다. 또다시 허리며 어깨, 무릎쪽이 저려드는듯 했던것이다.

그는 자리에 벌렁 드러누우며 어리궂은 총각애처럼 《얘- 이리와- 은진아- 춘송아-》 하고 큰소리로 두 궁녀를 불러들였다.

예종은 궁녀들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에 걸터 앉으며 신경질적으로 어디어디가 저리고 쑤신다고 투정질을 했다.

그보다 나이가 손우인 두 궁녀는 어린 군주의 이런 얄궂은 꾀병에 습관이 되여 마음속은 흔연하면서도 바빠맞은척 하면서 어깨를 주무르고 다독여준다, 종다리를 비벼준다 야단법석을 떨었다.

예종은 저리고 쑤시던데가 가뭇없이 풀리며 속이 편안해지고 자기 어깨며 잔등, 다리를 다독여주기도 하고 쓸어만지는 궁녀들의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어느덧 련인들의 애무로 안겨오기까지 했다.

(흠… 계집들의 손은 약손이야…)

그는 일어나기 싫어 그냥 퍼더버리고 걸터앉아 눈을 내리감은채로 나직이 흥얼흥얼 노래가락을 불러넘겼다.

그때 서늘한 바람이 불어들고 잔등을 다독이던 궁녀가 누군가와 속살거리는듯 했다.

예종은 순간에 군주로 돌아가 홱 돌아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문지방에 내시 안경준이 겁먹은 얼굴로 서있었다.

《이놈! 이 발칙한 놈!!

《상감마마, 황송하오이다. 너무 급한 일이 생겨 그만…》

《나- 갓- !

리황은 내시를 쫓아버린 다음 곤룡포를 걸치고 왕이 평소에 거처하는 편전으로 나갔다.

급기야 따라들어온 내시가 앞에 와 엎드려서는 머리를 조아리며 울음섞인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상감마마! 남이! 남이가 반역을 했소이다!…》

그리고는 류자광이 하던 말을 죄다 털어놓았다.

《무어-?!

예종은 끌날같은 눈으로 내시를 쏘아봤다.

분별이 없는 어린 군주는 비천한 내시가 자기 침전에 함부로 발을 들여놓았다는 그 분격에 누가 반역을 했다는 소리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이놈… 이눔! 너따위가 감히 남이를?! 태종임금의 외손을…?!

내시 안경준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화들화들 떨었다.

다음순간 임금은 이놈이 나와 궁녀들의 관계를 렴탐해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놈이 고자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여봐라-》

옆방에서 대기중이던 승정원의 늙은 도승지가 뚱기적거리며 달려들어왔다.

《이눔을 의금부에 처넣어라-》

이윽고 달려들어온 호분위의 두 군사가 내시의 덜미를 틀어잡았다. 가련한 내시는 이미 기절하여 버둥거리지도 못하고 흙포대처럼 질질 끌려나갔다.

바로 그때 편전으로 들어가던 한명회가 걸음을 멈추고 군사들한테 끌려나가는자를 여겨보았다. 그는 첫눈에 벌써 끌려나가는자가 류자광이 이미 자기한테 보고한 내시 안경준임을 알아보고 놀랐다.

어찌된 일인가. 전하가 남이를 두둔한것인가…? 그러나 한명회는 못 본척 하고 군주앞에 와 신하로서 공손하게 엎드리며 절하였다.

《상감마마, 옥체무강하시오니까?

임금은 대감의 그런 례의범절에 못내 만족했으나 저으기 당황해진듯 일어나라고 권유했다.

한명회는 그냥 엎드려있었다.

임금이 말했다.

《이자 들어오다가 끌려나가는 놈을 보았나요?

《예?… 예…》

《내시 안경준이란 놈인데… 착실한것 같아 늘 가까이에 두고있었는데 지내보니 렴탐군이요. 과인하고 궁녀들이 어찌는가… 간악한 놈…》

《상감마마, 그렇다면 내시들과 궁녀들… 왕실에 무시로 드나드는 그 년놈들 행실을 한번 조사케 해야 하나이다.

《과인도 벌써 그렇게 생각했소… 음… 흠… 그건 그렇고 무슨 연고로 입궁하셨소?

한명회는 시름겨운 한숨을 내쉬였다.

《상감마마, 고정하사이다. 무슨 큰 변도 아니니… 상감께서는 정녕 선견지명이 계시옵니다.…》

《…?!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뗀것은 나라를 구원한 조치…》

《무슨 일이요?!》 다급히 물었다.

《남이! 저 간악한 역신이 성변을 보고 살별이 나타난것은 이 나라에 새 왕조가 선다는 뜻이라고 지껄였소이다.

임금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너털웃음을 터뜨리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입을 다물었다.

《아니… 방금전에 내시 경준이놈도 그 비슷한 소릴 했는데…?

《모르겠는데요. 입이 다사한 작자니까 꾸며낸 소린지 렴탐한 소린지 우연히 맞아떨어졌는지 허참… 남이는 벌써 북방정벌때부터 새 왕조를 세우자는 야망을 품고있은게 분명하오이다. 그때 지었다는 시를 봐도… 남아 이십에 나라 얻지 못한다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보사이다. 미득국… 이거 무슨 소리인가요? 제놈이 새 왕조를 세우고 그 왕으로 군림한다는 야망을 은근히 드러냈소이다!

임금은 주먹으로 어좌를 내리치며 갈린 목소리로 씹어뱉았다.

《아- 네놈이 감히- 선왕때는 옴짝 못하고 충신으로 가장하다가 과인이 등극하니 얕보고 새 왕조를 세운다-?! 이눔- 어디 보자. 나는 네놈을 벌써부터 온곱지 않게 봤어. 병조판서로 되니 기고만장해서 궁궐에 들어와 과인을 보고도 본척만척… 과인의 애마를 받고도 모르는척… 불충불의한 이눔! 이눔…!!

어린 군주는 길길이 터져오르는 분을 이기지 못해 화들화들 떨며 입술을 짓씹었다.

붙는 불에 키질하듯 한명회가 말을 이었다.

《저… 이건… 공조에서 나온 말인데…》

《뭐야-?!

이미 광기로 뒤번져진 임금의 눈이 한명회를 삼키는듯 했다.

《네, 네… 저… 남이가 명나라로 간 규수들을 놓고… 이렇다 저렇다…》

《그눔이 또 뭐라고 했게!

임금은 불이 이는듯 다우쳐물었다.

《… 글쎄 남이가 제힘을 길러 안녕을 도모해야지 처녀들을 남의 나라에 보내여 나라를 보존하려 해서야 되겠는가 했다고 하나이다.

또박또박 씹어뱉는 한명회의 말에 임금은 온몸을 떨었다.

《그… 일은 선왕의 어지로 행해진것이고 명나라황실과 과인이 약조한 일이요. 언감생심…》

《남이의 불충은 역모도 가능케 할 전고미문의것이로소이다.

임금은 한명회의 말에 더더욱 부아가 치솟는듯 역정을 섞어 내뱉았다.

《이눔… 남이 이눔! 과인이 등극하여 천하가 태평하매 제 힘을 기른다함은 웬 역설이뇨. 명나라황실에서도 조선국의 안녕은 저네가 지킨다고 하였은즉 쓸데없는 공역으로 백성 을 들볶는 그눔이 제정신이냐?!

《지당한 말씀이요.

한명회가 얼른 쾌응을 보이자 임금은 덩달아 소리쳤다.

《남이… 그눔이 역모한것이 분명한지고!… 그런데 안경준이 그 속내를 어이 알았을고. 음… 안경준이… 안경준이… 그눔도?!

한명회는 등골로 식은땀이 흐르는듯 했다. 그는 류자광에게 손벽은 두손으로 쳐야 소리가 크게 난다, 누구인가를 사촉하여 재차 고발하도록 하라고 지시했었다. 상감이 그것을 느끼지 않았는가. 그것을 느끼는 날에는 큰 벼락이 내린다.

한명회는 화제를 빨리 다른데로 돌려야 했으나 속이 켕겨서인지 머리가 돌지 않았으며, 하여 말없이 덤덤히 서있게 되였다.

어린 군주가 사나운 눈길로 그를 지켜보았다.

《저… 저… 상감마마, 남이… 저 역적은 나라의 병권을 다 틀어쥐고있을 때 벌써 새 왕조의 기반을 다 다졌을지 모르니 빨리 선손을 써야 하오이다!

《선손이라니?

《역신 남이와 그 패당을 한시라도 빨리… 모조리… 의금부로 잡아들여 족쳐야 하오!

임금은 강심을 먹고 피발이 선 눈을 크게 떴다.

《대감, 옳소이다! 아니… 그러다가 저것들이 먼저 눈치채고 반변을 일으키면…?!

《허니까 감쪽같이 잡아들여야지!

《노루도 아니고 사람인데… 그것도 무예에 능한 장수인데 어떻게 쥐도 새도 모르게 감쪽같이…?!

《상감께서 밤중에 어명을 내려 하나하나 불러들이면 되오이다.

《아 그렇지! … 아니 그러다가 기미가 이상하면 도망칠수 있는데…?

《명소패… 명소패를 써야 하오이다!

《…?

《누구나 찾아가서 뻐젓이 명소패를 꺼내보이면 상감의 급한 호출인줄 알고 달려오게 돼있으니까 흐흐… 그 구리패쪽은 이런 때엔 제격이거든…》

기대에 찬 눈길로 한명회를 지켜보는 임금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대감, 내내 곁에 있어주오.

 

5

 

한성의 밤은 깊어갔다.

거리와 거리의 모든 집들에 등불이 꺼진지 오래고 하늘에서는 바람만이 음울한 휘파람을 불었다. 심야의 텅 빈 거리로는 간혹 술주정군이 누구에겐가 험악한 욕설을 퍼부으면서 비틀비틀 갈지자걸음을 쳤다.

사후 세조라는 시호를 받은 임금이 빈전에 누워있는 때라 이따금 투구에 갑옷을 떨쳐입은 순라갑기병들이 삼엄한 기세로 말발굽소리 요란히 거리를 지나갔다.

그밤 허름한 농부차림의 한 젊은이가 흘끔흘끔 앞뒤를 살피며 운종가로 걸어가다가 광천교를 달려지나 어스름속으로 사라졌다.

구떡쇠였다. 그는 곽주호군영장이 보내는 꿩 두마리가 든 꼴망태를 지고 신명이 나서 들썽거리며 남이의 집으로 찾아가는 길이였다.

그가 남이의 집쪽으로 가는데 웬 군사들이 그 집을 둘러싸는것이 보였다.

구떡쇠는 몸을 날려 골목의 울담벽에 붙어섰다. 백여명은 실히 되여보이는 군사들이 발소리를 죽여가며 그 집 둘레에서 오락가락했다.

이윽고 한 그림자가 대문을 쾅쾅 두드렸다.

그때 솟을대문 안쪽 집안에서는 정선공주가 밤늦게까지 거문고주법을 배워주고 떠나는 예기 탁문아를 바래주려고 자리에서 일어나고있었다.

쾅- 쾅- 쾅-

그 위혁적인 울림소리로 집안에 살얼음이 가는듯 했다.

정선공주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들어 문쪽으로 황급히 다가가고 탁문아는 눈이 휘둥그래져 벽에 붙어섰다.

쾅- 쾅- 쾅- 콰앙-

메아리쳐오는 그 소리는 집안의 평온을 산산 들부시였다.

남이가 대청마루방으로 뛰여나왔다.

《이거 웬 소리요?

《모르겠구나.…》

그때 대문쪽에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왔다는 호령소리가 울려왔다.

《뭐-요-?

《명소패! 명소패라고 하지 않았소?!

《응…?!

《이밤중에 임금이 갑자기 왜 부를가…》

탁문아가 끼여들었다.

《좋은 일이겠지요. 상감이 부를 때에는… 호호…》

그때 대청마루문이 열리고 행랑방 종로인이 나타났다. 어느 관청에선지 명소패를 가진 고관이 오고 웬일인지 백여명으로 보이는 군사들이 집을 둘러쌌다고 했다.

어머니가 아들을 와락 붙안고 네가 무슨 죄를 졌느냐고 묻는듯 뚫어지게 아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남이로서도 뜻밖의 일이여서 할말이 없었다.

궁중의 오묘한 내막을 미처 다 알수 없었던 남이였지만 전장에서처럼 다가드는 위험을 떳떳이 맞이하고싶었다.

(분명 군사들이 집을 둘러쌌다면 좋은 일은 아닐것이다. 명소패를 들이대고 잡아가둠은 결코 장난이 아님을 뜻한다. 그러나… 떳떳이 나가자! 다른 모습으론 결코 살수 없다.)

남이는 소매자락에 매달리는 어머니며 탁문아를 조용히 물리치고 란타로 뒤흔들리는 대문가에 다가섰다.

이 운명의 시각 남이가 무슨 생각과 결심을 하였는지는 다 모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선뜻 다가설수 없는 기상이 청년장군의 얼굴에 어려있었음을 력사는 말하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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