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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남이가 병조판서로 부임하여 관청으로 나가는 첫아침 하늘은 씻은듯이 파랗게 개이고 해볕은 유난히도 따스했다.

그 아침 판서의 집은 명절처럼 흥성거렸다. 공덕로인은 임금이 하사한 말을 끌어내와서 다리며 발통을 씻어주고 갈기를 솔로 빗어주는가 하면 녀종들은 먼지가 일지 않도록 뜨락에 물을 뿌리고 판서가 걸어나올 대청마루에 다시 마른걸레를 놓았다.

이윽고 정선공주가 손녀 구을금의 손목을 잡고 뒤따라 나왔다.

남이는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흘깃 쳐다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뜨락복판에 서있는 말한테로 느릿느릿 걸어나가 윤이 흐르는 갈기를 쓸어만져보았다.

그때 색동저고리에 다홍꼬리치마를 받쳐입은 딸애가 아장아장 걸어나가 할머니가 시켜준대로 아빠가 뒤돌아보자 곱게 엎드려 절하였다. 방들에서 문을 방싯 열고 그 광경을 내다보는 부엌어멈이며 시녀, 녀종들이 기쁨을 금치 못해 입속말로 소곤거렸다.

《아이 고와라…!

《똑똑하지?…》

《아빠는 판서님이지…》

남이는 딸애를 번쩍 쳐들어올려 방그레 웃는 그 얼굴을 쳐다보며 호탕하게 웃는다. 그 웃음소리와 함께 뜨락에 싱그러운 선풍이 몰아치는듯 했다.

그날 아침 남이가 병조의 으리으리한 자기 방에 들어가 앉기 바쁘게 병조참판이하 관리들이 앞을 다투어 줄레줄레 들어와 새 판서의 부임을 환영하여 공손하게 혹은 젊은 판서의 금새를 가늠해보려는 눈치를 감추지 못하며 인사들을 하고 나갔다.

헌데 마지막으로 들어온 관리는 화문석돗자리우에 엎드린채 의분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판서나리, 신은 분해서 여기 못 있겠나이다. 어제그제 부임했소이다.

《…?

얼굴을 드는것을 보니 낯익은자였는데 며칠전 강순령상방에서 자기뒤에 엎드려있던 례조참의였던것이다. 그날 례조참의는 밖에까지 좇아나와 재상앞에 엎드려있지 않았다고 시비했었다. 그래서 야유하며 일축해버린 일이 생각났다. 이자가 어떻게 병조로 굴러왔는가?

그 작자는 해말쑥하고 강마른 얼굴에 몇오리 안되는 수염발이 조개턱밑에 드리운 흉상인데 마치도 구면친지라도 만난듯이 스스럼없이 굴면서 신임판서를 반기였다.

《어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지요. 히여- 얼마나 좋은지. 헤헤…》

《아니, 례조에 있지 않았던가요?

《그렇지요.

《어떻게 여기 병조에…?

《팔자사나운 놈이야 할수 없지유. 휴- 례조판서하고 의가 틀려 예로 쫓겨왔지요.

《아니, 무슨 일로?

《삼우제와 졸곡때문이였지요.

그는 이마에 퍼런 피대를 세우고 악에 받쳐 씹어뱉았다.

《례조판서라는 작자가 글쎄 장례를 지내고나서 치르는 삼우제와 졸곡제사날자를 절반으로 뭉턱뭉턱 잘라버리자고 했소이다. 농번기에 초상난 집들에서 석달이상이나 그 제사를 지내고나면 농사를 망치고 그래서 토호들은 전세를 관가에 물지 못해 나라에 손해가 크고 그 페단이 막심하다는거죠. 소신은 조상전래로 내려오는 제례를 뭉턱 잘라버리면 절대 안된다, 그렇게 되면 나라안에 효도가 문란해지고 백성들이 조상도 몰라보는 개, 돼지 같은 중생이 돼버린다고 우겼지유. 엑- 기가 막혀서… 된다, 안된다 쟁론이 오래동안이나 계속됐지요. 그러다나니 그 작자하고 척을 지게 되고 나중에는 아주 숙적이 됐지유. 저를 병조로 내리쫓더군요.

《으흠…》

《그 작자는 나리가 병조판서로 되자 뒤에서 얼마나 흉을 봤는지 몰라요. 나이가 지내 어리다, 어떻다 하면서… 판서님, 저런 작자는 령상어른께 말씀드려 파면시켜야 하오이다. 판서님이야 왕가의 외손이 아닌가유.

남이는 수모를 당한듯 가슴이 떨려 작자를 지켜보다가 내뱉았다.

《그렇게 허지… 헌데 먼저 례조판서를 만나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그다음에 령상을 만나겠소.

고발자는 얼굴이 해쓱하니 질려 엉거주춤 일어나서 부들부들 떨며 빌붙었다.

《아니, 아니 판… 판서나리 고정하시오.

남이는 문쪽을 가리키며 웩- 하고 소리쳤다.

《꺼져, 어서 꺼져라- 나아갓.

그 작자는 바람에 날려가듯 문쪽으로 사라졌다.

남이는 그 작자가 나간 뒤에도 분노가 치밀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안을 오락가락하는데 북방의 하늘밑에 묻고온 무주고혼이나 다름없는 군사들의 무덤들이 눈에 선히 떠올랐다. 군사들은 나라를 지켜 목숨을 바쳤는데 예서는 저런 공리공담으로 세월을 보냈는가! 여기 병조에 저런 문관나부랭이들이 더 있지 않을가…?

그날 남이는 병조참판을 불러 병조의 관리들에 대하여 대충 알아보았는데 놀랍게도 주요직책에 있는 관리들 태반이 무관이 아니라 문관들이였다. 기막히고 어처구니 없어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는 리조와 좌의정을 통하여 병조안의 관료들의 배치정형과 관직제도, 그 권능을 자세히 료해하였다.

우선 80여개 중앙관청중에 6개만이 무관의 서반관청이고 나머지 74개는 모두 문관의 동반관청이였다.

남이는 문무관청의 수자상 비례만 보고도 나라의 통치기구가 완전히 문관관청에 치중하여 꾸려졌음을 알수 있었다.

그뿐아니라 무관의 최고관청인 중추부의 판사, 지사, 동지사, 첨지사 등 당상관벼슬들은 모두 몸집이 부하고 얼굴이 희멀쑥한 문관나리들이 차지하고있었으며 무관들을 이끄는 군사행정기관인 병조의 고위관리들도 문관들로 꾸려져있었다. 무관들은 군사지휘계통과 군사행정계통의 고위관리로 임명될수 없게 제도화되여있었던것이다.

하루는 새 령의정 강순이 6조의 관청들을 돌아보다가 병조에도 들리였는데 남이는 그의 얼굴인상이 이 며칠사이 희한하게 달라진데 저으기 놀랐다. 로장의 서리내린 숱진 눈섭밑에 번쩍이는 눈매는 천하를 굽어보는듯 하고 체소하나 박달처럼 단단한 몸집은 담대하고 호탕한 기개에 차넘치는듯 했다.

강순은 자기를 맞은 남이의 얼굴에 그늘이 짙게 비낀것을 보고 병조에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물었다.

남이는 얼굴색이 더 어둑하게 질리며 령상을 자기 방으로 안내하였다.

강순이 자리에 앉자 남이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령상나리, 이런 병제를 가지고는 전쟁을 할수 없나이다.

《엉? 그건 무슨 소린고…?

《여긴 병조인지 문조인지… 문조인지 병조인지 알수 없소이다.

《뭐-? 문조라고…?!

《그렇소이다. 명색은 병조인데 문관들이 주요한 직책은 다 차지하고있습니다. 무관들을 이끄는 병조의 고위관리들도 다 문관들로 꾸려져있소이다. 병조판서라는 저를 내놓고는 죄다…》

《흠- 답답한 일이네!

《령상나리, 보시오이다. 이 내막을 자상히 알아보니 무관들은 군사지휘계통과 군사행정계통의 고위관리로 앉힐수 없게… 그렇게 아주 제도화되여있소이다.

강순은 취기라도 오르는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무릎에 올려놓은 주먹이 알릴듯말듯 떨었다.

《어- 어험!

《이러니 병조에서도 문관나리들이 머리를 쳐들고 주인행세를 하지요. 령상나리, 좀 생각해보사이다. 군사를 모르는 그런 나리들이 어떻게 군사를 이끌며 전쟁을 하나이까? 뜯어고쳐야 하나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오이다.

《어- 이전의 병조판서들은 어이하여 이런 병제를 수용했을고? 그이들도 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였겠는데… 아닌보살하고있었는고?!

《령상, 병제개혁을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있다가 외적이 대무력으로 침공해들어오면 나라가 망합니다. 아주 망하오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 문관들이 어떻게 나오든 상관말고 단호히 개혁해야 합니다.

《…》

강순은 시름겨운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말이 없었다.

《문관을 존대하고 무관을 비하하는건 고려때부터 내려오는 유습이오이다. 아니, 이 나라 체질이오이다.

《장군, 자중하오. 수수백년동안이나 굳어지고 다져진 병제를 하루아침에 뜯어고칠수야 없지. 또 그런 개혁을 다 쌍수를 들어 찬동하겠는가도 생각해볼 일이요. 우선 병조안에 들어와있는 문관출신들이 결사반대할거란 말이요. 병제개혁은 시간이 오래 걸려야 성사될수 있소. 무슨 수로 력대 임금들이 만들어놓은 병제를 하루아침에 뜯어고친단 말인고?

《…?

《속담에도 있지 않나. 아무리 급해도 우물을 꺼꾸로 쳐들고 물을 마실수는 없거든. 한바가지씩 퍼올려 마셔야 하네… 상감에게 상주하거나 여하튼 내가 알았으니 경은 잠자코 있어주게.

그리고 령상은 젊은 병조판서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나는 오늘 판서하고 국방책을 시급히 의논하고싶어 들렸소.

그리고 령상은 왜구들이 곧 우리 나라에 쳐들어올것 같다고 했다.

《조선군대의 쯔시마정벌후 왜놈들은 복수심에 이를 갈며 칼을 갈아왔소. 이번에 저놈들이 침략해온다면 기필코 대무력으로 해안에 상륙할것 같아. 어제 서울에 올라온 경상도 관찰사는 지금 왜나라쪽으로부터 울릉도, 포항, 부산쪽으로 도끼밥들이 파도에 실려 자주 밀려온다고 하네. 저놈들이 큰 배들을 뭇는게 분명하이.

남이는 가슴이 철렁했다.

《녜?!

《그 관찰사 말이 요새 부산바다가에 사는 왜인거류민들이 수상쩍다네. 왜인잡화상들이 희한한 물건짝들을 조선군대 군영가까이에 가지고와 팔면서 돌아치는데 렴탐군들이 아닌지 모르겠다는거네. 방비책을 빨리 세워야 하네. 높은 산봉우리들의 봉화대에도 알리고…》

령상이 떠나간 다음 남이는 진정을 못하고 방안에서 서성거렸다. 그는 생각했다.… 지금은 병제개혁을 운운할 때가 아니다, 아니다.

남이는 낮에는 물론 야밤이경이나 삼경까지 모대기며 번민하였다. 만약 왜구의 침공과 때를 같이하여 나라안에서 또다시 그 어떤 란이 터진다면 과연 사태가 어떻게 번져질것인가…

신임병조판서의 생각은 끝이 없었다.

… 지금은 우선 중앙군과 함께 지방군영들을 착실히 꾸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수한 병쟁기들을 더 많이 만들어 요충지들에 먼저 배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현듯 녀진정벌과정이 떠오르고 무시무시한 불소나기를 토해내던 화포사격의 장쾌한 전경이 눈앞에 보이는듯 했다. 그 화포들을 바다기슭에 끌어내여 불벼락을 들씌운다면… 산성에 의거하고있던 야인들도 혼비백산이 됐는데 바다우에 떠있는 왜구들이야…

남이는 병조에 제일 오래 있었다는 늙은 병조정랑을 불러 여기에 화포기술에 대한 고문서들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 정랑은 고려의 충신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옹이 생존당시에는 그런 고서들이 굴러다니는것을 더러 구경했는데 요즘은 어디에 묻혀있는지 종적을 바이 알길이 없노라고 했다.

남이는 그한테 그것들을 이틀사이에 꼭 찾아내라고 으르다싶이 요구했다.

하루 반이 지나 그 늙은 병조정랑이 숨이 턱에 닿아 찾아 들어와 두권의 고서를 바쳤다. 누런 책표지에 덮인 먼지를 불어버리고 표제를 읽어보니 최무선의 저술 《화약수련법》과 《화포법》이였다.

남이는 그 책갈피를 하나하나 번지며 선각자의 저술들을 읽었다.

 

 2

 

화포대장 곽주호의 집은 화포대군영 길건너편 밭가운데 있었다.

울바자를 둘러친 낡은 기와집이였다.

뒤울안에는 돼지우리도 있고 앞뜨락에서는 송아지만 한 누런 개가 오락가락하고있었다.

그날 아침 주호는 간밤에 마신 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아 군영에 나갈 시간이 지났는데도 코를 드렁드렁 골며 늦잠을 자고있었다. 함길도 농부의 딸인 마음씨 드세면서도 약삭바른데가 있는 그의 안해가 밖에 나가 돼지여물이며 개죽을 두번째로 주고 들어왔으나 화포대장은 그냥 태평스럽게 코를 골고있었다. 안해는 그런 꼴이 보기 싫고 괘씸도 해서 우야 문을 쾅쾅 여닫으며 드나들어도 코소리만 좀 잠잠해질뿐 그냥 잠을 깨지 못한다.

그 아낙네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더럭 겁이 들어 고주망태가 된 남편의 얼굴을 지켜보다가 한숨을 내쉬였다. 그리고는 군영으로 달려가 파수장한테 집어른이 고뿔이 와서 누웠노라고 그럴듯하게 꾸며대였다.

아낙네가 집에 돌아오니 랑군이 웬일인지 상심한 얼굴로 일어나 앉아있었다. 어디 편치 못한가고 물으니 한숨만 후 내쉬였다.

《에그- 속상해라. 왜 그러오?

《이상한 꿈을 꾸었소.

《꿈이요?

《내 꿈은 대개 맞소. 우리 판서님이 재취해서 후실을 맞아들인다지 않소.

《에그, 그럼 잘됐구만. 그 남복을 했던 아씨하구 혼사말이 있은게지?

《당신이 어떻게 아우?

《작년 가을에 달래 캐러 나갔다가 봤지비!

《뭐라구?

《놀라긴 왜 그렇게 놀라우?

그리고는 그날 어떤 고관네 집 아씨하고 같이 어울려 달래를 캐는데 그옆으로 두분이 말을 타고 지나갔노라고 했다.

《고관네 아씨가 귀띔해주지 않겠소. 이쪽은 남이장수고 저쪽은 경신인가 경진인가 하는 아씨라구. 말을 달리는걸 눈이 퀭해서 봤는데 에그- 희한하기란 쯧쯧… 한번 저래봤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니까. 흐흐.

곽주호는 눈을 흡뜨고 안해를 지켜보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이것아, 그게 그렇게 부럽던가? 사내다운 나한테 시집왔으면 됐지!

곽주호는 사실 마음속으로 남이와 경신의 혼인을 이전부터 썩 달가와하지 않았었다. 세상에서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 남자와 녀자는 일곱살만 되면 자리를 같이할수 없다고 이르는데 백주에 남복차림으로 사나이와 함께 말을 타고 돌아치는 허파에 바람이 든 저런 계집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가 어쩌자고 저러는가싶어서였다. 주호는 남이가 장군만 아니여도 찾아가서 년장자로서 권유하고싶었다. 허나 자기와 같은 화포대장이 이런 인륜대사에 끼운다는것은 너무 무엄하고 주제넘은짓인것 같아 가슴을 앓으면서도 침묵을 지켰다. 잘못 간참했다가는 남이의 그 성미로 보아 분노를 살수도 있는 일이였다.

그는 평소에 사람이 너무 제노라고 발호하면 남들과 척을 진다고 생각해왔었다. 남이가 발호하는 성미인데다가 저 랑자 역시 규방의 아씨답게 안온하고 유한 성정이 못되니 장차 어떤 화단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안해는 남정의 기분에는 아랑곳없이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 그 이튿날에는 또 그 자리에서 아씨까지 만나 말도 해봤소다. 우리 집이… 군영장의 집이 어떤가 와보고싶다지 않겠소. 에그, 창피해라. 이런 루추한 집을 어떻게 그런 아씨한테 보이겠수.

《…》

《여보, 판서나리가 장가든다는데 당신은 왜 그리 심란해졌소. 꿈까지 꾸고… 하긴 공조판서로 있었겠다, 그새 꽃같은 아씨들이 줄을 서서 청혼을 기다렸겠는데 다른 아씨와도 어쨌는지 알우?

《남판서는 그런이가 아니여.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잘 아오? , 형제간이라도 되는것처럼…》

《그이상이야!

그날 아침 안해가 차려들여온 밥상을 받는데 밖에서 다급한 발자욱소리가 울리고 숨이 턱에 닿아 주인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주호는 불길한 예감에 문을 차고 뛰여나갔다.

얼굴이 해쓱해진 파수장이 새 병조판서가 내려와 화포들을 아무렇게나 구겨박아놓았다고 대노했다고 휘파람같은 소리로 귀띔했다.

주호가 정신없이 군영안으로 달려들어갔을 때 병조판서는 뜨락복판에 버티고 서서 불이 이는듯 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는데 눈결에 뜨락 여기저기며 집모퉁이에 구겨박은 화포들에 덮었던 거적때기들을 내던져진것이 언듯언듯 띄였다.

남이는 그가 전혀 생소한 무관인듯 왈칵 어성을 높였다.

《뭐 고뿔이라구?! 태평세월도 아닌데 이런 때 집에 나자빠져있어 엉?! 화포들은 흙먼지투성이고 녹이 쓸었는데!!

장군의 성미를 잘 아는 주호는 고개를 떨구고 부들부들 떨다가 속이 후련하도록 화풀이를 하라고 웃도리를 와락와락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울음섞인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나리, 죽을 죄를… 이놈을 쳐주사이다.

그러자 남이는 발을 탕 구르며 《헝, 이건 또 웬 노죽이냐? 그런 얼림수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이눔, 옷을 입엇!》 하고 소리쳤다.

주호는 울먹이며 옷을 주섬주섬 주어입었으며 남이는 엄한 소리로 오금을 박았다.

《오늘 낮과 밤중으로 화포들을 깨끗이 닦아놓앗! 윤이 알른알른하게! 래일 화포를 쏴보고 잘 맞히면 용서하고 아니면 곤장맛을 볼줄 알아라!

그리고는 말에 올랐다. 따라왔던 종사관과 군관들이 우르르 그의 뒤를 따라갔다.

 

×

 

그 다음날 오후 남이는 병조참지로 된 류자광을 화포대에 내려보내여 화포들의 정비상태를 알아보게 했다.

자광은 화포대에서 돌아와 희색이 만면하여 보고하였다. 그 대장녀석이 얼마나 혼찌검이 났는지 화포들을 말끔히 닦아서 칠덕정훈련장에 줄세워놓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병조판서나리 한마디 불호령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밤새 모든걸 일신했소이다. 군사들로부터 화포들이랑…》

남이는 곧 칠덕정훈련장으로 나갔다.

병조판서의 군마가 위엄스럽게 훈련장으로 들어서자 모여앉아 쉬고있던 군졸들이 혼비백산하여 화포들앞에 정렬하고 대장이 마주 달려나와 땅바닥에 엎드리며 절하였다.

남이는 그 아첨기가 언짢았으나 내색을 않고 대장앞을 지나 관복자락을 펄럭이며 화포들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류참지의 말대로 화포들은 윤이 흐르게 닦아졌고 눈결에 보니 대장의 텁석부리 수염도 밤새 방정하게 다스려진것 같았다.

남이는 대장에게 이제 당장 시험사격을 할수 있느냐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판서나으리, 할수 있나이다.

《좋아, 어디 보자!

사격이 시작되자 불화살들이 휙- 휙- 울부짖으며 날아가기 시작했는데 그 락하거리는 일정하지 않았다. 긴것도 있고 짧은것도 있었다.

남이는 흥분하여 사격하는 화포들 뒤로 왔다갔다하며 목청껏 소리쳤다.

《쏘아라- 쏘-아라- 쏘-아-라-》

불화살들은 계속 날아가고 남이는 근엄한 얼굴로 버티고 서서 날아가던 화살들이 땅에 박히는것을 바라보고있었다. 어떤것은 멀리로 날아가 떨어졌으나 태반의것들은 그 절반거리도 겨우 날아가 맥없이 떨어졌다.

남이는 허리에 올린 주먹을 올렸다내렸다하며 사나운 얼굴로 그쪽을 바라보고 화포대장 곽주호는 얼굴빛이 거멓게 죽어 판서의 눈치만 살폈다.

《어째서 올라산성싸움때보다 못해졌는가?》 하고 남이가 주호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거칠게 물었다.

《…!》 주호는 겁에 질려 대답도 못했다.

헌데 그때 기괴한 일이 생겼다. 어디서 달려들었는지 재빛 야생들개 십여마리가 불화살들이 날아오는 이쪽을 향해 주둥이를 쳐들고 숨이 넘어가는 소리로 짖어댔다. 그것들은 이쪽을 무슨 적수나 도적떼로 아는듯 했다. 들개들은 화살이 떨어진데로 달려가 무섭게 으르릉대며 땅에 박힌 화살들을 물어메치고 짓밟으며 돌아치는가 하면 어떤 놈은 가로물고 멀리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런판에 다른 재화가 또 생겨 주호대장과 류참지가 정신없이 오른쪽으로 뛰여갔다. 그쪽 방향 세개의 화포가 황갈색 연기에 휩싸였다. 사격이 중지되고 여러명의 군졸들이 왁작 떠들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남이도 화가 꼭두까지 치밀어 그들의 뒤를 따랐다.

황갈색연기에 휩싸인 화포들, 그 화포들의 앞뒤구멍에서 날름거리는 시뻘건 불길, 바람결에 흩날리는 매캐한 연기… 날랜 군졸들이 근처의 우물에서 물을 퍼다가 화포들에 휘뿌리니 불길은 인차 꺼졌다.

류자광이 벅적 떠들어대는 군졸들을 물러가게 하자 남이가 주호에게 물었다.

《화포대장, 어찌된 일이냐? 화살들은 올라산성때보다 멀리 날아가지 못해, 화포에는 불까지 달려 왜 이렇게 됐느냐?! 개들까지 조롱해…!

곽주호는 불에 덴 손을 싸쥐고 고개를 수굿하고있다가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얼버무렸다.

《저… 판서나리, 저는 화포대장재목이… 못되오이다…》

《뭐라구?!》 남이는 성이 독같이 나서 꽥 소리쳤다.

《재목이냐 재목이 아니냐 그게 아니다!

《…》

《저 올라산성에서는 한몫 하지 않았는가. 싸움이 끝나니 태평세월이 왔다고 생각했어?!

《판서나리, 그것도 그렇지만 저는 사실 재목이 못되오이다.

《재목타령은 그만햇!

최해산옹때만 해도 화포화살이 이삼백보… 아니 오륙백보는 나갔다는데 지금은 백보도 안되니 어인 일이냐?

화포대장이 화살이 멀리 나가는것은 전적으로 화약에 달렸다고 했다.

《화약을 다룰줄 몰라 누기가 드는 바람에 화살이 제대로 나가지 못하오이다. 특히 지난 장마철에 잘 간수하지 못해…》

《음, 화포에 불이 달리는건 무슨 까닭인고…?

《거야 뻔한 리치지요. 불화살이 나가면서 화포속이 화끈 달아올라 불이 일었소이다.

《그럼 그걸 막는 수는 없는가?

《대안에 구리판대기를 말아넣어 안을 대면 아무리 쏴도 일없소이다.

《그럼 그렇게 할것이지 왜 여태 가만히 있었나 엉?

《판서나으리, 구리가 어디 있어야지유.

《음… 그렇다…?

남이는 한숨이 나갔다.

《이봐, 그래 불이 나는줄 알면서도 속수무책이였는가?

《아니오이다. 부러진 수저, 놋바리따위들을 녹여서 구리판을 만들어 써봤지만 그걸루 되는가유? 화포들이 얼마나 늘어났는데요…》

이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소리였다.

새 병조판서는 올라산성싸움때 불화살이 멀리 가지 않아 애먹었던 일이 생각났다. 불화살이 멀리로 날아가게 하자면 그 꼬리에 화약을 더 많이 장진해야 하였고 화약을 많이 장진하자면 그안에 구리토시를 말아넣어야 했다.

그날 칠덕정을 떠난 남이는 류자광이를 뒤에 달고 그길로 공조에 찾아들어갔다. 그가 만난 공조정랑은 나라에서 생산되는 얼마 안되는 동도 서울량반들의 사치한 생활을 꾸리는데 죄다 써버린다고 개탄하였다.

그 공조정랑(공조의 정5품벼슬아치)은 의분에 얼굴이 벌개졌다.

《나라에 동자원이 없으면 하다못해 다른 나라에서라도 들여와야 할텐데 허참… 비단이나 홍보석, 록보석따위나 교역하지요. 요새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량반들은 한성이나 개경장사치들을 수행원으로 가장시켜 끼고 가서는 별의별 희한한 사치품들을 잔뜩 사들여 팔아서 벼락부자가 되지요.

그리고는 나라에서 이렇게 사무역으로 횡재를 하는자들을 엄하게 단속하면서 공무역을 장려하여 동을 사들여야 할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놈팽이들은 그런다치고 공조에서는 무슨 마련이 없소?

《동을 녹여내자면 도미니인지 도가니인지 하는 돌가마를 높이 쌓아야 하는데 우리 사람들 재간으로는 안되오이다.

《음…》

《우리 재간으로 안되면 조정에서 그런 나라들에 두세사람 류학시키면 그 재주를 전수해올수 있을텐데… 헌데 판서나으리, 여태 명나라에 유교의 주자성리학때문에 숱한 인재들이 갔다왔지만 실학때문에 갔다온건 개국이래 한사람밖에 없다 하오이다.

《이 사람, 내 공조판서한테도 건의하겠네만 무슨 수로나 우리도 동을 다량 녹여내야 할가보네. 동이 없어 화포를 제대로 쏘지 못하네. 국방이 미흡하면 국운이 위태롭네.

그때 곁에 앉았던 류자광이 비양조로 한마디 던졌다.

《판서나리, , 이젠 공조까지 다시 타고앉으시려우?

남이는 일이 안되여 속이 상한 때에 그런 이죽거리는 소리까지 듣게 되자 얼굴빛이 해쓱하게 질리고 피가 곤두섰다. 그러나 다른 관아에 와서 자기 신하를 닦아세울수 없어 꾹 참았다.

사람좋은 공조정랑이 판서의 심경을 인차 가늠하고는 류자광에게 힐난의 눈길을 던졌다가 남이를 돌아보며 공손하게 말했다.

《남판서나리, 감사하오이다. 그러지 않아도 우리는 병조의 도움을 받자던 참이오이다…》

그리고는 병조와 공조가 힘을 합쳐 어서 돌가마를 세워보자고 말했다.

남이는 정랑의 그 말에 속이 후련하게 내려가 공조에서 나와 말에 올라서도 뒤따라 말에 오른 자광에게 꾸짖는 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밤에 집에 돌아와서는 류자광을 두고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였다. 그가 자기한테 속이 뒤틀려졌거나 그 무슨 앙심이라도 품은 놈팽이가 아닌가싶었다.

(여태 나는 임자한테 왼심을 써왔어. 그래서 리시애란때도, 야인정벌때도 공을 세우라고 싸움판에 데리고 다녔다. … 한데 갑자기 방자스러워지니 웬일이냐?)

아무리 생각해도 그 까닭을 알수 없었다. 나중에는 그가 한번 롱질한걸 가지고 너무 심하게 생각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되였다.

 

×

 

그밤에 류자광도 자지 않았다.

그는 방안에서 누웠다 일어났다 또 누웠다 일어났다 하면서 진정을 못하고 서성거리다가 밤이 깊어 자리에 까딱 움직이지 않고 앉아 방구석의 초대에서 타오르는 발기우리한 초불만 빤히 지켜보았다. 이따금 바르르 떠는 초불밑 초대에서 초물이 흘러내렸는데 그것이 웬 일인지 피눈물처럼 보였다.

… 자광은 병조참지벼슬자리에 오른 날에는 천하를 얻은듯 붕 떠서 돌아갔었다. 그것도 그럴것이 한낱 군졸이나 다름없는 갑사로 있다가 여러 품계를 뛰여넘어 서반무관의 중앙관청참지로 되였으니 그럴만도 하였다. 허나 강순이 령의정벼슬자리에 오르고 남이가 공조판서에서 병조판서자리로 옮겨 앉아 나라의 병권을 잡게 되자 저도 모르게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하였다. 어찌 보면 모든 벼슬자리에는 관리들을 터무니없이 유혹하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는 심술궂은 요귀가 붙어있는것 같았다.

류자광은 자연히 이렇게 생각하게 되였다.

강순이 령의정벼슬에, 남이가 병조판서벼슬에 오를수 있다면 나도 병조참판자리에는 넉근히 오를수 있지 않는가, 늙어서 귀도 멀어간다는 강순이나 남이가 도대체 나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가, 남이한테서 태종왕의 외손이라는것만 빼놓으면 순 인품으로 보나 무얼로 보나 나보다 나은 점이 도대체 무엇이며 내가 모자란 점은 무어냐. , 서자… 적자가 아닌 첩자식, 빌어먹을 서자… 이 망할 놈의 감투를 어떻게 하면 벗느냐?

여태 자광은 가슴에 황황 타오르는 시기심의 불길을 제때에 끄지 못해 때때로 남이를 얕잡아보게 되였으며 그래서 오늘 공조에 가서도 그런 심술궂은 소리가 저도 모르게 나가게 되였던것이다. 자광은 시름겨운 한숨을 내쉬였다.

(남이는 언젠가는 나한테 앙갚음을 하자고 할거다. 두고보자.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아…)

초불만 지켜보는 자광의 고동색눈에 맹금의 눈처럼 살기가 번뜩이였다.

류자광은 다음날 오후 당대의 명복(이름난 복술) 홍계관에게 찾아가 사주팔자를 보았다.

홍계관은 백발이 성성하고 이발이 다 빠져 하늘의 신선처럼 보이는 로인이였다.

명복의 집 대청마루에는 사주팔자를 보러 온 사람들 여럿이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있었다. 명복을 만나고 나오는 사람들중에는 눈물을 쥐여짜는 사람도, 희색이 만면한 아낙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과시 명복이로다. 내 손자 발이 얼마만큼 크다는것도 보지 않고 어떻게 알고… 허허…》 하고 찬탄하며 나오는 로인도 있었다. 류자광이 차례가 되여 가슴을 울렁이며 명복의 방에 들어갔을 때 로인은 윤이 흐르는 담비털자리에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명복이 누워있는 뒤벽에는 어느 화백의 명화인듯 한 대폭의 그림이 붙어있었다. 쏟아지는 폭포, 폭포곁 절벽우에 수염발을 날리며 눈을 감고 앉아있는 신선, 신선의 손에 쥐여있는 념주,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가 방안에 진감하는듯… 어떻다고 이름할수 없는 감개가 자광의 몸을 감쌌다.

로인은 허리가 아파 좀 누워있노라면서 이름과 생일을 물었다.

명복은 눈을 내리감고 끝까지 듣고나서 채머리를 떨며 신기한 예지가 빛발쳐나오는듯 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조용히 한숨을 내쉬였다.

《…보아하니 경은… 어, 경은 심려가 많은분이요!

류자광은 늙은 명복이 참지에 지나지 않은 자기를 경이라고 높이 부르는데 저으기 감동되여 몸가짐을 바로하였다.

《억울한 연고도 있고 노여운 일도 있어 노상 심기가 편안치 못하오.

그리고는 그의 응대에는 개의치 않고 옆으로 돌아앉아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입속으로 웅얼웅얼 경을 외우면서 소반우에 산가지(점을 칠 때 쓰이는 가느다란 참대개비)를 널어놓고 휘저었다.

류자광은 순간에 가슴이 옥죄여들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지… 집에 돌아와서야 확연히 생각났다.

명복은 벼락에라도 맞은듯 얼떠름해진 눈으로 자광을 지켜 보다가 황황히 일어나 그를 밖으로 떠밀어냈다. 그리고는 안으로 쇠를 절커덕 걸고 밖에 대고 나직이 일렀다.

《물러가! 썩 물러가! 내앞에 다시는 오지 말어!

류자광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가 잘못한 일이 없는듯 한데 도대체 왜 그러는지 영문을 알수 없었다.

저녁녘과 밤, 새벽과 아침에 다시, 또다시 찾아갔으나 문은 굳게 닫겨 열려지지 않았다. 생각하다못해 집에 깊이 간수해두었던 호피를 싸안고 다시 찾아가 대문을 두드렸다. 신기하게도 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명복로인은 아무 소리도 없이 그를 대청마루 안쪽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광이 자리에 앉자마자 호피를 내놓으니 로인은 그것을 밀어버리고는 밀담이라도 하려는듯 목소리를 죽여가며 물었다.

《경은 이날이때까지 뉘한테 관상을 보인적이 있나유?

그 물음에 자광은 느닷없이 더럭 겁이 나고 이마에 식은땀이 내배는듯 했다. 그는 지난날 관상을 보인적이 한두번이 아니였으나 절대 없노라고 거짓을 꾸며대게 되였다.

《요새는 관상을 본다고 돌아치는 작자들이 많은 모양인데 잡것들한테 존귀하신 화상을 함부로 내맡겨서는 안되오이다.

《명복나리, 스승이 보기에 소인의 관상에 무슨 흉조라도…?

《휴- 글쎄…》

《깨우쳐주시면 세월이 흐르고 신수가 어떻게 달라져도 그  은공 잊지 않겠소이다.

그러자 복술은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고 눈을 감더니 웃몸을 좌우로 약간씩 흔들며 도교나 불교의 경전을 내리엮듯이 노래조로 은근하게 웅얼거리였다.

그는 자신의 육신과 혼백이 그지없이 편안해지며 신비의 세상으로 이끌려가는듯 했다.

《… 음… 흠- 천하 중생들 관상은 머리하고도 이마로부터 본다더라… 어떤 량반이나 성현들 이마에도 가는 주름살 셋이 지나갔거늘… 제일 우의것은 천문이요, 가운데것은 인문이라 음… 흠… 그밑은 지문인데… 아뿔싸, 하- 이런 변이라고야. 지문과 천문은 좋은데 인문중간이 잘리웠으니 큰 야단이고나…》

《아니 뭐라구요?》 숨을 죽이고 듣고있던 자광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이런 소리가 튀여나왔다.

《인문중간이 끊기웠소이다.

《그건 무슨 상인가유. ?

《나리, 락망하지 마시오이다.

《녜?!

《이 세상에 태여나서나 한생에 언젠가는 한번 크게 랑패를 보고 무서운 고행을 겪겠소이다!

류자광은 얼굴빛이 해쓱하게 질리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인은 지금도 고행을 겪는데 이제 또 고행이란 웬 말인가유.

《아-니, 지금도 고행이라니…?

《신은 적자가 아니라 서자로 태여나서 벼슬길도 막힌… 아주 막힌…》

그러자 복술은 대노하여 방바닥을 내리쳤다.

《엑- 고현놈, 그 소리를 왜 이제야 하는고? 내가 명복인가 아닌가 떠보는 수작이지?

《아니 제발 아니오이다. 서자라는 소리 죽기보다 더 싫어…》 그리고 자광은 두손으로 상투머리를 싸쥐며 끅끅 흐느껴울었다.

《허- 이 사람, 눈물을 걷게. 내 그럼 터놓고 말하지. 임자는 머리가 큰편이고 더우기 그 귀가 처지지 않고 웃쪽으로 뻗쳤으니 운세가 도도하야 인생사나 정사에서도 대성할 상이로다. 신라때 어느 왕도 귀가 말귀처럼 생겼다는 옛얘기도 있는데 똑똑히 들어. 그 귀 도도한 운세를 보면 서자고 뭐고 다 물리치고 천하를 다스릴 상이라…》

그리고 명복은 갑자기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고 귀안에 더운 입김을 불어넣으며 수군거렸다.

《재상이나 혹은 군주로…》

《녜-?!

《쉿, 소리치지 말엇. 왕실이 알면 그날로 사약이 내려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그리고 명복로인은 진실이든 아니든 나는 이렇게 말했고 그대는 들었으니 우리는 공범자로 되였노라고 했다.

《나는 첫날에 벌써 경의 상을 보고 다 알아봤소이다. 그때는 무서워 물리쳤으니 노엽게 생각마시오이다.

명복 홍계관은 무거운 모두숨을 후 내쉬였다.

《이제 그대앞에 귀인이 나타나니 시키는대로 하면 되오이다.

《그게 뉘신지요?

《그건 모르오이다. 조만간에 동남쪽에서…》

《아…!!

그날 류자광은 명복의 분부로 한식경이나 대폭그림 《폭포수와 신선》밑에 누워있다가 복술의 집을 나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발이 나가는대로 활개를 훨훨 저으며 걸어갔다.

거리의 행인들중에 자기를 지켜보는자가 없는것은 참으로 다행이였다. 머리가 터져나가는듯 하고 가슴이 벅차오르며 하늘이 돌아가는것 같았다.

배속으로부터 나는 이제 천하를 다스리게 된다 하는 환성이 터져나오려고 했으나 삼켜버리려고 안깐힘을 썼다. 얼마후 자기가 집쪽과 반대방향인 동대문앞에 와있다는것을 느낀 순간 모진 현훈증과 함께 먹은것을 왈칵 토해버렸으며 오한이 나서 오슬오슬 추워나기 시작했다.

그는 저녁녘에야 집까지 간신히 찾아왔다.

 

3

 

한편 남이는 화포대의 군영을 두세번 다시 찾아보았고 제물포와 수원, 공주의 군영들도 돌아보았다.

그 어느곳에 가봐도 군사들의 훈련형편과 생활처지는 어슷비슷했다. 군졸들한테 활을 쏘아보이니 과녁을 맞히는자가 거의 없었다. 활쏘기훈련이란것은 한달에 한두번 하면 고작이였다. 태평세월이 왔다고 보는지 어느 군영의 대장들이나 앞으로 큰 싸움이 있을수 있다고 생각하는자 별로 없었다. 게다가 흉년이 들어 군사들은 먹고 살아나갈 걱정뿐이였다. 그리고 부병제라는것이 실시되여 군졸들은 근처의 자기 집에 가서 제가 먹을 쌀을 등짐으로 지여오는 형편이였다. 군졸들은 모두 군량이 떨어지면 자기 집들로 뿔뿔이 흩어져가서 며칠 묵으면서 농사일도 돕고 낟알도 털어오군 하였다. 어느 군영에서나 사냥질이 성해져서 노루와 사슴, 메돼지사냥에 정신들이 팔려있었다.

남이는 속이 뒤집혀져 견딜수 없어 지방군영의 우두머리들한테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정 화가 나면 채찍을 들기도 하고 포도청에 처넣는다고 위혁도 했다.

고을들의 군영을 돌아보고 한성으로 올라온 남이는 여러모로 궁리하다가 강순령의정한테 하정을 토설하고 의논해보자고 마음먹었는데 령상이 자리를 뜨고 없었다.

한때 령의정으로 있던 한명회한테 병문안드리러 갔다는것이였다.

한데 일이 잘되자고 그런지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뜻밖의 소식을 알렸다.

《오늘 행랑거리에 나갔다가 령상 로부인을 만났소. 너무 속상해해서 위로는 했지만…》

《무슨 일인데요?…》 하고 남이는 의아해서 물었다.

《아니, 글쎄 래일모레가 령상어른의 생신날인데…》

《아 참, 그렇지!

《한데 글쎄 령상어른이 고집해서 쇠지 못한대요.

《아니 왜…?

《거기선 모르는가?

《몰라요.

《령상어른 생신날이 선친 제사날하고 겹쳐있다오. 그래서 여태 제사만 지내고 생일은 쇤 일이 없다오.

《허-》

《부친님에 대한 령상어른의 효성이 어찌나 지극한지 이번에도 제사만 지내고 생일은 못 쇤다고 고집을 부린다지 않소. 막무가내라오.

《어머니, 령상이 그런 효자인줄 몰랐어요.

그리고 남이는 이러한 때 령상을 어떻게 도울수 없겠는가 하고 잠시 생각했다.

그 제사를 지낸 다음 로장을 집에 모셔다 환대하고 그 기회에 나라의 방비를 터놓고 의논하는것이 좋을것 같았다.

《어머니, 령상이 제사를 지낸 다음날 우리 집에 청해다가 생일잔치상을 차려 잘 대접하면 어떨가요?

《글쎄 … 좋기는 하다만…》

《저도 령상하고 조용히 의논할 일도 있고… 또 도움을 받아야 할 일도 있소이다.

어머니는 쾌히 응해나섰다.

 

×

 

그날은 마침 쉬는 날이였다.

남이는 어제 아이적 송아지친구였던 문효량과 전장의 고우 류자광에게도 조용히 알리고 탁문아를 통하여 서너명의 예기들도 청해 즐거운 좌석의 흥취를 돋구도록 만단의 차비를 하였다.

령상을 모시게 될 그날 아침부터 대궐같은 남이의 집은 잔치상차리기에 분주하여 전에없이 흥성거리였다.

어떻게 알고 례조에서 보낸 경회루의 료리인은 사슴고기를 탕치느라고 칼도마소리를 높이 울리고 부엌어멈은 꿩고기를 볶느라고 작은 솥앞에 구부정하고 서서 주걱을 휘젓는가 하면 벌써 명절옷차림으로 말쑥하게 차린 시녀들과 녀종들은 허연 김이 문문 날아오르는 부엌문으로 들락날락하며 대청마루방에 상을 차리기에 바빴다. 웃음소리, 흥얼흥얼 노래소리, 접시를 깬다고 가볍게 꾸짖는 소리…

남이의 어머니 정선공주도 비단치마자락을 끌며 대청마루도 돌아보고 정원이며 방들도 돌아보면서 미흡한 점이 없나 하고 눈을 밝혔다.

그날 여기에 류자광과 문효량이 나타났다. 자광이 시녀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돌아갔으나 모두 흔연하게 여겼다. 그것은 자광이 이전부터 이 집에 자주 드나들었으며 대사집에 가까운 이웃이 찾아와 돕는것은 례사로운 일이였기때문이다.

그러나 문효량은 모두의 주의를 끌었다. 훤칠한 키에 호감을 주는 얼굴, 남아다운 구성진 목소리 그리고 오래간만에 찾아왔기때문이였다.

정선공주는 효량을 반겨맞으며 짐짓 노여운듯 눈까지 흘기면서 우리를 아주 잊었는가 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마님, 용서하세요. 일이 너무 바빠서…》

《좌우간 반갑네!

그때 자광이 끼여들어 과방을 어느 방에 정했느냐고 물었다.

정선공주는 얼떠름해져 큰 잔치도 아닌데 과방까지야… 하고 얼버무렸다.

《마님, 령상을 모시는데 큰 잔치가 아니라니요?

《오, 그렇지. 내 이 정신 봐라…!

《마님도 참… 나라의 병조판서어른이 령상을 위해 차리는 연회인데 과방도 없이 그렇게 허술히요?

《아유- 자네가 안 왔으면 어찔번 했나!》 하고 정선공주는 혀를 차며 그의 팔굽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리고는 대청마루 안방쪽으로 가서 방문을 열어보이며 이 방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자광은 대단히 좋다고 하며 팔소매를 걷어붙이면서 내 오늘은 과방도감이다 하고 제법 큰소리까지 쳤다.

집안은 흥성거렸다.

점심전에 집에 와본 남이는 어머니한테서 효량과 자광이 말을 듣고는 저으기 감동되였다.

점심때 남이가 령상을 모셔왔다.

남이를 따라 대청마루에 올라선 강순은 큰상에 차려진 산해진미의 료리들이며 신선미 풍기는 과실들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로장은 저으기 놀라 질책하는듯 한 눈길로 남이를 돌아봤으나 코수염밑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아-니 판서, 이 무슨짓이요?

《령상나리, 용서하시오이다. 그 효성에 감동되여 저의 어머님이 조촐한 상을 차렸소이다.

아릿다운 예기들이 주빈과 주인을 얼싸안아들이듯 잔치상자리들에 모시자 정선공주도 손녀의 손을 잡고 아들곁에 자리를 잡았다.

옥저와 가야금, 장고의 가락이 흥취를 돋구는 가운데 자주빛저고리에 람색꼬리치마를 허리에 두른 꽃다운 예기 셋이 령상과 판서, 정선공주에게 절을 하고 금술을 각각 잔에 따랐다. 그렇게 한잔 또 한잔 술을 드는 사이에 어느덧 좌석에는 취흥이 도는데 정선공주의 손길에 이끌려 손녀가 술잔을 들고 령상앞으로 다가갔다. 구을금이는 강순에게 술잔을 드리고는 귀염성스럽게 엎드려 절을 하였다.

강순은 너무 기쁘고 대견하여 희슥희슥한 턱수염을 쓸어내리고는 그 술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 그리고는 구을금의 머리를 쓸어주며 너 몇살이냐고 물었다.

《여섯살이예요.

《너 내 누군지 알겠느냐?

《령상할배…》

구을금이는 야무진 목소리로 대답하고 강순은 무릎을 치며 《과시 신동이로다.》 하고 환성을 터치는데 방안에는 찬탄의 소리, 웃음소리가 넘치였다.

그때 문효량이 움쭉 일어나 강순에게 절을 하고는 술을 부었다.

강순은 그 술을 한모금 마시고는 그를 빤히 지켜보았다.

《임자는 뉘시던가?

《령상나리, 사복시에 새로 들어온 문효량입니다.

《어- 알만 하이, 내 리조판서한테서 들었어. 고조부때 우리 나라에 귀화한 녀진인이라지?

《녜…》

《이 사람 의산군!…》(의산군은 남이의 아버지 남휘가 받았던 훈작인데 그 아들이 그냥 넘겨받았던것이다.)

《…고맙네 고마워… 올라산성싸움때 일이 눈에 선하이. 참 잘들 싸웠지. 그때 우리가 오늘처럼 이런 날이 있을줄이야 몰랐지. 나는 령의정! 임자는 병조판서!… 이런 좌석에 앉으니 임자, 의산군의 의리심과 례의에 정말 감개무량하네. 내 황천에 간들 임자 우의를 잊을수 있겠나…!

강순이 손수건을 눈에 가져가는데 어느새 과방에서 뛰여나왔는지 류자광이 따로 들고나온 술병을 조심스럽게 기울여 감빛술을 잔에 찰찰 넘치게 부어 강순에게 드리였다.

《령의정대감나리, 연수불로주오이다.

《어- 그런가! 임자는 전공을 떨쳐 전하마마의 은총을 받아 병조참지벼슬에 올랐으니…》

《령상나리! … 그 술은 맛이 감미롭고 젊음을 되살려주는 약술이오니 장복해주사이다!

《어- 그렇다- 허허허…》

음악소리가 터져오르고 꽃같은 예기들이 사뿐사뿐 걸어나와 강순과 남이 그리고 정선공주와 손녀의 손을 잡아 끌어내며 춤을 추었다. 예기 탁문아가 강순의 손을 잡고 스스럼없이 어울려 춤을 추는데 류자광은 예쁘장하게 생긴 한 예기의 가는 허리를 안고 돌아갔다. 고조되는 음악, 들썩거리는 어깨, 물결처럼 흐느적이는 팔들… 고령의 강순은 숨을 헐썩거리며 춤추는 시늉을 하다가 관기한테 부축되여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어느덧 모두 제자리들로 돌아와 앉았을 때 강순이 측은한 눈길로 정선공주곁에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앉은 구을금이를 지켜보았다.

《조것이 기특하면서도 어- 참, 불쌍하거든…》 하고 그는 정선공주에게 눈길을 돌렸다.

《마님이 저 애를 키우느라고 얼마나 시름스럽겠소?

《웬걸요. 애가 역어서 속상한 일은 없나이다.

《허… 그럴테지만… 남공은 어째 재취를 안하는지 모르겠군요. 이제는 병조판서에 명성을 떨친 장군이겠다, 어이하여 후실을 맞아들이지 못하는가유…?

남이는 강순과 긴요하게 의논할 일도 있는데 화제가 그런데로 돌아가자 속상하여 고개를 수굿하고 앉아있었다.

《령상어른, 그런게 아니라 실은…》 하고 정선공주는 그만 리진강대감의 따님과 통혼이 있었다는 이야기랑 입밖에 내고말았다. 그 바람에 눈치빠른 예기들은 물론이요, 문효량과 류자광이도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자리를 피했다.

남이가 어머니에게 힐난의 눈길을 보내고는 강순에게 좀 퉁명스럽게 말했다.

《령상나리,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이다. 소인은 이애가 철이 들기 전에는 재취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소이다.

《아-아- 그런 소리 말게나. 리진강대감에게 훌륭한 딸이 있다는 말을 나도 들었네. 문병도 할겸 한번 찾아가보려네.

《나리, 그 마음 그지없이 고맙지만 소인의 심경도 헤아려주사이다.…》

남이는 강순앞에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다가 이윽고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 그의 입에서 격한 소리가 뿜어나왔다.

《령의정대감, 이 자리를 빌어 긴요하게 할 얘기가 있소이다!

《나도 그걸 느꼈어. 말하게나. 띠를 풀어놓고 죄다 이야기하게…》

《헌데 좋은 소리는 못되오이다.

그리고 남이는 얼마전 제물포와 수원, 공주의 군영들을 돌아본 이야기를 하면서 군사를 추켜세워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강순은 서리가 허옇게 불린 숱진 눈섭을 치켜올리고 그를 지켜보았다.

《소인은 앞으로 전쟁에는 화포군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이다. 이제는 창이나 칼, 활로만 싸우던 시기는 지나갔소이다!

《남판서가 옳게 봤소!

강순이 이렇게 호응해나서자 남이는 여태 품어온 생각들을 다 털어놓았다.

《령상! 헌데 지금 화포군형편만 봐도 말이 아니오이다! 제가 이번에 화포군에 나가 쏘아보게 했는데 올라산성싸움때보다 형편이 못하오이다. 전체적으로 사거리가 짧은데다가 락하점이 개개가 다릅니다. 사거리가 긴것 짧은것… 저마끔입니다.

《음… 그렇던가?

《예! 사거리를 늘이자면 구리… 동이 있어야 하오이다.

《동이라니?

《절간 종을 만드는 그런 동이 있어야 하오이다.

남이는 목소리가 떨렸다.

《화약은 최해산이 애쓴 덕에 많이 장만했는데 이제는 구리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남이는 그 리치를 설명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 불화살을 멀리 날려보내자면 화약이 좋아야 하고 화포안에 토시처럼 동판을 말아넣어야 합니다. 헌데 지금 구리는 절간의 인경을 만드는데 쓰고 고관대작들의 집, 대궐들의 처마를 치장하는 풍경을 만드는데 쓸 구리는 있어도 화포를 개조하는데 쓸 동은 없소이다. 속이 상해서 공조에 찾아가보니 거기서도 속수무책이오이다.

그리고 공조에서 들은 이야기를 죄다 하며 나라에서 돌가마를 쌓고 동을 녹여내는 한편 다른 나라에서 동을 들여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 장영실이 건재했더라면…!

남이는 강순의 상심한 얼굴을 지켜보았다.

《그게 어떤분입니까?

《재주가 뛰여난 사람이네. 전라도 명기의 아들인데 재기가 뛰여나 세종임금이 불러올려 썼지. 명나라에 류학도 보내고… 저 경복궁 천상을 보는 간의대, 측우기, 물시계… 다 장영실의 고안품이네. 세종임금은 그한테 관직을 주어 동광을 세우라고 저 문경지방에 내려보냈어.

《예?!

《채방별감이란 벼슬까지 주어… 장영실이 거기서 동광을 찾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네.

《동광이요?! 어디라구요?

《문경 어디라고 했는데… 어, 장영실이…!

《사망했는가요?

《어디에 귀양보냈다는데 어디로 내려보냈는지…?

《왜 그런 인재를 귀양까지 보냈는가요?!

《생존해있는지 사망했는지 바이 알길이 없네. 에- 아까운 인재를…》

《무슨 죄로 그리되였나이까?

《죄야 큰 죄지… 임금이 타는 가마를 허술하게 만들어 행차중에 글쎄 그 어가가 허물어져내렸다네.

《예?!

《장영실이 노비신분인 저한테 벼슬까지 준 임금에게 해를 주자고 그랬겠나. 세종임금은 용서해주라 여러번 분부를 내렸는데 훈구파령감들이 하도 기승을 부려 종시 귀양을 보냈지…》

《지금 어디 생존해있을가요? 신이 찾아보겠소이다.

《진중하게… 훈구파령감들이 알면 경을 쳐… 조심하게나… 이번에 자네가 병조판서에 오르고 내가 령상에 오르니 들려오는 소리가 저 대감들이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모양이거든…》

《그 령감들이 왜 그러는가요?

《모르지…》

남이가 누가 엿듣지 않는가싶어 눈길을 대청마루방밖에 돌렸는데 이윽고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돌아보니 늙은 령상이 벌써 고개를 떨구고 코를 쌔근쌔근 골기 시작했다.

 

4

 

이튿날 남이가 장영실의 행처를 의금부와 형조에 알아보니 여러해전에 경주지방으로 류배보냈는데 그후 소식은 모른다고 했다.

닷새후 남이는 경주지방으로 떠났다. 왜구의 침습이 우려되여 경상도의 군영들을 순시한 다음 장영실을 기어코 건져내여 동생산에 이바지하도록 하자는것이였다.

병조판서의 행차라 하여 오위군소속 충좌위의 열다섯명 갑기병들과 판서의 종사관이 뒤따랐다.

그가 병조에서 떠날 때 뜻밖에도 병조참지 류자광이 따라나서 자기를 꼭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다. 멀고 험한 길로 떠나보내고 마음을 놓을수 없다는것이였다. 남이는 처음에는 데리고 갈가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미 그한테 화포에 쓸 파동을 모아 공조에 넘겨주라는 지시를 준바도 있어서였다.

병조판서행차는 한성을 벗어나자 남쪽을 향해 내달렸다. 말들은 흙먼지구름을 뒤로 날리며 기운차게 달렸다.

그날 남행길은 순편치 못하였다.

흉년이 들어 리농한 농부가정들을 드문히 만나는데다가 다리들이 홍수에 떠내려가 개울을 만나면 말을 끌고 물을 건너야 했다.

병조판서의 행차는 쉬임없이 달려 이튿날 오후에는 경상도땅에 들어섰다.

남이는 경주와 포항을 비롯한 몇몇 주요 군영들을 순시하며 왜구의 침습이 있을만 한 요충지들마다 수루를 세우게 하고 해변가를 따라 화포들을 배치하게 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갖추도록 조처해놓았다. 한편으로 이르는 곳마다에서 장영실의 행처를 찾기 위해 사처로 파발을 띄웠다.

남이가 보낸 파발들이 산간벽지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그렇게도 애타게 찾는 장영실의 행처는 바이 알길이 없었다. 헛물을 켠 파발들이 맥빠진 모습으로 돌아올 때마다 남이는 강군양성의 자기 웅지를 실현할 길이 묘연해지는듯 하여 가슴이 답답해지기만 했다.

어느날 남이는 답답한 속도 풀겸 장영실이 있을만 한 곳을 찾아 자기가 직접 금오산쪽을 향해 떠났다. 해종일 헤매이던 그의 일행이 어느 산자락의 고목밑에서 다리쉼을 하고있는데 우쪽으로부터 허연 수염발을 날리며 눈이 곯아빠진 로인이 지팽이로 땅을 더듬더듬 골라 짚으며 걸어 내려왔다.

로인은 숨을 들이키며 무슨 냄새를 맡는것 같더니 임자들이 한성서 내려왔다는 군사들이 아니냐고 물었다. 소경은 눈이 멀어도 청각과 후각이 비상히 발달한다는 리치를 몰랐던 남이는 저으기 놀라 눈이 멀어도 자기네를 알아보는 로인이 산신령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남이와 로인사이에 이런 말이 오고갔다.

《그대들이 한성군사들이면 가져왔다는 사약을 소인한테 넘겨주사이다.

《예?

《이 사람은 옛적에 형조참판으로 있던 권충지요… 예서 귀양살며 숲과 새들을 벗하여 살아왔소. 이렇게 눈이 빠지게 오늘을 기다려왔소이다.

《권충지옹, 사약이란 웬 말이시오? 우리는 이 지방에서 귀양산다는 한 인걸을 한성으로 모셔가려고 왔소이다!

로인은 앉았다.

남이도 따라 앉았다.

《젊은이, 인걸이란 뉘시오?

《천문학사 장영실이라고…》

《이 사람들… 어- 왜 이제야 오는고?!

《예?

《아, 이런 원통한 일도 있는가…!

《무슨 일이오니까?

《여러해전에 별세했소이다. 나하고 같이 귀양을 살았네. 이웃에서 노상 동광때문에 가슴을 앓았지. 문경지방 어디에 있다는…》

《예-?!》 남이는 소스라쳐 놀라 뛰여일어났다. 로인을 지켜봤다.

《… 어느 하루밤새 동맥을 찾아놓고 죽겠다고… 나한테 몰래 귀띔해주고는 예서 도망쳤어. 눈바람이 사나운 밤이였네. 어- 참, 독한 사람이지. 류배지에서 도망치면 참을 당한다는걸 알면서도 갔어. 나로서는 그 뜻을 꺾을수 없었네.

《그후 어찌 되였소이까?

《알수 없어… 없네…》 로인의 곯아빠진 눈이 물기에 젖는듯 했다.

《들려오는 소문에… 광산에 가닿지 못하고 고을 포도청에 끌려갔다는 소리도 있고 광산에 가서 동맥을 찾다가 굴이 허물어져 영영 땅속에 묻혔다는 풍설도 있었지. 한데 그후에도 군아라장이란것이 찾아와서 이웃에서 귀양살이를 했는데 그놈 어디로 도망쳤는지 모르냐고 나를 못살게 구는걸 보면 어디에 숨어있는것도 같고… 어느 말이 랑설이고 어느것이 정설인지 바이 알길이 없소이다. 어- 참, 이 무슨 세월인고…》

남이는 군사들을 이끌고 그날로 문경고개를 넘어 동광산을 찾아 산간벽지를 헤매였다. 그들이 열댓채의 오막살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은 산간마을에 들어섰을 때 그 고장 사람들은 난데없이 불쑥 나타난 갑기병들의 어마어마한 차림새에 질겁하여 숨어버리거나 숲속으로 도망쳤다.

종사관이 시꺼먼 바위뒤에 장끼처럼 구겨박힌자의 덜미를 잡아끌어왔다. 마흔이 되나마나한 절름발이였다.

헐어빠진 누데기를 걸친 그 절름발이는 지레 겁을 먹고 와들와들 떨다가 종사관의 설명을 듣고서야 얼굴에 화색이 돌아 광산이 바로 저 뒤골짜기에 있었다고 했다.

동광산의 갱구는 오래전에 허물어져내린데다가 년년의 홍수에 사태가 내려 그 흔적이 겨우 알릴뿐… 구리를 녹여내던 돌가마도 허물어진데다가 홍수에 씻겨내려 그 자리만 간신히 알렸다. 돌가마둘레의 키를 넘는 버럭무지들은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그 무슨 무주고혼의 무덤처럼 보였다.

남이는 가슴이 허물어져내리는듯 싶었다.

《페갱한지 벌써 10여년이 넘지요.》 하고 절름발이사나이는 시름겨운 모두숨을 후 내쉬였다.

《예서 구리를 좀 녹여낼 때에는 굉장했습지요. 관가에서랑 무슨 포도청이요 병마절도사요 하는 량반들이 내려와 빡빡 긁어갔습니다. 대감집 아씨들 비녀요, 반지요, 술잔, 놋바리랑 만들어 서울에 공물로 바친다지요…》

《옛날에 여기로 서울서 채방별감어른이 내려와있었겠는데…》

《예? 장영실별감님이요?!

《아는가…?

《알다뿐이겠소이까. 우리하고 갱마구리속을 기여다녔습지요. 그 어른은 조막도끼로 쇠돌을 깨서 그 가루를 씹어 맛을 보고는 구린지 아닌지 알아냈지요. 마음이 어진 량반이였소이다.

그리고 사나이는 가슴이 꺼져내리도록 한숨을 쉬였다.

《에- 세상에… 기막힌 일도 다 있습지요. 그분이 글쎄 귀양내려왔다가 옛정을 못 잊어 우리한테 찾아와 숨어서 여기 일손을 돕다가 그만 발각이 나 포도청에 끌려갔지요. , 기막힌 일도 다 있지… 거기서 효수를 당했다지요.(효수는 목을 잘라 장대에 높이 매달아두는 형벌)

《뭐요-?!》 남이는 의분이 터져올라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실말인가?!

《후에 들려오는 소리는 달라요. 끌려가는데 별안간 안개가 자욱히 끼고 돌개바람이 불더니 하늘로 날아올라갔는지 종적없이 사라졌다지요. 헌데 조화거든요. 산신령이 대노해 그뒤부터 동맥이 잦아들어 싹 자취를 감추었거든요. 그래 페갱이 되고말았지요…》

《…어…!!》 남이는 홀연 얼혼이 빠진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곁에 선 고목에 의지하여 서있다가 주먹으로 그 고목을 쳤다. 한번 또 한번… 나무껍질이 부서져 날아났다.

남이는 돌아섰다.

한성쪽으로 우불구불 뻗은 산길로 백리가 넘도록 지나오면서도 한마디 말도 없었다. 그는 흥떡이는 말안장에 고개를 수굿하고 앉아있었는데 졸고있는지, 무슨 생각에 묻혀있는지 알수 없었다. 뒤따르는 종사관도 앞장서가는 갑기병들도 말이 없었다. 하여 병조판서의 행차는 내내 침묵속에 움직여갔다.

 

×

 

푸르싱싱한 소나무숲이 계속되였다. 그것은 아름드리 거목들의 총림이였다. 수백년 묵은 그 로송들에서는 신비감과 함께 머리가 찡 저리도록 청신한 기운이 풍겨왔다.

가도가도 끝이 없을상싶은 무인지경의 소나무숲속에는 태고연한 정적이 고즈넉이 깃들어있었다.

군마들도 그 정적에 숙연해져 발굽을 조심스럽게 옮겨갔다.

병조판서의 행차는 영동이 지척인 숲속에서 괴이한 일에 맞다들어 멎어서게 되였다. 행차가 가는 앞쪽 절벽밑에 웬 중이 꿇어앉아 목탁을 두드리며 웅얼웅얼 불경을 내리엮고있었던것이다.

남이도 말을 세웠다.

사모에 갑사장삼차림의 그 중은 한참 경을 외우다가 일어나 하늘을 이윽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실성한듯 덩실덩실 춤추면서 돌아가다가 노래가락을 뽑았다. 애조가 짙은 처량한 목소리였다.

 

어- 어여라-

울리는 저 북소리 이 목숨을 재촉하는데

얼굴을 돌려보니 서산에 해 저문다

황천 가는 길에는 주막도 없다는데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자고 가리…

 

남이는 그 기괴한 중을 유심히 지켜만 보았다. 그는 그 풍요가락이 사륙신중의 한 충신인 성삼문이 사형장으로 나가며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시구에서 온것임을 알고있었다.

중은 활개를 훨훨 저어 장삼자락을 날리며 취흥에 젖은듯 약간 비칠거리다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황천 가는 길에는 주막도 없다는데…

 

행랑중의 처량한 노래소리가 숲속에 울려퍼졌다.

그 중은 앞을 막아선 갑기병들이 눈에 띄였는지 더 높은 청으로 새 노래가락을 뽑아넘기며 군마들옆을 스쳐지나갔다.

 

삭풍은 나무끝에 불고 명월은 눈속에 찬데

만리변경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파람 큰한소리에 거칠것이 없어라

남이는 놀랐다.

(, 어디서 봤던가…?!)

그는 행랑중의 모색이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어 말에서 뛰여내렸다.

《스님!

돌아보는 행랑중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남이는 너무 놀라 환성도 올리지 못하였다.

(, 매월당이 아닌가. 김시습이…?!)

김시습은 어려서부터 시재로서 한성장안을 뒤흔든 신동이였다. 시습이 다섯살때 세종임금이 글재주를 높이 치하하여 하사한 비단 50필과 관련된 일화는 사람들을 경탄시켰다.

임금과 고관대작들이 저 어린것이 신동이라는데 저렇게 무거운 비단퉁구리를 어떻게 날라가는가 보자고 구경하는데 다섯에 난 아이는 비단필을 다 풀어놓고는 그 한끝을 허리에 동여매고 걸어나가자 비단필이 저절로 전부 끌려나갔다는것이다.

남이가 아이적에 매월당(시습의 호)은 그의 선망의 대상이였다.

남이의 아버지 남휘는 아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 시습을 댁에 불러 잘 대접하고 며칠 함께 지내도록 보살핀적도 있었던것이다.

남이는 이런 심산수림속에서 중의 법의를 입은 매월당을 만난것이 너무도 놀랍고 반가와 그한테로 한걸음 다가서며 환성을 올렸다.

《아니 이거… 시습 매월당이 아니오이까?

《초야에 묻힌 이 중생을 먼저 알아봐주어 고맙소이다!

《말씀을 낮추시오.

《나라의 병권을 한손에 거머쥔 병조판서로 되셨다는 소식은 풍설에  들었소이다.

《아-니, 이 웬 일이오니까. 그 출중하던 재기와 뜻은 다 어디 버리고… 승의를 입었나이까?

《허허- 아니- 아니요…》

《혹 귀양살이라도…?

《귀양살이면 승의를 입을수 있나? 내스스로 이 길을 택 했지.

《스스로라니요?!

《허-허…》 매월당은 허구프게 웃었다.

《내스스로… 초야에 묻혀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를 벗하여 살고싶었네. 갈길이 바쁘겠는데 어서 지나가게. 이렇게 만나본것만 해도 반가워… 기쁘네. 무척… 무척…》

남이는 그냥 떠나갈수 없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종사관을 가까이로 불러 자신이 갈 때까지 저쪽 현무암절벽밑에 가서 쉬면서 기다리라고 일렀다.

군사들이 물러가자 남이와 시습은 길가의 이끼 덮인 너럭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인 연고로 벼슬길에서 스스로 물러나 장삼을 걸치게 되였나이까? 어찌하야 스님이 되였소이까?

남이는 성미대로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시습은 그 대답을 회피하며 자기의 방랑생활이며 여러 절간들에서의 생활 등등에로 화제를 끌어가려고 애썼다.

허나 그의 이마며 미간에 깊이 패인 주름살이며 더부룩한 턱수염, 열기가 풍기고 피진 가느스름한 눈, 얼굴전체에 짙게 어린 암담한 그늘은 무거운 번민과 고행의 고백이였다.

남이는 가슴쩌릿한 의혹에 휩싸여 같은 말을 묻고 또 물었다.

시습이 나중에는 노한 얼굴로 왜 남이 숨겨두는 사연에 그리도 파고드느냐고 역증을 냈다.

《꼭 알아야 되겠소이다! 매월당 같은 나라의 귀한 재사가 스스로 벼슬길을 버렸다는건, 이건 범상한 일이 아니오이다.

《허… 여보게 장군, 요즘 세월엔 범연한 일일세.

그리고 시습은 고개를 떨구고 가슴이 꺼지도록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매월당, 고정하셔요!

《허허… 죄송하이… 흔히 있는 일이네.

《…》

《내 나이 21살이 되던 해에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했지. 이런 무도무법한 세상에서 벼슬은 해서 무엇하랴! 이런 생각으로 책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삭발하고는 승려가 되였지. 나는 설잠(설잠은 눈산의 령마루를 이르는 말이다.)이라는 중이 되여… 벼슬도 명예도 다 버리고 오직 정의를 찾아 팔도강산 곳곳을 방랑했네…》

남이는 이미전에 그런 소리를 들은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남휘는 아들에게 너희 어린것들이 알바가 아니다, 다시는 그런 소리 입밖에 내지 말아 하고 오금을 박으며 그건 무어나 시비하기 좋아하는 집현전의 선비들이 가볍게 혀바닥을 놀린 소리라고 했었다. 어머니 정선공주도 집현전의 그 입이 뾰족한 선비들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졌노라고 혀를 찼다.

허나 오늘 그처럼 머리가 명석하고 대바른 매월당한테서 같은 소리를 들으니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머리가 터져나가는듯 싶고 온몸의 피가 굽이치는 소리가 귀안에서 우뢰소리처럼 울렸다.

《이 사람 장군, 소인때문에 그렇게 너무 비분강개하지 말라니. 방랑생활로 초야에 묻혀 사는것도 리득을 보는 일이 아닌가 생각하네.

《…?

《벼슬을 버리니 시기와 질투를 아니 당하고 다시말하면 남들이 탐내는바를 탐내지 않으니 세상의 미움을 사지 않고 그래서 마음 편히 지낼수 있지… 허허, 숲에 사는 짐승도 개들이 싫고 무서워 인간세상을 멀리하지 않나…》

남이는 분명히 설잠의 이야기를 듣고있었으나 그 말뜻이 잘 안겨들지 않았다.

… 작별할 때 서로 인사말을 나누었던지 몰랐으며 설잠이 행차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눈바래움을 했는지 어쨌는지도 몰랐다. 그저 가슴만 못견디게 저려들뿐…

그날 남이가 말을 달려 현무암절벽밑에 이르자 종사관과 군사들이 말들에 뛰여올라 그를 뒤따랐다.

병조판서의 행차는 한성을 향해 북으로 달리고 또 달리였다. 날아 지나가는 수풀, 흩날리는 말갈기, 북을 두드리는듯 한 말발굽소리…

남이는 제정신이 아니였다. 기염을 토하던 설잠의 목소리가 귀전을 스치고 또 스쳐서였다.

수양은 단종을 없애기 전에 모사 권람, 한명회의 간계로 김종서장군을 사살했다. 좌의정 김종서는 백두산 태호의 기상으로 어린 단종임금을 옹위했었다. 6진을 개척하여 나라의 북부국경을 확정하고 나라의 령토를 확보한 장군… 아, 이런 충신을 죽였단 말인가. 철여의로 머리를 쳐서… 권람, 한명회가 짠 계략에 따라… 아, 임금의 룡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 도대체 무엇인가. 사람으로서 어찌… 어리고 착하고 순진한 조카, 아무런 야심도 없는 단종을 죽일수 있단 말인가?! 처음에는 상왕으로 더 높이 모시는척… 다음에는 녕월이란 산간벽지로 귀양보내고 그다음에는 사약을 내려보내 아주 죽여버렸다. , 당조카인 단종임금을 아니, 아니 사람으로서 인두겁을 쓴 사람으로서 어찌 그리할수 있느냐… 혹시 랑설이 아닌가. 사악한 선비놈들이 꾸며내서 퍼뜨린 요설이 아닐가? 하늘이여 신이여, 이 모든것이 거짓이면 폭우를 쏟아부으라! 이 엄청난… 더럽고 악독한 허위를 깨끗이 씻어내리게!… 아니, 아니다- 전하께서는 그럴수 없다! 없다! 없다! 나를 그처럼 총애한 군주… 내가 타고다닐 말까지 하사해주신분… 그렇다면 설잠의 말은? 그것은 저 매월당이 군주한테 원한을 가진 사악한 무리들의 요설에 속은것이다. 나는 내 눈으로, 이 눈으로 가까이에서 보았다. 똑똑히 보았다. 무명으로 지은 도포를 입고 근정전에 나온 전하를… 그것이 위선이라면 궁궐의 벽들을 치장한 화려한 벽지들을 죄다 긁어내리도록 한것은 무엇인가! 그래 그래, 어떤 요설에도 속지 말자. 나는 군주가 총애하는 신하다! 아니… 아니…? 나는 군주가 총애하니 덮어놓고 의와 불의를 가림이 없이 숭상해온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무슨 참신하이고 참사람인가… … 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하 여섯이나 죽인것은? 그이들도 김종서와 같은 리유로 죽인것이 아닌가. , 왕권찬탈을 위해 그렇게 많은 지사들을 죽였단 말인가… 아, 나는 군주의 총애에 눈이 먼것이 아닌가?

남이는 문득 경신이 생각이 가슴을 찔렀다. , 경신이가 진실을 말했다면, 그앞에서 칼을 빼든 나는 어떤 위인인가? 폭력배? 자기 감정에 거슬리면 죽이러 접어드는 광신자? , 그때 경신의 통곡소리가 지금도 들려오는것 같구나… 경신은 그후부터 나한테 한번도 찾아온적이 없다. 경멸해서겠지? 절색에 총명한 경신이, 어째서 경신이가 이리도 그리워지는가!

  

×

 

남이가 경신이 생각을 하며 말을 몰아 바람속을 달리는데 뜻밖의 일이 생겼다.

역참이 있는 앞쪽의 소잔등같은 언덕받이로부터 웬 작자가 사람 살리라고 고함치며 뛰여내려왔던것이다. 그 작자는 앞을 막아서는 군사들앞에 넙적 엎드려 절하며 이런 대낮에 산적들이 역참으로 쳐들어와 말이며 쌀이며 다 빼앗아간다고 아우성쳤다.

그자는 역참아전이였다.

남이는 군사들에게 놈들을 모조리 붙잡으라고 호령하고 갑기병들은 그 령이 떨어지자 말을 몰아 언덕받이로 올리뛰였다.

남이와 종사관이 역참으로 올라갔을 때에는 벌써 갑기병들이 산적들을 잡아제낀 뒤여서 열한명의 놈들이 오라를 지고 역참뜨락에 꿇어앉아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얼굴들이 새까맣게 타고 군사들한테 얻어맞고 짓밟혀 처참한 몰골들이였다.

그자들은 엉엉 울어대며 죽이지 말아달라 애걸하는데 제일 뒤꼬리의 애숭이산적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오돌오돌 떨뿐 소리내여 울지도 못하고 피멍이 든 입술만 피루고있었다.

《넌 몇살이냐?》 하고 남이가 그 애숭이한테 거칠게 물었다.

그 애숭이는 대답대신 왕- 하고 울음보를 터치였다.

그때 뜨락에 던져진 도끼를 들고 역참아전이 산적들에게 달려들어 마구 찍어넘기려는듯 날뛰였다. 종사관이 판서의 심문중에 웬 망발이냐는듯 그 도끼를 빼앗아 던져버리니 아전은 너무 분하고 억울해 발을 탕탕 구르며 입에 거품을 물고 산적들의 악행을 고발하였다.

《이… 이… 이놈들을 내 손으로 요정내게 해주시유. 대낮에… 이런 대낮에 날이 시퍼런 도끼를 들고 역참에 달려들었소이다. 죽인다고 을러메며 우릴 부엌에 가두고 고간에서 쌀을 퍼내고 말까지… 관군이… 고마운 군사들이 달려오지 않았다면… 아이고… 저 애놈도 산적이니까 어찌나 영악한지 내 팔을 물어뜯었어유. 아이고-》

역참의 다른 사람들도 저놈들을 죽여달라고 주먹을 흔들며 부르짖었다.

남이가 사나운 눈길로 산적들을 둘러보는데 제일 가녁에 앉은 다부진 몸매에 수염이 덥수룩한 작자가 아전쪽에 희번득이는 눈길을 흘깃 던지고는 부르짖었다.

《저 사람 말은 거짓이요. 우린 도끼도 없었고 누굴 가두지도 않았소… 곧이듣지 마시오이다. 우린 강도도 산적도 아니오! 아니오이다. 제땅이 없어 토호들밑에서 노비살이로 시달리다가 흉년까지 들자 그만 리농해서… 산속을 헤매다가 두루두루 만난 사람들이지요. 굶주림을 참을수 없어 산에서 내려왔지요. 나리는 굶어본적 있소?

그자의 말투와 눈빛에서는 죽기를 각오한자의 무분별이 느껴졌다.

남이는 그 기개와 배심이 범연치 않아 칼을 빼다가말고 마감소리까지 다 들어보자고 생각했다.

《예가 역참인줄도 모르고 찾아들어왔소이다. 너무 배고파 밥동냥을 했소이다. 한데…》

텁석부리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역참아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사람이 먼저 산적이다- 소리쳐 일이 생겼소. 밥동냥을 하는데 몽둥이를 드니 복통이 터졌지유.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산적으로 모니 밸이 나 아주 산적이 돼서 막 짓뭉개기 시작했소이다. 쌀을 퍼냈다, 말까지 끌어냈다는건 저 사람이 보탠 소리오이다. 무관나리, 죄없는 사람들을 다 죽이지 말고 내 목만 쳐주시유. 이놈이… 저 사람이 손찌검을 하자 이놈이 먼저 팔을 걷어붙이구 맞섰수다. 저것들을 휘동했지유…》

남이는 나라형편이 기막히고 잡힌자들이 측은하기도 했다.

그는 역참의 아전이며 노비들을 돌아보며 뉘 말이 옳으냐, 아전의 소리냐, 저 작자 소리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두세명의 노비들은 고개를 숙이고 응대를 못하는데 중로배아전이며 나머지 노비들은 저 텁석부리 말이 다 거짓이라고 악에 받쳐 소리소리 내질렀다. 텁석부리는 허허… 하고 웃었다. 종사관이 보다못해 아전을 쏘아보며 너희들이 뉘앞이라고 지랄이냐, 이분은 병조판서어른이시다 하고 소리 쳤다.

그 소리에 아전과 노비들은 물론이요, 텁석부리를 비롯한 산적으로 몰렸던자들이 모두 질겁하여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였다.

남이는 근엄한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다가 역참아전에게 오금을 박았다.

《너 이눔! 너는 역참의 관리로서 거짓고발을 해 본관의 행차를 지체시켰으니 죽어 마땅하다. 허지만 본의아닌 과실로 보아 관용을 베풀고저 한다.

그리고 굶주린 저 겨레들에게 밥을 지어 대접하는것으로써 지은 죄를 사죄하라고 엄하게 일렀다.

역참아전은 머리를 조아리며 분부대로 하겠노라고 눈물을 머금고 다짐하였다. 갑기병들이 달려나와 산적으로 묶였던 사람들한테서 오라줄을 풀어주었다.

그날 남이는 역참을 떠난 뒤에도 그 텁석부리의 갸륵하고 슬기론 마음을 두고 한동안 생각했다.… 제 목을 쳐달라고…? 남들은 다 살리고 자기만 죽겠다는게 헐한 일이냐. 어- 까막눈의 무지렁이같은 백성들속에도 저런 의리와 정의를 지닌 남아가 있는가! 여태 나는 량반, 고관이랍시고 저런 백성들을 무얼로 여겼던고? 헌데 우리 서울량반네들은 과연 어떤가… 끝없는 시기와 암투, 무서운 모함… 군주의 룡상을 둘러싸고는 또 어떤가?

그는 의분에 가슴이 타번져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내가 참신하라면 돌아가는 소리만 듣고 혼자 속을 썩이다니? 죽기를 각오하고 임금에게 직접 문의해야 한다, 뒤에서 돌아가는 소문이 사실인가 아닌가, 전하가 김종서장군과 단종임금을 사살했다는게 사실인가 아닌가 진위를 알아야 한다, 소문이 요설이면 격노한 전하 칼에 맞아 기쁜 마음으로 웃으며 죽자, 사실이면 자결하거나 벼슬을 버리고 매월당처럼 되자, 사실인가 아닌가 이 진위를 밝히는건 이건 나라의 제일 중대사다!

남이는 서울을 향해 말을 때려몰았다.

귀전에 바람소리가 윙-윙- 울부짖었다. 수림이 설레이고 길가의 고목이 와지끈 허리 부러져 비통한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군마들은 한성쪽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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