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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선기가 돌고 때없이 하늬바람이 며칠째 불어대더니 나라의 북변에 이른 서리가 내렸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임금이 병상에 누워있는 때라 그런 소문도 매우 불길한 전조처럼 들렸다. 여름내 구들에 불을 때지 않고 살아온 서울장안 사람들은 새벽녘에 방안으로 찬기운이 스며들자 잠자리에서 깨여나 바깥으로 나와봤다. 그들은 오한이라도 나는듯 으시시해져 올해에는 겨울이 일찌기 닥칠것이라며 땔나무걱정이랑 하는데 서대문거리쪽에서는 가난한 두 선비가 마주서서 누가 엿들을세라 목소리를 죽여가며 수군거렸다. 《임금이 문둥병이란건 사실인가?》 《쉿,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졸경을 치러요. 종로쪽에선 상감이 천벌을 받아 뢰풍에 걸렸다고 떠들어댄 작자를 포도청에서 꽁져갔대유.》 《허- 그래서 요새 그런 소리가 기여들었군.》 《왕실의원들속에서 새나온 소리라야 제일 믿을만 헌건데 아주 감감이요.》 《중태에 빠졌을가… 좀 호전되는고…?》 《어-랍쇼, 뢰풍에 호전이라는게 있나유?》 《아무리 문둥병이라도 저분이 원체 장수체질이니… 예전에 세종임금도 대견스럽게 여겨 무쇠같은 신체에 용맹이 넘쳐나니 옷을 넓게 입으라고 했다는 얘기도 있지 않수.》 《어- 아무리 무쇠체질이라 한들 뢰풍을 어찌 당하오. 천벌이 딴게유?》 《허- 기막힌 일도 다 있지. 당조카인 단종을 죽이지는 말고 어떻게나 살려둬야 하는건데…!》 《휴-》 세상의 공기가 이렇게 흐르는 속에 한명회는 상감의 병세가 어떠한지 감감 모르고있어 속이 달대로 달아올랐다. 임금이 자기 병세를 두고 함부로 입질하는자가 있으면 그가 의원이건 궁녀이건 모조리 포도청에 처넣으라고 호령했던것이다. 어느날 한명회는 끝내 참지 못하고 세자궁으로 찾아들어가다가 왕세자가 공부하는 시강원앞에서 세자를 만났다. 리황세자는 심하게 재채기를 하고나서 눈살을 찌프리고 한명회를 지켜보았다. 한명회는 얼른 세자앞으로 다가가서 공손하게 읍하며 절하고는 감기가 왔는가고 근심스럽게 나직이 물었다. 《아버님, 무슨 일로 입시했나이까?》 《저하! 급히 아뢰고싶은 일이 생겨…》 《…?!》 왕세자 리황은 그를 조용한 밀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한명회는 세자가 한때 자기 사위였지만 공손하게 엎드려 절하였다. 그는 자기 딸인 장순세자빈이 애통하게도 왕후의 영화를 누려보지도 못하고 황천으로 떠나가자 기를 쓰고 그 자리에 가까운 친척인 한백륜의 딸을 들여앉혔던것이다. 몸도 비위도 약한 리황은 황황히 한명회의 팔굽을 받들어 일으켜 앉혔다. 비단방석에 세자와 마주앉은 한명회는 세조의 병세를 두고 근심어린 말을 꺼내였다. 그러나 세자는 입을 굳게 다물고 응대도 안했으며 그러자 한명회는 급기야 화제를 돌렸다. 《저하(왕세자의 호칭), 이 로신은 만백성의 소원을 아뢰고저 이렇게 무엄하게 입궁했소이다.》 《…?》 《애통하게도 상감마마의 병세가 중태에 빠져 헤여나지 못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이 비통한 시각 신은 만백성이 기원하는바를 아뢰는것이 신하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하옵니다.》 리황은 긴장으로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눈살이 꼿꼿해져서 그를 지켜보았다. 왕세자는 누가 엿들을세라 숨을 죽이고 나직이 물었다. 《백성들이… 무어라고… 하는가유?》 《로신은 진심으로… 진실만을 아뢰오…》 이렇게 말하는 한명회의 늙은 얼굴이 사생결단의 의지가 비끼며 이마의 피줄이 불거져올랐다. 《지금 백성들은… 왕세자저하께서… 인자하고 대자대비하며 호협하고 담대하고… 현명하고 문명한 세자께서 부왕의 권유를 사양치 말고 왕위에 즉위하여 룡상에 앉으시기를 목메여 기원하오이다…!》 한명회라는 이 음험한 흉물은 영특한 관료이든 임금이든 누구나 다 애타게 바라던 소리를 듣게 되면 그대로 곧이듣는다는 인간세상의 괴이한 섭리를 일찌기 터득하고있었던것이다. 한명회의 류창하고 절절한 고백을 들은 리황도 역시 그러했다. 나이 19살에 난 리황은 갑자기 눈에 군주의 위엄이 번뜩이고 입가에 느슨한 미소같은것이 알릴듯말듯 떠올랐다. 《백성들이 나를 어떻게 아는고…?》 《덕망과 성품까지 아오이다!》 《허- 빠르거든 빨라…!》 《세자저하, 지금 저 령남과 함길도에서도 문무백관들과 백성들이 조정에 간하자고… 한성으로, 여기 서울로 밀려올 기세입니다!》 《음, 그러지 말라 이르시오. 오늘 아침 부왕께서 세자가 당분간 나라정사를 맡으라 어지를 내렸소.》 그리고는 또다시 재채기를 하였다. 한명회는 이렇게 약골이고 나이도 어린 리황이 과연 나라를 다스려내겠는가 우려되기도 하였지만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고 반색하는 빛을 띠였다. 《과시… 상감마마의 선견지명과 천운은 만백성의 칭송을 받아야 할줄 아오이다.》 로회한 한명회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얼떠름한 찬사를 한마디 하고는 미리 궁리해둔 계책대로 화제를 이끌었다. 《저하, 지금처럼 조정이 강녕치 못한 때에 특별히 민심을 잘 살피셔야 하나이다.》 《민심?!》 《지금 태조대왕께서 천신만고 이루어놓으신 나라의 기틀을 시비하고 태평성대를 소란케 하며 저하의 기둥이 될 공신들을 질시하는자들이 있다 하나이다.》 세자는 몹시 마음이 무거운듯 두눈을 감고있다가 나직이 물었다. 《그게 누구들이요?》 한명회는 한동안 세자의 동정을 살피다가 북방정벌후 조정에 새로 들어온 무관출신 관리들이 병제를 시비하고 태평세월에 화포대를 늘인다고 소란을 피우고있다며 이런자들은 세자가 아끼는 공신들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요언을 들고다닌다고 간하였다. 리황은 잠자코 듣고있었다. 이윽토록 무엇인가 생각하던 그는 갑자기 두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경은… 남이를 두고 하는 말이요?》 너무도 뜻밖에 정통을 찔리운 한명회는 한순간 당황하여 굳어졌으나 역시 한명회인지라 느슨한 웃음을 그리며 찬사를 터뜨렸다. 《과연 저하의 통찰력과 예지는 선조대왕들의 경지와 맞먹는 출중한것이로소이다. 신은 실로 황송하나이다.》 세자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였다. 《남이… 남이가 그런다… 남이…》 《그뿐이 아니라 방자하기 이를데 없소이다. 알아본데 의하면… 술에 취해 저자거리 술집에 쓰러져있는가 하면 밤중에 기생을 끼고 돌아쳐 소문을 내고… 장영실이 같은… 대역죄를 짓고 류배간자를 찾아 돌아다니고… 장영실이 그 역적은 백정들처럼 군역에도 제외되는 노비출신이나이다.》 《헝, 그런 놈인가?》 《이건 저하가 탄신하기 전 일이오이다.》 하고 한명회는 장영실의 죄행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남이는… 당상관이라는이가 비천한 군졸을 집에 끌어들여 귀빈처럼 음주접대를 하고… 지방군영 순시하러 나가서는 귀양살이하는 대역죄인을 찾아 돌아치는가 하면 이런 태평세월에 화약, 화포에나 열을 올리고… 수상하오.》 리황은 얼굴이 해쓱하게 질리였다. 《역모를 한다는건가요?》 《설마한들 그렇기야… 이 로신이 미심쩍어하는 소리오이다.》 왕세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너무 마음을 쓰지 마시오. 남이는 태종왕의 외손이요.》 《근친일수록 반역하면… 더 무서운 일이지요!》 한명회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반역할가봐 그러시오?》 하고 리황은 한명회를 유심히 지켜봤다. 《아니, 그런건 아니지만 병권을 쥐는 병조판서로 승진시키지 말고 공조판서로 그냥 두어둘걸 그러지 않았는가싶어…》 한명회는 이렇게 말하며 시름겨운 모두숨을 조용히 내쉬였다. 《상감마마 병세가 중태에 빠지니 별의별 걱정이 다 생기오이다. 항간에는 이제 민란이 터진다는 소문이… 요새는 어인 일인지 밤마다 당상관, 당하관들이 서로 찾아다니는 일이 잦아졌소이다. 밤중에 마주앉으면 상감의 병환얘기가 입에 오를게고 그러다 의사소통이 되면… 민란이 터진다는 풍문이 돌아가는 때인데… 일이 어떻게 번질지 모르오…》 왕세자는 눈빛이 사나와져 뇌까렸다. 《내 령상에게 이르겠소. 찾아다니는 놀음을 당장 엄금하라고!》 《옳거니! 고관들중에도 저하께서 년소하시다고 얕보는 령감들이 있을수 있소이다. 망치가 가벼우면 못이 솟는 법이라는데 솟는 못은 모조리 뽑아버리고 잘라버리며 군주의 위세를 떨쳐야 하오이다!》 그날 한명회는 왕세자와 한참 더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리황은 밖에까지 따라나와 그를 바래며 앞으로도 자주 찾아와달라고 당부했다. 바위처럼 든든한 한명회에게 의지가 되여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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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 밤 종로거리에서 화재가 일어나 삼단같은 불길이 터져올라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서대문과 동대문쪽에서 인경의 울부짖음소리가 둔중하게 울려왔다. 집집에서 깊은 잠에 들었던 사람들이 거리로 뛰여나와 왁작 떠들어댔다. 이게 웬일이냐, 외적이 쳐들어온게 아닌가. 어디서 민란이 터진게 아닌가. 임금이 승하한게 아닌가… 남이도 깊은 잠에 들었다가 기겁하여 뛰여일어나 병조로 달려나갔다. … 다음날 아침 령의정 강순이 남이를 자기 방에 불러들였다. 남이는 간밤의 소요로 자지 못해 벌겋게 피진 눈으로 령상의 방에 들어섰다. 강순은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간밤에는 어떻게 된 일이요?》 《예… 인차 수습이 되였소이다.》 《소신은 상감이 승하하신줄로 알고 건춘문앞에까지 뛰여갔댔소.》 《허 참… 웬 폭도들이 종로의 빈집에 불을 질러 화재를 일으켰사와요. 놈들은 야경군들과 순라군사들이 불이 난데로 모여드는 그 틈에 종각을 점거하고 인경소리를 울렸소이다. 상감이 죽었다고 요설을 퍼뜨리고는 어디로인가 사라졌는데 소요를 일으켜 민란으로 몰아가자는 작자들로 보아집니다.》 《음… 릉지처참을 해도 시원치 않을 놈들…》 강순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거멓게 질린 얼굴로 가슴이 꺼지도록 한숨을 후- 내쉬였다. 《판서, 내가 이 아침 그대를 부른것은 승정원에서 보낸 상감마마의 어지를 전하기 위함이요…》 남이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들어 강순을 몇순간 지켜보다가 자리우에 엎드렸다. 그의 머리우에 강순령의정의 떨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전하는 그대의 병조판서벼슬을 거두라는 어지를 내렸소…》 남이는 그 소리에 어리친듯이 잠자코 있다가 저도 모르게 뛰여일어나며 분노를 터뜨렸다. 《뭐-요-? 령상, 이게 어찌된 일이요?》 그 소리가 어찌나 높았던지 옆방의 젊은 관리가 뛰여나와 방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였다. 《나도 모르겠소… 승정원 도승지가 하는 소리는 록봉도 그대로 주고 당분간 쉬라는거요.》 《헐 일이 태산같은데 무엇때문에 이러는가?》 《휴- 알수 없는 일이거든. 전하가 하사한 말도 그대로 타라는걸 보면 파직은 아닌것 같고… 상감의 어지인것만큼 자중해서…》 남이는 강순의 다음말이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 파란 불꽃이 날아돌고 어딘가 멀리에서 바람소리가 울부짖는듯 했다. 그는 정신없이 밖으로 나와 말에 뛰여올랐다. 2
남이는 얼굴이 거멓게 질려 집으로 돌아와 맥없이 말에서 내렸다. 여느날과 다름없이 열려진 대문가에 서있던 공덕로인이 주인이 넘겨주는 말고삐를 두손으로 받았다. 그때 문득 이전에 근정전에서 임금의 격찬을 받고 나올 때 자기한테 등을 돌리고 서있던 고관의 뒤모습이 언뜻 떠올랐다. (나를 시기한 고관들의 작간인가…?) 어머니가 달려나왔다. 《아니, 왜 그러고 서있누…?》 남이는 어머니한테 가까스로 반겨 웃어보이고는 가운데방 퇴마루에서 올롱한 눈으로 아빠를 지켜보는 딸애한테로 가서 번쩍 안아들었다. 딸애는 벌써 무엇을 느꼈는지 웃지도 못하고 얼굴이 돌처럼 굳어져 재롱도 피우지 못한다. 어머니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으나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놀라지 말어. 경신이한테서 기별이 왔어…》 《녜?!… 무슨 기별이요?》 《인편에 쪽지편지를… 방안 문갑에 있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방안으로 바람처럼 사라졌으며 남이는 그 자리에 못박힌듯이 서있었다. 가슴이 터질듯이 울렁거리며 눈앞이 휙 돌아가는듯 했다. 거의 한해동안이나 소식이 감감하던 경신이… 이제는 이 불우한 남아를 까마득히 잊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왜 하필 이런 불길한 날에 기별을…? 방에서 나온 어머니는 아들에게 꼼꼼히 접은 쪽지편지를 내밀었다.
판서님 오늘 저녁 만나주세요 소녀의 마지막소원이예요
정선공주는 아들이 넘겨주는 그 쪽지를 읽어보고는 반색을 띠였다. 《만나지 않겠어요. 오면 없다고 해요.》 《아니, 이 사람 그러면 쓰나? 어쩌다가 오는데…》 남이는 자기한테 덮쳐든 재난때문에 경신이를 만날 경황도 못되였으며 그렇다고 아들을 하늘처럼 믿는 어머니한테 쓰디쓴 진실을 다 털어놓을수도 없었다. 그는 부실한 녀석처럼 히죽이 웃으며 《엑, 어머니 커- 하는거 생각나는데요.》 하고 마시는 시늉을 했다. 《병조에 나가지 않어?》 《쉬겠어요.》 어머니는 측은한 눈매로 아들을 여겨보다가 방에 들어가라고 조용히 일렀다. 이윽고 방으로 주안상을 든 시녀가 들어와 꿇어앉아서 잔에 술을 부었다. 그는 시녀에게 대접을 가져오게 하여 거기에 청자주전자의 술을 쏟아붓고는 쭉- 들이켰다. 그때 방에 들어선 어머니가 눈이 휘둥그래서 털썩 주저앉으며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개탄했다. 《이 집안에 무슨 변고가 생겼고나…!》 시녀가 황급히 방에서 사라지고 남이는 껄껄 웃으며 어머니를 달래기 시작했다. 《어- 어- 어머니, 천지가 뒤집혀도 남이는 끄떡없어요. 그렇지 않구요!》 《한데 어째서 화술은 그렇게…?》 아들은 대접의 술을 마저 마시고는 취기에 불깃한 얼굴로 몸을 약간씩 좌우로 흔들며 노래가락을 넘기듯이 자작한 시를 읊조리였다. 걸걸하면서도 그윽한 목소리였다. 백두-산석은- 마도-진이요- 두만-강수는- 음마-무라-
화살이 비발치는 싸움터를 달려온 무부의 기개와 열정이 방안에 차넘치고 공기마저 취흥에 설레이는듯 하였다. 정선공주는 눈물이 그렁하여 아들의 손을 꼭 잡고 그 시구들을 풀어서 자기 말로 정을 담아 나직이 속삭이였다. 《남아 스물에 나라를 평정 못하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요…》 모자간에 오가는 후더운 정에 가슴들이 훈훈해지며 벅차올랐다. 《어머니, 고마와요!》 《참 좋구나. 이제는 머리도 식히고… 좀 누워 쉬자. 세상만사를 다 잊고 편안히…》 그러자 아들은 아이적 어리광이 되살아난듯 어머니 무릎을 척 베고 누웠다. 《호- 장군도 이러나?》 남이는 코고는 시늉을 하고 어머니는 아들의 머리를 쓸어만지며 아이적에 그 아들이 장난이 세차 속상했던 일이랑 생각하며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장군의 가슴이며 잔등을 조용조용 다독여주며 실날같이 가는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렀다.
자장자장 울 아기 잘도 자지 저 웃집 두꺼비는 울기만 하는데 자장자장 울 아기 잘도 자지 저 하늘 별님들도 내려다봐요
남이는 저도 모르게 혼몽한 꿈속에 잠겨들었다… 하늘에 칠색이 령롱한 무지개가 비꼈는데 홍보석, 록보석이 빛을 뿌리는 족두리를 쓰고 눈같이 하얀 혼례옷으로 단장한 웬 아씨가 다가서며 다소곳이 절을 한다. 남이가 놀라서 눈을 뜨니 꿈이였다. 어느새 어머니는 방에서 나갔고 자기는 베개를 베고 방에 홀로 누워있었다. 가슴이 허전해지고 경신에 대한 그리움이 솔바람처럼 솔솔 불어들었다. (아, 여태 나를 잊지 않고있었는가. 저한테 칼을 빼들었던 사나이, 이 미욱한 중생을…) 칠덕정의 그날 경신이와 나란히 말을 달리던 일이며 물웅뎅이에서 그를 안아 내오던 일들이 떠올랐다. 남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서성거리였다. 칼을 빼들었을 때 쓰러져 통곡하던 그 비통한 울음소리가 귀전에 간간이 들려오는듯 했다. 그날 저녁 어스름이 깃들무렵 경신이가 가마에 앉아 그의 집 대문앞에 나타났다. 행랑종로인이 뛰여들어와 알리고 어머니가 손녀의 손목을 잡고 나갔다. 정선공주는 어인 일인가싶어 뜨락으로 들어서는 모색이 달라진 경신이의 얼굴을 놀라서 지켜보았다. 경신은 정선공주앞에 다가와 공손히 인사하고 장군이 댁에 계시는가고 묻는것이였다. 그때 남이가 퇴마루에 나섰다. 방안에 들어온 그 녀자는 다소곳이 절을 하는데 남이는 너무도 달라진 그 모습에 놀랐다. 무슨 인생고를 겪었는지 창백한 얼굴이 처절히 깎이고 생기에 빛나던 눈언저리에 어둑한 그늘이 어려있었다. 몸에 윤이 흐르는 비단옷을 걸쳤으나 어제날의 발랄하고 생동한 기운은 가뭇없이 스러져 그 자태가 구슬프게 안겨왔다. 그 녀자는 권하는 공단방석에 앉아 그린듯이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있었다. 객방안에 한동안 심연속처럼 괴괴한 정적이 흐르고 바깥뜨락에서도 정선공주가 오래간만에 찾아온 경신의 눈길이 심상치 않아 손녀를 이끌고 방에 들어가며 시녀들과 녀종들한테도 조용하라고 손짓했던것이다. 그러자 가마를 메고 왔던 교군들도 행랑방으로 사라져 휑해진 뜨락에는 어디서 날아왔는지 재빛 락엽만이 날렸다. 경신은 눈길을 약간 들며 갈린 목소리로 나직이 속삭이였다. 《…장군, 전 래일 명나라로 가나이다… 떠나기 전에 하고싶은 말도 있고 해서 찾아왔나이다.》 《아니, 이 무슨 소리요?!》 남이는 너무 놀랍고 기가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경신은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차라리 그때… 장군의 칼에… 그럼 이런 오늘이 없었을텐데… 소녀가 하고싶은 말을 다하게 해주사이다. 마감까지 다 듣고 죽여주사이다.》 경신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남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전 먼 명나라에 가기보다 장군칼에 죽고싶나이다…》 남이는 처절한 감정에 가슴이 찢어져 소리쳤다. 《말하오. 어서!》 《… 아버지는 임금이 내려보낸 사약을 먹고 한달전에 돌아갔나이다. 이전에 단종임금을 복위시키자고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에게 보낸 격문이 발각되여 그만…》 《…》 《그후 소녀는 관노로 굴러떨어졌지만 한확대감이 몰래 자기 집으로 데려갔나이다. 웬일인가 했더니 누이동생 둘씩이나 명나라황실에 팔아먹고 출세한 그 대감이 글쎄 소녀까지 팔아먹지 않았겠나이까.》 남이는 가슴속에서 돌사태가 쏟아져내리는것만 같았다. 《뭐? 경신이가 관노? 공녀? 아니, 공녀제도가 없어진지 언젠데 아직도 남의 나라에 처녀들을 바친단 말이요.》 《명나라 황제가 조선처녀를 꼭 후궁으로 맞고싶다고… 그래서 어지가 내리고 대감댁 규수 몇명이 선발됐는데 한확대감이 소녀가 관노이기는 해도 명문가의 소생이라며 명부에 적어놓았답니다. 명나라에서 온 사신이 나를 보러 와서는 산해관에서부터 호화스런 사인교에 태워 베이징으로 들어간다, 황궁에서 궁녀나 후궁생활이 어떻다 갖은 감언리설을 다 늘어놓았지만 소녀는 싫어요. 죽기보다 싫어요!》 경신의 눈에 새파란 불꽃같은것이 타오르는듯 했다. 눈물도 다 말라버린듯 한 경신의 눈에서 번뜩이는 그 섬광은 무부의 심장을 지닌 남이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에익! 제 힘을 길러 나라를 지킬 대신 처녀들을 팔아먹고 안녕과 부귀를 누리다니. 후세에 이 나라를 무엇이라 하겠는가…》 남이는 두손으로 장판바닥을 깨져라 두드리고는 의분에 넘쳐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아! 아버님이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번들거리는 황동초대의 초불도 바르르 몸부림쳤다. 남이는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팔려가는 신세가 되여 멀고먼 이역의 하늘밑으로 아주 가버리는 가인에게 위로가 될 말이 어디 있으랴. 《…그때 …소녀는 판서님을 원망했어요. 그때 칼만 빼들지 않았던들 부친님을 설유했을지도 몰라요. 저는 원망했어요. 장군은 전하가 베푸는 은총에 눈이 멀어 단종왕을 독살하고 왕권을 찬탈한 그 죄행도 보지 못했어요.》 남이는 눈을 꾹 내리감았다. 경상도 영동산골에서 만났던 방랑시인 설잠 김시습의 초췌한 모습이 선히 떠오르고 그의 목소리가 귀전에 쟁쟁히 들려오는듯 했다. (이 경신이의 말이나 설잠의 말이 똑같아… 아, 민심이 저주하는 수양대군… 그럼 나는 무언가… 개… 강아지만이 먹이를 던져주면 꼬리를 흔들며 따른다. 자기 주인이 강도이건 살인자건 가림이 없다. 먹이만 많이 주면 꼬리를 흔든다.) 그는 이마에 식은땀이 내배였다. 《판서님, 칼을 뽑아요. 그때처럼…》 《아씨!!》 《…?》 《경신이, 그러지 마오!》 사나이의 목소리가 떨리였다. 경신의 눈에 물기가 핑 돌았다. 《소녀는 이날 이때까지 내내 판서님을 생각했사와요. 부친님이 사약을 받았을 때도… 한확대감집에 끌려갈 때도… 그전에도 내내… 판서님, 불쌍히 여겨줘요. 소녀는 의지가지할데 없고 따뜻이 안길 품도 없어요. 그렇지만 명나라에는 가기 싫어요. 남의 나라 왕실에 바치는 노리개로는 되고싶지 않아요. 노비로 살아도 이 땅에 남고싶어요. 아버지와 선조들 유골이 묻힌… 장군이 계시는 이 땅에…!》 그리고 경신은 한확대감집에서 도망치겠으니 어느 군영 같은데라도 숨겨달라고 했다. 《나라의 병권을 다 틀어쥔 장군이 소녀 하나쯤 어디나 숨겨주지 못하겠나요? 살려줘요.》 《경신이, 나도 이제는 병조판서가 아니요.》 《녜-?》 《실각됐소…》 애오라지 남이만 생각하며 달려왔던 경신은 실성한 눈으로 그를 지켜보다가 맥없이 앞으로 엎어져 조용히 흐느끼였다. 남이도 련민의 정이 북받치고 스러졌던 련정의 불길에 휘말려 경신의 물결치는 잔등을 쓸어만지다가 어깨를 와락 부둥켜안고 몸부림쳤다. 경신은 헛손질하듯 남이의 팔이며 머리를 더듬더듬 쓸어만지며 신음소리를 내였다. 《살고싶지 않아요. 절 아주 죽여줘요. 내 님… 내 님… 아하… 흐흑…》 그리고는 방바닥에 쓰러졌으며 남이는 경신이를 부둥켜안았다. 저 바깥 가을하늘의 신선한 정취가 페부로 휩쓸어들고 칠덕정의 풀판에서 말을 달리던 때, 그때의 상쾌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듯 했다. 녀자는 남이의 목을 꽉 끌어안고 죽여달라, 죽이라고 단내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말의 코투레질소리가 뢰성처럼 들려오며 방안공기를 휘저었다. 경신이는 소스라쳐 놀라 나를 잡으러 왔다고 속삭이며 방구석쪽으로 황황히 기여갔다. 밖에 군사들이 온것 같았다. 남이는 분노가 욱 치밀어 저도 모르게 검을 빼들었는데 후원쪽으로 난 문밖에서 어머니의 부름소리가 들렸다. 《이 사람, 누가 찾아왔어.》 남이는 문밖으로 나섰다. 어머니가 날이 시퍼렇게 된 칼을 보자 주춤 물러섰다. 《에그머니, 아니, 아니요. 한확대감 아드님이…》 남이가 후원으로 나갔을 때 저택의 정원에 돌려세운 마차쪽으로부터 문관복차림의 애젊은 관리가 애써 웃으며 남이앞으로 다가와 굽석 허리를 꺾으며 인사했다. 《소식을 들었소이다, 아마 영전이겠지요. 인사도 올리고 부친의 분부가 계셔 아씨도 모셔가고 겸사겸사해서 왔소이다.》 경신이와의 이야기를 매듭짓지 못하고 그 어떤 방책도 세우지 못한채 뜻밖에 한호를 맞이하게 된 남이는 속이 부글거렸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그때 경신이가 마루로 나왔다. 그날 남이는 님을 실어가는 마차의 그림자가 대문밖으로 사라진 뒤에도 쓰린 가슴을 부여안고 어스름속에 이윽토록 서있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방안이 쓸쓸하고 한산하기 그지없는 페허처럼 안겨왔다. 경신이는 몸만 떠나간것이 아니라 생활의 꿈과 아름답고 살뜰한 모든것을 다 휩쓸어가지고 가버린것 같았다. 이전에 그 가인한테 가혹하게 대하고 매정하게 군 일들이 후회가 되여 밀려들며 가슴이 못견디게 저려들었다. 다른 한편 그가 명 나라 황제의 침전에서 노리개로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에 불길이 황황 이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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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이와 한호가 탄 마차는 칠덕정쪽으로 가고있었다. 경신이 칠덕정쪽으로 돌아가자고 졸랐던것이다. 그 정각은 잊지 못할 추억이 깃든 곳인데 이역만리로 떠나기 전에 들려보고싶다는 애절한 부탁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아니면 그 나름의 딴 궁냥이 있었는지 알수 없었다. 날씨는 푸근하고 하늘에서는 보름달이 구름장들사이로 헤염쳐가고있었다. 마차바퀴는 시름없이 굴러가고 한호는 롱말을 건네며 지분거리다가 그사이 판서의 집에 더러 다녔는가, 남이와는 통혼이라도 된것이 아닌가, 명나라로 간다니 섭섭해하지 않던가… 하고 렴탐군처럼 지꿎게 캐여물었다. 경신이는 가슴에 차고넘치는 슬픔때문에 그의 물음에 전 혀 대답하지 못하거나 건숭으로 응대했을뿐이다. 칠덕정의 합각지붕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두루미처럼 깃을 활짝 폈고 겹처마의 단청무늬들은 달빛속에 현란한 자태를 자랑하는듯 싶었다. 마차가 칠덕정밑에 멎어서자 경신은 수레에서 내려 정각으로 올라가 사위를 둘러보았다. 때마침 시꺼먼 구름장을 가르며 달빛이 비껴내려 칠덕정훈련장을 훤하게 밝혔다. 훈련장 저쪽 가녁 어스름속에 이쪽으로 분명히 두명의 기사가 말을 몰아오는데 그 말발굽소리가 가슴을 울리는듯 했고 그날에 흩날리던 말갈기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얼굴을 스치던 바람의 휘파람소리가 귀전을 스치는듯 했다. 경신은 홱 돌아서 루각의 남쪽 모서리로 달려갔다. 달빛에 번들거리며 흐르는 한강의 유정한 흐름이 바라보이고 강기슭 버들방천의 설레임이 손저어 부르는듯 참새들의 떠들썩한 우짖음소리가 그날처럼 들려오는듯 싶었다. 그리고 그이 남이장군이 짚고 서있던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키돋움하여 이쪽을 바라보는것 같았다. 그 녀자는 정각에서 내려와 버들방천속으로 뛰여들어가다가 한 버드나무에 안겨 눅눅한 나무껍질에 볼을 꼭 대였다. 그때 경신에게는 마차에 올라 떠나는 자기를 오래도록 바라보던 남이의 눈길, 그 어떤 약속도 주지 못했지만 끓어오르는 사랑으로 몸부림치던 사나이의 눈길이 잊혀지지 않았다. 아, 이제 다시는 그리운 님을 만날수 없단 말인가. 그 녀자는 버드나무를 안고 절망감에 몸부림치며 섧디섧게 울었다. 강바람이 몰아쳐와 버들방천이 웅-웅- 함성을 지르며 들레였다. 그날 밤 한호는 음란한 야심을 품고 버들방천으로 들어가다가 갑자기 광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놀라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중천에 넝마처럼 갈기갈기 찢어진 구름장들이 어디런가 날려가고있었다. 그때 별안간 경신이가 피타는 목소리로 누구인가를 부르며 한강물쪽으로 뛰여갔다. 한호는 몸을 날려 뒤쫓아가 강물로 뛰여들려는 경신이를 붙잡았다. 3
그날 밤 남이는 경신이를 구출해내자고 한확의 집으로 찾아가다가 돌아서고말았다. 자기 녀동생 둘씩이나 팔아먹고 출세한 작자한테 무슨 정의이며 인정이 통하랴 싶어서였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세상을 한탄하며 술을 정신없이 퍼마시다가 자리에 쓰러졌다. 정선공주는 아들의 정상이 측은하고 래일이면 팔려가는 경신이가 못내 불쌍해 잠들지 못했다. 경신이가 떠나는 날 새벽녘에 정선공주는 첫닭이 홰를 치며 우는 소리를 듣고 놀라서 눈을 떴다. 이제 밝아오는 새 아침에 경신이가 멀고먼 이역의 하늘밑으로 떠난다고 생각하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그 닭울음소리가 그지없이 처량하게 들렸다. 꼬끼요- 꼬끼요- 꼭꼭… 그 울음소리가 닭의 삐죽한 부리처럼 가슴을 쪼아 거기로 찬바람이 불어드는듯 오싹한감을 느꼈다. 정선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남이가 방에 들어서며 왜 벌써 깼느냐고 물었다. 《오늘 경신이가 떠난다지…?》 《…?》 《다른 량반집에서는 모두 바래주러 나가겠는데 저것은 혈혈단신이니 아이고- 어찌나?》 《…!》 《이 사람, 내 나가 바래줄가 하네.》 《녜? 어머님이?…》 그리하여 남이는 그날 아침 가마에 어머니를 모시고 광화문쪽으로 나가게 되였다. 가는 도중 가마는 앞쪽에서 밀려드는 숱한 사람들의 파도속을 헤쳐나가게 되였는데 그네들은 하나같이 구경군들은 다 쫓아버린다, 명나라로 가는 아씨들의 부모들이나 친척들한테만 보인다고 떠들어댔다. 그런 사람들속에서 만난 공조참판의 로부인은 공주마님을 띄여보자 저으기 놀라며 돌아서자고 했다. 그 로부인은 지난해만 해도 나라의 경사라고 다 보였는데 올해에는 수문장청의 군사들이 나와 구경군들은 다 쫓아버린다, 아마 무슨 어지가 내린것 같다고 귀띔했다. 남이는 그런 권유도 마다하고 가마를 그냥 앞으로 나가게 했는데 광화문앞에 이르니 수문장청의 군관이 엄엄한 기색으로 나왔다가 그를 알아봤는지 좀 살갑게 물었다. 《나리집안에서도 친척이나 누가 가는가유?》 《친척보다 더 가까이 지내는 량반집따님이 가오.》 《녜…녜… 민심이 흉흉한 때라 좀 단속하라는 어지가 내렸소이다.》 그리고 군관은 어지간히 굽신거리며 건춘문이나 영추문쪽으로 돌아가면 가마들이 떠나는것을 볼수 있을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한발 늦은 남이가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건춘문앞을 황급히 지나갈 때 벌써 저쪽 영추문쪽에서 고취악의 울림소리가 터져올랐다. 그날 남이는 어머니와 함께 건춘문과 영추문사이의 궁성울담밑에 서서 영추문쪽에서 나오는 가마들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명나라 사신과 조선관헌이 나란히 말을 타고 앞에서 가고 그뒤로 처녀들을 태운 꽃가마가 창검을 비껴든 군사들의 옹위속에 줄레줄레 뒤따르고있었다. 길가에 늘어선 고취악대가 해빛에 악기들을 번쩍이며 흥겨운 음악소리를 높이는데 명절옷차림을 한 부모들과 형제, 가까운 친척들이 공녀들의 가마들에 매달려 따라가고있었다. 명나라 사신과 조선관헌의 뒤를 따르는 관복차림의 소리군이 청높은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에-에히요- 아빠- 엄마- 아버지- 어머니- 부디- 부디- 오래- 오래- 사세요- 아- 고향- 산천아- 잘 있거라- 나는- 이 딸은 영영- 가- 요-》 그것은 가마안의 아씨들을 대신하여 아버지와 어머니들에게 영별을 고하는 소리였다. 그런 웨침소리가 하늘에 메아리치는데 가마안에서 갑자기 통곡소리, 아빠, 엄마를 찾는 피타는 부르짖음소리가 울려나오고 공녀들이 가마벽을 허비고 두드리며 요동을 치는지 가마가 기우뚱거리고 교군들이 휘청거리며 발을 헛디디게까지 되였다. 가마안의 그 아씨들은 떠나기 전에는 명나라로 간다고 떠있었는데 막상 떠나고보니 다시는 엄마, 아빠를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가슴을 쳐서 그처럼 울부짖고 요동을 치는것 같았다. 한 가마의 교군들이 가마채를 길바닥에 내려놓고 못 가겠다고 하는것 같더니 군사들이 달려와서 무서운 함성을 내지르며 그들을 다시 떠나게 했다. 남이곁에서 물기에 젖은 타는듯 한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던 정선공주는 아들을 돌아보며 무엇이라고 하더니 길쪽으로 달려갔다. 남이는 뒤따라가서 어머니를 붙잡고 만류했다. 《이 사람, 예까지 왔다가 사람으로서 어찌…잘 가라는 소리라도 한마디 해주고싶어…》 아들은 어머니의 애끊는 심정이 가슴을 쳐 더 만류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은회색저마포치마자락을 날리며 길로 달려나가 지나가는 기마행렬속으로 뛰여다니며 경신이를 찾는것 같았다. 그러다가 가마들을 따르는 부녀들속에 어우러져 그 모습을 가려볼수도 없게 되였다. 앞에서 명나라 사신이 우리 관헌을 보고 무어라고 하는것 같더니 그 관헌이 뒤쪽의 군사들을 돌아보며 호령했다. 그러자 군사들이 여기저기로 뛰여다니며 가마에 매달린 부녀들을 뜯어버리기도 하고 창대로 우격다짐으로 떠밀어 길밖에 내쫓기도 했다. 길가에 엎어진 부녀들, 다시 일어나 가마로 달려가는 아낙네들… 남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냥 서서 그런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 가마행렬이 저 멀리 무악재고개너머로 사라지자 딸자식들과 영영 갈라진 부모들과 형제, 친척들이 약속이나 하듯이 길바닥에 엎드려 절하며 가버린 살붙이들이 복락을 누리기를 하늘에 빌었다. 그때 정선공주가 어디서인가 고름이 떨어져나간 저고리앞섶을 여미여잡고 궁성울담밑의 아들한테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억이 막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단숨을 몰아쉬였다. 《아무리 불러봐도 대답소리 한마디 들리지 않어… 기절해 가마바닥에 쓰러졌겠지. 아이고- 불쌍해…》 그리고는 얼굴을 싸쥐고 허물어지듯이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여기에 강순령상이나 한확대감이 말을 타고 나타난것은 참으로 뜻밖의 일이였다. 그들은 명나라 사신일행이 떠나는것을 마감까지 보아주고 돌아가는 길이였던것이다. 강순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 언짢은 얼굴로 남이며 정선공주를 살펴보고는 아무말없이 떠나갔는데 웬일인지 한참 가 다가 되돌아와서 실각한 장군에게 오후 내 방에 좀 들리라고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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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올 때 정선공주는 아들에게 푸념질을 했다. 어떤 경우에도 푸념이란 할줄 모르던 어머니였다. 남이는 이마살을 찌프릴사 하고 듣기만 하였다. 《… 이 어미는 그래도 거기서 따라나올줄 알았어. 지체가 있으니 그럴수도 있겠지만… 아이고 불쌍해라. 그 애야 얼마나 기다렸겠수. 혹시 바래러 나오지 않을가싶어 기다리다가 가마가 훌 떠나게 되니 너무 원통해서 통곡하다가 기절해 쓰러졌겠지. 그 첫걸음에 벌써 그렇게 쓰러진 경신이가 그 먼길을 가면서 밥술이나 제대로 들가? 아이고 그 먼길을 가다가… 한달이상이나 걸리겠는데 도중에 무슨 탈이라도 생기지 않을가. 얼마나 원망하겠소. 아유, 이거 다 공연한 소리지. 요새 세상일이란 다 이런걸 휴…》 집에 돌아오자 남이는 어머니한테 혼자 있고싶다고 하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멍하니 서있다가 방에 들어온 그는 자리에 쓰러져 주먹으로 방바닥을 치며 몸부림치다가 끝없는 생각에 잠겼다.… 어- 미녀들 정조를 팔아 나라의 안녕을 구걸하다니… 이거 할짓이냐. 치욕이다! 이런 치욕이 어디 있느냐. 더럽고 치사하다. 이 나라에 남아다운 남아가 한 녀석도 없느냐. 속을 파헤쳐보면 이런건데 볼모로 가는 아씨들을 나라의 효녀들, 애국의 천사들이라고 꽃가마에 태우고 고취악을 불어대며 떠나보낸다?! 허허… 정녕 가관이로다.… 그래 어떤 불한당이 생명을 위협하며 안해를 내놓으란다고 해서 그놈한테 매일 밤 제 안해를 섬겨바치고 환심을 얻어 일신의 안녕과 부귀영화를 도모한다면… 세상에 그런 추물이 있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아, 나라면 당장에 그 추물의 목을 치고말테다. 어- 나라정사가 문존무비의 시궁창에 빠져 군사를 소홀히 하다나니… 나라방비를 빈틈없이 다질 대신 이런짓에 매달리고있으니 어- 이거야말로 망조가 아니고 무어냐… 그날 오후 남이가 령의정 강순의 방으로 찾아들어가니 로장은 여느날과 다름없이 반겨맞는듯 했으나 얼굴 한구석에 어딘지 모르게 노기가 서려있는것 같았다. 그 방에는 언제나와 같이 번들거리는 문서함들과 장롱, 값진 문갑, 거부기모양의 은제연적, 비취색고려자기 등속이 조화롭게 놓여있었고 방바닥에도 상좌에 련꽃무늬 화문석돗자리며 아라비아산 모전이 깔려있었으나 남이는 다른 방에 들어선듯 좀 어정쩡해졌다. 그것은 안벽에 새로 둘러친 병풍때문인것 같았다. 그 병풍에는 수려한 산천경개가 수묵화로 그려지고 그우에 태평세월을 구가한 명시들이 내리휘갈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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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가 강순이와 마주앉을 때 령상은 첫마디 말부터 질책조로 나왔다. 《도대체 남공이 명나라에 가는 규수들 하고 사촌간이라도 되오?》 《예?!…뭐라구요?!》 남이의 반문도 온곱지 못했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마님까지 모시고 거기 나왔어?》 《그래 그 일때문에 저를 오라고 했소이까?》 《그렇네!》 《사람구경을 하자고 갔소이다.》 그리고 남이는 결패스럽게 움쭉 일어서려고 했다. 령상은 그를 붙잡아 앉히고는 모두숨을 후- 내쉬였다. 《이 사람아, 자네는 속이 편한 모양이여. 어지가 내린걸 알기나 하나?》 《예. 들었소이다! 강령공, 군사를 길러 나라를 지킬 대신 제 나라 처녀들을 바치고 안녕을 꾀하다니… 이 어디 될말이오니까. 후세에 이 나라 남아들을 무엇이라 하겠소이까. 어-통분한 일이요!》 《나한테라고 왜 그런 생각이 전혀야 없겠나. 나도 나라를 지켜싸운 무부일세!》 로장의 목소리는 떨렸다. 남이는 그 소리에 가슴이 쩌릿해져 자신이 로인에게 지나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잠자코 들었다. 《임자야 천군만마를 거느리고 큰 싸움을 해본 장군이 아닌가. 스스로 타산해보게나. 싸움에서 약한쪽이 강적을 이기던가? 이기기는커녕 아주 망해. 저 미녀들을 바치는게 분하다고 욱욱거려 여러모로 큰 나라 황실을 노엽히면 그때에는 전란이 터져… 어느쪽이 애국이고 어느쪽이 망국인고? 저 미녀들은 기특하게도 나라의 안녕을 위해 갔네. 한때 삼국을 통일하고 강성했던 고려도 원나라 황실에 공녀들을 바쳤네. 그때 한 장수가 재상에게 분을 참지 못해 항소했는데 재상은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와신상담>이라고 조용히 일렀네. 제 몸을 스스로 괴롭혀서 나라를 추켜세울 의지를 벼린다는 소리지… 자고로 다른 나라 왕실과 척신의 의를 맺고 안녕을 도모함은 우리 나라만이 아니요. 진나라에 이어 다시 중원을 통일한 한나라도 흉노에 공주를 보내여 변방을 안정시켰고 강대하던 원나라도 고려왕실에 비를 들여보내지 않았나. 그러니 <와신상담>으로 생각하게…》 강순의 진중한 설득에도 속이 내려가지 않는지 남이는 버럭 소리쳤다. 《남들은 그래도 우린 그럴수 없소이다! 제 나라 내인들도 지키지 못할바에야 전장에서 피는 왜 흘렸나이까. 나라 위해 목숨바친이들이 이걸 알면 땅을 차고 일어날것이오이다!》 남이는 터져오르는 분격을 참을길 없어 주먹으로 허공을 때리고는 강순의 방을 분연히 나섰다. 4
그날 밤 리유임금(수양대군)이 승하했다. 말하자면 저승으로 갔다. 이른새벽부터 조객들이 수강궁으로 밀려들었다. 당상관, 당하관품계의 고관들을 비롯한 서울장안의 수백수천의 량반들이 임금의 시신이 누워있는 빈전에서 땅을 치며 호곡소리를 높였다. 남이는 관복우에 베감투를 쓰고 울적한 얼굴로 조객들의 출입을 보아주기도 하고 빈전의 질서를 살펴주면서 돌아갔다. 오후에는 궁녀들과 내시들이 빈전에 엎드려 통곡했지만 백성들의 그림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것에 제일 민감하게 반응한이는 왕세자 리황이였다. 선황의 유지에 따라 야밤삼경에 부랴부랴 즉위의식을 벌리고 왕위에 오른 리황, 19살의 임금예종은 한산한 빈전을 돌아보고 눈살이 꼿꼿해서 령의정 강순에게 왜 조객들이 이렇게 적으냐고 따져물었다. 바빠맞은 강순은 승정원과 례조에 전하의 분노를 전했다. 그리하여 포도청의 라장들과 호분위, 의흥위군사들이 급기야 말을 타고 한성장안의 여기저기로 달려나갔다. 그들은 이 골목 저 골목들과 행랑거리들에 들이닥쳐 생업에 드바쁜 백성들을 경복궁쪽으로 몰아왔다. 그 백성들은 빈전밖의 뜨락과 길들, 공지들에 엎드려 호곡을 하게 하였는데 그런 사람들속에는 군사들도 있었다. 다음다음날 남이가 밖에 엎드려있는 사람들속을 누벼나가며 동정을 살피는데 웬 군졸이 움쭉 일어나며 절하였다. 구떡쇠였다. 《오…자넨가?》 《포도청에서 와서 야단을 쳐 달려왔소이다.》 《음…그래야지…》 얼마후 남이가 사람들속을 돌아보다가 공지에 나서는데 등뒤에서 누구인가 헐썩거리며 뛰여오는것 같았다. 돌아보니 아까 만난 구떡쇠였다. 《판서나리, 공주마님께서랑…?》 《음, 다 무고하네.》 그리고 남이가 요새는 군영에 쌀이 떨어지지 않았느냐고 묻는데 그 군졸은 건숭으로 대답하며 지나가는 사람들만 흘끔흘끔 돌아봤다. 남이가 이상스러워 군졸을 데리고 잔디밭쪽으로 들어가니 그는 우리 군영장님이 판서님을 꼭 만나라고 했다는것이였다. 《무슨 일이 생겼느냐?》 《경신아씨라고 아셔요?》 《엉?》 《우리 군영에…》 《언제?!》 《어제그제…》 그리고 군졸은 제김에 화닥 놀라 뒤를 한번 돌아보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저쪽으로 도망쳐가더니 한무리의 군사들속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남이는 저놈 잡아라 소리치고싶었으나 소란을 피울수 없어 참았다. 눈앞이 휙 돌아가고 현훈증까지 일어 웅크리고 앉아 머리를 싸쥐였다. 어제그제 군영에 갔다면 명나라에 안 갔단 말인가. 아, 이게 어찌된 일이냐?! 그는 등골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땅바닥이 움씰거리는듯 했다. 착잡한 의혹과 근심, 오만가지 생각이 그를 삼켜버렸다. 그날 어슬녘에 남이는 화포대군영으로 말을 달렸으며 화포대장 곽주호는 그를 반갑게 맞아 자기 방으로 안내했다. 두사람은 돗자리에 마주앉아 서로 심중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판서나리, 기다렸나이다.》 《고맙네 화포대장, 나 이제는 판서가 아닐세.》 이렇게 말하는 남이의 입가에 게면쩍고 쓸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곽주호는 저으기 놀랐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오이까? 어떻게…?》 《허- 어떤 풋내기비위에 거슬렸겠지…》 《예? 아니 그럼 화포는…? 그렇게 애써왔는데…!》 《화포라… 후임이 알아서 어떻게 조처하겠지. 지금 나한테는 아씨의 행처가 더 궁금하네. 알려주게… 부탁이네!》 이렇게 토설하는 남이의 눈가에 물기가 번뜩이였다. 《장군, 죽음을 각오하고 실토하겠나이다.》 《…?》 《산적들한테로 갔소이다.》 《무어라고…?!》 주호는 산적이라고 다 도적이나 강도떼들이 아니라고 하며 개중에는 뜻이 있는 의적들도 있다, 자기와 우연히 알게 된 의적대장 장대손은 서울방화폭동때 주모자의 손자로서 량인 백성들은 절대 다치지 않고 악착한 탐관오리들과 부자들만 돌아가며 친다고 했다. 《그 손자 장대손에게 아씨를 보냈소이다. 아마 내 소개장을 가지고갔으니 환대는 못 받아도 허술히 대하지는 않을거웨다.》 그리고는 장대손이 기개가 높고 밀약에는 목숨을 내걸고 충실한자라고 했다. 《아씨가 역적의 딸로 도망쳤으니 이 세상 어느 하늘밑엔들 갈데가 있나이까. 할수없이 산적들한테 보냈는데… 아마 그네들이 밥도 먹여주고 괜찮게 보살피겠지요.…》 그리고 경신이가 간장 한사발을 마시고 고열이 나자 촉한을 만났다고 아부재기를 쳐서 겨우 공녀를 면한 다음 노비로 끌려갔던 대감집에서 몰래 도망쳐서 화포대로 찾아왔다는 등 만장의 사연을 이야기했다. 《의적대장 장대손이 밀약만은 목숨을 내걸고 지켜주는 남아이니 믿어도 일없소이다. 마음을 푹 놓수다.》 《…음?》 남이는 장대손이 의적대장이라는 그 소리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으며 경신이도 그자들과 어울려지내는 사이에 의적으로 되지 않을가싶은 우려까지 들었다. 《의적대장… 그 사람을 어떻게 그처럼 잘 아시오?》 《올라산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소인이 실토했던 제 동생이 생각나시우?》 《아, 생각나오.》 그러자 곽주호는 그때 동생이 북방야인들속으로 도망친것이 아니라 토벌군의 경계가 덜 미치는 황해, 경기도쪽으로 남하해서 변성명을 하고 산속으로 숨어다니다가 산적이 되였는데… 하고는 가슴이 꺼지도록 모두숨을 내쉬였다. 《… 세상에는 별의별 기구한 일도 다 있다더니… 달포전에 이 형집에 제발로 기여들었지요.》 그리고는 명천현감을 지낸 그 동생이 산적으로서 돼지를 도적질하러 기여들었다가 제 형수한테 잡힌 이야기며 산적들의 대장이 화기라는 몹쓸 병에 걸렸다가 자기네가 보낸 돼지고기를 먹고 살아났으며 그것이 인연이 되여 서로 알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그런 이야기까지 듣고 남이는 무거운 한숨을 조용히 내쉬다가 도대체 그네들의 소굴은 어디에 있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곽주호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장군, 그건…그것까지는 알려주지 못하겠소이다. 제발 묻지 말아주소이다.》 《…?》 《신의를 저버린것으로 되여 저들이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지요. 복수하오이다. 그리고 아씨도 무얼 당할지 모르오!》 그 소리에 남이는 가슴 섬찍해졌으며 눈앞에 한성주변의 먼 산발들에서 무겁게 설레이는 밀림의 바다가 선히 떠올랐다. 남이는 한시간남짓 더 앉아 주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군영을 떠났다. 그는 달빛이 훤하게 비치는 길을 따라 말을 느릿느릿 몰아가며 무거운 생각에 묻혀있었다. 군영을 떠나 밤길을 홀로 가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번거로와졌던것이다. 산적들속으로 들어간 경신의 신상에 걱정되는 일이 한두가지 아니였으며 만약에 이 일이 알려지면 어떤 격란이 벌어질것인가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그리고 만일 자기가 지금도 병조판서라면 당장에 오위군부대를 풀어 산적들의 그 소굴을 일거에 소탕하고 경신이한테도 오라를 지워 잡아오게 할것이 아닌가. 나라와 조정의 대의명분으로 보아 응당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곽주호나 경신이와의 의리나 인정을 생각하면 주저하게 되고 그렇게 할수 없는 일이였다. 주호는 이 사람을 믿고 진실을 실토했는데 내가 전장의 막역지우의 고백을 듣고 군사들을 풀도록 한다면…? 나라의 대의명분이냐? 사람들의 신의와 인정이냐? 그는 이 갈림길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번민에 모대기였다. 그러다가는 모두숨을 내불며 자신의 숙명을 두고 개탄하게도 되였다. 아, 그대는 어이하여 이런 일에 자꾸 맞다들리느뇨?! 어- 불우한 무부여!! 서늘한 마가을바람이 불어오고 어디선가 날아온 락엽들이 한잎두잎 날아내리며 달빛속에 언뜩거렸다. 길가의 마을들에서 갑자기 개들이 숨이 넘어가는듯 한 소리로 짖어댔다. 그가 서대문쪽으로 들어가는데 수백명의 사람들이 한길에 달려나와 밤하늘을 쳐다보며 왁작 떠들어댔다. 《아- 저게 뭔고-?!》 《여…여기로 우리한테로 떨어지지 않어?!》 《살-별-이다-》 《무어-?!》 《혜성… 혜성이야-》 남이도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주먹만 한 은백색불덩어리가 이릉거리며 희부연 꼬리를 길게 끌면서 은하수밑을 날고있었다. 곁에서 두 로인이 수군거렸다. 《천상에서 옥황상제가 대노했어. 어릴적에 겪었는데… 인간세상에 천벌을 내릴 때면 저런 살별이 떴지…》 《천벌을 받아 싸지… 싸… 헝. 량반벼슬아치들이란 백성들한테 오죽이나 못되게 굴었어. 공물을 바쳐라… 군포를 내라…》 《이제 홍수가 지고…흉년에 전염병이 창궐할걸세. 다- 쓸어가라- 다- 망해라.》 갑자기 하늘로부터 수만마리의 말들이 무리지어 달리는듯한 굉음이 들려오고 살벌한 기운이 태풍처럼 몰아쳐왔다.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집들쪽으로 달려들어가기도 하고 길바닥에 엎어지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