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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남이는 옥안에서 뼈가 부서진 다리통세가 너무 심해 상한 다리를 부여안고 모지름을 쓰다가 그 아픔을 참을수 없어 철없는 사내아이처럼 목놓아 울기까지 했다.

그러면 옥리들이 달려들어와 이 역적놈아, 네놈때문에 수인들이 자지 못하고 다 깨났다, 당장 그치지 않으면 들어내다가 천계천시궁창에 던져버린다고 을렀다.

자정이 지나 웬 그림자가 꿈속에서처럼 소리없이 들어와 부러진 다리를 쓸어만지며 여러모로 위로의 말을 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여겨보니 낯익은 내시 안경준이였다.

그는 무슨 좋은 수라도 있는지 얼른 어디로인가 사라졌다가 이슥해서 돌아왔는데 보시기에 담긴 씁쓸하면서도 들큰한 물을 먹여주며 아편즙이니 인차 효험이 날것이라고 속삭이였다.

그의 말대로 이윽하여 통세가 가라앉는듯 하면서 눈앞에 안개같은것이 자욱히 끼고 정신이 흐리마리해졌다. 그러나 류자광, 그 간악한 모함군 생각이 들자 분노가 욱 치밀며 정신이 더 초롱초롱해졌다. 자광이를 뒤에 달고 관북전장이며 야인정벌의 싸움판을 돌아다닌 일들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 나는 그를 애국의 군사로 키우자고 애썼다. 간혹 모질게 꾸짖은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참사람이 되기를 바라서였다. 그한테 원한을 살 일이란 한번도 없었지. 헌데 무슨 앙심을 품어 그토록 모해했느냐. 왜… 왜… 그것도 거짓을 꾸며 화포로 경복궁을 불사르자고 했다고. 내 만약 병조판서가 아니고 제놈이 병조참지가 아니면 이런 일이 있었을가. 없다… 없어, 네놈은 분명코 내 벼슬과 명성에 시샘이 났던거다. , 시샘이란 은혜도 인정도 몰라보고 무찌르는 감정이냐? 하늘이여 신이여, 어이해 사람들 령혼에 이런 간특하고 포악한 독기를 심어주었나이까…?

남이는 눈을 내리감고 어금이를 악물며 임금과 고관대작들이 자광의 고발을 처음부터 믿는 반면에 자신이 피눈물을 뿌리며 부르짖은 진실은 덮어놓고 거짓으로 몰아대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는 앞가슴을 허비며 몸부림쳤다… 아, 예로부터 잔등에 업힌 조카라도 옳은 소리 하면 들어야 한다고 했거늘 나라를 지킨 장수의 피타는 고백은 귀도 기울이지 않으니 이 천지가 어찌 될고? 앞서나가는 뛰여난자는 무작정 의심해 역적으로 몰아대니 어, 이 컴컴한 천지에 언제면 려명이 밝아오는고…?!

남이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터져오르는 비분을 씹어삼켰다.

 

《화포대장나리, 웬 군사들이 여기로… 군영을 둘러싸요!

군영장방에 뛰여들어온 강마른 파수병이 눈이 뒤집혀서 소리쳤다.

《뭐?!

《백명은 실히 돼요!

한낮이였다.

화포대장 곽주호는 머리가 철여의에 얻어맞은듯 뗑해지고 눈앞이 휙 돌아갔다.

남이장군이 잡혀간 후로 그의 명이 경각에 달했다는 소문도 있어 내내 속이 켕겨있던 군영장은 자리에서 벌떡 뛰여일어나며 파수병한테 나가서 파수막을 지키라고 다급히 소리쳤다.

파수병이 물러가자 그는 얼굴이 퍼렇게 질려 방안을 오락가락 서성거렸다.

(이건 틀림없다. 틀림없어, 의금부가… 호분위군사들이 나를 잡으러 온거다. 앉아서 순순히 잡히느냐 도망치느냐, , 어느쪽이 살길인가?)

그는 무작정 방에서 뛰여나와 말에 날아올라 산골안쪽으로 올리뛰였다.

얼마 못 가서 산비탈로부터 네댓명의 군사들이 《서랏- 서랏-》 하고 멱따는듯 한 소리를 지르며 달려내려왔다. 그자들은 앞을 막아서며 말고삐를 거머쥐려고 날치였다. 영특한 말은 사악한 무리들의 손에 잡히지 않으려고 앞발을 쳐들고 곤두서며 바스라지는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주호는 군도를 빼들고 안장에 매달리는자를 걷어차 뒤로 넘어뜨리고는 말갈기에 손을 뻗치는자를 찍어넘겼다.

그리고 질풍처럼 내달렸다.

《서-랏-! 저놈-잡아-랏-!

화살들이 비명을 지르며 귀전을 스치고 그가 산굽이를 회오리바람처럼 날아도는데 별안간 말이 바스라지는듯 한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절뚝거리다가 앞으로 푹 꼬꾸라진다. 그 바람에 주호도 안장에서 굴러떨어져 뭉게치는 흙먼지구름속에 딩굴었다. 찰나적인 혼란…

주호는 뒤쫓아오는 군사들의 고함소리를 뢰성처럼 들으며 산비탈로 정신없이 기여올라가 수풀속에 날아들었다. 목구멍에서 겨불내가 풍겨올랐다. 그러나 다시 뛰여일어나 산릉선을 두세개 넘어 울창한 원시림속으로 뛰여들었다. 아름드리 강대나무를 붙안고 숨이 턱에 닿아 씨근거리다가 뒤돌아보며 귀를 강구었다. 아무리 엿들어야 놈들이 추적해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놀란 새들의 우짖음소리만 귀따갑게 들려왔다.

주호는 그제야 좀 안도감이 들어 거목밑 락엽우에 너부러져 하늘을 쳐다보았다. 얼기설기 엉킨 나무가지들사이로 파란 하늘이 쳐다보이고 눈부신 해살이 한들거리는 잔가지초리들과 어울려 언뜻거리며 희롱질을 했다.

뜻밖의 봉변에 탈영한 주호는 두고온 화포대군영과 군사들을 생각했으며 집에 홀로 남은 안해가 비로소 측은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자신이 왜 도망쳤던가, 화약을 터뜨리고 화포들을 쏘며 맞서야 하지 않았을가 하고 생각했다.

파란 하늘이 그를 유심히 굽어보는듯 했다.

(, 저 하늘이 바다라면… 첨벙 뛰여들어 어디로나 헤염쳐갈수 있겠는데…!)

그는 요즘 공연히 속이 켕기며 불안해져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었다. 오위도청부와 군사들속에 돌아가는 소문은 갈피를 잡을수없이 착잡했다. 남이장군이 역모를 했다, 아니다, 그이는 충신이다, 관북에서와 야인정벌때 어떻게 우리 부대들을 이끌었는가, 그런 장군이 역적모의를 했단 말인가, 어떤 악귀가 장군을 모함한것이 분명해, 그게 어떤 놈이냐? 장군의 무훈과 승진을 시기질투한 고관들속에 모함한자들이 있지 않을가? , 목을 잘리우고싶으면 그런 소리를 해라, 아니, 누가 혀바닥을 고약하게 놀린다고 왕가의 외손을 함부로 옥에 가두겠냐.

알고도 모를것이 사람속내야, 의금부에서 새나온 소리는 나어린 임금을 얕보고 강순령의정과 둘이 짜고 왕권을 찬탈하자고 했다…

그런 풍문을 들을적마다 곽주호는 자신이 여태 보아온 장군의 충의며 의리심, 성정을 두고 거듭거듭 깊이 생각해보았다.

어느모로 보나 젊은 장군은 간악하고 비렬하고 음험한데가 있는 위인이 아니였다. 간혹 가다가 젊은 혈기에 자신의 권세를 너무 믿어서인가 발호하는 때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에도 주호는 젊은 장군의 혈기가 리해되고 그 충의가 뜨겁게 안겨와 묵묵히 순응하였다. 지어는 험악한 욕설을 퍼붓고 채찍을 들었을 때조차 그를 수걱수걱 따르게 되였었다.

곽주호는 단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누가 뭐라든 그이는 충신이다! , 헌데 역모라니? 나도 그이와 역적모의를 함께 했거나 그 하수인으로 보는가?)

문득 동생 주선의 말이 떠올랐다.

동생은 리씨왕권이 저들한테 이의가 있거나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다 적으로, 역적으로 본다고 했었다.

(그래서 저 주선이도 저 경신이도 다 이 세상에서 갈데가 없으니 산으로 들어갔다. 하다면 이 화포대장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고… 아, 어디로…? 이제 와서 저들한테로 돌아선다는건 호박을 쓰고 돼지우리로 기여드는거나 다름없어. 함길도전란을 봐도 전란전보다 전란후에 사람들 원한이 더 쌓였다. 나도… 나도 민심을 따라가야 하지 않는가…!)

갑자기 우쪽에서 수풀이 와스스거리고 헐썩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메돼지나 곰같은 산짐승들이 씨근거리는 소리로 들었는데 인기척이 분명했다.

곽주호는 숨을 죽이고 잡관목속으로 기여들어가 그 소리에 귀를 강구었다.

《이쪽으로 올라왔지? 분명한가?

《참지나리, 그렇소이다!

《멀리로는 못 갔어. 찾아보라… 불러보라!

그러자 여러 목소리들이 입을 모아 목청껏 부르짖었다.

《화포대-장-》

《곽-주-호-대-장-》

《곽-주-호…》

뒤따라 누군가 그 목소리들보다 더 챙챙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부르짖는다.

《주호대-장, -귀-관-은- 오해요.- 우리는 그대가 아니라- 다-른- 살인자를-잡으러- 왔-소- 나오-시오-》

주호는 잡관목들사이로 소리치는 군사들쪽을 내다보다가 그들속에서 동달이군복차림의 무관을 알아보고 와뜰 놀랐다. 류자광이였던것이다.

이전에 병조로 찾아가 류가놈한테 토설한 얘기들이 뇌리에 번개치고 저놈이 나를 공모자로 본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며 머리가 찡 저려들며 분노가 터져올랐다.

(자광이 저놈은 의금부에 고발하고… 의금부는 군주한테 아…악…)

순간 이마안에서 뚝하는 소리가 둔중하게 울리는듯 하더니 뜨끈뜨끈한것이 코안으로 흘러내렸다.

얼결에 손이 코로 갔다. 코피였다. 손등을 적신 코피에 후더운것이 뿌려졌다.

그는 속에서 터져오르는 울분을 씹어삼키며 잡관목덤불속으로 살금살금 기여들었다.

놈들은 그를 몇번 더 불러보다가 아래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내려왔는데 그때 주호는 왈칵 뛰여일어나 자광이놈을 멨다꼰지고 밟아죽이고싶었으나 이를 사려물고 참았다. 행인지 불행인지 놈들은 그가 숨은데로부터 열댓걸음 옆으로 지나갔다.

 

×

 

그날 곽주호는 낮과 밤 그리고 이튿날 온종일 괴석산쪽으로 가는 오솔길을 찾아 원시림속을 헤매였다. 그러다가 해질녘에 나지막한 산등성이에 올라 두리번거리다가 얼기설기 뒤엉킨 나무가지들사이로 웬 회백색산정을 바라보게 되였다.

산허리에 희부연 연무를 두르고 태고연하게 우뚝 솟아있는 그 산봉우리는 살길을 찾아 헤맨 무관을 향해 여기로 오라고 소리쳐 부르는듯 싶었다.

(어허- 산신령이 도왔구나-!)

그 순간 여기 괴석산으로 먼저 온 동생 주선이와 경신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어서 만나고싶어 활개를 저으며 걸음을 다그치는데 머리우의 나무가지로부터 휘파람소리와 함께 웬 놈이 흙포대처럼 날아떨어져 목을 조이는가 하면 앞쪽 나무에서도 야성을 내지르며 두놈이 날아떨어져 몽둥이를 휘두 르면서 달려들었다.

망을 보던 산적들인것 같았다. 너무도 불의적인 봉변에 곽주호는 울기가 왈칵 치밀었으나 검을 빼들 겨를조차 없었다.

세놈은 뭇매질로 그를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마구 짓밟고 걷어찼다. 그는 그 란타의 광란속에 딩굴다가 정신을 잃고 늘어졌다.

화포대장은 그날 밤 어디선가 풍겨오는 메주콩냄새같은것에 혼몽한 정신이 개이기 시작했다. 눈앞에 젖빛안개가 흐르고 머리며 온몸이 지끈지끈 쑤시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동생 주선이와 경신이가 곁에 앉아 근심스럽게 지켜보고있었다.

동생은 이전보다 얼굴빛이 나아진것 같으나 경신은 심한 번뇌의 흔적인듯 눈에 피가 지고 입술이 말라터진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동생이 괴석산밑에 있는 암자인데 의병군영이라고 알려주었다.

주호는 갈증이 심하게 나서 물을 찾았다. 경신이가 샘물을 떠다주어 그것을 들이키니 머리속이 찡 저려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산적들한테서 졸경을 치르던 일이며 그후 여기로 업혀왔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신이 방긋 웃어보이며 이제는 우리를 알아보겠느냐고 묻고 주선이도 빙그레 웃었다.

《형, 큰일날번 했어. 망을 보던 녀석들이 무관복을 입은 형을 보고 뒤에 관군이 달렸다고 생각해서… 헛참, 그래서 의병대가 싸움차비를 한다, 모두 피난간다고 복새통이 벌어졌소. 허허… 허참…》

《음, 그런 일이…?

《그새 대장어른이 세번이나 찾아왔더랬소…》

《대장이?!

《이젠 형님도 쫓기우는 신세가 되였는데… 어떡하시겠소? 여기에 남아 같이 있읍시다. 대장어른도 쌍수를 들어 반길거우!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고 노루털등거리를 걸친 억대우같은 사나이가 들어섰다.

장대손이였다.

곽주선이와 경신이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주호도 웃몸을 무겁게 일으켜앉았다.

장대손은 화포대장의 손을 잡아쥐고 인사했다.

《우리 애들이 몰라보고 그만… 너그럽게 량해하시오이다.

주호는 일전에 자기가 보내준 돼지고기덕에 대장이 화기를 고쳤다는 말을 들은 생각이 불쑥 들어 웃으며 롱담을 했다.

《허- 도야지고기값은… 그만하면 후하게 받은셈이지요… 허허허…》

장대손도 호탕하게 웃으며 금후 어떻게 할거냐고 물었다.

곽주호는 순간 심각해진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였다.

장대손은 그러는 화포대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경신이의 안타까와하는 눈길을 의식해서인지 이렇게 물었다.

《남이장군소식은 뭐 들은게 없소?

이 물음에서는 어쩐지 경신이에 대한 따뜻한 념려가 느껴졌다.

물음을 받은 곽주호의 눈길은 저도 모르게 경신이에게 쏠렸다.

《뭐… 나두 별로…》

그는 남이장군의 명이 경각에 달했다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으나 경신이를 생각해 그만두고말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경신의 얼굴에 한가닥 불안해 하는 빛이 떠돌더니 차츰 낯색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분명 무엇인가를 알고있겠는데 저렇듯 모르쇠를 하는것을 보면 필경 일이 범상치 않게 번져져간다는 어림짐작인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처녀의 몸도 상당히 축간듯 했다.

(남이장군때문에 얼마나 심사를 썼으면…)

곽주호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분위기가 점차 침울해지자 장대손은 곽주호에게 아직 불편하겠으니 몸조리를 좀더 하라고, 구체적인 이야기는 후날 다시 하자고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며칠후 파수병이 대장채에 뛰여들어와 사냥군차림의 놈팽이들이 산채와 잇닿은 골짜기부근에까지 들어와 돌아치는데 렴탐군들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보고했다. 장대손은 즉시 하던 이야기를 뒤로 미루고 파수막이 있는 산등성이로 향했다.

(이놈들이 무슨 냄새를 맡고 여기까지 기여들었는가? 혹시 곽주호를 뒤쫓아?)

한참 산등성이를 내리는데 수다쟁이아낙네가 헐썩거리며 뛰여오다가 장대손을 보자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질렀다.

경신이가 자기와 함께 골짜기근방에서 산나물을 뜯댔는데 사냥나온듯 한 웬놈들이 불쑥 나타나 경신이를 희롱하다가 어디론지 끌고갔다고, 자기는 힘이 딸려 어쩌지 못하고 놈들의 발길질에 이렇게만 됐다며 치마자락을 들쳐 피멍든 허벅지를 내보였다.

《뭣이!!!

순간 장대손은 리성을 잃었다.

짐승같은 그놈들이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렴탐군들은 아닌것 같았다.

보매 객기를 부리며 이 깊은 산중골짜기까지 들어와 사냥놀이나 하는 량반부스레기들일것이다.

장대손은 도끼눈을 해가지고 그놈들이 간쪽이 어데냐고 고함쳤다. 얼혼이 쑥 빠져나간 아낙네가 가리켜준 곳으로 뛰여가며 장대손은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제발 늦지만 말았으면… 늦지만!)

수풀이고 잡관목이고 닥치는대로 헤집으며 맹수와 같이 달려나갔다.

선바위꼭대기에서 부엉이같은것이 놀란듯 푸드득 날아올랐다.

다행히도 그놈들은 멀리 가지 못했다.

울긋불긋한 비단옷자락들이 나무가지들사이로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 사냥은 헛탕인가 했더니… 요런 기집이 걸려들다니… 히히》

《에이- 나두 좀 보자구 … 히야!

우두머리인듯 한 놈이 경신이를 깔고있고 다른 놈들은 빙 둘러서서 눈요기를 하는판이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놈들아!!!

무시무시한 야수의 울부짖음같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보이고 걸치는 족족 찌르고 베버리고 물어뜯었다.

눈물이 앞을 가리워 잘 보이지도 않았다.

장대손은 놈들이 다 뻐드러진것을 확인하자 그제야 맥이 탁 풀려 비척거리며 경신에게로 다가갔다.

처녀는 실신한듯 아무 감각이 없었다.

헤쳐진 옷자락사이로 젖가슴의 륜곽이 선명히 드러나보여 그것을 내려다보는 장대손에게 형용할수 없는 아픔을 느끼게 했다.

그야말로 위기일발의 순간 처녀를 구해냈다는 안도감에 털썩 처녀곁에 주저앉았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처녀의 옷깃을 여며주었다. 아직도 처녀는 기척이 없다.

장대손은 처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또 보았다.

이 순간 새들도 우짖기를 멈춘듯 나무들도 설레임을 멈춘듯 신비한 정적이 깃들었다.

까닭모를 울분이 솟구쳤다.

《아씨! 어서 일어나오.

그만큼 멀리 나가지 말라 했는데 왜 예까지 왔소? ?

숨죽은듯 한 처녀의 눈가에 어느덧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고 뒤이어 가느다란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장대손은 화닥닥 뛰쳐일어나 처녀의 곁에서 물러섰다. 뒤이어 오열을 참지 못하는 처녀의 울음소리가 서럽게 들려왔다.

장대손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보이지 말아야 할것을 보인 사람처럼 장대손은 수치감을 느꼈다.

애절한 처녀의 울음소리는 내장을 토막쳐 끊어내는듯 한 아픔을 느끼게 했다.

불행만이 겹치는 처녀에게 큰 죄악을 저지른듯 했다. 뒤늦게야 소식을 듣고 달려오던 건상, 석쇠, 수다쟁이아낙네도 뜻밖의 광경에 선뜻 다가설념을 못했다.

장대손은 홱 돌아서서 정신없이 걸었다.

이튿날 아침 곽주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대손을 찾아갔다.

그는 자신의 탈출경위를 이야기하며 남이장군과의 남다른 관계, 생사운명이 경각에 다달은 장군을 구출하지 못하는 애끊는 마음을 털어놓았다.

《의금부에 있는 소시적지우를 통해 저들이 며칠안으로 장군을 참형에 처하리라는걸 알았소.

한데 웬일인지 장대손은 뚝한 얼굴로 수염만 만지작거렸다.

정의가 있고 의리가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장대손이 예상외로 나오자 곽주호는 어리둥절해졌다.

… 곽주호는 장대손이 경신이를 구원한 얘기며 처녀에게 마음끌려 한다는 말을 듣자 자신이 마치 수모라도 당한듯 얼굴이 벌개졌다.

그리고 아침에 자기가 하던 말에 왜 대장이 침묵하게 되였는가도 자기나름대로 리해되였다.

허나 장군의 명이 경각에 달했는데 그따위 잡념은 싹 걷어치우고 장군을 구출할 방도를 꼭 찾자고 마음다지며 대장채에 틀어박혀있는 장대손을 찾아가 설복하기 시작했다.

사실 장대손에게는 자기식의 일가견이 있었다.

-남이장군문제는 량반들사이의 알륵과 당쟁의 소산이니 우리가 상관할바가 아니라는것이다.

무예수련이나 잘 해놓으며 당분간 우리의 힘을 소모하지 말고 조용히 지내자, 힘을 키우자!

우리의 뜻은 더 멀리에 있다.

괜히 들떠서 화근을 불러오지 말자!

곽주호가 등이 달아서 탈옥문제를 들고다닌지 이틀이나 지나갔다.

그는 장대손에게 화약만 잘 쓰면 옥문같은것을 날려보내기는 식은죽먹기라고, 인명피해를 적게 하면서도 장군을 구할수 있는데 무얼 주저하느냐고 기염을 토했다.

장대손은 웃으며 나는 주저하는것이 아니라 반대이라고 잘라 말했다.

두 거인은 서로 마주앉아 상대를 주시했다.

경신의 일로 위축되였던 장대손도 점점 남이의 탈옥문제가 심각하게 번져지자 신경이 곤두섰다.

(남이의 탈옥을 누구보다 간절히 바랄 사람은 경신이다. 내가 이 문제를 계속 반대하면 사람들은 … 나를 속통이 좁은 놈으로 비웃을것이다.

하지만 그런 체면때문에 쉽사리 마음을 돌린다면 그런 알량한 두령을 하늘처럼 믿고 따르는 형제들과 우리 애들이 불쌍하다.)

곽주호는 동생에게서 대장이 원래 고집이 세서 한번 아니요 하면 그다음부터는 요지부동이란 말을 들었지만 막상 부딪쳐보니 간단치 않았다.

(정말 소힘줄이구나!)

곽주호는 입을 쩝쩝 다셨다.

《사실 장군의 명성을 빌면 좋으면 좋았지 나쁠게 뭐요? 대장이 이제 굉장한 거사를 준비한다는 말도 들었는데… 장군을 여기에 구출해오고 그 이름으로 격문도 발해야… 엉… 인장을 쾅쾅 찍어 날려야 백성들도 따라서고 천군만마가 밀려오지 않겠소?

이렇게 말해 안됐소만 장대손의 이름으로는 안될거요. 시간이 없소. 지금 이렇게 갑론을박할 때가 아니요.

… 경신이를 보자 수다쟁이아낙네가 새삼스레 반색을 지으며 어디 갔댔느냐고 물었다.

《…?

《… 내 오늘 시키지 않는 일을 했는데 욕하지 말아요.

《…?

《아씨가 곁에서 속태우는걸 보고 가만있을수 있어야지. 령너머 재골이라는 마을에 몰래 내려가서 점을 쳐봤어요.

《아니…?

《방편이 있대유.

《방편…?

《살찐 닭 날개죽지밑에…》 아낙네는 누가 엿들을세라 목소리를 죽여가며 수군거렸다.

《장군 이름자와 난날을 적은 종이쪽지를 끼워넣고 멀리 안고가서 놓아주면 그 닭을 잡아먹은 사람이 죽고… 그 령혼이 하늘로 올라가면 모함한 놈들한테로 살이 비쳐가 그 악귀를 죽여버린대유. 장군은 저절로 살아나고… 아씨, 이런 방편을 썼다는걸 누가 알면 포도청에 잡혀간대유. 아씨, 오늘 밤부터는 맘을 푹 놓고 발편잠을 자요.

그리고는 갈 때 《소뿔》이라는 별명을 가진 여기 젊은이가 옹노를 놓아 잡은 꿩을 주면서 점을 잘 쳐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후에라도 만나면 인사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인차 잠이 들어 남정네처럼 코를 드렁드렁 골기 시작했다.

경신은 고마움과 함께 잃었던 세상을 되찾은듯 한 기쁨에 겨워 태평스럽게 자는 그 무던하게 생긴 얼굴을 정답게 여겨 보았다. 문득 자신이 부끄러워지며 뼈아픈 가책이 가슴에 파고들었다.

괴석산에 처음 들어왔을 때 자신은 이 아낙네와 이곳 사람들을 얼마나 업신여기고 어울려지내기를 꺼려했던가.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매정스럽고 탐욕만 있는 서울의 량반들에 비하면 여기 사람들은 비록 언행은 거칠고 무지한데도 있지만 얼마나 인정스러운가 하는 생각이 들며 그네들이 돋보이기도 했다.

경신은 호- 한숨을 내쉬며 아낙네가 덮은 낡아빠진 포단도 여미여주고 가슴우에 얹힌 한손을 꼭 잡아주었다. 다음날 밤 웬일인지 느닷없이 《이붓아비 말은 다 들어도 점쟁이소리는 절반만 믿으라》는 옛 어른들 말이 떠오르면서 아낙네가 가져온 방편에 의혹이 가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가슴이 서늘하게 식어들었다.

그 방편이 허황한것 같았다. 훈구파와 사림파가 무엇이며 그 알륵과 당쟁, 왕실의 전횡이 어떤것인지 깊이 알지도 못하고 겪어보지도 못한 소경 복술이 낸 방편으로 어떻게 액운을 물리치는가? 천리안이라는 명복과 아낙네의 진심은 그지없이 고마왔지만 그 방편은 너무나도 소박하고 유치한것이였다. 이렇게 생각하는 경신의 이마로 식은땀이 흘렀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얼마간이나마 걸었던 기대마저 허물어지니 아득한 낭떠러지밑으로 날아떨어진듯 싶어 소리없이 울었다.

그리고 가슴을 조이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젠 다른 술수가 없어. 다른 길이 없다, 없어. 여기 사람들로 장군을 구출해내는 길밖에…

그러자면 장대손을 움직여야 한다.

화포대장이 벌써 몇번이나 들이댔는데 장대손은 아직 탈옥문제를 반대한다.

불현듯 자기가 겁탈의 위기를 가까스로 면하던 광경이 떠올랐다. 성난 맹수처럼 놈들을 찍어넘긴 장대손, 그 사람은 언제나 주도세밀하고 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사내대장부다.

! 호탕한 남이장군의 그 모습!

이밤 왜 그 모습이 이토록 그리운것인가!

그이의 운명이 경각에 달했는데 난 지금 뭘하고있는가?

밖에 달려나오니 찬바람이 몰아치고 하늘엔 보름달이 환히 비치고있었다.

! 지금쯤 님도 옥안에서 저 달을 보고계시겠지… 경신은 땅에 엎드려 달쪽에 대고 절하면서 오열을 터뜨렸다.

그밤 경신은 장대손의 괴괴한 대장채에 어떻게 들어섰으며 무슨 정신에 그앞에 나섰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장대손은 앞에 나타난것이 숲속의 무시무시한 요귀로 보였는지 엉거주춤 일어나며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귀신이냐 사람이냐?!

《요귀》는 다름아닌 경신이였다.

장대손은 결코 무분별한 사나이가 아니였다.

경신의 돌발적인 숨은 심리적고충을 음미하는듯 눈살을 쪼프리고 처녀를 바라보았다.

숨막히는 정적너머 두사람은 마주섰다.

(정말 훌륭한 녀자다! 마음도… 얼굴도…)

순간 장대손은 자기로서는 감히 범접 못할 처녀의 세계를 느끼게 되였다.

그 세계에는 경신이와 남이만이 있을뿐… 자기는 그 사랑의 세계를 지키는 파수군에 불과하리라는 숙명적인 자아인식이 그의 자존심을 흔들어댔다.

혼백은 다 남이에게 간 빈 몸뚱이, 절반짜리 사랑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너절하고 굴욕적인것은 원체 장대손이에게는 맞지 않는것이였다.

《가시오! 나의 부하들은 대의를 위해 칼을 들었지 그 누구의 사말사때문에 밀려다닐 경솔한 무리는 아니요!

아가씨에게 장군이 귀하듯 내게도 부하들이 귀하오! 아가씨의 사랑을 구하려 부하들의 목숨을 서뿔리 던질수가 없소! 가시오. 나도 괴롭소!

그리고는 구석쪽 통나무벽에 상투머리를 구겨박으며 끙끙 모지름을 썼다.

경신이는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싸쥐고 절망에 빠져 몸부림쳤다.

그때 남이와 경신의 관계를 알고있는 곽주호가 암자에 들어서다가 못 볼것을 본듯 후닥닥 놀라 밖으로 뛰여나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신음소리를 내였다.

달빛이 휘영청 밝은 그밤 괴석산일대의 원시림은 하많은 밀사를 안고 웅-웅- 울며 무겁게 설레였다.

 

  2

 

그밤 남이의 어머니도 잠들지 못했다.

정선공주는 시녀와 녀종들이 다 잠든 다음 몰래 부엌어멈을 깨워 그 녀인의 헐어빠진 무명치마저고리를 빌어 입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요즘은 밤중에 고관들이 서로 찾아다니는것을 엄금하고 또 역적의 어머니가 어디로 간다면 포도청의 눈길도 끌수 있었기때문이였다.

정선공주는 강순령상을 찾아뵙고싶은 생각이 문득 불같이 났던것이다. 이전부터도 남이를 나라의 자랑으로 귀하게 여긴 령상이다.

정선공주는 아들이 의금부로 끌려간 다음 허구한 밤과 밤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가슴을 재로 채웠다. 그리고 이 어미나 아들이 무슨 죄를 지어 이런 재난을 당하는가싶어 죄되는 일은 티끌만치도 하지 않았으며 더더욱 선한 마음을 지니려고 애썼다. 스님이 찾아와 목탁을 두드리며 동냥을 하면 옥백미로 골라 푹푹 퍼주었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거지가 와서 밥동냥을 하면 행랑방이나 대청마루방에 들여놓고 손수 밥상을 차려주고는 배불리 먹고 가라고 인정깊은 말도 아낌없이 해주었다. 근처의 복술(점쟁이)을 찾아가 아들의 죄명이며 그 방편도 알아보고는 하라는대로 다했다. 원각사로 찾아가 부처님에게 제를 지내며 열백번 엎드려 절을 하며 빌었었다.

그날 밤 정선공주는 대문밖에 나서자 저도 모르게 하늘을 쳐다보게 되였다. 드넓은 밤하늘도 인간세상의 슬픔이 어려서인가 어스름하게 흐려지고 은하수의 희붐한 흐름도 흩어지며 폭포로 쏟아져내릴것만 같았다.

기침을 쿨렁쿨렁 기으며 따라나왔던 대문지기 공덕로인이 골목길로 총총히 사라지는 정선공주의 처량한 그림자를 지켜보다가 한숨과 함께 길바닥에 엎어져 절을 하였다.

그때 어딘가 먼 고루에서 시간의 흐름을 알리는 북소리가 세상의 슬픔을 위로하듯이 은은하게 울려왔다.

둥-둥-덩-

정선공주는 한길을 따라 부지런히 걸어가다가는 이따금 짐수레며 기마순라병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짐수레를 끄는이들은 묵묵히 지나갔지만 순라병들은 승하한 임금이 빈전에 누워있는 때여서 기상이 삼엄했다. 한 순라병졸은 허름한 무명옷차림의 정선공주를 거지할망구로 봤던지 거칠게 소리쳤다.

《왜 밤고양이처럼 싸다녀?! 어디 북데기속에라도 들어가 자랏, !

정선공주는 때가 때이니만치 그런 소리가 전혀 노엽지 않았다. 되려 그 순라병졸이 자신의 지체를 알아보지 못하는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러자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휩쓸어들었다.

그 그리움이란 아들에 대한 사랑만큼, 자랑만큼 어머니의 가슴을 칼로 저며내는듯 했다. … 얘도 옥중에서 이밤 집생각, 이 어미생각으로 잠들지 못하겠지, 밥은 제대로 먹는지, 혹시 매를 맞지나 않는지, 법이 아무리 무섭고 감옥이라는데가 아무리 인정사정을 모르는데라지만 나라앞에 공을 세운 장군이야 설마한들 때릴가, 얘가 무슨 탈이라도 생기지 않았을가, , 내 아들아, 집걱정일랑 말아라, 나도 구을금이도 다 잘 있어…

그러다가 정선공주는 무엇에 발이 걸채였는지 힘껏 앞으로 엎어졌다. 무르팍이 따끔거려 치마자락을 걷어올리고보니 무릎복숭아뼈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슴배여나왔다. 정선공주는 두손으로 무릎을 싸쥐고 흐느끼였다. 그 상채기가 저리고 아파서가 아니라 이런 밤길도 홀로 다녀야 한다는 서러움이 북받치여서였다.

이윽고 정선공주는 눈물을 훔치고 다시 일어나 약간씩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겨갔다.

강순령상의 집은 경복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 집 솟을대문앞에 이른 정선공주는 가슴을 울렁이며 작은 문에 손기척소리를 내였다.

이윽고 안쪽에서 발자욱소리가 자박자박 나더니 빗장을 빼고 문이 빠금히 열렸다. 그리고 핀잔의 소리…

《이 밤중에 무슨 동냥질이냐?! 가라, 썩 물러가!

정선공주는 자신의 옷주제때문인것도 몰랐다.

《안에 전해요. 강령공을 찾아 운종가쪽에서 누가 왔다고요…》

그때 강순은 집으로 늦게 돌아와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있었는데 손이 그냥 부들부들 떨려 수저를 제대로 놀릴수 없었다. 가슴이 활랑거리고 머리속에 벌떼가 날아도는듯 윙윙 소리가 그냥 울리였다.

그는 남이가 체포되여 의금부로 끌려갔다는 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자기한테로 곧 불찌가 날아오리라는 예감에 불안해져 전전긍긍하고 초조한 시간을 보내였었다.

남이뒤에는 언제나 강순이 서있었으며 남이 또한 강순의 선봉장이나 다름없었다. 오죽하면 남이가 그의 생신날에 잔치상을 크게 차렸으랴.

남이가 의금부로 잡혀간 그 이튿날 아침 그는 한명회가 방에 찾아들어와 바로 그 잔치상을 비양조로 입에 올리자 그만 리성을 잃고말았던것이다. 어- 왜 그랬던고…

영물인 한명회가 그런 발광이 죄의식, 자격지심에서 왔다는것을 왜 모르겠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어리석고 분별이 없는짓인고… 그건 평소의 생활에서도 단짝일뿐아니라 역모에서도 쌍벽이였다는걸 스스로 자백하고 드러낸것이나 다름없는짓이다. , 왜 그런 망녕을 부렸던고…!

강순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의연 남이의 충의를 믿고있었다. 하지만 류자광이 남이의 역모와 새 왕조를 세우려는 야망을 폭로하고 단죄했을 때 바로 그 일로 하여 자격지심이 들어 아니라고 바른소리 한마디 못했으며 임금이 분개하여 펄펄 뛰는것을 보고는 극진히 아껴온 장수가 살아갈 길이 막혔다고 속으로만 개탄하였다.

물론 강순은 심문도중에 불꽃같은 눈으로 자기를 지켜보는 남이의 눈길과 마주친적이 여러번 있었으며 그가 무엇을 호소하고있는가를 똑똑히 알았으나 자기쪽을 유심히 지켜보는 임금의 눈길과 마주치면 가슴이 선뜩 얼어들며 주눅이 드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낮에 임금이 문효량을 친국할 때 그자는 령의정 강순이도 역모에 가담했노라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였다.     그러자 임금은 강순이한테도 고랑을 채우라고 불호령을 내렸었다.

그때 강순은 시퍼런 번개불이 눈을 후려치고 순간에 세상이 캄캄해지는듯 싶었다. 그는 드디여 기다리던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으로 울음을 터뜨리며 아니라고 부르짖었다… 임금의 자비심으로 고랑을 벗었으나 하루종일… 그리고 집에 돌아와 밥상에 마주앉아서도 가슴이 마냥 활랑거리고 머리속에서 윙윙하는 소리가 멎지 않는다.

강순이 얼마 자리를 내지 못한 밥상을 물리고 방에 들어와 잠자리에 누워 이 생각, 저 생각 굴리다가 잠을 청하는데 허리가 꼬부장한 로부인이 들어와 의산군부인이 찾아와 대문밖에 있는데 나가 만나보시면 어떠냐고 물었다. 의산군부인이면 남이의 어머니가 아닌가. 강순령상은 웩 소리치며 일어났다.

《뭐-?! 당장 물러가라고 햇? 넨장 포도청에 알리기 전에…!!

《여보세요- 불쌍하지 않아요?! 예전에 그렇게… 그렇게 가까웠던 사인데…》

《헌데 왜 이집저집 찾아다닌대? 살별이… 뜬 때부터 고관들이 서로 찾아다니는걸 엄금했는데…》

《그렇기는 하지만 얼마나 속이 타면… 아유 기막혀…》

《나가서 좋게 타일러. 몸이 불편해 일어나지 못한다고…》

로부인이 나갔다가 한참 있다 돌아와서 떠나갔노라고 했다.

한식경이나 지나 대문을 지키는 행랑종로인이 들어와 의산군부인이 다시 돌아와 잠간만 만나게 해달라고, 울면서 손이야 발이야 사정한다고 했다.

로부인이 따라들어와 제발 만나주라고 간청했다.

강순은 성이 독같이 나서 부르짖었다.

《제-기 쫓아버리오. 나까지 옥에 처넣지 못해 안달이 났나?!

《여보세요, 어디 있는지 살아있는지 그것만 알고싶대요.

《나가서 살아있다고 하오.

그날 밤 령상의 로부인이 대문밖에 나와 정선공주에게 아드님이 생존해있다는 말을 전하고 여러모로 위로가 될수 있는 말을 찾아하는데 정선공주는 아무말없이 돌아섰다.

령상부인은 아연해서 대문을 등지고 그냥 서있는데 정선공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꼿꼿이 걸어갔다.

남이의 어머니는 달빛을 밟으며 걸어가면서 사람들과 이 세상에 대해 생각했다.

따뜻한 위로의 말이라도 한마디 듣고싶어 왔는데 만나주지도 않았다.

(한때 관북을 뒤흔든 도원수, 천군만마를 거느렸던 강순총대장이 저리도 박정한이였던가… 이 어미를 쫓아버린 사람이 남이 당자한테는 어이했을고…? 사람들 인심이 언제 이렇게… 아, 이 무슨 세상인고…?!)

정선공주는 무거운 발걸음을 허둥지둥 옮겨갔다.

누구나 붙잡고 하소하고싶었지만 거리에는 사람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문득 공조참판의 로부인얼굴이 떠올랐다. 예전에 문병갔을 때 한번 다시 꼭 놀러 오라고 청했던 인자스러운 현씨로부인, 이밤 그이를 만나면 속이 열리는 시원한 소리를 들을것 같고 그 크고 부드러운 손을 잡고 실컷 울기만 해도 가슴이 한결 가라앉을것 같았다.

정선공주는 그밤 무슨 기운에 서대문가까이까지 단숨에 왔는지 몰랐다.

공조참판댁 솟을대문앞에 이른 정선공주는 숨을 죽이고 작은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갑자기 안쪽에서 사나운 개가 영악하게 짖어대고 작은 문이 빠금히 열리며 행랑종인듯 한 젊은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그한테 의산군댁에서 급한 일이 생겨 심부름 왔노라고 하며 로부인을 만나게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그 젊은이가 안쪽으로 사라진지 이윽하여 현씨로부인이 대문밖으로 나왔다.

로부인은 정선공주를 알아보자 기겁하여 뒤걸음질치다가 주변 동정을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없어… 없어요. 아무도 몰라요.

그러자 로부인은 주춤 다가서며 갑자기 목소리를 죽여 휘파람같은 소리로 속삭이였다.

《누가 모해했어요. 어디서 새나왔는지 류참지라는 소리도 있어요. 벼락이 쳐갈 놈! 우리 집 어른도 그래요. 남이장군이 어떤 장수요. 나라에 어떤 공을 세운 무부요. 태종임금의 외손… 의산군의 아들이요. 임금이 룡마까지 하사하고…》

어머니는 가슴의 설음과 슬픔, 울분을 더는 누를길 없어 머리를 숙이고 울먹이다가 로부인의 가슴에 와락 안겨 세차게 흐느꼈다.

로부인은 정선공주의 잔등을 다독이며 《그만… 그만… 고정하세요. 누가 듣겠어요…》 하고 달래다가 담담한 목소리로 일렀다.

《언젠가는 밝혀져요. 오늘이 아니면 십년후… 백년후에라도… 꼭… 참 마님, 신문고라는 말을 들었어요?

《…?

《왕궁 어느 벽에 그런 북이 걸려있대요. 북채와 나란히 걸려 나라에 한이 있는이들이 찾아와서 그 북을 치면 임금도 만나준대요. 함부로 북채를 들었다가는 졸경을 치른다는 풍설도 있지만 마님 … 마님이야 태종임금을 봐서도 소홀히 대하겠나요?

어머니는 로부인이 너무 고마와 언제나 은혜를 갚는다고 속다짐하고 또 했다.

정선공주는 집으로 돌아오다가 다리맥이 진해 길가에 앉아 끝없는 상념에 잠겼다. 류자광이… 그 사람이 이짓을 했을가. 아니 믿어지지 않아. 그렇게 똑똑하고 사리에 밝은 사람이 그런 우둔한짓을 했을가. 무슨 앙심이 있어서? 남이가 그 사람한테 얼마나 왼심을 썼던고… 선왕에게까지 그의 전공을 아뢰고… 나는 또 그를 서자라고 얼마나 불쌍히 여기고 친자식처럼 여기며 마음을 써왔던고… 허나 모를것이 사람마음이지.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는 속담도 있지 않어… 정말 자광이 그랬다면 아 괘씸하고 절통한 일이로다. 이 어미나 남이가 사람을 잘못 봤는가? 의산군은 늘 음식은 꽁꽁 씹어봐야 진미를 알고 사람은 오래 지내봐야 진속을 안다고 했지. 눈앞에서 놀아나는것만 보고 사람됨됨이를 가늠한다면 큰 랑패를 보고 임금이 사람들을 잘못 보고 신하로 쓴다면 나라가 허물어진다고 했지. 아이고 우리 모자는 어이하여 눈귀가 그토록 멀었던고… 한데 자광이 저놈은 우리한테 무슨 한이 있어 앙심을…?

정선공주는 의분이 치밀어 이 사실을 임금에게 급히 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온 정선공주는 밤을 꼬박 새워 상감에게 드릴 상주문을 썼으며 그것을 품속에 간직하고 저택을 나서 경복궁쪽으로 총총히 발걸음을 옮겨갔다.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아 종로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숨이 턱에 닿아 헐썩거리면서 경복궁 광화문앞에 다달으니 왕궁의 수직실격인 수문장청앞에 파수병이 서있었다. 수문장청밖에서 타오르는 홰불에 파수병의 창이 서슬푸르게 번뜩였다.

어머니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파수병쪽을 지켜보다가 광화문안으로 소리없이 들어섰으며 다시 나와 파수병을 조심하며 왕궁울담밖으로 에돌아 건춘문쪽으로 갔다.

신문고는 건춘문옆 담벽, 사람의 키만 한 높이에 그린듯이 걸려있는데 태고연한 왕궁의 정적속에 숨을 죽이고있는듯 했다.

어머니는 화들화들 떨리는 가슴을 애써 달래며 북채를 두손으로 잡아들었다. 그리고는 하늘에 빌면서 북을 치려고 천근무게의 그 북채를 높이 쳐들었다.

그 순간 하늘이 허물어져내리는듯 한 무서운 굉음이 울려와 정선공주를 태풍처럼 떠밀었다.

쾅-콰앙-꽈르릉

정선공주는 덴겁하여 북채를 떨구며 쓰러질듯이 비칠거리다가 몸을 날려 담벽에 붙어섰다. 어쩐지 무서운 굉음이 북의 울림소리 같지 않아 눈이 휘둥그래서 사위를 둘러보는데 멀리 마포쪽 하늘에서 시뻘건 불구름이 뭉게쳐올랐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은 정선공주는 황황히 북채를 도로 찾아들고 신문고앞으로 다가갔다.

정선공주는 아들의 울분을 담아 태종임금과 의산군의 령혼을 부르며 눈물을 뿌리면서 기운껏 북을 치고 또 쳤다.

그 북소리는 궁성의 담벽들이며 겹처마들에 메아리쳐 온 왕궁에 울려퍼지는듯 했다.

쿵-쿠웅-쿠웅-

이윽고 건춘문쪽에서 군사들이 왁작 떠들며 달려와 순식간에 정선공주를 둘러쌌고 우악스럽게 생긴 교위가 그의 손에서 북채를 앗아내며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왜 함부로 신문고를 건드려 엉?!

정선공주는 속이 후두둑 떨렸으나 애써 의젓한 자세로 대답했다.

《군사… 나는 남이장군 어머니요. 임금을 만나자고 왔소!

교위는 그 어조에서 정선공주의 조만치 않은 지체를 가늠한듯 목소리가 좀 누그러졌다.

《마님, 상감마마는 승정원을 통해서만 만날수 있소이다.

《그렇게 할 겨를이 없소. 전하마마가 급히… 급히 아셔야 될 국사요!

《예?

《신문고야 이러한 때 울리라고 내건거겠지요?

《헌데, 무슨 일인가요?

정선공주는 그런 물음에 분노가 터져 갑자기 어성을 높였다.

《아니 뭐… 뭐라고? 상감마마가 알건 저도 알아야 된다는건가?! 발칙하고 분수없는 이놈!! 나는 왕가의 공주다!

그 우악스럽게 생긴 교위는 결패스럽게 홱 돌아서서 건춘문안으로 뛰여들어갔다. 둘러섰던 군졸들도 비실비실 피해 울담밑으로 몰켜서서 수군거렸다.

어머니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두무릎이 그냥 떨렸다. 정선공주는 입술을 옥물며 무슨 소식이 있을 때까지 절대로 이 자리를 뜨지 않으리라 속다짐했으며 만약 임금이 끝끝내 만나주지 않으면 신문고밑에서 궁궐의 울담에 머리를 짓찧어 자결하리라 마음먹었다. 옥에 갇혀있는 아들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 두려운것 없는 어머니였다.

시간이 퍼그나 지나 그 교위가 나와 조심스럽게 마님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어떤 밀실로 안내했다.

 

×

 

서늘한 기운이 꽉 들어차있는듯 한 낯선 방에 들어선 정선공주는 예가 어디며 왜 이런데로 데려왔을가싶어 가슴을 두근거리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구석쪽의 초대에 초불이 호젓하게 타오르는 크지 않은 방에는 삿자리 같은것이 깔려있고 그 복판에 허름한 방석 두잎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어느 벽면에도 밖으로 통하는 창문이나 뙤창도 없다는것을 알자 정선공주는 가슴이 더 두근거리며 숨이 답답하게 막히는듯 싶었다. 허나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며 구석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 나들문밖에서 인기척소리가 나며 이쪽으로 누가 오는것 같았다.

정선공주는 황급히 일어섰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풍채좋은 고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어섰다.

정선공주는 첫눈에 그가 한명회라는것을 알아보고 애써 반기며 인사했다.

한명회도 시원하게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가벼운 질책부터 앞세웠다.

《아-니, 마님, 신문고는 왜 울려요? 그게 어디 왕실의 근친들이 치라는건줄 아시오?! 백성들을 위해 울담밖에 내건건데 이거야 참 속상해서…》

한명회의 목소리에는 진정에 넘친 근심과 왕가의 근친들사이에 오가는 스스럼없는 감정까지 풍겼다.

정선공주는 감사의 정에 눈물을 머금고 갈린 목소리로 조용히 사죄했다.

《용서하오이다. 너무 속상해서…》

《허허… 뭐가 속상해서 이러시유?

《항간에 너무 험한 풍문이 돌아… 역모를 했다, 왕궁을 불사르자 했다…》

《허- 그런 헛소문에 귀가 항아리만 해서 여기저기 찾아다니고 나중엔 신문고까지 울렸수?

그리고 한명회는 왕실이나 조정에 얼간이들이 앉아있지 않다, 다 가려듣는다, 아무렴 우리가 태종임금의 외손을 더 신뢰하고 아끼지 그까짓 허깨비같은 간신들 송사질에 넘어가겠느냐고 분격하며 타이르는것이였다.

《마님, 제발 잡놈들이 돌리는 풍설에 놀라 경거망동을 하지 말고 곱게 돌아가서 기다리세요. 제발 자중해서…》

고마움에 목이 메여 대감을 쳐다보는 정선공주의 눈에 눈물이 끓어 안개가 끼는듯 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한명회의 흉배에 수놓인 쌍학의 날음에 부연 안개도 흩날려가는듯 했다.

정선공주는 격정을 누르며 품속에서 봉서를 꺼내여 한명회에게 올렸다.

《상감마마에게 올리는 상주문이예요.

《음…?

그는 사팔뜨기눈을 번뜩이며 봉서의 앞뒤면을 찬찬히 여겨보다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마님, 의향대로 전하마마한테 전하겠소이다.

그리고는 들어올 때처럼 조용히 밀실에서 나갔다.

정선공주는 너무 고마와 방바닥에 엎드려 한명회의 등뒤에 대고 절하였으며 그 발자욱소리가 아주 사라질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귀결에 나들문쪽에서 무엇인가 덜커덕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정선공주는 아랑곳없이 그냥 엎드려있었다.

이윽고 정선공주가 집으로 돌아가자고 일어나 나들문쪽으로 다가가 문을 밀어 열려고 했으나 열리지 않았다. 두번 세번 밀었다. 어느새 누군가 밖에서 빗장을 지른것이였다. 그것을 깨닫고는 자신도 갇힌 몸이 되였다는것을 알았을 때 한명회의 《선의》를 믿었던 정선공주의 심경이 어떠했으랴.

정선공주는 그 무슨 몽둥이가 가슴을 후려친듯 가느다란 비명을 올리며 비틀거리다가 아주 실성해서 두주먹으로 나들문을 쾅쾅 두드리며 울음섞인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게 누가 없느냐- 없어-? 이놈들아 나를 왜 가두냐- 문을 열어라- 열라- 나는 나라를 지킨 무관의 어머니다-》

정선공주의 절통한 부르짖음소리가 방안들에 메아리치고 외랑들에까지 새여나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부르짖음소리에 한마디 응대도 안했으며 달려오는 관리나 군졸 한명 없었다.

밀실안에 괴괴한 정적만 흐르고 불우한 정선공주는 졸도하여 문가의 마루바닥에 쓰러졌다. 그 바람에 풀어내린 낭자에서 빠져나온 비녀만 마루바닥에 떨어져 딩굴었다.

 

×

 

그날 아침 한명회는 편전에서 임금에게 정선공주의 상주문이 든 봉서를 올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남이에미가 신문고를 울리고는 이런 상주문을… 신문고를 얼마나 악에 받쳐 두드렸는지 북이 찢어졌소이다.

그리고 한명회는 어좌앞에 엎드려 절했는데 리황은 정선공주의 상주문을 펼쳐보았다.

상주문에는 굵은 비방울같은것이 뿌려져있었다.

정선공주가 흘린 눈물이 분명했다.

리황은 정선공주가 얼마나 억울하면 신문고가 찢어지도록 북을 쳤으며 이렇게 눈물까지 흘렸으랴싶으면서 그에 대한 따뜻한 동정심이 북받치고 남이까지 측은해졌다.

허나 남이네가 나라에 초상이 났을 때 소고기를 사먹었으며 그 고기를 먹을 때 누구 고기를 씹는다고 생각했는가 하는 생각이 뇌리에 번개쳐 치를 떨며 가차없이 상주문을 북북 찢어버렸다.

 

 3

 

다음날 오후 한명회는 교위를 시켜 남이를 창덕궁 수문당 대궐뜰로 끌어내왔다. 임금의 기분상태로 보아 둘레가 시원하게 열리고 약간 둔덕진 거기가 의금부쪽보다 한결 좋을것 같아서였다.

전날 고문에서 다리뼈가 부서진 남이는 들것에 실려나왔다.

그날 날씨는 새움이 트는 봄날처럼 따스한데 하늘은 티없이 개이고 수문당대궐의 기와지붕과 겹처마밑에서는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수많은 참새들이 생기에 넘쳐 떠들썩하게 우짖고있었다.

시름없이 푸드득푸드득 날아다니는 고것들을 쳐다보는 남이의 눈에 이슬기와 함께 미소 같은것이 어리는듯 했다.

(, 새야… 새야 재롱스런것들아. 예서 구경할거 없어. 멀리… 멀리로 날아가라…)

그는 오늘로 자기 한생이 끝나리라고 생각했다.

남이는 뜨락의 화강석바닥에 놓인 들것우에서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현란한 단청무늬로 장식된 대궐의 겹처마아래에 놓인 어좌에 임금이 나와 앉아 포석을 깐 바닥에 빙 둘러 엎드려있는 고관대작들을 언짢은 눈길로 둘러보았다. 리황은 심기가 편안치 않았던것이다. 간밤 삼경이 썩 지나 마포쪽에서 폭음이 터져올라 서울장안을 들었다놓았기때문이다. 한명회는 그것을 도적떼들의 작간으로만 보았지만 그런 소리가 믿어지지 않았다. 도적들이 도대체 화약이 어디서 났는가. 군기시에서 화약고는 출입이 금지된 내시들한테 맡겼다는데 어디서 어떤 밀로를 통해 도적들한테까지 새여나갔는가? 남이나 여기 엎드려있는 고관들속에 혹은 내시들속에 도적떼와 내통하고있는자가 있지 않느냐? 그의 가슴은 불안과 갖가지 의심으로 번거로왔다.

임금이 남이쪽을 돌아볼 때 남이는 령의정 강순이만 지켜보고있었다. 강순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빛이 거멓게 질려 머리를 외로 돌리고 그쪽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남이는 속에서 슬그머니 피가 곤두서는듯 했다.

… 임금의 눈총이 무서워 나쪽은 보지도 못하는가… 북방전장의 고우이며 로장으로 이름떨친 그한테 은근히 기대를 걸었던 자신이 역겨워지고 속이 뒤집혀졌다.

임금이 한명회에게 엄엄한 얼굴로 심문을 계속하라고 분부하고는 정승들에게 물을것이나 하고싶은 말들이 있으면 하라고 일렀다.

서너명의 정승들이 의분에 앞을 다투어 일어나 저 대역죄인을 효수형에 처하라, 릉지처참하라고 뜨락이 떠나가도록 소리쳤다.

그때 고관들의 등뒤에 숨어있던 류자광이 벌떡 일어나 보란듯이 이전의 상대장을 이놈저놈 하고 몰아대다가 저것이 병란을 일으켜 경복궁 왕궁을 화포대로 불사르려 했다, 제가 임금의 곤룡포를 떨쳐입고 룡상에 앉아 천하를 다스리려 했다, 남이와 절친한 사이였던 령상이 이런 사실을 알았는가 몰랐는가고 소리쳤다.

그러자 벽밑에 앉아있던 고관대작들이 남이가 제 혼자서 이런 엄청난 흉계를 꾸밀수 있느냐, 령상과 공모했다고 입을 모아 부르짖었다.

장내에 살벌한 기운이 몰아치는 속에 임금이 그들쪽을 향해 자중하라고 손을 내젓고는 한명회한테 강순에게 다시 고랑을 채워 남이곁으로 끌어가라고 일렀다.

강순은 너무 기막히고 주눅이 들어 한마디 항변도 못한채 와들와들 떨며 라장들한테 끌려가다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령상이 공모했다는게 사실이냐? 사실이면 진상을 자복하라!》 하고 임금이 남이에게 소리쳤다.

남이는 들것우에 앉은채 하늘을 몇순간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전하, 죄다 사실이오이다.

고관들이 놀라움에 술렁거리는데 남이는 쇠소리 울리는듯한 소리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 거사날은 십이월 승하한 임금을 장사지내는 날, 그날에 하기로 예정했소이다. 헌데 여기 상감이 있게 될 창덕궁과 수강궁은 너무 드러난 곳이라 거사에 적합치 않아 모두 부왕을 장사지내러 간 다음 두 궁전에 불을 지르기로 했소이다. 전하가 경복궁으로 옮겨앉으면 그때엔… 강순령상과 짜고 같은 시각에 수직을 서다가 나는 수직서는 겸사복들을, 령상은 수직서는 군사들을 휘동해 병란을 일으키자고 했소이다!

그의 목소리는 우렁차게 울리고 고관들은 그 무시무시한 소리와 당당한 기상에 놀라 숨을 죽이고있다가 다시 앞을 다투어 뛰여일어났다.

《또 누구하고 공모했냐?》 하고 임금이 물었다.

남이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벽밑에 주런이 앉아 군주한테 잘 보이려고 발광하던 고관대작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고관들은 그 바람에 얼굴들이 흙빛으로 굳어지는가 하면 목이 움츠러들어 채머리를 떨기도 하고 헛기침을 기기도 하고 고개를 수굿하고 죽은듯이 앉아있기도 했다.

어느 고관이나 입을 벌릴 엄두도 못내 장내가 물을 뿌린듯이 조용해졌다.

헌데 남이는 그런 고관들을 둘러보다가 저도 모르게 제일 앞줄에 앉아있는 몸집이 좋고 얼굴이 희멀쑥한 한확을 지켜보게 되였다.

남의 나라로 이 나라의 처녀들을 떠나보내던 날 큰 경사라도 치른듯 의기양양해하던 그때 모습이 선히 떠올라서였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린 한확이 벌떡 뛰여일어나 밸을 토하는듯 한 소리를 내질렀다.

《야- 이 역적놈아, 왜 날 지켜봐?! 내가 언제 너하구 역모를 했냐-?!

남이는 너무 뜻밖이고 괴이쩍어 뜨락이 떠나가도록 웃어댔다.

《흐아 흐아 흐아… 홧하하- 옳소 옳아, 귀관은 역모를 안했소. 그러니 안심하고 마음편히 부귀영화를 실컷 누리며 오래오래 사시오. 홧하하…》

장내가 술렁거리는 속에 한확은 무안에 겨워 상판이 지지벌개서 앉았다.

이윽고 뜨락에 다시 정숙이 깃들자 임금이 위엄을 풍기며 남이에게 호령했다.

《너 이놈, 마감으로 할 소리 있으면 할지어다!

남이는 생각깊은 얼굴로 모두숨을 길게 내쉬였다.

《… 전하, 신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이오이다. 이 한몸은 칼탕을 쳐서 한강에 뿌려 던져도 짐승들 먹이로 산야에 던져도 무방하지만 신이 남기는 말만은 부디 명심하기 바라오이다.

제발 문존무비… 이 쓸개빠진 놀음만은 걷어치우시오. 문관은 분에 넘치게 존대하고 군사들은 터무니없이 의심하여 경계하고 비하하고 천시하는것이 이 나라 정사가 아닌가. 문관량반들은 호강을 하다못해 기생을 끼고 주색에 빠져있는데 무부들은 나라를 지키다가 전몰해도 묻힐 자리 하나 변변한것이 차례지지 못하는것이… 이것이 나라의 실상이요. , 김종서장군은 무슨 죄로 죽으며 신은 또 무슨 루명을 쓰고 가는가?!

전하, 무부들을 아끼지 않고 소외시하고 배척하거나 군사를 이렇게 홀시하면 나라가 망하오!

리황은 짐짓 대범해진듯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남이쪽을 지켜보았다.

남이는 계속하여 문관만 드나드는 일화문과 무관만 드나드는 월화문을 따로낸데 대하여, 놀고먹는 문관들에게 나라의 록봉을 타먹게 하려고 《체아직》을 제정한데 대하여 드러내놓고 지탄하였다.

《… 지방군에 실시하는 <부병제>는 또 어떤가? 군사들이 제 집에서 쌀을 날라다 먹게 했으니 이런 군대가 싸우면 이길수 있는가. 전하, 국방은 소홀히 하면서 남의 나라 왕실에 처녀들을 바치는걸로 나라의 안녕을 도모하는건… 이건 분명코 민족의 치욕이나이다!…》

한명회가 뛰여일어나며 미친듯이 소리쳤다.

《저… 저 입에 자갈을 물리랏-》

대기하고있던 라장들이 야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매질을 시작했으며 남이는 위혁적인 함성을 내지르며 그에 항거했다.

인간세상의 참상에 기겁한 참새들이 공중에 솟구쳐오르는가 하면 아스라한 허공에서 모래알처럼 아물거리다가 밑으로 엇비스듬히 내리꼰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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