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재차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볼티모》호는 괴물처럼 신음소리를 지르며 불길과 연기에 휩싸인채 속도를 떨구고 맥없이 왼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마스트에서 펄럭이던 커다란 성조기도 화염에 구슬려서 데쳐낸 시래기마냥 축 늘어졌다.
내부격실들과 선수선미, 중갑판에서 아우성소리가 터져올랐다.
파공퇴치를 단념한 승무원들이 다투어 갑판으로 뛰쳐나왔다. 갑판에 있던 승무원들은 어쩔바를 몰라 쿵덩거리며 돌아갔다.
앞창을 들이받고 산산쪼각나 흩어진 유리쪼각들우에 어푸러진채 숨이 죽은듯 기척이 없던 잭슨함장이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구레나룻을 위엄있게 길렀던 그의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여서 보기에도 으쓸 몸서리가 쳐질 지경으로 끔찍했다.
코구멍과 량쪽귀구멍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어뢰가 폭발할 때 생긴 충격파로 귀고막이 터진 모양이였다.
《웨리크! 자네 어데 있나?》
자신심과 위엄을 졸지에 잃어버린 잭슨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두손을 허우적거렸다.
웨리크는 허리를 굽히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나 여기에 있소!》
잭슨은 가늘게 떨리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당부했다.
《모든걸 자네에게 맡기네. 난 통 앞이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도 않으니 어쩌는 수가 없구만.》
잭슨은 고개를 떨구었다.
《안심하십시오, 함장님.》
웨리크는 어푸러져있는 잭슨함장을 바로 눕혀주었다.
생사위기에 처한 이 급박한 정황에서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미해군의 기함으로 명성을 떨쳐온 《볼티모》호가 눈에도 들지 않는 소형어뢰정의 공격을 받고 침몰된다는건 너무도 어이가 없는 일이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된다. 침몰되면 미해군은 아니, 대아메리카는 이 수치를 두고두고 씻을수 없게 된다.
그는 자꾸만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몸의 균형을 가까스로 잡으며 전송관에 대고 소리쳤다.
《함은 침몰되지 않는다! 한명도 함에서 탈출하지 말라! 있는 수단을 다해서 파공을 막고 화재를 진압하라! 장교들은 명령에 불복하는자들을 즉시 쏴갈기고 바다에 처넣으라!》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듯 장교들이 권총을 빼들고 소래기를 지르며 공포를 탕! 탕 쏘아댔다.
갑판에 뛰쳐나왔던 승무원들은 물이 차오르는 내부구간으로 황급히 쫓겨들어갔다. 각자와 목침, 망치와 도끼를 비롯한 생활력투쟁기재로 파공을 막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겨끔내기로 울렸다. 각 구간에 설치되여있는 비상뽐프들이 돌아가며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반정신이 나간채 갑판에 쓰러졌던 토니를 비롯한 포수들도 불을 끄기 위해 부랴부랴 방화호스를 늘이였다.
웨리크는 함선구조에 달라붙은 승무원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려고 전축과 련결된 확성기스위치를 돌렸다.
마스트에 매달린 대형확성기와 내부구간들에 설치되여있는 방송에서 《해군행진곡》이 비장하게 울려나왔다.
웨리크는 눈을 비비고 포연과 화염에 잠긴 무시무시한 전장을 둘러보았다.
방금전에 《볼티모》호를 향해 어뢰를 발사한 어뢰정21호가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디에 갔을가? 그놈을 복수해야 할텐데…
두리번거리는데 원양구축함에서 급해맞은 함장의 비명이 날아왔다.
《아! 〈볼티모〉! 어뢰정이 우리 함을 공격한다.》
웨리크는 구축함쪽을 바라보았다.
자옥한 포연과 불길을 뚫고 어뢰정 한척이 마치 불사조마냥 날아가는게 언뜻 보였다.
《어뢰정을 타격하라!》
《볼티모》호의 선미갑판과 원양구축함의 선수갑판에 설치된 함상포들이 어뢰정21호를 노리고 황급히 포신을 돌렸다. 그런데 어뢰정과의 거리가 너무도 가까와서 조준을 할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중순양함과 구축함이 서로 때릴 내기를 할수 있었다. 포병장과 조준수들이 어찌할바를 몰라하는 사이에 어뢰정21호는 두 적함사이를 무사히 빠져나갔다.
《어디 죽어봐라! 양키놈들아!》
박원협은 포연에 더 거쉬여진 목청으로 쌍욕을 하면서 원양구축함의 선수갑판에서 갈팡질팡하는 적들에게 고사총련발사격을 퍼부었다.
김군옥은 적들의 시선이 21호정에 쏠린 틈을 타서 22호정에 어뢰돌격을 명령했다.
어뢰정의 속도를 최대로 올려 300메터계선까지 뚫고들어갔던 리완근정장은 두군데나 치명상을 입은 《볼티모》호의 선체중심에 대고 어뢰를 발사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타륜을 왼쪽으로 돌려 좌현25도로 변침했다. 이것은 지난 기간의 거듭되는 훈련을 통하여 익숙할대로 익숙해진 동작이였다. 이처럼 22호정은 기정과 반대방향으로 회두하며 자옥한 포연과 물보라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발사한 어뢰는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맹수의 멱을 노리는 풍산개처럼 파도를 헤가르며 쏜살같이 나가 이미 파공이 난 중순양함의 심장부를 재차 강타했다.
요란한 폭음, 번쩍이는 화광과 함께 《볼티모》호의 거대한 선체는 지진을 만난 섬처럼 진동했다. 승무원들이 악전고투하여 파공된 격실들을 페쇄하고 물을 퍼내던 구간이 다시 수메터 직경으로 펑 뚫어져 우현으로 관통되였다. 파공된 선체의 량쪽에서 바다물이 폭포치듯 소리치며 쓸어들었다. 혼비백산한 승조원들 대다수는 아우성을 칠 사이도 없이 사품치는 물속에 휘말려들었다.
다른 구간에 있던 승무원들은 경악하여 앞을 다투어 다시 갑판에 뛰쳐나갔다.
포좌지를 차지하고있던 승무원들은 어뢰가 폭발할 때의 강한 충격에 타박상을 입고 갑판에 굴러떨어졌다. 세찬 불길과 지독한 연기가 갑판과 사령탑을 휩쌌다. 중갑판에 설치되여있는 5련발어뢰발사관에도, 선미갑판의 량쪽에 렬을 지어놓은 폭뢰들에도 불이 펄펄 붙었다.
포탄고에도 불이다.
《볼티모》호는 언제 터질지 모를 거대한 폭탄으로 변했다.
함의 운명이 경각에 달했지만 승조원들은 제 목숨부터 살리겠다고 구명조끼함과 구명환에 달라붙었다. 먼저 구명조끼를 입겠다고 필사적으로 아귀다툼을 했다.
벌써 바다에 뛰여내리는 놈들도 있었다.
《개새끼들! 함과 생사를 함께 하는건 미해군의 전통이야! 함을 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도망을 쳐? 빨리 화재를 진압하라! 어뢰가 터질수 있다! 포탄이 터질수 있어! 어뢰를 쏴갈기라! 폭뢰를 다 바다에 떨구라! 어서!》
다행히도 수뢰장이 이 명령을 받아물고 용약 불길속에 뛰여들어가 어뢰를 발사했다. 5련발어뢰발사관에서 련속 발사된 어뢰는 목표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선미갑판에서도 폭뢰를 바다물에 마구 떨구었다. 큰 위험이 가셔진셈이다.
웨리크가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미처 떨구지 못한 불달린 폭뢰들이 요란한 폭음을 울리며 터져나갔다.
선미갑판에서 폭뢰를 떨구던 승무원들과 포좌지에서 뛰여내린 승무원들이 좌현중갑판으로 도망쳐왔다. 일순 바로 서려던 중순양함은 다시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야! 개새끼들! 밥통들아! 경사지는쪽에 몰켜서면 되는가? 우현으로 가라!》
승무원들은 목동의 채찍을 맞은 양무리처럼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자식들! 멍청히 서있지 말고 포탄상자와 전투예비품상자들을 다 꺼내서 바다에 처넣으라! 식품창고를 까고 술상자, 통졸임상자들도 빨리 내던지라! 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웨리크는 자꾸만 기울어지는 몸의 중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허둥거리다가 뒤로 벌렁 나가넘어졌다. 뒤통수가 바닥에 쾅 부딪쳤다. 타격이 얼마나 센지 눈알이 툭 튀여나가는것만 같았다. 무서운 아픔이 머리속을 징징 울렸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있다가 아픔이 좀 가라앉자 전송관을 붙잡고 비칠거리며 일어났다.
할수 있는껏 노력했지만 함은 이미 좌현으로 20도이상 기울어졌다.
무엇을 붙잡지 않고서는 지휘소에 서있기도 어렵게 되였다. 이런 지경에 처한 함을 구원한다는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였다.
《야! 통분하구나!》
웨리크는 피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하는수없이 탈출을 명령했다.
《구명뽀트를 내리우고 전원탈출할것!》
갈팡질팡하던 승무원들은 살판을 만난듯 급기야 활기를 띠면서 상갑판에 달려올라가 거기에 활차와 바줄로 고정시켜놓은 구명뽀트들을 내리우기 시작했다. 구명뽀트들이 수면에 떨어지자 저마다 타겠다고 밀치고닥치고 야단이였다.
그 꼬락서니를 보니 웨리크는 또 쌍욕이 터져나갔다.
《이 개자식들아! 네놈들에겐 상관도 없고 상급도 없나? 부상당한 함장을 먼저 구명뽀트에 태울것!》
지휘소 한쪽구석에 얼친듯이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부함장과 당직장교는 그 소리를 듣고 부시시 일어나더니 쓰러진채 기척이 없는 잭슨함장을 맞들고 나가려고 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던지 잭슨은 자기를 다치지 말라고 몸부림치며 소래기를 질러댔다.
《비켜! 난 함장이다! 함과 운명을 함께 하겠단 말이다!》
부함장이 자못 난처해진 기색으로 웨리크를 힐끔 돌아보더니 함장에게 사정했다.
《함장님, 그건 무의미한 죽음입니다. 어서 탈출합시다.》
잭슨은 두눈을 부릅뜨고 턱수염을 덜덜 떨며 웨쳤다.
《아니다! 너희들이나 목숨을 건지라. 그리고 미해군의 전체 장병들에게 말해주라. 그들의 뼈에 사무치게 말해주라. 이 못난 잭슨처럼 북조선해군을 우습게 알고 허장성세하다가는 참패를 당한다고 말이다. 아! 〈볼티모〉호가 이 신세가 되다니… 정말 절통하구나!》
주먹으로 지휘소바닥을 탕탕 치며 울부짖던 잭슨은 피를 토하며 고개를 구겨박았다. 실로 바라보기조차 스산한 광경이였다.
비감에 잠겨 말없이 잭슨함장을 주시하던 웨리크는 엉거주춤 굳어진채 자기의 눈치만 살피는 부함장과 당직장교에게 본인의 의사엔 관계없이 어서 함장을 데리고 탈출하라고 눈짓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자기에게 함께 탈출하자고 권하기를 은근히 바랐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경황이 없는지 그들은 함장을 맞들고 도망치듯 부리나케 지휘소에서 나갔다.
잭슨이 애용하던 파이프는 주인의 버림을 받고 바닥에 나딩굴었다.
둘러보니 조타수녀석은 언제 꼬리를 사렸는지 모르겠다.
《개새끼들! 비겁쟁이들! 갈테면 가라!
이 웨리크는 마지막까지 〈볼티모〉호와 운명을 함께 할것이다!》
그는 내심 이렇게 웨치며 무선통화기를 손에 쥐였다.
《원양구축함! 어뢰정21호를 추격하라!》
《알았다!》
《포탄을 다 쏴도 좋다! 그놈을 기어코 침몰시키라!
〈야이카〉! 어뢰정22호를 추격하라!》
어뢰정23호는 고사무력의 집중사격을 받고 이미 산산쪼각이 났다.
그러니 나머지 두척의 어뢰정만 때리면 된다. 이놈들을 격침시켜야지 그러지 못하면 미해군의 명성이 바다속에 처박히우게 된다.
오! 하느님, 도와주옵소서.
원양구축함은 어뢰정21호의 꼬리를 물고 속도를 내며 함포사격을 들이대고있었다. 경순양함은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어뢰정22호를 찾느라 크게 반원을 그리는중이다. 전투장엔 포연이 자옥해서 앞을 가려보기 어려웠다.
원양구축함을 뒤에 달고 위험한 유인기동을 하면서 김군옥은 자신만만하게 열정에 넘쳐 계속 전투를 지휘했다.
《22호, 중순양함은 끝장이 난거나 마찬가지다.
경순양함을 공격하라!》
《알았다!》
《볼티모》호에 어뢰를 명중시키고 신속히 빠져나왔던 어뢰정22호는 자기를 찾아서 갈팡질팡 돌아치는 경순양함을 향해 다시 돌격침로에 들어섰다.
리완근정장은 어뢰사격조준기로 적함을 겨누며 불을 뿜듯이 목청껏 웨쳤다.
《동무들! 위대한 장군님을 위하여 전속 앞으로!》
어뢰정22호는 불길과 포연속을 뚫고 동음을 높이 울리며 전속으로 내달렸다. 가증스러운 경순양함의 거대한 선체가 마주칠듯 눈앞에 다가왔다.
《발사!》
어뢰조준기로 적함을 겨누고 발사구령을 내린 리완근은 발사된 어뢰를 긴장하게 주시했다.
어뢰는 불과 연기가 출렁거리는 수면을 헤가르며 쏜살같이 나아간다. 급해맞은 경순양함은 급기야 속도를 내며 어뢰를 피하려고 했다.
어뢰는 경순양함의 선미에 명중되였다.
요란한 폭음이 울리고 물기둥이 솟구쳤다.
경순양함은 꼬리가 잘라진 맹수처럼 속도를 늦추고 꽁무니로 불길과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이제 어뢰를 한발만 더 명중시키면 꼼짝없이 침몰될텐데 벌써 어뢰 두발을 다 쏴버렸으니 그는 아쉽기 그지없었다.
정대장의 목소리가 수화구로 울려나왔다.
《새매 둘! 빨리 전장에서 탈출하라! 위험하다!》
《알았다!》
리완근은 그제서야 어뢰정을 돌려세웠다. 경순양함에서 쏘는 총포탄소나기가 날아왔다. 그는 어뢰정을 몰고 탄우속을 뚫고 전장을 재빨리 빠져나갔다. 22호정이 무사히 탈출하는것을 지켜보던 김군옥은 김도형정장의 어깨를 툭 쳤다.
《우리도 빨리 돌아서서 원양구축함을 때리자!》
《알았다!》
김도형정장은 약간 허리를 굽히고 타륜을 재빨리 돌리면서 소리쳤다.
《어뢰발사준비!》
선미갑판에 뛰여내려 좌현에 적재한 어뢰의 제동장치를 풀기에 앞서 정상상태를 확인하던 박원협은 그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뭔가?! 파편에 맞아 어뢰추진기가 뭉청 끊어져 날아갔던것이다. 하긴 그것도 다행인셈이다. 파편이 장약을 한 어뢰 앞부분이나 곁에 있는 연유탕크실을 쳤다면 어뢰정이 무사치 못할번 했다.
《지휘소! 어뢰고장!》
어뢰정을 날쌔게 한바퀴 잡아돌려서 추격해오는 원양구축함과 일직선상에 마주세운 김도형은 어뢰가 고장이라는 소리에 아연실색해졌다.
《뭐라구?!》
《파편에 추진기가 꺾어졌습니다.》
《젠장! 빌어먹을…》
김군옥은 악에 받쳐 박원협을 쏘아보는 김도형정장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도 어뢰공격을 하오!》
결국 선체육박을 하라는 명령이였다.
《알았다! 전속 앞으로!》
어뢰정21호는 원양구축함을 맞받아 물갈기를 날리며 내달렸다.
《연막을 칠것!》
박원협은 재빨리 연막장치의 변을 열었다.
화살처럼 나가던 낙지가 먹물을 확 뿜은듯이 검은 연기가 뿜어나와 어뢰정을 감쌌다.
어뢰발사직전에 연막을 친다는걸 모를리 없는 원양구축함 함장은 급해맞아서 변침을 명령했다.
원양구축함은 오른쪽으로 황급히 배머리를 돌리고 최대속도로 도망을 쳤다. 어찌도 빠른지 어뢰정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그 꼬락서니를 지켜보던 웨리크는 억이 막혔다.
《구축함! 구축함!》
구축함에선 응답조차 하지 않았다.
《이 개자식아! 비겁쟁이야! 도망치지 말고 돌아서서 어뢰정21호를 때리라! 격침시키란 말이다!》
구축함에 대고 주먹질을 하며 목이 쉬도록 고함을 지르던 그는 갑자기 반신불수라도 된듯이 몸의 균형을 잃고 모짜로 나자빠졌다. 머리에 재차 심한 타박을 받아서 정신이 아찔했다. 일어나려고 모지름을 썼지만 선체가 너무 기울어서 바로 설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일어서던 그는 비칠거리다가 이마로 타륜을 들이받으며 꼬꾸라졌다.
리성을 잃은 광증이 꺼지자 무시무시한 공포가 전신을 휩쓸었다.
그는 침몰을 앞둔 중순양함의 기본지휘소에 자기가 어째서 홀로 남았는지 알수 없었다.
해상전투도중에 함이 침몰의 위기를 면치 못하게 되는 경우 함과 끝까지 운명을 함께 해야 할 사람은 함장이다. 그런데 내가 무엇때문에 잭슨함장을 대신하여 《볼티모》호와 함께 본국에서 수천마일이나 멀리 떨어진 여기 조선동해에 수장되여야 한단 말인가?
급작스레 전신이 와들와들 떨렸다.
그런즉 《볼티모》호가 침몰된단 말이지. 어쩌면 이럴수가 있나? 이게 악몽이 아닐가?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는다. 난 믿을수가 없어! 대아메리카의 상징이자 미해군의 상징인 《볼티모》호가 경순양함과 원양구축함까지 거느리고도 불과 네척밖에 안되는 북조선해군 어뢰정들과의 싸움에서 여지없이 대패하다니… 정녕 통탄할 일이 아닐수 없구나!
문득 절망에 빠진 그의 눈앞에는 견장을 뗀 해군장교복차림의 로회하게 생겨먹은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 사나이인즉 언젠가 자기 잠수함의 수로안내를 해준적이 있는 패전당한 일본의 소해함함장 시마무라였다.
력대 해군명장들가운데서 처음으로 조선사람인 리순신을 꼽던 그의 목소리가 귀전에 쟁쟁 되살아났다. 유명한 《셔먼》호사건도 상기시켜주던 그의 목소리가…
《김일성장군의 령도를 받기때문에 북조선은 빠른 기간에 강력한 해군함대를 창설할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칫하면 당신들은 〈셔먼〉호의 신세가 될수도 있는거지요.》
혹시 저 어뢰정에 김일성장군이 타고있는게 아닐가? 그렇지. 모름지기 김일성장군이 어뢰정대에 명령을 내렸을것이다. 우리 기동분함대를 타격하라고… 빨찌산으로 백만관동군과 맞서싸워 이긴 장군만이 어뢰정대로 기동분함대를 공격하라는 대담무쌍한 명령을 내릴수 있는것이다.
정녕 조선은 무서운 나라다. 근 백년전에는 포함외교로 문호개방을 해보려던 《셔먼》호가 불타서 대동강에 수장됐다면 오늘은 조선전쟁의 앞장에 섰던 《볼티모》호가 불타서 조선동해에 침몰되고있지 않는가. 이것은 피할수 없는 미국의 운명인것 같구나.
어푸러진채 통탄하여 마지않던 웨리크는 생에 대한 급증하는 애착에 떠밀려 이를 악물고 일어나 비칠거리며 지휘소를 나섰다.
상갑판과 하갑판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여기저기에 피가 랑자하고 시체들이 나딩굴었다. 골수가 터져나왔는지 허옇고 흐들흐들한것과 살점들이 매닥질된 갑판은 미끄러워서 발을 제대로 옮겨디딜수가 없었다. 동료들의 시체를 마구 짓밟으면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승무원들이 여기저기서 헤덤벼치고있었다. 모두들 침몰의 위기에 처한 함에서 빨리 탈출하여 목숨을 건질 오로지 그 욕망에 불타서 발악적으로 날뛰는것이였다.
도처에서 화염이, 열풍이 몰아쳐서 숨을 쉴수가 없었다. 살 타는 냄새와 피비린내가 역하게 풍겼다.
이대로 몇분만 서있다가는 질식되든가 미쳐버릴것만 같았다.
말그대로 아비규환의 생지옥인 상갑판과 중갑판을 거쳐 하갑판에 내려온 웨리크는 구토감을 참으며 무작정 바다물에 뛰여들려다가 무춤 굳어졌다. 구명조끼를 입지 못한 자신을 뒤늦게야 발견한것이였다. 그는 광기어린 두눈을 사납게 희번득거리며 사위를 둘러보았다.
목숨을 건지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승무원들은 구명조끼나 항해복을 입은것도 부족해서 구명환을 메거나 구명띠를 몸에 두르고 다투어 바다물에 뛰여들고있었다. 구명수단을 갖추지 못하고 바다물에 뛰여든 작자들은 파도에 삼키웠다가 가까스로 머리를 추켜들고 손을 내밀며 구원을 청했다. 갑판에서도 바다에서도 울부짖음이 터져올랐다. 온통 아우성이였다.
웨리크는 구명수단을 찾느라 숨이 졌거나 부상당한 승무원들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웬놈이 구명복을 입고서도 구명환을 어깨에 멘채로 나자빠져있었다. 구명환을 벗기려고 다가가던 그는 경악을 했다.
고사총탄에 면상을 주어맞고 피투성이가 된 젊은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불티모출신의 장탄수 토니였던것이다. 벌써 숨이 끊어졌는지 토니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굳어져있었다. 웨리크는 눈을 꾹 감고 그의 몸에서 구명환을 벗겨냈다. 구명환에 머리와 한쪽 팔을 꿰면서 허겁지겁 현측으로 달려간 그는 몸서리를 치며 굳어졌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도 처참하고 무시무시했다.
주문진해상은 활활 불타면서 썰썰 끓고있는 커다란 지옥의 기름가마를 련상시켰다.
파도가 아니라 불이 이글거렸고 출렁거렸다. 불타는 시체들과 포탄상자들, 식료품상자와 지함들, 구명환과 구명띠들이 이리저리 밀리우며 선체에 부딪쳤다. 배기름과 뼁끼가 타는 냄새, 살이 타고 피가 타는 냄새가 짙은 연기에 뒤섞여 지독하게 코를 찔렀다. 흥떡이는 불바다우에서 무주고혼이 된 미해군장병들의 시체가 미친듯이 춤을 추는것만 같았다.
그 광경을 보니 웨리크는 전신이 와들와들 떨렸다. 갑판에 그냥 서있을수도 없고 그렇다고 불바다에 뛰여들 용기도 나지 않아 망설이는데 별안간 요란한 폭음이 련이어 울렸다.
이건 뭔가? 또 어뢰에 맞았는가?
그것은 미처 바다에 내던지지 못한 포탄들이 다투어 터지는 소리였다. 불속에서 달대로 달아오른 포탄들은 더는 견디여낼수 없었던지 아우성치듯 작렬했다. 폭음에 절반이나 바다에 잠긴 선체가 진동했다.
불길과 연기에 휩싸인 중순양함은 위엄있던 자태를 이미 잃어버리고 커다란 파철더미로, 불무지로 변했다.
마스트에 매달렸던 성조기는 형체도 없이 불타버렸는데 확성기에서는 《해군행진곡》이 계속 울려나오고있었다.
주여! 보살펴주소서!
나의 령혼 천당에 갈수 있게
세찬 파도여 나를 도와주렴
나의 주검 바다깊이 수장해다오
그것은 씩씩한 행진곡이 아니라 비통한 장송곡이였다.
조선전쟁에 참가하려고 사세보항을 떠날 때 잭슨함장의 선창에 따라 씩씩하게 《내리워지지 않는 성조기》를 합창했던 승무원들 대다수가 그 장송곡을 들으며 불바다밑으로 깊이깊이 가라앉고있었다.
문득 웨리크의 눈앞에는 이 시각 저 멀리 미국의 아늑한 해안도시 자기 집 서재에서 《태평양전쟁사》를 집필하고있을 니미쯔의 모습이 떠올랐다.
세계제패의 명성을 떨친 미해군이 여기 조선동해의 연안에 기여들었다가 수치스러운 패배를 당한줄 니미쯔는 알기나 하는지?
《주여, 보살펴주소서!》
웨리크는 두눈을 감고 두손을 합장한채 무시무시한 불바다에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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