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한백천의 견해에 의하면 홍동철기지장은 설사 폭풍이 불고 바다가 뒤번져진대도 끄떡하지 않는 성미였다. 그처럼 대범하고 침착하고 여유작작했으며 웬간해서는 절대로 흥분하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전에 기지로 돌아온 그는 한백천의 사업보고를 받으면서 진정을 못하고 구두발소리를 내며 성급히 해도탁주위를 감돌았다.
(웬일일가?)
한백천은 기지장이 자기의 보고를 귀등으로 들으면서 다른 생각에 몰두했음을 알아차리자 그만 입을 다물었다.
문득 멈춰선 홍동철은 작전과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 동무는 어떻게 생각하오?》
가뜩이나 어리둥절했던 한백천은 느닷없는 그 질문에 아연해지고말았다.
《예?!》
《우리가 적들의 기동분함대를 까부실수 있을가?》
한백천은 두눈을 크게 뜨고 기지장을 멍하니 마주보기만 했다.
우리란 결국 어뢰정 네척에 불과했다.
홍동철은 작전과장의 심정을 알고도 남았다.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고있었기에… 하지만 지금은 할수 있는가 없는가를 론할 때가 아니였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친히 명령을 내리셨으니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적기동분함대를 무조건 까부셔야 했다.
《적정통보에 의하면 적기동분함대는 삼척―강릉앞해상을 순회하며 함포사격을 하다가 밤이면 묵호항앞에 있는 묘박지에 들어와 닻을 떨군다고 하오. 야밤에 묘박지를 들이치면 어떨것 같소?》
깊이 생각해보던 한백천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건 승산이 있습니다.》
《나는 해군사령관동지와 그런 방향에서 작전을 수립하자고 의논을 했소. 어디 구체적으로 작전을 세워봅시다.》
그들이 한창 작전을 세우는데 어뢰정대장과 문화부정대장이 숨이 턱에 닿아 헐떡거리며 들어섰다.
두 군관의 땀에 젖은 상기된 얼굴과 번쩍거리는 눈동자에는 전투에 대한 갈망이 너무도 적라라하게 비껴있었다.
홍동철은 그들이 전투임무를 받게 될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겠는가를 절감하면서 먼저 적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나서 쿡 찌르듯이 물었다.
《어뢰정대가 단독으로 미제침략군 기동분함대와 맞서 싸울수 있겠소?》
그러지 않아도 몸이 달았던 김군옥은 불쑥 한걸음 나서며 즉시 대답했다.
《예, 명령만 내리십시오!》
홍동철은 우정 미타한듯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승산이 있는가 말이요?》
《예, 기어이 이기겠습니다!》
홍동철은 문화부정대장을 돌아보았다.
리학섭은 거무틱틱한 얼굴에 여유작작한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나 확신에 넘친 목소리로 말했다.
《기지장동지, 우린 적 대형함선집단과 싸워이기기 위해 지금껏 준비해왔습니다. 어서 명령을 내리십시오.》
순간 홍동철은 가슴을 찌르는 자책감과 후회에 휩싸였다.
위대한 장군님께 나는 어째서 이들처럼 승리의 신심에 넘친 대답을 올리지 못했던가.
여태 자기의 머리속에서 맴돌던 의문이 이제야 풀리는것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해상전투에 앞서 하신 승리에 대한 확신은 바로 이들에 대한 크나큰 믿음에 기초한것이였구나!
홍동철은 자기의 가슴이 급작스레 넓어지는듯 한 감을 느끼며 자신만만하게 지시봉을 쥐고 해도탁에 다가섰다.
야밤에 적기동분함대의 묘박지를 기습하기 위한 작전토의는 진지하게 진행되여 한시간후에 일단락 끝났다.
작전수역이 멀리 남쪽에 있기때문에 어뢰정대는 먼저 속초항으로 은밀히 이동하기로 했다. 속초항에서 연유와 물을 보충하고 7월 2일 0시에 기동하면 제일로 어둠이 짙은 새벽 4시경에 적기동분함대의 묘박지에 이르게 된다.
작전의 승패여부는 어뢰정대가 어떻게 신속히 기동하며 은밀성을 보장하는가에 많이 달려있었다. 속초항에 도착할 때까지는 이 작전에 대하여 정대원들에게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홍동철은 임무가 중대하니만치 작전과장과 함께 어뢰정대에 승선하여 속초항에 가서 그때의 정황을 고려하여 작전안을 최종검토해주기로 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번 해상전투가 력량상 비할바없이 우세한 적들과의 대결인것만큼 승조원들이 결사의 각오와 승리의 신심을 가지도록 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원쑤와의 결사전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한 사상동원사업을 잘하라고 각별히 당부하시였소.》
리학섭은 가슴을 들먹이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바로 동무들속에서 공화국의 첫 영웅이 나오기를 바란다고 하시였소.》
가뜩이나 격동되였던 김군옥은 너무도 벅찬 흥분에 가슴이 파도치듯 설레여서 숨조차 바로 쉬기 어려웠다.
영웅! 공화국의 첫 영웅!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우리 어뢰정대에서 공화국의 첫 영웅이 나오기를 바라신다는것은 이번 해상전투에서 우리가 반드시 이기리라는 확신에 기초한것이 아니겠는가, 장군님께서는 우리를 이처럼 믿고계신다, 우리를 믿으시고 친히 전투명령을 내리시였다, 그이께서 몸소 그어주시고 지켜보시는 승리의 항로따라 어뢰정대는 쏜살같이 달려가 미제침략선을 수장시키는 멸적의 폭음을 높이 울리리라! 하여 신성한 우리 령해에 감히 기여든 침략의 무리를 조선의 해병들이 어떻게 쳐부시는가를 온 세상에 똑똑히 보여주리라!
위대한 장군님의 슬하에서 자라나 그이의 명령을 받고 싸우는 조선의 해병이 된 긍지와 자부심이 그들의 가슴속에 차고넘쳤다.
홍동철은 팔소매를 걷어올렸다. 손목시계를 보니 밤 9시였다.
《앓는 동무는 없소?》
《없습니다. 담당준의동무가 오늘도 건강검진을 했는데 모두 정상입니다.》
《그럼 돌아가서 항해준비를 하시오. 한시간후에 출항합시다.》
두 군관은 반달음쳐서 가설잔교로 돌아갔다.
벌써 기미를 차린 정대원들이 항해용식품과 의약품들까지 다 실어서 고정시켜놓고 각기 자기의 전투초소를 차지하고있었다. 이처럼 항해준비에 만전을 기하고있어 구태여 더 손을 댈게 없었다.
김군옥은 사뭇 긴장해서 자기를 지켜보는 정대원들에게 우선 속초항으로 이동한 다음 거기서 전투명령을 받게 된다고 알려주었다.
《출항시간은 밤 10시요.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눈을 붙여도 되겠소.》
그는 간단히 지시를 주고 자기의 잠자리인 선수갑판으로 가려고 했다. 문화부정대장이 그의 옷자락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왜 그럽니까?》
리학섭은 긴숨을 들이쉬고나서 흥분을 가까스로 누르며 모두에게 말했다.
《당원동무들은 당원증을 바치시오.》
순간 모두들 전신을 쩌르르 울려주는 비장하고 엄숙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당원증을 바치라! 이것은 살아서 돌아올수 없는 만약의 경우를 예상한 요구였다.
그렇다! 우리는 만약이 아니라 십중팔구 기지로 돌아올수 없게 된다.
느닷없이 갈마드는 이런 생각에 지금껏 언제나 각오하고있던 죽음앞에 바싹 다가선듯 한 느낌이 들었다. 신경이 힘껏 당긴 활시위처럼 팽팽해졌다.
김군옥은 마음을 진정시키노라 숨을 길게 들이쉬고나서 먼저 품속에서 당원증을 꺼내 바쳤다.
그러고나니 자기가 방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것 같았다. 바친 당원증과 함께 자기의 운명은 조국의 운명에 합쳐진듯싶었다. 쿵쿵 울리는 심장의 고동소리조차 더 힘있고 엄숙해진것처럼 느껴진다.
리학섭은 당원증을 다 받아 함에 넣고나서 조용히 권고했다.
《고향에 편지를 쓸 동무들은 건국실에 가시오.
거기에 편지지와 철필이 있습니다. 편지를 다 쓰면 자기 책상우에 놓아두십시오. 그리고…》
리학섭은 정대장에게 의논조로 물었다.
《가족군관동무들은 집에 잠간 다녀오게 해야 하지 않을가요?》
김군옥은 문화부정대장의 섬세한 마음에 감동되면서 자책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여태 벼르고벼르어오던 싸움을 앞두고 거기에 온 정신이 쏠려 다른 일에는 관심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문화부정대장은 싸움에 앞서 정대원들의 생활과 감정에 이처럼 육친적인 관심을 돌리고있었다.
이런 정치일군이 곁에 있으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렇게 합시다. 가족이 있는 군관동무들은 얼른 집에 가서 작별인사를 하고오시오.》
가족이 있는 군관이래야 리완근정장과 두명의 기관장뿐이다. 문화부정대장도 장가를 갔지만 아직 가족들을 여기에 데려오지 못했다.
가족을 가진 군관들은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았다.
《22호정장동무, 왜 그러고있소? 어서 집에 갔다오시오.》
독촉을 받은 리완근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전쟁이 터진 그날에 이미 안해와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두 기관장도 같은 소리를 했다.
김군옥은 구태여 더 권고하지 않았다.
《그럼 출항하기 전에 눈이나 좀 붙이시오.》
몹시 흥분된 그는 잠자기를 아예 단념하고 가설잔교에서 내렸다.
바다는 잠든듯이 고요해졌다. 배전을 치는 물결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판가리결전이 벌어질 전투항해를 앞두고 단잠에 든 해병들이 깨여날세라 숨을 죽인듯싶었다. 그는 어둠에 잠긴 바다기슭을 천천히 거닐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흥분되고 격동되여 자신을 다잡기 어려웠다. 이제 출항하면 이 정든 군항으로 돌아오지 못할수도 있었다. 추억의 발자국이 세일수 없게 찍혀진 이 기슭을 더는 걸어보지 못할수도 있고… 그러기에 누구와 모래불에 나란히 앉아 속을 툭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고싶었다.
문화부정대장이 고향에 편지를 쓰라고 했었지.
결사의 각오를 안고 전투항해길에 오르게 된 이 시각 나는 누구에게 흥분된 이 심정을 터놓아야 하는가? 내가 설사 편지를 써도 고향엔 그것을 반갑게 받아줄 일가친척이 없다.
자기를 참된 길로 손잡아 이끌어준 항일투사들의 미더운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오토바이기관의 동음을 요란하게 울리며 제법 배머리를 추켜들고 달리는 전마선, 기관총을 설치한 배머리에 서서 불어치는 해풍에 옷자락을 날리며 칭찬을 아끼지 않던 김성국의 목소리가 귀에 되살아난다.
《좋소! 아주 좋소. 신통히도 어뢰정같구만.
동문 어뢰정정장감이야. 수상보안간부학교에 가서 어뢰정을 배우게. 어뢰정을 타야 싸움판에서 한몫 할수 있소.》
김성국이 자기를 수상보안간부학교에 보내주었다면 조정철은 정신적인 량식을 안겨주고 충성의 항로를 내달릴수 있게 생의 좌표를 그어주었다.
원항해타격훈련을 위해 청진기지에 갔을 때 그가 간곡히 하던 당부도 귀전에 되살아났다.
《어뢰정대는 인민해군을 대표하는 중요한 전투구분대요. 그래서 당에서는 중앙당학교를 나온 일군을 문화부정대장으로 보내준거요. 정대의 쌍기둥인 동무들이 합심을 하고 협력을 해야 정대원들을 펄펄 나는 싸움군으로 키워낼수 있소.
그래야 일단 유사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그 어떤 대적과 싸워도 이길수 있단 말이요.》
그 당부를 명심했기에 나는 훈련일면에만 치우치고 문화사업을 등한히 하던 결함을 고치고 문화부정대장과 손잡고 해병들의 마음을 이끌수 있게 되였지.
김광민교장과 채정보부교장의 모습도 떠오른다.
수상보안간부학교와 해군군관학교시절의 보람찬 나날들이 이밤따라 소중한 추억을 불러주며 의미깊고 친근하게 되새겨진다. 하기에 고향이 아니라 자기의 참된 삶이 시작된 해군군관학교에, 스승들과 동창생들에게 편지를 써보내고싶었다.
동창생들가운데서 선참으로 떠오르는건 몇달전 남포기지의 어느 한 해안포구분대로 조동된 리대훈이다.
대바르고 결패가 있어 마음에 들었던 친구다.
그가 원항해타격훈련에서 성과를 거둔 우리 어뢰정대를 축하해주려고 절군 고래고기를 목통으로 두개나 가지고왔었지, 참 좋은 친구야, 지금 아마 남포앞바다에 기여드는 적함들을 해안포로 통쾌하게 까부시고있을테지.
뒤이어 눈앞에 떠오르는것은 해군지휘관으로 자라던 못 잊을 학창시절에 자기와 늘 앞자리를 다투던 고준무의 담차고 영악스런 모습이였다.
그가 지휘하는 소포정대는 포탄수송임무를 받고 출항한지 사흘이 되여오건만 왜서인지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혹시 항해도중에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겨 지체되는게 아닐가?
고준무는 수상보안간부학교에 입학한 초기 멋없이 우쭐해서 남들을 눈아래로 보면서 이래라저래라 훈시질을 하기 좋아해서 환영을 받지 못했지, 더우기 일부 교원들의 그릇된 주장에 추종하다가 경을 친적도 있었어, 그래서 나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지, 하지만 대담하게 자신을 뉘우치고 유능한 해군지휘관이 되기 위해 전심전력했지, 오늘까지도 변하지 않은건 남에게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그 승벽심이야.
김군옥은 고준무를 만나 수영을 하든 수구를 하든 팔씨름을 하든 마지막으로 승벽내기를 한번만 더해보고싶었다.
모든 면에서 단연 앞자리를 차지하려는 열정적이고 야심만만한 친구를 곁에 둔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런 상대가 곁에 있어야 노상 분발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교실에서 그와 대판 싸우고 처벌로동을 한것조차 이 순간에 즐겁게 돌이켜졌다.
그러나 원항해타격훈련이 진행된 이후 자기가 그를 몹시 노엽힌적이 있는데 그것이 속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마침 그날은 하기훈련에 진입하는 첫날이라 군관가족들이 떨쳐나와 요란하게 특식을 차렸다. 어뢰정대는 오늘부터 소포정에 승선하여 항해훈련을 하게 되여있어 모두들 더욱 신바람이 났다. 아침식사를 한 어뢰정대는 해군행진곡을 목청껏 부르며 발맞춰 씩씩하게 소포정들이 계류해있는 부두로 갔다.
갑판에 나와있던 소포정대원들은 그들을 보자 괴로운 표정을 짓더니 슬며시 내부구간으로 들어가버렸다. 주인들이 반갑게 맞아주지 않으니 어뢰정대원들은 거북하고 어색해서 부두에 덤덤히 서있었다. 김군옥도 마찬가지였다.
소포정11호의 사령탑에서 모욕이나 당한듯이 시펄뚱한 기색으로 김군옥을 흘겨보던 고준무는 상대방이 정작 갑판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쭈빗거리는걸 보자 버럭 역정을 썼다.
《젠장! 눈치를 보긴… 왔으면 어서 승선하라구!》
김군옥은 미안해서 차마 그를 마주보지도 못했다. 자기가 너무했다고 생각되였는지 고준무는 애써 언성을 낮추었다.
《자! 어서 배에 오르라구.》
《고맙네.》
《고맙기까지야… 어쩔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부탁이 있네. 동무도 아다싶이 우린 함선도장을 한지 열흘도 안됐네. 그러니 색감이 벗겨지거나 어지러워지지 않게 될수록 주의해주게.》
김군옥은 가슴이 뭉클했고 코허리가 시큰했다.
고준무와 소포정대원들은 자기들의 함선을 이처럼 제 살점과도 같이, 눈동자와도 같이 아끼고 사랑하고있었던것이다.
김군옥은 자책을 금할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어뢰정을 탄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함선들은 하찮게 여겨왔지, 확실히 나는 겸손치 못하고 허심하지도 못하며 우쭐해서 자신을 과신하기 좋아하지, 그래서 고준무와 공연히 성격을 살리고 티각태각한거야, 이제라도 그 친구를 만나 머리를 숙이고 용서를 빌었으면 좋으련만…
고준무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기다렸던듯 그 처녀, 김정인의 억세고 아름다운 모습이 보름달처럼 둥실 떠올랐다. 어둡던 바다기슭이 갑자기 밝아진것처럼 느껴졌다. 바다도 흥분을 눅잦히노라 모지름을 쓰는듯싶었다. 넘실넘실 소리도 없이 잔뜩 부풀어올랐다가는 거품인양 푹 꺼져내리고 잠시후 다시 부풀어오르고…
불시에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군의소에 달려가 그 처녀를 만나고싶었다. 나에겐 동무밖에 없다고, 이 세상 수많은 처녀들중에서 동무가 제일로 아름답다고 열정적으로 속삭이고싶었다. 하지만 완강한 의지로 자신을 억제했다.
정인이가 원산기지에 갓 조동되여왔을 때 군의소에 찾아갔다가 그만 자기가 집행해야 할 상학시간을 지키지 못한 일이 생각났다.
이제 군의소에 찾아갔다가 피치 못할 일로 출항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어이하랴, 이것은 전쟁전 상학시간을 지키지 못한것과는 다른 문제다, 지금은 전쟁시기다, 오로지 싸움할 생각만을 해야 한다, 출항준비상태를 다시한번 검열해보자.
잔교에 오르려던 그는 인기척이 나서 돌아섰다.
어둠속의 모래불에 누군가 서있었다. 소독수냄새가 아카시아꽃향기처럼 은은히 풍겨온다. 구태여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만 했다. 그 처녀, 정인이였다.
《전투임무를 받았지요?》
몹시 흥분된 처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김군옥은 되물었다.
《누가 그럽디까?》
《제 예감이 그래요.》
김군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는 설레이던 가슴이 진정되며 따스해짐을 느꼈다.
이 처녀를 만나고싶었다. 속을 툭 터놓고 열정적으로 속삭이고싶었다, 나는 동무를 사랑한다고… 그런데 정작 만나니 할말이 없다. 하기야 영원한 작별이 될는지 모를 이 시각에 구태여 그런 말을 해선 무엇하리.
김정인은 단호히 말했다.
《정대장동무, 저두 함께 가겠어요.》
김군옥의 가슴에는 행복감이 그들먹이 차올랐다.
세상엔 수많은 청춘남녀가 있다. 그들은 쌍쌍이 사랑을 속삭인다.
개중엔 싸움터로 떠나는 총각을 눈물로 배웅해주는 처녀들도 적지 않으리라. 그러나 생사를 기약할수 없는 싸움터에 함께 가자고 서슴없이 따라서는 처녀는 몇이나 될가? 정인이, 동무말고 또 있을가?
김군옥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되오.》
총각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처녀의 눈동자가 어둠속에서도 별빛인양 반짝이였다.
《우린 다시 만나지 못할수도 있잖나요. 난 헤여지고싶지 않아요.》
김군옥은 여유있는 미소를 지었다.
《무슨 소릴 하는거요? 난 꼭 돌아오겠소. 그때 우리가 던지는 계류바줄을 정인동무가 받아주길 바라오.》
더는 말이 없었다. 바다도 숨을 죽인듯 고요했다. 쿵! 쿵! 두 심장이 높뛰는 소리만 들릴뿐…
밤하늘에서는 별들이 아름답게 반짝이였다.
문득 어뢰정들의 갑판우에서 부산스런 소리가 나더니 김도형정장의 부름소리가 울려왔다.
《정대장동지!》
꼼짝없이 서있던 김군옥은 펀뜩 정신이 들어 얼른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그야말로 쏜살같이 흘러서 벌써 10분전 10시였다.
《자, 그럼…》
그는 가설잔교를 향해 날듯이 달려갔다.
김정인은 정신조차 혼미해져서 잠시 그대로 숨죽이고 서있었다. 마치도 자기가 한낮의 따스해진 바다물에 고요히 잠겨있는것 같기도 하고 달콤한 꿈을 꾸는것 같기도 했다.
가설잔교에 계류한 어뢰정들의 갑판우에서 불빛들이 반짝거리더니 보조기관들이 고르로운 동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정대장과 정장들의 구령소리와 해병들의 복창소리, 갑판을 구르며 달려가는 소리,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는 모두었던 숨을 호 내쉬고나서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으로 찬찬히 비다듬고 군복매무시도 바로잡고나서 천천히 잔교에 올라갔다.
《너 정인이 아니냐?》
잔교우에 작전과장과 함께 서있던 홍동철은 어둠속에서 불쑥 나타난 처제를 보자 놀라와했다.
《어떻게 왔니?》
김정인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저씨의 질문이 저으기 고까왔다.
내가 어뢰정대 담당준의라는걸 아저씨는 모른단 말인가? 알면서야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수가 있어?
처제의 토라진 속마음을 뒤미처 헤아려본 홍동철은 우정 소리내여 허허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손으로 이마를 툭쳤다.
이것 봐라! 정인이를 보니 생각나는군, 내가 아직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지, 하마트면 까먹고 그냥 바다에 나갈번 했군, 이거 어쩐다?!
《여보, 작전과장동무.》
《예.》
《거 부르기 좋고 뜻도 깊은 이름을 하나 제꺽 지어주구려.》
그야말로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부탁이라 한백천은 어정쩡해졌다.
《내 갓 낳은 아들에게 아직 이름을 지어주지 못해서 그러오. 빨리 생각해내라니까.》
한백천은 저으기 급해맞았다.
《이거 갑자기 좋은 이름이 생각날수가 있습니까. 좀 궁리해봅시다.》
《시간이 없소. 7분후엔 출항이야!》
21호정의 사령탑에서 정장들로부터 출항준비정형을 보고받던 김군옥이 잔교쪽에 대고 큰소리로 웨쳤다.
《기지장동지! 걱정마십시오. 아들이름은 우리가 벌써 지었습니다.》
홍동철은 이게 웬 떡이냐? 하듯이 그쪽을 얼른 바라보았다.
《뭐라고 지었나?》
김군옥은 그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김정인이 얼른 귀띔을 해주었다.
《홍해남이라고 지었어요.》
그런즉 바다사내란 뜻이다. 홍동철은 즉시 쌍수를 들어 찬성했다.
《좋다! 어서 가서 언니에게 알려주거라.》
《아니, 아저씨도 어뢰정대와 함께 가세요?》
홍동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어뢰정21호의 선수갑판에 뛰여올랐다.
한백천도 뒤를 따랐다.
쾅! 꽈르릉―
21호정의 주기관이 선참으로 폭음을 울렸다.
이에 호응하여 세척의 대렬정들도 별안간 선체를 푸들푸들 떨면서 다투어 요란하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꽈릉! 꽈릉! 하는 소리가 따웅! 따웅! 하고 울부짖는 호랑이의 노성처럼 울렸다. 도래굽이에 차분히 깃들었던 정적은 순간에 산산쪼각이 났다. 후끈하고 매캐한 배기가스가 어뢰정들의 꽁무니에서 삼단같이 뿜어나와 삽시에 가설잔교와 모래불을 휩쌌다.
정인에게는 숨이 턱턱 막힐것 같이 역한 배기가스냄새가 오늘따라 구수하게만 느껴졌다. 배기가스에 쏘여 눈물이 나왔지만 처녀는 삼단같이 자옥한 연기속에 그냥 지켜서서 어뢰정들의 출항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짙은 배기가스속에서 호각소리, 구령소리, 복창소리가 씩씩하게 울렸다.
《선수바줄 올렷!》
졸지에 가설잔교에 홀로 남은 김정인은 부랴부랴 계류바줄의 올가미를 벗겨 힘껏 던져주었다.
《선미바줄 올렷!》
김정인은 그쪽으로 얼른 달려가 선미바줄의 올가미도 벗겨주었다.
《삿대 밀엇! 미속으로 전진!》
고속기관들이 더 용을 쓰니 어뢰정들의 꽁무니에서 세찬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추진기가 돌면서 바다물을 힘껏 비틀어 차던지는것이다.
반작용으로 어뢰정들은 씽하니 앞으로 달려나갔다.
김정인은 가설잔교끝에 서서 어둠속 저 멀리로 사라져가는 어뢰정들의 동음에 이윽토록 귀를 기울이였다. 뜨거운 눈물에 가리워 어뢰정들의 사령탑에서 반짝이는 불빛이 천만갈래로 부서졌다.
《동무들! 꼭 승리하고 돌아오세요.》
처녀는 마음속으로 절절히 당부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기다리겠어요.》
짙은 배기가스는 사라지고 청신한 해풍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못박힌듯 서서 어뢰정대가 사라진쪽을 지켜보던 처녀는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섰다. 모래불의 어둠속에 여러 사람이 서있는게 어슴푸레 눈에 띄였다. 그는 서둘러 잔교에서 내려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어린애를 안고 나온 언니와 군관가족들이였다.
마음을 언제나 남편들의 전투함정에 싣고 사는 녀인들은 방금전 군항을 통채로 뒤흔들며 요란하게 울린 어뢰정들의 동음을 듣고 잠자리에서 뛰쳐나 허둥지둥 달려나온 참이였다. 야속하게도 어뢰정대는 이미 출항하고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로 사라져가는 고속기관의 동음만 알릴듯말듯 울려올뿐…
《언니, 아저씨도 함께 갔어요.》
정녀는 의례히 그럴줄 알았던지라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아기의 이름은 해남이라고 지었어요.》
정인은 차거운 바다바람을 맞을세라 포단과 머리수건으로 꽁꽁 감싼 조카애를 소중히 받아안았다. 어뢰정의 지독한 배기가스냄새와 너무도 대조되는 달콤한 젖냄새가 몰몰 풍기며 코끝을 간지럽힌다. 불시에 목이 꽉 메였다.
《해남아! 요 귀염둥이야! 네 아버지는 용감한 어뢰정대원들과 함께 미제침략선을 까부시는 싸움터로 떠나가셨단다. 너의 요람을 지키기 위해, 너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서늘한 해풍이 불어왔다.
녀인들은 이젠 거의나 들리지 않는 어뢰정들의 동음에 그냥 귀를 기울인채 오래도록 움직일줄 몰랐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