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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이 나가자 잠시 못박힌듯 서있던 학생들은 저으기 멋적은 기색으로 입을 다시며 맥없이 털썩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눈앞에서 폭음을 울리고 화약내를 풍기며 떠돌던 항공모함과 순양함을 비롯한 전투함정들의 모습은 신기루인양 홀연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실습선은 고사하고 교육용배기관이나 함상포조차 없는 학교의 실정이 별스레 아프게 눈을 자극하는것이였다. 생각해볼수록 허전했고 그래서 주눅이 들었다.
김군옥은 하도 속이 상한김에 저도 모르게 주먹으로 책상을 힘껏 내리쳤다.
《젠장! 그러니까 우린 여기에 쭈그리고앉아서 아무리 골싸매고 공부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거지?》
《결국은 그 소리지요.》
채기정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뽀쬼낀〉선생은 상학시간에 왜 그런 소리를 자꾸만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젠 듣기가 싫구만요.》
채기정은 나이가 제일 어리나 체통은 큰 열여덟살의 순진하고 무던한 젊은이였다. 그는 비교적 유족한 가정에서 고생이란걸 모르고 무탈하게 자라난지라 자립성이 부족하고 의존심이 강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탐구심과 실천력이 강한 김군옥을 형처럼 따르면서도 은근히 어렵게 대했다.
이때 고준무가 어딘가 모르게 《뽀쬼낀》선생의 말투를 본따서 훈시조로 말했다.
《그러게 우린 소좌동지의 말대로 이 외진 구석에 박혀서 보지도 못한 순양함이나 구축함을 배울게 아니라 모두 류학을 가야 해!》
학생들의 눈길은 소대장인 고준무에게 쏠렸다.
《우리 나라에서 가까운 울라지보스또크에도 해군군관학교가 있다는구만. 하지만 난 이왕이면 오데싸나 레닌그라드에 있는 해군대학에 가서 배우고싶네.》
그는 격동되면 노상 그러하듯이 하늘에 솟구치려는것처럼 발뒤축을 고이며 몸을 한껏 추켜올렸다.
《우리모두 순양함을 타고 수에즈운하와 마젤란해협도 통과해보고 하와이의 진주만과 미드웨이섬에도 가보자구.
그래야 앞으로 함장이 되여도 당당히 제구실을 할수가 있단 말이야.》
김군옥은 순양함의 사령탑에 오르기라도 한듯이 잔뜩 기고만장한 그가 몹시 아니꼬왔다.
전형적인 함흥내기인 고준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를 타고난 배군처럼 행세하는데 그에 걸맞게 체통이 크지 못한게 유감이였다. 그러나 다부지고 파도에서 굴던 조약돌처럼 빤질빤질한데 여간만 승이 세고 이악스럽지 않았다.
고수머리가 드리운 한쪽이마에 엇비스듬히 찍히운 허물자리와 말을 할 때마다 반짝반짝 드러나군 하는 두개의 금이발은 간단치 않은 그의 성미를 그대로 보여주고있었다.
그는 해방전 보통학교에 다닐 때 함흥일판에 소문을 낸 야구선수였다. 언젠가 그는 경기에서 패하고 행풀이를 하려고 달려든 일본학생들과 싸우다가 야구방망이에 맞아서 이마가 터지고 앞이가 두대나 부스러진적이 있었다. 그런 상태로도 용감히 싸워 일본학생들을 곤죽이 되게 밟아놓았다. 그리고는 억울하게도 류치장생활을 열흘간 하고 나왔는데 모두들 그를 영웅처럼 떠받들었다.
한 녀학생의 발기로 모금을 해서 그에게 금이발을 해주었다. 고준무가 상처자국이 있는 이마를 보란듯이 쳐들고 금이발을 번쩍거리며 나타나기만 하면 일본학생들은 주눅이 들어서 비실비실 곁으로 비켜서군 했다.
그가 동서해의 한다하는 젊은이들이 다 모인 수상보안간부학교에 와서 대뜸 소대장이 된것은 그러한 전적이 있기때문인지도 모른다.
머리가 좋고 꾸준해서 그날 배운 내용은 밤을 새우면서라도 그대로 다 암기하군 하는 김도형이 두눈을 반짝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나. 류학을 보내주기만 한다면 난 선참으로 가겠네.》
여느때는 별로 말이 없던 최정수도 신이 나서 흰목을 뽑으며 소리쳤다.
《동무들! 류학을 보내주기만 바랄게 아니라 보내달라고 제기하자구. 거 이왕이면 소대장동무말마따나 레닌그라드에 있는 해군대학에 보내달라고 말이야.》
침착하고 사색적인 눈매를 가진 리대훈은 그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해보다가 미타한듯 고개를 기웃거렸다.
《우리가 한꺼번에 다 류학을 가기는 이모저모로 곤난할것 같애. 그 많은 학생들을 누가 공짜로 배워주겠대. 류학을 가자면 돈이 있어야 한단 말이야. 그리고 로어로 뜯개말정도는 할수 있어야 해.》
그러자 떠들썩하던 학생들이 조용해졌다.
《로어보다는 중어를 배우기가 훨씬 쉽겠지?》
《참, 중국엔 해군대학이 없나?》
누군가 이렇게 불쑥 묻자 학생들가운데서 유일하게 장가를 들어 그런지 퍽 듬직해보이는 리완근이 신통치 않은 대답을 했다.
《글쎄… 있는것 같지 않소. 설사 있다 한들 중국은 지금 류학생들을 받을 형편이 못되지.》
《중국엔 해군대학이 없소.》
고준무가 한손을 휘저으며 결론을 짓듯이 확신있게 장담했다.
《청나라는 땅덩이가 크고 인구가 많지만 해군이 약해서 서양놈들과 일본놈들한테 계속 얻어맞았거던.
그래서 신식함대를 창설하는데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려고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넬슨제독의 모국인 영국에 류학을 보냈지. 한편 숱한 금덩이와 은덩이를 넘겨주고 외국에서 군함들을 사들였지.
류학생들이 돌아오자 비로소 북양함대를 창설했는데 일본함대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풍지박산이 났다는거야. 그후 청나라를 꺼꾸러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손중산도 함대창설의 절박성을 느끼고 영국과 미국, 도이췰란드 지어는 일본에까지 류학을 보냈지. 제정로씨야도 마찬가지야. 뾰또르1세는 락후하기 그지없는 로씨야를 추켜세우기 위해서는 우선 강력한 해군함대를 건설하여 흑해와 발뜨해의 제해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하면서 외국기술자들을 대대적으로 초빙해다가 군함들을 건조했거던. 류학도 보내고… 지금 형편에선 우리도 그렇게 할수밖에 없단 말이야.》
처음 듣는 소리가 아니였다.
고준무는 언젠가 한백천소좌가 상학시간에 여담삼아 들려준 소리를 되풀이하고있었다.
김군옥은 교원의 그릇된 주장에 덮어놓고 추종하는 고준무의 장황한 말을 더이상 듣기가 역스러웠다.
《소대장동무, 그런 말은 삼가하게.》
화제의 중심이 되였다가 기분잡치게 도전에 부딪친 고준무는 그만 약이 올랐다. 그런데 상대가 자기와 모든 면에서 앞자리를 다투는 김군옥인지라 여유있게 미소를 지으며 짤막하게 물었다.
《어째서?》
《동무의 주장은 우리 실정에 맞지 않기때문이요.》
고준무는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아챘다.
《우리 실정이 어쨌다는건가?》
《그걸 몰라서 물어?》
서로를 노려보는 눈초리가 대뜸 사나와져서 교실의 분위기는 긴장해졌다.
《당장이라도 전쟁이 터질수 있단 말이야!
우리가 류학을 가서 남의 배를 타고 세계일주나 하고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며 순양함이나 구축함을 사올 돈을 버는 사이에 적들이 덤벼들면 어쩔셈인가?》
준절한 물음이였다.
그러나 고준무는 대수롭지 않은듯이 여전히 비양조로 대꾸했다.
《이봐! 그런건 자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 청진항에 쏘련태평양함대가 분함대를 주둔시키고있지 않나. 일이 생기면 그 분함대가 즉시 출동하지 않으리.》
이것 역시 《뽀쬼낀》선생이 그 무슨 자랑거리나 되는듯이 자주 입에 올리던 소리였다.
《우리 바다는 우리가 지켜야 해. 남이 지켜주기를 바라는건 어리석은짓이야.》
고준무는 이런 훈시를 받는게 거슬렸다. 그래서 큰일이나 난듯이 금시 눈이 꼿꼿해서 걸고들었다.
《그건 도대체 무슨 소리야? 쏘련군대가 달갑지 않다는거야? 너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하는거야?》
김군옥은 그만 입이 얼어붙었다.
수세에 몰린 그를 곁에서 채기정이 두둔해나섰다.
《소대장동무, 거 너무 그러지 말자요.
우리 바다를 우리가 지키자는게 뭐가 나빠요?》
고준무는 이마에 찍힌 상처자리를 손으로 매만지면서 마뜩지 않은 눈찌로 채기정을 쏘아보았다.
《여! 동무가 뭘 안다고 참견이야?》
채기정이가 완력에 눌리워 더 어쩌지 못하자 여태 입을 꾹 다물고있던 양판익이 나섰다.
《소대장동무, 자중하오. 나도 군옥동무의 말이 옳다고 보오.》
대다수의 학생들도 동감인 기색이였다.
고준무는 소대장으로서 체면이 있는지라 신경질적으로 목청을 돋구어 자기의 그릇된 주장을 고집했다.
《우리 바다를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건 물론 옳은 소리지. 그런데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지킨다는거야? 도무지 다섯손가락안에도 들지 못하는 구식경비함이나 소해함을 가지고 적들의 항공모함이나 순양함과 맞서자는거야? 아니면 저기 바라보이는 부업선이나 전마선을 몰고 싸움판에 나가자는거야? 왜 대답을 못해?》
말문이 막힌 김군옥은 숨조차 막힌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정말이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천적인 방도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속이 상했고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종시 대답을 하지 못한 그는 입술을 깨물며 맥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도전적으로 나오던 상대가 찍소리도 못하고 수그러드니 고준무는 더 기가 올라서 소리쳤다.
《그거야말로 닭알로 바위치기야! 자살행위란 말이야! 그러니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소리를 한건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야! 당신!》
고준무는 금이발을 번쩍이며 감히 삿대질까지 했다. 김군옥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당신이라는 소리가 별스레 귀에 거슬리며 신경을 자극했다.
당신이란 흔히 부부사이에 무랍없이 부르는 다정한 부름이다. 하지만 생판 모르는 남이나 가증스런 원쑤를 대할 때도 그렇게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그 부름은 억양이나 말투에 따라 때로는 심히 모욕적인것으로 느껴지는것이다.
지금의 경우가 그러했다.
하지만 학생들모두가 지켜보는 교실에서 여느 학생도 아닌 소대장과 야비하게 싸울수는 없었다.
김군옥은 가까스로 자제력을 발휘하며 상대방을 어디까지나 말로써 설득시키려고 했다.
《소대장동무, 하여간 우리 실정에 맞게 자체의 힘과 지혜로 가능한껏 해보면 될게 아니요.》
고준무는 댕댕해서 코웃음을 쳤다.
《글쎄 어떻게 한다는건지 방도를 내놓으라구.
륙지에선 혹 어쩔런지 모르겠지만 해상에선 함선의 배수량과 속도와 무장장비가 승패를 결정하는 법이야.》
이것 역시 《뽀쬼낀》선생이 자주 강조하는 소리였다.
《하자고 마음을 먹고 애를 쓰면 방도는 생기더구만.
난 서해수상보안대에 있을 때 전마선에 오토바이기관을 설치하고 막심중기를 놓고서 해상경비근무를 수행했는데…》
김군옥은 이야기를 마저 할수 없었다.
고준무가 어이없었던지 금이발이 확 드러나도록 입을 쩍 벌리며 교실이 떠나갈듯 앙천대소했기때문이였다.
《하하! 여, 그런 감탕내가 나는 소리는 꺼내지도 말라구. 여긴 동해야! 동해!》
일종의 터세랄가. 고준무를 비롯하여 동해출신들은 서해에서 온 학생들을 이런 식으로 하대하거나 깔보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해방직후 수상보안대가 먼저 조직된 곳은 서해였다. 남포에서 서해수상보안대가 창설된 주체35(1946)년 6월 5일이 후날 해군절로 되였다.
해방된 이듬해 여름 자기가 보람찬 새삶을 시작한 서해수상보안대에 고향이나 가정과도 같은 소중한 애착을 간직하고있는 김군옥은 고준무의 비양을 더는 참을수 없는 모욕으로 간주했다.
졸지에 리성을 잃어버린 그는 하마트면 벌떡 일어나 고준무의 면상을 후려칠번 했다. 상대방을 쏘아보는 그의 두눈에선 불이 펄펄 일었다. 그 눈빛에서 위협을 느낀 고준무는 당장 치고받을듯 한 공격자세를 취했다.
《군옥이! 너 어쩌자는거야? 생각이 있으면 어디 덤벼들라구.》
김군옥은 가까스로 자제하며 눈길을 떨구었다.
고준무는 상대방이 숙어드는것 같이 보이자 더 기세를 올렸다.
《왜 그러고있어? 덤벼들라는데두. 여! 서해감탕판에서 벌벌 기던 동무가 어디에 와서 큰소리를 치는거야.》
이런 모욕까지 참자니 김군옥은 속에서 불이 이는것 같았다. 그렇다고 교실에서 완력행사를 할수는 없었다. 그는 눈길을 떨군채 까딱 움직이지 않았다. 책상을 꽉 틀어쥔 손이 푸들푸들 떨렸다. 곁에 있던 채기정은 자기가 모욕을 당한것만 같아서 눈을 흘기며 고준무를 나무랐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건 옳지 않소.》
고준무는 가소로운지 픽 코웃음을 쳤다.
《너도 서해수상보안대에서 왔다고 편역을 드는거야? 꼭뒤에 피도 안 마른게 재수없게스리.》
고작 두살차이인데도 고준무는 상대방을 이렇게 하대했다. 그는 김군옥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채기정을 마깝지 않게 여기던터이다. 채기정이 군옥을 친형처럼 깍듯이 대하면서도 소대장인 자기에게는 너나들이로 나오니 과연 기분이 상했다.
채기정은 왈칵 얼굴을 붉혔다.
《뭐가 어째? 재수가 없다구?》
평소엔 순하고 어질던 그가 일단 성을 내니 무서웠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사태를 지켜보고있었다. 고준무는 가소로운듯 금이발을 번쩍이며 여유작작하게 이죽거렸다.
《음, 재수가 없단 말이야. 당신같은 코흘리개는 저리 비켜!》
채기정은 불이 번쩍나게 주먹을 휘둘렀다. 이 찰나에 김군옥은 튕기듯 일어나며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뒤미처 고준무도 주먹을 내질렀다. 김군옥은 다른 손으로 그 주먹을 붙잡았다.
《이걸 놔요!》
《비켜서지 못해!》
《싸우면 안돼! 그만두라!》
다른 학생들도 와 하고 달려들어 싸움을 말리다가 《뽀쬼낀》선생이 들어오자 흠칫 굳어졌다.
한백천은 복도에서 학생들의 그 언쟁을 지켜보고있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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