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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초순 강순총대장이 이끄는 원정대는 만산쪽으로 돌아오고있었다. 크게 승리하고 돌아오는 부대들은 의기양양하여 걸음을 다그쳤다. 행군종대의 앞에는 어유소의 좌군부대들이 서고 그뒤에는 남이의 우군부대들이 섰다. 그리고 그뒤로는 야인들한테서 도로 찾아가는 농부들과 부녀들, 마소행렬 또한 포로된 사람들이 고개를 떨구고 군사들의 감시속에 끌려가고있었다. 맑게 개인 파란 가을하늘에는 기러기떼들이 강남으로 줄지어 날아가고 대지에는 길게 늘어선 승리자들의 행군종대가 흙먼지구름을 엇비스듬히 날리며 황성평의 무연한 구릉지대를 내리고있었다. 남이는 흡족한 마음으로 행군종대옆에서 말을 타고가다가 시신들을 실은 수레들쪽에 눈길이 갔다. 거기에는 올라산성싸움에서 용맹을 떨친 여섯명의 용사들이 영민속에 누워있었다. 올라산성에서 떠날 때 그는 여느 전사자들은 산성에서 멀리 떨어진 황량한 언덕에 묻고 왔지만 그들만이라도 야인들이 살판치는 지역에 남겨두기 싫어 석대의 수레를 구해 싣고왔던것이다. 무명천 몇필이 없어 헐어빠진 삿자리며 마대천에 덮여 누워있는 시신들을 여겨보노라니 가슴이 못내 저려들었다. 그때 앞쪽에서 걸어가는 군졸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유쾌하게 주고받는 말소리들이 들려왔다. 아마 산성싸움의 무훈담을 나누는것 같았다. 남이는 저도 모르게 흥미가 당겨 그쪽으로 다가가게 되였다. 그 군졸들은 투구며 갑옷을 어깨에 둘러메고 건들거리며 이야기판을 벌렸다. 《에- 저 부녀들이 다른 맛을 봤겠는데 남정들이 좋아할가?》 《헝, 야인들은 잡은게 크다는데 저 계집들이 제 서방을 성차할가?》 《에키, 이놈. 그런 욕된 소리말아. 저 부녀들은 다 정조를 지켜냈어. 순정을 지키자고 목숨을 끊은 내인도 있다지 않나.》 《허- 대단하이!》 《렬녀네…》 그속에서 문득 류자광의 목소리가 울렸다. 《에-라, 내 이번에 서울 올라가면 꼭 승정원에 찾아간다.》 《아니 임자 군졸이 승정원에…? 흐흐흐 큰소리는 잘- 한다.…》 《이 풍산시골뜨기야 넌 아무것도 몰라. 우리 상대장님은 태종임금의 외손이겠다, 한양장안 고관대작들치고 남이장군이라면 모르는이 없어. 상대장님만 따라가면 승정원이 아니라 어전에도 들어갈수 있어.》 《히야─》 《거 대단한걸─》 《허허허…》 군졸들이 왁작 떠드는데 한 갑사가 챙챙한 목소리로 따져 묻는다. 《임자 무슨 용건으로 승정원에 들어가려 하나?》 《용건? 그럴 일이 있네. 리시애대가리를 바치러 들어갔을 때 도승지대감이 따라들어간 나한테까지 서울에 오면 들리라고 했거든…》 《잘못 들은거 아니여?》 《아니─ 거야 인사치레로 한 소리겠지…》 《아닐세. 똑똑히 들었네.》 그러자 가벼운 웃음소리, 부러움에 찬 한숨소리… 남이한테는 그가 산성싸움에서 적장을 제멋대로 사살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자기는 얼마나 분노했던가. 허나 지금은 그 나이에 어느 군사인들 무공을 떨치고싶은 욕망이 없으랴 싶으면서 그가 용서되기도 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가면 기회를 봐서 그를 꼭 승정원에 데리고 가서 도승지대감에게 인사라도 시키자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였다. 화포대의 구떡쇠라는 군졸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남이에게 다급히 일러바쳤다. 《상…상대장나리! 저…저기 뒤쪽에서 쌈이 붙었소이다!》 《뭐라구?!》 하고 남이는 펄쩍 놀라며 소리쳤다. 구떡쇠는 보병군졸들이 올라산성에서 화포를 제때에 쏴주지 않았다고 먼저 시비를 걸어 불집이 터졌다는데 화포대장한테 손찌검까지 했노라고 숨이 턱에 닿아 부르짖었다. 《대승하고 돌아가는데 이 무슨짓이냐?! 개-자식들-!!》 그는 분노를 터뜨려 이렇게 소리치며 말을 돌려세우고 검을 휘 뽑아들었다. 말은 바스라지는듯 한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뒤쪽으로 달려갔다. 란동이 벌어진데 이른 남이는 너무 아연해져 소리치지도 못하고 말에서 뛰여내렸다. 힘장사인 화포대장이 웬 군졸을 머리우에 번쩍 쳐들고 길가의 벼랑턱에 서서 낭떨어지밑으로 내던질듯 우들우들 떨었고 쳐들린 군졸은 사람 살리라고 아우성치며 뻐드럭거렸다. 아마 화포대장한테 손찌검을 했다는 작자인것 같았다. 화포대 군졸들은 던지라, 죽이라고, 보병군졸들은 한번만 용서하라고 입을 모아 소리쳤다. 《그- 만-!!》 하고 남이는 벽력같이 소리쳤다. 그 바람에 주호가 놀라서 뒤돌아보고는 쳐들었던 군졸을 내려놓았다. 감때사납게 생긴 그 군졸이 남이앞으로 달려와 울음섞인 목소리로 화포를 쏴주지 않아 자기 사촌형도 죽었노라고 악에 받쳐 고발했다. 그 작자는 너무 혼쭐이 나 바지에 오줌까지 쌌는지 사타구니가 질벅하게 젖어있었다. 남이는 웃음이 나왔으나 꿀꺽 삼키고는 화포대장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곽주호는 성이 풀리지 않아 험한 기상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씨근거리다가 남이가 나타나자 고개를 숙이였다. 남이는 그의 남아장부다운 기상이 마음에 들었으나 발을 구르며 되게 꾸짖었다. 《꼴이 좋-다. 헝 군졸한테 맞아? 그런 욕을 당해 싸지 싸다!》 그리고는 군졸들을 둘러보며 엄하게 호령했다. 《화포를 어떻게 쐈느냐 이건 너희네가 간참할 일이 아니로다- 한성 올라가면 판별이 된다. 이제부터 군률을 어기는자는 목을 치겠어. 찍소리말고 흩어져-》 군졸들은 질겁해 제자리들로 뛰여갔다. 그날 남이가 행군종대의 앞뒤로 말을 달리며 부대들을 살펴보는데 화포대장이 눈에 띄였다. 곽주호가 시신들이 실린 수레뒤로 고개를 떨구고 따라가고있었던것이다. 그는 고인들의 상제나 조객들처럼 어이-어이- 하고 호곡소리를 들릴듯말듯 나직이 내고있었다. 그 구슬픈 호곡소리에 가락이라도 맞추는듯 삐걱거리며 굴러가는 수레바퀴소리가 가슴을 허비였다. 길가의 나무우듬지들에서 두세마리의 까마귀가 청승맞게 울어대고있었다. 남이는 어인 일인지 곽주호가 측은하게 여겨졌다. 그는 화포대장을 동무해주고싶어 말에서 내려 그의 곁으로 다가서서 시신들이 실린 한 수레를 따라 고개를 수굿하고 무거운 걸음을 옮겨갔다. 앞에 선 곽주호는 그냥 호곡소리를 나직이 내는데 그 구슬픈 소리를 들으며 시신들을 둘러보니 가슴이 찢기는듯 쓰려났다. 그들은 올라산성에서 적병들이 끓는 물을 퍼붓는데도 우장을 쓰고 산성꼭대기까지 기여오른 용사들이였다. 남이는 입술을 피터지게 깨물었다. (군사들…임자들은 하나같이 전공을 떨쳤어. 임자들 한을 잊지 않겠네. 우리… 살아있는 우린 이 강산의 바위돌들이 다 닳도록 칼을 벼려 외적을 치겠네. 구천에 사무친 만백성원한을 풀겠어!…) 수염이 꺼칠한 그의 볼을 따라 눈물방울이 굴러내렸다. 이윽고 그는 앞에서 가는 곽주호곁으로 걸어나가 은근하게 말을 건네였다. 《모를 일이야. 나는 임자를 용맹스런 남아로 알았는데 올라산성에선 어째 그랬나 응? 임자가 그런 졸부였던고?… 모를 일이거든.》 《실은 동생일이 가슴에 걸려…》 《음? 동생이라니…?》 《어휴…》 하고 그는 가슴을 주먹으로 뚝뚝 두드리며 단숨을 내불었다. 그리고 침울한 얼굴로 목소리를 죽여가며 하소하였다. 동생이 명천현감으로 있었는데 리시애란이 터지자 길주로 나와 폭동에 가담해서 리시애동생 리시합의 밑에서 싸웠노라고 했다. 《쇤네는 쌍둥이형제였지요. 길주싸움후에 쌍암에서 우연히 제수를 만났는데 그 쓸개빠진 놈이 글쎄 반란이 망하자 종적을 감췄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지요.》 《음…》 《야인들 지역에 쳐들어가자 혹시 함길도 관료들을 따라 거기로 들어오지 않았나 수소문해봤는데 봤다는이가 없수다.》 《허…》 《올라산성을 칠 때 혹시 저안에 동생과 고향사람들이 있지 않을가 생각하니 손이 떨렸수다. 그래 쏘지 못했소이다.》 《허- 그랬군…》 《그때 상대장님이 채찍을 들지 않았다면 어쩔번 했소. 한성에 돌아가면 절 내쫓겠지요? 섭섭하지만 할말이 없소이다. 쫓아버리오이다!》 남이는 그의 솔직성과 남아다운 담이 마음에 들어 속이 후련해졌다. 그는 팔굽으로 화포대장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바보같이… 처음엔 그랬지만 마감에는 얼마나 잘 쐈어?! 야인들은 사실 화포에 질겁해 손을 들었지. 하하하…》 속이 내려간 남이는 다시 말에 뛰여올라 앞으로 내달렸다. 그날 강순은 행군종대를 함길도쪽인 동남방향으로 이끌었다. 거기에는 백두산록에서 원목들을 끌어내린 소발구길이 나있었던것이다. 그리하여 부대들은 오던 길이 아니라 산세가 좀 험하고 개울들이 드문히 나타나는 수림지대를 꿰질러나갔다. 그 이튿날 행군종대가 울창한 수림지대를 벗어나 나지막한 산등성에 올라서서 다리쉼들을 하는데 시원하면서도 훈훈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결에 구수한 땅냄새가 가슴에 뭉클하게 안겨오고 어디선가 딱따구리가 강대나무를 쫏는 소리가 정답게 들려왔다. 그때 웃쪽에서 군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무엇엔가 경탄하여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게 함백산이 아닌가!》 《야-성산이다-》 《아-백두산이다-》 남이와 강순이도 놀라서 일어나 군사들이 보는쪽을 바라보았다. 끝간데 없는 수해우에 백두의 장엄하고 희끗희끗한 련봉이 떠있는데 그우의 하늘에는 백설같은 희디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여오르고있었다. 강순이 남이의 손을 뜨겁게 잡아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조종의 산일세. 저우엔 천지라는 큰 못이 있지. 밤마다 선녀들이 천지물에 내려와 미역을 감고 하늘나라로 올라간다네.》 《아-!》 남이가 이렇게 탄성을 지르는데 백두쪽으로부터 이름할수 없이 신선한 기운이 풍겨오며 얼굴을 쓸어만지듯 했다. 그때 무슨 조화인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희뿌연 구름장들이 하늘절반을 서서히 가리웠다. 이윽고 군사들속에서 누구인가 목이 터지도록 환성을 터치였다. 《야-아-해비이-해비가 온다-》 남이는 놀라서 하늘을 쳐다봤다. 산듯산듯하고 그지없이 부드러운 감촉이 얼굴을 간지럽히는데 아스라하게 높고 넓은 파란 공간에서 수만수억의 비발이 해빛에 반짝이며 비껴내리며 날리였다. 군사들이 기쁨에 겨워 왁작 떠들어댔다. 《여 친구들- 이건- 이건 성산이…하늘이 보내는 인사일세-》 《하하하…!》 《헛허…어-어- 시원하다-》 《여-여보게들-투구를 벗으라-해비를 맞으면 키가 큰다고 했어-》 《장수한다고 했네-》 군사들이 앞을 다투어 투구들을 벗는데 해비를 손에 받아 얼굴을 씻는 군사들도 있었다. 남이는 어릴적에 아버지가 저 백두산이 왜 백두로 되였는지 아느냐, 수수천년 이 나라 백성들이 당하는 재난을 하도 보아와서 머리가 백발이 되였느니라… 하던 말이 되새겨지고 여태 치른 혈전의 전장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불현듯 시흥이 터져오르고 번개치는 령감이 가슴노리를 쾅쾅 울리는듯 했다. 남이는 끓어오르는 열광을 걷잡지 못하고 단검을 와락 뽑아든채 가까이에 있는 해묵은 박달나무에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나무에 단검을 푹 박고 껍질을 벗긴 다음 단숨을 몰아쉬다가 힘있게 시를 쓰기 시작했다.
백두산석 마도진 두만강수 음마무 남아 이십 미평국 후세수칭 대장부
어인 일인가싶어 군사들이 우르르 모여들었으나 거의다 까막눈들이여서 눈만 슴벅거리며 웅성거리는데 류자광이 달려와 그 글자들을 보더니 목청을 돋구어 읊었다.
백두산 돌은 칼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물은 말 먹여 다 말리리 남아 스물에 나라 평정 못한다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박달나무가지들이 이슬을 뿌리며 설레이고 거기로 강순이 달려왔다. 그 시는 그날로 행군종대의 부대들에 파다하게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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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그닥 넓지 않은 강물을 건너온 남이는 풍치수려한 양지바른 언덕에 전몰한 용사들의 묘들을 나란히 썼다. 그런데 묘들을 쓰고나니 비석은 아니라도 패말은 세워줘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들의 이름이며 고향주소를 전혀 모르고있었다는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하는수없이 동료군사들을 따로 불러내여 이름자와 고향주소를 크게 새겨 패말들을 박도록 지시했다. 패말들을 다 박고난 군사들이 묘들에 절을 하고 돌아간 다음에도 남이는 언덕의 솔밭속에 머리를 수굿한채 그냥 서있었다. 강바람에 동달이군복자락이 날리며 그 붉은색안천이 드러나 언뜻거렸다. 그는 무관벼슬에 오른 후 처음으로 군대안에 력대로 흘러내려오는 구습과 기풍을 두고 깊이 생각하게 되였다. … 모를 일이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어째서 군영안에서 군관들과 군졸들이 가까이 지내는것을 허물로 여기는가? 어째서… 무슨 연고로 군관은 군관끼리 군졸들은 그네들끼리 보이지 않는 장막을 치고 지내는가. 그런 공기속에서 지냈으니 내가… 거느리고 싸우는 군사들의 이름이며 고향을 죄다 모를수밖에… 아, 군관들과 군졸들사이에 정이 통하고 흐르는것이 싫은가. 왜 그리도 경계하는가. 과연 모를 일이다. 모를 일이야… 그래서 내가 저 여섯 군사들 시신을 실어가겠다고 했을 때 강순총대장과 어유소까지도 공연한짓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일어난 회오리바람에 재빛락엽들과 뿌연 먼지구름이 날아올랐다. 남이는 동달이군복자락을 펄럭이며 솔밭에서 내려오다가 걸음을 멈추고 침울한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때 아래쪽에서 벅적 떠들고 떽떽거리는 호령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을 여겨보니 몸매 다부진 한 갑사가 관복차림의 웬 뚱뚱보와 말다툼질을 하며 산자락으로 올라오고있었다. 관복차림의 행색으로 보아 뚱뚱보는 이 고장 고을의 형방벼슬아치 같았다. 그 벼슬아치는 남이앞에 와서 위엄스럽게 헛기침을 하며 위혁적으로 을렀다. 《귀관이 뉘신지 모르겠지만 당신이 거느린 군졸놈들한테 곤장을 쳐야겠소.》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나이 사십은 되였을 뚱보는 새파랗게 젊은 남이의 벼슬품계를 얕잡아보았던지 발까지 구르며 호령했다. 《에키 고약한 놈들, 누가 여기다 군졸들 무덤을 쓰라고 했는가, 관가의 승낙도 없이… 이 언덕에는 북변 유학의 거성 송암어른이 누워계시오!》 남이는 고개를 약간 숙여보이며 일부러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그러자 뚱보는 더 기승을 부렸다. 《천하에 이런 불손이 있는가, 앙?! 말들을 강물에 끌어들여 물을 먹여 말들이 오줌을 갈기지, 찌를 싸지 에 퉤-》 《나리, 그게 어쨌단 말이요?》 《뭐 뭐-?! 저기 저 버들방천 명월루에 도관찰사어른이 와계시오. 우리 고을원님이 귀빈을 명월루에 모셨어. 알기나 아는가?!》 《허 이거 죄송하오이다.》 《죄송하다? 엉? 그게 다야?! 관찰사어른이 명창명기들의 가무를 즐기며 산천경개를 탄상하시는데 기가 막혀서… 말들이 오줌을 갈기고 강물에… 청신한 공기를 다 흐려놓았으니 이… 이… 이런 무도하고 불경막심한짓이 어디 있는고? 이 고을 방어사, 원님은 대노하야 저 군졸놈들을 당장 곤장을 쳐서 쫓아버리라 령을 내렸어!》 북관의 비바람과 해볕과 전진에 거멓게 그을린 남이의 얼굴이 별안간 사납게 찌프러지고 눈에 분노가 번뜩였다. 《명월루가 어디 있소?》 하고 남이는 나직이 물었다. 《뭐야-?》 형방벼슬아치는 그 기상에 반발하듯이 거칠게 소리쳤다. 남이는 그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옆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성큼성큼 걸어내려갔다. 어찌된 일인지 뒤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나는것 같더니 《아유 이 일을 어쩌노-》 하는 비명소리가 올랐다. 남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형방벼슬아치가 앞에 황황히 달려와 넙적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리였다. 《상대장나리- 제-발, 제발 용서하시오이다. 이 시골놈이 몰라봤소이다-》 아마 갑사가 무어라고 귀띔한것 같았다. 서울의 량반들이나 오위군의 군사들중 그가 태종임금의 외손이라는것을 모르는이가 별로 없었던것이다. 형방벼슬아치는 눈물을 빗씻으며 자기가 명월루까지 모셔다드리겠노라고 자청해나섰다. 명월루는 수양버들가지들이 휘늘어진 버들방천속에 합각지붕을 건듯 쳐들고 서있는 단청무늬 현란한 루각이였다. 남이가 그 루각밑에까지 갔을 때 우에서는 어떤 녀인의 간드러진 노래가락, 뚱땅거리는 장고소리, 기생들의 요사스러운 웃음소리, 량반들의 《좋다-》, 《좋지-》 하는 환성, 박수치는 소리들로 들썩했다. 남이가 뒤돌아보니 형방벼슬아치는 어느새 빠져나가 루각으로 올라갔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하는수없이 남이가 동달이소매의 먼지를 천천히 터는데 웬일인지 우에서 노래가락이며 장고소리가 뚝 멎는다. 남이는 화강석층계를 따라 루각으로 올라갔다. 정각으로 들어서는 문곁에 형방벼슬아치가 읍하고 서있는데 안쪽에는 하나같이 얼굴빛이 희멀쑥한 7∼8명의 량반들이 산해진미의 료리들이 차려진 주안상둘레에 엉거주춤 서있다. 기생들은 겁을 먹고 구석쪽의 붉은 루주곁에 몰켜가 서있고…술내와 향긋한 분내가 흐르는 화문석돗자리우에 나이지숙한 두 량반만 틀지게 앉아있는데 제일 상좌의 범나비수염에 턱수염을 길게 기른자가 도관찰사이고 볼이 처지고 군턱이 진 늙은이가 고을원인것 같았다. 남이는 그들에게 의젓한 몸가짐으로 인사말을 건네였다. 《지나가던 길손으로서 어르신네 취흥을 깨쳐 죄송하오!》 그러자 관찰사가 황송해하며 남이에게 고을원을 인사시키고 원이 말을 더듬거리며 서있는자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는데 놀랍게도 그중 다섯은 모두 고을의 방어사들이였다. 관찰사가 자기곁에 자리를 권하며 같이 앉아 명월루의 가을풍치를 즐기자고 청했다. 남이는 문득 올라산성싸움에서 전몰한 군사들생각이 가슴을 쳐 분노가 욱 치밀었다. (싸움판에선 군사들이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리는데 예서는 기생을 끼고 술판이라…) 남이는 관찰사곁으로 가지 않았다. 방금전까지 량반들의 무릎에 앉아있은것이 분명한 예쁘장한 기생이 분내를 풍기며 그한테 날렵하게 안겨들어 관찰사가 권하는 자리로 끌었다. 남이는 기생을 부드럽게 물리치고 고을원에게 말했다. 《나는 원님에게 할말이 있어 찾아 들어왔소!》 늙다리원은 눈이 휘둥그래져 남이를 지켜보며 채머리를 덜덜 떨었다. 《아니… 아니… 내가 어쨌다고요…?》 《우리 군사들 묘를 쓴걸 가지고 뭐라고 하셨소? 제 나라 땅인데… 어떤 선비 묘소곁에 군사들 묘를 썼다고 뭐라고 했소? 그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군사는 그만한데도 묻힐 자격도 없는가요?!》 《아니 어쩌지 않았는데…》 《우리 군사들이 강물에 말을 끌고 들어가 물을 좀 먹였는데 뭐라고 했소?!》 《아-니 이런, 나는 아무 소리 안했소. 나는 몰라, 모르오!》 《원님, 그럼 얼마전에 야인들 지역에서 어떤 싸움이 있었는지는 아는가유?》 《예? 아… 아니 무관나리 무엇이라구요? 소인은 귀가 멀어 잘 듣지 못하오이다.》 그러자 관찰사가 얼굴빛이 불그락푸르락해서 건기침을 톺으며 고을원곁에 읍하고 서있는 문관출신 다섯 방어사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아느냐고 물었다. 《애햄… 저는 부친님 삼년제사가 있어 전주에 갔다 어제야 돌아왔는걸요. 헤헤…》 《관찰사나리, 저는 요새 리질을 만나 바깥출입도 변변히 못했소이다.》 《나리, 저는 요새 허리증이 도져 내내 방구석에 누워있어…》 방어사라는 다섯사람중 세명이 이렇게 발뺌을 하고 나머지 두명은 야인지역에서 싸움이 있었다는 정도로밖에 몰랐다. 도관찰사는 어쩔바를 몰라 쩔쩔매다가 짐짓 주먹으로 무릎을 치며 개탄하는척 했다. 《지척에서 어떤 싸움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면서 고을의 방어사라고? 엉? … 황소 웃다가 꾸레미가 터지겠어. 나라에서 타먹는 록봉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던가?!》 그리고는 남이에게 자기가 엄하게 조처하겠으니 널리 량해하고 상경해달라고 빌었다. 남이는 그 소리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고을원만 지켜보며 오금을 박았다. 《내 매해 저 군사들 묘소에 찾아오겠소. 묘를 함부로 옮긴다거나 허술히 거두었다가는 생벼락을 맞을줄 아시오!》 분노한 남이의 호령소리에 량반들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남이가 도관찰사에게 차거운 눈길을 던지고 휙 돌아서는데 고을원이 남이를 붙잡으려고 헤덤비며 일어서다가 주안상을 걷어차는 바람에 그만 호로병이 넘어져 딩굴며 술이 쏟아졌다. 남이는 그런 꼴을 돌아보지도 않고 루각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구역질이 나서 거기에 더 있을수도 없었던것이다. 그날 오후 남이는 행군종대와 함께 말을 타고가며 줄곧 명월루에 뛰여들었던 일만 생각했다. … 한개 고을에 무슨 방어사가 그리도 많은가. 고을원을 비롯해서 여섯이라… 듣던 소문처럼 모두 얼굴이 해말쑥한 문관나부랭이들이다. 선비가 군사를 주도하는 방어사라… 이건 분명히 음풍영월이나 읊조리고 기생을 끼고 술놀이나 하는 문관나부랭이들한테 나라의 록봉을 타먹게 하자는 수작이다. 저런것들이 륜번으로 돌아가며 방어사벼슬을 차지한다지 않는가. 한데 우리 무관들은, 군사들은 어떤가. 나라를 지켜 싸우다 죽어도 변변한 묘자리 하나 차례지지 않어. 어-기막힌 일이로다. 더럽다. 고약한 형방벼슬아치놈, 뭐가 어쩌구 어째? 어느 선비묘소근처에 군사들 묘를 썼다고 야료를 해?! 괘씸할지고… 그러다가 문득 저 고을원늙다리가 앙심을 품고 후에 군사들의 묘를 다 파버리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뇌리에 번개쳤다. 걷잡을수 없는 의혹과 분노가 터져올랐다. (젠장, 아까 그 술상을 왜 군도로 내리치지 못했던고… 음풍영월이나 읊조리는 저런 매미같은 작자들이 방어사라? 저것들이 나라를 지켜 피를 흘리겠는가?!) 그의 분노는 해질녘부터 어머니와 딸 구을금의 생각 그리고 집에 찾아왔다던 아씨생각이 떠올라 좀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산들바람이 얼굴을 스치였다. 무연하게 흘러내린 산발들이며 길가의 나무들도 황금빛락엽을 날리며 그를 반겨 마주 달려오는듯… 길게 늘어선 행군종대는 의연히 의기양양해서 발걸음을 옮겨갔다. 화포들의 수레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 어느 군졸인가 건드러지게 불어대는 풀피리소리… 2
경신아씨는 얼굴이 능금처럼 발갛게 익어 뜨락의 정자나무밑에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나무그늘로 흘러드는 해빛그림자가 얼굴이며 어깨에 떨어져 아롱다롱한 무늬를 그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까치울음소리가 경신의 가슴을 더 울렁이게 했다. 며칠전부터 강순총대장이 이끄는 원정군부대들이 한성으로 돌아오고있다는 소문이 서울장안에 떠들썩하게 퍼지고 그와 더불어 남이의 무훈에 대한 풍설도 사람들속에 선풍처럼 날아돌았던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적마다 못내 기쁘고 반가와 가슴이 한껏 부풀었으며 그러다가도 남모르는 자책감에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충의에 넘친 그런 장수를 《불한당》으로 봤으니 자기야말로 얼마나 속이 여물지 못하고 천박한 계집인가 하는 모멸감에 잠기게 되였다. 그리고 남이의 이름이 민심을 뒤흔들수록 그런 모멸감이 더해지는가 하면 그 명성에 반발해 속이 뒤틀려지며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이윽고 아버지 병구완을 하는 시녀가 다가와 대감님이 찾는다고 조용히 일렀다. 경신은 얼른 일어나 궁궐같은 집안으로 총총히 들어갔다. 경신은 부친을 그지없이 따르면서도 은근히 두려워도 했던것이다. 리진강의 방에는 도교와 유교, 불교의 경전들이 그득차있는 서류장들과 이름난 성현들의 명구들이 새겨진 족자들이 두 벽에 묵직이 드리워져있는데 밝은 빛이 흘러드는 문쪽의 대폭족자에는 일심(-心)이라고 휘갈겨 쓴 두 글자가 새겨져있다.(그것은 언제인가 리진강이 의분에 떨리는 주먹에 먹물을 묻혀 쓴것이였다.) 그 족자앞에 놓인 백자화분에서 참대가 천반에 닿을듯말듯이 자라오르고있었다. 경신이 방에 들어섰을 때 로환에 몸져누운 리진강은 자주빛비단홑이불을 덮고 약탕관을 머리맡에 놓은채 눈을 꾹 내리감고 누워있는데 쉬는지 무슨 상념에 골똘하고있는지 알수 없었다. 방안에 초약냄새만 연하게 떠돌았다. 경신이 조심스럽게 곁으로 다가서는데 병약한 아버지는 눈을 크게 뜨고 딸을 돌아보았다. 《얘야, 게 앉거라.》 그리고 경신이 앉자 진강은 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쥐였는데 손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아버님, 좀 어떠세요?》 《음, 괜찮다.》 《그래도…》 《너도 들었겠지만 북방정벌에 나갔던 우리 원정대가 서울로 돌아온다누나. 대승했으니 참말 장해! 장해…》 그리고 아버지는 해소기침을 몹시 기었다. 《병조에서 하는 소리가 오늘 오후쯤에 강순총대장이 원정대를 이끌고 서울에 들어설것 같다고 했다.》 《그래요?!》 《나는 몸이 이래서 못 나갈것 같구나. 우리라고 이런 경사날 어찌 가만있을수 있겠냐. 그러니…》 대감은 딸에게 집안의 하인들을 모조리 내보내여 전공을 떨친 군사들을 축하하게 하라고, 그것이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관례이고 도리라고 말했다. 원정대도착소식은 경신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경신의 나이또래 처녀들 누구나가 그러하듯 경신이 역시 영웅남아에 대한 환상이 남달랐고 더우기 자기를 구해준 남이도 이번기회에 똑바로 보고싶었다. … 그날 오후 서울의 거리거리들에서 사람들이 이기고 돌아오는 군사들을 보겠다고 종로쪽으로 달려갈 때 경신이도 하인들을 모조리 다 내보내고 자기도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한창 바쁘다니까 철없는 시녀가 어느새 마주보기 민망스러울 정도로 분을 요란하게 바르고 나타나 한참이나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럭저럭 준비가 끝나고 종로거리에 나와보니 사람들이 하얗게 떨쳐나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임금님이 내보냈다는 고취악대가 풍악소리를 요란하게 울리고있었다. 내우가 심한 량반집 부녀들은 물론이요, 려염집 아낙네들도 뒤켠 여기저기에 몰켜서서 한길쪽만 발돋움하며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정네들과 초립동이들은 구경하기 더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고 서로 찾고 부르며 이리저리 뛰여다녔다. 와-와- 떠드는 소리… 그런 혼잡을 이룬 중생들속에서 호떡이며 과일꾸레미들을 들고 앞쪽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드세찬 아낙네들…우정 버티고 서서 들어서려는 아낙네들과 몸싸움, 말싸움하면서 걸죽한 롱말을 건네는 흉측한 축들도 있었다. 경신이는 아예 앞자리를 단념하고 뒤켠에 물러나 구경하기로 했다.… 저기 행랑거리앞에 커다란 물드무를 내다놓고 거기에 탁배기를 쏟아붓는 장사치들의 모습도 보였다. 갑자기 어른들 짬에 끼여서 주위를 살펴보던 꾀바르고 장난기가 심하게 생긴 여라문살 갓 넘었을 외태머리 총각녀석이 손을 번쩍 쳐들고 다급한 소리로 《온다!》 하고 웨쳤다. 수많은 눈길들이 그 자그마한 손이 가리킨 곳을 보다가 자기들이 속히운것을 알자 녀인들쪽에서는 가벼운 웃음이 터져나왔고 남정들쪽에서는 《고현놈!》 하고 욕지거리를 하였다. 삽시에 수많은 눈길을 받은 총각애는 제가 마치 개선장군이나 된듯 헤벌쭉 웃다가 뒤에서 넘어온 거쿨진 주먹에 애꿎은 이마빡만 주어맞았다. 이윽고 군사들의 선두대렬이 나타나고 전장의 살벌한 기운이 거리를 휩쓸기 시작했다. 숲을 이룬 창검들이 해빛에 번쩍이고 군사들의 얼굴은 볕에 타고 싸움판의 흙먼지에 부대껴서인가 하나같이 흙빛인데 시큼한 땀내가 확확 몰아쳐왔다. 생기발랄한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모두 지칠대로 지친 기색들이다. 마중 나온 량반들과 백성들은 처절한 감정에 휩싸여 숨을 죽이고있다가 일시에 격정과 환호를 터뜨려 웨쳐대기 시작했다. 《군사들-장하이-》 《수고들-했네-》 《잘-싸웠네-》 《고생들 했겠네-!》 군사들도 그런 환영에 화답하여 반겨 웃어보이기도 하고 팔들을 번쩍 쳐들어 흔들기도 했다. 여러 아낙네들이 달려나가 그들에게 호떡이며 과일꾸레미를 안겨주는가 하면 전장에서 살아돌아온 아들을 얼싸안고 돌아가는 로인들도 있었다. 그런 열광속에서 호떡이며 과일쪼각을 입에 문채 꼽새춤을 우습강스럽게 추어대는 군졸들도 보였다. 비단치마저고리차림의 경신은 따라나온 시녀와 함께 백마를 타고 느릿느릿 지나가는 강순을 흠모의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명실공히 그는 북방정벌의 장수였다. 하지만 이 시각 사람들은 또 한명의 장수, 남이장군을 찾기 시작했다. 《여-군사들, 소문난 남이장군 어디 있어-?》 군사들속에서 누구인가 큰소리로 화답한다. 《여-뒤쪽에-뒤에 와유-》 《아-남이장군-》 《장-군-!》 사람들의 열광적인 부르짖음소리가 터져오르자 뒤켠에 몰켜서있던 규방의 부녀들과 아씨들이 내우며 부끄러움이며 다 잊고 와르르 밀려나왔다. 저쪽켠에서부터 와-와- 하는 함성소리가 높은것을 보아 아마 남이가 오는 모양이였다. 남이의 름름한 모습이 가까이 올수록 경신은 자기가 점점 작게 느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확실히 남이는 소문에 있는바대로 거인이였다. 사람들을 압도하는 억센 기상, 대범한 몸자세, 사려깊은 눈길… 경신은 시대의 거인으로 우뚝 일어선 남이의 남아다운 그 기상에 존경 아닌 다른 감정이 싹트고있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였다. 그러거나말거나 남이는 밝은 얼굴로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저으며 지나갔는데 야속하게도 이쪽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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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의 가을은 봄날처럼 화창하고 따뜻했다. 제비들은 멀고먼 강남으로 갈 차비를 하느라고 집집의 지붕이며 처마끝에 주런이 앉아 새로 태여난 새끼들한테 날기재주를 익혀주느라고 야단스럽게 우짖어댔다. 화단들에도 백일홍, 만수국 등 갖가지 꽃들이 아직 시들지 않고있었다. 그즈음 운종가 광천교가까이에 있는 남이의 대궐같은 집은 개선영웅을 맞아 명절기분으로 흥성거리였다. 부대들이 한성으로 돌아온 날부터 이틀동안 아들은 오위도총부에 나가 바삐 지내다가 저녁늦게 집으로 들어오군 했다. 낮이면 경복궁쪽으로부터 의정부와 6조의 유명짜한 당상관, 당하관 부인네들이 가마와 사인교(큰 가마)를 타고 찾아와 인사도 하고 정선공주한테서 남이의 무훈담도 듣고 갔다. 그 부인네들은 거의다 정선공주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는가 하면 옆구리를 살그머니 찌르며 이 집 남이가 이제는 무훈도 세웠겠다 더 높은 벼슬자리로 승진할것이라고 귀띔했다. 이러한 날이면 행랑문지기 종로인은 새 두루마기를 갈아입고 대문안에 읍하고 서서 가마가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였다. 어느날 오전에는 공조참판의 로부인이 돌아갈 때 대청마루방에서 나와 신발을 신다가 깜짝 놀라 《아유 고와라-》 하고 탄성을 터치며 화단쪽으로 다가갔다. 손님을 바래러 나왔던 정선공주는 무슨 영문인가싶어 그쪽으로 따라갔다. 화단의 동백나무가지에 하얀 동백꽃 한송이가 숫저운듯 푸른 잎새로 얼굴을 살짝 가리우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있었다. 공조참판의 로부인은 곁에 다가온 정선공주의 손을 덥석 잡으며 이 댁에는 경사에 경사가 겹치겠다고 하였다. 정선공주는 환히 웃었다. 경사우에 새 경사라면 아들한테 새 반려가 생긴다는 소리가 아닐가! 어머니는 기쁨에 겨워 가슴까지 활랑거려 그게 무슨 소린가, 그런 징조라도 보이는가고 물었다. 로부인은 한숨을 조용히 내쉬며 말했다. 다른 집도 아니고 하필 이 집 동백만이 가을에 꽃을 피웠겠는가. 그것도 이렇게 탐스러운 하얀 꽃을… 징조면 이런 길조가 어디 있겠는가. 두고보라. 이제 이 동백꽃처럼 살결이 맑고 천하절색인 가인이 며느리로 들어올것이라고 장담했다. 공조참판의 로부인은 정선공주를 데리고 뜨락의 구석진데로 가서 뒤숭숭한 소리도 하였다. 혹시 잡귀신이 비쳐들면 길조가 흉조로 뒤번져지는 경우도 있으니 대문에 부작을 크게 써붙이고 무녀를 데려다가 굿을 올리는게 좋겠다고 귀띔했다. 어머니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잡귀신이 비친다면 남이의 전실, 권씨며느리의 령혼이 훼방을 놓을수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 그래서 그 아씨가 한번 오고는 다시 찾아오지 못하는것일가… 로부인이 떠나간 다음에도 정선공주는 그 동백꽃을 유심히 여겨보고 또 보았다. 보면 볼수록 소담하고 탐스러웠다. 그 발랄한 생기와 신성한 기운은 남이가 없는 사이 집에 찾아왔던 경신아씨한테서 풍기던 심령의 향기 그대로이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듯 한 꽃송이는 그날 숫저워하던 경신의 자태와 흡사했다. 아픈 마음으로 동백꽃을 쓸어만져보니 손끝에 이슬기가 느껴졌다. 아, 이슬인가 눈물인가… 그날 밤 어머니는 아들에게 동백꽃이야기며 저녁녘에 로부인이 한 말… 속상한 마음을 다 털어놓았다. 아들은 야속하게도 껄껄 웃어댔다. 어머니와 아들사이에 이런 말들이 오갔다. 《왜 그렇게 웃느냐?》 《어머님, 신상도 여의치 않사온데 어서 쉬세요.》 《잠이 와야 자지? 이 사람아, 이 어미는 그 아씨가 돌아간 다음 며칠밤을 뜬눈으로 새웠어. 온 나라가 영웅처럼 떠받드니 저를 키운 어미도 한낱 시골 할망구로 보이느냐? 응?!》 《허참, 어머니, 쌈판에서도 어머님을 한순간도 잊은적 없어요.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이 저한테 용맹을 떨치게 했어요!》 아들의 그런 고백은 어머니를 더 섧디섧게 만드는듯 했다. 《야밤중에 네 방에 들어가 혼자 꼬부리고 자는걸 보면 가슴이 쓰려서 온밤 자지 못하는걸 알기나 아느냐.》 남이는 어머니의 하소가 괴로운듯 《그만해요.》 하고는 끙 돌아누웠다. 정선공주는 남모르는 괴로움을 안고 사는 아들의 심정이 마쳐와 그 큰 어깨를 어루쓸다가 슬며시 화제를 돌렸다. 《휴- 큰사람이 전장에 나가있는 사이에 문효량이네는 패가망신을 다 했어…》 《…?》 문효량은 남이와 아이적부터 송아지동무였었다. 《효량이네 일때문에 서울장안이 떠들썩했지…》 《무슨 일이 있었어요?》 《무슨 일이라니 기가 막혀서… 참… 효량이 그 사람이 예쁘장한 첩을 맞아들였는데 본댁이 들고일어나 머리끄뎅이를 틀어잡고 당장 내쫓는다 야단법석을 떨고 첩은 독약을 먹고 죽는다고 태질하고… 그게 무슨 망신이람… 그 얌전하던 본댁이 글쎄 환장을 했지…》 《효량이 나쁘지요. 그 본댁하고 혼사말이 있어 왔다갔다할 때 어쨌어요. 업고 다닐것처럼 하더니 벌써 첩이라니?!》 《이 세월에 첩을 두지 않는 량반이 몇이냐. 세상풍조가 그러니 효량이 그 사람이라고 어찌겠냐?》 《남아라면 일구이언하지 말아야지. 의리가 있어야지요. 어제는 울고불고 하더니 오늘은 벌써 축첩이라, 엑- 사람도…!》 정선공주는 제 아비의 혼백을 그대로 닮은 아들이 못내 대견하여 고개를 알릴듯말듯 끄덕이였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정선공주는 남편 남휘의 결곡한 성미를 두고 생각하다가 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뜨락으로 나갔다. 가을밤은 벌써 선기가 들어 서늘한데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했다. 어느 구석에서인가 귀뚜라미가 귀따갑게 울어댔다. 여느날 밤에는 그 소리가 끝없는 송사질로 들려왔는데 이밤에는 애끊는 속삭임소리로 들렸다. 정선공주는 시름겨운 한숨을 호- 내쉬며 하늘을 우러렀다. 둥그스럼한 하늘에는 그 수를 헤아릴수없이 무수한 별들이 보석을 뿌려놓은듯 반짝이고 그 별천지의 복판으로 은하수의 희붐한 흐름이 굽이쳐흐른다. 예로부터 현인들은 이 땅에 아기가 태여나면 저 하늘에도 아기별이 나타나며 사람이 죽으면 그 별도 꺼진다고 했다. 정선공주는 남이가 태여난 후 밤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어느것이 아기의 별일가 하고 온 하늘에 널린 별무리들속을 끝없이 살펴본적도 있었다. 자기 아기의 별은 남달리 크고 광채를 뿜는 별이여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별은 없었다. 저 별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별들이 그보다 더 크고 반짝이는것 같았으며 다른 별무리들속을 찾아 헤매면 별들은 저마끔 숨박곡질하듯 자기가 짚이면 숨어버리는것이였다. 속상하여 눈물까지 나왔다. 정선공주가 그러한 일들을 돌이켜보는데 문득 은하수가까이에서 별찌가 눈부신 포물선을 그으며 근처의 별무리들속으로 날아들어 아주 사라졌다. 정선공주는 너무 놀랍고 신비하여 머리가 핑 돌아가고 눈앞이 검스름한 어스름에 자욱히 덮이는듯 했다. 정선공주는 그길로 근처에 있는 복술의 집으로 달려가 아들의 불행을 뜻하는듯 하니 부작을 써달라고 간청했다. 복술은 눈을 감고 이윽토록 경문을 내리엮더니 한지에 글자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귀신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듯 한 부작을 그려주었다. 정선공주는 그 부작을 대문바깥면 복판에 붙여놓으니 한결 근심이 덜어지고 마음속이 든든해지는것 같았다. 3
이튿날 이른새벽, 누군가 대문을 쾅쾅 두드리며 《여봐라-》 하고 엄한 목청으로 호령했다. 깊은 잠에 들었던 행랑문지기 공덕로인은 이건 또 웬 녀석이냐 하고 두덜거리며 기침을 쿨렁쿨렁 기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대문밖에서는 또다시 호령소리가 터져올랐다. 《빨리 대문 열어라! 상감마마 어명이시다-》 종로인이 기겁하여 황황히 대문을 여니 풍채좋은 문관이 들어섰다. 그 문관은 크지 않은 둥그런 패쪽을 쑥 내민다. 종로인은 그것이 임금의 급한 호출이 있을 때 쓰는 《명소패》라는것을 알아보자 땅에 넙적 엎드려 절부터 하였다. 남이의 집에는 복닥소동이 일었다. 남이는 머리가 핑 돌아가 방복판에 우두커니 서있고 어머니는 남이에게 새로 지어온 무관복을 입혀준다, 관모를 씌워준다, 다심하게 살펴보며 돌아갔다. 남이는 허리에 각띠를 맨 다음 비단관복의 팔소매도 쓸어보고 쌍호가 수놓인 흉배도 만져보고는 차림새가 어떠냐는듯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얘야, 어찌된 일이냐. 너 혹시 나라에 해되는 일을…》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리였다. 《원, 어머님도 절 모르십니까?》 《그럼 어이하여 이런 신새벽에… 전하께서…?!》 《무슨 알아볼 일이 생겼겠지요.》 《아니… 이런 새벽에…》 《전하께서야 국사로 주무시지 못할 때도 종종 있겠지요.》 그날 새벽 남이는 이렇게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집을 나섰으나 달리는 가마에 앉아 공연히 속이 켕겨 침울한 얼굴로 바깥의 어스름을 내다보았다. 서울장안거리는 희부연 안개속에 묻혀있어 집집의 지붕들이며 이따금 지나가는 행인들이 모두 환영들처럼 희미하게 어른거리는듯 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리시애란의 전장이며 야인지역 정벌 때 일들을 더듬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감마마한테 노여움을 살만 한 일은 없었다. 《명소패》를 품고왔던 문관이 탄 말은 앞에서 뚜벅뚜벅 가볍게 걸어가고 가마를 멘 교군들은 뒤떨어지지 않자고 헐헐 단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재게 놀리였다. 그 바람에 가마는 물결우에 실려가는듯 흐느적이였다. 남이는 일찌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통하여 임금을 못내 사모하며 따르게 되였다. 임금은 키도 크고 담도 크고 기운도 장사같아서 태조대왕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했다. 그리고 눈이나 눈섭, 수염도 다 위풍이 름름하고 너무나도 용맹이 넘쳐나 아버님인 세종대왕도 《너처럼 용맹한 사람은 부드러움을 배워야 한다.》고 이르시며 이름도 부드러울 《유》로 지었다고 했다. 매사에 다심한 세종대왕은 《너처럼 용맹스러운 사람은 옷도 넓은 옷을 입어야 한다.》고 일러 소매가 넓은 옷을 입게 되였으며 그래서 《소매 넓은 나으리》라는 별호까지 가지게 되였다고 했다. 정선공주도 어려서부터 장난이 심하고 드세찬 아들한테 품이 넓은 옷을 지어 입혔었다. 흐르는 어스름속에 경복궁지붕이 바라보였다. 하늘에 날아오를듯이 처마를 날개같이 쳐든 그 왕궁은 왕가의 외손인 남이에게 있어서 전혀 생소한 곳은 아니였다. 아주 어릴적 이 외손한테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곳이였다. 기기묘묘한 단청무늬들이 호화찬란한 어느 루각, 어느 기둥, 어느 벽, 어느 다리에나 청룡, 황룡, 백호, 주작, 현무, 불가사리, 해태 등 무서운 짐승들이 당금 뛰여나올듯이 도사리고있었던것이다. 네살인가 나던 어느 봄날에는 엄마따라 경회루에 올라갔는데 가없이 넓은 늪과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물우에 펼쳐진 련꽃들의 바다에 그만 어리치고말았다. 아이는 너무 희한하고 기뻐 새꼬리만 한 머리태를 날리며 《야-》 하는 탄성과 함께 루각안을 돌아쳤다. 장난에 정신이 팔린 아이는 련꽃을 따려고 루각아래로 달려내려갔다가 그만 악- 하고 소리치며 뒤로 발랑 넘어졌다. 다리목에 웅크리고있던 해태가 무섭게 울부짖으며 날아왔던것이다. 그날 밤에 아이는 꿈에 두번이나 해태를 보고 와-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겁먹고 오돌오돌 떠는 아이를 품에 꼭 안고 잔등을 다독여주었다. 《얘야 무서워말아라. 그건 해태라는 짐승인데 돌로 만든거란다.…》 《해태? 해태라는건…?》 《뭐랄가… 잡귀신… 사악한 나쁜 놈한테만 달려들어 잡아먹는 짐승이란다. …》 《돌로 만들었다면서?》 《너한테도 날아들지 않던?》 《응… 그랬어…》 《봐라 나쁜 놈만 오면 그래… 넌 좋은 사람이니까 해태가 도로 돌로 되였지. 불가사리도 그래… 불가사리는 불을 잡아먹는 짐승이야. 외할아버지가 계시는 왕궁이랑 한성 천지 집들이 다 나무로 지었거든. 불만 나면 다 타버려. 그래서 불가사리도 왕궁을 지키는거다. 무서워말아라. 호랑이도, 현무도 다 널 고와하는 외할아버지를 지키자고 있는거야…》 《음… 그렇나?!》 《이담에 커서 장수가 되여 나쁜 놈들을 다 쓸어버리면 저 해태랑 불가사리랑 다 제 집으로 돌아가. 너를 제일 고와하는 외할아버지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음…음… 그렇구나. 나 장수가 될가?…》 어머니는 아들을 꼭 안아주었다. … 추억을 싣고 달리던 사인교는 경복궁의 남쪽대문인 광화문앞에서 멎어섰다. 앞에 섰던 문관이 말에서 뛰여내렸다. 그가 번쩍이는 창을 들고 서있는 수문병한테로 다가가는데 왕궁의 정문수직실인 수문장청에서 칼을 찬 장수가 걸어나왔다. 장수는 문관이 내민 《명소패》를 보자 공손히 읍하고는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남이는 거대한 왕궁의 태고연한 고요에 눌려 문관의 뒤를 따라 홍례문쪽으로 숙연하게 발걸음을 옮겨갔다. 가슴이 쿵쿵 뛰였다. 경복궁은 일찌기 고려 숙종때 세웠던 남경 별궁터인데 그 자리가 좁아 조금 남쪽으로 옮겨 넓은 곳에 조선의 정궁을 건립하였었다. 경복궁자리는 고려때부터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명당자리로 알려졌다. 한성의 지세는 북쪽의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왼편에 락산, 오른편에 인왕산, 남쪽에 산세가 사납지 않은 남산이 있으며 서울의 명당수인 청계천이 북서에서 동으로 흘러가는가 하면 한강이 동쪽에서 흘러들어와 서쪽으로 유유히 흘러나갔다. 경복궁은 이런 명당자리의 아늑한 지대에 자리잡고 남동향으로 앉아있다. 경복궁부지는 긴 장방형인데 남쪽의 정문인 광화문, 동쪽문인 건춘문, 서쪽의 영추문, 북쪽의 신무문… 그 네개 문들의 배치를 보면 태고적 선조들의 사신도를 련상시킨다. 광화문은 주작, 건춘문은 청룡, 영추문은 백호, 신무문은 현무를 상징한다. 남이는 문관을 따라 홍례문을 지나 영제교에 들어섰다가 다리목에 웅크리고있는 해태의 괴이한 조각상과 다리밑 명당수의 번들거리는 흐름에 순간적으로 눈길을 팔게 되였다. 앞선 문관이 흘깃 돌아보았다. 남이는 마음이 긴장되였다. 그들이 근정문에 이르렀을 때 남이는 갑자기 무슨 혼돈이 일었던지 문관을 그냥 따라 동쪽의 일화문쪽으로 돌아서는데 그 문관이 비양조의 미소를 머금고 서쪽문을 가리켰다. 남이는 그제야 문관들만 동쪽 일화문으로 다니고 무관들은 서쪽 월화문으로만 다니게 되여있다는것을 상기했다. 남이는 불쾌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건 뭔고, 상감마마 부름을 받았는데도 다른 문으로?) 그는 여느때 같으면 무어라고 한마디 온곱지 않은 소리를 했으련만 전하의 부름을 받은 때라 불쾌감을 묵새기며 월화문으로 걸어들어갔다. 4
경복궁의 근정전이란 군주가 근하게, 부지런히 정사를 다루는 정전이란 뜻으로서 문무백관들이 엎드려 절하며 임금을 칭송하거나 축하하는 례식, 국가적인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사절들도 접견하는 법전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큰 학 두마리가 쌍을 지어 하늘로 날아오르는듯 한 겹처마의 그 웅장한 기와지붕건물은 밖에서는 2층으로 보이나 안은 천정이 아찔하게 높고 바닥이 드넓은 통칸이였다. 리성계가 1394년, 리조개국 3년만에 자기 힘을 내외에 시위하려는 야망밑에 국고를 다 기울여 지은것이다. 근정전의 외부 합각지붕이며 내부의 호화찬란하고 신묘한 장식들은 고려왕권을 찬탈한 리성계일당의 끝없는 야심과 허영심, 무제한한 권력의지를 반영하고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중세기적환상이 빚어낸것이다. 그 건축물에는 당대의 유교철학사상과 종교적신앙, 미신까지 반영되였다. 《우물》천정의 신비롭고 현란한 단청무늬… 그 중심부에 품으면 천하를 얻는다는 전설의 구슬, 여의주를 희롱하며 꿈틀거리는 황룡 두마리가 그려져있다. 그 쌍룡의 머리, 가슴,배, 다리, 꼬리, 발에 덮인 금빛비늘들의 번쩍거림… 그 억센 기상과 생동함에 찬탄과 함께 소름까지 끼쳤다. 그날 새벽 남이가 근정전에 들어서자 이윽하여 동쪽 출입문가에 으리으리한 관복차림의 네댓명 고관대작들이 들어와 나란히 서는것 같더니 홀연 무엇이라고 이름할수 없는 신성한 기운이 정전안에 회오리치는듯 했다. 그리고 거구에 기세가 용용한 리유임금(세조)이 느릿느릿 걸어나와 어좌에 앉았다. 남이는 자신이 어떻게 임금앞으로 달려나갔으며 어떻게 엎드려 어명대로 대령했음을 아뢰였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가슴이 마냥 벅차올랐다. 《어- 남이장군이로군!》 임금의 그 호걸스러운 목소리는 저 어좌뒤에서 찬란히 빛나는 해와 달, 푸른 창공으로부터 은은히 울려오는듯 했다. 《과인이 그대를 찾은건 국사가 아니라 오늘 새벽에 잠을 깨니 어찌나 보고싶은지…》 남이는 목이 꺽 메였다. 《상감마마- 황공하오이다!》 《네가 보고싶었다. 어머니 의산군부인도 무고하시냐?》 《예-이-!》 《과인의 심경은 그렇지 않다만 군주로서 늘 국사에 쫓기다나니 근자엔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구나.》 남이는 엎드려있다가 얼결에 고개를 들었는데 그만 가슴이 철렁 내리고 자기 눈에 의심이 갔다. 남이는 일찌기 상감이 백성들이 어렵게 사는데 왕실도 사치를 멀리해야 한다면서 궁궐안의 벽들에서 호화로운 벽지들을 긁어냈다는 소리를 들은적 있었다. 허나 제 눈으로 직접 소매가 넓은 야청색무명도포차림에 짚신을 신고있는 임금을 보게 되자 눈굽이 찡- 저려들었다. 그는 마루바닥에 이마를 박은채 울먹이였다. 임금은 근심어린 눈길로 그를 굽어보다가 집에서 무슨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도 생겼느냐고 물었다. 남이는 얼굴을 번쩍 쳐들고 절규했다. 《전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그러시면 안되오이다. 임금은 백성의 우상이요, 나라의 얼굴이온데 어찌 이렇듯 옥체를 괴롭히시나이까. 이렇게 되신건 우리 신하들 불충이오이다!》 《헛허허… 백성이 없으면 임금도 없고 임금이 없으면 백성도 없느니라… 그런 소리 다시는 입에 올리지 말어!》 왕가에서 태여나 충군으로 살아온 남이에게는 세조의 이 말이 눈물없이는 받아안을수 없는 금언처럼 느껴졌다. 남이는 크게 감복했다. 세조는 화제를 돌려 리시애란을 평정한것과 야인들을 정벌한데 대해 치하했다. 《… 강순한테서 다 들었다. 잘 싸웠어. 특히 남이가 잘 싸웠다. 어- 사실 태조대왕 종친들이 있는 함길도에서 민란이 일어난건 큰 우환거리였다. 리시애 그놈이 한성으로 남하한다고 헛소문을 퍼뜨리자 전주, 충주요-, 경주요-, 거제도요- 꼬리를 사리는자들이 한둘이 아니였다. 헛허… 남이 네가 큰 공을 세웠다.》 화제가 리시애란으로 옮겨지자 남이는 문득 자기가 목격한 함길도백성들의 피페한 모습들과 민란포로들의 당당한 얼굴이며 피타는 절규가 되새겨져 가슴이 서늘히 식어드는것을 느꼈다. 그리고 사그라졌던 번민이 다시금 머리를 쳐들고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남이는 임금에게 묻고싶었다. 임금은 이렇듯 검박하게 살며 부귀를 멀리하는데 백성은 어찌하여 제 한목숨 부지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궁핍한가. 이 나라 산야에서 얻어지는 그 많은 쌀과 무명, 갖가지 재물들은 다 어디로 가느냐. 어찌하여 임금의 말과 뜻과는 달리 백성은 더더욱 도탄에 빠져 민란을 일으키지 않을수 없게 하는것인가. 그가 이런 생각을 하며 서늘하고 괴로운 표정으로 덤덤해있는데 세조가 어좌에서 움쭉 일어나 곤룡포자락을 펄럭이며 걸어와 남이의 무관복속에 손을 넣고 가슴노리며 허리와 잔등을 조심스럽게 만져보는것이였다. 순간 당황해졌던 남이는 세조가 어릴적부터 자기를 사랑해준 갖가지 일들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 이렇듯 정깊으신 우리 임금, 내 어찌 언감생심 이런 임금에게 불측한 물음을 할 생각을 순간이나마 했단 말인가. 남이는 임금의 자애에 가슴이 뜨거워 자기의 번민을 덮어버리고말았다. 차마 물을수 없었던것이다. 봉건왕권의 아스라하게 높은 탑밑에서 무자비하게 짓뭉개여지는 백성의 곤욕과 임금이 생색을 내는 과도한 검박함사이에 무제한한 부귀영화를 탐하는, 처세와 뻔뻔스러운 아닌보살이 있음을 끝내 리해하지 못하고 남이는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끝지점을 향해 가고 또 갔다. … 세조는 남이의 잔등을 철썩 쳐주고는 어좌로 돌아가 앉아 화색이 도는 얼굴로 벽밑의 고관대작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과인은 오늘 새벽 이상한 … 무서운 꿈을 꾸었소. 그 꿈 해몽을 같이해보자고 이른새벽에 경들을 불렀으니 미안하오.》 그 꿈이야기는 다음과 같은것이였다. … 새벽에 침전밖에서 숨이 넘어가는듯 한 말울음소리가 들렸다. 임금이 놀라서 뛰여나가보니 뜨락에 피투성이가 된 말이 서있는데 그밑에 웬 장수가 떨어져있었다. 그 장수는 남이였다. 남이의 어머니 정선공주가 남이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면서 전장에서 리시애가 독을 묻힌 화살로 아들을 쏘았는데 남이의 가슴노리를 뚫었다고 했다. 그때 모두발로 길길이 뛰여오른 룡마가 주먹같은 눈물을 휘뿌리면서 빨리 금강폭포에 가서 거기 생명수에 미역을 감기면 살아날수 있다고 했다. 세조는 만사를 제쳐놓고 수백리밖에 있는 금강폭포로 말을 달렸다. 폭포에 이른 세조는 생명수가 소리치며 내리는 절벽밑으로 남이를 업고 들어가서 그 생명수에 미역을 감기니 숨졌던 남이가 후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세조가 너무 기뻐 남이의 팔목을 끌고 물가에 나오니 뜻밖에도 따라왔던 룡마가 죽어넘어져있었다. … 놀라서 눈을 뜨니 꿈이였다. 세조가 이런 꿈얘기를 하며 벽밑에 앉아있는 고관들에게 이것이 길몽이냐 흉몽이냐며 같이 해몽을 해보자고 경들을 불렀다고 했다. 고관들은 모두 생각에 잠겨 잠자코 앉아있는데 유독 한명회만이 움쭉 서둘러 일어났다. 그는 한꿈에 주검 두구를 봤으니 흉몽하고도 아주 나쁜 악몽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세조는 노성을 내질렀다. 《남이가 살아났으면 됐지 말이 백필이 죽은들 무슨 큰일이냐?!》 그러자 고관들이 앞을 다투어 자리를 차고 뛰여일어나며 길몽이다, 아주 좋은 꿈이다 하고 소리쳤다. 남이는 임금의 뜨거운 인정에 어쩔바를 몰라하다가 벌떡 뛰여일어나 절절히 간하였다. 《상감마마, 옥체의 소모를 마다치 않으시고 소신을 그토록 념려해주시니 신은 천은에 어찌 보은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나이다. 신하된 몸으로 전하의 친애는 감격하오나 심기를 해하는 과념은 삼가해주시길 부디 바랄뿐이오이다.》 세조는 그윽한 눈매로 당돌한 남이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내전이 떠나갈듯이 웨쳤다. 《남이는 과시 충신이로다!!- 여봐라, 도승지!》 《예-이-》 하고 시꺼먼 턱수염을 보기 좋게 기른 도승지 민준이 일어섰다. 세조는 싱그레 웃으며 그한테 일렀다. 《어- 도승지는 춘추관에서 올려보낸 송시를 어디 읊어보라. 과인도 한번 더 듣고싶노라.》 도승지는 서너걸음 앞으로 나서서 임금에게 절한 다음 관복소매에서 백지두루마리를 꺼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전하께서 이미 보아주신 이 송시는 대사헌 량청지대감이 북방을 평정한 무공을 칭송하여 지었소이다.》 그리고는 나직이 떨리는 목소리로 읊어내리기 시작했다. 시는 첫부분에서 리시애란의 발발, 세조의 어명이 떨어지자 한성과 도들에서 부대들이 관북으로 구름처럼 밀려가는 장면을 노래하고 민란의 절정에로 넘어갔다. 처음에 운률을 약간씩 붙여가며 읊어내려가던 도승지는 관군과 폭동군의 격전대목의 절정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채머리를 떨며 손세를 써가면서 목청껏 부르짖기 시작했다.
적의 무리- 달아났으나- 적의 기발- 아직도- 서있구나- 우리- 날랜 장-수들- 사자처럼 싸우고- 싸웠어라- 대부대 뒤따라- 추격하니- 어- 바람소리- 학의 울음소리- 장내가 홀연 전장으로 변하여 화살들의 날음소리, 군마들의 울부짖음, 군사들의 함성이 들려오는듯 했다. 격정에 떠는 랑송자의 손에서 풀려내린 백지마리자락도 백학의 날개처럼 너울거린다.
질겁한… 질겁한… 적들- 변방에 살구멍 찾아 오락가락 가짜 장수 뉘우치고 적의 괴수 묶어다가 우리 군사들앞에 바쳤네 그- 그- 목을 썩둑 베여서 한양으로 급히 보냈더니 저자거리에 매여달았네 한번 움직여 세번 이기니 북방인들모두- 수그러지네- … … 아, 나라는 예전처럼 굳건한데 산천은 더 빛을 내누나 나라 위풍- 멀리 퍼지고 전승의 공훈 날로 빛나 남쪽 왜구들에게 그 소문 들리자 북쪽의 오랑캐도 간담이 서늘해 중원에서도 찬사 아끼지 않고 왜놈들 겸손히 고개숙여 험-한 산 넘고 깊은- 바다- 건너 사신걸음 서로 잇닿았구나-
랑송이 끝나자 정전안에 태풍직후의 정적… 그 시정의 여운이 흐르는 속에 임금이 갑자기 웃음소리를 호탕하게 터뜨렸다. 《흐아 흐아 흐아 … 목을 썩둑 베였다…! 썩둑! 썩둑! 과시 명구로다! 이런 명시가 세상에 또 다시 있을소냐!! 한대감!》 그 순간 남이는 한명회의 남달리 큰 머리가 눈앞에 우렷이 떠올랐으며 그가 요즘 병환으로 령의정의 자리에서 잠시 물러앉아 보양중이며 임금과 사돈간이라는것까지 생각났다. 임금이 그한테 묻는다. 《한대감, 경의 소견은 어떠하오?》 한명회는 웬일인지 약간 동안을 두었다가 격정에 목이 메여 겨우 대답하는듯 했다. 《… 전하, 운문에 둔재인 소인이 감히 무슨 소견을 올리겠나이까. 신의 우둔한 생각으로는 이 송시가 량청지대감 시재의 소산이라고만 볼수 없소이다…》 《…?》 《만약의 경우 전하께서 온 나라 군대를 일거에 불러일으켜 역적무리들의 란을 쓸어버리지 않았다면, 우리 장수들과 군사들이 전하의 어지를 받들어 맹호처럼 싸우지 못했다면 이런 시가 나올수 있었겠소이까?! 저 중국의 굴원이나 두보의 명시들도 이 시에 견줄바가 못되오이다. 썩둑! 이 희세의 시구에만도 담대하고 용용하고 호협한 전하의 기개가 비껴있나이다. 이 동천하 어느 시에 이런 주옥같은 명쾌한 시구가 있나이까. 없소이다! 없소이다!!》 세조가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고개를 알릴듯말듯 끄덕이다가 주먹을 흔들며 소리쳤다. 《옳아! 과시 옳은 말이요!! 허허허…》 장내에 격정의 열파가 몰아치는듯 했다. 세조는 불같은 눈으로 남이쪽을 보며 큰소리로 물었다. 《남이! 야인추장의 목도 썩둑 잘랐다지?!》 《예-이-》 동쪽 벽밑의 고관대작들이 환성을 터뜨리며 술렁거리였다. 《그자의 목은 누가 잘랐느냐?》 《류자광이 번개같이 달려나와…》 《처음 듣는 이름이다…》 《건춘문을 지키던 갑사온데 이번에 잘 싸웠나이다.》 《허 갑사라… 갑사로 두기는 아까운걸!》 세조는 잠시 말을 끊고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그윽한 눈빛으로 남이쪽을 지켜보았다. 《내 경의 시도 보았어. 승정원에서 상주했더군. 대단해… 백두산돌은 칼을 갈아없애고 두만강물은 말을 먹여 다 말린다니 장군이 지닌 그 기개, 그 충의는 이 나라 무부들의 귀감이요 우리 왕가의 자랑일세! 경들 그렇지 않소-?!》 대감들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전하, 그렇소이다-》 《전하, 나라의 경사오이다!!》 그 우렁한 호응의 잔향이 장내에 메아리쳤다. 남이는 격정을 못이겨 흐느껴 울었다. … 임금이 어좌에서 일어나 나간 뒤에도 남이는 자리에 그냥 엎드려있었다. 그는 감사의 눈물을 머금고 집에서 속이 새까매서 기다리고있을 어머니를 생각하였다. 동녘하늘은 벌써 푸름푸름 밝아오고 근정전처마끝에서는 새들이 날아예고있었다. 앞에서는 정전에서 갓 나온 고관대작들이 무엇이라고 수군거리며 걸어갔다. 웬일인지 그들의 발걸음이 가벼운것 같지 않았다. 가슴이 한껏 부풀어오른 남이는 주춤거리며 그들의 뒤를 따르다가 성급해져 앞질러 나가려고 활개를 크게 저으며 기운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다가 그만 주먹으로 한 고관의 팔굽을 툭 건드렸다. 그 고관은 한명회였는데 사팔뜨기눈을 번뜩이며 남이를 지켜보다가 뇌까렸다. 《젊은이, 잘 살펴가게나.》 남이는 시까스르는 그 소리에 《명심하리다 나리…!》 하고 대답하였다. 신이 아닌 그는 앞으로 이러루한 일로 하여 어떤 어망처망한 후환이 닥칠것인지 상상도 할수 없었던것이다. 그날 아침 남이는 가마에 올라타서 교군들에게 흰소리까지 던지였다. 《여 인차 해가 뜨겠군. 허허 배가 출출한걸…》 교군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이튿날 정오에 남이의 집으로 사복시에서 나이지긋한 별감이 찾아왔다. 사복시란 궁중에서 쓰는 말과 수레, 목장을 관리하는 중앙관청이였다. 찾아온 관리는 목을 우야 눌러서인지 좀 석쉼하고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승정원에서 무슨 기별이 왔으리라 믿어 아뢰오.… 오늘 아침 전하께서 1등급 제주말을 나으리께 하사하는 은총을 베풀었소이다.》 《예?! 황공하나이다…》 남이는 얼결에 이렇게 대답했으나 얼떠름해졌다. 5
남이는 찾아왔던 별감의 당부대로 오후 첫 시간에 회양동의 사복시양마장으로 나갔다. 어머니 정선공주도 따라나섰다. 하늘은 푸르고 선들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넓은 양마장의 목책안에는 수십마리의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있었다. 구석진데 있는 마구간쪽에서 어제 왔던 별감이 밤빛말 한필을 끌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갈기가 탐스럽고 허리가 늘씬한 말잔등에 윤이 흐르고 기름기가 번들거렸다. 별감이 입속말로 무엇이라고 웅얼거리며 잔등을 다독여주자 말은 새 주인에게 인사라도 하듯 앞다리를 약간 굽혀보였다. 그 순간 남이는 왕은에 목이 메여 말잔등을 슬슬 쓸어만져보다가 갈기에 얼굴을 묻고 뜨거운것을 삼켰다. 그때 어머니가 곁에 와서 아들의 잔등을 부드럽게 쓸어만지며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얘야, 이런 날에 너의 아비가 생존해계시면…!》 《어머니…!》 《큰사람도, 나도 이런 은총을 잊으면 사람이 아니지. 꼭 보은하기요!》 그때 여기로 사복시에 볼일이 있어 나왔던 리황세자가 나타났다. 아직도 코밑에 보슴털이 보르르한 19살의 왕세자는 웬일인지 랭소를 머금었다. 《이건 내가 점찍어두었던 말이야. 이런 멋진 룡마를 받아 좋겠는데… 상감마마 은총이 대단한만큼 언제나 왕은을 잊지 말어…》 《세자저하 명심하겠소이다.》 리황세자는 못내 아쉬운듯 말갈기털을 다시 쓸어만져보고 잔등에 앉은 등에를 쫓아주고는 고개를 수굿하고 말둘레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남이와 정선공주가 드리는 인사도 받지 않고 따라왔던 사복시의 별감을 데리고 가버렸다. 어머니는 얼굴이 해쓱하게 질려 조용히 한숨을 내쉬였다. 《이 사람, 저하가 아쉬워하오. 사양할걸 그러지 않았나? 이런 인사불성이 어디 있소?》 《원 별말씀을… 상감께서 하사하신건데 일없어요.》 《무슨 후한이 없을가?》 《원 어머니도… 헛허허…》 《아니 아니요. 어서 가서 다른 말과 바꾸자고 하오.》 《일-없어요!》 하고 남이가 짜증을 냈다. 정선공주는 그때 벌써 무엇을 예감했던지 만류하는 아들을 뿌리치고는 마사쪽으로 멀어져가는 왕세자를 뒤쫓아갔다. 남이는 먼발치에서 어머니가 세자앞에 굽신거리며 무엇이라고 간하는양을 지켜보다가 민망스럽기도 하고 속이 꿈틀거려 돌아서고말았다. 이윽고 세자한테서 돌아온 어머니는 근심스럽게 말했다. 《세자님은 괜찮다고 그냥 타라고 했지만 그 진속이야 어찌 알겠냐?》 《됐어요!》 《아사라, 사람일이란 모른다오. 별찮은 오해로 후일에 큰 화를 당한이들이 많다오.》 그날 남이는 어머니를 가마에 태워 먼저 집에 들여보낸 다음 한강가의 칠덕정으로 나갔다. 거기 넓은 훈련장에서 말을 한껏 달려보면서 새 말의 질주능력이며 특기, 습성, 좋지 못한 버릇이 없는가도 알아보고싶었다. 칠덕정의 드넓은 들판에는 한산한 기운만 떠돌았다. 훈련장에서 무술을 익히는 군사 한명 보이지 않고 풀을 뜯는 말들도 없었다. 들판 저쪽에서 학들이 날아가는것이 보일뿐이였다. 남이는 말고삐를 끌고 들판가운데로 스적스적 걸어나가 말갈기를 쓸었다. 말은 벌써 질주의 흥분이 오는듯 코김을 시큼하게 내불며 발굽을 재게 옮겨딛는가 하면 엉덩이근육을 부르르 떨었다. 남이도 격정이 북받쳐 말안장으로 뛰여올랐다. 말은 처음에는 슬쩍슬쩍 달리다가 다음에는 갈기를 날리며 구보로, 습보로 내뛰였다. 어느덧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귀전에 바람소리가 울부짖었다. 남이는 이름할수 없는 흥분과 쾌감에 신바람이 나서 《이러-! 이러-!》 하고 목청껏 소리치며 고삐를 휘둘러댔다. 그러다가 문득 누구인가 뒤쫓아오는듯 싶어 뒤돌아보니 칠덕정 저쪽 모퉁이로부터 한 기마수가 말을 성급히 몰아오고있었다. 오위도총부나 어디서 자기한테로 급파한 파발인듯 싶었다. 가까이 다가오는것을 보니 퍼그나 안면이 있는 우군시절의 별장이였다. 《우군장나리!》 《…?》 《방금전 우리 애들이 장거리에서 어떤 대감집사람들과 싸움을 했는데 싸움끝에 보니 이런 상주문이…》 남이가 받아보니 승정원에 가는 상주문이였고 보내는 사람은 사간원 대간 리진강이였다. 순간 남이는 범상치 않은 사태가 벌어졌음을 느꼈다. 《어떻게 된 연고냐?…》 《장군께서도 아시다싶이 어제부터 북벌원정군에 속해있던 군졸들이 이전에 자기가 속해있던 관청과 고을들에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우리 우군에서 내가 데리고있던 녀석들이 오늘 귀향하다가 무슨 연고인지 싸움판을 벌려놓았는데… 막상 일이 터지니 저한테로 달려왔습니다.》 《무슨 연고는 무슨 연고! 전하께서 하사하신 술을 마시느라 로상에서 술판을 벌려놓았겠지! 그만하면 알만 하다.》 남이는 이 일은 자기가 관여할바가 아니라고 생각되면서도 어떤 어려운 일에 부닥칠 때마다 먼저 자기를 찾아오는 수하장병들의 뜨거운 신뢰감을 느끼며 이번 일을 잘 조처해 후환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별장은 나를 따르라.》 … 리진강은 상주문을 올리려 승정원으로 향하던 종사관이하 하인놈들이 장거리에서 술마시던 군졸들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상주문까지 떼운채 돌아왔다는것을 알자 노발대발해서 어쩔줄 몰랐다. 당장에 마당 한가운데 형틀이 차려졌다. (제각기 고향으로 떠나는 숱한 원정군사들속에서 이제 어떻게 그 문서를 찾는단 말인가! 에익- 고현놈들!) 온 집안에 풍랑이 인듯 서늘한 랭기가 떠돌고 대청마루밑에 엎드려 처분을 기다리는 하인들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오듯 했다. 이제 불호령 한마디에 영낙없이 다리병신, 허리병신이 나올판이였다. 하녀들은 물론이고 경신이까지도 험악한 분위기에 전률하고있었다. 이때 행랑하인 하나가 뛰여들어와 남이장군이 찾아와 뵙자한다고 아뢰였다. (남이가…?!) 집안의 분위기를 보아서는 손님맞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지만은 도리상 찾아온 손님을 되돌려보낼수는 없어 마지못해 사랑채에 들게 하라고 일렀다. 긴장했던 이 순간 남이장군이 찾아온데 대해 집안사람들은 다행으로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남이는 마당 한가운데 놓여진 형틀과 집안공기를 일별하고나서 역시 무관답게 찾아온 용건부터 말하였다. 《대감님! 저의 군사들이 오늘 대감댁 사람들과 싸움을 벌렸기에 제가 이렇게 사죄하러 왔소이다.》 리진강은 깜짝 놀랐다. 《그들이 장군휘하의 군졸들이였소?》 《녜! 귀향하던 군졸들이였는데 제가 훈계를 바로 못해 오늘 일이 이렇게 번져졌사온즉 대감을 볼 면목이 없게 되였습니다. 자! 이것이 상주문이올시다!》 리진강은 상주문을 보자 그제서야 마음이 좀 풀어져 허- 허- 웃음을 지었다. 《장군휘하 군사들이 싸움을 잘한다길래 무슨 소린가 했더니 오늘 우리 애들이 단단히 졸경을 치르었나보오.》 《정말 면목이 없소이다. 야전생활에 거칠어진탓도 있겠지만 평소부터 신칙을 잘하지 못한 저의 과실입니다.》 《그것이 왜 장군의 과실이겠소? 내 알기엔 원정군이야 이미 해산되였고 이제는 장군휘하의 군사들도 아니지 않소?》 리진강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물론 이제는 내 휘하의 군사들이 아닙니다. 허나 그들은 얼마전까지 북방의 허허벌판과 험산준령들에서 나와 피를 나누었던 전우들입니다. 그들의 어제만이, 승전하고 돌아온 어제날만이 나의 차지이고 오늘의 추행은 그들의것이라 한다면 내 무슨 당당한 사내라 할수 있겠소이까? 이런 뉴대가 없이는 싸움을 못하지요.》 남이가 찾아온것을 직접 목격한 경신은 청년장군에 대한 동경심이여선가 어느결에 사랑채와 잇닿은 문지방에 다가섰다. 장군의 당당하고 대바른 한마디한마디의 말은 가물에 단비처럼 처녀의 가슴속에 스며들어 련모의 싹을 피워올렸다. 한편 사랑채에서 대감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집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라져 활기를 띠였다. 눈치빠른 하인녀석들과 부엌어멈, 행랑채의 검정개까지도 사기가 올라 뛰여다니기 시작했다. 잠시후 주안상이 차려지고 주객의 례에 따라 술이 부어졌다. 《참, 일전에 듣자니 범에 쫓기던 우리 딸애를 장군이 구해주었다던데 정말 감사한 일이요. 그러고보면 딸애의 생명의 은인이니 응당 례의를 차려야지!》 리진강은 곁에 있던 시녀에게 빨리 가서 경신이를 데려오라 분부했다. 남이는 순간 리대감 따님에 대해 쓴 어머니의 편지내용이 떠올랐다. 자기 품에서 소스라쳐 뛰쳐나가던 모습도… … 경신이는 자기가 어떻게 사랑채에 들어섰고 어떻게 남이장군에게 술을 따라드렸는지 의식할수 없었다. 다만 술잔을 받을 때 사람을 깜짝 놀래우리만치 우렁우렁한 목소리로《고맙소.》 하던 말만이 귀전에 남아있었다. 어지간히 술기운이 오르자 병환에 있던 리진강의 얼굴에 피로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는 남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공은 정말 젊구만, 젊어… 정말 부럽네.》 아버지의 이 말은 곁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경신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이윽고 몸에 불편을 느낀 리진강은 안방으로 들어가고 남이는 주인을 하직하고 마당으로 나왔다. 남이가 대문가에 다달았는데 갑자기 시녀가 다급하게 달려나와 우리 아씨가 잠간 뵙자고 한다는것이였다. 의아한 눈길로 뒤를 돌아보던 남이는 잰걸음으로 다가서는 경신의 자태를 홀린듯 바라보았다. 처녀는 남이에게 생명을 구해준 그 은혜에 변변한 사례의 말 한마디 못해 미안하노라며 귀한분이 가시는데 대문밖까지라도 배웅하게 해달라며 청을 드렸다. 남이는 처녀의 흠모어린 눈길을 받자 당황해졌다. 요행 이때 행랑채에 있던 별장이 남이의 말을 끌어내왔다. 무심히 말에 눈길을 돌리던 경신의 입에서 불현듯 어마나-! 하는 탄사가 튀여나왔다. 《…?!》 순간 남이는 이 처녀가 말을 많이 다루어보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말은 전하께서 하사하신 제주말인데… 아가씨도 말에 대해 조예가 깊으신가 보오.》 경신은 미소를 띠운채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탈줄 아오?》 요행 말건덕지가 생겨 두사람은 거북했던 감정에서 벗어나게 되였다. 《녜… 약간…》 남이는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물론 북방정벌시 말탄 녀무사들을 더러 보아왔지만 서울의 한다하는 대감집 규수에게 이러한 취미가 있다는것은 무장인 남이에게 있어조차 쉽사리 리해되지는 않는 일이였다. 하긴 남복을 하고 사냥터에 나갔던것을 보아도 처녀의 남다른 성격의 일단을 짐작할수는 있었다. 《그럼 래일쯤 한번 같이 달려보지 않겠소?》 갑자기 불쑥 들이대는 남이의 이 청은 처녀에게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안겨왔다. 인생길을 함께 달려보자는 달콤한 속삭임처럼 느껴져 가슴은 마냥 설레이기 시작했다. 남이도 처녀의 그윽한 그 눈길이 점점 자기의 마음을 사로잡음을 느끼게 되였다. 하지만 소탈한 남이는 이러루한 감정따위에 자기 인생의 전부를 거는 작은 인간이 아니였다. 느끼는바 그대로 즉시 표면에 자기 감정을 로출시키는 얄팍한 인간도 아니였다. 서너마디 말이 오갔지만 경신이는 이것을 느꼈다. 이것은 정녕 풀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한두마디 말에 정이 통하게 되고 그 인간의 전체 상을 느끼게 되는 이런 수수께끼를 풀수 없는 까닭에 우리 조상들은 아마 《연분》이라는 말을 생각해냈으리라! 하여 다음날 남이와 경신이를 태운 두필의 말은 가지런히 서서 가락맞게 발걸음을 옮기게 되였다.
훈련장 저쪽 버들방천쪽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우짖음소리,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남이와 경신 두 청춘남녀는 희열에 들뜨고 가슴가슴이 설레여 말우에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게 되였다. 아마 경신이가 자그마한 거리감도 느끼지 못하는 이 현실은 남이의 소탈한 태도에 많이 관계될것이다. 《나리, 전하께서는 북방에서 세운 전공때문에 나리를 만나주셨나이까?》 《그렇소…》 《서울장안에도 소문이 다 퍼졌나이다. 장군이 리만주추장의 목을 치던 얘기랑… 목을 치니 피가 한동이나 쏟아졌다던데…?》 《내가?!》 그리고 남이는 껄껄 웃었다. 《녜…?》 경신은 의아해서 그를 돌아봤다. 《목을 벤건 내가 아니라 류자광이라는 갑사요. 내가 야인정벌에 데리고갔던 갑사요.》 《아니, 그런걸 모두들…》 《나는 그 추장과 결투해서 쓰러뜨렸을뿐이요.》 《일 대 일로요?》 《놈이 청해서 그렇게 했소.》 《호… 그렇군요! 함길도 민란, 야인정벌때 싸움판소문이 어찌나 빨리 퍼지는지 한성 장안사람들은 만나면 그 얘기부터 했나이다.》 《우리 어머니는 내내 뜬눈으로 밤을 지새다싶이 했다오.》 《귀한 아드님을 싸움판에 내보낸 어머님이야 어찌 그러지 않겠나이까?》 《만백성의 우국지심인가 보오.》 《대승하고 한성으로 개선한다는 소문이 돌던 어느날 밤,병석에 누워계시던 아버지가 저한테 몰래 귀띔했나이다. 이번의 대승과 장수들 개선을 다 기뻐하는건 아니라고… 개국공신후손들인 훈구고관대작들의 안색이 좋지 못하다고 했나이다.》 《허… 그건 무슨 소린가?》 《이번 전승을 배경으로 새로 등장한 장수들 세력에 저들이 밀려날가봐 그래서 시기한다던데… 시기, 질투 이런건 왜 사람들한테 있는지 모르겠나이다.》 남이는 웬일인지 근정전에서 자기를 지켜보던 한명회의 얼굴이 언뜻 떠올랐다. 《허, 그런건 맹수들한테도 있소. 생기는 먹이를 제가 다 차지하려는… 에익, 이런 소리 말고 시원하게 달리자구.》 남이는 말고삐를 툭 건드렸다. 《살같이!》 경신이도 나직이 부르짖었다. 두필의 말은 가지런히 모두발로 내뛰였다. 가락맞게 울리는 말발굽소리, 흩날리는 말갈기… 얼굴을 후려치는 세찬 바람, 귀전에서 태풍처럼 울부짖는 바람소리,… 남이는 질주의 쾌감을 못이겨 호탕한 웃음소리를 허공에 날렸으며 경신은 그 기상에 신명이 나서 말고삐를 휘둘렀다. 남이는 갑자기 아이적 장난기라도 살아올랐던지, 상대를 기쁘게 해주고싶었던지 슬그머니 말고삐를 뒤로 당겨 경신의 말을 앞세웠다. 그런 기미를 눈치채지 못한 경신은 신명이 나서 말을 더 기운차게 몰아댔다. 남이는 호탕하게 웃으며 목청껏 소리쳤다. 《더 빨리! 더 빨리! 홧하하… 내가 지겠는걸…》 경신은 뒤를 휙 돌아보고는 채찍을 휘두르며 더 세차게 말을 몰아댔다. 그때 남이는 문득 처녀의 잔등에서 들뛰는 칠흑같은 머리태끝에서 나풀거리는 연분홍댕기를 띄여보았으며 그 나이에 이른 아씨들은 흔히 자주빛이나 보라빛댕기를 머리태에 들이기마련인데 어째서 애어린 처녀애들처럼 하필 연분홍일가 하고 생각했다. 그것은 언뜻 지나간 생각이였다. 그날 남이와 경신은 훈련장둘레를 여라문번이나 돈 다음에야 속이 좀 후련해져 버들방천속으로 들어갔다. 한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그 기슭에는 인적도 없었다. 바람에 버드나무가지들만 고요히 설레이고 땀에 젖은 두필의 말은 가지런히 서서 풀을 뜯고있었다. 경신은 말을 타고 그처럼 질주의 쾌감에 취하여 떠들썩하게 달려온것이 갑자기 수줍어져 화끈 단 량볼을 싸쥐고 조용히 앉아있었다. 남이는 그로부터 대여섯걸음 떨어진 풀밭에 퍼더버리고 앉아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을 건넸다. 《말을 괜찮게 타는걸…》 《흉을 보시나이까?》 《흉이라니? 함길도에 가보니 관북아녀자들도 말을 잘 탔소. 반란군쪽에도 녀기마수들이 300여명이나 있다고 했소.》 《…참! 애는 잘 있나이까?》 남이는 물끄러미 경신이를 바라보았다. 《댁에 찾아갔을 때 떨어지지 않겠다고 해서 애를 먹었나이다. 나흘전 꿈에는 내가 오지 않는다고 울지 않겠나이까?》 이렇게 무랍없이 말하던 경신의 눈가에 이슬이 고였다. 남이는 말을 달릴 때의 그 활달하고 용용한 기세하고는 판판 다른 경신의 모습에 저으기 놀랐다. 봄볕처럼 따스한 처녀의 인정미! 그 봄볕의 푸른 들판에 딩굴고싶었으나 눈을 내리뜨며 자신을 다잡느라 인차 화제를 돌렸다. 《말타기는 어디서 배웠소?》 《아빠한테서… 아버지는 문관이지만 기마술에도 능하고 병석에 눕기 전에는 무예도 즐겨 칼쓰기, 활쏘기랑 드문히 하군 했나이다.》 경신의 목소리는 자랑스럽게 울렸다. 남이한테는 그 소리가 여간 반갑지 않았다. 《아, 그렇군!》 알고보니 경신이의 증조부는 고려 공민왕때 무신이고 조부도 무부였으나 아버지는 세종임금이 총애한 문관이였다. 아버지대에 와서 무부의 대가 끊어졌으나 그 정신만은 피속에 그냥 흘렀다. 《저는 외동딸이였고, 어머니는 아들을 못 본 그 자책감에 늘 안색이 밝지 못했다고 해요. 그래서 아이적부터 저한테 남복을 입혀 키웠다나요…》 처녀의 마음은 어느덧 유년시절로 되돌아간듯 했다. … 외동딸은 아장아장 걸어다닐 때부터 사내애들하고만 놀았는데 그 애들도 자기네와 같은 사내로 여기는데 습관이 되여 스스럼없이 굴었으며 바람개비돌리기, 돌팔매질, 연띄우기 같은 장난질도 같이하였다. 여라문살 되자부터 아버지한테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배웠다. 그무렵 한 감때사나운 애녀석하고 무슨 일로인가 싱갱이질하다가 씨름이 붙어 서로 붙안고 돌아갔다. 그러다가 어떻게 된노릇인지 그녀석이 제김에 엎어지는 바람에 녀석을 깔고앉아 목을 누르게 되였다. 녀석은 밑에 깔려 악을 쓰며 뻐드럭거리다가 그를 떠밀어버리고는 덴겁하여 뛰여일어났다. 그녀석은 무슨 영문인지 눈이 화등잔처럼 되여 경신이 계집애다-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씨름구경을 하던 녀석들이 와르르 밀려들어 깡충깡충 뛰여오르면서 계집애, 계집애 하고 손벽을 치며 돌아갔다. 세상에 《더없을 수모》를 당한 처녀애는 얼굴을 싸쥐고 폴싹 주저앉아 앙-앙- 울고 그 애 짝패인 사내애가 주먹으로 감때사나운 그녀석의 얼굴을 힘껏 후려쳤다. 코피가 터졌다. 그날 밤 어머니는 눈물지으며 이제 사내를 쳤다는 소문이 온 장안에 퍼질텐데 이 일을 어찌느냐, 어느 량반집에서 너를 며느리로 데려가자고 하겠니 하고 꾸짖었다. 그리고는 내가 남복을 입혀 널 키운게 잘못이였다고 한숨지었다. 남이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경신의 가슴앞에 드리운 윤이 흐르는 머리태와 연분홍의 갑사댕기에 자주 눈이 팔렸다. 댕기는 경신의 가슴이 오르내릴적마다 한떨기 호함진 연분홍꽃송이처럼 싱싱한 향기를 풍기는듯 했다. 경신은 남이의 그 눈길에서 무엇을 느끼는지 숫저워하며 머리태를 어깨너머로 슬그머니 치워버렸다. 《… 사내녀석하고 그런 일이 있은 뒤 엄마는 제 머리태에 이런 갑사댕기를 들였지요. 처녀애를 알아보라는 표적인지,나더러 채심하라는건지 호호… 간혹 잊어먹고 밖으로 그냥 나가면 야단쳤어요. 그래서 내내 댕기를 들인 머리태로 나다니게 되였지요. 돌아가신 다음에도 걱정많은 엄마생각이 나서 풀어놓지 못했어요. 생전에 어머니는 종종 멀리 시골로 이사가야 너를 시집보낼수 있을것 같다며 한숨지었어요.》 경신은 구슬픈 미소를 지어보였다. 《… 커서 인생사를 알게 되면서부터는 시집갈 생각이랑 없어졌는걸요.》 《그렇소? 그건 왜?》 《장군은 <칠거지악>에서 부조리한 점을 못 느꼈나이까? 소녀는 그중 한가지만은 참을수 없나이다.》 《한가지? 뭔데…?》 《질투라는건… 시골관가의 아전에서부터 한성의 고관대작들까지 첩을 두지 않은이, 기생한테 빠져있지 않은이가 거의 없다던데… 그래도 안사람이 질투하면 벌을 받는다니…》 경신은 마치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해 분한듯 얼굴이 새빨개졌고 남이는 그 모양이 귀여워 호탕하게 웃었다. 경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는 남이는 처녀에게서 풍기는 청신한 향기를 느꼈다. 경신의 내면세계는 참으로 이채로운 황홀경이였다. 그속에는 유아기의 천진성도 있었고 장난꾸러기의 익살도, 처녀다운 사랑관, 미래에 대한 강렬한 욕구도 있었다. 남이는 이 처녀에게서 사랑을 느꼈다. 언제나 진취적이던 남이의 발걸음은 여기서 멎어서버린듯 하였다. 사랑을 느끼는 순간 남이는 주저하였다. 서슴없이 자기의 눈길을 받으며 무엇인가를 기대하는듯 한 처녀의 눈빛은 더없이 매혹적이였다. 그는 두눈을 지그시 감았다. 버드나무가지들이 조용히 설레이고 누런 락엽들이 꿈속에서처럼 소리없이 흩날려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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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는 밤마다 련정이 끓어번져 모대기군 하였다. 하루는 아들이 걱정되여 방에 들어온 어머니에게 자기의 번민을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즉석에서 아들을 질책하였다. 호랑인줄 알았더니 내 아들이 시라소니였구나… 이튿날 바로 그 장소에서 두 청춘남녀는 다시 만났다. 첫날과는 달리 바람 한점없이 잠풍하고 아늑하여 인생의 명상에 잠기기 쉬운 날씨였다. 남이는 불현듯 처녀의 손을 잡았다. 《아씨, 노엽더라도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오. 나는 아씨와 혼인을 하려고 결심했소!》 경신이는 저으기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헌데 댁의 춘부장께서 병환이 깊다니 이런 일로 찾아가기도 딱하고… 이건 사실 춘부장께 엎드려 간해야 할 문제이오나 나로 말하면 이렇게 구혼할 처지도 못되는 사람이요. 속세의 중생들이 보기에도 전하의 은총을 받아 부귀영화를 누리는것 같지만…》 남이의 목소리는 약간 갈리기 시작했다. 《… 이 사람은 네해전에 상처하고 딸애 하나를 데리고 쓸쓸하게 살고있소. 그래서… 그래서… 그대와 혼인을 결심했소.》 처녀는 몸둘바를 몰랐다. 남이는 춘부장어른께 만나고싶다는 의향을 꼭 전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사흘후 북악산골안 이전의 그 소곁에서 기다리겠노라 하였다. 이 시각 버들방천도 숙연한 침묵속에 잠기였다. 6
북악산골안의 그 소는 두사람의 인연이 맺어진 곳이라 남이가 그곳을 선택한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남이는 공연히 속이 켕겨 딸애부터 업어주었다. 구을금은 무엇을 느꼈는지 아빠목을 꼭 끌어안으며 애절한 목소리로 따져물었다. 《아빠, 날 버리고 어디 가?》 《…?!》 《아빠, 저승이 어디 있어. 먼데야?》 《저승이라고?》 《엄마를 찾아오겠어.》 《할마니 데려올수 있다고 하였어.》 아마 어머니가 사람의 죽음이란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것 가슴에 못을 치는것이 가슴아파 그렇게 에둘러 말한것 같았다. 《엄마를 데려올래.》 《너 자꾸 그러면 못써.》 남이는 그렇게 말해놓고보니 가슴이 도끼에 찍힌듯 못견디게 저려들었다. 사흘뒤 남이는 약속한 북악산골안의 소곁에서 경신을 기다리면서도 딸애생각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그날 오후 경신은 늦게야 약속한 장소에 찾아왔는데 눈에는 피가 지고 얼굴은 해쓱하게 질려있었다. 경신은 울먹이지도 못하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 부친은 안된다고 소리쳤다. 남이는 의산군 남휘대감의 적자이고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장수지만 안된다. 내 딸아, 똑똑히 들어라. 남이는 한시절 좌의정을 지낸 권람의 사위다. 권람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할 때 크게 한몫한 작자다. 나어린 단종임금을 태호의 기상으로 옹위했던 김종서장군을 사살할 때 모사 한명회와 더불어 손에 피를 묻혔던 살인자이다. 한명회를 수양이한테 끌어다 붙인것도 권람이다. 한명회는 그후 수양의 신뢰를 밑천으로 삼아 몸값을 높여오다가 마침내 자기 딸을 수양의 아들 리황세자의 빈으로 들여보내는데 성공했다. 한명회는 이렇게 자기 권력지반을 닦아놓고 큰소리를 떵떵 치며 지내는 놈이다. 수양은 즉위하여 임금이 되자 친조카인 단종을 강원도 녕월쪽에 귀양보내고 나중에는 사약을 내려보내 독살했다. 왕실의 묵은 죄악을 아는 나로서는 귀한 딸을 권람이네와 피를 섞었던 남공에게는 줄수 없다. 그런 대역죄인네와 혼인을 맺었고… 권람의 딸한테서 딸애까지 본 사내가 아니냐. 안된다. 그가 설사 왕가의 외손이라 해도… 경신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 아버님은 장군이 일찌기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고 임금의 은총을 받게 된거랑 다… 아이… 권람대감의 덕이라고 하셔요.》 남이는 세상에 더없는 수모를 당한듯 가슴에서 분격이 터져오르고 주먹이 우들우들 떨렸다. 《부친생각은 그렇다치고… 경신의 생각은 어떻소? 그대도 내가 그런 놈으로 보이오?》 《…》 《부친과 의절하고 나한테로 오오! 우리의 연분은 하늘의 뜻이요!》 남이는 언제인가 공조참판의 로부인이 모친에게 잡귀신이 비칠수 있으니 대문에 부작을 붙이고 부녀들을 불러 살풀이를 하도록 일렀다던 일이 생각났다. (아- 이 경신의 아비야말로 잡귀신이 아닌가?!) 《의절을 하오!》 《…》 《부친과 나, 둘중 하나를 택하오!》 《병고에 계시는데 어찌…》 남이는 저도 모르게 장검을 뽑아들고 나무가지를 내리치며 울분을 터뜨렸다. 《이 요사한것! 당장 사라지라!》 경신은 애원이 분명한 눈빛으로 그를 흘깃 치떠보고는 맥없이 모로 쓰러져 통곡했다. 남이는 홱 돌아서서 말을 매둔데로 달려내려갔다. 그는 창을 맞은 맹수처럼 비틀거리며 정신없이 말을 끌고 산비탈로 내려갔다. … 휙휙 날아 지나가는 나무가지들이 얼굴을 후려쳐도 아랑곳없이 뛰여내려가며 전하를 모독한 잡귀신을 우선 의금부에 처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이 바스러지는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얼마후 남이는 말을 냅다 몰아 광화문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날은 마침 저자장이 서는 날이여서 길에 늘어선 행인들이 놀라서 비켜서며 뒤돌아보았다. (가자! 의금부로 가자. 전하가 얼마나 인자한 군주인지는 내가 잘 안다. 그 요설쟁이 늙다리독설가가 제명대로 살기 싫은거다. 가자 의금부로!) 그날 남이가 광화문앞에 이르니 창을 비껴들고 파수 서는 수문장청의 군사가 고개를 기웃하고 그쪽을 빤히 지켜보았다. 그 눈총에 웬일인지 가슴이 서늘해져서 말을 세웠다. (경신은 나를 믿고 아비한테서 들은 얘기를 죄다 털어놓았는데 그걸 묵새기지 못해 의금부에 고발한다면 그러면 내 무슨 남아인고… 그렇다고 가만히 잠자코 있다면 아, 내 무슨 상감의 신하인고…?!) 남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가당착에 빠져 심한 번민에 모대기며 관자노리로 식은땀을 흘렸다. 7
정선공주는 아들이 북악산쪽에 가서 경신아씨를 만나고 어두운 얼굴로 돌아온 날부터 내내 그의 눈치만 살펴왔다. 어머니는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면서도 지체있는 그를 어려워했고 울적해있는것을 보면서도 더 괴롭힐가봐 무엇을 캐여묻지도 못했으며 그저 한숨속에 날을 보내였다. 어머니는 자식이 철없을 때에는 다심하게 보살펴주다가도 그 자식이 어른으로 자라면 받들고 섬겨야 한다는 조선가정의 륜리와 법도를 고스란히 지켜왔던것이다. 남이는 밤마다 야밤이경이나 삼경이 지나도록 잠들지 못하고 번민하며 술만 퍼마시였다. 어머니는 손녀를 꼭 안고 가운데방에 누워있었지만 좀처럼 잠들수 없었다. 전날들에 자기와 아들의 신상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되새겨보았다. 아들과 함께 사복시에 임금이 하사한 말을 받으러 갔던 일, 군졸들의 란동으로 리진강대감집에 사죄하러 가 경신이를 만났다는 아들의 말을 듣고 기뻐하던 일, 그후 말을 함께 달릴 때보니 여간 세차지 않더라고 말하던 아들의 모습, 또 이번에는 아들이 경신이와의 약속대로 북악산에 간다며 집을 나서는것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을 울렁이였던가… 한데 어찌된 일인고? 밤새 처녀의 마음이 달라졌는가. 춘부장께서 거절한것인가. 아니면 그 아씨한테 새로운 혼처라도 생겼는가… 아무리 궁리해봐도 영문을 알수 없는 일이였다. 정선공주는 손녀를 안고 누워 고것이 불쌍해 눈물을 흘리였다. 이튿날 아침 남이가 군영으로 나갈 때 정선공주는 아들에게 무관복을 입혀주며 얼결에 묻게 되였다. 《큰사람이, 이거 어떻게 된 일인가. 경신이 마음이 돌아섰냐?》 《어머님, 너무 걱정말아요. 후에 이야기하지요…》 헌데 그때 철없는 구을금이 뽀르르 달려와 군영으로 나가는 아빠앞에 절하고는 《그 아씨 보고파. 언제 오나?》 하고 물었다. 《몰라!》 하고 남이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순간 딸애는 아빠가 뺨이라도 후려친듯 흰자위가 다 드러나도록 눈이 휘둥그래서 아빠를 치떠보다가 얼굴색이 까맣게 질려 기침까지 했다. 할머니는 너무 놀라 어린것을 황황히 달래며 기침이 멎으라고 잔등을 두드려주는데 왈칵 열물을 토하기까지 하였다. 녀종들이 기겁하여 달려들어와 토한 자리에 부랴부랴 걸레를 놓았다. 정선공주는 이 모든것이 악령의 작간으로 여겨져 눈을 내리뜨고 화들화들 떨며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찾았다. 그날 아침 남이는 뚝한 얼굴로 집을 나섰다. 오위도총부의 관청에 나가서도 딸애의 울음소리가 귀전에 그냥 들려오는듯 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후에 류자광이 찾아왔다. 천성이 대범한 남이였지만 요새는 번민에 끝없이 빠져들어 혼자 있기가 제일 싫었는데 사설쟁이 자광이 찾아온것이다. 게다가 술냄새까지 피우며… 남이는 그가 귀찮다기보다는 여간 반갑지 않았다. 그래서 대낮에 어디서 술을 마셨느냐고 싫은소리도 하지 않았다. 취기가 올라 얼굴이 수수떡처럼 벌개지고 눈에 피발까지 선 자광은 자리에 앉자마자 제 먼저 한잔 했노라 실토하며 건주정인지 불평부터 털어놓았다. 《상대장… 나으리, 왜 한성에 오자마자 제-기 우리 군졸들을 뿔뿔이 갈라놓소이까?》 남이는 허거프게 웃었다. 《그래서…?》 《그래서 마른 북어처럼 쭉-쭉- 찢어서 뿌려던졌지요. 시골들에- 서울에는 안주감만 하게 쪼꼼 남기고…》 《음-》 남이도 물론 그런 조치가 취해진것을 알고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력대로 내려오는 군대의 관례였다. 자광이 이에 대하여 물었을 때 한숨을 조용히 내쉬며 군대의 오랜 관습이겠지 하고 막연한 대답을 했다. 그리고는 이번에도 승정원을 통해 임금의 어지가 내리고 병조가 그 어지를 집행했노라고 했다. 류자광은 그 누구인가를 비웃어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허기야 잘허지유. 쌈판에서 같이 고생하면서 정이 들고 속심이 통한것들을 그냥 한우리속에 둬두면 장차 의기투합이 돼서 어떤짓을 할지 모르거든요. 군관들 모르게… 하하하…》 남이는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그 소리를 되새겨보다가 좀 깔끔한 소리로 물었다. 《자네 이런 소리하자고 나한테 왔나?》 《아니, 아니요.》 《…?》 《좀 들었나유?》 하고 류자광은 바투 다가앉으며 속살거렸다. 《뒤에서 몰래 돌아가는 소리가 이제 나리들은 품계가 오른다고 해요.》 《쓸데없는 소리…》 《아유- 깜깜이군요. 리조에서 새나온 소린데 나리는 판서로 올라갈거라고 해요.》 남이는 처음 듣는 그 소리에 저으기 놀랐으나 그런 내색은 내지 않고 신랄하게 물었다. 《야 이눔, 무관이야 병조에서 인사관계를 보지 리조에서 보느냐? 알아두라 리조는 문관만 봐.》 《아니 아니, 그런거 아니라 공조판서는 판서가 아닌가유? 정2품 벼슬에 판서…》 《헝, 무관이 목수따위 쟁인바치들을 거느린다 허허허… 정2품이 아니라 정1품이라도 싫다. 어느 놈이 그런 허튼 요설질을 했는지 고약한 놈 볼기를 칠가부다!》 《아유 이러지 마셔요. 전 그런 허튼 소문이라도 돌았으면… 넨장 상대장나리야 잘 아시지요? 리만주의 목을 누가 쳤는가요? 그런데 감감무소식이니. 제-기-》 《자광이, 너무 급급해하지 말어.》 《저는 다 아오이다.》 《…?》 《제가 적자가 아니라 서자라고 제껴놓겠지요. 어떤 때에는 죽고싶은 생각까지 들어유.》 남이한테는 그가 인품이 천박한 놈으로 보이기도 하고 한편 생각하면 측은하게도 여겨졌다. 《상대장어른, 올라산성에 같이 들어갔던 강순총대장한테 좀 말씀해주소이다.》 남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불쾌한 얼굴로 조용히 일렀다. 《그런 소리 자꾸 하겠으면 물러가!》 류자광은 얼굴이 퍼렇게 질려 나갔다. 그가 사라지니 또다시 그 번뇌, 경신에 대한 그리움이 샘물처럼 용솟음쳤다. 남이는 경신이와 그의 춘부장 그리고 자광이 지껄인 공조판서로까지 생각이 번져져 괴로운듯 신음소리를 내였다. 저녁녘에는 관청을 나서며 말도 부르지 않고 가마도 찾지 않았다. 거리바람을 쏘이며 행랑거리를 걸어가면서 형형색색의 사람들 구경을 하노라면 속도 넓어지고 마음에 다소 위안이 되지 않을가싶어서였다. 저녁노을이 비낀 하늘밑에 펼쳐진 행랑거리는 사람들로 끓고있었다. 점방들에 비단, 모시, 베, 무명, 바가지, 솥, 비자루따위들을 내놓고 물건값을 깎자느니, 안된다느니 아귀다툼질하는 사람들, 징을 두드리고 피리를 불어대며 손님들을 부르는 어물장사들, 고추가루장사들… 문득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장정이 눈에 띄고 사람들의 물결 저쪽에 술집 같은것이 바라보이자 남이는 주충이 동해 사람들속을 비집고 나가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집안은 비교적 조용했다. 손님은 없었다. 그는 자기 벼슬이며 지체에 개의치 않고 루추한 방바닥에 퍼더버리고 앉아 녀종을 불러 술 한사발을 청했다. 그는 한꺼번에 술을 들이키고는 또 청했다. 세사발째 술을 들던 그는 그만 눈앞이 핑 돌아가 그 자리에 벌렁 누워 코를 드렁드렁 골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지 어디선가 향긋한 냄새가 물씬 풍겨오고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이 자기를 안아 일으킨다는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쳐다보니 예쁘장한 얼굴이다. 예기 탁문아이다. 그 예기는 며칠전부터 그의 집에 불려와서 어머니한테 거문고주법을 배워주고있었다. 남이는 이전에 무심히 보아왔던 예기가 이밤에는 전에없이 이쁘장하게 보여 볼을 살뜰하게 다독여주었다. 탁문아는 방긋 웃으며 그의 손을 볼에서 떼여 조용히 내려놓았다. 《얘, 너 탁문아가 옳지?》 《…》 《어찌된 일이냐? 고명한 예기아씨가 이제는 술집기생이 됐느냐?》 《모시를 몇필 사러 왔다가 너무 늦어서… 한데 정말 어찌된 일이오이까? 고명한 장군이 이런 루추한데 와서… 지나가다가 너무 놀라서 들어왔사와요.》 《음-음- 허허, 그렇게 됐다!》 남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자 예기는 그를 부축하며 집까지 모셔다드린다고 하였다. 훤한 달밤이였다. 그 예기는 남이를 끼고 행랑거리 어스름속을 걸어갔다. 남이는 눈앞이 무시로 돌아가 비틀거리기도 하고 우두커니 서있는가 하면 발걸음을 재게 옮기다가도 발길이 무엇엔가 걸채여 엎어질번도 했다. 그를 부축해가는 탁문아가 그때마다 재미나서 죽겠다는듯 캐득거렸다. 《얘 이년아, 왜 웃어? 너 량반들 품에 많이 안겨봤지?》 《전 거문고줄이나 뜯는 예기인걸요.》 《예기는 관기가 아니냐? 어느 대감이 으뜸이드냐?》 《난 아무것도 몰라요. 우리 애들 말이 한명회대감이 기중 사내답대요. 기운도 좋고요.》 《응?!》 《거사를 치르고는 돈도 푼푼히 쥐여주고요.》 《새로 나온 조선통보… 그 돈을?…》 《그렇지 않고요.》 탁문아는 남이의 저택에 자주 드나들면서 그와 가까와지기를 은근히 바랐으며 언제나 수청들 마음속차비까지 다 갖추고있었는데 남이쪽에서 아무런 눈치도 없으니 공연히 속이 바글바글 끓으면서 이 무부어른이 병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던것이다. 더우기 수상쩍은것은 여러해전에 상처했다면서 녀자의 정을 모르고 어찌 지낼가싶었는데 경신이와 정사가 있는듯 한 눈치를 채고는 시샘이 나 속이 바질바질 타들었다. 마님이나 장군의 안색으로 보아 그것이 튄것 같아 깨고소해졌다. 그리고 자기가 만약 장군의 첩으로 들어앉으면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갈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이밤이야말로 하늘이 베푼 밀월의 기회였다. 《너 재미난 얘기나 좀 하려마.》 탁문아는 남이가 하자는대로 품에 안겨들기도 하고 겨드랑이밑에 칭칭 감겨들며 갖은 아양을 다 떨다가 단숨을 몰아쉬면서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옛날, 아득한 옛날에 어느 나라 임금이 양마장에 가서 숫말들과 암말들이 노는걸 보고와서 굉장한 판을 벌렸다 해요.》 《어떻게? 엉?》 《어머, 몰라요.》 《어떻게 했나 응? 말햇…!》 《아이, 창피해… 궁녀들을 홀랑 벗겨놓고 말처럼 그랬는데… 그밤 여러 아씨들이 까무라쳤대요. 그걸 당한 아씨들은 우리 임금이 1등 남아라고 했대요.》 《허- 세상에 … 임금이 그러면 재상들이 그 본을 따르고 재상들이 그러면 당상관, 당하관들이… 나중에는 아전들까지… 그건 어떤 음란한 호색한이 꾸며낸 소린지도 몰라.》 남이는 맑은 정신에 돌아왔는지 이렇게 말하고 몸가짐을 바로하면서 화제를 돌렸다. 《너 오늘 밤에도 우리 집에 갔댔느냐?》 《갔댔어요. 글쎄 오늘 밤엔 마님이 <수심가>를 배워달라지요.》 《<수심가>를…?》 《그래서 열번이상 뜯었더니 팔이 저리고 손가락끝이 거문고줄에 닳아 떨어진것 같아요.》 《음… <수심가>라…》 남이는 경신이때문에 속을 썩이는 어머님심경이 마쳐와 가슴이 뻐근하게 저려들었다. 《여태 흥겨운 가락만 즐기시더니… 속상한 일이라도…》 《너 우리 집에 오면 어머님을 잘 위로해드려…!》 《마님이 시끄러워하지 않을가요?》 《뭐라고 하시더냐?》 《아니요…》 《그럼 어떻게 알어?》 《마님이 거문고줄을 헛갈려 튕기거든요.》 《흠…》 《어머님은 공주마님인데도 마음이 참 너그럽고 좋아요.》 《허…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천대를 떡먹듯이 하는 기생이나 노비들은 그걸 인차 알아요.》 《허참… 그래?》 《지체가 높은 량반댁일수록 더 고약해요.》 《너 이년,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입버릇을 고쳐주어야겠다.》 《나리님, 제 말을 다 들어보고 탓하세요. 저와 같이 예기로 있는 애가…》 《그 애가 어쨌어?》 《한 고관댁마님한테 한해이상이나 다니며 가야금을 배워드렸죠. 처음에는 그 댁 도련님한테 꼬리를 치지 않는가 해서 미워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도적으로 몰았어요.》 《음?》 《마님 옥비녀가 없어졌는데 그걸 글쎄 훔쳤다고 머리끄뎅이를 잡아끌고 내놓지 않으면 도끼로 손목을 잘라버린다고까지 으르다가 아주 내쫓았지요. 며칠후에 밝혀졌는데 그 집 맏딸이 욕심이 나서 가졌대요. 그 예기가 소식을 듣고 너무 분해서 찾아가니 그 집 주인마님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듯이 왜 그새 안 왔느냐, 삯을 후하게 줄테니 그냥 다니며 가야금을 배워달라고 하더라지 않아요. 얼마나 얕봤으면 그러겠어요. 아유, 량반네들은 왜 사람에 대한 의심이 그렇게 많을가요?》 《음… 흠…》 《우리 마님은 정말 달라요. 거문고나 좀 배워준다고 저 같은걸 스승처럼 여겨요. 말씀 한마디 해도 따뜻이 하고 저녁에 좀 늦으면 거문고 뜯는 일이 헐한 일이 아니라면서 밤참까지 들여오게 하지요.》 남이는 탁문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걷는 사이에 어느덧 집 솟을대문가까이까지 다 왔다. 대문앞에서 서성거리던 행랑종 공덕로인이 허연 상투머리를 숙이며 마님이 주무시지 못하고 기다린다고 아뢰이였다. 뜨락에 깔린 유정한 달빛우로 거문고소리가 흐르고 저기 안쪽 초불빛이 환한 방문에 어머니의 그림자가 비껴있다. 그 그림자의 어깨며 팔이 뚱땅거리는 소리에 따라 쉬임없이 오르내린다. 그 울림소리는 주법이 서툴러 더 처량하고 애절하게 안겨오는데 혹은 잦은가락으로 가슴을 쥐여뜯는가 하면 홀연 롱현으로 넘어가 가슴 밑바닥의 슬픔과 울분을 우벼파내여 별들이 총총한 밤하늘로 날려보내는듯도 했다. 남이는 문득 전실부인의 죽음과 경신의 출현, 그 경신이와의 쓰디쓴 결별로 어머니가 당한 슬픔과 고통이 안겨들며 가슴이 찢기는듯 했다. (아, 이런 불효막심한 자식이…!) 그는 죄책감에 저도 모르게 뜨락바닥에 엎드려 어머니그림자앞에 고개를 떨구고 움직일줄 몰랐다. 8
다음날은 바람 한점 없는 잠풍한 날씨였으나 한성의 조정은 질풍이 휩쓰는듯 모든것이 들썽해졌다. 임금이 깊이 생각하고 내린 결단인지 아니면 즉흥적인 선발이나 망령인지 북변전쟁의 로장 강순을 우의정자리에 앉히고 그 신하 남이에게 공조판서자리를 준다는 어지를 내렸던것이다. 이 뜻밖의 어지를 받은 승정원과 사간원, 륙조의 관리들은 이방저방으로 뛰여다니는가 하면 손맥을 놓고앉아 수군거리였다. 이것은 불길한 조짐이다. 이제 조정에서 문관출신의 관리들을 모조리 쓸어내고 무관들을 그 자리들에 앉히는 날이 올것이다. 보라, 문존무비가 아니라 무존문비가 세상풍조로 되는 때가 올것이다. … 제일 독이 올라 기염을 토하는것은 개국공신들의 후손이며 막대한 농지소유자들인 훈구파세력의 고관대작들이였다. 그들은 개국공신의 특전을 받아 높은 벼슬자리, 막대한 농지를 차지하게 되였는데 북변의 전승을 배경으로 새로 등장한 무관들과 그에 합세한 사림파들이 조정을 쥐고 흔들면 저들의 정치적기반이 허물어지고 개국이래 누려온 모든 특전과 부귀영화를 죄다 잃을수 있었기때문이였다. 세조의 그 갑작스러운 어지가 내린 날 오후에 훈구세력의 거두라고 할수 있는 로고관대작 셋이 사간원으로 찾아가 입에 거품을 물고 자신들의 의사를 전하께 상주해달라고 소리쳤다. 군사밖에 모르는 강순이 어떻게 문관들을 이끄는가, 어떻게 원과 명, 왜구… 외국사신들을 다루는가?! 그러나 사간원에서는 후환을 생각하여 전하에게 간하는것을 삼가했다. 그날 남이는 공조판서로 된것이 못마땅하여 우의정자리에 앉은 강순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으리으리한 방에 들어서자마자 좌우를 둘러볼 경황도 없이 열기를 내뿜었다. 《이럴수 있소이까?! 누가, 어느 대감이 신을 공조에 천거했나이까?》 남이는 수모를 당한 사람처럼 얼굴이 벌개져 숨을 거칠게 몰아쉬였다. 《신더러 칼과 활을 버리라고? 종6품 벼슬인 참지자리라도 병조에만 써주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겠소이다!》 《남판서, 전하의 은총인줄로 아오.》 하고 강순은 근엄하게 일렀다. 그는 마치도 리시애란과 야인정벌때의 싸움판에서 한데 어울려 딩굴던 강순이 아니라 이제는 나라의 당당한 정승이라는것을 똑똑히 알라고 오금을 박듯이 잘라 말했다. 남이는 정승으로서는 그것이 옳은 처사이라 여기면서도 의분과 섭섭함을 금할수 없었다. 《정승나리, 잘 알겠소이다. 한가지만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퍽 오래전 일이지만 제가 무과에 장원급제했을 때 임금은 저를 경회루에 불러 치하하시면서 앞으로 무궁토록 무부로 있으며 나라를 지키라고 당부하시면서 너는 언제나 태종임금의 외손이라는것을 명심하라 하셨나이다! 》 그리고는 자리에 의젓하게 앉아 강순을 지켜보다가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비로소 돌아보았다. 뒤쪽의 돗자리우에 만나면 수인사나 나누는 40대의 례조참의가 엎드려있었다. 강순우의정은 그한테는 개의치 않고 모두숨을 길게 내쉬였다. 《나도 그 뜻을 알고있네. 허나 이보라구. 어찌겠나, 전하의 어지에 따라 임자한테 공조를 맡긴걸…》 남이는 다시 격해져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부르짖었다. 《어허- 초지를 저버리고… 활과 칼… 동달이군복을 벗어던지고 목수쟁이들… 집이나 짓고 다리나 놓는 잡부들을 거느리라는건가유?》 《그렇긴 하네만 어찌겠나. 전하의 뜻인걸… 맡아주게나. 공조에도 할일이 태산같아…》 고령의 강순은 인생의 눈서리에 반짝이는 숱진 눈섭을 찌프릴사 하고 손자벌인 남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자네도 눈으로 봐서 알겠지만 지금 온 나라 다리들만 봐도 말이 아니네. 놓은지 너무 오래되여 고삭아 허물어져내리고 국도에 있는 역참들도 다 헐어빠졌어. 헌데 6조중에서 공조일이 제일 안된다고 하네. 자네 같은 손아귀 드센 무관출신판서가 있어야 되네. 이제는 민란도 눌러놓고 태평세월이 왔으니 나라를 추세워야 할거 아닌가!》 《나으리, 전장의 우의를 중히 여긴다면 상감마마께 한번만 간해주사이다!》 《공의 심경이 리해되지만 어찌겠나. 전하의 어지를 따르는게 신하의 도리가 아닌가!》 남이는 그에게 더 말을 붙여보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6조의 고래등같은 기와집들이 주런이 늘어서있는 거리를 따라 고개를 수굿하고 어깨가 축 처져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갔다. 누구인가 황황히 뒤쫓아오는듯 했다. 돌아보니 아까 령상방에 엎드려있던 얼굴이 해말쑥한 그 례조참의였다. 그 문관나부랭이는 아첨기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판서나으리, 앞으로 좀 삼가해야 되지 않을가싶어 감히 말씀드리오니 용서하오이다.》 《…?》 《이자 정승대감앞에서 너무 좀 지나친것 같아서… 노엽게 생각하지 마시오이다.》 남이는 그자의 비루한 언행에 메스꺼움이 치밀어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요?!》 《예… 예… 다름아니라 재상의 말씀은 엎드려 들어야… 엎드려 듣는것이 조상전래의 례의가 아닌가 생각하오이다.》 남이는 부아가 치밀었으나 참으며 껄껄 웃어댔다. 《례조참의어른, 내 옛얘기를 하나 할가요?》 《…?》 《옛날 고려 충렬왕때 일인데 그때 주열이란 사람이 있었지요. 자는 이화요 본은 능주라… 주열은 벼슬길에 올라 남원판관을 지낸적도 있었는데 치적이 대단했고 청렴결백하고 고정한 관리여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왔는데…》 《예…》 《그 주열이 어느날 재상부에 들어가서 필요이상의 공손을 피하고 의젓하게 앉아 재상과 정사를 담론했지요.》 《…?》 《한데 무슨 일이 있었는고 하니 동석했던 대신들이 못마땅하게 여겨 <재상의 말씀은 엎드려 들어야 하지 않는가>고 충고했지요. 그러자 주열이 한 대답이 괴짠데… <재상의 말을 엎드려 듣는다치면 임금의 말씀은 마땅히 땅을 파고 들어가서 들어야 되지 않겠는가>… 홧하하》 남이는 눈물이 날 지경으로 웃어대다가 얼결에 돌아보니 저쪽으로 지나가던 왕세자 리황이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지켜보는듯 했다. 9
그후 남이는 자신을 다잡고 공조판서의 일에 몸을 잠그었다. 공조가 해야 할 일도 전장에서 대적과 맞다들린것처럼 방대하고 아름찬것이였다. 앞으로 공조가 해야 할 일들과 나라의 형편을 대충 알아보니 이전의 력대 공조판서들과 관리들은 도대체 무엇들을 하고있었는지 말이 아니였다. 크고작은 강들에 놓인 수많은 다리들이며 도로들, 간선도로가에 있는 역참들만 보아도 세월의 눈비에 고삭고 헐어빠져 당장 수리하거나 아주 헐어버리고 신축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였다. 그는 관북민란과 야인정벌때 령길을 넘고 강들을 건느면서 고생한 일들이 삼삼히 떠오르자 상감이 자신을 공조판서자리에 앉힌 그 뜻이 가슴쩌릿하게 안겨왔다. 그리고 자부심과 일욕심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그래, 이건 나같은 무관만이 할수 있는 일이야. 문관나부랭이들은 못해!) 남이는 일판을 크게 벌려 우선 도로들, 부대들의 신속한 이동에 편리하도록 남북으로 우불구불 뻗은 국방도로들부터 새로 닦으려고 결심했다. 하루는 우의정 강순을 찾아들어가 의논하는데 그가 심상치 않은 소리를 했다. 요새 왜놈들의 배가 원산과 통천앞바다에 무시로 출몰하는데 고기잡이배인지 렴탐선인지 모르겠다는것이였다. 그 소리에 남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의 구상에는 남북으로 뻗은 국방도로공사만 예견했지 동해쪽으로 나가는 도로는 생각하지도 못했던것이다. 남이는 그날로 양덕에서 고원쪽으로 나가는 도로와 화천에서 추지령을 넘어 통천쪽으로 떨어지는 길을 화포수레들이 달릴수 있도록 새로 닦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인차 그 방향들에 공조참판이하 관리들을 급파했다. 그때로부터 네댓달후 남이는 공조참판을 비롯한 관리들을 거느리고 추지령쪽 길닦이현장에 나가보았는게 격분을 참을수 없었다. 이제는 공사가 상당히 진척되였으려니 기대하며 추지령에 오르니 산판에 길닦이를 하는 인부들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던것이다. 길을 닦아나가다가 그만둔 자리, 굴리다가 만 바위들, 찍어넘긴 통나무들, 도끼밥들만 발길에 채울뿐이였다. 마침 아래쪽으로부터 헐썩거리며 올라오는 농부차림의 젊은이를 붙잡고 길닦이하던 인부들이 다 어디로 갔느냐고 물으니 현감나리가 올라와서 길닦이를 중지시켰노라고 했다. 보리가을철이 다 지나가는데 길닦이가 다 뭐냐고 소리치며 부역에 나온 농부들이며 노비들을 모조리 마을로 쫓아내려보냈다는것이였다. 숲속에서 새들의 우짖음소리만 누구를 조롱하듯이 야단스럽게 들려왔다. 남이는 성이 독같이 나서 관리들을 거느리고 말들을 질풍처럼 내몰아 고을 관청으로 찾아갔다. 그 관청에서 마중 나왔다는 얼굴에 개기름이 번지르르하고 몸집이 남이보다 더 큰 현감이란 작자는 새파랗게 젊은 판서를 얕보았는지 인사말도 별로 없이 온곱지 않은 소리부터 내뱉았다. 《나리, 아니 밭에서 보리들이 다 썩어가는데 길닦이라니? 원참 세상에…》 《뭐? 뭐라구 이놈, 다시 말해봐!》 《보리밭에 가보시오. 저 길닦이야 몇해 잘 걸리겠는데 그것때문에 철을 놓치면 농사는 다 망치오. 여기엔 도관찰사어른의 보리밭도 있소이다!》 남이는 그 작자가 도관찰사까지 거들며 자기를 정당화하려는데 분노가 욱 치밀어 말채찍을 번쩍 쳐들고 목청껏 소리쳤다. 《이놈, 이 발칙한 놈아, 그럼 왜 급한 사람만 내려보내지 않고 공사를 다 중지시켰어? 네 눈깔에는 저 바다에 떠있는 왜구들 렴탐선도 뵈지 않어? 왜구들이 보리가을이 끝나기를 기다려준대? 네놈은 역적이나 같앗, 이 역적놈아! 》 현감이라는 작자는 남이의 불호령에 뒤걸음치다가 돌부리에 발이 걸채였는지 뒤로 벌렁 넘어져 나딩굴었다. 작자는 어디가 상했는지 엄살을 부리고 관가에서 관리들이며 아전들이 기겁해 달려나왔다. 남이는 그자들을 향해 발을 구르며 이 역적놈을 당장 형방에 가두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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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무렵 한명회는 허리증이 도져 한강가의 정각 별당에 나와 보양을 받고있었다. 왕실 의원이 매일 꼭꼭 나와 침도 놓고 허리에 찜질도 하고 탕약도 따끈하게 달여 대접해서인지 치료에서 효험이 나는것 같았다. 그러나 서울의 량반들속에서는 대감이 녀색에 너무 빠져 생긴 허리증이라는 뒤소리도 수군수군 돌아갔다. 그것도 그럴것이 한명회는 예쁜 계집만 눈에 띄면 어떻게나 나꾸채여 《밤재미》를 보고야마는 성미였던것이다. 날씨가 화창한 어느날 한명회는 허리통세가 좀 가라앉아 허연 무명도포차림으로 별당뜨락으로 나와 시름없이 거닐며 화초구경을 하는데 얄궂게도 나라의 불길한 정사가 떠올라 마음이 번거로와졌다. 그는 문병 오는 고관들과 관리들의 얘기를 통해 조정안에 돌아가는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끼고있었던것이다. 조정안의 관료들은 임금이 관북민란을 평정하고 야인정벌에 대승한 무관들인 강순을 우의정, 남이를 공조판서자리에 앉힌데 충격을 받아 몹시 뒤숭숭해진것 같았다. 잔잔한 호수에 자그마한 돌멩이가 날아떨어져도 파문이 이는데 조정의 높은 벼슬자리에 전에없이 문관도 아닌 무관이 둘씩이나 들어앉았으니 그 충격이 어찌 크지 않으랴싶었다. 허나 관리들속에 돌아가는 소리는 너무나도 엄청난것이였다. 이제 임금이 문관들이 유약하고 무능하다고 다 밀어내고 손탁이 센 무관들을 그 벼슬자리들에 앉히지 않을가?… 이러다가는 고려때처럼 무신정권이 설지 모른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흠 무신정권이라…) 한명회는 무거운 한숨을 조용히 내쉬였다. 그는 고려의 무신정변과 그 결말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고려 무신들인 정문부, 리고, 리의방… 그놈들은 별치않은 일로 정변을 일으켜 의종왕을 거제도로 내쫓고 그 동생, 그 머저리를 룡상에 앉히고는 제 심보대로 나라의 정사를 주물러 저들을 얕보고 천시한 문관들은 비록 서리라 해도 씨도 남기지 말라며 복수전을 벌려 숱한 문관들을 죽여버렸지. 어, 끔찍한 일이야… 헝, 문관들이 없이 칼부림밖에 할줄 모르는 제까짓것들이 학문이 있나, 나라를 다스려본 경험이 있나. 어떻게 정사를 이끌어?… 문존무비야 하늘의 뜻이지… 그 무신정권때에 나라가 일대 혼란에 빠지고. 어, 어떤 재난을 겪었던고… 그런 참변을 모르지 않을 영특하신 전하께서 오늘에 와서 다시 그 전철을 밟을소냐. 어림도 없어… 한명회가 이런 생각을 굴리며 꽃잎들을 만지작거리는데 별당으로 윤이 흐르는듯 한 가마 두채가 흥떡거리며 들어섰다. 앞뒤가마에서 으리으리한 관복차림의 고관 둘이 내렸다. 얼마전까지 우의정을 지낸 한확과 병조판서 박중선이였다. 한확은 읍하고 선채로 머리를 숙여 병문안했지만 박중선은 뜨락바닥에 엎드려 절하며 대감의 옥체무강을 절절하게 기원했는데 그럴만 한 까닭이 있었던것이다. 그는 일찌기 한확을 통하여 한명회에게 접근했으며 여러 방면의 헌신과 끈덕진 아부로써 남다른 신의를 얻는데 성공했었다. 관북민란이 터졌을 때에는 병조참판으로서 부대를 이끌고 황해도에서 관북으로 달려가 란을 진압하는데 전공을 세웠으며 작년에는 한명회가 천거해서 병조판서로까지 승진했었다. 한명회는 그의 은사나 다름없었다. 그날 한명회는 손님들을 객방으로 데리고 들어와 객담을 벌렸는데 얼굴이 희멀쑥하고 군턱이 진 한확은 병치료며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랑 하며 그에게 귀맛이 좋은 소리만 하였다. 《대감님, 병석에 눕기 전보다 안색이 한결 좋아졌소이다. 입버릇이 고약한 작자들은 뒤에서 녀색때문이라고 입을 삐죽거리지만 이 세상 남아호걸들 치고 색을 즐기지 않는 어른이 있나유? 다 시샘이 나서 그러지요. 허허허…》 내내 말이 없던 박중선이 울기가 올라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격하게 말했다. 《남이가 공조판서랍시고 사처에 길닦이를 벌려놓았는데… 야단났소이다. 신이 이번에 강원도 군영들을 순시하다가 남판서의 무서운 폭거와 전횡을 알게 되였소이다.…》 그리고 그는 남이가 보리가을이 바빠 잠시 도로공사를 중지시킨 통천현감을 형방에 가둔 사실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여기에 한확이 끼여들었다. 《서울에 상경했다가 저를 찾아온 강원도 관찰사는 이러면 저 고려때 무신정권하고 뭐가 다르냐고 한탄했소이다. 그 어른은 도의 병마절도사들이랑 남이와 강순이 조정에 들어온 다음부터 내놓고 문관들을 얕보며 불손하게 군다고 했소이다.》 《저도 무관이지만 무부들이 문관들을 타고앉아 정사를 휘저어놓으면 나라가 혼란에 빠지오이다!》 하고 박중선이 뇌까렸다. 한명회는 알릴듯말듯 고개를 끄덕였으며 그러자 한확이와 박중선이 겨끔내기로 남이를 비난, 고발했다. … 물론 그 현감도 잘못한 점이 좀 있겠지만 그가 만약 문관이 아니고 무관이였다면 그런 폭거를 자행하지 않았을것이다. 원래부터 남이는 파심이 강하다. 그가 훈구고관들에게 례절바르게 인사드리는적이 있는가? 어떤 때는 참 곁에서 보기 민망스러운 때도 있다. 왕가의 외손이라고 발호해서 턱을 쳐들고 다닌다. 이런 태평세월에 싸움할 생각만 한다. 그래서 바다에 뜬 어선도 왜구의 렴탐선으로 봤겠지… 태평세월에야 농사를 잘 지어야지 길닦이라니 환장을 하지 않았는지 흐흐흐… 《허, 상감이 아시면 얼마나 놀라실가…》 하고 한확이 시름겨운 얼굴로 말했다. 《대감님, 왕세자야 사위가 아닌가요? 세자를 통해 상감께 상주한다면…?》 《음?!》 한명회는 저으기 놀란듯 눈섭을 치켜올렸다. 《대감, 조정의 높은 벼슬자리에 강순이, 남이… 이렇게 배심이 통하는 무관이 둘씩이나 있다는건 좋지 않아요. 두고봐요. 기필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오이다. 아주 갈라놓든지 다 밀어내든지…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나이다.》 그리고 한확은 갑자기 무릎을 치며 기염을 토했다. 《대감님, 나라를 위해 나서주사이다!》 방안에 우국충정의 열기가 몰아치는듯 했다. 한명회는 그들이 하는 소리가 자기 생각이나 다름이 없지만 무엄하게도 누구를 감히 부추기려 접어드는것 같아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볼편만 부들부들 떨다가 두눈을 번쩍 떴다. 치째진 눈이 차겁게 번뜩였다. 《엑? 발칙한것들, 전하께서 총애하는 무신을 벌써부터 시비질이냐? 그따위소리 하겠으면 다시는 문병오지도 말엇! 어허-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을 말가 하노라!-》 로회한 한명회는 그날 저녁 허리증이 완쾌되였노라고 하며 별당을 나와 왕세자를 만나러 부랴부랴 떠나갔다. 10
한달후 남이는 뜻밖에도 오위도총부 도총관의 벼슬자리로옮겨앉게 되였다. 6조의 모든 판서들이 정2품의 당상관이였지만 오위도총부의 도총관은 벼슬품계는 같아도 당상관이 아니였다. 보통 관료들 같으면 왜 이렇게 옮겨놓는가고 마음을 썼겠지만 남이는 그러지 않았을뿐아니라 도리여 오위도총부로 돌아온것이 너무 기뻐 기세등등해졌다. 하여 자신의 운명에 어떤 그림자가 비껴오고있는지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남이는 오위도총부로 옮겨앉은 그 이튿날 의기양양해서 공조로 찾아가 공조판서 서리한테 자기 사업을 곱게 넘겨주면서 추지령의 도로공사를 잘해달라고 당부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어느날 얼마전에 령의정으로 된 강순의 가마가 남이의 집 뜨락으로 들이닥쳤다. 강순은 놀라서 마중 나온 남이와 정선공주를 데리고 대청마루방으로 들어갔다. 령상은 격정에 북받쳐 후들후들 떨며 임금이 남이를 병조판서의 벼슬자리에 앉히라는 어지를 내렸노라고 웨쳤다. 전 병조판서 박중선은 한명회가 싸고돌았지만 박팽년(박팽년은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왕의 왕권을 찬탈한것에 반기를 들었다가 참형을 당한 사륙신의 한사람)과 숙질간이라는것이 드러나 한명회도 어쩔수 없었다고 하였다. 《상감마마는 충신중의 충신만이 병조판서로 될수 있다고 하시면서… 백두산석은 마도진이요 두만강수 음마무라 … 이런 충신한테만 병권을 줄수 있다고 하셨네!》 강순의 격정에 넘친 목소리가 방안에 메아리치는듯 했다. 《남이밖에 병조판서할 재목이 없다 이러시지 않겠나. 허허허… 자네가 참지벼슬이라도 좋으니 병조에 써달라 간했다고 하니 대견해서 호탕하게 웃으시였네…》 정선공주는 한손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눈물을 머금었다. 강순이 떠나간 다음 남이는 어머니에게 혼자 있고싶노라 하며 후원으로 나갔다. 그는 후원의 련못가를 거닐며 격정을 가라앉히고는 대나무화분들곁에 놓인 침상에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끝없이 쳐다보았다. 가을의 파란 하늘에는 흰눈같은 뭉게구름이 여기저기 떠있고 그우로는 무한대한 공간이 아스라하게 바라보였다. 바라보면 볼수록 그 공간에 투명한 이슬방울 같은것이 하염없이 아물거리다가 안개처럼 희부옇게 흐려졌다. (어, 하늘이란 얼마나 넓고 드높은가. 전하의 뜻이란 얼마나 깊고깊은것인가. 병조판서! 나는 이십대에 나라의 병권을 잡았다, 틀어쥐였어! 어- 병조판서…!) 이렇게 생각하니 천만가지 근심걱정이 커다란 바위돌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나같은 소인이 나라방비를 맡는다니… 아! 나한테는 얼마나 빈구석이 많은가. 이제 당장 왜구들이 침입한다면… 어디서 민란이 터진다면…? 언제 다가왔는지 딸애 구을금이가 흑진주같은 눈으로 아빠를 빤히 굽어보았다. 남이는 벌떡 일어나 고것을 늬큼 업고 들썽거리며 련못가를 걸어돌았다. 련못의 거울같은 수면에 그 그림자가 꺼꾸로 비껴 어른거리고 도란도란 주고받는 말소리가 고요히 흐른다. 《아빠, 병조판서 됐지?》 《누가 그래?》 《할머니가… 부엌어멈도 그랬어. 높아졌대…》 《허 그래…?》 《얼마나 높아졌나?》 《그래도 우리 구을금이가 더 높아.》 《거짓말…》 《참말이야. 아빠는 임금이 준 말을 타고 구을금인 그 아빠를 탔거든. 헛허허…》 《아이 좋아. 하하하…》 딸애는 아빠 목을 꼭 그러안는다. 그 애의 작은 가슴이 뛰는것이 잔등에 감촉된다. 그리고 콩콩 뛰는 심장의 박동소리도 들리는듯… 《얘야, 한번 뛰여볼가?》 《응…!》 남이는 딸애를 업은채 련못둘레를 망아지처럼 뛰여돌고 아이는 너무 좋아 숨이 넘어갈듯이 캐득거린다. 그가 멎어서려는데 딸애가 불쑥 말했다. 《나 경신아씨 봤다. 행랑할아버지하고 광천교에 물구경 나갔다가…》 《엉…?》 남이는 순간에 가슴이 찌르르 저려들어 뚝 멎어섰다. 련못도 하늘도 어둑해졌다. 《아빠, 그 아씨 나한테 호떡 사줬어!》 《응…?!》 《아빠하고 같이 먹자고 감춰뒀어. 가져올게.》 그리고는 잔등에서 미끄러져내려 집쪽으로 정신없이 뛰여간다. 남이는 늪가에 앉아 머리를 싸쥐였다. 아, 경신이! 나는 잊었는데… 잊으려 애썼는데… 그대 부친은 안된다 했지만 경신은 나를 생각하고있었구려… 그대 부친은 내가 한때 권람의 사위였다는 순 그 리유로 거절했지만… 아, 권람이… 권람이… 전실처의 그 부친과 남이가 무슨 상관인가. 내내 골골 앓기만 한 그 녀자… 아씨 부친은 권람이 수양대군과 막역한 사이였다고 나를 배척했는데 아씨의 춘부장대감은 고약하고 랭혹하고 괴벽한 로인이다. 어, 한스럽구나. 무슨 악령이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드느뇨?! 바람이 불었다. 련못에 잔물결이 일고 그우에 누런 락엽들이 후두둑 뿌려졌다. 련못 저쪽으로부터 딸애가 정신없이 달려오며 챙챙하게 부르짖는다. 《아-빠-》 남이는 슬픔에 찌뿌둥한 얼굴로 그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무슨 꾀가 생기는지 가까이에 있는 백호석상쪽으로 엉기엉기 기여가며 어느덧 가슴에 동심이 찰랑거리는듯 키득거리면서 그뒤에 숨었다. 그는 어린것의 가슴에 그늘을 던지고싶지 않아 늘 그랬던것처럼 숨박곡질이라도 하고싶었던것이다. 구을금이는 숨이 턱에 닿아 콩콩 달려왔으나 아빠가 가뭇없이 사라진것을 알자 령리하게 눈을 깜빡이며 인차 영문을 깨닫고 짐짓 아빠를 애타게 찾는척 하다가 석상뒤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애 발자욱소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남이는 별안간 《따웅-!》 하고 호랑이소리를 무섭게 내지르며 달려나가고 딸애 또한 질겁한듯 《왕-!》 하고 맞받아 소리치며 아빠의 품속으로 날아든다. 남이는 고것이 너무 재롱스러워 번쩍 쳐들어 업고는 가슴에서 치미는 비감을 씹어삼키려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련못가를 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