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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천은 학업성적이 높고 학습열의도 대단해서 자기가 기특하게 여기며 각별히 믿고 사랑하던 고준무와 김군옥이 다른 장소도 아닌 교실에서 서로 싸운것이 못마땅하고 불쾌했다. 여기에 말려든 학생은 자기와 사이가 그닥 좋지 않은 채정보부교장의 아들이니 이 또한 난처하고 공교로왔다. 그래서 엄하게 추궁하려다가 그런 정도로 수습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홱 돌아섰다.

그는 부교장실에 들어가자마자 채정보에게 격해서 부르짖었는데 마치도 함상포가 련발사격을 하는것 같았다.

《난 이걸 그저 언쟁이라고만 볼수 없습니다.

김군옥학생의 발언은 매우 엄중합니다. 그는 감히 쏘련을 빗대고 남이 제 나라를 지켜주기를 바라는건 어리석은짓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쏘련을 시끄러운 존재로 여기면서 배제하자는건데 유감스럽게도 채기정학생은 그에 동조했습니다.》

한백천은 모욕이라도 당한듯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볼편이 푸들푸들 떨렸다.

자기만 똑 제일이고 원칙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그도 남들이 범하는 결함은 사소한것도 융화하거나 묵과하지 않고 엄중하게 분석하여 즉석에서 되게 문제를 세워 두들겨패기를 좋아했다. 이처럼 목청을 돋구어 열변을 토하는걸 보면 자신의 원칙성을 과시할수 있는 이런 기회가 온것을 무척 기뻐하는것 같았다.

그의 입에서는 침방울이 막 튕겨나갔다.

그와는 반대로 노상 시간이 모자라 애를 태우며 어쩌다 짬이 생기면 함선설계도면에 손을 대군 하는 채정보는 사색적이고 침착한 일군이였다.

그에게는 부교장이라는 직무가 어울렸지만 별이 세알이나 박힌 누런 견장이 달린 해군군관복은 그닥 어울리지 않았다. 오늘도 모처럼 생긴 짬시간에 경비함설계도면을 펴놓은 그는 한창 사색을 무르익히다가 이런 방해군과 맞다드니 골이 났다.

한백천이 큰일이나 난듯이 법석 떠들어대는 소리를 시끄러운대로 들어보니 그렇게까지 격분해서 송사할 일이 아니였다. 채정보는 군옥학생이 옳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설계도면에서 마지못해 눈길을 떼며 나직이 물었다.

《그래서 어쩌자는거요?》

《되게 문제를 세워야지요. 군옥학생은 학과실력이 높기는 하지만 일부 교원들의 그릇된 영향을 받아서인지 탈선하고있습니다.》

한백천소좌를 피곤한 기색으로 쳐다보던 채정보의 눈까풀이 알릴듯 말듯 떨렸다.

상대방이 한 말은 결국 자기에 대한 로골적인 비난이였기때문이다.

지금 학교에서는 교육기자재도 걸렸지만 보다는 교원진영이 약해서 애를 먹고있었다. 채정보처럼 해방전에 상선학교를 나오고 조타를 잡아본 사람들이 몇명 있었고 나머지는 한백천이처럼 쏘련에서 해군에 복무하던 사람들이였다. 경력이 서로 다른 이들은 학교운영과 교수안작성으로부터 시작해서 해군함대창설전망을 놓고 의견이 대립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채정보는 함대창설에 필요한 인재를 자체로 육성하며 전투함정들도 자체로 건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백천을 비롯한 일부 교원들은 그것을 실현불가능하거나 시기상조로 여겼다. 여기에는 그들의 우월감이 다분히 작용했다. 자기들은 정규적인 함대에서 이미 복무해보았다는데로부터 오는 우월감이였다.

더우기나 한백천은 태평양함대에서 대위견장을 달고 세계혁명을 해온 자기가 지금 고작 소좌견장을 달고 교원노릇이나 하는데 해방전에 상선이나 타던 채정보가 부교장자리에 앉아있으니 심사가 편치 않았다.

《김군옥학생을 당장 출학시킵시다!》

채정보의 눈까풀이 다시금 푸들 떨렸다.

《나는 그 학생을 장차 함대사령관도 할수 있는 전도유망한 해군지휘관으로 지목하고있소.

참, 동무도 언젠가 나에게 그런 생각을 터놓은것 같은데…》

그것이 사실인지라 한백천은 말을 못했다.

《실력이 제일 높은 학생을 출학시키면 다른 학생들에게 주는 영향이 좋지 않을텐데 그 후과를 동무가 책임지겠소?》

사실 한백천은 자기도 실력을 인정하고있는 김군옥을 출학까지 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런 제기를 한것은 부교장에게 심리적인 압력을 가하고싶었기때문이였다.

그는 이미 작정한대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럼 한주일 영창처벌합시다.》

《나머지 두학생은?》

한백천은 저으기 난처해졌다.

소대장 고준무는 교원의 립장을 지지하고 옹호했으니 문제될게 없는것이고 김군옥의 편역을 든 채기정은 부교장의 아들이니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들은 크게 잘못한게 없으니 영창처벌을 주는건 가혹한 처사라고 봅니다.》

채정보는 별안간 두눈을 흡뜨며 언성을 높였다.

《크게 잘못한게 없다구? 교실에서 큰소리로 언쟁하며 소동을 피웠는데도 잘못한게 없단 말이요? 이건 혁명군대의 교육기관에서 절대로 용납할수 없는 망동이요!》

한백천은 선비같은 부교장이 이렇게 큰소리를 칠줄은 몰랐다.

《세 학생을 다 처벌로 한달동안 해상부업에 동원시키시오.》

채정보는 맺고끊듯이 지시하고나서 아무런 일도 없은듯이 두눈을 가느스름히 쪼프리며 다시 설계도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말뚝처럼 서있던 한백천은 부교장이 더는 자기와 상대하려 하지 않자 눈만 껌벅거리다가 슬며시 물러나고말았다.

이튿날 아침 상학준비검열시간에 세 학생은 대렬앞에 불리워나갔다.

김군옥은 수치감에 얼굴이 타는듯싶어 차마 고개를 들수 없었다. 그는 시범동작을 보여주거나 훈련성적이 높아 칭찬을 받으려고 대오앞에 나선적은 여러번 되지만 이처럼 처벌을 받으려고 나서긴 처음이였다. 생각할수록 자신이 원망스럽고 후회되였다.

고준무와 채기정도 어깨가 축 처져서 고개를 떨구고 처분만을 기다리고있었다.

한백천은 교권을 시위할수 있는 이 기회에 또 한번 열변을 토했다.

《동무네 머리속에 배겨있는 낡은 사상잔재가 언제야 뿌리뽑히겠소. 여긴 함대지휘관들을 키워내는 신성한 교육기관이지 승벽내기나 하고 패싸움을 하는 어수룩한 뒤골목이 아니란 말이요. 특히 강의에서 취급한 내용을 놓고 이러니저러니 시비질을 하는건 매우 옳지 못한 태도요.

앞에 나온 세 학생은 해상부업을 통하여 자신을 단련하고 뉘우쳐야 하겠소.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라도 지금 거의나 비여버린 수산물창고를 한달동안에 다 채워놓으시오. 알겠는가?》

세 학생은 여전히 고개를 떨군채 겨우 알릴듯말듯 대답했다.

《예.》

《사민들처럼 〈예〉가 뭐야? 다시!》

한백천이 감때사납게 소리치자 그제서야 세 학생은 번쩍 고개를 들며 일제히 큰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습니다!》

《부업창고로 갓!》

세 학생은 뒤쫓기듯 부업창고로 갔다.

말이 부업창고지 쓸만 한 어구가 눈에 띄우지 않았다. 지난 3월에 청어를 잡노라 쓰던 덤장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띄우개도 변변치 않았다. 김군옥은 난감한 기색으로 구석구석을 둘러보다가 손에 잡히는대로 노대를 하나 둘러멨다. 김군옥의 눈치를 살피던 채기정은 《하여간 뭔가 담을게 있어야 하겠지.》라고 중얼거리며 청어비늘과 소금알갱이들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빈 목통을 어깨우에 힝 올려놓았다. 철띠로 단단히 테를 두룬 참나무통에서는 쩔대로 쩔은 물고기비린내가 역하게 풍겼다.

마뜩지 않은 기색으로 밖에 그냥 서있던 고준무는 그들이 밖에 나오자 창고문을 쾅! 하고 소리나게 닫아버렸다.

운동장에서 학생들은 두패로 갈라져 바줄맺음훈련과 련락삭던지기훈련을 하고있었다. 바줄맺음훈련은 한백천소좌가 직접 집행하고 련락삭던지기훈련을 부소대장인 리완근이 집행하는중이다. 고준무가 보기엔 리완근이 오늘따라 별스레 으쓱해진것 같았다.

《련락삭 준비!》

리완근의 구령에 따라 두 학생이 나와 련락삭을 각기 량손에 갈라쥐고 수류탄을 던질 때처럼 웃몸을 비스듬히 뒤로 제꼈다.

《던졋!》

두 학생은 련락삭을 쥔 두손을 률동적으로 흔들다가 힘껏 뿌려던졌다. 련락삭끝에 달린 연추가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간다.

고준무는 야구공던지기명수인지라 련락삭도 잘 던졌다. 이번에 처벌을 받지 않았으면 시범동작을 하며 훈련을 멋지게 집행할텐데 참 일이 공교롭게 되였다.

그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잔교로 가는 김군옥과 채기정을 마지못해 뒤따르며 게두덜거렸다.

《젠장, 남들은 훈련을 하는데 우린 이게 뭐야. 도대체 뭘 가지고 해상부업을 하라는거야? 한달이 아니라 석달이라도 수산물창고를 채우긴 코집이 글렀어. 빌어먹을…》

이때 무엇인가 휙 날아왔다. 그는 와뜰 놀라며 날쌔게 비켜섰다. 곁에 떨어진건 련락삭이 매달린 연추였다. 자칫하면 연추에 맞아 머리가 깨질번 했다. 그는 약이 올라서 홱 돌아서며 감때사납게 동무들을 쏘아보았다.

방금전에 련락삭을 던지다가 그만 실수를 하여 왕청같은 방향으로 연추를 날려보낸 학생은 김도형이였다. 감고장인 안변이 고향인 그는 감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동그란 얼굴에 량볼이 오동통하고 발기우리한데 방금전의 실수로 당황한지라 얼굴이 더 빨개져서 홍시처럼 익어버렸다. 그는 어쩔바를 몰라하며 소리쳤다.

《미안해! 소대장동무.》

고준무는 쓰거워서 입을 다시며 돌아섰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억울했다.

어째서 나에게 군옥이와 꼭같이 처벌을 주나?

《정말 너무해!》

속에서 부글거리던것이 자꾸만 입밖으로 튀여나갔다.

《부업선이라는건 기관이 고장나서 움직이지 못하지, 그물은 죄다 헝클어지고 찢겨진 상태지, 그러니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으라는건가?》

자존심이 강하고 명예를 귀중히 여기는 군옥이도 처벌을 받고 심사가 편할리 없었다.

고준무가 자꾸만 곁에서 징징거리니 더 화증머리가 났다.

《무슨 말이 그리도 많아? 해상부업을 하라면 해야지 별수 있어.》

《글쎄 뭘 가지고 어떻게 하는가 말이야?》

《궁리해보자구. 무슨 방도가 생기겠지.》

고준무는 코웃음을 쳤다.

《흥! 여긴 동해야. 망둥이잡이나 하는 서해와는 조건이 다르단 말이야.》

그 소리는 가뜩이나 팽팽해진 김군옥의 신경을 아프게 건드렸다. 그는 턱 멈춰서서 여차하면 한대 후려갈길 자세로 고준무를 쏘아보았다.

아름드리참나무목통을 혼자서 둘러메고 수걱수걱 걸어가던 채기정이 자꾸만 불집을 일구는 고준무를 나무랐다.

《소대장동문 쩍하면 동해니 서해니 하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되나요?》

《알겠네. 난 그저 속이 상한김에 아무 생각없이 한 소리야. 그러니 량해하게.》

고준무는 화해조로 말하고나서 먼저 부업선에 올라갔다. 조타실안을 들여다보고 발판을 제끼고 기관실안을 굽어보던 그는 케가 글렀던지 입을 쩝쩝 다시며 현측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바다물속을 들여다보았다.

바다물이 맑아서 두어길이나 깊은 물속바닥까지도 빤히 들여다보였다.

우죽뿌쭉한 바위짬들에 이악스레 뿌리를 박은 기다란 다시마들이 춤을 추듯 소리없이 너울거렸다. 사이사이에 다보록하게 돋아난 발그스레한 김이나 약간 검누런 미역도 보인다. 잡아먹을나위도 없는 줄도미와 새끼보가지, 열기따위의 잔고기들이 바다풀사이를 누비며 재롱스레 헤염치고있었다. 오각별모양의 삼바리와 말성게도 더러 눈에 띄였다.

《에라! 모르겠다! 다시마나 건지세!》

고준무는 갑판에 놓여있던 삿대를 쥐고 활촉모양의 쇠갈구리가 달린쪽을 물속에 들이밀고 다시마를 휘감아당겼다.

누르스름하면서도 푸르끼레한 살진 다시마가 수면에 떠올라 번들거리는 제모습을 보란듯이 드러냈는데 흡사 레스장식을 한 기다란 혁띠같았다.

고준무는 삿대끝에 감아올린 다시마를 추켜들고 의기양양해서 소리쳤다.

《여! 뭘 멍청히 서있어? 어서 목통을 가져와!》

채기정은 독촉을 받고서야 잔교에 놓았던 목통을 들고 뚱기적거리며 부업선에 올라갔다.

고준무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다시마를 목통안에 던져넣고 또 허리를 잔뜩 굽히고 삿대질을 했다. 별다른 수가 없어 채기정도 내키지는 않았지만 삿대를 들고 다시마를 건져내기 시작했다.

사실 배군들은 다시마따위를 먹지도 않는다.

김군옥은 다시마국을 퍼줄 때마다 상골을 찡그리던 동무들이 생각나서 고준무가 하는 일에 합세하지 않고 두다리를 드리우고 잔교끝에 앉아 부시럭거리며 담배쌈지를 꺼냈다.

보라색공단으로 곱게 기운 담배쌈지에는 파도를 헤치며 내달리는 어뢰정이 흰 실로 정히 수놓아져있었다. 그것을 보니 불시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 담배쌈지를 기념으로 준 그 처녀가 처벌을 받고 주눅이 든 자기의 꼬락서니를 지켜보는것만 같아서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지난 1월초.

수상보안간부학교 개교식을 며칠 앞두고 동서해의 수상보안대에서 선발된 젊은이들이 커다란 포부를 안고 모여들 때였다.

김군옥은 기차가 연착되는 통에 하루 늦어서 원산역에 내려 예비집결장소인 동양려관에 찾아갔다. 입학생들로 흥성거릴줄 알았던 려관이 예상외로 조용했다. 접수에 알아보니 공교롭게도 입학생들은 려객선을 타려고 한시간전에 부두에 나갔다고 했다.

그는 속이 철렁해서 허둥지둥 부두로 달려갔다. 야속하게도 려객선은 지각생을 골려주듯이 부웅!― 하고 배고동을 길게 울리며 장덕섬을 에돌아 저 멀리로 미끄러져간다.

견장이 없는 군복차림을 한 웬 처녀가 부두에 홀로 서서 려객선의 뒤모습을 안타까이 지켜보고있었다.

《동무, 말 좀 물읍시다.》

처녀가 고개를 돌렸다. 군옥을 마주보는 처녀의 시원하게 생긴 두눈엔 물기가 어려있었다. 보아하니 무슨 속상한 일이 생겨서 혼자 울던것 같았다. 아름답게 생긴 처녀가 눈물을 머금은걸 보니 군옥은 대뜸 동정심이 생겼다. 처녀가 무엇때문에 그러는지 자기가 가능한껏 도와주고싶었다.

《동문 어째서 웁니까?》

《예?!》

처녀는 별 싱거운 사람을 본다는듯 미간을 찌프리며 눈을 흘기더니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멋적어진 군옥은 머뭇거리다가 미안쩍은 어조로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저 려객선에 수상보안간부학교에 입학할 동무들이 타지 않았습니까?》

처녀는 얼른 고개를 돌리더니 대뜸 반색을 하며 친근한 어조로 되물었다.

《동무도 그 학교에 추천받아 오는가요?》

《예.》

《야! 동문 얼마나 좋겠어요.》

처녀는 두손을 모두어 쥐더니 발까지 동동 굴렀다. 이럴 때 보니 어린애처럼 천진했다.

《난 동무가 부러워요! 정말 부러워요.》

김군옥은 어리둥절해졌다.

《도대체 뭐가 부럽다는겁니까?》

처녀는 솔직히 터놓았다.

《나도 수상보안간부학교에 입학하려고 왔는데 동무처럼 정식으로 추천받지는 못했거던요. 그래서 동무가 부러운거예요.》

김군옥은 두눈이 휘둥그래지도록 놀랐다.

《뭐라구요?!》

처녀는 두눈이 올롱해졌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동무야 녀자가 아니요. 그런데두 수상보안간부학교에 입학하러왔단 말이요?》

처녀의 얼굴에 가득하던 부러움과 천진란만함이 순간에 가뭇없이 사라졌다. 정색해진 처녀는 엄한 기색을 지었는데 어찌도 도고한지 범접하기 어려울 지경이였다.

《녀자가 어째서요?》

콕 찌르는듯 한 그 물음에 김군옥은 대답을 못하고 침만 삼켰다.

《동문 남녀평등권이 발포된걸 아직도 모르는가요? 아니면 동무에겐 녀성이라면 덮어놓고 업신여기는 봉건사상이 있는가요? 왜 대답을 못해요?》

마치도 처녀는 교원이 경솔한 학생을 추궁하는듯 한 엄한 목소리로 따져물었다.

김군옥은 어지간히 급해맞아서 변명조로 구구히 대답했다.

《오해하지 마시오. 난 녀성들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녀자가 전투함정을 탈수야 없잖소. 수상보안간부학교는 해군지휘관들을 육성하는 곳이란 말이요.》

처녀는 보기 좋게 군턱이 지고 감실감실하게 탄 얼굴을 도고하게 추켜들었다.

《해군지휘관은 남자만이 될수 있는가요?

이봐요, 똑똑히 명심하세요! 나도 해군지휘관이 되자는거예요.

이왕이면 전함이나 순양함의 함장이 되자는거란 말이예요.》

김군옥은 어이가 없어서 허허 웃고말았다.

처녀는 바싹 약이 올라서 얼굴을 확 붉히며 야멸차게 쏘는듯이 물었다.

《왜 웃어요? 실없게스리…》

《미안합니다. 난 지금까지 녀왕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녀함장이 있다는 소린 들어본적이 없거던요. 그래서…》

처녀는 조급하게 그의 말을 가로챘다.

《예, 바로 그래서 난 기어코 함장이 되자는거예요. 다음엔 함대사령관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어요.》

《뭐라구요?!》

김군옥은 눈이 뒤집혀질 지경으로 놀랐다.

《함대사령관이 되겠다?》

처녀는 어글어글한 두눈과 복스럽게 생긴 입술에 미소를 지으며 어엿이 대꾸했다.

《예, 우리 아저씨가 그러는데 함대사령관이 될 꿈을 꾸지 않는 해병은 제구실을 하지 못한대요.》

음미해보니 과연 심중에 새겨둘만 한 소리였다.

그제서야 김군옥은 이 녀장부가 결코 허영에 뜬 소리나 롱담을 하고있지 않다는걸 더더욱 놀라운 심정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정색해서 조심스레 물었다.

《아저씨가 누구요?》

처녀는 입술을 찡그리며 픽 웃었는데 그럴 때조차 밉기는 고사하고 더 매력있어보였다.

《아저씨가 아저씨지 누구겠나요.

하여간 동무생각엔 어때요? 내가 수상보안간부학교에 입학하기만 하면 앞으로 해군지휘관이 될수 있을것 같나요? 솔직히 대답해주세요.》

김군옥은 이 처녀가 높이 세운 그의 포부와 그것을 기어이 성취하려는 강한 지향과 열정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전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예, 동문 꼭 그렇게 될겁니다!》

처녀는 뜻밖인지 저으기 놀랍고 미덥지 않은 기색으로 군옥을 마주 보더니 긴장해서 숨을 죽이고 재차 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요?》

김군옥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였다.

《예, 난 그렇게 믿고싶습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거라고 확신합니다.》

《혹시 저를 놀리는건 아니예요?》

《아니요. 동무의 말을 들으니 내가 부끄럽습니다. 난 동무처럼 그렇게 큰 포부와 희망을 지니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니 진심이군요. 정말 고맙네!》

처녀는 활짝 웃으며 군옥의 두손을 무랍없이 덥석 쥐고 환성을 올렸다. 그 모습이 철부지소녀처럼 재롱스럽고 천진란만했다.

《글쎄 동무를 내놓고는 누구나 녀자는 해군지휘관이 될수 없다는거예요.

나를 지지해줄줄 알았던 우리 아저씨까지 그러더란 말이예요. 바다는 남자들의 독점물인것처럼 거만하게 여기거던요. 그래서 난 말이예요. 아저씨의 군관복을 슬쩍 채입고 떠나온거예요.

수상보안간부학교에 아저씨와 가깝게 지내던 〈뽀쬼낀〉소좌가 있거던요. 그를 믿고 왔는데…》

《〈뽀쬼낀〉이요?》

《예, 그런 사람이 있어요.

해방전에 태평양함대에서 복무했답니다. 그는 로씨야전투함인 〈뽀쬼낀〉호가 짜리를 반대하여 폭동을 일으킨 이야기를 즐겨하군 하지요. 그래서 그런 별명이 붙은것 같애요.》

과연 흥미가 동하는 소리였다.

《그래서요?》

《마침 그 소좌동지가 입학대상자들을 데리려 원산에 나왔더군요. 나를 보고 몹시 반가워했어요.》

명랑하게 이야기하던 처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러자 주위가 어두워진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내가 수상보안간부학교에 입학하러 왔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큰일이나 난듯이 펄쩍 뛰더군요.

자고로 동서방 어느 나라에서나 녀자가 해군지휘관이 된 례가 없다는거지요.

난 막 떼를 썼어요. 그러자 소좌동진 정색해서 나더러 추천문건을 내놓으라는데…》

말꼬리를 흐린 처녀는 군옥에게 물었다.

《참, 동문 추천문건이 있어요?》

김군옥은 은근한 자부심을 느끼며 점잖게 고개를 끄덕이였다.

처녀는 서글픈 기색을 지으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였다.

《나에겐 그런게 없어요.

소좌동진 추천문건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받아줄수 없다면서 남동무들은 다 려객선에 태우고 나 혼자만 떨구어놓고 가버린거예요.》

김군옥은 처녀의 처지가 가련하게 여겨져서 동정심을 금할수 없었다.

《거 소좌동지가 정말 너무하구만. 모르는 처지도 아닌데 어쩌면 그럴수 있소.》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셈이지요.

그 사람은 인정도 없거니와 머리속엔 녀성들을 천시하고 업수이 여기는 봉건사상이 꽉 들어차있어요. 바다가 어디 남자들만의 활무대인가요?》

《옳소. 해방이 되니 고기배를 타고 일하는 용감한 녀성들도 있단 말이요.》

처녀는 자기의 심정을 진심으로 리해해주는 총각을 정겹고 미더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해방된 새 조선은 우리 녀성들도 혁명의 한쪽 수레바퀴를 힘차게 밀고나갈것을 요구하고있어요. 이젠 녀자들속에서 비행사도 나오고 기관사도 나오고 함장이나 선장도 나와야 한단 말이예요.

그래야 내 나라를 튼튼히 지키고 하루빨리 부강조국을 건설할수 있어요.》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총각의 고무를 받은 처녀는 억실억실한 눈동자를 빛내이며 다시한번 마음을 도슬러먹었다.

《난 기어이 수상보안간부학교에 들어가겠어요.

자! 어서 가자요.》

김군옥은 어정쩡해졌다.

《어딜 가자는거요?》

《어디긴요, 수상보안간부학교에 가야지요. 배를 놓쳤으니 걸어서라도 가잔 말이예요.》

처녀는 정말이지 여간내기가 아니였다.

《그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나 하고 그러오?》

《딱히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원산만안에 있겠지요. 려객선이 간 방향으로 해안가를 따라 가보자요. 그저 제발로 걸어가는게 제일이예요.》

김군옥은 처녀가 대할수록 마음에 들었다.

포부가 크고 지향이 뚜렷하며 목적을 향하여 자신심에 넘쳐 완강히 돌진하는 이런 처녀와 나란히 행군한다는것은 행운이 아닐수 없었다.

그래서 기꺼이 동의했다.

《좋소, 가기요!》

날은 일찍 어두워졌다.

줄창 해변가를 따라 걷는데 해풍이 어찌도 기승을 부리는지 숨이 컥컥 막혔고 이마와 볼편이 얼어들었다. 하지만 가슴은 불을 안은듯 뜨거웠다.

마치 화창한 봄날에 향기그윽한 꽃동산을 손잡고 거니는듯이 즐겁기만 했다.

그들은 신이 나서 걸으며 통성을 했다.

처녀의 이름은 김정인, 열아홉살, 함흥의전 학생.

고향은 산골인 풍산, 너무도 공부하고싶어 어린 나이에 함흥에 나와 바다일을 하며 학비를 마련하여 중학을 다녔다.

언니도 해방전에 함흥에 나와 간신히 녀학교를 다니고 고향에 갔다가 해방직후 군부녀부장으로 사업하던중 지금 보안간부훈련소에서 부소장을 하는 홍동철과 결혼하였다고 한다. 아저씨는 젊어 한때 쏘련에 들어가 발뜨함대에서 복무하다가 동방근로자대학을 나오고 국내공작을 하던중 감옥살이까지 했다니 대단한 인물인것 같았다.

《바로 우리 아저씨가 발뜨함대에서 복무할 때 어뢰정을 탔는데…》

자기가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그리도 동경하여마지 않는 어뢰정이라는 말이 나오자 김군옥은 귀가 번쩍 열리는것만 같았다.

《가만! 이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 아저씨가 어뢰정을 탔단 말이예요.》

《음, 어뢰정을 탔단 말이지요. 그게 정말입니까?》

김정인은 무춤 멈춰섰다.

《왜요? 믿어지지 않아요?》

《아, 그런게 아니라 동무의 아저씨가 너무 부러워서 하는 말입니다. 난 아직 어뢰정을 말만 들었지 구경도 해보지 못했거던요.》

솔직한 그 말이 마음에 들었던지 김정인은 생긋 웃더니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여 내밀었다.

《자! 그럼 구경하세요. 어뢰정이예요.》

김군옥은 저으기 놀라며 얼결에 그것을 받았다.

사진인데 날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부랴부랴 성냥불을 켜서 비쳐보았다. 해군군관복을 입은 풍채좋은 사나이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처녀가 속삭이였다.

《뒤면에 있어요.》

사진을 뒤집어보니 거기엔 파도를 헤치며 내달리는 어뢰정의 모습이 솜씨있게 그려져있었다. 날씬하게 생긴 어뢰정은 칼날같은 배머리를 추켜들고 창공으로 막 나래쳐오르는듯싶었다.

갑자기 성냥개비를 쥔 손끝을 누가 깨무는것만 같아서 김군옥은 손을 털며 비명을 질렀다.

《앗 따거!》

《호호!》

처녀는 소리내여 웃었다.

김군옥은 성냥불에 덴 손끝을 입김으로 불고나서 다시 성냥불을 켜고 어뢰정그림을 주의깊게 보았다. 그러고나서야 사진을 처녀에게 돌려주었다.

《이 군관이 아저씨요?》

《예, 우리 아저씬 그때 장차 해방된 조국에 나가서 함대사령관이 될 꿈을 안고있었대요.》

《아, 그래서 동무가 함대사령관이 되겠다는 소리를 했구만.》

《예, 얼마나 랑만적인 꿈인가요. 아저씨가 이루지 못한 그 꿈을 내가 실현하자는거예요. 참, 동무의 꿈은 뭐예요?》

김군옥은 시무룩이 웃었다.

《난 동무처럼 감히 함대사령관이 될 꿈은 꾸지도 못했소. 그러나 어뢰정은 타고싶소. 이왕이면 어뢰정정장이 되고싶구만.》

《동문 정장이 아니라 정대장도 될수 있을것 같아요.》

《놀리지 마오.》

《정말이예요. 목표를 그렇게 높이 세우고 아글타글 노력해보세요. 그러면 무슨 일이나 꼭 되는거예요.》

아름다운 처녀의 믿음에 넘친 고무를 받은 김군옥은 사기가 났다.

내가 그렇게 값있는 존재란 말인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지. 암, 그래야 하구말구.

그는 흐뭇한김에 한대 말아 피우려고 엽낭에서 담배쌈지를 꺼냈다.

추위에 곱아든 손으로도 솜씨있게 제꺽 마라초를 말아물고 불을 달았다. 그리고는 멋지게 연기를 내뿜었다.

좀 아연해하는 기색으로 그를 지켜보던 처녀는 코살을 찡그리며 약간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그 담배쌈지에선 령감냄새가 나는군요. 동무에겐 어울리지 않아요.》

김군옥은 별안간 시무룩해져서 나직이 한숨을 내쉬였다.

《그럴수밖에… 이건 우리 아버지가 애용하시던거요.》

본의아니게 상대방의 아픈 곳을 건드린 정인은 몹시 미안해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지금은 아버지가 안계시나요?》

김군옥은 괴롭게 얼굴을 찡그리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음, 세살때 어머니를 여읜 나를 아버지가 홀로 키우셨소. 아버진 남포와 신의주로 오가며 상품을 실어나르는 짐배를 부리셨는데 그렇게 죽기내기로 돈을 벌어 나를 소학교에 보내셨지. 난 고생하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하여 제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소. 그러나 돈이 딸려서 중학교에는 갈수 없었소.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다리를 상해서 더는 배일을 할수 없게 됐소.

아버지대신에 내가 짐배에 올랐지. 그러던 어느날 배가 암초에 부딪쳐서 산산쪼각이 났소.》

《저런?! 그래서요?》

《난 널쪽 하나를 붙잡고 날바다에서 며칠간 표류하다가 겨우 뭍에 기여올랐소. 집으로 가니 문밖에 나와 지켜서있던 아버지가 나더러 당장 압록강을 건너 도망치라고 하더란 말이요.》

정인은 두눈이 올롱해졌다.

《어째서요?》

《돈밖에 모르는 일본인선주놈이 깨여져나간 배의 값과 배에 실었던 상품들의 값을 기어코 받아내겠다고 윽윽 벼르면서 선원들중에서 누구인가 살아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는게 아니겠소.》

정인은 치를 떨었다.

《정말 흡혈귀로군요.》

《그통에 난 집안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그달음에 밀선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 이국땅으로 도망쳤소. 헤여질 때 아버지가 이 담배쌈지를 내 손에 쥐여주었는데 안에 지전과 동전이 1원 50전 들어있더군. 난 그 돈을 손에 쥐고 산설고 물설은 이국땅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녔소.

그때 받은 수모와 구박을 잊을수가 없소. 정말 상가집개만도 못한 신세였지. 아버지가 그립고 고향집이 그리워지면 나는 이 담배쌈지를 펼치고 냄새를 맡군 했소. 그러다가 담배를 피우게 됐지.》

정인의 두눈엔 눈물이 가랑가랑 맺혔다.

《난 해방이 돼서야 고향에 돌아왔소. 그런데 아버진 몇해전에 돌아가셨더군. 선주놈이 나 대신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우리 아버지를 배에 태우고 혹사시켰으니 견디여낼수가 없었다는거요.

난 아버지의 원쑤를 갚아드리려고 해방이 되자 어디론가 도망친 쪽발이선주놈을 찾아 서해안을 샅샅이 훑으며 남포까지 내려갔다가 수상보안대에 단속되였소.

수상보안대를 책임진 항일투사동지가 나를 만나 사연을 알아보더니 지금 남조선에서 일본놈들을 대신하여 미국놈들이 또다시 우리를 노예로 만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있으니 놈들이 범접을 못하게 바다를 지켜야 한다고 일깨워주시더군. 그래서 난 수상보안대에 들어가게 된거요.》

정인은 눈굽에 맺힌 눈물을 손수건으로 꼭꼭 찍더니 애써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수상보안대에서 무슨 일을 했어요?》

《신의주로 드나드는 각종 배들을 단속했소. 처음 우리에겐 전마선밖에 없었소. 전마선으로는 발동선들을 단속할수가 없더구만. 우린 생각하던 끝에 전마선에 오토바이에서 떼낸 기관을 놓았소.

배머리엔 막심중기를 걸었지. 그랬더니 발동선들도 꼼짝하지 못하더군. 우린 적산물자를 비법적으로 빼내가던 발동선들과 모리간상배들, 파괴암해분자들을 붙잡았소.》

정인은 두눈을 반짝이며 탄성을 올렸다.

《야! 정말 멋있군요. 어쩌면 그런 기발한 생각을 다 했어요?》

《이제야 우리가 바다의 주인이 아니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힘으로 바다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런 방법도 떠오르더구만.

어느날 수상보안대 대장인 항일투사 김성국동지가 우리 신의주분소에 왔댔소. 투사동지는 발동선으로 개조한 전마선을 보고 몹시 기뻐하면서 나를 수상보안간부학교에 추천해주더란 말이요. 그래서 이렇게 오게 된거요.》

《정말 대단해요. 앞으로 함대사령관은 내가 아니라 동무가 될거예요. 난 그렇게 확신해요.》

김군옥은 초면인 처녀에게 지나치게 제 자랑을 한것 같아서 얼굴을 붉혔다.

《내가 어떻게 감히 함대사령관이 되겠소. 난 어뢰정이 좋소. 투사동지도 나더러 꼭 어뢰정정장이 되라고 했단 말이요.》

《그럼 나도 어뢰정을 타겠어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소.》

《그렇게 될수 있게 동무가 힘써주세요. 동무에겐 그럴 힘이 있어요.》

《그럼 어디 노력해보기요.》

성수가 나서 이런 얘기를 나누며 걷다나니 그들은 힘든줄도, 밤이 지새는줄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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