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왕궁의 창문살들로는 밝은 해빛이 스며들었다. 예종은 사정전에서 내시를 시켜 한명회를 불러놓았으나 인차 몸이 불편하여 침전으로 들어가 자리에 편안히 누웠다. 눈을 지그시 내리감으니 창덕궁 수문당대궐뜨락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남이가 강순을 역적모의의 공모자로 끌어들인것은 경악하지 않을수 없는 일이였다. 두 신하의 이전 관계로 보나 남이의 그 성미로 보아 믿기 어려운 일이다. 예종은 한명회를 통하여 남이가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옛 총대장의 죄행을 불지 않으리라는것을 이미 알고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남이, 그 사나이가 갑자기 혼자 죽는것이 억울하고 분했는가, 둘이 나누어 죄를 지면 형벌이 가벼워지리라고 약삭바르게 타산했는가? 적들을 무찌르는 싸움에선 펄펄 뛰던 무관도 죽음을 앞두고는 마음이 약해지는구나… 한데 강순을 공범자로 끌어들일 때 그의 목소리는 얼 마나 우렁차고 당당했던가. 그 목소리를 생각하니 오싹 소름이 끼치고 오한이 나는듯 오솔오솔 추워지기까지 했다. 때마침 서춘월이라는 궁녀가 따스하게 덥힌 차물을 들고 들어와 그것을 들이켰으나 한기가 가셔지지 않았다. 예종은 나이가 우인 풍만한 궁녀앞에서 엉석이라도 부리는듯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는 감기가 오려는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깨, 허리, 다리가 쑤신다고 푸념을 했다. 궁녀는 이상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손바닥을 맞비비더니 그의 이마며 머리를 더듬더듬 짚어보았다. 예종은 그 손바닥이 선뜩 차겁게 느껴지고 (이년이 감히…?!) 하는 노여움이 들어 벌떡 일어섰다. 《물러가랏-》 영문도 알수 없는 그 노성에 기겁한 궁녀는 문쪽으로 황황히 걸어나가다가 방바닥에 엎드려 임금에게 곱게 절하였으며 예종은 얼굴빛이 표표해서 그옆으로 휙 지나갔다. 그때 내시가 문지방을 조심스럽게 넘어서다가 읍하고 서며 한명회대감이 편전에 들어와 대령하고있노라고 아뢰였다. 예종이 편전에 들어섰을 때 한명회는 예나 다름없이 방바닥에 죽은듯이 엎드려있었다. 예종은 편전에 들어와 어좌에 앉자마자 이전 왕후의 아비에게 근엄하게 물었다. 《대감이 혼자요? 형조판서와 리조판서는 어디로 갔소?》 《상감마마, 승전내시가 알리지 않았소이다.》 《그럴수 없엇…!》 《제가 인차 부르겠나이다.》 《아- 어- 됐소 됐어, 한대감만 있으면 되오!》 그다음 임금은 한명회한테 남이와 강순에게 어떤 형벌을 주겠는가 안이 있으면 내놓으라고 했다. 한명회는 엎드린채 울먹이며 머리를 조아리였다. 《신은 천추에 용서 못할 저 간악한 역신들의 죄행을 류자광의 신고를 받고 뒤늦게야 알았으니 신이 먼저 벌을 받아야 마땅한줄로 아오.》 《음…》 하고 예종은 흡족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이였다. 《옛날 중국에서 촉나라 충신 제갈공명은 이런 일이 있으면 먼저 자신의 품계를 한급 낮추어달라 류비왕에게 간했거늘 신이 무엇을 잘했다고 오늘 감히 형벌안을 … 아니 안되오이다!》 예종은 그의 《충의》에 저으기 감동되여 그윽한 눈빛으로 그를 여겨보았다. 《그럼 과인이 군주로서 안을 내놓겠소. 대역죄인 남이, 대역죄인 강순을 새남터사형장에서 사지를 찢어죽이고 그 머리를 높은 장대끝에 이레동안 매달아둔다. 조정의 관리들은 모두 형집행을 똑똑히 볼지어다! 과인의 안은 이러한데 대감은 어떻게 생각하는고?》 《상감마마의 뜻은 하늘의 뜻이오이다!》 하고 한명회는 고개를 깊이 숙여보였다. 임금은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호탕하게 웃었다. 《허허… 간악한 놈들을 제거했으니 이제는 태평세월의 영화를 누리게 됐도다- 헛허허…》 그 웃음소리에 방안공기도 설레이는듯 했다. 그러나 한명회는 아연해졌다. 그는 임금처럼 쾌재를 올릴수 없었다. 한명회는 남이와 강순의 제거로써 일이 끝나는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대숙청의 바람을 일으켜 서울과 지방에서 새로 득세한 무부세력과 유림파들을 모조리 쓸어버려야 했던것이다. 《전하, 예서 끝나서는 안될줄로 아오.…》 한명회는 이 말을 해놓고 인차 지나쳤다는것을 깨달았다. 대뜸 임금이 얼굴빛이 새하얗게 질려 소리쳤다. 《대감, 삿대질은 그만하시오. 그대가 이러니 남이도 한명회가 임금을 끼고 조정을 쥐락펴락한다 했어…》 한명회는 숨을 죽이고 방바닥에 엎드려있었으며 등골로 식은땀이 흘렀다. 2
그날 밤 남이는 옥중의 어스름속에서 뼈가 부러져 퉁퉁 부어오른 다리를 쓸어만지며 끙끙 앓음소리를 삼키는데 웬일인지 문득 관북민란의 우두머리 리시애의 목을 치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시애는 눈을 부릅뜨고 자기를 쏘아보았었다. 그 작자는 겁이란 꼬물만치도 없어 무서워도 안하는것 같았다. 남이는 리시애의 목을 잘라 목함에 넣는것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세상에 둘도 없을 악당이며 무지한 독종이라고 생각했었다. 헌데 나는 다리뼈가 좀 부서졌는데 아, 왜 이리도 참을수 없이 고통스러운가? 그 아픔은 배속으로까지 뚫고들어와 밸을 비틀고 훑어내는것이였다. 과연 어떻게 하면… 어찌하면 아픔이 좀 잦아들수 있을가.… 그가 입술을 짓씹으며 모지름을 쓰는데 연분홍의 실안개같은것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것은 경신의 머리에 늘 나풀거리던 갑사댕기의 환영이였다. 그 댕기를 생각하니 경신이가 떠오르고 약동하는 청춘의 훈향이 풍겨오는듯 했다. 남이는 옥중의 어스름속에서 경신이와 나란히 말을 달리던 일이랑 생각하며 육신의 고통을 이겨내다가 자정이 썩 지나서야 쪽잠이 들었다. 꿈결에 딸애 구을금이가 나타나 눈이 올롱해서 아빠를 지켜보다가 뾰로통해지며 옹알거렸다. 《아빠는 나쁜 사람이야. 왜 죄없는 령상할아버지… 날 제일 고와하는 할아버지를 고발했어? 나빠… 나빠…!》 눈을 떠보니 꿈이였다. 가슴이 서늘했다. 아, 어째서 그랬던가. 그것은 몇마디 말로 다 말할수 없는 감정의 폭발이였다. 그리고 이상한것은 강순을 공모자로 고발한 다음 가책이나 후회가 전혀없이 대업을 마무리지은듯 한 안도감으로 속이 후련해지는것이였다. 후세사람들이여, 나를 저주하라, 이런 웨침이 가슴속에서 터져올랐다. 그리고 강순의 얼굴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 령상, 이미 고발은 해놓았으니 이제 와서 그걸 도로 거두어들일수는 없게 되였소이다. 내 얼굴에 침을 뱉고싶으면 뱉으시우. 령상은 고령의 나이를 살아보았고 나라의 최고관직에까지 올라보았으니 나이 28에 죽는 나처럼이야 억울하겠소이까. 대범해지시유. 그리고 나하고 동무해서 저승길로 갑시다. … 남이는 어제그제 다리뼈가 부서진 다음부터 임금이 자기를 없애려 한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임금은 그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살이 찢겨 피가 튀여나고 뼈가 부서져도 곧장 대역죄인으로 몰아댔으며 한명회도 같았다. 애초부터 과녁을 세워놓고 들이대는 국문이고 고문이였다. 한데 이 지경에 이른 지금까지도 설마… 하는 미련이 문득문득 드는것은 어인 까닭인가. 그런 미련은 내가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이고 너무나도 살고싶기때문인가.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삶의 유혹에 끌리지 않을자 어디 있으랴… 그는 이 재판놀음이 진실과 허위를 밝히자는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를 사살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진행된다는것을 감감 모르고있었던것이다. 장군은 입술을 사려물고 몸부림치다가 가슴을 애써 가라앉히며 여태 자기를 괴롭히고 학대한자들을 돌이켜보았다. 다시 떠오르는것이 류자광이였다. 새 왕조를 세우자고 역모했다, 화포대로 경복궁을 불사르려 했다… 어, 이런 거짓이 어이하여 그리도 헐하게 거침없이 통하는고? 한명회한테는 나를 역적으로 몰아가는것이 필요했다. 그래야 북변싸움의 승리를 배경으로 조정과 지방관청들에 새로 들어온 무관세력들을 제거할수 있기때문이다. 그러면 임금은? 군주는 군주대로 무부들에 대한 의심병이 있다. 예 있던 내시 안경준은 있는자는 재물을 도적맞힐가봐 늘 없는자를 경계하고 의심하며 멸시한다고 했어. 그 말이 옳아. 명담이야. 빌어먹을 의심병! 태조가 고려장군으로서 왕건이 세운 고려왕조를 뒤집어엎고 그 왕권을 찬탈해 새 왕조를 세웠으니… 제가 그랬으니. 리조의 장군들중에도 저와 같은 야망을 품은자가 있을수 있다고 넘겨짚어 생각한데서부터 의심병이 든게 아닌가. 참 기막힌 일이로다. 이 의심병은 리씨왕권의 뿌리깊은 고질병이 아니냐. 그래서 저 리황이도 자광의 신고를 듣자 진위를 가려볼새도 없이 화약에 불이 달리는것처럼 확 불이 달렸어. 왕실에 력대로 내려오며 쌓인 의심병은 화약고나 같은거였다. 어, 한이로다. 원통하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시샘에서 나온 요설들을 그냥 믿는다면 뛰여나고 선봉에 선 장수들이 과연 얼마나 살아남겠는고. 그러면 나라방비는 어찌 되고? 아, 내 죽은들 눈을 감겠느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어스름속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들고 옥안으로 웬 검스름한 그림자가 소리없이 들어왔다. 몽상이 아닌가싶어 정신을 가다듬고 여겨보는데 그 사람이 다가와 묵묵히 엎드려 절을 하고는 볼이며 가슴을 떨리는 손으로 쓸어만졌다. 그 부드러운 손길의 떨림은 《대역죄인》으로서 무서운 고문과 랭혹한 학대속에 까마득히 잊었던 인간세상의 따뜻한 인정을 깨우쳐주었다. 옥의 환기구멍으로 새여드는 희미한 달빛이 그 사람의 잘 생긴 얼굴륜곽을 어렴풋이 밝혀주자 남이는 내시 안경준을 겨우 알아보았다. 내시는 그의 귀에 더운 입김을 불어넣으며 수군거렸다. 《…장군, 놀라지 마오.》 《…?》 《저 산속에서 의적단이 장군을 모시러… 내려왔소이다!》 《엉…?!》 《쉿…》 그리고 내시는 목소리를 더 죽여가며 래일 새벽 새남터사형장에서 장군을 참형에 처한다, 새남터로 가는 길목에 의적들이 숨어있다가 호송병들을 까버리고 수인수레로 달려들어 장군을 룡마에 옮겨 태운다고 했다. 《… 하늘이 도왔지요. 아무리 경계가 삼엄해도 인정이 통하는 틈바구니가 있는가봐유… 바위틈에도 용수가 있다더니…》 옥안의 침침한 어스름속에서 죽음만을 기다려온 남이는 너무 놀랍고 희열에 넘쳐 다리뼈가 부서진것도 그만 잊고 벌떡 뛰여 일어나다가 모재비로 쓰러졌다. 그는 옥바닥을 긁으며 희열을 삼켰다. 아, 이게 꿈이냐 생시냐!! 머리우에 푸른 하늘이 비끼고 싱그러운 쑥냄새가 페부로 휩쓸어드는듯 했다. …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어머니하고 딸애와 나란히 누워 예서 고생한 얘기랑 밤새도록 하자. 구을금아, 아빠가 살아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다가 문득 경계가 삼엄한데 무사히 빠져나갈수 있을가 하는 걱정이 바위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머리를 싸쥐게 되고 무거운 한숨이 나갔다. 내시가 그를 안아일으키며 위로의 말을 속삭이였다. 《저 의적들은 산적살이를 한 작자들이라 살생과 도망질에 이골이 난…》 장군은 산적이라는 소리에 가슴이 섬찍해졌다. 《산적이…?》 《그렇지 않고요. 이런 일엔 날구뛰는 작자들이지유.》 하고 내시는 자랑하듯이 귀속말로 수군거렸다. 《…》 남이는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응대를 못했는데 랑패를 보면… 하는 의혹과 함께 엄청난 불안이 휩쓸어들었다. 혹시 의금부나 한명회의 계책이 아니여…? 그의 이마로 식은땀이 흐르고 오만가지 궁리가 뇌리에 번개쳤다. 아마 그 순간의 생각을 펼쳐보면 이런것일수 있다… 안경준이 사람됨됨을 보아 산에서 의적들이 내려왔다는건 참말일수 있다. 까막눈의 무지렁이같은 백성들속에도 정의를 아는 사내들이 있을수 있다. 허나 저들은 산적이 아닌가. 내 왕가의 외손, 나라의 이름난 장수로서 목숨이나 건지자고 저것들한테 구출돼 도망친다면 한명회따위 훈구고관들은 아마 쾌재를 올릴거다. 보라, 저 짐승보다 못한 역적이 왕권을 찬탈하자다가 안되니 산적을 따라 도적소굴로 도망쳤다고… 그럼 난 후손만대의 저주를 받는다. 진위를 가려보지 못하는 후손들은 내 령혼에 침을 뱉을거다. 이건… 이건 죽기보다 못해. 죽느냐 사느냐…? 끝까지 살아 이 오명을 벗고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옥안에 침통한 적막이 흘렀다. 순간이 십년세월처럼 느껴지는 그 정적속에서 내시는 무엇을 느꼈는지 당황해져 장군의 손을 따뜻이 잡았다. 《나리, 걱정말아요.》 남이는 그의 손길을 밀어버리며 나직이 일렀다. 《감사하오만… 물러가주시오.》 《녜? 제발…》 내시는 엎드려 절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찾아온 산적들을 믿어달라고 간했다. 《좋은 말로 사양할 때 물러…》 《다시 없을 기회요.》 《…》 《혈육들 생각을…》 《…》 《후회할 때가…》 《가시오!》 내시는 억이 막혀 숨을 헉 들이긋고는 무겁게 돌아서 들어올 때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남이는 고역에 녹초가 된 사람처럼 옥바닥에 터덜썩 쓰러져 숨진듯이 누워있었다. 밖에서는 늦가을의 하늬바람이 몰아치는듯 했다. 3
그날 이른새벽 낯선 군졸이 의적들이 숨어있는 주막집으로(어느 세월에나 사형집행이란 맑은 정신으로는 못할짓이여서 여기에 주막집이 생겼다.) 뛰여들어 남이의 그 단호한 거절의사를 전하고는 사라졌다. 새남터에서 좀 떨어진 주막집에 잠복해 호시탐탐 때를 기다리던 장대손이하 의적들은 너무나도 뜻밖이고 아연해져 입들이 얼어붙어 말 한마디 못했다. 그들은 의혹과 분격, 저주로 이글거리는 눈길로 경신이만 지켜볼뿐이다. 경신은 장대손을 마주볼수 없어 황황히 곽주선을 돌아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숨진듯이 앉아있었다. … 장대손대장은 경신이가 남이장군을 구원해달라고 간청한 그 이튿날 화포대장 곽주호와 그 동생에게 우리 손으로 장군을 건져내자고 기염을 토했으며 다른 의적들도 불러일으켰던것이다. 그리하여 대장의 암자로 20여명의 의적들이 밀려들었는데 거의다 경신이가 아는 사나이들이였다. 그네들은 경신이가 괴석산에 나타난 첫날부터 공연히 설레며 환심을 사려고 객기를 부리던 괴짜들이였다. 남이의 거절의사는 의적들을 좌절감에 몰아넣어 모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해있는데 장대손은 거멓게 질린 얼굴로 턱수염만 잡아뜯고있었다. 그는 남이를 괴석산으로 구출해내오기만 하면 앞으로 그의 명성을 빌어 민란을 크게 벌릴수 있다고 타산하고있었던것이다. 이윽고 건상이 결김에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며 한마디 던졌다. 《헝- 량반은 얼어죽어도 겨불은 쬐지 않는다는거지. 퉤-》 결김에 문을 차고 바깥으로 나간 곽주선은 분을 삭이지 못해 오락가락하다가 새남터사형장쪽을 바라보았다. 그쪽 희붐한 새벽 어스름속에서 웬 그림자들이 거불거리며 땅을 파올리고 그 뒤쪽에서도 기침소리를 내며 다른 그림자들이 길다란 장대 같은것을 세우고있었다. 주선은 저기서는 뭣들을 하는가싶어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흠칫 놀라 멎어섰다. 혹시 남이장군을 참형할 차비를 하는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가슴을 선뜩 에이였던것이다. 그 순간 저쪽 어스름속으로부터 무엇인가 흙덩이 같은것이 날아와 발치에 떨어졌다. 흙투성이 된 다듬이방치나 사람의 다리뼈 같은것이였다. 예전에 새남터에서 죽은 어느 인간의 뼈쪼각이 틀림없었다. 주선은 불길한 조짐인것 같아 그것을 날아든 쪽에 뿌려던지고는 돌아섰다. 그가 돌아서 걸어가는데 등뒤에서 인기척이 나서 뒤돌아 보았다. 무엇이 못마땅한듯 뒤쫓아오던 작자가 주춤 멎어서다가 질겁하여 뒤걸음질쳤다. 그리고는 뒤쪽으로 달려가며 미친듯이 소리쳤다. 《산적이다-》 산적시절 언제인가 백주에 그한테서 강탈을 당한자가 틀림없었다. 삽시에 새남터 여기저기에서 질겁한 인부들의 함성이 터져 올랐다. 《산적이-야-》 《잡아-라-》 그리하여 이 세상 거의 모든 비밀거사들이 다 그러하듯이 장대손의 의거도 사전에 발각되고말았다. 새남터의 인부들이 쟁기들을 들고 달려들었으며 때마침 근처로 지나가던 순라기병들이 말머리를 돌려 뛰여들어왔다. 급해맞은 장대손은 부하들에게 탈출을 명령하고 걸인행색인 경신의 팔을 잡아끌었다. 경신은 안 간다, 못 간다고 엉엉 울며 앙탈을 부리다가 남아의 기운을 감당할수 없어 문설주의 쇠고리를 붙잡았다. (아, 화포대장이 있다면…!!) 곽주호는 얼굴이 드러난터여서 괴석산에 남았던것이다. 장대손은 죽고싶은가 하는 위혁적인 부르짖음소리와 함께 주먹으로 경신의 손목을 내리치며 무서운 완력으로 그를 번쩍 안아들고 말한테로 뛰여갔다. 그는 경신이를 말에 올리고는 말안장에 뛰여올랐다. 말은 앞으로 내달렸다. 대장의 의형제들인 건상, 석쇠들은 필사의 각오로 대장의 탈출을 엄호하였다. 건상은 비발치듯 련이어 비수들을 날렸고 석쇠는 비호같이 내달리며 칼을 휘둘러댔다. 피방울이 마구 튀여나는 무시무시한 살륙전이 벌어졌다. 장대손은 경신이를 뒤에 달고 이 위험한 도가니속에서 한시바삐 탈출해야 했다. 《대장님! 빨리 아씨를 데리고 빠지슈!》 건상이 부르짖었다. 여기저기서 의병들이 쓰러졌다. 문득 날아드는 칼날에 건상의 왼쪽다리가 잘리워져나갔다. 《이 개자식들아!》 석쇠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뒤에서 쫓아오고 량옆으로 밀려드는 군사들은 그들을 향해 사정없이 화살을 날려보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 아우성소리, 말발굽소리… 의적들은 그 추격의 화살들에 맞아 골목길이나 한길바닥에 쓰러져 딩굴었다. 말갈기를 붙잡은채 까무라쳤던 경신이는 대손의 고함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웬일인지 뒤쫓아오는 군사들도 울부짖으며 날아드는 화살들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어딘가 저 멀리 뒤에, 옥에 남겨두고 온 장군에 대한 원망때문에 가슴이 발기발기 찢어지는듯 해서였다. 아, 아… 그대여 왜 그랬나이까?! 이 사람들, 의적들을 얕보았던가요? 말은 기를 쓰며 달리고 경신의 비통한 울음소리는 세찬 바람에 휘말려 뒤로, 뒤로 흩날려갔다. 날아드는 화살들이 공기를 째는 소리가 귀전을 스쳤다. 장대손은 칼을 휘둘러 그 화살대들을 분질러 날려보냈다. 눈결에 저기 언덕받이에서 활을 쏘는 군사들의 그림자가 언뜻 보였다. 공골말은 사납게 울부짖으며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경신이는 웃몸이 한옆으로 쏠리는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냥 울었다. 내버려두면 말잔등에서 굴러떨어질것 같았다. 질주의 열광에 뛰노는 말다리밑으로 새밭이 갈색물결처럼 파도치며 날아 지나갔다. 대손은 미친듯이 소리쳤다. 《경신이 그만- 야- 그만 울엇-》 그리고는 어제만 해도 신비롭고 신성하게 여겼던 경신의 허리를 왈칵 끌어안았다. 자기 잔등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 모르는 말은 산비탈로 치달아오르고 개울을 날아건너 숲속을 꿰질러 산등성이로 뛰여올라갔다. 《으악-》 경신의 옆구리에 어느 순간,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화살이 박혀있었다. 창황히 말에서 뛰여내린 대손이 그를 안아내려 땅에 눕히고 화살을 뽑았다. 말이 기겁하여 뛰여오르며 무섭게 코투레질을 하고 짐승의 그 울음소리에 화답하듯이 바람이 터졌다. 세찬 바람이였다. 수림은 윙- 윙- 설레이고 산들도 몸부림치는듯 했다. 까무라쳤다가 깨여난 경신은 자신에게 마감이 왔다는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자 남이에 대한 원망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이가 못견디게 그리워나며 목구멍에 불이 황황 이는듯 했다. 장군의 품에 안겨 죽고싶었다. 문득 장군의 집에서 마감으로 헤여질 때, 그때 몸은 떠나가도 댕기라도 남겨두고싶었던 심정이 되살아올라 경신은 황황히 품속을 더듬어 그 연분홍갑사댕기를 찾아 오돌오돌 떨리는 손에 꼭 쥐고 눈을 감았다. 별안간 수림속에서 곽주호가 달려나오며 절통한 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장군을 구출하러 떠난 의적들이 걱정되여 마중 나왔다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숲속을 꿰질러 달려나왔던것이다. 주호는 허리에 피가 질벅해져서 쓰러져있는 경신이를 보자 어떻게 된 일이냐고 정신없이 소리치며 그옆에 꿇어앉았다. 경신이가 눈을 뜨고 지켜보았다. 그 눈에 이슬기가 어렸다. 《아씨, 가면 안되오, 장군을 생각해서두…》 하고 주호는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경신은 벌써 명이 진한듯 흐려진 눈으로 그를 여겨보다가 손에 쥐였던 갑사댕기를 넘겨주며 갈린 소리로 겨우 속삭이였다. 《고마와요… 이걸 어느… 어느 나무에나 걸어주세… 그이… 장군이 보게… 보게요…》 그리고는 흑하고 느끼며 살눈섭을 파들파들 떨다가 눈을 반쯤 내리뜬채 숨이 졌다. 온몸이 식어들며 굳어지기 시작했다. 곽주호와 장대손, 두 사나이는 너무 기막혀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얼굴이 거멓게 질려 덤덤히 서있다가 이 참사를 빚어낸 남이를 저주하며 상욕을 퍼부었다. 사나운 바람만이 윙- 윙- 울부짖으며 불어쳤다. 곽주호는 경신이 맡긴 댕기를 만지작거리다가 어느 나무에나 걸어주자고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경신의 그 심경이 가슴을 찢어 산꼭대기를 향해 정신없이 뛰여올라갔으며 거기 높다란 바위우로 기여올라갔다. 그리고는 령혼이라도 님곁에 가기를 빌며 댕기를 울부짖는 바람속에 날려보냈다. 경신의 순정이 스민 그 연분홍갑사댕기는 몰아치는 바람에 휘말려 구슬프게 고패치다가 아스라한 연보라빛허공으로 너울너울 날려 올라갔다. 곽주호는 가슴이 터져와 그 날음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데 장군을 찾는 경신의 애절한 부르짖음소리가 만리대공에 메아리치는듯 했다. … 아래쪽으로부터 호분위군사들이 왁작 떠들어대며 산비탈로 뒤쫓아올라왔다. 백여명 남짓해보였다. 그자들은 투구와 장검을 번뜩이며 미친듯이 뛰여올라오는데 전장의 살기와 피비린내가 태풍처럼 몰아쳐왔다. 곽주선이 대장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대장- 저놈들이… 아씨를 알아보면 무슨짓을 할지 몰-라- 빨리 감추시오. 우린 저놈새끼들을…!》 그리고 주선은 무서운 함성으로 불호령을 내려 의병들을 반격에로 불러일으켰다. 살생에 이골이 난 어제날의 산적들은 악악 야성을 내지르며 칼과 창, 도끼들을 휘두르면서 호분위군사들을 맞받아 달려내려갔다. 한편 곽주호는 경신의 령혼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고 억척같은 기운으로 시신을 업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장대손이 그의 뒤를 따르면서 침통한 목소리로 위로하듯이 말했다. 《로형… 묘를 잘 써주고… 괴석산에 렬녀비를 세우겠소. 후세사람들도 다 알게 말이요.…》 곽주호는 응대도 못했다. 두사람은 단숨을 헐헐 몰아쉬며 숲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갔다. 4
남이에 대한 처형은 뜻밖에도 며칠간 연기되였다. 남이는 그 며칠 낮과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는데 부지불식간에 눈을 감았다가는 소스라쳐 놀라 깨여나군 하였다. 내시 안경준이 산적들이 구출하러 찾아왔다고 전하던 일이랑 꿈속의 몽상처럼 생각되였다. 그때 그것이 한명회나 의금부의 간계로 생각되여 물리쳐버렸는데 다행스러운 일이였다. 내시의 말을 곧이듣고 응했더라면 어찌 되였을가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속이 뒤숭숭해졌다. 한편 그 내시의 사람됨됨을 생각하면 그가 알려준 소리가 참말이 아닐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아, 그 일이 사실이라면 수모를 당한 저들이 나를 얼마나 원망하고 저주했으랴… 혹시… 만약 그 의적들속에 경신아씨도 끼여있었다면 아 얼마나 통분했으랴… 남이는 생각이 예까지 미치자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경신이한테 사죄해야만 새남터의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 걸음도 헐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군의 뺨을 따라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옥밖에서 발자욱소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망령들의 기척처럼 들려왔다. 그날 새벽 남이는 비몽사몽간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세상에는 숨막히는 괴괴한 정적이 깃들고 아득하게 높고 드넓은 연한 보라빛하늘로는 재빛안개바다가 굼실굼실 뭉게치며 소리없이 밀려든다. 그 하늘밑 가없이 넓은 모래불로 자기, 남이가 흉배에 쌍호가 수놓인 무관복자락을 펄럭이며 허둥허둥 걸어가고있다. 모래불에 발이 푹푹 빠지면 그때마다 영상도 뵈지 않는 신령님이 등을 가볍게 떠밀어준다. 하늘에 뭉게치는 안개속에서 난데없이 까마귀떼들이 날아내려 머리우로 감돌며 청승맞게 울어대나 어인 일인지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쳐다보게 되지 않는다. 신령님이 이끄는대로 모래불로 걷고 또 걸어 한성 저자거리라는데 이르니 숱한 집들이며 행랑점방들이 벼락을 맞아 불타고 허물어져내린 황량한 페허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어디서인가 둔중한 북소리며, 종소리들이 은은하게 울려오고 안개가 자욱히 끼면서 길다란 장대같은것이 높이 치솟아오르는데 그 끝에 웬 사람의 머리가 매달려 거연히 떠오른다. 그것은 분명 관북민란의 두령 리시애의 머리인데 이전에 목함에 넣어 한성으로 올려보냈던 때의 그 모색을 고스란히 간직하고있다. 그 머리는 뭉게치는 안개바다우에 숙연히 떠있는데 남이를 알아보고 석쉼하게 소리친다. 《허, 이거 남이장군이 아니시우?!》 《…》 《반갑소, 저승에서 소식을 다 들었소이다.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한다니 거 참 안됐구려. 여보시오 장군, 어느 전란이나 정쟁에도 승리자와 패배자가 생기기마련인데 승자는 우직한 힘으로 이겨서 얻은 기득권을 휘둘러 패자를 역적, 살인악당으로 고발하고 그래도 패자, 죽은자는 한마디 항변도 못하고 세상은 패자한테 어떤 정의가 있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으니 아, 분통하구나, 원통하도다! 그대도 겪어봐서 알겠지만 이것이 세상이요. 승자가 정의의 화신으로 행세하는걸 보구려. 나는 공평한 세상을 이 땅에 펼치자는 웅지를 품고 백성들을 불러일으켰소이다. 그 뜻을 믿어 함길도 수만중생들이 나를 따랐소이다.》 《닥쳐라! 네놈은 야심이 가득해 백성의 불만을 리용하여 민란을 일으키고 그것이 승산이 보이지 않자 자기를 따라나선 백성을 배반한 2중의 반역자다. 더러운 배신자! 너같은 놈과 칼을 어우르려 달려갔던 나를 저주한다!》 《그래, 나는 우리 함길도를 류배지 대하듯 하는 남도놈들이 미워 죽을 지경이였소. 세상에 그쯤한 사욕도 없이 란을 일으키는자가 어데 있겠소. 오늘 나라의 도처에서 민란이 계속 일어나는데 량반들은 주색에 빠져있고 탐관오리들은 당쟁에 미쳐 돌아가고 백성들은 해마다 살기 어려워져가는데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거사를 해야 하오.》 《닥치지 못할가, 역적놈아!》 《휴- 장군은 아직도 충군흉몽에서 깨여나지 못했구려. 그대는 나라와 임금과 백성들을 위한다고 자부했는데 실은 임금의 사냥개, 쇠몽둥이, 철여의에 지나지 않소. 무슨 일이나 쇠몽둥이를 들지 않으면 되지 않으니 여기에 무슨 정의와 량심, 인륜이 있는고? 그대는 나라를 지키고저 강병책을 강구했지만 당쟁에 미친 무리들에게 역적으로 몰렸으니 어리석은 풋내기… 흐아 흐아 흐아!》 그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텅- 하는 굉음이 울리더니 반란두령의 머리에 시뻘건 불길이 날름거린다. 남이는 그 굉음에 놀라 꿈에서 깨여났으나 조야한 그 웃음소리가 그냥 들려오고 심한 오한에 온몸이 화들화들 떨렸다. 남이는 그날 밤에도 오한에 떨다가 무슨 악령의 살이 아닌가싶어 언제인가 도교경전에서 익힌 주문을 웅얼웅얼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 그는 밤중에 옥문밖에서 옥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우연히 엿듣게 되였는데 그 작자들은 산에서 산적들이 내려와 어느 수인을 구출해내려다가 발각이 되였다, 군사들이 추격해서 여러 놈을 죽였는데 사로잡은 놈은 없는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밤도 미심쩍으니 망을 잘 보라고 수군거렸다. 그런 소리를 귀결에 엿듣게 된 남이는 가슴이 선뜩 얼어들었다. 산적이 내려왔다면 저 내시가 알려준 그네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이 한명회나 누구의 간계가 아니라 참말이 아닌고… 아, 내 무슨짓을… 무슨 죄를 졌느냐. 저 내시나 산적들이 헛고생에 수모만 당하고 돌아서자니 얼마나 분하고 노여웠겠느냐. 이 덜된 량반은 저들을 비천하게만 봤어. 도적질, 강도질에 이골이 난 악당이라고… 오늘 보면 저들한테도 나름대로 뜻이 있고 덕이 있을텐데 아, 그건 도대체 어떤것일가… 그것은 왕가의 외손인 남이로서는 도저히 가늠할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것이였다. 하지만 자기를 살려내자고 찾아왔던 의로운 사람들한테 사죄의 말 한마디라도 전할수 있다면 새남터로 끌려가서 이 세상을 하직할 때 한결 마음이 가벼울것 같았다. 수염이 꺼칠한 그의 볼을 따라 짜디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문득 산적들속에 있다는 경신이가 못 견디게 그리워났다. 리경신의 비참한 운명을 감감 모르고있던 그는 이전처럼 낮이나 밤이나 가슴을 끓이며 그를 보고싶어했다. 5
어느날 어슬녘에 밖에서 북소리가 둔중하게 울렸다. 이 세상을 하직한다는 고별의 울림소리였다. 형리들이 남이를 들것에 들고 밖으로 나와 수인수레에 올렸다. 뒤따라 강순이 나왔다. 남이는 비로소 처형의 시각, 자기 명에 마감이 왔다는것을 똑똑히 알게 되였다. 의금부로 끌려온 후로 얼마나 많이 생각했던 죽음인가. 그리고 얼마나 거듭 죽이지 못한다 그런 판결은 있을수 없다고 부정했던 죽음인가. 너무 번민하며 전률해 이제는 그 의미마저 몽롱해져 어느덧 습관이 되였는데 지금은 자기 죽음에 깃든 쓰디쓴 의미를 랭철하게 깨달을수 있었다. (이 어리석은 인간은 첨부터 왕가의 외손이라 죽이지 못한다고 생각했지. 허허… 외손이 다 뭐냐, 왕실의 형제지간에도 죽이는 판국에… 그런건 다 지나간 옛일로만 여겼어… 혼자 룡상에 앉아 천하를 다스리며 만복을 누리자면 룡상을 넘보는자는 그가 누구든 다 척결해야 한다. 그가 친부모이든 형제이든 종친이든 다 없애야 한다. 옳고그름을 가리지 않고… 아, 이것이 리씨왕권의 생존섭리인가. 그래서 왕족의 계보는 피로 얼룩졌다. 아아, 내 일찌기 이런 섭리를 깨쳤다면…!!) 수인수레들은 무겁게 굴러갔다. 을씨년스러운 가을의 눈까비가 종일 날리는듯 마는듯 하여 대기도 수목들도 땅도 축축히 젖어 길바닥도 몹시 질쩍거렸다. 영추문앞길에는 벌써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설레였다. 새남터를 들었다놓은 폭음과 산적들의 출몰에 놀란 의금부가 사형장을 저자거리로 옮겼던것이다. 때가 되자 녹이 쓴 영추문이 아츠러운 마찰음을 내지르며 무겁게 열리고 사형수들을 실은 소수레들이 삐걱거리며 느릿느릿 굴러나왔다. 수레들에는 대역죄인 아무개라는 패말들이 세워졌고 그밑에 사형수들이 오라를 진채 다리를 퍼더버리고 앉아있었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수레를 따라갔다. 울음소리, 비통하게 찾고 부르는 소리… 남이는 황황히 그 사람들을 둘러보았으나 어머니도, 딸애도, 가까운 이웃들도 보이지 않았다. 수레에 실린 강순의 심정도 다를바 없었다. 아, 우리 집에서 어찌하여 누구도 나오지 못하는가? 형조나 의금부, 포도청에서 엄중히 단속한것인가? 남이는 하늘에라도 영결을 고하고싶어 머리를 뒤로 젖히였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재빛으로 흐려있고 서늘한 안개만이 얼굴을 스칠뿐… 그래도 별빛 한점이라도 보고싶어, 어느 별한테라도 고별의 인사 전해달라 당부하고싶어 하늘에서 그냥 눈길을 떼지 못하는데 트레트레 흐린 구름장들이 그 무슨 장막처럼 서서히 갈라지며 은발을 날리는 어머니의 모습과 구을금의 초롱초롱한 눈이 보인다.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나도 인차 따라갈테니 먼저 가라고 속삭이는듯 하고 딸애는 눈물 한방울 보이지 않고 불찌같은 눈으로 아빠를 뚫어지게 지켜본다. 그리고 북변전장에서 쓰러진 군사들이 떠오르고 곽주호를 비롯한 여러 군영들에 남아있는 얼굴들이 생각난다. 굴러가는 수레바퀴에서 흙덩이가 처절썩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질쩍한 흙냄새가 풍겨오며 가슴을 아프게 에인다. 봄… 봄… 이제 래년 봄이 오면 들에는 꽃들이 망울지고 밭들에는 새싹이 움터날것이지… 남이는 문득 살아남고싶은 욕구가 북받치며 자신을 구출하려고 찾아들었던 의적들을 물리친것이 몹시 후회되였다. 아, 그때… 그때 용단을 내렸다면 살수도 있지 않았는가… 《령상이 살인을 했소-? 무슨 죄로-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아이고-》 로부인의 절통한 부르짖음소리였다. 호분위군사들이 까무라쳐 수레길옆에 쓰러진 로부인을 안아 길옆으로 끌어냈다. 수레들은 무엇인가 가지 말라 붙잡기라도 하는듯 찌꾹찌꾹거리면서 힘겹게 굴러갔다. 질쩍한 길로 굴러가는 수레바퀴들에 묻어돌아가던 두터운 진흙덩이들이 이따금 길바닥에 처절썩 떨어져내렸다. 저자거리쪽으로 뻗은 한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늘어서서 저승길로 실려가는 죄인들을 눈바래움하고있었다. 저주에 이를 가는 량반들, 겁에 질린 얼굴들,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부녀들… 통곡소리, 부르짖음소리… 날이 시퍼렇게 선 창검을 들고 사형수들을 호송하는 군사들은 공연히 사람들을 둘러보며 웩떽하고 위혁적인 소리를 내질렀다. 《여보게… 이 사람… 내 말을 좀 듣게…》 그것은 남이의 등뒤에 앉아있는 강순의 울음섞인 목소리였다. 《나는 여태 별의별 생각을 다해봤소. 자네는 왜 죄없는 나까지 저승으로 끌어가는가. 내가 역모는커녕 아무런 죄도 없다는거야 뉘보다 임자가 잘 알지 않는가?》 남이는 가슴에서 더운 피가 울컥 치밀었다. 《나라일을 걱정해서 그랬소!》 《엉…?!》 《죽기 그렇게 억울한가요? 령상은 고령이 되도록 살았고 나라의 제일 높은 벼슬자리까지 올라 락을 누리며 살고… 나로 말하면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정말 억울하오!》 《이 사람아, 한데 나까지 저승으로 데려가야 맛인가. 내가 아무런 죄도 없다는거야 임자가 제일 잘 알지 않어?》 《그럼 내 충의에 대해 령상만큼 잘 아는이가 어디 있는가? 만약 령상이 전하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나를 두둔해나섰더라면 류자광 저놈의 시꺼먼 속심이 만천하에 드러났을거요. 허나 한마디… 한마디도 안했소. 전하눈치만 보면서… 나는 이제나저제나하고 령상의 바른소리가 나오기를 기다렸소… 끝내 한마디 없었소.》 《…》 《가까운 신하를 위해 바른소리 한마디 못하는이가, 나라의 정사가 기울어지면 자기밖에 모르는 당신이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무엇을 할수 있겠는가?》 《아… 아…》 《당신과 같은 량반을 령의정자리에 그냥 두고는 나라일이 걱정되여 혼자 갈수 없소.》 진눈까비는 흩날리고 저승길로 가는 수레들은 삐걱삐걱거리며 느릿느릿 굴러갔다. 강순은 가슴을 두드리며 속에서 쥐여짜내는듯 한 신음소리를 내였다. 남이는 측은한 심경으로 그 소리를 들으며 눈길을 들어 먼 하늘가를 바라보았다. 망연해보이는 그의 눈매에서 애젊은 나이에 억울한 오명을 쓰고 너무도 일찌기 세상을 하직해야 하는 내심의 분노가 이글이글 타번지고있었다. (아! 저 하늘끝 어디엔가 이 남이를 중히 써줄 그런 임금은 없을것인가. 내 이승에 두번다시 태여난다면 그런 임금을 받들어 부국강병을 떨치는 겨레의 기둥이 되고싶고나!) 그러자 남이는 앞에서 죽음이 기다린다는것도 까마득히 잊은듯 삶의 욕구가 북받쳐 자작 한시를 흥타령조로 우렁차게 읊어내리게 되였다.
백두산석은 마도진이요 흥 두만강수는 음마무라 흥 어- 어허여라 흥야라 흥 남아 이십에 미평국이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흥- 흥
그의 심경을 알수 없는 호송군사들은 사형수가 죽음을 앞두고 실성한것이라고 측은하게 여기며 그러거나말거나 개의치 않고 창대를 비껴든채 고개를 수굿하고 질쩍거리는 길로 묵묵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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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리들에게 부축되여 수레에서 내리는 남이는 눈결에 오차를 위한 형틀이며 작두와 도끼 등 흉기들을 띄여보았다. 이윽고 그가 땅바닥에 비스듬히 누워있는데 누구인가 관복자락을 펄럭이며 곁으로 스적스적 다가오고 형리들이 옆으로 비껴섰다. 쳐다보니 다가온자는 낯익은 승정원의 《복사마귀》 민준이였다. 도승지는 허리를 구부정하고 측은한 눈매로 그를 굽어보는듯 했다. 우등불의 너울거리는 불빛그림자에 그의 관복흉배에 붙은 쌍학이 나래를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르는듯 했다. 도승지는 바로 앞쪽 어스름속에 치솟아있는 장대끝을 쳐다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그것은 사형수들의 머리를 달아맬 장대였던것이다. 《허… 나이가 아깝지…》 《…》 《이 세상에 무슨 남길 말이라도…?》 《누가 왜 뒈졌느냐고 물으면 이 대장부 일찌기 깨닫지 못해 저승에 끌려갔노라고 전해주시오이다…》 《음 그건 웬 소린고?》 《…》 남이는 응대를 안했다. 그때 뒤쪽에서 황소들의 무서운 영각소리와 함께 소방울소리들이 죽음을 재촉하듯이 왈랑절랑 들려왔다. 남이는 놀라서 돌아봤다. 황소대가리가 씨근덕거리며 그한테로 육박해오는듯 했다. 뭉툭한 뿔, 사납게 흡뜬 시퍼런 눈망울, 거품을 문 주둥이밑으로 게걸스러운 느침이 날렸다. 그것은 리씨왕권의 겉모양새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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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와 강순이를 비롯한 무관들을 참형한 그 이튿날 아침 리황임금은 승정원 도승지와 리조판서, 례조판서를 사정전에 불러들였다. 임금은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남이, 강순의 역모를 분쇄하는데서 특출한 공을 세운 한명회와 류자광을 비롯한 7명의 <충신>들을 적개공신 1등으로 책봉하며, 신하 10명을 2등 공신으로, 신하 21명을 3등 공신으로 책봉할것이다.》 또한 충신 류자광에게 역적 남이가 살던 집과 말을 하사하며 충신 한명회에게는 남이의 딸을 노비로 준다는 은총을 베풀었다. 그리고 무관이 아닌 문관 허종을 병조판서로 임명한다는 어지를 내렸다. 그뿐아니라 남이의 어머니 정선공주가 나라의 초상중에 아들에게 짐승고기를 먹였으며 인륜도덕을 어기고 아들과 간통했다는 죄명으로 저자거리에서 사지를 찢어죽이고 그 머리를 사흘동안 장대에 매달아두는 형벌을 내렸다. 리조실록 예종편 120페지에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수록되여있다. 《… 임금이 그를 저자거리에서 사지를 찢어죽이고 그 머리를 사흘동안 매여달아놓으라고 지시했다. 그것은 남이가 어머니를 간통했기때문이였다…》 이것은 예종이 남이장군의 명성을 시기하며 그를 얼마나 미워하는가를 알고있는 당대의 춘추관들이 임금이 속이 후련해지도록 꾸며낸 거짓이 분명하다. 그 어용춘추관들은 어리석게도 저들이 붓대를 놀리는대로 력사가 정립된다고 믿은것 같다. 6
바람 한점 없는 날이였으나 행랑문지기종 공덕로인은 스산한 돌개바람속에 휘감긴듯 눈앞이 돌아가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지경이였다. 아침부터 류자광이 보낸 인부들이 달려들어 흙먼지를 날리며 뜨락을 쓸어낸다, 화단의 시들어버린 꽃포기들이며 누렇게 황이 든 동백나무를 뿌리채 뽑아버린다, 처마밑이며 바깥벽에서 현판들과 대청마루에 걸린 족자들을 나꾸채여 뜨락에 내던진다 야단법석을 떠는것이였다. 종로인은 한시절 무훈으로 자랑 떨치며 부귀영화를 누리던 무관의 집이 몰락하는 참경을 보며 너무 놀랍고 억이 막혀 앓음소리를 내며 채머리만 덜덜 떨다가 이것이 악몽이 아니라 생시이고 장군일가는 영영 망했다는 절통감에 허물어져내리듯 주저앉아 가슴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였다. 그때 대문이 쾅쾅 울리며 호령소리가 울렸다. 《여봐라- 대문 열어라- 게 누가 없느냐- 내가 왔다-》 종로인은 한뉘 몸에 밴 관습의 발작으로 황황히 뛰여일어나 대문으로 달려갔다. 세조임금이 남이장군에게 하사했던 밤빛말을 타고 류자광이 의기양양하여 들어왔다. 뜨락에 들어선 류자광은 잡부들이 깨끗이 쓸어놓아 비질자리가 력연한 마당바닥이며 새로 꾸미는 화단쪽을 둘러보다가 날아오르는듯 한 합각지붕의 처마끝에 눈길이 멎었다. 꼬마종처럼 재롱스럽게 생긴 풍경이 해빛을 령롱하게 반사하고있었다. 새 집주인은 그것이 너무 희한하여 유심히 치떠보다가 장난기가 드는지 칼집에서 검을 빼들어 그 끝으로 슬쩍 건드려 본다. 쟁강… 쟁그랑… 은방울 굴리는듯 한 소리… 류자광은 횡재를 한자의 흡족한 미소를 머금고 그것을 몇번 더 건드려보다가 껄껄 웃었다. 그리고 방안과 퇴마루에서 겁먹은 눈으로 자기쪽을 지켜보는 녀종들쪽으로 느릿느릿 다가가 이쁘장하게 생긴 녀종에게 이름이며 나이를 묻고 이전 주인네는 어떻게 먹이고 입히더냐고 거드름스럽게 물었다. 그리고는 홀연 얼굴빛이 엄엄해져 너희들은 이제부터 내 종들이다, 한데 어째 우두커니 서만 있느냐, 어서 방들과 부엌에서 먼지를 털어내고 윤이 흐르게 걸레질을 해라, 천정과 벽, 방바닥에서 역적네 때와 냄새를 깨끗이 벗기고 씻어내라고 호령했다. 한식경이 지나서는 한명회가 그 집에 나타났다. 가마에서 내린 문관복차림의 한명회는 언짢은 기색으로 집밖을 둘러보다가 뜨락구석쪽에 읍하고 서있는 종로인에게 구을금이가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종로인은 그 애가 보이지 않는데 놀라 이방저방을 황황히 돌아보며 찾다가 뒤뜨락쪽으로 나가보았다. 그새 구을금이는 아빠에 뒤따라 할머니까지 사라지고 집안이 텅 비자 낮이나 밤이나 할머니를 찾으며 울고 또 울었었다. 마음씨 어진 부엌어멈과 종로인은 녀종들에게 저 어린것이 아빠와 할머니가 참형된것을 알면 기절한다, 아이까지 죽이고싶지 않으면 입들을 굳게 다물고있으라고 거듭 오금을 박아놓았다. 그 애는 그만 그치라고 달래면 설음이 더 북받쳐 흐느끼다가 목이 터지게 울었다. 그러다가 지쳐 행랑방구석에 꼬부리고 쓰러진 고것이 불쌍하여 덧저고리를 개여 머리밑에 밀어넣다가 잘못 다치면 눈을 뜨고 더 바스라지는 소리로 울어댔다. 종로인은 너무 속상하고 짜증이 나서 아빠도 할머니도 다 없다, 죽었다고 소리치고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치밀었으나 우들우들 떨며 참았다. 그 어리고 마음 여린것한테 모진 소리를 할수 없었던것이다. 그래서 애를 업고 서성거리며 구을금이가 울음을 그쳐야 아빠도 할머니도 온다고 달래였다. 그러자 그 소리를 믿은듯 한동안 진정이 되여 잠잠해졌다가는 다시 쿨쩍거리기 시작했다. 그 애는 너무 울어 허리가 로파처럼 꼬부장해진듯 하고 이마에 실주름까지 생겼으며 울음소리도 석쉼해져 어린것의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할마- 할마-니- 어디 갔나- 아빠-》 그 울음소리가 대궐같은 기와집 처마들에 메아리치고 울담밖으로 지나가던 동네어른들은 그 소리가 황량한 페허에서 오르는 호곡소리같아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귀를 기울이였다. 그날 종로인은 구을금이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예전에 아빠랑 같이 숨박곡질을 종종 하던 련못가로 미심결에 나가보았다. 거울같은 련못의 수면에는 행복했던 시절처럼 야릇한 파문이 이는데 그 애는 숨박곡질을 하듯 허리를 꼬부리고 백호석상으로 살금살금 다가가더니 아빠가 있을 때처럼 석상뒤로 날듯이 달려들어가며 《왁!》 하고 소리친다. 종로인이 백호석상뒤로 뛰여가니 그 불쌍한것은 쪼그리고 앉아 고사리같은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섧디섧게 흐느끼고있었다. 《할아부지 거짓말쟁이… 아빠… 아빠 안 왔어…》 그 철부지는 아빠가 이전처럼 석상뒤에 꼭 숨어있으리라 믿은것 같았다. 종로인은 고것을 와락 안고 끅끅 흐느꼈다. 이윽고 로인이 구을금이를 업고 앞마당으로 나왔을 때 풍채 름름한 고관은 뜨락에 그냥 버티고 서있었다. 종로인은 세상에 소문난 사팔뜨기눈을 보고 비로소 자기앞에 서있는 어른이 한명회란것을 알아보았다. 종로인이 구을금이를 땅에 황황히 내려놓고 절하려는데 한명회가 앞으로 다가서며 조용히 일렀다. 《임금의 어지로 저 애는 손녀삼아 내가 데려가니…》 《아니 녜…?! 언제…?》 《저 방문을 열엇. 계집애한테 조용히 일러둘 말이 있다.》 종로인이 황급히 퇴마루로 뛰여올라가 가운데방문을 열어주고 돌아서는데 놀라운 광경이 안겨들었다. 어느새 그렇게 되였는지 활짝 열려진 대문으로 구경군들이 쓸어들었고 울담에도 동네아이들이 올라서서 왁작 떠들며 구경하고있었다. 한명회는 돗자리에 꿇어앉은 계집애 정수리에 크다랗고 살찐 손바닥을 올려놓고 사팔뜨기눈을 살기로 번뜩이며 나직이 을렀다. 《내 말을 명심해 들어.》 구을금이는 겁을 먹어 울지도 못하고 사팔뜨기눈만 지켜보았다. 《아버지, 할머니가 어째 못 오는지 너 아느냐?》 《…?!》 《저 종로인… 령감태기가 사람을 해치는 살을 가지고있어. 너도 여기 저 귀신곁에 그냥 둬두면 살이 비쳐 죽고만다. 그래서 내 손녀로 삼아 데려가니 그리 알어라…!》 그리고 한명회는 다짜고짜로 구을금이를 업고 밖으로 나와 사인교에 오르려고 했다. 그때 공덕로인이 두팔을 벌리고 구을금이를 목메여 부르며 달려나왔다. 바로 그때 한명회의 잔등에서 굴러떨어진 구을금이가 땅바닥의 흙모래를 활활 긁어모아 종로인의 얼굴에 활 뿌려던지며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죽어라-》 영문도 모르고 모래벼락을 들쓴 종로인은 너무 기막히고 섧어 비통하게 그 애를 부르며 달려나가는데 한명회가 살이 붙은 놈아 비켜라 하고 로인을 와락 밀쳐버렸다. 그 바람에 뒤로 벌렁 넘어졌던 로인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났을 때에는 벌써 사인교가 솟을대문을 빠져나가고있었다. 그날 사인교는 흔들거리며 골목길로 달려가고 종로인은 애절한 목소리로 구을금이를 부르며 허둥지둥 넋없이 뒤따라가다가 길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차거운 바람에 뭉게쳐오르는 흙먼지구름이 불쌍한 로인을 삼켜버렸다. 함박눈이 내리는 어느 겨울날 밥동냥 들어왔다가 이 집에 떨어진 후로 한뉘 집시중을 들었던 공덕로인, 남이장수도 업어 키웠으며 장수의 딸도 금이야 옥이야 알뜰살뜰히 보살펴주고 감싸주었던 공덕로인이 그런 모래벼락을 맞았을 때 가슴이 어떠했으랴. 공덕로인은 중풍에 걸려 헛소리를 몹시 치다가 한달후 세상을 떠났다. 한명회의 간계에 속았던 그 동네 풋내기들은 살이 있는 령감태기 잘 뒈졌다고 뇌까렸지만 그밖의 여느 사람들은 로인의 죽음을 가엾게 여겨 혀를 차는가 하면 한명회를 저주하여 왜 저런 흉물은 귀신이 빨리 잡아가지 않느냐고 생각했다. 7
류자광은 남이의 《역모》사건을 기화로 여태 상상할수조차 없었던 나라의 진상을 알게 되였다. 처음 한명회한테 남이를 고발하러 달려갈 때만 해도 대감이 믿지 않고 의혹을 품거나 반대로 뒤집혀 자기를 의심하면 어찌랴싶어 망설이고 재고 또 재고 망설이였다. 한데 한명회는 물론 임금까지도 자기 신고를 그대로 믿어 황급히 《역신》을 의금부로 잡아들여 국문을 들이댔다. 그는 여기서 임금과 고관대작들의 신하들에 대한 신의란 어떤것인가를 알게 되였으며 그들이 허울은 름름하고 의젓하지만 속으로는 어디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가 항시 사시나무 떨듯 하는 가련한 위인들이라는것을 알고도 남았다. 자광은 이런 판국에 나보다 뛰여난자들을 물어메치기란 식은 죽 먹기이며 출세와 영달의 길을 열어나가기도 예상외로 헐하다고 생각하게 되였다. 류자광은 매일 아침마다 대궐같은 집에서 남이가 타던 룡마에 올라앉아 거리로 달리다가도 자신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는 량반들이 옆을 지날 때면 가슴이 한껏 부풀어올라 생각했다. (뛰여난자들을 시기만 하지 말고 가차없이 제껴야 한다. 그래… 그래. 바로 이것만이 출세의 비결… 나만이 아는… 내가 찾은 비결이다!) 마침내 류자광은 연산군 4년, 무오년에 또다시 피비린내 나는 엄청난 사화,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 사화는 일찌기 세조가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비유적으로 비난한 김종직의 글 《조의제문》내용이 《성종실록》초고에 들어간것을 자광이 냄새 맡은데로부터 터진것이였다. 그는 야심가인 동료관료와 짜고 이 사실을 《반역죄》로 몰아 국왕 연산군에게 재빨리 고발했다. 이번에도 화약에 불이 달리듯이 그 즉시로 반응이 있었다. 연산군은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쳐 그 사체를 토막쳐버리고 그의 문집을 모조리 불사르도록 형벌을 내렸으며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등 관계자들을 잔악무도하게 죽이고 그들의 토지, 노비를 비롯한 재산을 몽땅 몰수하여 훈구대신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했다. 그리고 수많은 관련자들을 파직시켜 귀양보내였다. 그후 류자광은 일약 《숭록대부》로 봉해져 종1품의 문관벼슬자리에 뛰여올랐으며 권세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때부터 세상에는 류자광을 두고 사람이 원래부터 똑똑했다, 총명하고 영특하며 머리가 잘 돌아간다, 일찌기 충의가 남달랐다는 등등 그를 동경하고 숭상하는 갖가지 풍설들이 파다하게 퍼졌다. 구린내나는 세상의 비바람속에서 가난에 쪼들리며 부대끼는 중생들속에서는 그를 비난, 저주하는 목소리도 울려나왔으나 그런 민심은 맥을 추지 못했다. 량심에 자물쇠를 채우고 허위와 간계, 거짓충의로 출세와 영달을 꾀하는 작자들의 운명을 두고는 흐르는 시간과 력사가 지켜보다가 단호한 징벌의 철추를 내려 깨끗이 결산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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