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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고요히 깊어갔다. 하늘에서 반짝이던 별들도 졸음에 취했는지 맥없이 슴벅이는데 대지의 희푸르스름한 어스름속에 묻힌 화포대군영과 그 근처의 마을에는 어디선가 소쩍새의 울음소리만이 처량하게 들려왔다. 헌데 산촌의 밤, 괴괴한 정적을 흔들며 화포대장네 집쪽에서 느닷없이 악에 받친 아낙네의 악다구니질소리와 남정네의 웩떽거리는 고함소리가 터져올랐다. 부부싸움이 붙은것 같았다. 마실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동네사람 두셋이 걸음을 멈추고 그쪽에 귀를 기울이며 수군거렸다. 저 집은 아낙네가 너무 드세여 저렇다느니, 저 무던한 화포대장이 어떻다고 밤중에 저렇게 악악거리느냐, 저런 계집은 사등뼈를 분질러놓아야 고쳐진다, 화포대장이 한번 욱하고 성나면 범같은데 집안에서는 너무 어자어자하는것 같다고 혀를 차는것이였다. 그 부처간의 갑작스러운 부부싸움은 구리, 파동바람에 일어났는데 곽주호의 집에는 황동초대와 놋대접이 있었다. 주호는 새 병조판서가 동때문에 못내 마음을 쓴다는것을 곁에서 보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그는 장군의 옛 부하로서, 동이 있어야 살아날수 있는 화포의 한 대장으로서 모른다고 등을 돌려대고있을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집에 있는 그 초대와 놋대접을 내놓음으로써 예하 군사들에게 수범을 보이려고 했다. 그러나 남편의 뜻을 다 리해하지 못한 박씨부인은 처음부터 조상제사때 쓰는 제기여서 안된다고 앙탈을 부리다가 나중엔 어딘가에 아주 감춰버렸다. 하여 내놓아라, 못 내놓겠다 하는 아귀다툼질이 벌어졌다가 남정쪽이 먼저 화가 꼭두까지 치밀어 이 집에서 나가라 하고 벽력같이 소리치며 뺨을 후려쳤다. 박씨부인은 남정의 험악한 기상에 질겁하여 방안에서 뛰여나왔으나 울바자밖에 막상 나오니 갈데가 없었으며 그렇다고 뛰쳐나온 집안으로 밤고양이처럼 다시 살그머니 기여들기는 싫었다. 아낙네는 하는수없이 허청간 짚덤불속에 구겨박혀 가슴을 쥐여뜯으며 소리없이 울다가 쪽잠이 들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어느덧 동네에서 첫 닭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허청간덕대의 수닭이 홰를 치며 꼬끼요- 하고 울어댔다. 박씨부인은 아직 더 자야 날이 밝겠다고 생각하며 짚덤불속에서 몸을 옹송그리였다. 그때 웬일인지 개우리쪽에서 개가 으르릉거리고 컹컹거리다가 조용해지는것 같더니 이번에는 뒤울안 돼지우리쪽에서 어미돼지와 새끼돼지들이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 울어 댔다. 박씨부인은 돼지우리속에 승냥이나 여우가 뛰여들었다는 생각이 들자 앞뒤를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대로 몽둥이를 들고 뛰여나갔는데 그 아낙네가 집모퉁이를 돌아갈 때 웬 그림자가 울바자에 매달려 넘어가자고 버둥거리고 새끼돼지의 바스라지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도적놈은 바지가랭이가 무엇엔가 걸려 벗어나려고 안깐힘을 쓰며 버들쩍거린다. 《도적이야-》 아낙네는 무서운 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날려 몽둥이로 그놈의 엉뎅이를 후려쳤다. 그 바람에 도적놈은 울바자밑에 철썩 떨어지고 새끼돼지가 도적의 겨드랑이에서 빠져나가 도망쳤다. 놈은 다시 후닥닥 뛰여일어나 앞뜨락쪽으로 내빼려하더니 웬일인지 와뜰 놀라며 주춤주춤 뒤걸음질쳤다. 다음순간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도적놈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리다가 땅바닥에 넙적 엎드려 울음섞인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형수님-》 박씨부인은 그 소리에 소름이 끼쳐 이를 사려물고 몽둥이를 더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형수! 나요, 나 주선이요. 아주머니, 나를 모르겠소? 명천현감으로 있던 주선이요!》 그 목소리를 들어서는 시동생 같은데 어스름속이지만 그 험상궂은 모색은 판판 다른 놈처럼 보였다. 아낙네는 더럭 겁이 나고 급해맞아 정신없이 남편을 소리쳐부르게 되였다. 《여보- 여보-》 그 숨이 넘어가는듯 한 부름소리가 뜨락을 들었다놓고 곽주호가 문을 차고 달려나왔는데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형님! 나요, 날 모르겠소? 주선이요.》 《야- 너 이게 웬일이냐?》 《형님-》 형제가 주고받는 그 소리에 박씨부인은 너무 놀라 털썩 주저앉아 어쩔바를 몰랐다. 《아이구- 이 무슨 망신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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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그날 새벽 박씨부인이 눈물코물을 흘리며 부엌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쌀을 씻는다, 법석을 떨며 돌아갔으며 방안에서는 쌍둥이형제가 마주앉아 두서없는 말을 주고받게 되였다. 《형님, 죄송하오. 도적놈으로 형집에 뛰여들다니, 이 집이 형님집인줄 내 어찌 알았겠소. 허허…》 하고 동생이 먼저 사죄의 말을 했다. 곽주호는 너무 기막혀 그런 소리에 응대도 못하고 실성한듯 한 얼굴로 동생을 지켜만 보았다. 주선의 얼굴에서는 예전의 그 다정다감하고 총명한 빛이란 찾아볼수 없었다. 머리털은 도깨비나 귀신처럼 거푸수수하게 헝클어져내리고 얼굴은 시꺼먼 흙빛이요, 피진 눈은 도적의 탐욕과 광기로 번뜩이는데 턱은 앙심을 드러내듯 약간 비뚤어져보였다. 누데기처럼 헐어빠지고 여기저기 찢겨진 바지저고리를 걸친 그한테서 발구린내와 함께 숲의 써늘한 기운이 풍겨왔다. 곽주호는 이 동생때문에 여태 속을 썩여온 일들이 떠오르자 분기가 욱 치밀었으나 꾹 참고 누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주선이, 나는 현감벼슬에 있는 너를 늘 자랑으로 생각해왔다. 헌데 이게 웬 벼락이냐?!》 《흐흐…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니 그렇게 됐소.》 《너 보아하니 굶어다니는 걸인행색인데… 돼지우리에는 왜 뛰여들었니?》 《허- 흐흐…》 《갑자기 돼지고기가 먹고싶었던게구나? 이 집에 돼지뒤다리쯤은 있을거다. 형수가 끓여주면 실큰 먹어라.》 《허야- 돼지고기! 무관집이 다르긴 다르오!》 그때 마침 드세면서도 상냥스러운데도 있는 박씨부인이 주안상을 차려들고 들어왔다. 곽주호가 아낙네에게 어제 사온 돼지고기가 남았느냐고 물으니 있다고, 국가마에 넣었다고 했다. 그러자 시동생이 웬일인지 좀 당황해하며 가마에 다 넣었느냐고 물었다. 형수는 서글서글하게 웃어보이며 또 있으니 걱정말라고 이르고는 방에서 나갔다. 형제는 즐거운 얼굴로 술을 들었다. 동생 주선이는 연거퍼 술을 들이키고는 생뚱같은 소리를 했다. 《커? 술맛은 예나 다름이 없는걸. 흐흐흐… 형, 화기라는 병을 앓아본적이 있소?》 《음…?!》 《화기… 화기…!》 《엉- 화기… 소시적에 앓아봤지. 돼지고기를 먹으면 인차 털구 일어나.》 《그 병에 걸리면 날콩을 씹어도 비리지 않다면서?》 《아니, 네가 화기에 걸렸니?》 《아니우, 같이 있는 어른이…》 그리고는 잔에 술을 찰찰 넘치게 붓고는 쭉 들이켰다. 《그는 뜻이 높은이요. 나를 살려준 은인이요.》 《도대체 넌 살기는 어디서 살며 무얼 하느냐?》 여기서 주선이는 술기운에 담이 커져 자기 고행담을 거리낌없이 터놓기 시작했다. 《형, 놀라지 마시우. 나는 산적이 됐소.》 《엉?》 《돼구싶어 된게 아니라 세월이 날 산적으로 만들었소. 에- 기막혀서…!》 그리고는 리시애군이 망하고 주모자들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피신할 때 자기는 관료들의 한 무리를 따라 야인들쪽으로 도망쳤다, 한데 관군이 그냥 쫓아오지, 맥은 다 빠져 걸을 기운도 없지, 허기져 배가죽은 잔등에 붙었지… 이처럼 다 죽게 되자 형생각이 났다, 형한테 가면 밥이나 배불리 먹어보구 죽지 않겠느냐,… 그래서 몰래 떨어져서 남쪽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관북에서 경기땅까지 강인들 얼마나 건느고 험산준령인들 얼마나 넘었겠는가? 밥을 먹어야 살아남겠는데 누가 쌀을 주는가? 동냥질로 입에 풀칠하며 산길을 누벼오다가 산적들을 만났다, 모두 하나같이 고향에서 살수 없어 류랑하다가 산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였다, 자기는 최병괄이라 변성명하고 산적들속에 섭쓸려 지내다가 저도 모르게 아주 산적이 됐다, 알고보니 산적들도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고 서로 아껴주고 도와주는 착한 사람들이였다, 세상에서는 살인강도라고 무서워하고 하나라도 잡아죽이기 싶어 이를 갈지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심산유곡에는 어디나 산적들이 득실거린다, 달포전에 괴석산이라는데 흘러들었는데 알고보니 거기는 의적들이 숨어있는 곳이였다, 여느 산적들 소굴하고는 기품이 다르다고 말했다. 주호는 산적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더 놀라 머리칼이 곤두서는듯 했으나 이야기를 더 뽑아보자는 속심으로 그런 내색을 안하고 늦궈주었다. 《흠, 그런 으슥한데야 의적이 꾸릴수 있지… 화기에 걸렸다는 … 뜻이 크다는이는 도대체 누구냐?》 《형을 믿고 말하는데 어디다 옮기면 안되오.》 《걱정말어. 형제지간의 의리를 봐서도 내 어디다…》 《옛날 서울방화폭동의 주모자 장원만옹의 자손이 되는이요.》 《음… 그런이가 화기에 걸렸다니 정말 안됐구나. 그래, 돼지고기 구하려고 너 혼자 떠났냐? 일행이 또 있느냐?》 주선이는 울바자밖에서 둘이 망을 보고있다고 했다. 《네가 발각이 났을 때 나까지 뛰여나갔으니 도망치지 않았을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칠 그런 애들이 아니요.》 《음…》 주호는 눈을 지그시 내리떴다. 그는 이놈들을 화포대나 포도청에 알려 모조리 잡아가두고싶었으나 동생때문에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게 되였다. 주선이만 아니면… 죽은줄 알았던 동생을 찾았는데 인두겁을 쓴 사람으로서 어찌 그렇게 할수 있느냐? 밖에 있는 두놈을 먼저 홀치고 이놈은 제수한테로 돌아가라고 얼려보고 안되면 그때엔 모가지를 비튼다…? 방안에 심상치 않은 침묵이 흘렀다. 그때 미간을 찌프릴사 하고 말이 없는 형의 얼굴을 유심히 여겨보던 동생이 무엇을 느꼈는지 비양조의 미소를 머금었다. 《…형, 이제는 벼슬이 좀 올라갔수? 종6품이나 3품쯤으로… 흐흐흐…》 곽주호는 그런 조롱에 그만 밸이 와락 뒤틀리고 다리가 떨렸다. 올라산성싸움때 갑사로 굴러다니던 류자광따위가 다 전승덕에 병조참지로 등급한 오늘 그만은 화포대에 그냥 구겨박혀있는것이였다. (고약한 놈!) 《형도 관북싸움에 갔겠지?》 《갔다… 왜?》 《어디, 어디 갔댔수?》 《북청… 성진… 길주…》 주선이는 결패스럽게 벌떡 일어나서 벽에 걸린 군도를 벗겨 칼집에서 칼을 뽑아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거칠게 물었다. 《이… 이걸루 고향사람들을 찍어넘길 때 손이 떨리지 않았수? 양- 양-?!》 《…》 《에-익- 사람들을 얼마나 죽이고 집들과 산들은 얼마나 불살랐소? 산발들에 화재가 휩쓸고… 화포라…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려- 관북 고향땅을 저 지경으로 해놓구두 발편잠을 자우?!》 《야- 그런 소리말라-》 《형!!》 《야- 폭동은 왜 일으켰어?!》 《그것두 모르우? 왜 관북관리들을 차별하시우, 하대하우?! 나만 해두 그래 들구일어났소!》 《…!》 《란을 진압하고는 어쨌는가, 좀 고개를 쳐든 사람들은 돌아가며 <월족형>에 처해 발꿈치힘줄을 다 베버렸어. 다… 다… 관북땅 어디 가나 절름발이병신들이 수두룩하오. 에-익!》 《듣기 싫다. 개-소리 말앗-!》 《얏- 뭐라구-?!》 주호는 불꽃이 날리는듯 한 눈으로 주선이를 쏘아보고 그 동생이 군도를 쑥 내밀며 그렇게 미우면 내 목도 찍어보라고 악에 받쳐 씹어뱉았다. 《뭐-야-?!》 주호는 무슨 정신에 그랬는지 그 군도를 앗아 번쩍 비껴들었다. 초불빛이 부서지는 군도날에 서슬 푸른 살기가 번뜩이고 형이 내지르는 고함소리에 방안이 떠나가는듯 한데 부엌에서 박씨부인이 기겁해 뛰여올라와 칼을 쳐든 남정네 팔뚝에 매달려 울음을 터치였다. 《미치지 않았소?! 아이구- 세상에… 주정을 해도 분수가 있지!!》 주선이 그제야 술기운이 날아났는지 고개를 숙이며 형수한테 사죄했다. 《형수님, 용서하시우. 내 그만 말이 지나쳐 형을 노엽혔소.》 주호는 가슴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고는 쓰거운 입만 쩝쩝 다시였다. 박씨부인은 방바닥에 떨어진 군도를 얼른 집어들고 부엌으로 내려와 그 흉기를 시렁에 올려놓고는 쭈그리고앉아 눈물을 짰다… 에그, 이게 무슨 망신인고… 술상을 들여간게 잘못이였지비. 불을 찬것들은 술만 들어가면 도깨비된다니까… 쯧… 쯧… 아이고- 세상에 어떤 악귀가 저런 쌍둥이형제까지 척을 지게 하느냐…? 그때 방안의 형제는 쌍바위처럼 웅크리고 마주앉아 서로 외면한채 씨근거렸는데 동생이 먼저 온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였다. 《형님, 나는 아주마이가 지어주는 밥이나 먹고 떠나겠소. 아무쪼록 몸성히 잘 계시오. 군역에서도 별일이 없기 바라오.》 《떠나겠다는 말이지? … 내 속심은 달랐다. 너를 집에 잡아두고 잘 타일러 고향에 돌려보내고싶었다. 제수가 불쌍해서…》 그리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였다. 《형님의 그 내심이 고맙소만… 나는 어차피 산으로 들어가야 할 몸이요. 열백번 죽어도 고향사람들 한을 풀어줘야겠소. 처는 친정에 가있으면 되오. 갈길이 다르다고 제발 노엽게 생각지 말아주오…》 《음… 그렇다- 정 그러면 할수 없지…》 이윽고 주선은 형과 겸상을 하여 진지를 들고는 날이 희붐하게 밝아올무렵 형집을 나섰다. 형수가 돼지다리와 형이 입던 바지저고리를 넣은 꼴망태, 망을 본 두 산적의 밥보자기를 들고 시동생을 울바자밖에 나와서도 더 멀리까지 바래워주었다. 새벽하늘에 떠오른 새별이 저 멀리 산속으로 떠나가는 세 그림자를 유심히 여겨보는듯 했다. 그때 주호는 방안에 머리를 수굿하고 그냥 앉아 무거운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는 주선이와 산적들이 왔다가는것을 누가 보거나 눈치채지 않았을가싶어 불안했다. 그리고 이번 일을 말미로 장차 저 산적들이 무시로 찾아들게 되면 어찌랴싶어 겁이 났던것이다. 2
그 이튿날이였다. 하늘은 맑고 푸르고 해볕은 따스했으며 거기에 산들바람까지 약간씩 기분좋게 불어왔다. 류자광은 말안장에 거드름스럽게 앉아 인왕산쪽으로 뻗은 길을 가면서 코노래를 흥얼거렸다. 앞에서는 파동을 그득그득 실은 넉대의 수레가 찌꾹거리며 굴러갔다. 그 파동짐들은 뭇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도록 가마니들에 나누어 넣었으며 그우에 헐어빠진 삿자리며 벼짚나래들을 덮었다. 자광은 그 파동들로 하여 큰 횡재라도 한듯 배속이 흔들거리고 마냥 코노래가 나왔다. 그러나 소몰이군들이나 짐수레곁에서 따라가는 인부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같이 심드렁한 얼굴들이다. 그것도 그럴것이 싣고가는 파동들은 거의다 병조판서의 령이나 혹은 상감마마의 어명이라는 강권을 휘둘러 빼앗다싶이 한것들이였다. 그 시절에는 동, 구리가 금붙이처럼 귀한것이여서 어느 집에서나 그것을 쉽게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꼭지가 부러진 놋숟가락, 이빠졌거나 금이 간 놋대접이나 못쓰게 휘여든 부녀들의 비녀 하나도 귀한것이였다. 헌데 파동이 많이 묻혀있는데는 부자들이나 선비, 량반들의 가옥들이다. 처음에 파동모으기에 나섰던 한성부와 한양장안거리의 낮은 급 벼슬아치들이나 아전들은 그런데는 감히 범접하지 못했다. 그래서 별로 소득이 없었다. 병조의 종6품벼슬아치인 류자광은 동료참지들과 함께 팔을 걷고 나서서 높은 급의 선비, 당상관, 당하관급고관들의 집들에도 마구 들이닥쳤다. 류자광은 강권을 휘둘러 떵떵 을러메며 파동이라고 할수 없는 풍경, 초대, 양푼버치, 쟁반, 동거울 등속의 숱한 황동기물들을 앗아냈다. 나중에는 원각사의 인경까지도 종밑굽에 금이 간것을 트집잡아 종각에서 끌어내렸다. 파동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공조에서는 류참지의 성과에 환성을 올렸으며 어깨가 으쓱해진 그는 성과를 혼자 차지하고싶어 한사코 단신으로 호송관이 되여 길을 떠났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강탈행위로 하여 백성들과 고관들속에서 어떤 여론과 불만이 터져올랐으며 앞에서는 무엇이 기다리고있는지 감감 모르고 여전히 배속이 흔들거려 코노래를 흥얼거렸다. 짐수레들이 산굽이를 돌아가는데 갑자기 웃쪽 산비탈로부터 대여섯명의 사나이들이 질풍처럼 달려내려와 앞길을 막아섰다. 모두 주먹깨나 써보이는 험악한 얼굴의 사나이들이였다. 그자들은 다짜고짜로 류자광을 말에서 끌어내리고 짐수레들을 돌려세우려 했다. (강도단이다!) 자광은 길바닥에 굴러떨어지기 바쁘게 용수철처럼 튀여일어나며 칼을 뽑아들었다. 그 사나이들은 주춤 물러서는듯 했다. 비수같은 말들이 오갔다. 《이 강도놈들아!》 《뭐-?》 《네깟놈들은 한칼에…》 《어-랍쇼. 누가 강도여? 우린 한성부 포도청에서 나왔다!》 《…?!》 《이눔, 고관대작들 집을 털고 원각사 펀펀한 종을 파동이라 빼앗은게 네눔이 아니냐? 잡아랏-》 《야, 이놈- 나는 병조참지-》 그 찰나 순간에 날아든 철여의가 자광의 면상을 후려쳤다. 그는 까무라쳐 피를 물고 길섶에 딩굴었다. 포도청 라장과 포졸들은 그한테 달려들어 오라줄로 묶는 한편 인부들에게 호령하여 고관대작들의 집에서 강탈한 기물들이며 문제의 종을 두대의 수레에 옮겨싣게 하였다. 그리고는 나머지 잡동사니들을 걷어 싣고 떠나라고 소리쳤다.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던 인부들은 그 살벌한 판에서 풀려났다는 기쁨에 정신없이 나머지 파동가마니들을 부랴부랴 옮겨싣고는 그 자리를 황황히 떴다. 그때 오라줄에 묶인채 길섶에 모재비로 쓰러져있던 자광은 꿈인지 생시인지 아주 가까이에서 말발굽소리들이 울리는 속에 다급한 호령소리들을 들었다. 《게- 섰거라-》 《서-랏-!》 꿈인지 생시인지 호분위의 갑기병 대여섯이 바람처럼 달려와 흙먼지구름을 날리며 포도청것들을 둘러싸는가 하면 뒤따라 웬 풍채좋은 대감이 백마에 올라앉아 허연 수염발을 날리며 그 현장에 나타났다. 문관의 관복을 떨쳐입은 그 대감한테서는 신성하면서도 위압적인 기운이 풍겨오는데 노한 기상이였다. 포도청 라장이며 포졸들은 그 대감이 말에서 내리자 모두 길바닥에 엎드려 절하였다. 대감과 포도청 라장사이에 이런 말이 오갔다. 《찾았느냐?》 《예… 대감님, 있소이다.》 《음…》 《대감님, 이런 걸음을 시켜 황송하오이다.》 한 포졸이 원숭이모양의 조각상 같은것을 두손으로 받쳐들고 와서 라장에게 내미니 라장 역시 그것을 두손으로 받쳐들어 대감에게 올리였다. 대감은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지 않고 그저 뒤짐을 진채 어디 상한데가 없나 유심히 살펴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옛날에 명나라 황제가 나의 조부님에게 하사한 손오공상이다. 사기에 황동물을 올린거지만 백만금에 못지 않은 국보이고 우리 가문 가보이다.》 류자광은 나는 죽었구나 하는 공포감에 가슴이 얼어들고 등골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대감집 울담을 기여넘어간 그밤에 대감부인의 가슴에 칼을 박을 기세를 보이며 빼앗은것이였다. 라장의 목소리가 먼 우뢰소리처럼 들려왔다. 《저놈은 병조참지라는데 죽여 마땅한 놈입니다. 우스운건 이걸 황금덩어리로 알고 파동가마니 밑창에 숨겨둔거지요. 흐흐…》 자광은 죽은듯이 눈을 감고있는데 대감이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와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흠칫 놀라는것 같았다. 《허, 구면인걸!》 그 바람에 자광은 눈을 떴다. 대감은 뜻밖에도 네가 리시애의 대가리를 가지고 승정원에 올라왔던 갑사가 아니냐고 묻고는 그때 임금이 너희들에게 연회를 배풀어 내가 왕후마마를 모시고 거기에 동석했노라고 했다. 류자광은 뜻밖의 상봉에 너무 격동되여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대며 끅끅 흐느껴울었다. 그러자 대감은 발을 구르며 호령했다. 《너 이눔, 그때 충의는 어디로 가고 날강도가 돼서 고관대작들 집까지 털고…네눔은 연회까지 베푼 전하의 신의를 저버렸으니 죽어 마땅하다!》 자광은 목이 터지도록 부르짖었다. 《신도 살고싶지 않소이다. 죽일테면 이 자리에서 목을 쳐주시오. 나라의 화포대를 추세우려고 파동을 모은것이 강도질인가요?! 대감님 부인도 나라일에 보탬이 된다면 이거라도 가져가라면서 저 황동상을 내놓았소이다. 내 눈엔 파동을 감추고 내놓지 않는자들이 다 역적으로 보였소이다!!》 《음… 흠… 다 역적이라…》 대감은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는것 같더니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관대작들을 노엽힌건 괘씸한 일이나 참지는 젊은 혈기에 우국충정이 지나쳐 경거망동한것으로 보이니 놓아주라!》 《대감님은 뉘신지…?》 《묻지 말어, 고관대작들 집 기물과 저 종은 돌려주면 될것이어늘 풀어주라. 포도부장한테는 나, 한…의 령을 따랐노라고 해라.》 자광은 오라줄이 풀릴 때 설음이 북받쳐 끅끅 흐느꼈으나 다시 의식이 혼몽해졌다. 그런 운명의 급전환이 철여의로 얻어맞은것보다 더한 충격을 주었던것이다. … 그날 류자광은 간신히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워서 한…이라는 대감을 만났던 일을 줄곧 생각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얼굴의 생김새와 위세로 보아 한명회대감이 분명한것 같은데 달리 생각하면 아닌것도 같았다. 풍설로 돌아가는 한명회는 남달리 커보이는 머리, 그아래로 내려오며 볼이 퍼진 얼굴 그리고 사팔뜨기눈을 가진 기인이였다. 그런데 자기가 만난 한이라는 대감이 사팔뜨기였던지 아닌지 아무리 머리를 짜도 도무지 분간할수 없었다. 그때 너무 어리쳐서인가. …만약 그 대감이 한명회였다면 자기가 몰라볼수 없겠는데… 당시 한명회는 병조를 비롯한 의정부의 젊은 관리들속에서 선망의 대상이며 숭앙하는 인물이였다. 모든 관리들이 그를 부러워하고 두려워도 했다. 그에 대한 풍설은 많고 많이 떠돌았다. … 한명회는 아득한 옛날, 개국직후에 명나라에 사절로 가서 나라이름을 무난히 통과시키고 오는데 공헌한 개국공신 한상질의 손자로서 지금 훈구세력의 중심인물이다. 그는 어미의 배속에서 일곱달만에 이 세상으로 기여나온 칠삭동이다. 항간에서는 팔삭동이도 배안의 병신으로 여기는데 칠삭동이니 그 용모가 어떠했겠는가 짐작이 된다. 한명회가 태여났을 때 그를 낳은 어미는 아기의 용모가 너무 끔찍하여 젖도 물리지 못하고 포대기에 아무렇게나 싸서 저절로 숨지라고 방구석쪽에 밀어놓았다. 그러나 아기는 죽지 않았으며 어디서 그런 기운이 샘솟는지 젖도 악을 쓰며 세차게 빨더니 무럭무럭 자라나 사람 비슷한것으로 되여갔다. 아비는 그 새끼를 가문의 수치로 여겨 한번도 안아보지 않았으며 다 크자 가까이 두면 집안망신이라고 멀리 림진강건너 개경(오늘의 개성)친척집으로 보냈다. 그래서 어미는 아비의 정도 모르고 자라는 그것이 불쌍하여 남몰래 눈물을 흘릴 때가 많았다 한다. 근친들도 그를 아이적부터 칠삭동이에 사팔뜨기라고 사람대접을 안했으나 앞날을 내다볼줄 아는 한 고관대작만이 그한테 딸을 주었다. 그리하여 한명회는 10살때 량반의 후손이라 중추부사 민대생의 사위가 되였다. 장모 허씨는 그게 어디 사람 같은가, 되다가 만 사람 같은게… 게다가 글도 배우지 못했으니 고운 우리 딸이 불쌍하지 않는가고 눈물을 짰지만 민대생은 글은 배우면 된다고 우기였다. 한명회는 나이 30이 넘도록 과거도 보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다가 38살이 되던 해에 겨우 송도의 경덕궁 궁지기로 되였다. 일설에는 그가 개경에 있을 때 고려의 충신 정몽주의 손녀를 첩으로 삼아 살려줌으로써 량반선비들과 백성들의 환심을 샀으며 자기는 비록 세상이 얕보는 사팔뜨기지만 명문가의 아씨를 매일 밤 끼고 잔다는 만족을 느꼈다는것, 집에 가만히 앉아있는것 같으면서도 천지조화며 세상사를 다 꿰뚫고있다는것, 령남의 산간벽지 어딘가에 자기 무장단까지 두고있다는것, 한때 좌의정을 지낸 권람이하고 아이적부터 딱친구인데 그를 구슬려 수양대군에게 접근하여 눈에 들게끔 되였다는것… 지난날에는 경덕궁이나 지키던 궁지기가 오늘은 령의정의 권좌에까지 올랐으며 처세술과 권모술수의 귀신이라 자기 딸을 어느 왕세자의 세자빈으로 들여보냄으로써 자기 권력기반을 든든하게 다져 지금은 큰소리를 떵떵 치며 지낸다… 라는 풍설이 떠돌았다. 류자광은 그런 풍설을 무심히 들을수 없었다. 칠삭동이, 사팔뜨기라는것이 어딘지 모르게 서자라는 딱지가 늘 붙어다니는 자기하고 숙명적으로 인연이 있지 않는가싶어서였다. 그날 밤 류자광은 자기가 만난것이 과연 한명회일가 아닐가 하고 생각하며 밤이 깊어가도록 가슴설레여 잠들지 못했다. 3
한성에 들어서기 바쁘게 남이는 령의정 강순에게 잠간 들렸다가 승정원으로 곧바로 말을 달렸다. 승정원의 우두머리인 민준도승지는 시꺼먼 턱수염밑에 콩알만 한 사마귀가 숨어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복사마귀라고 했다. 그것은 민준의 별호이기도 했다. 민준은 병조판서의 험한 기상에 눈이 휘둥그래져서 지켜보다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도대체 웬일이요? 무슨 급한 용건인데 상감을 그렇게 급히… 포항에 왜구라도 상륙했소?》 《그보다 더 급한 일이요!》 남이는 승정원문관들에 대한 평소의 불만까지 터져올라 볼편을 떨었다. 승정원것들은 전하의 어지를 아래관청들에 전하고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문서며 간하는 중대사를 상주하는 직책에 있다고 하여 병조의 무관들쯤은 함부로 얕보며 거드름을 피웠던것이다. 남이는 되게 을렀다. 《시간을 다투는 국사요!》 《아무리 급해도 우리가 알아보지도 않은채 상주할수 없소!》 하고 도승지는 새파랗게 젊은 병조판서를 야멸차게 지켜보며 잘라 말했다. 《이건 전하밖에 누구도 알아서는 안되는 중대사요!》 《흐흐… 어디서나 다 그렇게 을러 이젠 습관이 됐소.》 남이는 버럭 소리쳤다. 《도승지, 상주하겠는가 못하겠는가?! 만약 안하면 후에 목을 내놓게 된다는걸 명심하시오!》 《판서! 예가 어디라고 위혁인가?!》 하고 도승지는 얼굴빛이 표표해서 소리쳤다. 그리고는 인차 기색이 심란해져 모두숨을 후- 내쉬고는 진중하게 일렀다. 《지금은 제 생각만 하고 떠들 때가 아니요. 전하는 지금 병석에 누워계시오.》 《뭐라구요?!》 《의원들은 무서운 소리까지 하오.》 《예…?》 남이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몇마디 더 추궁했는데 그 소리는 전혀 가려들을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 승정원을 나섰는지 몰랐다. 밖에 나온 그는 말에 뛰여올라 어디라없이 내달렸다. 그날 남이는 마포쪽 한강가의 잔디밭에 벌렁 누워 하늘만 쳐다보았다. 푸른 하늘에는 자유롭게 날아예는 새 한마리 보이지 않고 아스라하게 높고 넓은 공간에 허무의 기운만 가득차있는듯 싶었다.… 도승지는 의원들이 무서운 소리까지 한다고 했지. 아, 무서운 소리란…? 전하에게 림종이 왔다는… 림종이 올수도 있다는 경고가 아니냐. 그처럼 기상이 도도하고 용용하고 드센 임금에게 죽음이란 웬 소린고…?! 승정원으로 달려올 때의 감정은 어디로 날아가버리고 가슴으로 따뜻한 인정의 온기가 휩쓸어드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아, 나를 얼마나 총애했던가. 내 성공을 뉘보다 기뻐하고 대견하게 여겼던 분… 양마장에서 제일 좋은 말까지 하사하고 승리를 축하해 연회까지 차려준 임금… 그런 정의와 인정을 지닌 군주가 왕권을 찬탈하고 단종왕을 독살했다니? 이건 다 간사한 무리들이 퍼뜨린 요설이 아닌가? 저 방랑시인 매월당이 그런 요설에 넘어가 나한테까지 토설한게 아닌가. 자기가 보지 못한 일을 두고 번민한건 거룩한 은인앞에 죄악이 아니냐. 아, 어제까지만 해도 벼슬을 버리자고 했던 내가 오늘은 왜, 어인 일로 이렇게 두둔하게 되는가…? 푸르디푸른 하늘도 남이를 유심히 굽어보는듯 했다. 풀밭에 누워있는 그도 아득히 높은 하늘을 끝없이 쳐다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사람들은 어느 누구나 언젠가는 저승으로 떠나기마련이다. 떠나가는이에게 박정하고 가혹한것은 불륜이고 악덕이지… 더우기 림종이 다가온 임금을 욕되게 한다는것은 나라백성으로서 큰 불손이요 죄악이다.… 나어린 조카 단종의 왕권을 찬탈했다는것도 그러지 않으면 안될… 그럴만 한 까닭이 있지 않았을가. 저 《황표정치》란것도 조정에서 재상이나 정승을 선출할적마다 나이 어리고 분별이 없는 단종을 위해 인선후보들의 이름자우에 노란 표식을 해놓았고 나어린 임금은 그 표식을 보고 이자를 시키라 어지를 내렸다니… 허- 이래 가지고야 어찌 나라정사를 바로할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단행한 찬탈이 무슨 죄악인지 불륜인지 나는 모르겠다. 젠장 그거야 어쨌든 잘한 일이 아니냐. 춘추관의 선비들이나 입이 닳도록 시비해보라지… 임금은 북벌전쟁후 문관출신이 아닌 강순로장과 나를 조정에 들여앉혔어. 강순은 령의정자리에, 나는 병조판서로… 이런 처사가 문존무비의 천하에서 과연 있을수 있는 일이냐. 훈구세력의 고관대작들이 얼마나 놀랐으며 이의를 가졌으랴… 무슨 후환이라도 없을가…? 여기까지 생각한 남이는 벌떡 일어나 풀밭에 엎드려 하늘에 빌었다… 아, 하늘이여, 신이여, 이 나라 백성들을 가긍히 여겨 병환에 쓰러진 임금을 소생시켜주소서, 빌고 또 비나이다! 그리고는 머리를 와락 싸쥐고 눈물을 머금었다. 머리우로 물새 여러 마리가 구성지게 울어대며 훨훨 날아 지나갔다. 문득 아까 승정원에서 도승지가 하던 소리가 떠올랐다. 도승지는 병조에 류자광이라는 참지가 있는가 묻고는 그 작자가 파동을 모은다고 복닥소동을 일으키며 돌아가다가 고관대작들의 집에까지 쳐들어가 기물들을 략탈해갔다, 이런 례의가 어디 있느냐고 추궁했었다. 아마 그 일은 임금의 병환소식을 들어 까마득히 잊게 된것 같았다. 남이는 자기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인가 있은것 같았으나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날 남이는 화포대군영으로 나가 군영장 곽주호와 함께 공조의 인부들이 쌓은 구리생산용돌가마들을 돌아보았다. 종사관이 판서를 뒤따랐다. 돌가마들은 웬일인지 허물어버린채 내버려져있었다. 몸집이 우람한 화포대장 곽주호가 난처해하며 공조의 석공들이 돌가마를 쌓았는데 숯불이 약한탓인지, 어디가 부실한지 동이 녹아내리지 않는다고 했다. 《목탄으로 안되면 석탄불은…?》 하고 남이가 물었다. 《석탄불이요? 허 석탄이 어디 있나유?》 《없어?!》 《없소이다!》 《공조판서로 있은 내가 석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는가?! 평양 사동에서도, 경상도 녕해에서도 석탄이 난다!》 《그 먼데 있는걸 무얼로, 어떻게 실어와요?》 《…?!》 남이는 입이 쓰겁고 노기가 치밀어 그한테 더 말을 붙이지 않고 돌아서서 불이 펄펄 이는듯 한 눈으로 인왕산자락을 둘러보았다. 수풀속 여기저기에 돌가마를 쌓았던 자리들이며 파동쪼각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는것이 언뜻언뜻 보였다. 인왕산기슭에 차거운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몰아치고 나무가지들이 윙-윙- 울부짖었다. (아, 이러한 때 장영실이…) 남이는 자신이 한지에 나앉은듯 온몸에 오한을 느꼈다. 그때 여기로 류자광이 말을 타고 달려왔는데 그는 판서를 보자 말에서 뛰여내려 반겨 웃으며 달려왔다. 《판서나리, 먼길에 별고없었나이까?!》 《엉, 잘 있었나?》 《녜 녜… 판서나리가 계시지 않으니 병조가 텅 빈것 같아요. 아유, 어찌나 기다려지는지…!》 남이는 어째선지 그 소리가 진심으로 들리지 않고 아첨으로 느껴졌다. 《그새 여기로 나와 봤나?》 《예?》 《동을 녹일 돌가마가 저 꼴이니까 하는 소리여!》 《저 보고는 파동을 모아주라고만 했는걸요.》 《그새 파동은 얼마나 모았나?》 《파동이 어디 흔해유? 없어요. 어휴- 내 참, 기막혀서…》 그리고 파동을 모으면서 고생한 일, 고관대작들의 집에까지 찾아들어갔던 일 그리고 한이라는 대감을 만나게 된 경위와 대감의 관용으로 오라줄에 묶이였다가 풀려났던 일까지 죄다 말했다. 병조판서는 펄쩍 놀랐다. 《그건 한명회대감이야!》 《예?!》 《호분위군사들을 앞세우고 온것만 봐도 모르겠어?! 바보…!!》 《비슷하다 하고 생각했지만…》 《오라줄을 풀어줬다고 아주 용서한줄로 알았느냐. 아니, 아니여, 한명회가 아닌가…》 그리고 남이는 가슴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였다. 《병조에서 아주 쫓겨나든지 의금부에 잡혀들어갈수도 있어. 빨리 대감을 찾아가 용서를 빌라…!》 《그 집에요?》 《대감은 집에 있지 않아, 흔히…》 남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감은 요새 한강가의 어느 별당에서 보양을 받는다는 소리를 들었노라고 했다. 그리고는 말에 뛰여올랐다. 종사관이 자광에게 눈총을 쏘고는 말에 올라탔다. 모두발로 뛰여가는 말꼬리뒤에서 흙먼지가 부옇게 날아 올랐다. 류자광은 얼굴이 시꺼멓게 질려 꼿꼿이 서있었다. 4
그날 남이는 인왕산의 화포대군영에서 돌아오며 이마살을 찌프리고 내내 암담한 생각에 잠겨있었다. 동생산이 그냥 안되면 화포대를 추켜세울 다른 방책이 없었다. 그는 강순과 다시 의논하고 다른 나라에서 동을 수입하는 한편 평양 사동이나 경상도 녕해에서 석탄을 시급히 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류자광의 건도 례사로운 일이 아니여서 머리가 지끈지끈 쑤시였다. 말을 느릿느릿 몰아가던 남이는 행랑거리어귀에서 광대들이 놀이판을 벌린것을 띄여보게 되였다. 그는 머리를 식히고싶어 그쪽으로 다가갔다. 요즘 항간에서 사당패라고 부르는 그네들은 도대체 어디서 흘러들어와 저렇게 흥취를 돋구며 미친듯이 놀아대다가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수 없었다. 둥둥 울리는 북소리, 캥캥거리는 징소리에 하늘땅이 떠나 가는듯 했다.… 머리에 패랭이를 제껴쓴 두 녀석이 고개를 들까불며 장새납을 불어대면서 돌아가는데 그 복판에서는 초립동 애녀석들과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남녀들이 한데 어울려 신바람이 나서 어깨춤을 으쓱으쓱 추며 돌아간다. 북잡이가 돌아가다가 북채로 장새납 부는자의 머리를 슬쩍 건드리니 그자는 머리를 뒤로 한껏 젖히며 하늘을 향해 신묘하고 경쾌한 소리를 뿜어올린다. 때- 때- 때- 구경군들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허리를 꺾으며 웃어댄다. 큰 갓을 쓴 선비가 체면도 잊고 껄껄거리다 한마디 던진다. 《허- 맹사성의 가락은 울고 가겠다-》 남이도 빙긋이 웃었다. 그는 사당패의 놀이에 정신이 팔려있으니 잠간사이에 가슴속울기가 잦아들고 마음이 편해지는것 같았다. 저렇게 흥겹게 인생을 즐기는 사당패, 그네들이 부럽기도 했다. 이윽고 그가 집쪽으로 말머리를 돌리려는데 구경군들속에서 웬 녀석이 달려나와 땅바닥에 넙적 엎드려 절을 하는것이였다. 그리고는 무엇이라고 소리치며 정신없이 달려왔다. 어디서인가 본적이 있는듯 한 군졸이여서 찬찬히 여겨보니 구떡쇠였다. 남이도 반기며 웃어보였다. 그러자 군졸은 검실검실하고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가득 피워올렸다. 《상대장… 아니 판서나리! 저를 알겠소이까? 구떡쇠올시다!》 하며 군졸은 말 탄 그의 다리에 매달렸다. 《암- 알지 않구. 허허… 헌데 어디서 오는 길이냐?》 《집에… 군량가지러 갔다와유.》 《집은 어디냐?》 《경기도 광주현이와요.》 《헌데 군량은 어디 있어?》 《…빈손으로 와요. 흉년이 들어서…》 군졸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빈손으로 가면 당장 무얼 먹어?》 《꾸어먹지요. 친구들한테서…》 《모두 같은 형편이 아닌가?!》 남이는 군졸이 그지없이 측은해지며 지방군의 부병제가 이제는 중앙군에까지 미쳐오는가 하는 생각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는 말에서 뛰여내렸다. 《가자… 우리 집에!》 《녜?!》 《가자!》 《제가 어찌 감히…》 구떡쇠는 눈이 휘둥그래져 뒤걸음질쳤다. 남이는 그의 팔목을 우악스럽게 틀어잡아끌었다. … 그날 대궐같은 병조판서의 집으로 끌려온 구떡쇠는 솟을대문을 지나 저택뜨락에 들어서자 어리친 사람처럼 되여버렸다. 판서를 맞는 집안에 언제나와 같이 복닥소동이 일었다. 행랑방의 종로인이 달려나와 말을 마구간으로 끌어간다, 여기저기서 녀종들이 탄성을 지르며 달려나와 앞을 다투어 곱게 절을 한다… 그 순간 구떡쇠는 으리으리한 합각기와지붕의 처마끝에 매달린 풍경에 눈을 팔았다. 풍경이라는 그 작은 종은 바람결에 한들거리며 기묘하고 야릇한 소리를 내면서 은빛으로 반짝이고있었다. 시골뜨기한테는 풍경이 한들거릴 때마다 구슬알들이 그밑으로 방울방울 날아 떨어지는듯 싶었다. 그때 얼굴이 해말쑥한 시녀가 남이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와 인사드리고는 공주마님이 구을금이를 데리고 서대문쪽에 병문안 가서 계시지 않는다고 아뢰였다. 누가 앓는가고 물으니 공조참판 로부인이 앓는다고 대답 했다. 남이가 시녀더러 곁으로 다가온 구떡쇠한테 인사하라고 이르니 군졸은 못내 황송해하며 제편에서 먼저 시녀에게 엎드려 절했다. 시녀는 창황중에 절을 받았으나 군졸의 헐어빠진 옷주제며 땀내때문인지 얼굴에 그늘이 언뜻 스치였다. 남이는 군졸을 데리고 대청마루방으로 올라가 삿자리우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군졸은 엉거주춤 서있었다. 《이번에 집에 가보니 어떻더냐? 동네에 절량이 된 집이 아주 많아?》 《좀 있어요.》 《음…》 《더우기 군역을 져 일손이 모자라는 집이 더하지요.》 《음…》 《군영에 돌아가면 뉘한테서 쌀을 꿔먹겠는지 막막하와요.흉년이 드니 모두 인심이 박해졌거든요.》 《너 오늘 아침 끼니는 어쨌냐. 먹었냐? 굶었냐?》 《이젠 한두끼쯤 넘기는건 심상하오이다.》 그 말을 들은 남이가 녀종을 불러 부엌어멈한테 빨리 밥상을 차려오도록 하라고 이르자 구떡쇠는 몸둘바를 모르고 쩔쩔매다가 제발 돌아가게 해달라고 졸랐다. 남이는 껄껄 웃었다. 《이봐, 병조판서집에 와서 군사가 밥 한끼 얻어먹지 못할가! 허허…》 원래 비위가 떡판같은 떡쇠라 그런 호협한 소리에 기운을 얻었는지 자기네 군영장한테 몇자만 써달라고 간청했다. 《무얼 말인가?》 《실은 사흘이나 늦었소이다. 장가드느라고…》 《음…》 《판서나리, 몇자만 적어주시면… 이대로 군영에 들어가면 늦었다구 곤장을 쳐요. 죽도록… 병신이 되게…》 그때 녀종이 자그마한 소반상을 들고 들어와 군졸앞에 놓아주고는 새침한 얼굴로 나가버렸다. 구떡쇠는 정신없이 밥상에 달라붙었다가 너무 게걸스럽게 퍼먹는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판서쪽을 흘끔 돌아보았다. 남이는 불쌍한 군졸한테 마음 편히 먹을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고싶어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방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얼마전 자신이 순시한 경상도 군영들의 정상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거기 군영들 형편도 비슷할거다. 거기도 흉년이 들었을테니까… 군사들이 자기 집에 가서 쌀을 져다 먹게 하다니? 이런 병제를 가지고 어찌 전쟁을 하는가. 과연 이런 군대가 싸움을 하면 이기겠는가. 이전 병조판서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 졸았는가? 죄다 주색에 빠져있었는가. 문관나부랭이들한테 밀려 맥을 추지 못했느냐. 아, 이런 한심한 일이라구야… 어… 나도 하정이 이 지경인걸 모르고있지 않았는가!) 이윽고 남이가 대청마루방에 나가보니 구떡쇠는 밥상옆에 모로 쓰러져 코를 골고있었다. 밥에 취해 식곤증으로 노그라떨어진것 같은데 꿈속에서도 음식을 씹는지 이따금 입을 우물우물 놀렸다. 남이는 그 정상이 불쌍하여 덤덤히 지켜보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밥을 더 먹도록 깨울가 하다가 말고 조용히 녀종을 찾아 밥상을 그냥 두고 그한테 베개를 베여주라고 일렀다. 그리고는 자기 방으로 나갔는데 병문안 갔던 어머니가 찾아들어왔다. 남이는 어머니를 보는 순간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어머니는 몹시 상심한듯 언제 봐야 밝고 부드럽던 얼굴에 어둑한 그늘이 비꼈는데 눈언저리가 물기에 젖어있는듯 했다. 남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공조참판의 로부인이 병세가 더 나빠졌느냐고 다급히 물었다. 정선공주는 아들에게 머리만 알릴듯말듯 저어보였다. 《그럼 구을금이가…?!》 《아니 밖에서 놀아…》 그리고는 아들의 손을 와락 그러잡았다. 《이 사람아, 이 일을 어찌누?》 《예?》 《상감이 뢰풍이 들어 그만… 참판 로부인이 그러는데 문둥병에… 아, 이런 기막힌 일이라고야!》 《아니 정말인가요?!》 남이는 어릴적에 사람들이 먼발치에서도 문둥병자를 보면 질겁하여 도망치던 일이 생각나며 소름이 끼쳤다. 문둥병자들은 몸에 거뭇거뭇한 부스럼이 나고 그것이 터지면 온몸이 만신창이 되여 진물이 흐르고 팔과 다리 할것없이 뼈마디들이 썩어 문드러지면 숨이 진다고 했다. 《이 사람, 상감이 어쩌면 그런 몹쓸병에 걸렸을가?》 《어머니, 랑설이겠지요.》 《아닐세. 참판 로부인 말이 상감이 몇해전부터 온양온천에 몰래 다녔다지 않어…》 《예…?》 《그 온천물이 문둥병치료에 효험이 크다 했지. 임금이 그 온천에 다녀 이런 소문이 났는지… 지금 임금이 천벌을 받았다고 쾌재를 올리는 작자들이 많다는거요.》 남이는 의분이 터져오르고 눈빛이 사나와져 부들부들 떨었다. 《엑- 고약하고 가증스러운 놈들…》 《참판 로부인 얘기는 임금이 저렇게 되자 한명회대감 같은 이는 임금이 빨리 숨지기를 하늘에 기원하고 부처님에게 빈다누만…》 《예?!… 어머니, 그게 정말일가요?》 《아니, 임금이 빨리 승하해야 자기 사위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않겠수.》 남이는 얼굴빛이 시퍼렇게 질려 어금이를 으드득 갈았다. 《아니… 아니야요. 이건 다 간사한 무리들이 퍼뜨린 헛소문이 아닌가 생각하오이다.》 《그럴가?》 《다… 죄다… 속에 딴꿈을 품은 요사스러운 신하들이 퍼뜨린 요언이예유.》 《그럼 온양온천에 다녔다는 소리는…? 나도 거기에 문둥병자들이 찾아든다는 소리는 어디서 들은것 같은데… 한대감이 사위를 왕위에 앉히자는건… 그이도 신선이 아니고 속세의 사람인 이상 그럴수도 있지 않을가. 그런 욕심이야 있을수도 있지.》 《어머니, 상감이 저렇게 쓰러지니 어인 일인지 저분이 쌓은 치적이 더 생각나요. 관북민란을 평정하고 야인정벌을 단행해 나라를 안정시키구… 재위14년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어떤 선정을 베풀었나유. 헌데 죄를 만나 천벌을 받았다구?엑- 무도한것들…!》 정선공주는 정겨운 눈매로 아들을 쳐다보며 눈물이 그렁하여 말했다. 《다른건 다 그만두고라도 궁궐에 잠실을 두고 왕실에서도 다 누에치기를 배우도록 한거나 누구나 다 읽을수 있도록 <잠서>를 한글본으로 찍어내게 한것만 봐도 뜻이 큰 임금이였지…》 공주는 한숨을 조용히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 《이 사람, 세상이 이렇게 어수선한데 만사에 조심해요. 그런데 대청마루방에서 세상모르고 자고있는 저 군사는 도대체 누구요?》 《어머님, 마음놓으세요. 북변전장에서 전공을 떨친 군졸이야요. 불쌍한 중생이지요.》 《그렇지만… 다른 량반들이 알면 수상쩍게 여기지 않을가. 병조판서네 집에 저런 천한 신분의 군졸이 자기 집처럼 들어와 대접을 받고 늘어져 코까지 골며 자다니. 누가 들어도 놀라지 않겠소?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이런 어수선한 세월에는 모가 너무 나지 말아야, 남들이 하는것처럼 해야 마음편히 지낼수 있소.》 남이는 싱그레 웃었다. 《헛허… 어머님도…》 《내 여태 큰사람이 하는 일에 배놓아라 감놓아라 한적이 있소?》 정선공주는 아들이 병조판서로 된 후 새 판서가 나라의 병권을 틀어쥐였다는 그 권세를 믿고 너무 발호한다는 소리랑 귀결에 들은적 있어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아유, 어머님, 마음놓으세요. 제가 뭐 애숭인가요? 허 허…》 《저 군졸은 어슬녘에 몰래 떠나보내세나.》 《녜- 녜… 그러지요.》 남이는 그날 어슬녘에 구떡쇠한테 화포대장 곽주호에게 보내는 편지를 주고 쌀자루를 지워서 조용히 떠나보냈다. 불쌍한 군졸을 대문앞에까지 나가 바래워주고 돌아들어오던 그는 뜨락의 정원수밑에 이르러 뚝 멎어섰다. 낮에 어머니가 한대감을 두고 한 이야기가 되새겨져서였다. 언제라도 임금이 승하하면 왕세자가 즉위하기마련인데… 리황세자는 언제 봐도 나를 언짢게 여기는 눈치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정원수에서 락엽들이 우수수 날아 떨어지면서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남이는 그날 밤도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5
한편 병조판서를 통하여 자기가 한명회대감을 만났다는것을 확신하게 된 류자광은 그날 밤 더욱 놀라운 생각을 했다. 이전에 자기 사주팔자를 보아준 복술의 말이 떠올랐던것이다. 그 명복은 분명히 이렇게 예언했었다. 이제 임자앞에 귀인이 나타나 도와줄것이다… 그 귀인이 한대감이 아닐가?! 그는 희열에 넘쳐 밖으로 뛰여나가 하늘을 쳐다봤다. 저 하늘의 별들이 유난히 반짝이며 자기앞으로 너울너울 날아드는듯 했다. 그는 이튿날부터 6조의 가까운 동료들을 통해 한대감의 처소를 은밀히 수소문해보니 대감은 한강기슭의 어느 정각 별당에서 보양을 받는다는 소문이 있다고 할뿐 그 흑막속 인물의 처소를 딱히 아는 관리는 한명도 없었다. 그는 남몰래 며칠밤 한강기슭 명소들을 찾아헤매였다. 어느날 밤 자광은 한강가의 외진 등성이 소나무숲속을 헤매다가 개짖는 소리를 들었다. 순간 온몸이 긴장되고 이마에 식은땀이 내배였다. 자광은 몸을 날려 몇아름이 되는 고목뒤에 붙어서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여기저기에 나무패말이며 희끄무레한 망두석이며 비석 같은것이 보이는것으로 보아 묘지들 같았다. 그리고 가까이에 달구지길 같은것도 어렴풋이 보였다. 소나무숲속에는 괴괴한 정적이 흐르는데 이름할수 없이 불길하고 무시무시한 기운이 안겨왔다. 희푸르스름한 달빛이 흘러드는 고목들밑 미궁같은 어스름속에서 여우나 온갖 요귀들이 이쪽을 빤히 내다보고있는듯, 참살당한자들의 망령이 수군수군거리며 머리우에서 감도는듯 했다. 류자광은 속이 한줌만 해져서 둘레를 흘끔흘끔 돌아보다가 저 앞쪽에서 한가닥 불빛이 언뜻 새여나왔다가 사라진듯 싶어 그쪽으로 달려갔다. 앞쪽 어스름속에 정각과 별당의 륜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덩실한 정각과 아담한 별당근처에는 인적기가 전혀 없고 키를 넘는 울담이 넓게 둘러쳐있었다. 무관복차림의 류자광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울담대문앞에 이르러 조용히 헛기침을 기어보고 대문을 안쪽으로 밀어보았다. 열리지 않았다. 안쪽으로 빗장을 질러놓은것 같았다. 큰 마음을 먹고 대문을 두드렸다. 한번, 두번… 응대가 없었다. 자광이 다른쪽 어디에 작은 대문이 없는가싶어 뒤쪽으로 돌아가보는데 별안간 우악스러운 몸뚱이가 와락 덮쳐들었다. 순간에 기절초풍하여 멱살을 틀어잡히고 두팔을 비틀어 잔등에 붙이는데도 고함소리 한마디 지르지 못했다. 어떻게 뒤문으로 끌려들어갔으며 어떻게 땅바닥에 꿇어앉게 됐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화들화들 떨기만 하는데 웬 우람한 몸집의 그림자가 다가와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웬놈이냐고 거칠게 물었다. 류자광은 부들부들 떨며 자기 신분을 밝히고 간청할 일이 생겨 무엄하게 찾아들었노라고 했다. 《아하- 너 이눔, 렴탐군이지?》 분명 한명회의 목소리였다. 《아… 아… 아니오이다. 제발…》 《간할 일이라면 병조판서나 좌의정, 령의정한테 찾아갈것이지 예가 어디라고 감히… 렴탐이 분명해. 여봐라-》 그 그림자는 심야의 침입자를 잡아들인 무사들을 불러 이놈을 곤장으로 볼기를 몇대 쳐서 내쫓으라고 호령했다. 자광은 그날부터 이틀동안이나 자기 집 아래목에서 뒤채기며 배신감에 모대기다가 곤장에 얻어맞아 부어오른 볼기를 어루만지면서 끙끙 앓음소리를 냈다. 사흘뒤 류자광은 죽을 각오를 하고 다시 한명회의 별당을 찾아갔다. 그가 별당앞으로 밤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가니 대문은 의연히 굳게 닫겨져있었다. 그래서 널대문을 조용히 두드리니 안쪽에서 다급한 발자국소리가 자박자박 나서 일전에 찾아왔던 병조참지라고 자기 직함을 드러냈다. 그러자 안쪽에서는 아무런 응대도 없이 발자국소리만 다시 뒤쪽으로 멀어지는듯 했다. 그밤 한명회는 자기 처소로 찾아들어온 파수군의 말을 듣고 저으기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작자 그만큼 혼뜨검이 났으면 됐지 어째서 또 기여들어? 누가 렴탐군으로 들이민게 아닌가? 한명회는 슬하에 은밀히 거느리고있는 무사들을 불러 그 작자가 렴탐군이 아닌지 알아보라, 단근질을 해서라도 흉계를 다 게워놓도록 하라고 엄명했다. 그리하여 류자광은 그밤 별당 뒤켠의 밀실로 끌려들어가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되였다. 겉보기에도 우직스러운 서너명의 무사들이 야간침입자를 두들겨패며 《흉계》의 속내를 짜내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류자광은 처음부터 남이장수가 한명회에게 사죄하라고 해서 들어왔노라고 아우성치며 몸부림쳤다. 사실이 그러하니 거짓을 꾸며댈수도 없었던것이다. 그러자 우직한 무사들은 숯불이 이릉거리는 화로에서 시뻘겋게 단 부저가락을 뽑아들고 접어들었다. 화끈한 열기를 내뿜는 부저가락이 후들거리며 눈앞으로 다가들자 죽기를 각오하며 눈을 꾹 내리감고 입술을 피터지게 깨물었다. 다음순간 부저가락이 살갗에 박히며 살이 타는 노린내가 확 풍겨올라 얼굴을 후려쳤다. 자광은 단말마적인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소리쳤다. 《야- 악- 네놈들- 누구들이야- 한명회는 나를- 날 살려준 귀인이-다-》 그리고는 거품을 물고 까무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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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로부터 네댓시간후 제정신으로 돌아온 자광은 자기가 낯선 방에 누워있다는것을 깨달았다. 온몸이 지끈지끈 쑤시고 단근질을 당한 팔이 얼얼하게 저려들었으며 귀안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같은것이 그냥 울렸다. 언제 의원이 왔다갔는지 단근질을 당한 팔에 무슨 고약인가 두툼하게 붙어있었으며 방안을 뚜릿뚜릿 둘러보니 방문에 연보라빛비단문발이 묵직이 드리워있고 구석쪽에 세워진 초대에서 초불이 고즈넉이 타오르고있었다. 그때 인기척소리가 나더니 방문으로 한명회가 웬 잰내비를 안고 들어왔다. 한명회는 문턱을 넘어서며 품에서 잰내비를 털어버렸는데 그 명물은 방바닥에 사뿐 내려앉아 낯선 손을 빤히 지켜보다가 초대밑으로 아장아장 걸어갔다.
그리고는 임자가 나를 귀인으로 여긴다는데 진심이냐고 물었다. 자광은 그 소리를 듣자 속이 왈칵 뒤집혀져 자리를 차고 뛰여일어나며 귀인으로 알고 찾아온 놈한테 단근질이라니 대감도 사람이냐고 소리치고는 뿌리치고 나오려고 홱 돌아섰다. 그가 대여섯걸음 걸어나오는데 등뒤에서 무서운 함성이 터져올랐다. 《죽겠으면 아주 가고 살겠으면 돌아왓!!》 그 격한 부르짖음소리에 방안이 떠나가는듯 하고 자광이 돌아보니 한대감의 얼굴은 살륙의 광기로 푸들거리고 사팔뜨기눈에도 살기가 번개치는듯 했다. 자광은 질겁하여 다시 돌아와 한명회앞에 엎드렸다. 한명회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며 어째서 나를 귀인으로 알게 되였느냐고 물었다. 자광은 명복 홍계관의 예언을 실토할가 하다가 그 사연은 덮어버렸다. 그리고는 포도청 라장과 포졸들한테 잡혔던 자기가 대감님이 오라줄을 풀어주라고 어명을 내려 살아날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무엄하게도 대감님을 하늘이 내려보낸 귀인으로 믿게 되였소이다.》 한명회는 무거운 모두숨을 길게 내쉬였다. 《음… 흠… 실은 자네가 병조참지로 오기 전부터 눈여겨봤지. 허… 자는 우복이요 본관은 영광이라 부윤 류규의 서자겠다. 흠… 흠… 그 빌어먹을 첩자식 감투때문에 공연히 속을 썩였더군. 허-》 자광은 한명회가 자기 래력을 알고있다는 그 사실이 너무 놀랍고 한편 반갑기도 하여 가슴이 뿌듯해졌다. 한명회는 측은한 눈매로 그런 모습을 여겨보다가 장차 이녀석을 심복으로 삼으면 덕을 볼수 있지 않을가 하고 생각했으며 그때 류자광은 대감의 환심을 사고싶어 거짓을 꾸며댔다. 《대감나리, 우리 판서님이 소인을 싫어했어요. 서자라고… 게다가 요새는 내쫓겠다고 해요.》 《남이라… 그 애는 어쩌지 못해…》 자광은 가슴에 얹힌것이 내려가는듯 조용히 한숨을 내쉬였다. 《저…》 《남이 그 애가 무슨 일로 내쫓는다고 했느냐?》 자광은 림기응변으로 동때문이라고 했다. 《허 참, 동이라… 병조판서라는 사람이 구리하고는 도대체 무슨 상관인데 그처럼 환장을 했어. 엉?!》 《화포를 더 크게 만들고 화포군을 썩 늘인다나요. 그래서 참… 참… 판서한테는 동… 구리생각밖에 없어유.》 《흥… 흥… 대단한걸, 대단해-!》 대감의 얼굴빛이 별안간 사나와졌다. 류자광은 자기 판서생각은 까마득히 잊고 한명회비위를 맞추느라 승기가 나서 기염을 토했다. 《대감님, 이번에 따라갔던 종사관 말이 경상도 군영들을 순시한다는건 구실이구요. 문경쪽에 나가 실은 장영실을 찾아 헤맸다는군요.》 《장영실이?》 《그 목수쟁이 있지 않어유?》 《음… 세종임금의 가마를 허술히 만들었던 놈, 귀양을 보낸 그놈을 찾아 돌아쳤단 말이여? 엉?!》 《장영실이 그 역적놈이 동제련술에 능하다나요.》 《음…》 한명회는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한동안 무엇인가 생각했다. 그러다가 눈길을 들어 자광을 지켜보았는데 대감의 사팔뜨기 한쪽눈이 맹수의 그것처럼 살기를 띠고 번뜩이였다. 《오늘 밤 오기를 잘했다. 사실은… 여기 전하측근의 로신들은 리시애란을 평정하고 조정에 새로 오른 무관들로 해서 속을 썩여왔다. 너 혼자 알고있어라-》 《대감! 남이가 령상을 자기 집에 꾀여내서 생일잔치까지 차려준걸 아셔요?》 《정말이냐?》 《이거 어떤 일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겠나유.》 《너도 정신을 차려야 해. 병조참지, 일에만 빠져있지 말고 병조내 판서, 참판, 정랑, 참지… 모든 관리들을 여겨봐라. 기미가 이상하면 그시그시 알려야 해. 이제부터 나는 너를 응시한다! 이 밀약이 루설되면… 똑똑히 알고있어라. 목이 날아난다!》 류자광은 격정에 목이 메여 자리에서 뛰여일어났다가 한명회앞에 다시 엎어지며 큰절을 드리였다. 한명회는 얼굴이 불깃하게 상기되여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래방쪽에 대고 손벽을 치며 목청껏 웨쳤다. 《얘- 종달이- 읍별이야-》 이윽고 주안상이 들어오고 대감과 신하는 그앞에 마주앉았다. 하나같이 예쁘장한 종달이와 읍별이는 잔들에 감빛술을 찰찰 넘치게 붓고 로인과 젊은이는 붓는쪽쪽 잔을 비웠다. 류자광은 머리가 핑 돌아가고 이것이 꿈이 아닌가싶어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문에는 윤이 흐르는 비단문발이 묵직이 드리웠는데 방구석들에 세워진 금빛 찬란한 초대에서 초불이 고즈넉이 타오르고 초대다리에 매달렸던 잰내비가 쪼르르 미끄러져내려 손벽을 짝짝 쳤다. 그지없이 아늑하고 감미로운 밤이였다. 취흥에 겨워선가 방안이 서서히 돌아가는듯, 어디로인가 둥둥 떠가는듯 했다. 그날 밤 류자광이 돌아간 다음 한명회는 잠들지 못했다. 병조판서 남이가 장영실을 찾아 헤매였다는 자광의 말이 가슴을 선뜩 에이였던것이다. 장영실은 세종임금이 끌어올린 령남 동래현 기생의 아들이였는데 별감이라는 벼슬까지 주었었다. 허울은 사람이지만 신분상으로는 노비로서 사람이 아닌자였다. 그때 의정부의 정승들은 임금의 그런 처사에 깜짝 놀라 펄펄 뛰였으나 반대의사는 조심스럽게 표현했었다. 노비한테 벼슬을 주어 등용한다는것은 나라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는 처사였던것이다. 그가 만든 임금의 가마가 허물어져내린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의 등용을 반대했던 정승들이 들고일어나 중형을 들씌워 대역죄인을 령남 멀리로 류배 보냈다. 헌데 병조판서가, 나라의 병권을 쥔 고관이 그 대역죄인을 살려내자고 찾아 헤맨것은 무슨 까닭인가? 장영실이 류배지에서 도망친 후 잡혀 문경포도청에로 호송도중 안개와 회오리바람속에서 실종됐다니 어인 일인고…? 이 모든것이 남이의 작간이 아닌고…? 한명회의 생각은 끝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