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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작년 12월부터 진행하여온 동기훈련을 총화하고 다음달부터 진입하게 될 하기훈련을 준비하는 완충기다. 그렇지만 허리띠를 풀어놓을수가 없었다. 요즘 정세는 긴장할대로 긴장해져서 전쟁접경에 이르렀던것이다.
미제의 조종을 받는 리승만괴뢰도당은 괴뢰군 8개 보병사단중에서 5개 사단을 38도선일대에 집중배치하고 매일과 같이 우리측 지역을 침공하는 엄중한 군사적도발책동을 감행하고있었다. 서해상에서는 괴뢰해군이 경찰선을 비롯한 각종 전투함정들을 우리 연해에 침입시켜 포사격을 하거나 평화적인 우리 어선들을 랍치하려고 혈안이 되여 날뛰였다. 동해상에서도 놈들의 도발이 있을수 있으니 경각성을 바싹 높여야 했다.
일본에 주둔하고있는 미해군의 7함대는 유사시에 여러개의 분함대로 갈라져 조선동해와 서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해상을 봉쇄하며 함포사격과 정박장타격, 대대적인 상륙작전으로 미지상군과 남조선괴뢰군을 지원할 작전계획을 짜고있다고 한다. 작전모의에는 패망한 일본해군의 고위장교들도 참가하고있다는것이다. 이처럼 전쟁의 검은구름은 시시각각으로 밀려들고있었다.
김군옥은 조성된 정세에 대처하여 어뢰정들을 상가시킨 조건에서도 훈련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훈련계획을 작성하여 작전과에 제출하였다. 한백천은 그가 들고온 훈련계획서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여보, 어뢰정들을 다 상가대에 올려놓고 도대체 무슨 훈련을 한다는거요?》
김군옥은 기분이 상했지만 공손히 대답했다.
《도보항해훈련을 위주로 하겠습니다.》
도보항해훈련이란 함선을 타고 바다에 나갈수 없을 때 땅에서 걸으면서 하는 훈련이였다.
《그거야 비행사들이 하는 훈련이지.》
《우리도 해보자는겁니다. 도보훈련을 백번 하면 항해훈련을 서너번 한것과 맞먹을수 있지요.》
《태평양함대에서는 그런 훈련을 하지 않소. 대신에 지휘관들이 해도를 펴놓고 탁상훈련은 자주 하오. 동무들도 그렇게 하라구. 그리고 시간이 있으면 세계해전사를 연구하오. 배울게 아주 많소.》
한백천은 자기가 자작 만든 커다란 해도사판을 가리켰다.
사판에 깔아놓은 푸른 유리판우에는 순양함과 구축함, 소해함을 비롯한 전투함정들의 모형들이 놓여있었다. 그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함선모형들을 움직이면서 유사시에 대비한 각종 해상전법들을 연구하군 했다. 지금은 비록 대해상작전을 벌릴만 한 큰 전투함선들이 없지만 앞으로는 생기게 될테니 희망을 가지고 미리 전투방안들을 짜놓아야 했다.
김군옥이 보기에는 작전과장이 지난날 수상보안간부학교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제나름의 세계에 잠겨있었다.
《작전과장동지, 래일이라도 당장 전쟁이 터질판인데 언제 그럴 시간이 있습니까?》
《여보, 전쟁은 과학이란 말이요. 해상전은 더욱 그렇소.》
《예, 바로 그렇기때문에 우리의 실정에 맞는 해상전법들을 연구하고 훈련을 통하여 숙련시켜야 합니다. 우린 도보항해훈련을 이달만 하겠습니다.
하기훈련이 시작되면 어뢰정들을 하가하고 원항해타격훈련을 또 하겠습니다.》
《뭐라구?!》
한백천은 화가 잔뜩 나서 표표한 기색으로 눈을 지릅뜨고 무분별하기 이를데 없는 젊은 정대장을 쏘아보았다.
《그게 제정신이 있는 소리요? 전번 원항해타격훈련때 25호정의 기관사용시간이 지나서 페물이 된걸 벌써 잊었어? 다신 원항해타격훈련을 할수 없소!》
《그럼 가까운 바다에 나가서 어뢰발사훈련만이라도 해야 하겠습니다.》
《안돼! 절대로 안돼!》
한백천은 잡아떼듯이 오른손을 홱 내저었다.
《어뢰기관도 수명이 제한되여있는거요. 전번엔 멀쩡한 어뢰정을 페물로 만들더니 이젠 어뢰까지 못쓰게 만들자는건가? 어디 대답해보오!》
어뢰는 장약하지 않은 상태로 발사훈련을 하고 회수리용하는데 기관수명때문에 두번이상은 하기 곤난했다. 그렇다고 모의훈련만 하면 실지 전투를 할 때 어뢰발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수 있었다.
《기지장동지에게 제기해주십시오.》
《동무가 제기하오. 난 상관하지 않겠소.》
김군옥은 함선정비가 기본적으로 끝나자 전투훈련에 들어갔다.
륙상병실정문옆에 놓인 직일탁을 마주하고 서있던 직일병이 《상학시작! 전투항해준비!》하고 웨치자 정대장으로부터 조기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대원들이 항해복을 입고 전투장구류를 착용하고 운동장에 달려나왔다.
정장들이 앞에 서고 기관장과 갑판장, 무전수, 조기조장, 조기수, 고사총수순서로 섰다.
해병들은 선자리에서 오른주먹을 쳐들며 보고했다.
《지휘소! 제1초소 전투준비 끝.》
《지휘소! 제3초소 전투준비 끝.》
…
초소들에서 올라온 보고를 받은 정장들이 정대장에게 정의 전투준비가 끝났음을 보고했다.
김군옥은 구령을 쳤다.
《출항준비! 21호정부터 리안할것!》
《알았다! 정 리안위치로! 선수바줄 올렷! 선미바줄 올렷! 기관 저속으로 전진!》
김도형정장의 지휘에 따라 21호정대렬이 먼저 도보를 시작했다. 다른 호정들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차례로 뒤따라갔다.
김군옥은 앞장서 걸으며 쐐기대형을 지으라, 벌린대형을 지으라 하고 련속 구령을 쳤다. 정장들은 힘차게 복창하고 대오는 여러가지 대형을 지으며 넓은 운동장을 빙빙 돌아간다. 적함을 발견하고 유인기동을 하다가 전투침로에 들어서자 모두 내달리기 시작했다.
항해복을 입고 전투장구류를 휴대한지라 달리기가 헐치 않았다. 모두들 단김을 내뿜고 땀을 철철 흘리며 내달린다. 부릅뜬 두눈에선 불이 일었다.
《연막을 칠것! 주의! 발사!》
먼저 어뢰를 쏜 기정이 변침하자 뒤이어 다른 어뢰정들도 차례로 어뢰를 발사했다.
기지로 돌아온다, 입항한다, 계류바줄을 던진다.
《전투경보해제! 상학휴식!》
직일병의 구령이 울리자 모두들 그 자리에 풀썩풀썩 주저앉았다.
너나없이 물에 빠졌다가 간신히 기여나온듯 군복이 푹 젖었다. 철갑모나 전화모를 벗으니 젖은 머리칼에서 김이 문문 피여올랐다.
《여, 이거 진짜항해훈련보다 더 급하구만.》
《난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야.》
혀를 가로 물고 김빠진 소리를 하는데 정인이가 샘물을 담은 두개의 바께쯔를 량손에 쥐고 잽싸게 달려왔다. 모두 물을 마시며 시원하다느니, 이제야 살것 같다느니 하고 떠들어댔다.
김군옥은 저으기 못마땅한 기색으로 서있었다.
정대원들이 말하듯이 도보항해훈련은 실지 항해훈련 못지 않게 힘들었다. 그러나 소득은 너무 적었다. 이렇게 땅에서 모의훈련을 하며 만세나 불러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함대출항식날에 몸소 어뢰정21호를 타시고 바다에 나가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하신 간곡한 당부가 그의 귀전에 되살아났다.
《날바다우에서 훈련하고 또 훈련하시오. 동무들은 땅우에서 큰소리를 쳐야 소용이 없소. 바다우에서 큰소리를 쳐야 하오. 그래야 적구축함이나 순양함과 맞다들려도 주도권을 틀어쥐고 대담하게 먼저 공격하여 타승할수 있소.》
그렇다! 배를 타고 날바다에 나가서 훈련해야 한다, 그런데 어뢰정들을 상가대에 올려놓고있으니 난사다, 설사 하가시킨다고 해도 기관사용시간이 제한되여있으니 문제다, 어쩌면 좋은가?
그는 문화부정대장과 의논해보고싶어 건국실로 갔다. 리학섭은 도보항해훈련때마다 25호정대렬에 서서 함께 훈련하군 했다. 그리고는 휴식시간이 되면 숨돌릴새없이 건국실에 달려가서 라지오를 틀고 새 소식을 듣고 정대원들에게 알려주군 했다.
김군옥이 건국실에 들어가려는데 창문이 활짝 열리더니 환해진 문화부정대장의 얼굴이 나타났다.
《동무들! 예술경연중계방송이요! 해군군관학교가 나온단 말이요!》
휴식을 하던 정대원들은 모두 환성을 올리며 건국실에 달려들어갔다.
라지오에서는 귀에 익은 녀방송원의 독특하면서도 친근한 목소리가 울려나오고있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지난 4일 조선인민군회관에서는 예술경연대회가 성황리에 막을 올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3일째 공연을 중계해드리겠습니다.
해군을 대표하여 흰 군복을 눈부시게 차려입은 조정철소속부대가 무대에 나왔습니다.
처음으로 합창 〈김일성장군의 노래〉.》
영생불멸의 혁명송가가 힘차게 울려나왔다.
김군옥은 합창대앞에 나서서 열정적으로 지휘봉을 흔드는 정치부교장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것만 같았다.
계속하여 《해군행진곡》이 씩씩하게 울려퍼졌다.
그것은 청진기지에 갔을 때 정치부교장에게서 직접 배운 인상깊은 노래여서 모두들 목청껏 따라불렀다.
예술경연중계가 끝나자 발명 및 미술경쟁대회에 입선한 발명품들과 미술작품들이 소개되였는데 그중에는 어뢰정대가 출품한 고사총야간조준훈련기재와 석고조각 《바다의 수호자》도 들어있었다. 환성이 터져올랐다. 수명이 다된 기관때문에 노상 울상이던 채기정의 얼굴에 오래간만에 웃음이 피여났다. 그는 어제 정대기관장으로 승급한 21호기관장의 후임이 되였다.
김군옥은 문화부정대장을 눈짓으로 밖에 불러냈다.
《이거 도보항해훈련이나 해가지고서는 될것 같지 않습니다. 며칠만 륙상생활을 해도 다시 배를 타면 처음엔 멀미가 나지 않습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뢰정을 타고 바다에 나가서 훈련을 해야 할텐데…》
리학섭은 잠시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꼭 어뢰정을 타야 맛일가요. 꿩대신 닭이라는 소리도 있잖습니까.》
김군옥은 귀가 솔깃해졌다.
《가만, 그러니까 다른 함선을 타고 바다에 나가자는겁니까?》
《예, 이왕이면 소포정이 좋지요.》
《고준무 그 친구가 소포정을 빌려줄가요? 아마 펄쩍 뛰면서 노발대발할겁니다.》
《그러게 잘 설복을 해야지요. 내가 한번 만나볼가요?》
《내가 만나지요.》
김군옥은 그길로 소포정대에 찾아갔다.
거기서는 공교롭게도 함선도장작업을 하고있었다.
여러 색갈의 뼁끼와 기계기름이 군데군데 묻은 작업복을 입고 채양이 없는 작업모를 쓴 해병들이 에나멜이 담겨진 깡통과 도장붓을 들고 마스트와 사령탑, 선수와 선미갑판 등 여기저기서 한창 칠작업에 열중하고있었다. 김군옥이 가까이 다가갔지만 칠작업에 정신이 팔려서인지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고준무는 항해모를 비스듬히 제껴쓰고 여기저기 돌아보며 훈시를 했다.
《붓자리가 나지 않게 칠하라구. 말쑥하게 발라야 해.》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사령탑을 칠하는 해병에게 다가가 붓을 빼앗아들고 시범동작을 했다.
《자! 이렇게 살짝살짝 발라야 해. 도장을 하는걸 보면 그가 진짜배기배군인지 햇내기인지 알수 있소.》
그는 도장붓을 넘겨주고나서 모두거리로 말했다.
《재삼 강조하는데 우린 1정대요. 기지와 함대의 기준정대란 말이요. 어뢰정대를 비롯한 모든 함정들이 우리를 따라배울수 있게 훈련도 함선관리도 잘해야 하오. 그렇지 않소?》
해병들은 붓질을 잠시 멈추고 목청을 합쳐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결정적으로 어뢰정대를 따라앞서야 하오. 그럴수 없다면 1정대자리를 내놔야지.》
보아하니 고준무는 어뢰정대장이 곁에 다가온걸 보고 귀있으면 들으라고 우정 그렇게 큰소리로 말하는게 분명했다.
김군옥은 그에게 말도 붙여보지 못하고 슬며시 돌아섰다. 소포정들에 바른 에나멜이 충분히 마르자면 며칠이 걸려야 했다. 그는 속이 달아서 그쪽만 쳐다보다가 사흘을 못 참고 다시 갔다.
소포정들은 철선이여서 군데군데 시누런 녹물이 배여나와 지저분해보이댔는데 선체녹털기를 진행하고 마스트로부터 사령탑과 갑판, 현측에 이르기까지 쥐색에나멜을 발라서 아주 멋쟁이가 되였다.
장난꾸러기들이 방금 목욕을 하고 방금 새옷을 갈아입은것 같았다.
갑판에 칠한 에나멜이 마를 때까지 정대원들은 불편하지만 림시로 부두에 취사설비를 내다놓고 천막을 깔고 숙식하고있었다.
한낮이라 해빛이 쟁글쟁글 내리쪼이고 갓 피여나기 시작한 아카시아꽃의 향기가 그윽히 풍겼다.
정대원들은 칠감이 묻은 도장붓을 휘발유로 씻거나 불에 태운 뼁끼깡통을 다시 쓸수 있게 닦아내고있었다. 함선관리에서는 도장작업이 제일 힘든데 이처럼 뒤거두매 역시 헐치 않았다.
고준무는 전투예비물자를 넣은 함통들로 대충 둘러막고 우에 방수포를 씌운 이를테면 림시거처에 들어박혀 손가락끝에 침을 바르면서 돈을 세고있었다.
지전들을 단위별로 갈라 종이띠로 묶어놓고 각전들도 갈라서 종이봉투에 넣으면서 종이장에 일일이 기입하는데 그 모양이 돈벌이에 옴한 장사군을 련상시켰다.
김군옥은 다소 의아한 눈길로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고준무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더니 짜장 놀라운 기색으로 빈정거렸다.
《아니, 어뢰정대장님이 어떻게 여느땐 왼눈으로도 쳐다보지 않던 우리 소포정대에 왕림하셨소?》
《의논할 일이 있어서 왔네.》
김군옥은 가치담배를 꺼내 고준무의 입에 물려주고 성냥으로 착실히 불까지 붙여주고나서 눈짓으로 돈봉투를 가리켰다.
《이건 뭔가?》
고준무는 담배연기를 달콤히 들이켰다가 확 내뿜었다.
《공채를 구입하려고 정대원들의 돈을 다 모은거야. 티끌모아 큰 산이라더니 적은 량이 아닐세.》
김군옥은 움쭉 놀랐다.
《벌써 공채가 나왔나?》
고준무는 눈을 흘겼다.
《동문 신문도 안 보나? 어제 나왔네. 군인들도 공채를 요구대로 구입할수 있단 말이야. 해군에서는 1차추첨을 년말에 가서 한다누만.
자기가 행운아인가, 아닌가를 알아볼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라고 볼수 있지.》
고준무의 금이발이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언젠가 그는 금이발이 참 신기하다, 기분이 좋을 땐 반짝거리고 몸이 말째거나 성이 나면 꺼멓게 색이 죽는다고 말한적이 있었다. 그러고보면 지금 그는 기분이 매우 좋은 모양이다.
《그런데 이것 보게. 난 덜퉁하다나니 생활비를 타면 그시그시 다 써버려서 남은건 다 털어도 오백원짜리 공채 석장밖에 살수 없거던.
생활비가 많지 못한 하전사들도 이렇게 저마다 공채를 구입하겠다고 나서는데 정대장인 내가 이 모양이니 망신이 아닌가.
여보게, 내가 오백원짜리 공채를 둬장만 더 구입할수 있게 돈을 좀 꾸어줄수 없겠나?》
김군옥은 난처했다.
대다수의 독신군관들과 하전사들이 그러하듯이 그도 생활비에 거의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군대에서는 돈을 쓸 일이 거의나 없었다. 하기에 생활비를 받으면 당비를 바치고나서 배낭고구석에 찔러두었다가 어쩌다 외출할 기회가 생기면 꺼내가지고 나가서 다 써버리군 했다.
지난달에 어뢰정대는 송도원에 나갔었다. 그는 배낭고구석에 있던 여러달분의 생활비를 다 꺼내가지고가서 정대원들에게 강냉이국수와 팥죽, 수수지짐 등을 사먹였다. 정대식당에서는 돼지고기나 동태같은건 쳐다보지도 않을 정도로 입이 높은 그들이 고향생각을 불러주는 토산음식은 사양없이 곱배기를 하는것이였다. 식사후엔 사진도 찍다나니 수중엔 이달에 받은 생활비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도 인차 공채가 나온다기에 다치지 않은건데 고준무의 신세를 지자니 내놓을수밖에…
《우리사이에 꾸고 말고 할게 있나. 자! 어서 가지게.》
김군옥은 군복안주머니에서 생활비봉투를 꺼내 그채로 고준무에게 주었다.
고준무는 금이발을 반짝거리며 재빨리 봉투에서 돈을 꺼내 세여보았다.
어뢰정대장의 편제군사칭호는 중좌여서 생활비가 천원이 넘었다.
《고맙소! 이젠 체면을 세울수 있게 됐소.》
고준무는 너무 좋아서 입이 헤 벌어졌다.
《만약 추첨에서 당선되면 당첨금을 죄다 자네에게 주겠네. 두고보게, 틀림없이 행운이 차례질거야. 그런데 나와 의논할 일이란 대관절 뭔가?》
김군옥은 우정 대수롭지 않은투로 말했다.
《소포정대를 댓새만 빌려주게.》
실로 왕청같은 청이여서 어안이 벙벙해진 고준무는 미심쩍은듯이 물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우리 어뢰정들은 기관사용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 그래서 도보항해훈련을 하고있는데 신통치 않아. 소포정은 어뢰정과 비슷하게 생겼으니…》
《걷어치우게!》
고준무는 모욕이나 당한듯이 당장 얼굴이 시뻘개져서 고함을 질렀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반짝거리던 금이발이 시뿌예진것 같았다.
《자네 소포정을 숙봐도 분수가 있지.
저건 훈련용이 아니라 전투함선이야! 당신네가 타고나가서 훈련이나 하라고 저렇게 도장까지 말끔하게 해놓은줄 아나? 썩 물러가게!》
어느새 주위에 소포정대원들이 모여들어 어깨성을 쌓았는데 불청객을 노려보는 눈찌가 사납기 그지없었다.
해병들은 어뢰정을 타든 소포정을 타든, 지어는 자그마하고 보잘것없는 련락정을 타도 자기의 전투초소이자 집인 함선을 제 살붙이처럼 사랑한다. 방금 선체도장을 한 함선에 아차 실수하여 발자국이 찍히거나 손자욱이 날세라 불편한대로 부두에서 침식하는 그들이니 그럴만도 했다.
모두의 눈초리에 찔리운 김군옥은 슬슬 뒤걸음치다가 홱 돌아서서 소해정대를 향하여 재빨리 걸어갔다.
《이보게, 군옥이! 이걸 가져가라구!》
고준무가 돈봉투를 흔들며 소리쳤지만 그는 못 들은체 했다.
소해정대장도 김군옥의 부탁을 즉석에서 거절했다.
《그것두 말이라고 하나? 자네 정신이 쑥 나갔구만.》
상대방에게서 이런 모욕적인 거절을 당하고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풀이 죽어서 스적스적 륙상병실로 돌아왔다.
게시판앞에 정대원들이 모여 떠들썩했다.
김군옥은 웬일인가 해서 그리로 슬며시 다가갔다. 게시판에는 《모두다 애국의 마음으로 공채를 구입하자!》라는 구호가 나붙었다.
《나는 180원입니다.》
《나는 250원을 하겠습니다.》
정대원들이 겨끔내기로 자기가 구입할 공채액수를 부른다. 문화부정대장은 그것을 당사자들의 이름우에 도표로 올리고있었다.
《나는 500원입니다.》
《나는 700원!》
흥이 나서 붓질을 하던 리학섭은 뒤를 돌아보다가 정대원들의 뒤에 서있는 정대장을 발견했다.
《정대장동문 얼마를 올리랍니까?》
모두들 그제서야 정대장이 온줄 알고 바라보았다. 정대장의 생활비가 제일 많으니 공채도 제일 많이 구입할거라고 기대하는 눈빛들이였다. 당황해서 대답을 못하고 돌아서던 김군옥은 공교롭게도 자기를 지켜보는 김정인의 눈길과 마주쳤다. 더욱 난처해진 그는 무슨 급한 용무라도 있는듯이 기지 지휘부쪽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하, 이거 야단이 났군, 내가 훈련에 정신이 팔려서 공채생각은 깜박 잊었댔구나. 이걸 어쩐다?!
그가 생각할수록 맹랑해서 자신에게 화를 내는데 누군가 뒤따라왔다.
그는 사뿐사뿐 디디는 발걸음소리를 듣고, 은은하게 풍기는 소독약냄새를 맡고 상대방이 다름아닌 김정인임을 알아차렸다.
별안간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졌다.
여느땐 자신만만하다가도 이 처녀와 맞다들리면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알수 없었다.
김군옥은 멈춰섰다.
《저…》
가까이 다가온 김정인은 무엇때문인지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눈처럼 흰 손수건에 정히 싼것을 내밀었다. 거기서는 향수냄새가 알릴듯말듯 풍겼다.
《이건 뭐요?》
얼굴이 발기우리해진 김정인은 상대방의 눈길을 피하며 나직이 말했다.
《어서 받으세요.》
김군옥은 그것을 받았다.
조심스레 손수건을 펴니 돈뭉치가 나왔다. 얼핏 봐도 수천원이 잘될것 같았다.
《이게 웬 돈이요?》
무엇때문인지 김정인은 더욱 얼굴을 붉히며 주저주저 말했다.
《아저씨가 저금했던거라는데…》
김군옥은 영문을 알수 없었다.
《그런데 그걸 왜 나에게 주는거요?》
《우리때문에 저금했던거라기에…》
《그건 어째서?》
《나도 모르겠어요. 하여간 그걸로 공채를 구입하세요. 정대장동무야 이런 일에서도 응당 앞장서야 할게 아니나요.》
김정인은 이렇게 당부하고나서 무거운 짐이라도 벗어놓은듯 안도의 숨을 내쉬더니 어엿한 자세로 식당을 향하여 걸어갔다.
김정인의 뒤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김군옥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손수건에 싼 돈을 호주머니에 넣고 곧장 기지장을 찾아갔다.
작전과장과 이마를 맞대고 해도작업을 하던 홍동철은 손에 연필과 량각기를 쥔채 허리를 폈다.
《기지장동지, 소포정대와 소해정대를 우리에게 한주일에 사흘씩만 빌려주십시오. 다른 배를 타고서라도 바다에 나가서 훈련을 하려고 그럽니다.》
홍동철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하는 눈길로 작전과장을 바라보았다.
한백천은 그러지 않아도 어뢰정대의 훈련때문에 제나름으로 고심을 하던 중이였다. 어뢰정대원들이 보병들처럼 땅에서 훈련하는걸 그냥 보고만 있을수 없었다. 어뢰정들을 하가시켜서 훈련하게 해달라는 정대장의 요구를 들어줄수도 없고… 과연 난처했댔는데 정대장이 다른 함선을 리용하여 항해훈련을 할수 있게 해달라고 제기하니 그게 신통한 방도인것 같았다.
《기지장동지, 정대장동무의 요구대로 해주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작전과장이 뜻밖에도 자기를 지지해주니 김군옥은 욕심을 부렸다.
《지금 당장은 다른 함선으로 훈련을 하고 하기훈련마감에 가서는 아무래도 어뢰정들을 하가시켜 어뢰발사훈련을 진행해야 하겠습니다.》
한걸음 양보했던 한백천은 당장 우거지상이 되여 소리쳤다.
《여보, 또 그 소리요? 그건 절대로 안된다고 내 이미 말했지.》
《모의훈련만 하다가는 정작 어뢰를 발사해야 할 순간에 실수할수 있습니다. 적함의 코앞에까지 뚫고들어갔다가 어뢰발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런 야단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뢰정대는 우리 해군의 귀중한 주타격력이고 나라의 재부요! 동문 그저 훈련, 훈련하면서 어뢰정과 어뢰를 아낄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것 같애. 기관사용시간이 지나면 25호정처럼 다른 어뢰정들도 페물이 될수 있소. 그 책임을 그래 동무가 지겠소?》
김군옥은 애가 타서 소리나게 한숨을 내쉬였다.
《그야 물론이지요. 그렇다고 어뢰정들을 땅에 올려놓고 구경이나 하고있을수야 없잖습니까.》
《그러게 래일부터 당장 소포정들을 타고나가서 훈련하오.》
《고준무정대장이 펄펄 뜁니다.》
《그건 내가 책임지고 보장해주도록 하겠소.》
호인다운 미소를 지은채 옥신각신하는 두 군관을 번갈아보던 홍동철은 허리를 굽히고 해도작업을 마감하고나서 수표를 해주었다.
김군옥은 기지장앞에서 어제날의 스승인 작전과장과 더 언쟁을 하고싶지 않아서 불끈거리는 속을 누르며 잠자코 있었다.
한백천은 기지장이 수표한 해도를 두르르 말아쥐더니 깍듯이 거수경례를 하고 나갔다.
김군옥은 주저하다가 군복주머니에서 손수건에 싼 돈을 꺼내놓았다.
홍동철은 눈이 둥그래졌다.
《이게 웬 돈이요?》
《모릅니까? 기지장동지가 저금했던거랍니다. 우리 정대 담당준의동무가 나에게 주더군요. 공채를 구입하는데 쓰라고 말입니다.》
《음.》
홍동철은 이제야 알만 해서 보기 좋게 벗겨진 대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럼 그렇게 하라구.
사실 그 돈은 처제를 시집보낼 때 쓰려고 저축했던건데 처제의 손을 거쳐 동무에게 넘어갔으니 주인을 찾아간셈이로구만.》
김군옥은 몹시 급해맞았다.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겁니까?》
홍동철은 불쑥 정색해졌다.
《왜? 동문 우리 정인이가 마음에 들지 않소? 오늘 내앞에서 솔직히 말해보라구.》
《거야 뭐…》
김군옥은 급해맞아서 돈을 싼 손수건을 손에 쥔채 돌아가겠다는 인사도 없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홍동철은 우정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정대장!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돈을 여기에 놓고가라구, 놓고가라는데두!》
젊은 정대장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쳤다.
며칠후인 5월 18일 아침, 라지오로 재정성의 보도가 발표되였다.
《지난 5월 15일 오후 다섯시에 15억원분을 목표로 발행한 인민경제발전채권은 동월 17일 오후 6시 현재 18억 1천만원분이 매급됨으로써 총발행액보다 3억 1천만원이 초과되였다.
이것은 공화국 전체 인민들과 군인들의 건국열의가 얼마나 높은가를 보여주고있다. 그들의 한결같은 요망에 따라 채권보급사업은 계속되게 된다.》
건국실에서 보도를 들은 정대원들은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며 만세를 소리높이 불렀다.
라지오에서는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가 힘차게 울려나왔다. 먼저 새장고를 메고 마당에 뛰쳐나간 박원협이 거쉰 목청으로 《어! 좋다!》하고 장단을 치며 돌아가자 정대원들은 다투어 춤판에 뛰여들었다. 손풍금을 메고 나온 리학섭은 능란한 솜씨로 혁명가요련곡을 흥취나게 치면서 두리번거리다가 방금 검식을 하고 식당에서 나오는 녀준의를 보자 소리쳐 불렀다.
《준의동무! 어서 오시오!》
김정인은 발씬 웃더니 기꺼이 달려와 당실당실 두손을 흔들며 사뿐사뿐 춤판에 들어갔다. 한송이의 꽃처럼 아름다운 녀준의를 축으로 해병들은 크게 원을 지으며 물결처럼 출렁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김군옥은 자기가 어느새 춤판에 휩쓸려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손풍금반주에 맞추어 혁명가요를 목청껏 부르며 으쓱으쓱 어깨춤을 추기도 하고 힘껏 발을 구르기도 했다.
부두에서도 춤판이 벌어졌다.
기지는 아침부터 경축일색이였다. 모두들 땀이 흠씬 나게 춤을 추고나서 식당에 들어갔다. 군관안해들이 떨쳐나와 요란하게 특식을 차려놓았다. 뜻깊은 날이니 한마디 하라고 문화부정대장이 자꾸만 추기기에 가뜩이나 흥분했던 김군옥은 기꺼이 일어났다.
《동무들! 오늘은 공화국의 륭성번영과 인민경제발전에서 특기할 력사적인 날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새로 확장된 평양방직공장을 비롯한 공장, 기업소들에서 울리는 동음이 들려오는것만 같고 현대적으로 신축한 평양역에 들어서는 렬차의 모습이 보이는것만 같습니다.
그 동음, 그 모습에는 우리의 애국의 지성도 담겨져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떳떳하고 자랑차고 기쁘기 그지없는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조국은 성실한 아들딸들의 애국의 지성에 떠받들려 더 살기 좋고 아름다운 락원으로 변모되고있습니다.》
모두 박수를 쳤다.
《그런데 미제와 리승만괴뢰도당은 북침준비에 더욱 광분하고있습니다. 놈들의 무분별한 책동으로 인하여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를 일촉즉발의 위기가 조성되였습니다.
이에 대처하여 우리는 전투동원준비를 철저히 갖추며 5월 27일부터 충천한 기세로 하기훈련에 진입해야 합니다.
하기훈련 첫달에 우리는 소포정대와 소해정대를 리용하여 항해훈련을 적극적으로 벌리게 됩니다.》
이거야말로 귀가 번쩍 열리는 소리여서 모두들 얼굴이 환해졌다.
《경상적전투준비를 견지하는것, 이것이 하기훈련의 기본과제입니다. 명령이 내리면 즉시 어뢰정들을 하가하고 항해길에 오를수 있게 항상 준비합시다.》
또다시 박수소리가 터져올랐다.
김군옥은 그날 오래간만에 흥그럽고 기분이 붕 떠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다. 자기가 정대장임을 홀연 잊어버린 스물두살의 젊은이는 정대원들과 팔씨름과 목침당기기도 하고 장기를 두거나 윷놀이도 했다. 바다도 흥분한듯 설레였다. 넘실넘실 소리없이 잔뜩 부풀어올랐다가는 꺼져내리고 다시 부풀어오르고…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그는 불처럼 달아오른 몸을 식히려고 바다가에 나갔다. 그러나 도저히 진정할수가 없었다. 그 처녀를 만나고싶었다. 만나서 열정적으로 사랑을 속삭이고싶었다. 가슴을 탁 풀어헤치고 만단사연을 다 터놓고싶었다.
모래불을 짓뭉개며 서성거리던 그는 저도 모르게 도래굽이의 샘터로 이끌려갔다.
맑은 샘은 여전히 금모래를 바글바글 일구며 솟구치고있었다. 흘러넘치고있었다. 하기에 샘은 보면 볼수록 유정도 했다. 늘쌍 미소가 흘러넘치는 그 처녀의 맑은 눈동자같았다.
정인은 어뢰정대에 나왔다가 저녁이면 여기에 들려 샘물을 길어가지고 군의소로 돌아가군 했다.
모름지기 오늘도 그러리라.
김군옥은 별안간 긴장해서 숨을 죽였다.
귀에 익은 노래소리가 울려왔던것이다.
어서 가자 가자 바다로 가자
출렁출렁 물결치는 명사십리바다가
안타까운 젊은 날의 새 희망을 찾아서
…
물통을 쥔 정인이가 코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듯이 한들한들 다가왔다. 그러다가 인기척을 느꼈던지 주춤 멈춰섰다.
《아니?! 정대장동무가 어떻게?》
김군옥은 못된 장난을 치려다가 들킨것처럼 얼굴이 화끈해졌다.
《아, 정인동무요? 그저 심심해서 산보를 나왔댔소.》
눈길이 마주친 두사람은 황급히 외면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김군옥은 기다리던 처녀가 정작 나타나니 저으기 급해맞아서 어쩔바를 몰라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으흠. 이리 주오. 내가 물을 담아주지.》
그는 태연한척 하려고 애를 쓰며 쭈그리고앉아 쪽박으로 물을 퍼서 물통에 담았다.
당황하고 어줍어서 허둥거리는 총각을 잠시 지켜보던 처녀는 안도의 숨을 호 내쉬며 생그레 웃었다.
《정대장동문 오늘 아침에 보니 춤도 잘 추고 연설도 정말 잘하더군요.》
《아무리 춤을 추고싶고 연설을 하고싶어도 그럴만 한 자격과 체면이 있어야 할수 있지. 그런 의미에서 난 이번에 정인동무 신세를 톡톡히 졌소.》
정인은 두눈이 올롱해졌다.
《신세라니?! 그건 무슨 소리예요?》
김군옥은 군복상의 안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보였다.
《여기에 싸준게 생각나지 않소?
그게 없었더라면 내가 연설이 다 뭐요. 오늘 창피해서 고개도 쳐들지 못했을거요. 정말 고마웠소.》
《아이, 무슨 그런 말을 하세요.》
김군옥은 상대방이 받을념을 안하는 손수건을 정히 포개여 품속에 소중히 간수했다.
《나는 해군군관학교시절에 이렇게 생각했소.
지휘관은 모든 면에서 대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할수 있게 준비되여야 한다고 말이요. 그래서 나는 군사기술적인 측면에서나 육체적인 측면에서도 첫자리를 차지하고 모범이 되기 위해 아글타글 애를 썼고 그것으로 정대를 이끌어왔소.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는걸 최근에 깨닫게 되였소.》
김정인은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게 신중해진 군옥을 바라보며 호기심이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무엇이 더 필요한가요?》
《혁명군대의 지휘관은 사상적각오가 투철하고 감정과 정서가 풍부해야지. 그리고…》
김군옥은 말허리를 끊고 슬며시 눈길을 떨구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정인은 다우쳐물었다.
《또 뭐예요?》
김군옥은 번쩍 고개를 들며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처녀를 바라보았다. 불길같은 그 눈초리에 찔린 김정인은 감전이 된듯 전률하며 그 자리에 꼼짝없이 굳어졌다. 별안간 사위가 고요해졌다. 술렁거리던 파도도 일순 숨을 죽이고 이들을 지켜보는듯싶었다.
정인은 더럭 겁이 나서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다시 물었다.
《뭐예요?》
《사랑할줄도 알아야 한다는거요!》
김군옥은 내뿜듯이 이렇게 웨치며 불쑥 일어났다. 그가 처녀에게 바싹 다가서며 사랑을 고백하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공교롭게도 다리가 물통에 걸렸다. 발길에 채운 물통이 넘어지면서 물이 쫙 쏟아졌다. 마술에 걸린듯 꼼짝없이 서있던 정인은 종다리와 신을 홈빡 적시고서야 불쑥 정신을 차렸다.
《어마나!》
처녀의 비명소리에 이번엔 총각이 떡 굳어졌다.
《이걸 어쩌나? 아이 속상해!》
정인은 눈물이 날 지경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와서 발을 동동 굴렀다.
뭔가 화끈 달았던것이 졸지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허전했다. 멋적었다. 구멍이 뚫린 구명환에서 바람이 새나가듯이 긴숨을 내쉰 김군옥은 멋적은 기색으로 다시 쭈그리고앉아 넘어진 물통을 바로 세우고 물을 퍼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런 일에 솜씨가 없는 자신에게 속으로 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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