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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530여년전에 일어난 함길도농민전쟁(리시애란)이 석달째나 계속되여 세상이 매우 소란하던 시기이다. 경기도 장단고을에서 남으로 서너마장 떨어진 나지막한 고개마루 한길가에 세월의 비바람에 고삭아 퇴색한 장승목신이 기웃이 서있고 그옆으로 낡아빠진 역참이 앉아있어 전란의 하늬바람에 시달리고있었다. 장단역참은 본채와 려로에 오른 량반관료들이 쉴수 있는 우진각기와지붕의 자그마한 려숙과 마구간으로 되여있는데 거기서 장씨성을 가진 거적눈의 아전이 주인노릇을 하고 그 밑으로 여섯명의 노비들이 바지런히 돌아치고있었다. 역참이란 이전에는 이를데없이 한적한 곳이였으나 관북에서 전란이 터지자 손발이 여덟이 되여도 모자랄 지경이였다. 낮이나 밤이나 관북전장으로부터 달려온 파발들이 들이닥쳐 먼길에 녹초가 된 말대신 새 말을 갈아타고 한성쪽으로 올리뛰였으며 임금의 새라새로운 어지며 최후통첩, 오위군도총관의 갖가지 계략들을 가지고 전장의 도원수부로 내려가던 도승지나 선전관, 종사관들이 때없이 뛰여들어 말을 내라, 마초를 내라, 당장 진지를 지으라, 술을 내라고 호령했다. 그러다가 좀 어물거리면 말채찍을 들고 주먹이 날아드는판이였다. 장씨아전은 그 량반님네 험한 기상에서 전장의 형세가 어떻게 기울며 임금과 조정의 분노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보지 않고도 짐작이 되여 찍소리 못하고 뛰여다녀야 했다. 일은 고약하게 돼간다는 생각과 함께 팔자타령이 나가고 고을관청의 아전으로 있던 때가 그리워졌다. 그때에는 비록 개바닥 구실아치자리지만 그래도 제 주머니에 좀 들어오는것이 있었다. 량인농부나 노비, 백정들한테 한번 눈만 흘겨도 찹쌀되박이나 중닭 아니면 돼지뒤다리라도 들어왔었다. 그래서 항간에는 촌년이 아전서방을 하면 가재걸음을 걷고 고기국 아니면 밥을 안 먹는다느니, 아전서방을 하면 중의 고리에 단추를 붙인다느니, 아전의 술 한잔에 환자가 석섬이요, 아전은 시골의 사대부라는따위의 소리까지 나돌았다. 거적눈의 아전은 그런 험구에 주눅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지체를 높여주는 소리로 여겨 활개를 더 크게 저으며 의젓하게 걸어다녔었다. 그러나 요새는 괴춤에 들어오는것이란 없고 걸핏하면 소나 말처럼 채찍에 얻어맞기가 일쑤였다. 어느날 한나절에는 함길도병마절도사의 행차가 역참에 들이닥쳤다. 일행은 병마절도사외에 11명의 갑기병이였다. 장씨아전은 황황히 달려나가 말에서 내리는 절도사에게 절을 하고는 어른을 고관들이 드는 려숙으로 모시려고 했다. 병마절도사는 관복허리에 두손을 올리고 시골역참을 둘러보고나서 그우에 비낀 하늘을 쳐다보다가 《여 자광이… 류자광이…!》 하고 누군가를 부르며 뒤돌아봤다. 그러자 날파람있게 생긴 갑기병이 자주빛비단보자기에 싼 목함을 들고 경계의 눈을 사납게 번뜩이며 절도사곁으로 총총히 다가왔다. 절도사가 그자의 귀에 대고 무엇이라고 수군거리는데 역참의 노비들은 땀내가 물씬물씬 풍기는 말들을 마구간쪽으로 끌어간다, 세면물을 떠내온다, 군사들을 려숙방으로 들인다 야단법석을 떨었다. 장씨아전은 무심결에 손발을 씻는 절도사를 돌아보다가 그의 관복자락이 험하게 찢어진데 눈길이 갔다. 그런데 절도사라는 어른은 손발을 다 씻고 자주빛비단보자기에 싼 목함을 방안에 들여가지 않고 퇴마루에 놓은채 그옆에 파수병만 세워놓고는 류자광이라는 작자와 함께 근엄하게 헛기침을 기으며 방안으로 사라졌다. 그런 눈치를 본 아전은 저 함속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을가 하고 생각을 굴리다가 별안간 가슴이 띠끔해졌다. 분명 한성의 어느 고관대작에게 올리는 진상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금불상이나 야광주 아니면 값비싼 록용이나 몇백년 묵은 산삼이 아닐가… 헌데 더욱 수상쩍은것은 절도사와 갑기병이 그 비단보자기에 싼 목함을 토방밑에 그냥 두고 거기에 파수병만 세워놓은것이였다. 그날 군사들은 점심요기를 대충하고는 먼길에 지쳐버려 인차 잠에 노그라떨어졌다. 목함을 지키는 파수병도 퇴마루옆에 쭈그리고앉아 끄떡끄떡 졸았으며 어깨에 걸친 창날만이 서슬푸른 살기를 번뜩일뿐이였다. 역참에는 괴괴한 정적이 깃들고 이따금 코고는 소리만이 새여나올뿐이였다. 장씨아전은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역참둘레를 스적스적 걸어돌며 군사들의 동정만 살폈다. 만약 하늘이 도와 이런 때에 역참에 벼락이 내리쳐 큰불이라도 일어나고 복닥소동이 벌어지면… 젠장, 그 틈에 저 목함의 금은보화를 걷어안고 관북쪽이나 야인지역으로 줄행랑을 놓는다면 내 팔자가 어이 될고 흐흐흐… 이렇게 환장을 하자 아까 띄여본 절도사의 관복자락이 험하게 찢어진것이며 투구도 쓰지 못한 군사들의 초라한 몰골이 떠오르며 이것들이 요새 전란통에 흔해지는 강도단, 병마절도사로 가장한 산적들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뇌리에 번개쳤다. 아전은 고을형방의 라장으로 있는 사촌동생한테 황황히 파발을 띄웠다. 사촌동생이 황금벼락을 맞으면 나를 모른다 하랴 하는 속심도 없지 않았다.… 시간이 가고 또 가도 속태우며 기다리는 라장도 라졸도 오지 않는데 류자광이라는 갑사가 굳잠에서 깨여나 밖에 나왔다. 갑사는 파수병곁에 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는 심드렁하게 말을 건네였다. 《이봐, 좀 있다 절도사어른을 깨워야겠어.》 《예… 갑사님, 알았소이다.》 (갑사란 부유한 량인상층출신의 군사로서 오위군의 골간이였다.) 《이제는 떠나야지, 저 림진강을 건너면 한성쪽 하늘이 바라보여.》 《히야- 한성이라-!》 《임자, 관북이 고향이라지?》 《그렇소이다.》 《한성구경이 첨이겠구먼…》 장씨아전이 역참의 본채모퉁이를 돌다가 우연히 그들이 주고받는 소리를 엿듣게 되였다. 《한성은 북청이나 길주하고야 다르지. 시골내기들은 눈이 뒤집혀! 경복궁… 창덕궁, 남대문, 서대문, 종로거리 허허…》 《공주나 궁녀도 볼수 있겠지오다?》 《아무렴!》 《갑사님은 대감님들중에도 아는이가 있소다?》 《사람을 무얼로 봐? 허허, 이봐 남이장군하고도 종친이나 같어.》 《예? 아-니-…!》 《건춘문이나 지키던 이 갑사를 관북에 데려간것도, 이번에 한성으로 가게 된거랑 다 남이장군이 왼심을 써준거지.》 《그렇구만…!》 《강순도원수가 명성을 날리게 된것도 다 남이장군덕이여 쉿… 함부로 입질하면 안돼. 북청 길주싸움에서 도원수가 대승한건 남이장군 머리에서 나온 계략을 쓴 덕이지. 장군은 지용을 겸비했거든…!》 《하-》 《혼자만 알고있어. 태종임금의 외손이고 남공의 어머니 정선공주마님은 태종임금따님이거든, 이번 상경한 걸음에 마님한테 인사라도 올려야겠는데 그럴새가 있겠는지…?》 《아시우?》 《이 사람을 친자식처럼 사랑해줬어.》 《갑사님은 정말 대단하오이다. 에- 에- 이- 못난이한테는 언제 그런 복이 찾아들겠는지…?》 웬일인지 갑사는 탐나는 눈으로 파수의 갑옷 여기저기를 여겨보는것 같더니 《헌데 임자 갑옷은 언제 그렇게 상처투성이가 됐어?》 하고 묻는다. 《석달째 쌈판에 딩구니 흐흐… 갑사님 갑옷은 새것 같구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역참의 얼룩개가 다가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돌아치고 쉬파리같은것이 그들의 머리우에서 날아돌았다. 파수병이 목함쪽을 돌아보며 냄새를 맡아보는지 씩씩거린다. 《아니, 이거 냄새가 새지 않는가?》 《쳇, 냄새는 무슨 냄새? 대가리를 유지에 여러겹 싸서 목함안에 넣고 회분을 다져넣었어.》 《쉬파리가 날아든걸 보우다. 쉬파리라는건 십리밖에서도 썩은 냄새를 맡고 날아든다는데 속이 구린 놈 송장은 더 빨리 썩는다지 않소.》 《흐흐, 나는 모르겠는걸. 임자 여우코가 아니여?》 장씨아전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엿듣다가 송장이라는 소리에 그만 화닥 놀라 벽에 붙어섰다. 목함안에 금은보화가 아니라 송장의 대가리가 들어있는것 같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치고 메스꺼움이 치밀었다. 한데 류자광은 무엇이 탐나서인지 파수병의 갑옷 가슴팍이며 팔뚝, 어깨를 쓸어만져본다. 《쯧쯧… 이 지경이 된것도 갑옷인가. 칼에 찍히고 창에 찔려 갑옷비늘이 많이 떨어졌구먼. 쯧쯧… 붕어도 비늘이 다 떨어지면 인차 죽어. 이런걸 걸치고 공주, 궁녀를 보겠어? 내것하고 바꾸세나.》 《아니 갑사님, 왜 이러시우?》 《허허, 나야 또 인차 새걸 얻을수 있지 않아.》 아전이 그 자리를 피해 마구간에 갔다가 돌아올 때 보니 갑사와 파수병이 서로 좋아하며 갑옷을 바꿔입고있었다. 그날 병마절도사행차가 새 말들을 갈아타고 떠난 후 고을형방라장이 15명의 라졸들을 이끌고 달려온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역참의 장씨아전은 꾀바르게 선손을 쓴것을 후회했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수도 없어 갑자르다가 그들에게 《강도단》이 사라진쪽을 가리켜주었다. 이윽고 저쪽 산굽이에서 놀란 갈가마귀떼들이 왁짝 떠들며 날아올랐다. 라장과 라졸들은 말을 정신없이 때려몰아 《강도단》을 따라잡고 흙먼지구름을 부옇게 날리며 일행을 에워쌌다. 말들이 숨이 넘어가는듯 한 소리로 울부짖는 가운데 칼부림과 같은 말들이 오갔다. 《이 날강도 같은 놈들아-》 《뭐-야?》 《목함을 열랏- 내려놔!》 《너흰 웬놈들이냐?》 《장단형방에서 왔다! 잔말 말고 목함을 열엇!》 《이 자식이?!》 병마절도사는 성이 꼭두까지 치밀어 그자를 사납게 쏘아보다가 말에서 뛰여내렸고 라장도 따라내렸다. 병마절도사는 말채찍으로 그자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는 길섶으로 결패스럽게 걸어갔고 라장은 그 험한 기상에 어리쳐 순순히 따라갔는데 절도사가 동달이군복안에서 황동빛구리패쪽을 보란듯이 꺼내보였다. 그것은 임금의 어지에 따라 움직이는 고관들만이 품고 다닐수 있는, 룡마 세마리를 돋을새김한 마패였던것이다. 라장은 그것을 보자 기겁하여 길바닥에 엎드려 용서를 빌며 머리를 조아리였다. 《얏- 이눔 정신을 차렷-》 《나-리, 나리… 몰라봤소이다!》 병마절도사는 행차를 지체시킨 시골뜨기를 더 꾸짖으며 되게 다루고싶었으나 시간이 촉박해 홱 돌아서 말한테로 달려갔다. 이윽고 병마절도사의 행차는 질풍같이 한성쪽으로 내달렸다. 2
비단보자기로 싼 그 목함안에는 함길도폭동군 두목 리시애의 머리가 들어있었다. 리시애의 머리가 서울에 도착했다는 소문이 이튿날 아침부터 한성장안에 파다하게 퍼져 문무백관들과 백성들을 놀래우고 희열로 들뜨게 했다. 그것도 그럴것이 거듭되는 민란과 소요에 시달려온 사람들은 이제는 바라고바라던 태평세월이 오게 됐다고 이 집, 저 집으로 뛰여다니며 그 소식을 전하고 여러 거리들에 모여 떠들기도 하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무렵 승정원(임금의 어지를 관청들에 전하는 기관)의 새파랗게 젊은 승지가 검은 관복자락을 펄럭이며 말을 달려 운종가의 광천교를 지나더니 어느덧 남이의 집 솟을대문앞에 이르렀다. 젊은 승지는 말에서 뛰여내리자마자 대문을 두드리며 《여봐라-》 하고 소리쳐 대문지기종을 불러내여 남이의 어머님이 집에 계시느냐고 물었다. 이윽고 집안에서 조용히 걸어나오는 정선공주에게 그는 머리숙여 인사하고는 품속에서 명소패(임금의 부름을 알리는 패쪽)를 꺼내여보였다. 정선공주는 저으기 놀라며 그 자리에 엎드려 명소패에 절하고는 갑자기 어인 일이냐고 묻는듯 승지를 지켜보았다. 《마님, 어제 저녁 관북폭동군의 우두머리 리시애의 머리가 궁성에 도착했소이다. 상감마마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패망한 그 역적의 몰골을 문무백관들에게 다 구경시켜 한을 풀도록 하라고 어지를 내리시고는 이번 싸움에서 전공이 큰 남공의 어머니 공주마님과 강순총대장 로부인께도 알리도록 하라고 분부하셨소이다!》 젊은 승지는 떠나면서 한성의 고관대작들이 다 모이는 자리로 가는것만큼 옷차림을 잘하는것이 좋으리라고 조용히 일렀다. 그날 아침 정선공주는 명절날처럼 마음이 즐거워 금실은실 비단실로 짠 저마포치마저고리를 떨쳐입고 가마쪽으로 나오는데 여섯살에 난 손녀 구을금이가 어느새 자기도 때때옷을 꺼내입고 뽀르르 따라나섰다. 할머니가 명절날이나 기쁜 일이 생기면 자기를 꼭 데리고 다니는데 버릇된 애였던것이다. 그날도 구을금이는 할머니가 의례히 저를 데리고 가려니 생각했는데 가마에 혼자 올라앉자 그만 설음이 북받쳐 째지는 소리로 울어대며 따라가겠노라 앙탈을 부렸다. 할머니는 아무리 경사스러운 날이여도 어린것한테 폭동군 두목의 머리, 그 끔찍한것을 보여주고싶지 않았던것이다. 대문지기 공덕로인이 마침 구을금이를 얼른 업고 대문안으로 들어가 아이를 달래여 마님은 무난히 떠날수 있었다. 정선공주가 저자거리사형터에 이르니 거기에는 벌써 수많은 고관대작들과 량반들이며 구경군들이 울담처럼 빙 둘러서서 웅성거리고있었다. 약간 둔덕진 언덕에 높다랗게 세워진 장대끝에 리시애의 머리가 매여달렸고 그밑에 마른 나무가리가 무드기 쌓여있었다. 아침에 왔던 승지가 찾아와 반기며 정선공주를 고관대작들이 서있는쪽으로 안내했는데 거기에는 한발 먼저 강순총대장댁 로부인이 와있었다. 해사한 얼굴에 은회색 비단옷차림의 로마님은 정선공주를 인차 알아보고 어서 곁에 와 서라고 손짓했다. 정선공주는 아들이 관북싸움터로 떠난 후 비로소 로마님을 알게 되였지만 그의 유순하고 상냥한 마음씨로 하여 인차 가까와진 사이였다. 옆자리와 뒤켠의 고관들이 정선공주쪽에 시선을 모으고 무엇이라고 수군거리는가 하면 눈인사를 보내는이도 있었다. 정선공주는 로부인과 손을 꼭 잡고 가지런히 서서 가슴을 두근거리며 리시애의 머리만 바라보았다. 회분같은것이 묻어 희꺼멓게 보이는 리시애의 얼굴에는 지독한 적의나 공포의 빛도 없이 깊이 잠든듯 한 평온한 기색만이 어려있는듯 했다. 여기로 올 때에는 머리에 뿔이 나고 뻐덩이발을 앙다문 흉악한 몰골을 보리라 생각했었는데 너무나도 수수한 모색이였다. 정선공주는 그 모색이 여느 사람들이나 다름이 없는데 저으기 놀라 몸서리까지 치게 되였다. 구경군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으리으리한 문관복을 떨쳐입은 승정원 도승지 민준이 나무가리옆으로 나서서 의분에 격해진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제-신들- 문무백관 여러분들- 장대끝에 매달린 저 악귀의 대가리를 똑똑히- 보시오이다- 저 두개골속에는 천하에 더없는 죄악이 끓고있었소이다. 저눔이 바로 리시애요- 똑똑히 보사이다. 천추에 용서 못할 리시애, 저런 역적이 감히 상감마마와 이 태평천국을 뒤집어엎구 제놈이 룡상에 올라 천하를 다스려보자구 꾀했다니 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고?! 홧하하하…》 그 웃음소리가 저자거리의 하늘에 울려퍼졌다. 도승지는 정의와 인륜을 등진 저 악귀는 거짓으로 량순하고 우매한 백성들을 속여 민란을 일으켰다고 지탄하고나서 이놈이 바로 상감마마와 조정이 관북민들을 멸살하자고 저 경흥 길주앞바다 후라토섬에 수백척의 수군함선들을 급파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그처럼 엄청난 민란이 터지게 했으니 이 얼마나 괴이하고 간악한 일이냐고 단죄했다. 그러자 숨을 죽이고 듣고있던 문무백관들이 기막히고 억이 막혀 한동안 어쩔바를 몰라하다가 일제히 주먹을 쳐들어 흔들며 무서운 함성을 터뜨렸다. 아- 저눔 죽어마땅한 역적이로다. 저 대가리 도끼로 까라. 리시애일족조상들 무덤까지 파헤쳐 유골들을 불사르라. 불태우라, 뼈가루 한줌도 이 땅에 묻힐수 없다…! 도승지는 팔을 흔들어 함성을 내지르는 관민들을 진정시키고는 상감마마께서 오늘도 이번 불의의 민란을 진압한 오위군의 강순도원수와 특히 남이의 전공을 높이 찬양하고 장군들에게 경의를 표시했노라고 했다. 그 우렁찬 웨침소리에 고관들이 설레이며 숙덕거리는데 정선공주와 강순도원수의 로마님은 숫저운듯 고개를 숙이였다. 그때 두 관리가 달려나와 나무가리에 불을 질렀다. 시뻘건 불길이 기름을 바른 장대에 휘감기며 황황 타오르더니 어느덧 그 끝에 매달린 리시애의 머리를 휩쌌다. 드디여 그 머리가 불덩어리로 되여 떨어져내려 밑에서 충천하는 불길속으로 날아들었다. 이윽고 두개골이 터지는 소리인지 펑- 하는 굉음과 함께 불찌들이 산지사방으로 날아났다. 정선공주는 너무 놀라 얼결에 로마님을 돌아보니 눈을 꼭내리감고있는데 맞잡은 손도 싸늘하게 식어드는듯 했다. 그때 나라굿을 맡은 장상차림새의 키가 꺽두룩한 무당과 몸매가 부한 무당이 느릿느릿 거드름스럽게 걸어나가 장새납을 불어대고 북소리를 쿵쿵 울려대자 예닐곱의 젊은 무당들이 《반란괴수》와 잡귀신들에게 호령하는듯 악- 악-… 얏- 얏-… 후여- 후여-… 하고 괴이한 함성을 내지르며 날름거리는 불길속으로 활을 쏘고 대신칼, 장군칼, 삼지창을 뿌려던졌다. 그 서슬푸른 쟁기들이 번뜩이며 화염속으로 휙휙 날아들고 활활 타번지는 불길속에서 반란의 악령이며 잡귀신들이 단말마적으로 악을 쓰며 몸부림치는듯 시커먼 연기와 희뿌연 재먼지들이 룡트림치며 회오리쳐오른다.… 이윽고 어느새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숯이 된 장대와 스러지는 불무지둘레를 울긋불긋한 차림새의 수십명 무녀들이 방울소리, 바라소리를 떠들썩하게 울리며 잦은걸음으로 춤추며 돌아갔다. 어떤 무녀들은 어깨를 들썩들썩, 팔을 너울너울 부채춤을 추며 돌아가는데 아마 재난많은 이 세상에 태평세월이 펼쳐지기를 하늘에 기원하는듯 했다. 몇몇 무녀들은 제 흥에 겨워 방긋방긋 웃음꽃을 날리기도 한다… 정선공주는 굿판의 그 야단스러운 방울소리며 바라소리에 형언할수 없는 신비감에 취해 무녀들의 춤가락에 정신을 팔고있다가 방금전 리시애의 머리가 불길속에 날아들던 환영이 눈앞에 떠올라 오싹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속이 메슥메슥해나며 눈앞이 휘휘 돌아가는듯 했다. 정선공주는 얼굴이 해쓱하게 질린 로마님과 함께 조용히 굿터를 떠나 가마들이 있는쪽으로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말없이 걸어가던 로마님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하소연했다. 《공주마님… 너무 끔찍해서 잘 보지도 못했어요.》 《…》 《에그- 저런 주검을 내지 않고는 나라를 평정 못하누?》 《로마님, 불의를 치자니 사람도 다치게 되고 목도 베게 되는가봐요.》 《그럴가…?》 《저런 역적들을 살려두면 더 많은 백성들이 해를 입는다지 않아요.》 정선공주는 장대끝에 매달린 그 리시애의 머리를 쳐다볼 때에는 가슴속이 못내 떨렸지만 로마님앞에서는 이런 말이 나갔다. 굿터에서 흩어진 량반들이 굉장한 구경거리를 봤다는듯 신바람이 나서 왁작 떠들며 곁으로 지나갔다. 정선공주와 로마님은 그런 패들을 먼저 지나보낸 다음 뒤따라 가지런히 걸어가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공주마님, 저렇게 해도 무슨 후환이 없을가유? 그게 더 걱정이예유.》 《아니, 무슨 후환이 있을라구요.》 《참을 당한 저 악령의 살이 뻗치면 아이고… 어이할고…?》 그 살이란 소리에 정선공주도 가슴이 섬찍해서 멎어섰으나 아무런 응대도 못하고 아스라하니 높은 파란 하늘만 쳐다보았다. (… 내 아들… 남이는 나라를 지켜 역적들을 무찔렀으니 설혹 저 악령의 살이 뻗쳐온다 해도 하늘과 신의 가호가 있겠지…) 하늘도 숨을 죽이고 충의에 넘친 정선공주의 심경을 읽어주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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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높다란 울안에서 나서 한떨기 꽃처럼 소담하게 피여난 정선공주의 심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민심의 흐름을 전혀 느낄수 없어 세상에 어떤 원한이 쌓이는지도 감감 모르고있었다. 그래서 이따금 잔파도처럼 일었다가 잦아드는 소요나 세상을 뒤흔드는 민란들이 죄다 흉악한 악귀들이 낫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까막눈의 백성들을 속임수로 부추겨 터친 우발적인것으로만 알았다. 하여 리시애란도 아둔하고 우매한 백성들이 그 역적놈의 속임수에 넘어가 일으켰으며 선대임금들의 치하에서 터졌던 민란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것으로 여겼다. 리씨조선은 네번째 왕인 세종때부터 개국이래 백여년간 나라안에 쌓이고쌓인 원한이 곪아터져 민란이 계속 일어났다. 그 첫 란리는 세종8년(1426년) 수도 한성에서 터진 방화폭동이였다. 그 폭동이 일어난 2월 15일과 16일은 때마침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 사람들의 아우성속에 서울장안을 휩쓰는 대화재의 불바다가 이틀사이에 2천 3백여호의 집들과 200여호가 넘는 량반부자집들과 관청들을 삼켜버렸다. 더우기 그 충천하는 불길이 토지세를 수탈해 걷어들이는 중앙재정기관 인순부 관료들의 집까지 재무지로 만들어버렸다. 무서운 기세로 퍼져가는 대화재의 불길은 리씨조선의 종말을 예고하는듯도 했다. 그 이태후 세종10년에는 개경지방과 경기도 장단현의 속현인 송림과 강음, 배천, 평산… 더 멀리로는 재령, 상원, 삼등 등지에서 재인, 화적(백정)들의 폭동이 터져올랐다. 수공업자들과 광대, 백정들이 태반인 그 폭동군에는 아녀자들도 있었는데 내인들도 남정들과 같이 무장을 갖추고 말을 타고 싸웠다. 또 여러해뒤에는 대성산농민폭동이 터져 한해동안이나 계속되였다. 리씨봉건정부는 련이어 터져오르는 민란의 불길을 꺼보려고 우선 백성들이 제멋대로 집결과 류동을 못하도록 《5가작통법》이란것을 엄격히 시행했다. 《5가작통법》이란 민가 다섯호씩 한개 단위로 묶어놓고 서로 그 움직임을 감시하고 고발하도록 하는 법이다. 그뿐아니라 잔인무도한 《월족형》이란것을 집행하여 폭동군에 참가한자들의 발뒤꿈치힘줄을 모조리 칼로 잘라버렸다. 그리하여 민란이 휩쓸고 지나간 지방들에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형형색색의 절름발이들이 수두룩하게 생겨났으며 그 불우한 병신들은 한평생 어디로 나다니지도 못하고 고통을 받다가 간악한 세상을 저주하며 숨져갔다. 허나 이런 악독한 보복에도 불구하고 민심은 주눅이 들지 않아 어디서 민란이 터졌다 하면 그 소문이 며칠새에 나라안에 파다하게 퍼져 백성들의 피끓는 가슴에 불을 달았다. 그런 풍문과 풍설들은 폭동소식뿐아니라 거기에서 얻은 경험과 교훈까지 전해주어 무엇을 류의하고 경계하며 엄금해야 하는가, 선봉장으로는 어떤이가 나서야 하며 파발은 어떤 젊은이를 써야 하는가, 무장으로는 어떤 쟁기가 제격인가 하는 폭동수단과 방법도 일깨워주는것이였다. 하여 련이어 일어나는 소요와 민란들은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그 방법과 계략도 원숙해졌으니 세조12년(1467년)에는 마침내 완전히 전쟁의 양상을 띤 함길도농민폭동이 터졌다. 이 농민전쟁의 근본원인도 봉건통치집단의 전대미문의 착취와 압박에 있었지만 함길도의 지방적인 특수성에도 있었다. 리성계시대에는 함길도가 국방상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었으며 따라서 문무관료들도 다른 도들에 비해 특별한 대우를 받고있었다. 그러나 김종서장군에 의해 북변에 4군 6진이 설치되고 국경방비가 충실해지면서 북방오랑캐들이 감히 침공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되자 나라안이 안정되여가면서 어느덧 함길도의 지위도 차차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러한 시기에 국왕과 조정은 곡창지대인 남쪽 도들을 중시하면서 관북을 소홀히 여기던 나머지 관료들을 크게 등용도 하지 않았다. 관북출신 문무관리들이 한양의 중앙관청에 등용되는 일이란 거의 없었으며 도관청은 물론이요 고을원의 벼슬자리도 서울이나 남도량반들이 내려와 차지했다. 함길도량반들은 비록 《개국공신》의 후손일지라도 높은 벼슬자리에 오를수 없었다. 이러한 지방차별정책에 불만을 품어오던 함길도토호들은 호구조사와 호패법실시로 수많은 관하민을 나라에 떼우게 되였다. 불만과 불만, 또 새로운 원한이 쌓이자 어느 누구나 선봉장으로 나서 휘동하면 들고일어날 형세가 조성되였다. 바로 그러한 판국에 한때 회령부사로 있다가 밀려나 길주류향소(고을원의 행정통치를 뒤받침하는 지방자치적인 기구)에 적을 두고 무위도식하던 리시애가 청운의 뜻을 품고 거사를 준비했다. 어느덧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리시애의 어머니초상을 계기로 한자리에 모여앉아 반변을 모의했으며 한편으로는 중앙정부가 함길도민을 몰살하려고 급파한 낯선 배 13척이 경흥부관하 후라토섬에 와있다, 충청도의 수군함선 10척이 지금 길주앞바다에 와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그리하여 노비로부터 량인, 토호, 량반, 무부에 이르기까지 온 관북땅이 들고일어났다. 고원이북의 영흥(금야), 함흥, 리원, 홍원, 북청, 단천, 성진, 길주, 혜산, 삼수, 갑산, 경성, 수성, 부령, 회령… 함길도 전역에서 련이어 민란의 불길이 터져올랐다. 조정에서는 그 봉기를 주모자의 이름을 따서 《리시애란》이라고 불렀다. 료원의 불길처럼 번져가는 《리시애란》은 마침내 리조봉건국가를 뿌리채 뒤흔들었다. 국왕 리유(세조)는 중앙군 오위의 부대들과 지방군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이 민란을 진압하려고 하였다. 국왕과 수도호위를 맡은 충무위에 소속된 남이의 부대도 출동하여 전선의 강순도원수 예하로 들어갔다. 세상은 소란해져 요언비어로 끓어번졌다.… 리시애의 폭동군이 싸움마다에서 련전련승하며 리시애의 동생 리시합이 이끄는 폭동부대가 벌써 북악산과 인왕산 울울창창한 수림속으로 스며들어 서울로 쳐들어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있다, 함길도의 봉기에 의기양양해진 전라, 경상, 충청, 강원땅의 농민들이 관가를 들이칠 기세를 보이고있으며 고을원들은 의기가 눌려 바깥출입도 하지 못한다, 도처에서 도적떼들이 백주에 관가의 고간들을 털어갔다… 발없는 소문이 사처에서 모여들어 한성장안을 들쑤셔놓았다. 그날 정선공주가 호기찬 기색으로 집에 돌아오니 대문밖에 나와 기다리고있던 부엌어멈과 시녀가 반겨맞으며 공손하게 절을 하였다. 공주는 훤한 얼굴로 가마에서 내리며 그들에게 오늘 상감마마께서 강순도원수와 남이에게 경의를 표했노라고 알려주었다. 그때 부엌어멈이 웬일인지 소금바가지를 들고 다가서며 악귀의 살이 따라왔을수 있다면서 소금을 쳐야겠다고 량해를 구했다. 정선공주는 빙긋이 웃으면서 그러라고 이르고 두팔을 들어올렸으며 부엌어멈과 시녀가 앞뒤로 바지런히 돌아가며 정선공주의 저마포저고리와 치마폭에 소금을 휙휙 뿌렸다. 뒤켠에 서있던 대문지기 공덕로인이 침울한 얼굴로 간밤에 산적들이 주인이 멀리 가고 없는 틈을 타서 남대문쪽 고관댁에 쳐들어가 그 집 아들을 죽이고 가산을 다 털어갔노라고 했다. 정선공주는 흔연한 얼굴로 그 말을 듣고는 《산적들도 장수의 집은 어쩌지 못해. 하지만 밤마다 대문에 빗장은 더 든든하게 지르고 집오래를 잘 지켜야 한다.》고 분부했다. 3
그날 한성의 밤은 유난히도 빨리 깊어가는듯 했다. 거리들의 불빛들이 무리로 꺼지자 남이의 합각기와지붕밑에서도 시녀들과 부엌어멈, 녀종들의 방들에서도 하나, 둘 초불들이 꺼지고 괴괴한 정적이 깃들기 시작했다. 밤마다 전장의 아들걱정으로 잠들지 못하던 정선공주의 방문에도 어느덧 어스름이 고즈넉이 서리고 뜨락의 정원수들도 달빛에 젖어 조을고있었다. 하지만 대궐같은 이 집 솟을대문을 지키는 행랑종 공덕로인만은 산적들이 날뛰는 때이고 마님의 분부도 있어 잠들지 못하고 대문에 빗장을 더 든든히 지른 다음 정원이며 사랑채들의 뜨락을 지나 후원의 련못가둘레를 돌아보는데 소슬한 바람이 불어왔다. 구름장을 가르며 비껴내리는 유정한 달빛이 련못의 잔물결에 부서지며 아득히 흘러간 세월의 추억을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워올렸다. 공덕로인은 어려서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류랑걸식을 하던중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겨울 아침 대궐같은 기와집에 밥동냥 들어왔다가 귀인을 만나 이 고관댁의 대문지기종으로 눌러앉게 되였는데 그 귀인이 바로 판한성부사로 있던 젊은 량반 남휘였다. 그때 공덕은 벼슬자리에라도 오른듯 기뻤고 자랑스러웠으며 어깨가 으쓱해져 이 량반집 일을 죽기내기로 해제꼈다. 그는 대문지기일뿐아니라 숯이며 장작을 사들여 부엌아궁이들에 불을 때고 마부의 일손도 도와 마구간을 쳐내고 녀종들이 바빠할 때에는 마루들에 젖은 걸레, 마른 걸레도 놓아주었었다. 돌이켜보면 기쁜 일, 눈물겨운 일도 많았다. 남휘가 태종임금의 넷째딸인 정선공주와 혼인을 맺아 성례를 치르고 의산군으로 봉해진 며칠후에 있은 일이다. 하루는 의산군과 공주가 그를 가까이에 불러 햇솜을 맞춤하게 둔 명주바지저고리를 선사하며 이걸 입고 지내라고 했다. 그날 너무 기뻐 마음이 붕 뜬 공덕은 난생처음으로 입어보는 명주바지저고리를 차려입고 거리로 나가 의젓하게 걸어다녀보니 자기가 누구한테도 짝지지 않고 기생년들도 꼬리를 치며 따라다닐수 있는 호남아 도련님으로 여겨져 입이 벙글써 해졌었다. …세월이 살같이 흘러 장난이 세찬 남이도령을 업고 룡마처럼 뜨락을 뛰여다니던 일이랑 떠올라 눈물이 그렁해있는데 어디서인가 버스럭소리가 들려왔다. 달빛에 취해있던 종로인은 도적이 들지 않았는가싶어 머리칼이 곤두섰다. 황급히 살펴보니 황이 들어 시들어버린 련꽃대들이 바람결에 설렁대는 소리였다. 공덕로인은 다시 앞뜰로 나와 돌아보다가 마님의 방문앞에 이르러 조용히 멎어서서 방안에서 앓음소리라도 새여나오지 않는가 귀를 기울이였다. 다행히도 마님은 깊이 잠든것 같았다. 종로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으나 그때 정선공주는 갖가지 걱정으로 전혀 잠들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낮에 본 폭동군두목의 머리며 그 머리가 충천하는 불길속으로 날아들고 울긋불긋한 차림새의 무녀들이 춤추며 돌아가던 일들이 그냥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런 속에서 리시애의 희꺼먼 얼굴이 떠오르고 그 악귀를 멸망시킨 아들 남이에 대한 자랑으로 가슴이 마냥 설레였다. 돌이켜 생각하면 남이를 붓대나 놀리는 문관이 아니라 무관, 무부의 길로 이끈 리유임금(세조)이 고마왔다. 남이가 7살때, 벌써 왕실과 고관대작들의 화제거리로 되였던 일이 떠올랐다. 하루는 주정뱅이로 소문이 나서 《술대군》이라는 별호까지 붙은 왕자가 술취한김에 경회루지붕에 고양이를 안고 올라가서 봄볕을 즐기다가 낮잠이 들었다. 한데 그 고양이가 재롱을 부리다가 그의 발바닥을 핥기 시작했다. 왕자는 잠결에 너무 간지럽고 시끄러워 고양이를 걷어찼다. 고양이는 야웅- 하고 비명을 올리며 지붕에서 굴러떨어져 공교롭게도 그밑으로 걸어오던 정선공주의 어깨에 떨어졌다. 공주는 그만 기절초풍하여 경회루 다리목에 엎어졌으며 그 어혈로 몸져눕게 되였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어린 남이는 장도칼을 시퍼렇게 갈아가지고 《술대군》을 죽여버린다고 쫓아다녔다. 왕실이 소동이 일고 왕자는 어디론가 피신해 숨어버렸다. 그때 뒤늦게 달려온 남휘는 아들의 종아리를 치고 어전에서 리유임금앞에 엎드려 자식의 불충하고 불효막심한 죄행을 두고 머리가 방바닥에 닿도록 절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때 임금은 크게 웃으며 가해자는 왕자와 고양이이고 피해자는 공주이다, 제 어미 복수를 하자고 칼을 들고나선 그 아들은 과시 무부의 기상이로다 하고 껄껄 웃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세찬 장난에만 정신이 팔린 남이의 장래가 크게 걱정되여 부친 남휘는 당시 시재로 소문났던 한 선비를 초청하여 아들을 부탁했다. 선비는 눈에 정기를 반짝이며 들어서는 어린 남이를 보자 크게 감탄하며 이애는 앞으로 큰 사람이 될 상이라고 했다. 남이의 당돌한 모습이 기특해 웃음을 머금고 지켜보던 선비는 지금 밖에서 마침 비가 내리고있으니 비 우(긷)자를 가지고 시 한편을 지으라 했다. 며칠동안 줄곧 쏟아지는 비발사이로 서늘한 랭기가 느껴졌다. 선비도 남휘도 이 시각 숨을 죽이고 어린 남이의 거동을 주시했다. 이윽고 붓을 든 남이가 또박또박 시련을 써내리기 시작했다.
아흐레동안 내린 비 소년의 마음 한끝만 적시였으니 쬐쬐한 우수에 시정이란 웬말인가
곁에서 시를 읽어보던 선비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댁의 공자님은 타고난 대장부요, 결코 나와 같은 선비로는 되지 않을거웨다!》 남휘도 어처구니없어 웃고있는데 선비가 자기도 화답시를 써서 꼬마장부에게 주겠노라 했다.
소년의 그 마음에 장마비도 무색하다 몸은 작으나 뜻은 웅장하니 과시 이 나라 기상인가 하노라
문관으로 키우긴 코집이 글렀다고 단념해버린 부친의 손탁에서 드디여 풀려나온 남이는 직심스럽게 무예를 닦았다. 어찌나 무예에 열중하였던지 남이의 집 후원에서는 야밤삼경까지도 칼소리와 고함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정선공주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남이또래의 소년들이 후원에서 아들과 함께 놀고있었다. 그중 한 소년이 문득 고려시기의 옛 시구를 읊었고 참 시가 좋다고 서로마다 떠들다가 나중에는 종이에다 적어보기로 했다.
유석중함질 그중에서도 돌은 성질이 곧아 무인외탈견 누구도 그 굳음 빼앗지 못하리
한참 붓을 놀리던 소년이 《칠 격》자를 쓰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모양을 보던 남이가 갑자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붓글을 쓰던 소년도, 주위에 있던 소년들도 의아해 남이를 쳐다보았다. 《뭐… 글자 하나 쓰는걸 그리도 힘들어하냐?》 자기의 붓글솜씨를 은근히 자부하고있던 그 소년은 발끈해서 대꾸했다. 《그럼 네가 한번 <칠 격>자를 써봐라.》 남이는 웃음기어린 얼굴로 곧 검을 빼들었다. 정선공주는 애들의 장난이려니 하고 돌아서려다가 아들이 이제 어떻게 하겠는지 궁금하여 다시 눈여겨보았다. 남이는 갑자기 밖으로 뛰여나가더니 얏! 소리를 지르며 검술훈련할 때 사용하던 허수아비를 힘껏 내리쳤다. 아직도 애들은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서있었다. 《이렇게 한칼로 치면 <칠 격>자가 아니냐?》 그제야 리해가 되는듯 애들도 웃음을 띠였다. 이때 한 소년이 나서며 《없을 무》자는 그럼 어떻게 쓰느냐고 물었다. 남이는 이번에는 몸을 솟구쳐 번개같이 칼을 휘둘러댔다. 나무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나무가지엔 잎사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없을 무》가 된셈이였다. 아마 쪼그리고앉아 끙끙 갑자르며 글을 쓰는 모양이 소년 남이에게는 좀스럽게 느껴졌을것이다. 아들의 호방한 성미를 잘 알고있는 정선공주는 아들의 궁냥이 너무도 대견스러워 오래도록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남이는 17살 나이로 무과의 과거시험에 응시했는데 그때 살같이 달리는 말에서 날린 화살들이 모두 과녁에 정확히 들어가박혔다. 임금은 칠덕정 정각우에서 고관대작들과 함께 그 장관을 구경하다가 무릎을 치며 호탕하게 웃으면서 웨쳤다. 《저 애는 우리 왕가의 자랑이요. 과시 타고난 무부로다! 예로부터 서울가는 하늘소 발통부터 다르다 했거늘 헛허허…》 남이는 무과에 장원급제한 뒤로 곧 벼슬길에 나서 무관벼슬의 품계들을 뛰여오르기 시작했었다. 마님은 한때 아들이 문관이 되기를 은근히 바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라를 지키는 무부의 길이야말로 남아대장부다운 길이 아닌가싶었다. 밤은 고요히 깊어가고 방문에는 달빛이 훤하게 어려 문살그림자가 가쯘하게 그려졌다. 싸움터에 가있는 아들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은 천갈래만갈래로 흐르다가 실안개처럼 몽롱하게 흐려지는듯 했다. 정선공주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모로 돌아누워 곁에서 세상모르고 쌔근쌔근 자고있는 손녀 구을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가고 경복궁쪽 고루에서 야밤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둔중하게 울려왔다.
둥- 둥- 둥-
정선공주는 그 소리에 가슴이 활랑거려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앉게 되였다. 그 웅글은 북소리가 이 몇해사이 집안이 당한 청천벽력같은 상실과 이제 덮쳐들 재화를 은밀히 예고해주는듯 싶었다. 그사이 아버지인 태종대왕이 승하하고 의산군이 벼락을 맞은 고목처럼 쓰러지고 사돈되는 권람이 … 그 건장하던이가 갑자기 피를 토하며 딩굴다가 저승으로 떠나가버리고 권람의 딸인 며느리마저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아, 다음은 누구 차례…? 나를 데려가겠는지… 차라리 그랬으면… 리시애의 죽은 살이 뻗쳐와도 제발 쌈터에 가있는 큰사람만은…! 세월의 흐름을 알리는 그 고루의 북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정선공주의 볼을 타고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러한 때 곁에 며느리라도 있으면 얼마나 의지가 되랴싶었다. 문득 사흘전에 찾아왔던 낯선 아씨가 생각났다. 그 아씨는 사간원 대간 리진강대감의 집에서 왔다면서 남이장군이 호랑이를 쫓아버리고 자기를 살려주었노라고 믿지 못할 소리를 하면서 감사의 인사라도 드리려고 찾아왔다고 했었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아들이 왜 그런 소리 한마디 없었는지 알수 없었다. 섭섭했다. 그러나 어쨌든 이밤 어머니는 그런 소식이라도 전하면 집에 기다려주는 님이 없는 아들에게 혹시 생기와 기운을 북돋아주지 않을가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선공주는 서둘러 문갑에서 종이와 붓, 벼루를 꺼내 눈물을 머금고 편지를 썼다. 병조나 오위도총부에서 전장쪽으로 가는 종사관이라도 있으면 그 인편에 보낼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밤은 소리없이 깊어갔다. 초가 다 녹아내려 초불이 꺼지려고 가물거리는데 바깥대문 저쪽에서 말의 코투레질소리가 나고 웬 길손이 대문을 쾅쾅 두드리며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공주가 놀라서 대청마루로 뛰여나가는데 행랑방의 문지기종로인이 도끼를 들고 헐레벌떡 달려들어왔다. 뜨락에는 달빛이 환했다. 문지기로인은 이런 야밤삼경에 들어오겠다는걸 보면 산적이 분명하다며 식솔들을 다 깨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여봐라- 공주마님께 여쭈어라. 나- 길주쪽에서 오는 류자광이다- 급한 전갈이 있으니 어서 깨우도록 하라-》 류자광! 정선공주는 남이가 리시애란 정벌에 떠나기 며칠전부터 집으로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갑사, 그 인사성이 밝고 총명한 젊은이를 모를리 없었지만 목소리가 다른것 같았다. 덴겁한 정선공주는 종로인에게 류자광이로 가장한 도적이 분명하니 절대 대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이르고는 방들로 돌아치며 시녀며 녀종들, 부엌어멈을 깨웠다. 집안에 복닥소동이 일어나 부엌어멈이 몽둥이를 들고 뜨락으로 달려나간다, 질겁한 녀종들이 집뒤에 숨는다, 처마끝에 사초롱불을 환하게 내건다 야단법석을 떠는 가운데 한 시녀는 후원의 뒤문으로 빠져 포도청으로 달려갔다. 정선공주는 손녀 구을금을 안고 방구석에 숨어 후들후들 떨며 대문밖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였다. 《도적》이 그냥 대문을 두드리며 물러갈 형세를 보이지 않는데 종로인은 끄떡없이 버티고 서서 으른다. 《가라 가, 물러가… 포도청에 알린다. 여기는 남이장군의 집이다. 도끼산장을 해버릴테다!》 《나 류자광이유!》 《그런 놈 몰랏!》 《남이장군이 댁에 꼭 들려달라 해서 소식 전하자구…》 《그럼 대낮에 올거지 왜 야밤삼경에…? 거짓말 말아!》 《마님께 꼭 전할 소식이 있어서…!》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 그 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자광의 소리와 비슷한것 같기도 하여 귀가 솔깃해지는데 대문밖의 불청객은 울음섞인 목소리로 자기는 장군의 잔등에 손바닥만 한 기미가 붙어있는것도 아는 사람이라고 부르짖는다. 정선공주는 그 소리에 움쭉 일어나 대문께로 나가서 종로인에게 대문을 열라고 일렀다. 굳게 닫겼던 대문이 열리자 갑옷차림의 군사가 말을 끌고 들어와 아무런 일도 없었던듯 종로인에게 싱긋 웃어보이며 말고삐를 넘겨주었다. 류자광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자광은 정선공주앞에 넙적 엎드려 절하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공주마님께- 문안드리오- 남이장군이 강순도원수와 함께 나라앞에 큰 공을 세웠음을 아뢰오-!》 그한테서 멀고먼 북변 전장의 서늘한 기운이 풍겨왔다. 어머니는 기쁨과 격정에 넘쳐 어쩔바를 모르며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젊은이는 어머니한테 남이장군이 보낸 봉서와 함께 안부를 전하고는 서둘러 돌아서려고 했다. 어머니는 봉서를 받아 품속에 얼른 넣고 떠나려는 그를 황황히 붙잡고 노여워 그러느냐, 모처럼 왔다가 이렇게 섭섭하게 그냥 떠나느냐고 눈을 흘겼다. 《마님, 갈길이 멀어서 그래요.》 《갈길이…?》 《래일중으로 강계쪽에 가닿아야 해요. 거기서 남이장군께서 기다리고계셔요.》 《강계에서…?》 《예…》 그리고 강순도원수와 남이장군이랑 석달동안의 고전끝에 함길도 전역에서 리시애군을 철저히 진압하고 새 원정군을 편성해가지고 북방야인들을 토벌하러 떠났노라고 했다. 《허, 이거 야단났는데요!》 류자광은 마지못해 정선공주한테 끌려 대청마루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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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남이의 집은 큰 경사가 난 집처럼 흥성거렸다. 북방전장의 아들소식이 날아들었으니 경사가 아닐수 있는가, 그것도 그 전장에서 직접 싸운 용사가 찾아와 전하는 소식인데야… 대청마루방에 초불들이 켜지고 처마밑에까지 사초롱불을 내걸어 집안팎이 환했다. 정선공주는 아들이 돌아온듯이 기뻐 어찌할바를 몰랐다. 눈치빠른 부엌어멈과 시녀들이 손님에게 비단방석을 깔아드린다, 주안상을 차려 들여온다 야단법석을 떨었다. 다심한 정선공주는 자광이곁에 다가앉아 정겹게 지켜보며 아들소식부터 물었다. 북관땅은 산세가 험하고 바람이 사납다는데 감기에라도 걸리지 않았는지, 거기 물은 입에 맞는지, 싸움판에서 어디 상하지나 않았는지, 우리 사람은 어려서부터 뱀을 보면 질색인데 북관에 독뱀이 많지 않는지?… 정선공주의 근심은 자식에 대한 사랑만큼 끝이 없는것이였다. 류자광은 껄껄 웃었다. 《마님, 걱정마셔요. 여느 군사들은 밤에 한지에서 잘 때가 많지만 장군은 장풍안에서 쉬여요. 장풍밖에는 파수가 서있고… 개미 한마리 얼씬 못해요.》 《오- 그럴테지…!》 《제가 있지 않아요. 전 장군 종사관격이라 장풍을 칠 자리도 제가 잡아드리고 세면물도 티끌 하나 없는 맑디맑은 샘물을 떠다드려요. 장군은 북관에 가서 건강이 더 좋아졌소이다.》 정선공주는 아들을 보살피는 그 지성이 고마와 젊은이의 손목을 따뜻이 잡아주었다. 《이 사람, 나도 임자가 곁에 있다는걸 생각하면 늘 마음이 든든해졌어.》 류자광은 공주가 백자보시기에 따라주는 청주를 죽 들이키고는 무훈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공주는 얼른 부엌어멈이며 시녀, 녀종들을 불러들이고 모두 대청마루방에 빙 둘러앉아 그 이야기를 들었다. 류자광은 의기양양해서 말하였다. 《남이장군이 룡마를 타고 장검을 휘두르며 천군만마를 이끌고 우뢰처럼 함성을 지르며 적진으로 돌진하는 그 위용을 마님이 보셨더라면 야- 참 굉장했지요. 장관이였어요…!》 정선공주는 물론 시녀들과 녀종들도 기쁨에 설레였다. 《… 이번에 겪어보니 싸움이란건 활이나 칼로만 하는것도 아니더군요. 머리로 지략을 잘 써야 하거든요. 허허허… 길주싸움에서 남이장군이 지략을 기막히게 썼는데…》 하고는 길주에 집결한 리시애군이 장군의 계략에 속아넘어가 새로 부임한 《원님》을 리시애가 보낸 진짜군수로 알고 환영연을 크게 벌렸다고 했다. 《… 이 사실을 렴탐한 아군은 야밤에 길주고을을 겹겹이 둘러싸고있다가 저놈들이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자 사방에서 전고(북)를 울리고 징을 치며 냅다 쳐들어가 폭동군을 모조리 쓸어눕혔지요. 홧하하하…》 녀종들은 환성을 올리며 박수까지 쳤다. 어머니도 크게 웃으며 자광에게 청주를 더 따라주었다. 《… 길주에서 크게 녹아나자 폭동군진영은 물먹은 담벽처럼 허물어졌지요. 폭동군들속에서 반변이 일어나 두목 리시애와 그 동생 리시합을 잡아 아군진영으로 찾아와 바쳤지요!》 《아니…!》 《히야…》 《강순도원수는 그 머리를 잘라 한시빨리 상감마마한테 보여드려야 한다며 저랑 다섯명을 한성으로 급파해서… 그래서 리시애의 머리가 든 함을 가지고 떠났는데 허허… 글쎄 오다가 더 죽을 고생을 했지요.… 북청을 지나서부터 여러 놈팽이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리시애의 머리를 빼앗자고 기를 쓰고 쫓아오는데 말들은 맥이 빠져 거품을 물고 땀에 젖어 비칠거리고 놈팽이들은 쫓아오며 서라- 서라- 소리치지… 에익, 참 아닌게아니라 목함을 팽가치고 도망치자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지만 어떻게 그렇게 해유… 말을 그냥 정신없이 때려몰았지요. 숨이 못견디게 차지, 목구멍에선 겨불내가 나지… 헌데 글쎄 제가 그만 말에서 날아떨어졌어요.》 손에 땀을 쥐고 듣고있던 시녀들과 녀종들이 비명을 올렸다. 《아- 니-》 《어- 머-》 《저걸 어쩌나-》 정선공주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광은 청주를 쭉 들이키고는 빙긋이 웃으며 손바닥으로 입언저리를 훔치였다. 그는 죽을 각오를 하고 자기한테 달려드는 놈들을 찍어넘기고는 다시 말을 잡아타고 내뛰였노라고 했다. 정선공주는 그때에야 비로소 자광의 갑옷이 험하게 상한것을 알아보고 저으기 놀랐다. 《아- 니-》 갑옷의 가슴팎과 어깨며 배허벅에 붙은 갑옷비늘들이 오그라들고 찢겨지고 아주 떨어져나가 온통 상채기투성이였다. 그 갑옷비늘들은 맹수의 뼈쪼각이나 구리와 쇠쪼각을 붙여 만든것인데 이렇듯 험상하게 되였을 때에야 어떤 혈투와 결전속을 뚫고나왔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정선공주는 처절한 심정에 떨리는 손으로 그의 갑옷을 쓸어만지다가 가슴노리의 갑옷비늘들이 떨어져나간데를 만지작거리며 갈린 목소리로 나직이 물었다. 《이 사람, 여기는 왜 이렇게 됐나?》 《마님은 별걸 다…》 류자광은 장단역참에서 함길도내기 군졸과 바꾸어입은 갑옷이 정선공주의 눈길을 끌자 게면쩍은듯 머뭇거리다가 적병이 뿌려던진 날창에 면바로 맞았노라고 겨우 얼버무리였다. 사실 관북전장에서 돌아온다는 자기 갑옷이 너무 말쑥한것 같아 한성의 고관대작들앞에서 면무식이나 해볼 타산으로 그 군졸의것과 바꾸어입은것인데 가는 곳마다 자기를 관북의 용사로 추어올리니 흐뭇하고 으쓱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옹색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러거나말거나 정선공주는 큰일 날번 했다고 연신 혀를 차며 남이도 이런걸 아는가고 묻는것이였다. 《허허, 쌈판에선 례사로운 일인데 무얼 그런걸 다 알리겠나유.》 대수롭지 않은듯 대척하는 류자광의 말에 감복한 정선공주는 그윽한 눈길을 감추지 못했다. 《정녕코 장하이… 자넨 무예만 뛰여난줄 알았더니 겸양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구먼.》 《원 마님도…》 류자광은 쑥스러운듯 얼굴을 붉히다가 이렇게 불쑥 말했다. 《사실 소인이 남장군한테서 무예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관북전장에 따라나설수 있었겠나이까. 다 장군의 은공이오이다.》 정선공주는 아들보다 나이도 퍽 이상인 그가 남이에게서 무예를 배웠다는것이 무슨 소리인지 리해가 되지 않았지만 자기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려는 자광의 다심한 사려로 받아들이고는 그를 만류하였다. 《그런 말 말게. 자넨 우리 집 사람을 알기 전부터 무예가 뛰여나 소문이 자자했는걸. 우리 집 사람도 판한성부윤의 자제가 무용이 뛰여나다는데 나라에 기쁜 일이라고 좋아했다네. 이제 전공도 크니 상감께서 크게 상을 내리실거네.》 정선공주의 이 말에 류자광은 삽시에 얼굴색이 컴컴해지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였다. 정선공주는 놀라서 물었다. 《임자… 아니, 왜 그러나?》 《…》 《어디 아픈가?》 이윽고 류자광은 추연한 눈길로 정선공주를 바라보며 설음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님, 소인은 애당초 그런걸 바라지 않나이다. 이놈의 팔자에 무슨…》 뜻밖의 일에 놀란 시녀들과 녀종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있다가 살금살금 자리를 피해 방에서 사라졌다. 정선공주는 류자광의 말에 더더욱 의문이 생겨 다우쳐물었다. 《이 사람, 속시원히 터놓게. 웬일인고… 무슨 노여운 일이라도 있나?》 《아니예유.》 《그럼… 나를 친어미로 생각하고 말하게나!》 류자광은 물기어린 눈으로 빠지직거리며 타들어가는 초불을 지켜보다가 비통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저야 서자… 첩의 소생이 아니오이까. 세상이 천시하는 이 첩자식은 아무리 나라에 큰 공을 세워도 안돼요. 아… 몇번이나 죽어버릴 생각을 했는지 몰라유. 저같은 무지렁이가 갑옷이 이 지경이 되도록 싸운들 무신 소용인가유!》 그리고는 한성부의 당당한 세도댁자제로 태여난 자기가 단지 서자라는 그 한가지 《오명》때문에 어릴적부터 축에서 밀려나 놀림을 받던 일이며 자랄수록 커만 가는 수모를 참을 길 없어 절치부심 무예수련에 심신을 다 기울이던 이야기를 자상히 했다. 드디여 《무예6기》에 도통한 류자광이 무과과거에 응시한다고 집대문을 나서려 할 때 그의 어머니가 막아서며 서자는 애당초 과거에 급제할수 없는 몸이니 공연히 수모를 당하지 말고 집구석에 박혀있으라고 눈물을 머금고 만류하던 일이며 재주는 있어도 도저히 펴볼 길이 없는 세상을 저주하며 울분을 터치던 이야기들을 듣고있던 정선공주는 저도 모르게 눈굽을 닦았다. 그것은 봉건적인 축첩제도와 적서차별이 빚어놓은 하나의 비극이였다. 정선공주는 무슨 말로 류자광을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이전에 아들 남이로부터 그가 적자가 아니라 서자라는 소리를 들은적이 있었으나 그때에는 그저 소식으로만 들었지 당자의 가슴에 어떤 한이 서려있는지 다는 몰랐었다. 정선공주는 젊은이가 측은하여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해주고싶었다. 《여보게, 너무 그렇게 모나게… 상심하지 말게. 공을 계속 세우고 곁에서 말들도 잘해주면 앞길이 전혀야 열리지 않겠나?》 《마님, 누가 남의 일을 제일처럼 생각하나유?》 《가만, 이 사람! 그 갑옷을 벗어놓고 가게. 내 가까운 고관들한테도 보이고 우리 장군한테도 보이며 들이대보겠네!》 자광은 갑옷을 벗으려다가 말고 넌지시 《마님, 감사하오이다. 제가 벼슬만 바라고 싸웠나유. 무부야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지요.》 하고 말하였다. 《이 사람, 자광이 정말 장하이!》 그날 새벽 정선공주는 류자광한테 아들에게 보내는 봉서를 맡기고는 그가 탄 말이 어두운 골목길굽이에 사라질 때까지 대문앞에 그냥 서있었다. 그리고는 방에 들어와 자리에 누워서도 젊은이를 어떻게 도울것인가 이 생각, 저 생각 굴리며 동창이 훤히 밝아올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