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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달동안에 관북의 산야를 휩쓸며 민란을 평정한 관군이 임금의 어명으로 영흥, 부령일대에까지 진출하여 민란의 패병들을 색출하느라 돌아치고있을 때 서북변경에서는 녀진야인들의 빈번한 침입으로 인마를 침탈당한 백성들의 원한이 날로 높아가고있었다. 이런 형세에 대처하여 조정에서는 오래전부터 북부국경을 소란케 해온 야인들의 소굴을 토벌하여 화근을 송두리채 들어내고 관북전장의 승리를 굳건히 다져 나라에 태평세월이 오도록 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급기야 원정대가 편성되였다. 그 원정대는 함길도민란을 평정하는데 공헌한 장수들인 강순을 총대장으로, 어유소와 남이를 각각 좌군과 우군의 상대장으로 하고 1만여명의 군사들을 망라하여 무어졌다. 원정대는 강행군으로 아득령을 넘어 강계를 거쳐 만산지방에 이르렀는데 그사이 군사들은 끝없는 원시림과 험한 산길에서 지칠대로 지쳐 쉴참이면 수풀속에 푹푹 쓰러지군 했었다. 관북전장의 피로도 풀 사이없이 먼길을 떠났으니 어찌 그러지 않으랴. 총대장 강순은 이런 군사들을 이끌고 싸움을 해낼수 있겠는가 근심걱정이 커서인지 만산땅을 밟자 부대들에 마을로 들어가 푹 쉬면서 말도 배불리 먹이라는 분부를 내렸다. 헌데 그날 군사들이 흩어져 마을들에 들려고 하는데 뜻밖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승냥이같은 개들이 떼지어 달려나왔던것이다. 개들은 여기저기서 군사들을 둘러싸고 미친듯이 짖어대는가 하면 물어뜯으려고 용을 쓰며 날치였다. 그것들의 눈에는 낯선 군사들이 도적떼로 보이는것 같았다. 하여 처처에서 사람들과 영악한 짐승들사이에 피비린내나는 싸움이 벌어졌다. 개들은 이발을 드러내고 무섭게 으르릉대며 군사들에게 달려들었고 군사들은 발길로 걷어차고 창을 휘둘러대며 그것들을 쫓아버리려 했다. 남이의 말에도 세마리의 시꺼먼 개가 달려들었다. 기겁한 말이 제자리에서 돌아치며 바스라지는듯 한 울부짖음소리를 내지르고 개들은 길길이 뛰여오르며 앞발로 말안장이며 말갈기를 후려쳤다. 남이는 군도를 휙 빼들고 벽력같은 함성과 함께 말안장에서 뛰여내려 칼등으로 날아드는 개들을 마구 후려쳤다. 개 두마리가 비명을 올리며 쓰러져 딩굴고 한마리는 그 바람에 질겁해 꼬리를 사리고 죽기내기로 도망쳤다. 어느새 동네사람들이 황황히 달려나오며 입을 모아 자기 집 개들을 불러들이는가 하면 성이 꼭두까지 오른 군사들앞에 엎드려 머리들을 조아리며 사죄했다. 지체가 있어뵈는 웬 백발로인이 남이앞에 와 읍하고 서서 채머리를 알릴듯말듯 떨며 관용을 빌었다. 《용서하사이다. 죄송하오이다. 무관나리, 저… 저 야인들 강탈을 막아보자고 집집마다 사냥개를 기르다나니 이런 불미스런 일이 생겼소이다. 얼마나 노엽겠소. 이런 실례라고야 참…》 남이는 빙긋이 웃어보였다. 《로인장, 개라는건 백성이 아니니 어찌 제 나라 군사들을 알아보겠나이까.》 남이는 무뚝뚝하게 대꾸하고는 말머리를 돌려 자기 장풍이 있는 곳으로 스적스적 말을 몰아갔다. 사실 이때 남이에게는 누구도 모르는 심리적고충이 있었다. 관북전장에서 입은 상처도 상처였지만 리시애란을 평정하는 과정에 일어난 정신적동요와 이름할수 없는 심리적타격때문이였다. 궁궐에서 태여나 호의호식하며 《왕가의 자랑》으로 떠받들리워 자라난 남이는 엄혹한 세상의 구조를 다는 알수 없었고 태평성대는 임금도 백성도 한모양으로 누리고있는줄로만 생각해왔었다. 간혹 칼을 차고 한양의 저자거리를 지나다가 핍박한 생활에 쪼들려 구원을 바라는 모습들을 보게 되여도 인애한 임금의 정사를 받들지 않고 뼈심을 들여 일하기 싫어 떠돌아다니는 장돌뱅이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아 낯을 찡그리고 돌아서군 하였다. 그런 남이였기에 함길도에서 민란이 터졌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사욕에 눈이 어두운 무리들이 지존스러운 임금을 배반하고 일으킨 소요라고 생각했고 반역무도한자들을 한칼에 쓸어버리고 전국을 평정하리라 맹세다지며 용용히 관북전장으로 달려갔던것이다. 북청에서의 첫 전투와 만령싸움에서도 남이의 용맹은 불의를 짓부시는 정의의 권화로 타올라 총대장 강순이며 맹패장 리숙기도 놀라 입을 딱 벌릴 정도였다. 온몸에 화살을 맞고도 낯색 하나 흐림이 없이 필마단창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좌충우돌하는 남이의 뒤를 따라 관군이 물밀듯이 짓쳐들어가 싸움의 형세를 격변시킨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세조는 한양의 궁궐에서 관북전장의 쾌보를 받을 때마다 대견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며 역시 남이는 《왕가의 장군》이라고 칭웅하였으며 그를 행-부호군으로 임명한데 이어 리시애란이 평정된 후에는 적개공신 1등에 봉하였다. 임금의 남다른 총애를 온몸으로 느끼며 관북전장을 질주하던 남이의 눈을 찌르며 세상의 어둡고 침침한 면이 날아든것은 실로 뜻밖의 일이 아닐수 없었다. 포로한 반란군사들을 역적의 무리라고 타매할 때에도 그들의 얼굴마다에 숙연히 어리군 하는 태연자약하고 조금도 주저를 모르는 헌헌한 기상은 호협한 남이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무엇을 주저하느냐. 난 떳떳이 죽으련다. 썩어빠진 이 세상을 뒤엎지 못하고 가는것이 한스러울뿐이다. 어서 죽여라.》 충혈된 두눈을 증오로 불태우며 노성을 터뜨리는 민란의 포로들모두가 서슴없이 칼날아래 자기 목을 들이밀 때 남이는 주저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들은 모두 평범한 백성들이였다. 처자권속을 거느린 이들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의를 지키는것을 보면 여기엔 필경 세상이 그려놓은 억울한 사연이 있음을 뜻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어느 한 마을에 들어선 관군의 앞길을 막으며 백발을 풀어헤친 로파가 《우린 어떻게 살란 말이냐. 이놈들아! 다 죽여라. 다 긁어가거라!》라고 절규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남이는 이것을 더 절박하게 느꼈다. 피흐르는 전장을 삐걱거리며 굴러가는 수레바퀴밑에서 튀여난 진창을 군사들과 함께 들쓰며, 그들과 땀내를 나누며 남이는 드디여 드높은 궁성을 떠받든 대돌과도 같은 백성의 인정세태와 그속을 흐르는 민심의 기류를 읽을수 있었다. 척박한 함길도땅에서 강행실시된 호패법과 신세포 등 가렴잡세로 질식할 정도로 짓눌린 백성들의 참경은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이였다. 이렇게 짓눌리우고 뜯기운 백성들이 반항의 기치를 들고 이 세상을 뒤엎으려 한것은 충군의 넋만이 꽉 차있는 그에게 있어서 분격할 일이면서도 괴롭지만 리해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남이의 번민은 그토록 고통스러운것이였다. 임금은 해마다 은혜를 베풀어 백성을 보살핀다 하고 한양궁궐엔 태평성대의 연례악이 그칠새 없는데 어찌하여 이토록 처절한 참경이 빚어질수 있단 말인가. 26살의 남이로서는 도저히 요지경속같이 얽히고 얽힌 세상의 리면을 리해할수 없었다. 하여 그의 검은 맥을 잃고, 그의 용맹은 과묵한 번뇌에 가리워 신기루와도 같이 되여버리고말았다. (내 나라 위해 무예를 닦고 병법을 익혀왔지 도탄에 빠진 제 나라 백성을 도륙하려 한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 상감이시여, 이 어찌된 일이나이까. 남이는 어쩌면 좋소이까!) 번민에 휩싸인채 제정신없이 전장을 미친듯 질주하는 그의 온몸에서 이런 절규가 터져오르는듯 했다. 그러한 그를 끝내 반군의 화살이 쓰러뜨렸다. 피냄새가 역한 전장의 장풍안에서 살을 뜯어내는 아픔에 소스라쳐 정신을 차린 남이는 더이상 그 무엇도 생각하고싶지 않았다. 정신육체적으로 상처를 입은 온몸을 도포로 감싸고 피안개 흩날리는 전장을 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남이의 두볼로 저도 모를 눈물이 고뇌의 진액처럼 흘러내렸다. 민란이 평정되고 토호이며 야심가인 리시애가 백성들의 불만을 리용하여 그들을 민란에 궐기시켰으며 싸움국면이 어려워지자 반란군 모르게 련속 임금에게 상주문을 올려 자기는 상감을 모반한것이 아니라 상감의 뜻을 어긴 함길도절도사 강효문과 같은 지방장관들을 반대하였을뿐이라고 구구히 변명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남이는 쓰거운듯 침을 퉤- 뱉았다. (더러운 놈, 자기를 따라나선 백성들을 배반하다니… 장부인줄 알았더니 필부로구나. 뒈져 싸다!) 남이는 겹쌓인 고뇌에 지쳐 술만 퍼마시였다. 동북땅의 안정과 함께 서북방의 흉흉한 소문이 날아들고 세조가 녀진정벌군의 상대장으로 자기를 임명했다는 소식을 주안상을 마주하고 전해들은 남이는 술기운에 흐리멍텅해졌던 두눈에서 광채를 내뿜으며 상탁을 치고 일어섰다. 《정벌이란 말이지, 정벌! 남이가 세상에 나타날 때가 이때인가 하노라.》라고 웨치며 바람처럼 마상에 날아올랐다. 아득령을 넘어 강계를 지나 만산에 이르는 기나긴 행군로상에서 쪼들릴대로 쪼들린 백성들의 살림을 목격할 때마다, 수탈과 강탈에 얼혼이 나간 모습들을 마주할 때마다 왕가의 외손이라는 외피를 찢어발기며 인간본연의 의협심이 타오르고 억지로 외면해버린 번뇌의 불씨가 되살아나 그를 괴롭혔다.… 이날도 마을에서 변을 당하고 장풍안에 드러누워 심란해있는데 종사관이 들어와 앞마을에 산다는 웬 로인이 찾아와 상대장님에게 청주를 드려달라고 간한다는것이였다. 남이는 술을 즐기는데다가 짚이는데도 있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어서 데려오라고 일렀다. 종사관을 따라 들어온이는 오전에 만났던 그 백발로인인데 베보자기에 싼 호로병을 품에 안고있었다. 로인은 그 호로병을 남이에게 드리고는 그 자리에 엎드려 절하며 격정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풍찬로숙하는 장군을 위로하고저 민심의 이름으로 드리는것이오니 사양하지도 나무람도 마시고 받아주소이다.》 이렇게 되여 남이는 그 로인과 마주앉아 잔을 들게 되였다. 술잔이 여러 순배 도는 가운데 취흥이 도도해지자 로인은 말이 많아져 자기는 여기 초야에 묻혀 류배살이하는 중생이라고 했다. 《… 아시고계시겠지만 김종서장군이 여기 북변에 4군 6진을 개척하고 야인들 침입을 막기 위한 행성들을 쌓아 북변방비를 굳건히 하고 나라국경을 확정한 다음에…》 남이는 김종서의 이야기가 나오자 턱을 끌어들이고 로인을 마뜩잖게 여겨보았다. 이 세상사가 어찌 된노릇인지 장군이 역적으로 참을 당했던것이다. 《… 그다음에 나라방비가 허술해지고 행성들이 다 허물어져내려도 누구 하나 개의치 않게 되였지오다… 그러자 저 방자한 야인들이 물을 건너와 이 땅이 제세상인것처럼 날치며 로략질을 해가도 어쩌지 못하지요. 아, 이런 통분한 일이라구야. 야인들이 열흘이 멀다하게 쳐나와도 칼을 들고 나서는이 없어요. 이 고장 현령이란이는 제 혼자… 제 식솔들만 살리겠다고 산중에 움을 파서 재물을 감춰놓고 밤마다 거기 올라가 자지요… 저 야인들은 로략질을 하다못해 토호들한테서 농지를 사가지고 우리 농군들한테 소작을 주어 가을이면 도조를 받아가지요. … 이게 뉘 땅이고 뉘 나라인데… 아, 원통하오이다! 원통하오! 장군! 저 야인들을 눌러놔야 백성들이 마음편히 살아요. 늙은 놈이 객기를 부린다고 욕하지 마오. 어- 요새는 김종서장군 생각이 더욱 간절하오.》 하고 그 수난자는 끅끅 흐느끼다가 석쉼하게 갈려버린 목소리로 김종서의 시에 운을 달아 노래부르듯이 읊조리기 시작했다.
삭풍은 나무끝에 불고-명월은 눈속에 찬데- 만리변경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파람 큰한소리에- 거칠것이 없어라-
그 백발로인의 주글주글한 볼을 따라 걸직한 기름방울 같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알고보니 로인은 한창때 함길도절제사 김종서의 종사관을 지내다가 상전이 좌의정으로 승진한 다음에는 서울에 따라올라가 병조에 있었으며 그가 역신으로 몰려 참형을 당하자 파직되여 류배살이를 하는 신세였다. 남이는 어지간히 격한 소리로 오금을 박았다. 《로인장, 다시는 어디 가 그 역신얘기를 입에 올리지 말고 그 시도 읊지 마시오!》 그는 이런 한두마디 소리로 로인을 질타했다. 그러나 로인이 떠날 때에는 장풍밖에까지 나와 정중히 바래주었다. 저녁녘에 군사들이 푹 쉬고 말들도 배불리 먹여 기운을 쓰게 되자 부대들이 마을을 떠나게 되였는데 얼굴이 진흙빛인 웬 농부가 남이를 찾아와서 쭈밋거리다가 겨우 간청했다. 《나리, 모두 그냥 떠나면…?》 《뭐요?…》 《말들이 숱한 조짚을 축냈는데 죽은 개값은 그만두더라도 짚값만은 좀 생각해주사이다.》 농부의 그런 소리에서도 땀내와 두엄냄새 같은것이 물씬 풍겨오는듯 했다. 남이는 골살을 찌프렸다. 농부의 요구가 불쾌해서가 아니였다. 항시 그를 괴롭혀온 번뇌가 다시 머리를 쳐들어서였다. 한 군사가 농부에게 나라를 위해 피를 바치는 군사들에게 짚값을 물라니 이 나라 백성이 옳긴 옳은가고 들이대는것을 본 남이는 그 군사를 만류했다. 함길도나 평안도나 백성이 수탈을 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뜯기우고 쪼들려 제 한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창생의 마음속에 무슨 충군이 있고 우국이 있을소냐.) 남이는 종사관에게 자기의 여벌 암말을 농부에게 주라고 일렀다. 2
압록강, 압록강으로… 녀진정벌군은 행군대오를 정비하고 걸음을 다그쳤다. 갑주를 떨쳐입은 남이의 온몸에 약진의 기상이 타오르고 그의 말에도 나래가 돋친듯 했다. 단숨에 압록강에 다달은 정벌군은 그날 밤 기슭에서 조금 떨어진 둔덕에서 숙영했다. 총대장 강순은 우군상대장 남이와 좌군상대장 어유소를 거느리고 도강지점을 확정하려고 강기슭을 오르내리였다. 강물은 차겁게 번쩍이며 흐르고 기슭의 갈밭은 조용히 설레며 서늘하고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 물건너쪽 어스름속에서 무리승냥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다가 인차 잠잠해졌다. 투구를 눌러쓰고 전복을 떨쳐입은 세 장군은 걸음을 멈추고 근엄한 얼굴로 그쪽을 이윽토록 지켜보았다. 어유소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였다. 《허, 고요한걸! 저 야인들이 어찌된 일인고? 허긴 그렇지. 얼마전만 해도 우리쪽에 건너와 숱한 소와 쌀, 소금섬들을 로략질해갔다니까… 허허…》 남이가 눈살을 찌프릴사 하고 흘깃 돌아봤으나 어유소는 아랑곳없이 계속했다. 《지금쯤은 추장이하 낮이나 밤이나 진탕 처먹고 놀아대겠지…》 《그렇게만 볼거 아니여. 저것들이 조용하다고 마음을 놓았다간 큰 랑패를 보지 않을가?》 《흠 글쎄…》 《저 음험하고 고약한 리만주추장이 겉으로는 졸고있는척 하면서 안속으로는 쳐나올 차비를 서두르는지 어찌 알겠소.》 《그렇긴 하네만…》 《아니, 놈들한테 숨돌릴 틈을 주지 말고 시급히 도강해 쳐야 하오!》 《흠- 쯧쯧, 또 또 다근다.》 《아니 아니, 시간이 급하오!》 총대장 강순은 그들의 말에 개의치 않고 느슨하게 웃으며 듣고만 있었다. 그는 함길도 싸움판에서 지내보고 남이와 어유소, 두 장수가 판판 다른 성미라는것을 느꼈다. 26살의 남이가 솔직하고 대바르며 좀 결패스러운데도 있는 젊은이라면 33살의 어유소는 주눅이 좋고 속궁냥이 깊어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좀 흥클한데도 있는 사람이였다. 남이가 펄펄 나는 표범이라면 어유소는 그보다 굼뜨나 검질기고 황소같은 힘장사였다. 무관으로서의 남이가 군사지휘에서 판단이 빠르고 과단성이 있다면 어유소는 침착하고 신중하여 실수가 없고 인내성이 남다른 장군이였다. 고령의 강순은 남이와 어유소의 성미를 잘 반죽하여 둘로 갈라놓으면 싸움에서 랑패가 없으리라 타산하고있었다. 이윽고 세 장군은 강기슭을 떠나 마을뒤쪽 둔덕진 자리에 번듯하게 쳐놓은 총대장의 장풍안으로 들어가 금후 군사행동을 의논했다. 초불이 켜진 장풍안은 아늑했다. 강순이 먼저 투구를 벗어놓고 희슥한 수염발을 쓸어내리고는 석쉼한 목소리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예로부터 여기 사람들은 오랜 세월 녀진야인들과 어울려 지내며 련계가 깊어 래왕도 잦았다, 저 야인들은 농사를 지어 살아가는 농경족이 아니라 짐승사냥과 목축을 생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유목종족이다, 그래서 성질이 방자하고 사납기 이를데 없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저것들은 흉년이 들어 기근이 오면 호피를 비롯한 피혁들이나 해청(산매), 담비가죽을 녹여만든 아교따위 등 희귀한걸 가지고 우리한테로 와서 쌀, 소금, 천류들과 교역해갔다, 그래서 생계를 근근히 유지했는데 그런 바꿈질을 하다가 아귀다툼질이 생기고 수틀리면 숱한 놈들이 말을 타고 밀려내려와 창과 칼을 휘둘러 쌀과 재물, 부녀자들까지 강탈해갔다, 이건 예전일이고 지금은 군사적으로도 강성해졌다고 하였다. 《… 그래서 리만주추장의 휘동하에 다른 부족들 침습을 막는다고 군사거점들에 목책을 둘러치는가 하면 산성들을 쌓고있소. 이제 우리가 쳐야 할 올라산성에는 수천군사들이 집결됐다는 소문도 있소.》 장풍안에 서늘한 기운이 몰아치는듯 했다. 초불도 바르르 떨었다.… 남이도 어유소도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제 그들은 나라의 안녕을 위해 낯선 황야에 들어서 피어린 싸움을 해야 했다. 드넓은 광야에서 고군분투해야 할 이들에게는 녀진야인들에 대하여 아는것이 너무도 적었다. 적의 군세며 책략도 몰랐다. 오직 하나 무조건 징벌하여 백성의 원한을 풀고 나라의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의지만이 가득차있을뿐이였다. 리만주는 건주위올량합부족의 추장이였다. 건주위는 명나라가 설치한 군사행정단위였다. 원제국이 붕괴된 후 산해관 동쪽 광활한 지대에는 정치적공백상태가 조성되였다. 이 지역에서는 녀진인들이 부족단위로 할거하여 세력을 다투며 끊임없는 싸움을 벌리고있었다. 개국초기 명나라는 녀진인들에 대하여 손을 뻗치지 못하고있다가 내부가 안정되자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 이 지역에 군사행정단위로서 건주위를 설치하고 리만주의 조부인 추장 어허츄에게 건주위지휘사의 벼슬을 주었다. 이리하여 명나라에 복속하게 된 건주위녀진들은 한때 명나라군사와 함께 몽골족의 한 갈래인 오이라드를 정벌하는 원정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나 그후 오이라드의 습격을 받고 리만주관하의 수백호가 파저강류역으로 이동한 후에는 명나라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있었다. 건주위녀진들은 명나라와 물품교역을 하다가는 수틀리면 수백명씩 떼를 지어 쳐들어가 곡물과 마소, 사람까지 잡아오군 하였으며 한편 조선정부에도 교역을 요구하여 거래를 하다가는 북부국경지역에 출몰하여 략탈을 일삼군 하였다. 그리하여 명은 이때에 와서 조선에 사신을 파하여 함께 건주위를 칠것을 요청하였다. 세조는 녀진의 침입을 막고 국경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원정군을 파견할 생각을 하고있던 차에 원병요청이 오자 지체없이 관북땅에 있던 중앙군을 녀진지역으로 진출시켰던것이다. 조선원정군이 압록강대안에 다달았다는 정보를 받은 리만주는 올라산성에 들어박혀 진형을 정비하고 싸움준비를 다그치는 한편 명나라의 협공을 막기 위해 사자를 파하여 명에 화친을 애걸했다. 리만주의 계략에 명나라군사가 주춤하는 사이 조선원정군은 압록강을 넘어 황성평을 지나 올라산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아직은 원정군이 압록강대안에 있었다. 《… 내 짐작에는 올라산성에서 큰 싸움을 벌려야 할것 같소. 우리가 피를 적게 흘리고 이길수 있는 방략이나 계책이 있으면 내놓소.》 하고 강순이 어유소와 남이를 번갈아 지켜보았다. 남이가 고개를 수굿하고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데 어유소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총대장나리, 우리 군사들이 낯선 고장에 와서 한번도 겨루어본적도 없는 적들과 싸우는것만큼… 그런 놈들과 붙어야 하니만큼 너무 서둘러서는 안되오이다. 적어도 대엿새는 단단히 차비를 하고 그사이 군사들도 좀 쉬우고… 지칠대로 지쳤소이다. 렴탐을 잘해서 적정을 손금보듯이 안 다음에 물을 건너야 하오이다.》 강순이 그 생각이 비슷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러자 남이는 가슴속에 불이 황황 이는듯 했다. 《총대장나리, 아니오이다. 나라의 안녕을 위해 거병한 우리가 어찌 순간인들 행보를 늦출수 있겠소이까. 시간을 끌수록 적들은 준비를 더 착실히 할것이고 형세는 우리에게 불리해질것이오이다. 선손을 써야 합니다. 군사들이 좀 지쳤지만 불러일으키면 되오이다. 저놈들이 싸움차비를 다 하기 전에 선손을 씁시다. 시간이 급하오이다.》 어유소가 넌지시 웃어보이며 이죽거리듯이 말하였다. 《허- 선손을 쓴다?! 거 귀맛이 좋은 소린데. 공은 적정을 렴탐도 안해보고 물을 건늘셈이요? 일없을가 엉? 허허!…》 남이는 훈계조의 그 말투에 어지간히 부아가 치밀었으나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소리쳤다. 《시간이 없소이다!》 남이는 한시라도 빨리 전장에 출몰하여 나라 위해 벼리고 벼려온 검을 휘두르며 관북전장에서 쌓인 번뇌를 털어버리고싶었다. 어유소는 남이의 기상이 재미있는듯 주눅이 좋게 벌쭉이 웃으며 일렀다. 《지내 서두르면 거사를 망쳐. 그리고 명나라와의 약속도 있지 않나. 이제 그쪽에서 협공신호가 올거네.》 어유소의 말을 들은 남이는 눈을 치떴다. 《약속?!… 우린 그 누구의 눈치나 보자고 거병한것이 아니요. 우리 힘으로 나라를 지키자고 예까지 오지 않았나이까. 신호가 왔으면 벌써 왔지. 우리가 관북에서 떠난게 언젠데 여적 무소식이란 말이요. 력대로 대국이라 자처하는 나라치고 신의를 제대로 지키는걸 보지 못했소이다. 명군의 신호를 기다릴것없이 한시라도 빨리 쳐야 하오이다.》 《남공, 맘을 푹 가라앉히고 대엿새 쉬면서 적정을 렴탐한 다음 움직여도 되여… 성급히 먹으면 체한다지 않나. 헛허허…》 어유소는 남이의 혈기에 세상에 이런 우스운 일도 있느냐는듯 장풍안이 떠나가도록 웃어댔다. 그 바람에 수모를 당한듯 한 남이가 칼을 뽑아들지는 않았지만 불같은 눈으로 상대를 쏘아보며 되알지게 따져물었다. 《거기 좌군에서는 지레 겁을 먹은게 아닌가. 겁부터 먹은게 누구요? 군사들인가 장군들인가?》 어유소가 욱 열이 올라 거치른 소리로 너무 서둘면 랑패를 본다고 소리쳤다. 그리하여 두 상대장사이에 강을 언제 건느냐 하는 쟁론이 이윽토록 계속되였다. 강순은 희끗한 눈섭을 찌프릴사 하고 엇갈린 론거들을 여겨듣다가 건기침을 떼여 로장의 나이무게로 두 젊은이를 눌러놓았다. 그리고는 선하고 인자스런 미소를 머금고 이렇게 타일렀다. 《여보게들, 자고로 사람은 새별이 뜨는 새벽이면 더 영특해진다고 했는데 이만하고 래일 아침에 더 의논해보세나.》 그러면서 부대들에서 군사들이 잠자리들은 제대로 잡았는지 모르겠노라고 걱정했다. 남이는 곧 일어나 장풍밖으로 나갔다. 어유소는 속이 내려가지 않는지 장풍안에 그냥 남아있었다. 남이는 파수병곁을 지나 몇걸음 걸어나오다가 달빛이 환하여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은하수 흐르는 밤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환한 달은 달무리까지 두르고있어 더 유정하게 안겨왔다. 달무리를 하염없이 쳐다보니 문득 한양의 임금도 이밤 우리 원정군을 걱정하시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쩌릿해졌다. 그리고 어머니와 어린 딸 구을금에 대한 그리움도 가슴에 따뜻이 젖어들었다. 3
그 깊은 밤중 남이 예하의 화포대는 강반에서 두세마장 떨어진 마을에서 굳잠에 들어있었다. 궂은 세월의 눈비에 고삭고 퇴락한 새초지붕이며 동기와지붕들이 옹기종기 붙어앉은 자그마한 마을이였는데 그 마을앞 뜰에 모닥불이 타고있었다. 외로운 그 모닥불곁에 웬 사람의 그림자가 바위돌처럼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그의 얼굴에 모닥불의 불빛그림자가 벌겋게 어른거렸다. 그는 화포대장 곽주호였다. 곽주호는 몸집이 우람하고 입이 무거운 남아로서 힘장사여서 한가위날 씨름판에 나서면 늘 상대를 배우에까지 배지기를 떠서 들어올리고는 무서운 함성을 내지르며 돌아가다가 보기 좋게 옆으로 멨다꼰지였다. 그래서 황소를 세번이나 상으로 타온 일까지 있었다. 그 바람에 한성 아근의 씨름군치고 《화포대 돌림배지기》라고 하면 모르는이가 없었다. 그가 마술을 써서 불찌가 이릉거리는 숯덩이도 와작와작 씹어먹는다, 도마뱀도 산채로 꿀떡 넘기고는 늠씰해있다는 터무니없는 풍설까지 돌았다. 길을 가다가도 그를 만나면 공연히 겁을 먹고 피해가는 아낙네들도 있었다. 달빛이 휘영청 밝은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하고 불무지에서는 검불이 허연 연기를 날리며 타고있었다. 이따금 그 연기가 바람결에 날려 자기한테로 쏠리면 주호는 얼굴을 외로 돌리고 씁쓸한 내내에 기침을 쿨렁쿨렁 기는가 하면 시름겨운 한숨을 후- 내쉬군 하였다. 곽주호는 명천현감으로 있다가 이번 전란통에 실종된 동생때문에 속을 썩이고있었다. 아무리 수소문해봐도 동생 곽주선이 도대체 어디로 종적을 감추었는지 알길이 없었던것이다. 한달전 명천바다가에서 만난 제수는 리시애군이 붕괴될 때 동료관리들과 함께 북쪽 녀진인들쪽으로 피신해간것 같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명천고을의 다른이들은 동생이 현감으로 있을 때부터 리시애의 동생 리시합이와 절친한 사이였기때문에 자결한것 같다고도 하고 어느 깊은 산골에 숨어있는것 같다고도 했다. 이웃 아낙네들은 제수가 집이 화포에 맞아 불타는 그 복새통에 아들애를 잃고 정신이 들락날락하게 됐노라며 동정어린 눈길을 보내는것이였다. 화포대장 주호는 속이 새까맣게 타서 목구멍에서 겨불내가 풍겨오르는듯 했다. (어- 이게 도대체 무슨 전쟁이냐, 제 백성도 다 적이라니…?) 주호는 동생 주선의 종적을 찾지 못하게 되자 그 동생이 더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그것도 그럴것이 곽주호와 곽주선이는 쌍둥이형제였다. 그가 과거시험을 쳐서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무관이 된 이듬해 주선이는 문과에 급제하여 문관의 벼슬길에 나섰다가 현감으로까지 승진되였었다. 그때 주호는 그 동생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관북땅을 휩쓴 뜻밖의 전란은 그들 형제를 량편으로 갈라놓았다. 형은 오위군편으로, 동생은 리시애군편에… 모색이 너무나도 같아 형과 아우를 어머니도 헛갈릴 때가 있던 그들이 전란통에 서로 적으로 되였던것이다. 주호는 시름겨운 한숨을 내쉬다가 불무지앞에 엎드려 스러져가는 밑불을 후-후- 불었다. 다시 밑불이 피여오르자 삭정이끝에 불길이 달려 탁탁 소리를 내면서 불찌를 날리였다. 잉걸불이 벌겋게 피여나는가 하면 어느덧 거기에 재가 앉아 한들거리다가 불길에 휘말려 밤하늘로 날아오른다. 주호는 불길속을 무심히 지켜보다가 오늘 오전 화포대가 마을에 들던 일들이 문득 떠올랐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겁을 먹고 그들을 피하거나 외면하는 눈치였다. 마을에는 대문이나 사립문에 빗장을 지른 집들이 여러채 있었다. 중앙군이 들어오면 관북에서처럼 량반이나 백성들을 가림없이 죽인다는 헛소문이 나돌아 사람들이 겁을 먹고 산지사방으로 도망친듯 했다. 그리하여 군사들은 호주와 식솔들이 남아있는 집들에만 찾아들어가 말들에 여물도 끓여먹이고 허청간이나 봉당, 퇴마루같은데 되는대로 누워버렸다. 이런 푸대접을 받는 화근은 관북쪽에서 무서운 풍문이 날아넘어왔기때문인것 같았다. 밤이 더 깊어지자 주호는 마을에 들어가봤댔자 잠자리가 있을것 같지 않아 불무지곁에 쪼그리고 누웠다. 그랬다가 화끈한 화기를 피해 돌아누웠다. 밤하늘에는 여전히 별들이 널려 반짝이였다. 어느덧 쪽잠이 드는지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는듯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잠결에 어딘가 멀리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오는듯 하더니 구떡쇠라는 우스개소리 잘하는 군졸이 무릎을 잡아흔든다. 《나리… 나리…》 주호는 화닥닥 놀라 일어나앉았다. 《뭐라구?!》 《아니, 왜 홀아비처럼 이런 한지에서 혼자 자우?》 벌써 날이 희읍스름하게 밝아오고 무엇을 먹었는지 그의 입에서 산마늘냄새같은것이 풍긴다. 《좀전에 남이상대장님이 말을 타고 지나갔소.》 《엉…?! 너 정말이냐?!》 그리고는 벌떡 뛰여일어났다. 《쳇, 이름만 들어도 머리칼이 곤두서는게지요. 흐흐흐… 괜찮아요. 부대들을 순시해보는거겠지요.》 《너희네 군졸하곤 달라. 빈틈이 있으면 용서없어. 무관들하고는… 어느쪽으로 갔어?》 《저 아래마을쪽으로…》 주호는 그쪽으로 정신없이 뛰여갔다. 구떡쇠도 그의 뒤를 따랐다. 동네개들이 놀라서 숨이 넘어가게 짖어댔다. 그들이 숨을 헐떡거리며 동구쪽에 이르렀을 때 아래쪽으로부터 남이가 말을 다급히 몰아 뛰여올라왔다. 말발굽소리만 들어도 성이 독같이 난것 같았다. 그는 화포대장을 알아보고 말에서 뛰여내려 거칠게 소리쳤다. 《화포대장, 왜 군사들을 한지에서 재우는가?》 《상대장님 죄송하오이다.》 《뭐? 죄송해?!》 《집들이 모자라…》 《저건 집들이 아니고 뭐냐?》 《나리, 주인없는 집들이 많소이다.》 《다 어디 갔어?》 《우리가 관북에서 쳐나온다는 소문에 놀라 다 도망쳤소이다.》 《가보자!》 그날 밤 남이는 마을로 들어가 서너채의 빈집을 돌아보다가 울담을 둘러친 덩지 큰 동기와집앞에 멎어섰다. 대문을 열어보니 그 집도 안으로 빗장이 질려있었다. 남이는 격한 목소리로 주호한테 대문을 들부시더라도 열라고 소리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마음이 용해가지고는 싸움을 못해!》 주호대장과 구떡쇠가 발로 널대문을 어기치기로 차다가 몸통을 날려 대문에 기운껏 부딪쳤는데 빗장이 우지끈 부러져나가며 문이 왈칵 열렸다. 너렁청한 마당으로 달려들어가던 주호와 구떡쇠는 놀라운 일에 마주쳐 그만 뚝 멎어섰다. 피골이 상접한 웬 작달막한 로인이 허청간쪽으로부터 도끼를 들고 우들우들 떨며 한걸음 또 한걸음 다가왔던것이다. 도끼날이 달빛에 시퍼렇게 번뜩이고 로인의 눈에서도 불이 황황 이는듯 했다. 주호는 얼결에 칼집에서 장검을 뽑았다. 《지나가던 군사들이야!》 《아니… 예?!》 로인은 와뜰 놀랐다. 《로인장은 뉘시오?》 로인은 도끼를 내리고 그 자리에 넙적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겨운 소리로 뇌이였다. 《무부나리, 제발… 제발 용서… 이 비천한건 이 집 노비올시다. 그만 소도적으로 잘못 알고… 비… 비나이다!》 그리고 노비늙은이는 주인네가 다 피난가고 저 소가 이 란리통에 새끼를 낳게 되여 자기만 《산파》로 떨어지게 되였노라고 했다. 《다행히 순산이라 복스런 암송아지를 보았소이다.》 그런 말을 듣기라도 한듯 허청간쪽에서 어미소가 음머- 하고 구성진 소리로 울었다. 곽주호와 구떡쇠는 남이를 따라 그쪽으로 가보았다. 허청간바닥에 건초가 푹신하게 깔려있는데 그우에서 어미소가 새끼한테 젖을 먹이고있었다. 구수한 건초냄새와 젖내가 물씬 풍겨왔다. 송아지는 어찌나 성급한지 주둥이로 어미젖통을 쿡쿡 박으며 쭉쭉 소리를 내면서 젖을 빨아대고 어미소는 자기한테로 다가온 불청객들을 흡뜬 눈으로 여겨보며 코김을 씩씩 내불었다. 곽주호와 구떡쇠는 그 송아지가 너무 탐스럽고 재롱스러워 허리를 굽히고 젖을 빠는 모양을 구경하는데 남이도 그들 뒤에 다가와서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뚝한 얼굴로 송아지쪽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발을 탕 구르며 버럭 소리쳤다. 《우- 욱-!!》 그 바람에 송아지는 화닥닥 놀라 어미젖통 저쪽으로 도망치고 어미소는 그 낯선 《괴한》을 떠받자고 코김을 험하게 불며 대가리뿔을 홱 숙였다. 목에 단 소방울이 절랑거렸다. 주호와 군졸은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송아지를 찬찬히 여겨보던 남이가 《야- 고놈 곱게는 생겼구나!》 하고는 어미소뒤로 살금살금 에돌아 송아지를 번쩍 안아들고 한바퀴 빙그르 돌아가며 껄껄 웃었다. 송아지는 기겁하여 《매- 매-》 하고 죽기내기로 울어대고 어미소는 고삐를 끊고 뛰쳐나 그 《괴한》을 떠받으려고 모두발로 뛰여오르며 무서운 함성을 내질렀다. 《홧… 화… 하… 하…》 남이의 웃음소리에 뜨락이 떠나가는듯 하고 노비로인은 황송하여 어미소를 진정시키려고 고삐를 거머쥐고 소목덜미를 정신없이 쓸어만졌다. 《와- 와- 와-》 남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송아지를 인차 어미한테 돌려주었다. 그리고 근엄한 얼굴로 곽주호한테 일렀다. 《한지에서 자는 군사들을 다 빈집들에 들엿! 이 집은 그냥 비워두고… 정 집이 모자라면 넣되 송아지가 있는 허청간에는 누구도 얼씬 못하게 파수를 세우라!》 그리고는 진담인지 롱말인지 송아지털 한오리라도 상하게 하는자는 목을 친다고 을렀다. 《알았소이다!》 《여, 화포대장 명심하라. 군졸들이 한지에서 꼬부리고 자면 화포를 제대로 쏘지 못햇!》 그날 밤 곽주호와 구떡쇠는 남이가 탄 말이 어스름속에 멀어지자 장군이 비록 태종의 외손이고 상대장이지만 저희네와 은근히 마음이 통하는이로 여겨져 서로 마주보며 빙긋이 웃었다. 4
남이는 말을 타고 이웃마을뒤 장풍이 쳐있는 자기 처소로 향했다. 어스름속 어디서인가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청승맞게 들려왔다. 남이는 말을 천천히 몰아가며 이제 있을 싸움을 두고 생각을 굴리고있었다. 이번 싸움에도 화포대가 한몫 단단히 해야 한다. 강을 건늘 때 말들이 헤덤벼 화포수레들이 여울목에 빠지면 큰일이다. 화약궤짝들이 물에 잠기면 더 큰 난사야. 그걸 언제 다 말리겠는가. 그렇게 되면 싸움을 뒤로 미룰수밖에 없어. 이른아침에 어유소와 함께 강에 나가 여울들의 밑바닥을 다시 살펴보고 도강지점을 확정해야 한다. … 남이는 이런 궁리를 굴리며 가슴이 벅차올라 모두숨을 후- 내쉬였다. 그때 앞쪽에서 달려오는 말발굽소리가 울리고 어스름속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상대장님- 나리-》 《누구여-?》 《류자광이… 자광이오이다.》 《아-니…!》 남이는 너무 반가와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류자광도 말에서 뛰여내려 앞으로 달려나와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였다. 남이는 달려나가 그의 손을 잡아일으키고 자광은 강순총대장어른에게 도착보고를 하고 오는 길이라고, 한성에서 내려오다가 함길도 병마절도사가 리질을 만나 쓰러지는 바람에 자기를 파발로 먼저 도원수부로 보냈노라고 했다. 《그래 리시애의 머리는 바쳤는가?》 하고 남이가 다그쳐 물었다. 《예- 저희들은 한성에 도착하자마자 승정원에 바쳤나이다. 우리가 도착한 이튿날 아침 상감마마께서 리시애의 머리를 보시고 역적의 머리까지 잘라왔으니 이건 만점의 승리, 대승리라고 기뻐하셨소이다!》 《전하마마는 저희들을 위해 연회까지 베풀어…》 《연회를…!!》 하고 남이는 환성을 올렸다. 《왕후마마가 한명회대감과 함께 연회탁에 나와 저희들 잔에 술까지 부어주셨소이다.》 이렇게 말하는 류자광의 몸에서는 승리의 환희로 들뜬 한양의 훈향이 확확 풍겨오는듯 했다. 남이는 다른 사람으로 되여 돌아온듯 한 자광이 돋보였으며 그가 은근히 부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름할수 없는 향수가 밀려들고 어머니와 딸애의 생각이 못견디게 파고들었으나 내색을 안했다. 그들은 말고삐를 잡고 가지런히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필의 말은 꼬리를 흔들기도 하고 시큼한 코김을 내불기도 하며 수걱수걱 주인들을 뒤따랐다. 《이번에 겨우 틈을 내서 댁에 들렸댔습니다.》 《바쁜 걸음에 그런 여가가 있던가?》 《아무리 바빠도 마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지 않으면 제가… 사람입니까.》 《음… 그래 우리 집에서는 무고하던가?》 《예… 한데 마님은 전장에 계시는 나리걱정때문인지 얼굴이 좀 수척해지신것 같았어요. 다심하신 마님은 저한테 상한데는 없는가, 잠자리는 어떤가 별의별걸 다 물었어요. 그래 마음을 푹 놓도록 안심을 시켰지요.》 《음, 잘했네.》 《따님은 저한테 매달리며 아빠는 언제 오냐고 자꾸 물었어요.》 《그래 뭐라고 했어?》 《인차 온다고 했지요.》 《허허… 잘-했소.》 류자광은 깜빡 잊었다는듯 놀라며 품속에서 남이의 어머니가 보낸 봉서를 꺼내여 남이에게 내밀었다. 남이는 자기 장풍안으로 들어오자바람으로 서둘러 봉서를 뜯고 초불밑에서 어머니편지를 읽었다. 편지의 글줄들에서 어릴적부터 몸에 밴 어머니의 체취와 따뜻하고 살뜰한 정이 풍겨나오는듯 했다. 다심한 어머니는 집안소식을 전하고는 아들이 몸이 성한가, 어디 아픈데는 없는가고 일일이 물었다. 어머니는 편지마감에 웬 아씨가 찾아왔던 이야기를 썼다. 《… 경신이라는 그 아씨는 알고보니 사간원의 대간 리진강대감님 따님이였소. 친지들을 따라 북악산사냥터에 올라갔다가 호랑이한테 쫓겼는데 장수가 화살을 날려 저를 구원해주었노라고 하지 않겠소. 그 아씨는 장수가 뉘신지를 모르고있다가 며칠전에야 알았다고, 그때 너무 무엄하게 굴어 용서를 빌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자고 찾아왔노라 했소. 놀라운건 좀처럼 남을 따르지 않던 구을금이가 아씨한테 안겨서는 떨어지지 않겠다고 앙탈을 부리며 운거라오. 이 사람 장수, 이게 무슨 연분이 아닐가. 이 어미는 며칠밤을 자지 못했네. 전장에서 돌아오면 그 아씨를 꼭 만나봤으면…》 편지를 읽는 남이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 벌렁 누워 눈을 꾹 내리감았다. 관북땅에서 예까지 이르는 장거리행군에 지쳐버린 군사들은 모두 굳잠이 든 시각 그만은 잠들지 못하고 몸을 뒤채기였다. (아, 그 《총각》이 처녀였단 말인가!) 그때 있었던 일이 어제그제 일처럼 눈에 선히 떠올랐다. 그날은 어찌나 재수가 없는지 노루, 사슴은 고사하고 토끼 한마리도 걸려들지 않았다. 하루종일 울창한 숲속을 헤매다가 북악산 후미진 계곡으로 내려오는데 따-웅- 하는 범의 울부짖음소리가 골안에 메아리치고 계곡 건너편 숲속에서 웬 총각이 굴듯이 뛰여내리고 그뒤로 싯누런 호랑이가 쫓아내려왔다. 《사-람-살려-!》 그때 저도 모르게 활시위를 기운껏 당겨 범을 겨냥하고 화살을 날려보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쫓아내려오던 범이 떼굴떼굴 굴다가 뻘떡 일어나 숲속으로 도망치고 총각은 그냥 굴러내려 골바닥 물웅뎅이 소에 첨버덩 떨어졌다. 그는 사람부터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소의 소용돌이치는 물속으로 뛰여들어가 수난자를 번쩍 안아들고 물가로 나왔다. 그 총각은 이상스럽게도 귀염성스런 얼굴이였다. 기절했거나 숨이 진것 같아 얼굴이며 목, 가슴을 쓸어만져보고 맥을 짚어보는데 총각이 화닥 놀라며 눈을 뜨고 팔목을 잡은 그의 손을 홱 뿌리쳤다. 새파랗게 얼어든 입술에서 앙칼진 소리가 새여나왔다. 《저리 가… 불한당같으니…》 《…?》 《소리치겠어. 사람들이 달려오게…》 범을 쫓고 살려줬는데 도대체 이건…?! 그가 결김에 벌떡 일어나 물러가다가 뒤돌아보니 숲속에서 두 남아가 달려내려왔다. … 장풍안의 어스름속에서 진정 못하고 몸을 뒤채기는 남이에게는 그때 매섭게 굴던 총각의 곱살한 얼굴이 떠오르고 가슴의 뭉클한 감촉, 이상야릇하고 짜릿한 흥분이 상기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뼈대 굵은 총각이 아니라 남복을 하고 사냥터에 온, 모든것이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처녀가 분명했다. (허, 그 《총각》이…?!) 아씨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집에 찾아왔고 아들이 재취하기를 손꼽아 기다려온 어머니는 첫눈에 탐이 나 인편에 소식을 전했으리라는것이 짐작되였다. 스물도 되기 전에 상처한 남이는 여태 서울의 몇몇 량반가문으로부터 구혼을 받은적도 있었지만 굳이 사양했었다. 한것은 권세당당한 가시아버지 권람대감의 눈치를 보게 된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전실부인과의 사이에 난 외동딸이 불쌍해서였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속담에도 이붓엄마가 들어오면 아빠도 이붓아버지로 된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일이란 몰라. 나도 어떻게 될지 알겠는가.… 이붓엄마의 눈치밥을 먹으며 자라날 애어린 구을금이 눈물겹도록 불쌍해서 그 애가 철이 들 때까지는 재취를 하지 않는다고 속다짐해온 그였다. 남이는 모두숨을 길게 내쉬며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님이 환장을 한게 아닐가. 어느 량반집에서 이런 홀아비에게 딸을 후실로 주자고 할가? 하물며 사간원에 있다는 리진강대감이야… 그 아씨가 찾아온것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는것이다. 그저… 그저 그뿐이다!) 이튿날 밤 원정대는 급기야 길을 떠나 도강을 단행했다. 5
남이가 이끄는 우군은 만산쪽에서, 어유소의 좌군은 벽계쪽에서 여울목으로 도강했다. 우군의 상대장인 남이는 행군종대의 중간에서 여울을 건너 낯선 땅 기슭에 올라섰다. 사위는 자욱한 어스름에 잠겨 숨을 죽이고있는듯 했다. 부엉이의 울음소리나 산짐승들이 버스럭대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괴괴한 적막감과 함께 섬찍하고 으시시한 기운이 엄습해들었다. 어느 숲의 어스름속에서 적의 매복이나 렴탐의 눈길이 내다보고있는것 같아 행군종대의 군사들과 말들까지도 초긴장속에 움직여갔다. 그때쯤 벽계쪽에서 도강한 어유소의 좌군쪽도 괴괴한 정적에 묻혀있었다. 남이의 우군에서는 군졸들은 물론이고 군마들도 무슨 불길한 조짐을 느끼고있는듯 걸음걸이가 떠지기만 하는것 같았다. 바로 그때, 행군종대의 앞쪽에서 기겁한 말들의 바스라지는 울음소리가 끓어오르고 왁작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이는 저으기 놀라 말배를 차며 고삐를 휘둘렀고 영특한 군마는 주인이 바라는대로 고개길로 날듯이 뛰여올라갔다. 단숨에 고개마루턱으로 뛰여올라간 그는 놀라운 참경을 띄여보게 되였다. 웬 시체 네구가 길을 가로질러 주런이 널려있었던것이다. 그 시신들은 하나같이 조선바지저고리차림이였다. 물씬 풍겨오는 선지피냄새… 질겁한 말들이 뒤걸음질치려고 날뛰고 군사들은 겁을 먹고 묵묵히 바라보는가 하면 치를 떨고있는데 희끄무레한 하늘에서는 별들이 대지를 굽어보며 피눈물을 머금고 슴벅이는듯 했다. 서늘한 바람이 음산하게 불어왔다. 군사들은 의분을 참을길 없어 저저마다 저주를 퍼부었다. 《에… 끔찍한 놈들!》 《아, 악착한 놈들, 잡혀가다가 도망친 사람들을 잡아서 이 지경으로 해쳤어. 짐승같은 놈들!》 《에- 에- 도망치면 이렇게 된다는거겠지.》 남이가 분노에 떨리는 목소리로 웨쳤다. 《아니요. 그뿐이 아니요. 제놈들 진영에 쳐들어오면 이렇게 죽인다는 공갈이요!》 옆에서 남이의 말을 듣고있던 강순은 분노와 련민으로 후들후들 떨다가 으드득 이를 갈며 그에게 어서 저 시신들을 잘 묻어주자고 일렀다. 그때 어디서 언제 달려왔는지 화포대장 곽주호가 나타나 홰불을 쳐들고 원통하게 참을 당한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유심히 비쳐보았다. 남이가 이상스러워 그한테로 다가가 나직이 물었다. 《누구를 찾소?》 《…》 주호는 아무런 응대도 없이 돌아섰다. 그밤 군졸들이 불이 번쩍 일게 흙구뎅이를 파올리자 시신들을 묘혈속에 안치하고 봉분을 두두룩하게 쌓아올린 다음 강순과 남이는 군사들과 함께 고인들에게 영별의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총대장의 다심한 종사관이 제돌우에 술병과 마른 안주 몇점을 펼쳐놓자 장의례법대로 간소한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는 분묘들에 술을 골고루 부어주고 산신령에게 무주고혼의 령혼들을 잘 보살펴달라고 빌며 고수레를 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행군은 계속되였다. 전에 없던 강행군이였다. 우군의 행군종대가 한시간남짓 걸어갔을 때였다. 저아래쪽으로부터 한 갑기(갑옷을 입은 기병)가 수풀속을 꿰질러 남이한테로 달려왔다. 어유소였다. 《총대장이 어디 있소?!》 《저 앞쪽에서 가오. 무슨 일이요?》 매사에 찬찬한 어유소였지만 웬일인지 대답하는것도 잊고 앞쪽으로 정신없이 내뛰였다. 남이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들어 그를 뒤따라갔다. 어유소는 말을 어찌나 정신없이 몰아대는지 기마술에 능한 남이도 따라잡기 어려웠다. 태풍의 울부짖음같은 바람소리가 귀전을 스치였다. 두 상대장은 얼마 안 가서 강순을 따라잡을수 있었다. 어유소는 말에서 뛰여내리자바람으로 총대장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울부짖었다. 《도원수, 큰일났소이다. 용서를 비나이다!》 《웬일인고?!》 《우리 등신들이 렴탐군을 놓쳤사와요.》 《뭐?!》 《세놈이 매복하고있었는데… 두놈은 활로 쏴제꼈는데… 추격중 한놈은 살아 올라산성쪽으로 도망쳤습니다! 아-》 강순은 격노하여 발을 탕 구르며 소리쳤다. 《엑- 쓸개빠진것들, 이번 싸움은 패했다!》 어유소가 땅바닥에 엎드린채 피타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신의 목을 쳐주시오이다.》 《엑키- 너같이 미련한걸 믿고… 누구 목을 친다고 랑패한 일이 바로잡히겠는가. 이제는 용빼는 수가 없어. 녀진야인들에 대한 정벌을 뒤로 미룰수밖에.》 그 소리에 놀라 남이가 강순앞에 나섰다. 《그건 안되는 일로 아오이다. 전하마마의 어지를 어기는 일이요. 신은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일이 아닐가 생각하오.》 전하마마의 어지라는 소리에 강순은 타는듯 한 눈으로 남이를 지켜보다가 근엄하게 물었다. 《상대장, 그대의 진출방향에는 적의 복병이나 렴탐이 전혀 없었단 말인고?》 《총대장어른, 없었소이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우리 부대들은 감시와 수색을 철저히 하면서 은밀히 진군했소이다. 진군도중에 부엉이 한마리도 날아오르지 않았소이다.》 《부엉이라구? 헝 부엉이야 없었으니 날지 않았지 복병이나 렴탐이 나무우에 숨어있었는지 어떻게 알어?》 이런 판국에서 산성공격은 자멸행위나 같노라고 했다. 《산성의 적은 벌써 싸움준비를 다해놓고 우리를 기다릴것이다! 돌아서라!!》 남이는 이런 속단에 저으기 놀랐다. 《어찌자고 이러시오?》 《파발을 띄워 여기 형세를 전하께 아뢰면 인자하고 현명한 전하는 량해하실거다.》 《안되요. 리시애란때문에 걱정이 많았던 임금을 또 야인들때문에…? 안되오이다.》 강순은 발을 구르며 분노를 터뜨렸다. 《그럼 어찐다는거냐?!》 남이도 맞받아 기염을 토했다. 《렴탐군 한놈 놓친것때문에 대군이 돌아선단 말이오이까?!》 강순은 노여움에 우들우들 떨었다. 《그럼 용빼는 술수가 있으면 내놓앗! 어서! 없으면 출전 중지다!》 남이는 오히려 랭철해져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녀진군사들이 강해졌다고는 하나 아직은 군세가 우리 군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예로부터 조선군사를 무서워한다. 때문에 대군이 출정했다는 정보를 받으면 겁을 먹고 갈팡질팡할것이며 그렇게 되면 진형이 헝클어질것이다. 이런 적은 예봉을 살려 맹격하면 능히 타승할수 있다. 다음으로 아직은 좌군만 발견되였지 우리 우군은 발견되지 않았다. 때문에 좌군이 원정군의 전부인것처럼 가장하고 소란을 피우며 기세등등 진격하면 적의 렴탐군들은 그렇게 알고 보고할것이며 적은 좌군에만 관심을 돌릴것이다. 적의 시선을 좌군에 집중시켜놓고 우리 우군이 배후에서 들이치면 쉽게 적을 이길수 있다. 병법에도 반간(적의 간첩을 역리용하는것)이라는것이 있지 않는가. 끝으로 아군의 장점인 화포가 있다. 화포만 잘 써먹어도 이번 싸움은 얼마든지 이길수 있다.… 남이의 사리정연하고 과단성있는 추측과 판단, 결심을 들은 강순은 응대가 없이 말안장에 올라 앞쪽으로 말을 몰아갔다. 행군종대는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령의 로장 강순은 예나 다름없이 갑주를 떨쳐입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허리가 구부정하고 초췌해보였다. 남이는 강순의 뒤를 묵묵히 따르며 그가 자기의 과격한 주장에 노여움이나 좌절감이 들었는가 하고 생각했다. 싸움을 앞두고 총대장의 이런 기분상태는 소홀히 스쳐지내보낼 일이 아니였다. 어디선가 소쩍새울음소리가 청승맞게 들려왔다. 남이는 저도 모르게 단내가 풍기는 모두숨을 후- 내쉬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느날과 다름없이 하늘중천에 은하수가 굽이쳐흐르고 저멀리 삼태성가까이에서 별찌 하나가 점선을 그으며 날아떨어졌다. 그때 갑자기 앞쪽에서 강순의 말이 바스라지는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길길이 뛰여오르고 그 바람에 강순이 말안장에서 떨어져 길가에 나딩굴었다. 남이는 급히 말을 때려몰아 앞쪽으로 내달리다가 정신없이 뛰여내리며 강순을 안아일으켰다. 《아니, 아니 어찌된 일인가유?!》 로장은 간신히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며 석쉼한 소리로 뇌이였다. 《이보게, 하늘의 뜻인가보네…》 《예?!》 남이는 가슴이 철렁했다. 군사들이 달려와 로장을 둘러싸고 떠들어댔다. 《총대장어른!…》 《상하지 않았수…?》 《괜찮어… 허리가 좀 시큰했어. 걱정말고 행군을 계속해…》 군사들이 물러서는데 여기로 어유소가 달려왔다. 《총대장님!》 《이 사람 어유소, 나는 늙었어…》 《이 무슨 말씀이오이까?!》 《이제부터는 남공의 지휘를 따르게. 둘이서 잘 의논해서… 자네가 이상이 아닌가? 아우처럼 여기고 잘 돕게. 남공의 계략대로 하면 이길수 있어…》 남이는 저도 모르게 털썩 꿇어앉아 로장의 손을 뜨겁게 잡아쥐고 피타는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아- 안되오이다-!》 그것은 진심의 토로였다. 로장이 진군의 앞장에 묵묵히 서만 있어도 속이 든든해지고 배심이 생기는 남이였다. 전쟁은 소인들의 용맹이나 잔꾀로만 하는 놀음이 아니였다. 적장보다 비할바없이 담이 크고 지혜도 더 웅심깊고 선견지명이 출중하여 앞일을 환히 내다보며 전장의 모든 징후를 즉각 느낄줄 아는 감각이 있어야 했다. 과연 누가 강순, 이 백전로장을 대신할수 있으랴.… 강순은 눈에 물기가 어려 젊은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석쉼한 소리로 뇌이였다. 《이보라구, 내가 그냥 곁에 있을테니… 맡으라구!》 남이는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있다가 가까스로 총대장님 명예에 그늘이 가지 않도록 싸워보겠노라고 했다. 군사들이 들것을 들고 달려와 그우에 눕히고 뒤쪽으로 발걸음을 떼는데 죽은듯이 누워있던 강순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벽력같은 함성을 터뜨렸다. 《이눔들아, 돌아서라 앞으로- 나는 혼백이 살아있는 한 원정군을 따른다.-》 그 기상에 놀란 군사들은 들것을 멘채 그의 령에 쫓기듯 다시 대오를 따라섰다. 남이는 말을 달려 부대들의 앞뒤로 뛰여다니며 군사들을 격려했다. 그는 총지휘를 맡았다는 책임감이 가슴에 바위돌처럼 들어앉아 무슨 조화인지 갖가지 방책이 화살처럼 뇌리에 들어와박히는듯 했다. 황막한 대지에 가을바람이 몰아쳤다.… 남이는 원정대가 황성평이 바라보이는 둔덕진 곳에 이르자 전군에 숙영을 명령했다. 장막들이 늘어서고 행군에 지친 군사들이 푹푹 꼬꾸라졌다. 남이는 적의 급습을 받을수 있다고 생각되는 곳들에 팽배를 세우고 각 군영들사이에 기마대를 배치하여 불의의 정황에 신속히 대응할수 있게 하였다. 숙영준비를 철저히 갖추게 한 후 총대장 강순의 장풍안에서 중랑장, 부장들을 위시한 지휘사령들의 모임을 열었다. 강순이 불편한 몸으로 침상에 기대여 앉아있고 어유소는 무거운 낯빛으로 남이를 바라본다. 남이는 이 모임에서 그간 입수한 정보들을 분석하여 차후 행동계획을 발표하였다. 남이가 착안하고 강순이 수락한 책략에 따라 좌군과 우군은 이 지점에서 서로 갈라져 좌군은 황성평을 지나 원래의 행군로정으로 진군하며 우군은 로정을 바꾸어 파저강쪽으로 우회하여 올라산 북쪽의 오미부로 진군하도록 하였다. 좌우군이 올라산성에 집결할 날자와 시간을 정한 후 구체적인 공성계획을 토의하였다. … 무변광대한 천리수해우에 아침해가 솟아올라 대륙의 산발들을 피빛으로 물들였다. 원정군의 기치창검이 솟구치더니 누리를 물들인 피빛을 헤가르며 대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유소의 좌군이 먼저 출발하였다. 남이는 말우에서 어유소에게 손을 흔들어보이며 《좌대장어른! 오미부를 혼자 먹을 생각은 마시오이다.》 하고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엉큼한데가 있는 어유소가 무슨 엉뚱한 일을 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인지 아니면 그 어떤 예감에서인지 남이가 그날 아침 이렇게 말한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였다. 좌군의 마지막종대가 보이지 않게 되자 남이는 우군을 출발시켰다. 척후를 앞세우고 일체 행동을 은밀히 하여 절대로 적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우군의 후위에서 강순을 태운 수레가 무겁게 굴러가고있었다. 강순은 수레에 엇비스듬히 기대여앉아 이 전쟁의 결말에 대해 생각하고있었다. 관북에서 단련된 장병들을 거느리고 일거에 괴멸시킬수 있다고 생각했던 녀진이건만 어찌된 일인지 첫시작부터 여의치 않았다. 그 어떤 병법상의 지략보다도 수많은 전장들에서 피로써 터득한 경험을 소유한 강순이건만 녀진정벌의 전망에 대해서는 어째서인지 료원해보이기만 했다. 문득 작전모임에서 어유소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 리만주는 이미 만단의 준비를 다 갖추고 우리 원정군을 기다리고있을거요.… 우리 군사는 수성전에는 능하지만 공성전에는 숙달치 못하지요. 이제 올라산성싸움이 어려울가 하나이다.…》 남이의 말이 떠올랐다. 《… 승패는 병가지상사라지만 우린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겨야 하나이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공성전에 숙달치 못한 군사를 가지고도 유주를 공격하여 함몰시켰고 대륙을 전률케 했나이다.…》 강순은 두눈을 지그시 감고 이제 벌어질 처절한 싸움에 대하여 생각했다. 6
어유소의 좌군은 적의 시선을 자기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야인부락들을 련이어 들이쳐 리시애잔당들을 잡아내는 한편 거기에 설치된 목책들과 방위거점들을 짓부셔버리면서 진군을 계속했다. 올라산성을 향해 어유소군이 지나가는 로정에 녀진기마대가 출몰하여 끊임없는 기습전, 소모전을 벌렸다. 좌군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녀진기마대를 경계하며 피로한 강행군을 다그쳤다. 한편 남이는 우군에 무지막지할 정도의 강행군령을 내려 행군속도를 배로 높이였다. 좌군보다 먼저 올라산성에 당도해야 한다! 남이의 머리를 집요하게 지배한 이 생각은 단순히 전술상의 계책에 의한것이 아니였다. 어유소의 성격과 행동방식을 잘 알고있는 남이로서는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것이다. 아마도 남이의 혼백에 이제 좌군이 빠져들어갈 무서운 함정의 피비린내가 풍겨왔는지도 모른다. 우군이 파죽지세로 달리고달려 올라산성에 거의 이르렀을때 황성평에서부터 혈전혈투의 수백여리를 간신히 헤쳐온 좌군의 눈앞에 올량합녀진추장 리만주의 소굴 올라산성이 우렷이 나타났다. 올라산성! 태고의 옛 흐름을 그대로 간직한 혼하를 옆에 끼고 우중충한 끝없는 산발들을 배경으로 광활한 대지를 한눈에 굽어보듯 산턱에 웅거한 높지 않은 이 토성은 장차 대륙정복의 야욕을 품을 흉포한 부족의 상징인듯 표표히 서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나지막한 토성, 야인으로 불리우는 미개부족의 조촐한 성곽에 지나지 않았다. 어유소는 올라산성을 바라보는 순간 허거픈 웃음을 터뜨렸다. (허-저게 사납고 잔인하기 그지없는 리만주의 소굴인가?) 어유소는 어느결엔가 육박의 용맹이 온몸에 터져오르고 단숨에 정벌의 목적을 이루고싶은 욕망이 타오르는것을 걷잡을수 없었다. 그러나 행군에 지칠대로 지친 군사들을 무작정 싸움에 내몰수는 없었다. 어유소는 군사를 물리고 우군이 도착할 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역시 여유작작하고 침착한 어유소였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까지도 우군이 도착하지 않자 불현듯 등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우군이 없이도 얼마든지 저쯤한 성곽은 깨버릴수 있다고 생각한 어유소는 끝내 랭철성을 잃고 좌군에 공성진형을 지으라는 령을 내렸다. 수천의 원정군이 흙먼지를 일구며 공격진을 형성하는 모양을 올라산성은 추장지휘기를 펄럭이며 침묵속에 지켜보고있었다. 산성앞벌을 꽉 메우며 산개한 좌군은 갑기병들을 앞세우고 기치창검을 펄럭이며 진격의 북소리를 기다렸다. 남이의 우군이 산성 북쪽기슭에 당도한것은 바로 이때였다. 멀리 산성앞벌에 무시무시하게 전개한 좌군의 공격전렬과 외로운 추장기를 퍼덕이는 침묵속의 산성 그리고 주변의 지형지물을 휘둘러본 남이는 그 무엇인가에 호되게 얻어맞은것처럼 눈앞이 새까매졌다. 복병이다! 이런 예감이 뇌리에 번개친 순간 남이는 저도 모르게 《공격 중지!》 하고 벽력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좌군은 멀리에서 남이의 고함소리를 반대로 들었는지 요란한 북소리를 울리며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어유소가 어떤 실책을 범하는지도 모르고 공격령을 내리였던것이다. 출전북소리가 하늘땅을 뒤흔들고 천여기의 갑기병들이 흙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구름처럼 산성을 향해 육박해들어갔다. 이윽고 좌군주력이 산성대밑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배후에서 삼단같은 불의 장벽이 솟구치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량익측에서 와- 우뢰같은 함성이 터지며 녀진기병들이 물밀듯이 쏟아져나왔다. 어유소의 좌군은 앞에는 깊이를 헤아릴길 없는 해자와 성벽이 가로놓이고 뒤에는 활화산같은 불의 장벽이요, 량옆에는 강포한 녀진의 복병이라 사면포위의 함정에 빠져 갈팡질팡하였다. 산성우에서 녀진궁수들이 내리쏘는 화살들이 비발치듯 하고 좌군의 전렬이 물먹은 담벽처럼 무너져버렸다. 남이는 피가 끓는듯 한 눈으로 전장을 지켜보다가 주먹으로 허공을 때리였다. 교활한 리만주는 조선군사가 공성전에 능하지 못하며 저희 군사는 기병전에 날래다는것을 타산하고 병력의 대부분을 산성에서 끌어내여 량익측에 매복하게 하고 공격서렬의 후위가 될 넓은 지대에 사람을 죽이고 짜낸 기름을 퍼부어 완전한 포위망을 형성해놓았던것이다. 순간에 전몰의 위기를 몰아온 어유소는 너무 억이 막혀 머리를 싸쥐고 몸부림치다가 말에 뛰여올랐다. 필마단창으로 적진에 뛰여들 기세였다. 중랑장 진흠이 말고삐를 나꾸어챘다. 《상대장님! 이러면 안되오이다. 수천군사가 전멸의 위기에 처한 이때…》 《닥쳐라! 어유소는 끝장을 보기 전에는 죽지 않아!》 그리고는 말을 때려몰아 질풍같이 내달렸다. 전장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둔덕우에 장풍을 친 강순은 노발대발하여 빨리 우군을 출동시키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남이는 침착하게 정황을 살폈다. 어유소의 좌군은 멸했구나! 그러나 구원해야 한다. 어유소만이라도… 좌군의 패배가 가슴아프기는 하나 아직은 우군을 출동시킬때가 아니였다. 적의 어떤 흉계가 또 숨어있을지 몰랐다. 좌군이 완전히 혼전속에 휘말려 적아의 구별이 없어지고 절명의 부르짖음과 횡포한 야성이 기진해갈무렵 드디여 남이는 철기대에 좌군을 도와 전장을 곧바로 꿰질러 적을 격살하며 동시에 화포대는 산성북문을 들부시며 성안팎을 불바다로 만들라고 명령했다. 우군의 철기대는 삽시에 혼전이 벌어지는 격전장에 덮쳐들어 사나운 맹호인양 짓쳐나가며 좌충우돌 적을 무자비하게 족쳤다. 그런데 작전의 다음단계를 열어제껴야 할 화포대가 웬일인지 이윽토록 잠잠하였다. 두개의 목표를 동시에 타격하여 전국을 역전시키려는 책략이 위기에 처하자 남이는 노성을 터뜨리며 말에 뛰여올라 화포대쪽으로 내달렸다. 화포진은 2∼3리밖의 수풀속에 있었으나 남이에게는 백리보다 더 먼것처럼 느껴졌다. 화포진에 당도한 남이는 벽력같이 고함쳤다. 《곽주호, 이눔! 왜 쏘지 않는가. 삼족을 멸할테다!》 화포곁에서 어물거리던 곽주호는 남이의 노성에 놀라 뛰여일어나며 《상대장님, 쏘지 못하겠소이다. 저 산성안에 우리 고향사람들이 있는데 어찌 제 백성들 머리우에 불벼락을 퍼붓겠나이까.》 하고는 끅끅 느껴울었다. 남이는 그러는 주호의 잔등을 말채찍으로 사정없이 후려치며 소리소리 내질렀다. 《이 천하의 바보! 그래 고향사람들 생각은 하면서 수천의 우리 군사, 수백만 겨레의 운명은 안중에도 없느냐. 이눔!》 남이는 더더욱 분기가 터져올라 엉거주춤 일어선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여적 쥐새끼처럼 숨어있는 놈이 누구냐? 어-이 무슨 수치인고! 나라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테면 나를 따르라!-》 남이는 말에서 뛰여내려 화포에 달려가 솔선 두팔을 걷어붙이고 화포에 불을 달았다. 무서운 뢰성이 터져오르고 불덩이들이 날아올랐다. 류자광이와 곽주호가 그제야 급히 달려와 련속 화포에 불을 다는 남이를 도와 화염을 무릅쓰고 장진을 해주었다. 《화포대장! 어찌된 일이냐.》 《상대장님, 용서하오이다!》 눈물이 핑 고이는 곽주호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남이는 가슴이 뭉클해져 그의 잔등을 철썩 때려주었다. 곽주호는 고개를 수굿하고 연신 화포들에 불을 달았다. 백병전의 흙먼지 자욱한 하늘을 헤가르며 수백수천의 불덩이들이 날아가 성문과 성안팎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남이는 또 하나의 철기대를 이끌고 화포에 의해 박산이 난 산성의 북쪽성문으로 육박해들어갔다. 성안에는 얼마 안되는 궁수들이 남아 화살을 날리고있었는데 화포대의 일제사격과 함께 돌입하는 우리 철기대의 기세에 혼비백산하여 성벽우에서 나떨어지는 놈, 불길에 휘말려 아우성치는 놈으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남이는 성안으로 마구 짓쳐들어가며 전령을 띄워 백병전이 벌어지는 산성남쪽의 문도 열어제끼게 하고 전군이 성안으로 들어오도록 하였다. 그리고 아군의 마지막서렬이 성문을 통과하자 문을 봉쇄해버리였다. 남이는 급히 어유소를 찾았다. 피범벅이 되여 남이앞에 나타난 어유소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처럼 강대하던 철기의 과반수를 잃고 자기자신이 혼전의 소용돌이속에 반정신이 나간 어유소는 맹수같은 울음을 터뜨리며 이제 살아 어찌 조국땅을 밟으며 임금과 백성을 무슨 면목으로 뵈옵겠는가고 부르짖었다. 남이는 추상같이 웨쳤다. 《장수는 절명의 위기에 빠져도 결코 울부짖지 않는다! 눅거리 눈물이나 보이려면 내앞에서 썩 사라지라!》 어유소는 울음을 뚝 끊고 놀란 눈으로 남이를 쳐다보았다. 이것이 남이인가. 남이는 홱 돌아서서 성벽아래를 훑어보며 전군에 령을 내렸다. 《성문을 굳게 닫고 수성전으로 넘어가라!》 산성앞벌에 어마어마한 포위진을 형성하고 조선원정군을 괴멸시키려던 리만주는 불의에 배후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원정군에 의해 자기의 계략이 파탄되고 뜻밖에도 산성이 조선군사들에게 점령당하자 당황망조하여 어쩔바를 몰라했다. 결사전을 각오한 리만주와 녀진군사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처자권속들과 조선과 명나라에서 포로해온 사람, 도망쳐온자들을 안전한 곳에 피신시키는 한편 속전속결을 노리고 량곡과 피륙을 비롯한 수많은 치중물자들은 그대로 두어둔채 성문을 나섰던것이다. 성을 빼앗기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녀진군사는 그 많은 치중물자를 남긴채 오도가도 못하고 성을 맹공격하였다. 비발치는 화살들이 하늘을 가리우고 화포의 불소나기가 적진을 란탕쳐놓았으나 적은 파도식공격을 련속 들이대였다. 적들의 파성진공에 조선군사들은 지칠대로 지쳤다. 수백여리 강행군의 피로를 풀 사이도 없이 전투에 진입한 조선원정군은 그야말로 초인간적인 의지로 싸우고있었던것이다. 적아의 치렬한 공방전이 며칠을 두고 계속되던 어느날 남이는 갑자기 성문을 열고 자신이 직접 정예기병 수십기를 이끌어 적진으로 짓쳐나갔다. 흰 전포를 펄펄 날리며 량손에 검을 비껴들고 적진에 돌입하는 남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하늘을 꿰지르는 매의 기상그대로였다. 불의의 반격에 순간 주춤했던 적들이 남이를 향해 비발치듯 화살을 날렸다. 남이는 전장을 질주하며 량손에 갈라든 두자루의 검을 번개처럼 휘둘렀는데 단 한개의 화살도 그의 몸에 닿지 못했다. 이윽고 적들이 남이의 기마편대에 왁 덮쳐들었다. 남이는 무서운 기세로 내달리며 덮쳐드는 적병들을 삼대베듯 하였다. 아우성소리, 비명소리가 온 들판을 꽉 메웠다. 한동안 적진을 들쑤셔놓은 남이의 기마편대는 그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성안으로 철수했다. 손에 땀을 쥐고 기마편대의 급습과정을 지켜보던 어유소가 부랴부랴 마주 달려가 남이를 맞이했다. 《장군, 어쩌자고 무모하게 적진에 뛰여든단 말이요.》 어유소가 노성을 터뜨렸다. 《홧하하. 좌장군! 검을 빼들고 적진을 누비는 멋 또한 일미라오. 하하하!》 이때 군사들이 남이의 전포를 보고 모두 놀라와했다. 《아니, 장군의 전포가…》 《원, 저런… 그 흰 전포가…》 군사들의 술렁거림에 어유소가 남이의 전포를 보니 얼마나 많은 적을 베였는지 흰 전포가 온통 적군의 피로 물젖어있었다. 어유소는 가슴이 섬찍해져 남이에게 일렀다. 《장군, 다시는 그런 모험을 하지 마시오. 그러다가…》 남이는 어유소의 정색한 모습을 흔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괜찮소이다. 적이 우리 군사가 방어에만 급급해있다고 생각할 때 불의에 쳐나가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예봉을 꺾어놔야 하오이다. 자, 보시오!》 남이는 성벽아래를 가리켰다. 과연 불의의 급습에 진중이 와해된 적들이 황황히 진형을 수습하며 물러가고있었다. 남이는 퇴각하는 적들을 눈아래 굽어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누리를 뒤덮은 석양빛에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담대한 사나이가 호호탕탕 터치는 웃음소리가 드넓은 황토대지에 우뢰처럼 메아리쳤다. 남이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불의의 기습전을 벌려 적을 혼비백산케 하였는데 그때마다 맹수처럼 전장을 질주하는 그의 흰 전포는 적의 피로 물젖어 불길처럼 나붓기였다. 녀진군사들은 《붉은》 전포를 날리며 진두에서 달리는 용맹한 남이를 《홍옥장군》이라고 불렀고 홍옥장군이 나타났다고 하면 공포에 질려 기를 쓰지 못하군 하였다. 강순은 남이가 전장을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진중한 눈길로 바라보고있었다. (남이! 그대는 림기응변의 지략으로 전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무비의 용맹으로 국면을 역전시켰도다. 남이가 아니면 과연 뉘라서 이 나라 대문을 지킬고… 아, 이젠 난 늙었구나!…) 며칠전부터 남이는 성안에 커다란 구뎅이를 파게 하였다. 그 구뎅이가 적군을 매몰해버릴 함정이라는것을 알았을 때 강순이도, 어유소도 모두 입을 딱 벌렸다. 함정이 거의 완성되였을 때 남이는 곽주호를 불렀다. 남이는 곽주호에게 화포대를 은밀히 성밖으로 끌어내여 성문을 마주하게 배치하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열려진 성문안으로 화포를 명중시켜 쏠수 있겠는가고 물었다. 곽주호는 얼마든지 명중사격을 할수 있다고 하며 장군만 곁에 있으면 문제없노라고 하였다. 그러는 주호를 이윽토록 바라보던 남이는 나는 여기 성루에 있겠다고 말하였다. 그 말에 주호는 대번에 펄쩍 뛰며 그게 제정신을 가지고 하는 소리인가, 어떻게 장군이 있는 성에 불소나기를 퍼부으라는건가, 절대로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사색이 되여 두손을 내흔들었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 적을 속이고 놈들을 함정에 몰아넣을수 있다!》 남이는 이렇게 오금을 박았다. 다음날 새벽 곽주호는 화포대를 은밀히 성밖으로 끌어내여 성문을 향하게 배치하고 만단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날 며칠동안 맹공격을 들이댔어도 성을 빼앗지 못한 적들은 악에 받쳐 남은 군사를 총동원하여 공격해왔다. 남이는 놈들이 성벽에 바투 붙어서자 어유소의 좌군철기대로 하여금 성문을 열고 짓쳐나가 적들을 족치게 하고 얼마 안되는 궁수들을 내놓은 나머지군사들은 모두 강순을 호위하여 성 북문을 빠져나가 유리한 곳에 진을 치게 하였다. 어유소가 정예한 기병 백여기를 이끌고 성문으로 짓쳐나가자 새까맣게 성벽을 타고오르던 적들이 와르르 모여들었다. 어유소의 기마편대는 좌충우돌 적을 무찌르다가 남이의 신호에 따라 거짓 패하는척 하며 적을 꼬리에 달고 성안으로 퇴각하였다. 적들은 열려진 성문으로 물밀듯이 쓸어들었다. 어유소의 기마대는 날쌔게 함정을 에돌아 북문으로 빠져나가고 급기야 성문으로 쓸어들어온 적들은 달리던 서슬에 그대로 함정에 빠져들어갔다. 악-악- 비명소리, 울부짖음소리, 란타의 광란… 앞서 들어온 적들이 함정에 빠져 밀치고 닥치고 엎어치고 하며 아비규환으로 끓어번질 때 뒤따르던 적들이 함정이 있는줄 알고 급기야 돌아서서 내빼려고 하였다. 이때라고 생각한 남이는 북을 울려 화포대에 사격신호를 보냈다. 량쪽 성문을 면바로 겨냥한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고 무시무시한 불덩이들이 열려진 성문으로 날아들어갔다. 불줄기들은 그대로 함정에 빠져 아우성치는 적들의 머리우에 쏟아져내렸다. 살이 타는 냄새, 피냄새, 마구들이 타는 냄새가 온 성안에 꽉 차고 미친듯 한 비명이 터져올랐다. 성은 말그대로 하나의 커다란 불도가니가 되여버리고말았다. 성에서 얼마 멀지 않은 둔덕에 풍을 치고 앉아 자기편 군사의 전몰과정을 얼빠진 눈으로 지켜본 리만주는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활화산처럼 터져오르는 화광과 전몰의 비명에 넋을 잃은 리만주는 《아-악!》 소리를 지르더니 《아! 남이!- 무서운 장수로다! 무서운…》 하고는 곁에 있던 호위군사들과 함께 말에 뛰여올랐다. 궁수들과 함께 불바다로 변한 성을 탈출하여 화포대를 향해 달리던 남이는 금빛전포를 날리며 말에 뛰여오르는 놈을 보는 순간 《리만주다!》 하고 소리쳤다. 군사들이 어쩔새도 없이 남이의 말은 리만주를 향해 쏜살같이 돌진했다. 량손에 칼을 비껴든 남이가 살같이 달려오는 모습을 본 리만주와 호위군사들은 부랴부랴 내뛰려고 하였다. 남이는 말을 달리며 벽력같이 고함을 쳤다. 《리만주! 너도 사나이거든 내 칼을 받아라!》 남이의 웨침에 리만주는 말머리를 홱 돌리더니 악- 소리치며 맹수처럼 돌진해왔다. 전란의 대화재가 휩쓸고 지나간 황막한 들판에 두 적수가 마주섰다. 약진의 기상이 서슬푸른 남이의 새파랗게 젊은 모습을 본 리만주는 단말마적인 광기와 적의가 어린 얼굴을 푸들푸들 떨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남이! 오늘 우리가 패한건 용맹과 지략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너희들이 염라국의 화고에서 훔쳐온 번개때문이다!》 남이는 통쾌하게 웃었다. 《아군이 쓴건 도적질한 번개가 아니라 화포다! 리만주, 어제날의 신의를 헌신짝처럼 줴버리고 략탈과 강도질로 우리 겨레를 괴롭힌 너의 운명이 이렇게 될줄 몰랐더냐. 너는 화포때문에 패한것이 아니라 불의에 매달려 온갖 못된짓을 다한 자기자신때문에 망했다. 애국에 불타는 우리 겨레의 기개를 꺾을상싶으냐!》 남이의 추상같은 꾸짖음에 얼굴이 거멓게 질린 리만주는 비록 싸움에서는 패했지만 용맹을 겨루는 공평한 혈투에서는 절대로 지지 않을거라고 하며 단병접전의 결투를 하자고 하였다. 이때 화포대쪽에 집결해있던 아군군사들이 우- 밀려와 리만주와 호위군사들을 에워싸고 금시 도륙을 낼듯 함성을 내질렀다. 리만주의 말을 들은 남이는 홧하!- 앙천대소하다가 한손으로 군사들을 제지시키며 패전지장의 마지막소원을 풀어주자고 하였다. 그리고는 온몸에서 증오의 불을 내뿜듯 와락 검을 비껴들었다. 무시무시한 칼부림의 란투가 벌어졌다. 맹수의 포효같은 야성을 내지르며 두 적수는 말우에서 서로 어기치고 바로치고 찌르고 베며 맞붙어 돌아갔다. 칼날과 칼날이 부딪칠 때마다 서슬푸른 불꽃이 튕겨났다. 녀진군사들은 물론 그들을 에워싼 조선군사들도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았다. 남이는 한걸음 물러서서 리만주의 치째진 눈을 쏘아보며 일격에 놈을 쓰러뜨릴 틈을 노리였다. 그는 적장을 아예 죽여버릴 생각은 없었다. 놈의 의기를 꺾어놓고 투항시켜 산채로 한성으로 끌어갈 속심이였다. 그래야 잡혀온 사람들과 숨겨둔 마소들도 모두 되찾고 녀진부족들에게 공포를 주어 다시는 우리의 지경을 넘보지 못하게 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두 적수가 서로 노려보며 기회를 엿보던 한순간 남이는 벽력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말을 달려 돌입했다. 적장도 칼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두필의 말이 어기는 찰나 남이는 말안장우에 털썩 누우며 힘껏 후려치는 적장의 칼을 피해 빠져나갔다. 칼날의 섬광이 눈앞에 번쩍일 때 남이는 말고삐를 나꿔채여 돌아서며 휙- 몸을 날려 칼로 허공에 반원을 그었다. 리만주가 악- 비명을 지르며 어깨를 싸쥐고 굴러떨어졌다. 군사들이 와- 환성을 터치며 달려나가 꿈틀거리는 리만주를 붙들어 일으켜세우는데 추장의 패배를 목격한 그의 호위군사들이 일제히 병쟁기를 버리고 통곡을 했다. 남이는 리만주앞으로 다가가 측은한 눈매로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불호령을 내렸다. 《내 칼끝을 불에 달구어 가져오라!》 그리고는 리만주의 장풍옆에 서있는 아름드리나무의 껍질을 벗기라고 소리쳤다. 리만주는 도대체 자기에게 어떤 형벌이 가해질지 가늠이 가지 않는듯 두눈을 데룩거리며 금시 허물어질듯 온몸을 떨었다. 이윽고 군사들이 나무의 한쪽 껍질을 벗기고 시뻘겋게 끝을 달군 칼을 가져왔다. 칼을 받아든 남이는 뻘겋게 단 칼끝을 노려보다가 하얀 속살이 드러난 나무에 글을 새기기 시작했다. 《조선국 정서주장 강순, 좌대장 어유소, 우대장 남이 건주위녀진을 정벌하였다.》 뿌직뿌직 나무의 속살을 태우는 칼끝에서 그어지는 글발을 바라보던 군사들이 일제히 와- 함성을 터뜨렸다. 이때 군사들에게 붙들려 후들후들 떨며 서있던 리만주가 별안간 악- 소리치며 군사들을 떠밀치고 불길에 휩싸인 군영울타리쪽으로 내뛰였다. 남이가 뒤쫓아가려는데 와-와-소리치는 군사들속에서 누가 뿌린것인지 창대가 날아가 추장의 잔등에 면바로 박히고 놈은 단말마적비명을 올리며 비틀거리다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남이가 놀라서 홱 뒤돌아보는데 류자광이 비호처럼 달려나가 그자의 목을 내리쳤다. 류자광의 돌발적인 행동에 남이는 아연해졌다. 자광이 여태 자기가 알았던 그런 사람이 아니고 그 무엇을 집요하게 노리는 낯선 작자로 보였던것이다. 자광이 무엇을 느꼈는지 얼굴빛이 거멓게 질려 그한테로 조심조심 다가왔다. 남이는 그를 쏘아보며 격한 목소리로 따져물었다. 《얏- 왜 시키지 않은짓을 햇- 왜- 왜…?!》 《저… 실은 놓칠가봐…》 《닥쳐라! 그렇게 전공을 떨치고싶으냐?》 《죽을 죄를… 제발 용서하오이다.》 류자광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때 류자광의 옆으로 허름한 관복차림의 문관 셋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관북에서 도망쳐온 나부랭이들이였다. 그자들은 남이앞으로 다가와 무엇이라 웅얼거리며 자기 소개를 하는것 같더니 죽은 추장의 머리에 침을 뱉으며 저들의 적개심을 시위하듯 웃어댔다. 그 모양을 바라보던 남이는 쓰거운듯 코웃음을 치며 와락 소리쳤다. 《너희들은 2중의 배신자다. 어제는 추장에게 빌붙어 살려달라 도와달라 애걸복걸하고 오늘은 그 추장의 시신에 치욕을 들씌우느냐. 우리 군대 얼굴에 흙탕칠을 한 너희들은 사람값에 못 가니 죽어 마땅하다!》 남이의 추상같은 노성과 함께 장검이 번개치듯 번뜩이더니 어느새 배신자들의 머리가 날아떨어져 흙먼지바닥에 검붉은 피를 뿌리며 딩굴었다. 한 나이지숙한 녀진군사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눈물이 그렁하여 격한 소리로 열변을 토로했다. 《남이장군! 조선과 같은 례의지국, 례의지군은 이 세상에 둘도 없소이다. 이런 례의지군에 투항해 화친을 맺음은 수치가 아니요, 광영이나이다!》 다른 녀진군사들도 격정을 누를길 없어 가슴을 두드리며 끅끅 흐느끼였다. 남이도 가슴이 뭉클해져 전란이 가신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아! 나는 무관인데도 어이하여 평온이 이토록 소중하며 화친이란 말이 이처럼 듣기 좋으냐! 전란이 없는 저 푸른 하늘아래 선의와 화친을 노래하며 살아가기를 내 바라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