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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렬차호송은 헐치 않았다. 기차가 멎어설 때마다 숱한 사람들이 매달려 인제는 기관차앞머리와 련결대 유개방통우에까지 가득 올라붙었다. 게다가 까닭없이 기차를 지체시키는 일들이 많았다. 순천역에서는 역원들이 쓸어나와 방통에 실린 기계들과 량곡 전량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성이 독같이 난 곽일무가 역장을 찾아들어가니 그는 전화를 받고있었다. 왜정때나 다름없이 빨간 모자에 철도제복을 단정히 입고 조끼주머니속의 회중시계를 꺼내들고있는데 곽일무의 성난 표정쯤은 개방귀만도 못하게 여기는듯 했다. 곽일무의 얼굴은 거의나 재빛으로 상기되여있었다. 군턱이 지고 마른 강냉이수염같은 귀밑머리가 강굴강굴 모자밑에 내밀려있는 느렁뱅이 늙은이, 이 역장도 반동놈이 아닐가, 강계에서처럼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있는게 아닐가 하는 생각에 눈살이 꼿꼿해졌다. 제밀할, 속담에도 원님이 갈리면 그 밑의 륙방관속도 다 갈린다고 했는데 이것들은 해방이 되여 석달이나 된 오늘까지 왜 그모양 본새로 거들먹거리는것인가?… 곽일무는 총부혁을 꽉 거머쥐며 소리쳤다. 《뭣때메 기차를 계속 붙잡아 두고있는거요. 예?!…》 역장은 성칼사나운 그의 웨침소리도 못 들은것처럼 계속했다. 《예, 예, 그렇게 합지요. 예… 호송병?… 아니 로서아사람들이 아니구… 예, 새파란 젊은이군요. 총을 메구… 지금 여기 와서 기차를 떠나보내지 않는다구 막 삿대질입니다그려. 예, 알겠수다.》 전화가 끝나서야 곽일무를 향해 능청스러운 눈빛을 던졌다. 《젊은이, 소리치지 말게. 그러지 않아도 저저마끔 호령질이지. 로서아사람들 아니문 보안서, 도인민정치위원회요 민주당본부요 하면서…》 역장이 페색전화기의 조정기를 꾹 누르자 절커덕! 소리와 함께 백동판같은 둥그런 통표가 툭 튀여나왔다. 《가게, 젊은이. 이젠 누구도 차를 세우지 않을걸세.》 《그-래-요?》 《음, 관심하는 사람들이 많은가보이. 적산물자라면 저마끔 뜯어먹지 못해 몸살이라니까.》 역장은 그이상 더 말해주지 않았고 곽일무는 또 그대로 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강계를 떠나 사흘만에야 평양역에 도착했다. 날이 저물 때였다. 기차는 화물역으로 들어섰다. 한종삼이 다가와 작별인사를 했다. 그동안 자별한 사이로 됐던것만큼 두손을 힘껏 부여잡았다. 《기어이 가겠다는건가?》 《가야 해.》 《바보!》 《잘 있어, 일무.》 《아무때건 찾아오라구.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청사, 잊지 않았지?》 《알구 있어.》 한종삼은 곧 역에서 붐비고있는 사람들속으로 사라졌다. 곽일무는 승강대우에 선채로 발밑에 욱- 밀리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서로 찾고 부르며 정신없이 뛰여다니는 사람들속에서 그 누군가를 찾고싶었다. 눈이 빠지게 자기를 기다리다가 춤추듯 달려올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마음속 꿈인지도 모른다. 바라는 마음이 그러한 허망한 꿈을 만들었으리라. 사람들이 왁작 떠들며 뛰여다니고있다. 해방이 되여 간도와 일본, 상해, 싱가포르, 지어 머나먼 남방에서까지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사처로 흩어져갔던 사람들이 신의주와 남포, 인천과 부산으로 돌아와 가고오는 기차마다에 매달려 때없이 들이닥치군 하는것이였다. 째지는듯 웨치고 허겁지겁 달려가 부둥켜안고 사방 뛰여다니며 《언니야!》,《쌍가매야!》, 《인복인 못 봤니?》 하고 기쁨에 겨워, 비통한 아픔과 목메이는 슬픔에 못 이겨 소리쳐 부르고 통곡하고 눈물로 속삭이거나 허탈에 빠져 허둥거리는것이였다. 기다리던 사람을 찾지 못한 군중이 곽일무에게 쓸어와 소리쳐 묻기 시작했다. 《신의주에서 오는 차나요?》 《간도에서 오는 사람들을 못 봤시요?》 《뒤에 오는 차가 또 있소?》 《뭐라구요, 없다구요?》 바로 그때 역사쪽에서 몰켜오는 한무리의 사람들이 눈에 띄였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 상호등을 들고 혹은 전지불을 사방 휘두르며 다가오는 그들의 거동이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기관차옆에 가득 모여섰던 사람들을 쫓아버리며 쌀을 실은 유개화차에로 밀려갔다. 그들중 한사람이 휘파람을 길게 불고 소리쳤다. 《차를 들이대라. 이쪽이다!》 화물역으로 통한 철대문이 열리고 화물자동차들이 전조등을 켜고 들이닥쳤다. 그뒤로는 여러대의 마차와 달구지들이 잇대여졌다. 말투레질소리와 소영각소리가 부릉부릉하는 자동차발동소리를 뒤따라왔다. 뜻밖의 일이였다. 곽일무는 웬 녀석이 유개화차문을 열려고 끙끙거리는것을 띠여보자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어떤 놈이야, 누가 거기 손대라구 했어?》 날카로운 웨침소리에 유개화차앞의 녀석들이 놀라서 돌아보았다. 상호등을 든 역원이 총멘 곽일무를 비쳐보고 급히 다가왔다. 새빨간 둥글모자를 썼는데 허리가 좀 구부정한 사람이였다. 《저 사람들은 적산물자량곡을 넘겨받으러 왔소. 증명서도 있는데… 보시겠소?》 《증명서?… 봅시다.》 곽일무는 승강대에서 뛰여내렸다. 등뒤에 지고있던 총이 무엇엔가 부딪친듯 했다. 약간 비틀했으나 그 사람이 내민 종이장부터 나꿔챘다. 몰풍스럽게 《이게 증명서오?》 하고 묻자 둥글모자는 무엇이 못마땅한듯 혀아래소리로 《그렇소.》 하고 중얼거렸으나 상호등을 비쳐주는것은 잊지 않았다. 곽일무는 주먹만한 공인이 찍히고 먹즙으로 누른 명판끝에 갈구리모양으로 멋부려 갈겨놓은 수표까지 있는 그 종이장을 깐깐히 훑어보았다. 잘 알수 없는 한자들때문에 어지간히 애를 먹긴 했지만 이럭저럭 끝까지 읽어낼수 있었다.
량곡처분증서
금일 1945(단기 4278)년 11월 13일 하오에 평양역에 도착하는 《파시너-31호》 기차의 적산물자량곡 전량을 《평남도그리스도교청년회》에서 인수하야 현하 평양시의 빈곤한 교인들에게 구제미로 공급할사.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조만식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종이장을 들여다 보고있던 곽일무는 마침내 그것을 역원에게 내던지였다. 《난 이런거 모르오. 뭐 교인들에게 공급할사?… 이게 어떤 쌀인지 알기나 해?》 하마트면 비밀을 터놓을번 하였다. 렬차호송임무를 주면서 자기를 떠나보낸 항일투사 최용진이 새로 내올 군사학교 학생들을 위해 준비해두는 량곡이라고 했던것이다. 학교를 짓는데 쓰려던 수백㎥의 목재를 반동놈들이 불태워버린것만 해도 이가 갈리는데 이 협잡군놈들이 량곡까지 손대려 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듯 했다. 《내 이제 전화를 걸구 오겠는데 그사이 누구든 여기에 손을 댔다간 뼈다귀도 못 추릴줄 아오!》 그러나 금시 걸음을 옮기려다가 몸을 홱 돌렸다. 유개화차앞의 패거리가 왁자하니 웃고 떠들었던것이다. 《어랍쇼, 제법 을러메는구만.》 《총을 멨다구 왜놈들의 겐뻬이다이 (헌병대)본을 따는거 아니야?》 《답새겨야 해. 보나마나 공산당패야.》 《저 까마귀4촌같은거 혼 좀 내줄가. 까마귀 열두가지 소릴 해두 다 제 맞아 죽을 소리랍데.》 참을길 없는 분노에 이를 떡떡 맞쪼았다. 으스러지게 틀어쥔 주먹이 돌덩이처럼 굳어지고 두눈에서는 불꽃이 튕겨나갔다. 《개자식들, 뭐가 어쨌어?》 그러자 더 큰 웃음소리가 터졌다. 《흐하하… 제법인걸.》 《관가돼지 쇠똥벙거지 쓴 격이지. 잉?》 그자들은 련사흘 기관실에서 부대끼며 석탄빛으로 얼룩칠을 한 곽일무를 전지불로 비치고는 또 흐하하… 웃어대였다. 입술이 타들고 심장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자기도 알수 없는 소리를 으르딱딱거리며 남달리 새되게 웃어대는 놈부터 견주고 나아갔다. 그때였다. 자동차적재함 저쪽에서 한 처녀가 유개화차에 기여오르는 녀석을 막으며 부르짖었다. 《다치지 말아요. 이건 역화물창고에 넣으라는 지시예요.》 금시 폭발하려던 이쪽의 결투가 장검으로 찍은듯 뚝 멎었다.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그쪽으로 쏠렸다. 끄물끄물 타들어가던 도화선을 잘라버린 그 웨침소리의 임자를 놀라서 쳐다보았다. 다음순간 악에 받친 녀석들이 그쪽으로 욱 밀렸다. 《넌 누구야. 누가 그따위 지시를 했어?》 《방금 전활 받았어요. 누구도 다치지 않도록 하라구요. 이제 곧 나오겠대요.》 처녀의 그 말에 녀석들이 또 날뛰였다. 《저년이?!… 저것두 공산당패 아니가?》 《치마를 들어올려라. 그래야 혀바닥을 놀리지 못해.》 《가랭이를 찢어놔야 해. 가랭이를!》 왜놈들의 군모를 쓰고 승마마지를 입은 한 녀석은 그 녀자에게 다가들어 쌍태머리를 휙 감아쥐고 태질을 했다. 《여 상렬이, 이 년을 끌구 가서 좀 주물러주라구. 젖통이 얼얼하게스리!》 다음순간 그 녀석은 면상을 무섭게 얻어맞고 허궁 나가떨어졌다. 화차문짝에 뒤통수가 부딪쳐 쓰러진 그자의 입에서 꾸르륵소리가 났다. 피거품을 울컥 쏟는것 같았다. 어느새 곽일무가 날아들며 죽어라 하고 후려갈긴것이였다. 너무도 급작스레, 무섭게 달려든 그의 사나운 기세에 얼어붙어버린 녀석들가운데서 제일 살집좋은 놈을 골라 또 시커먼 주먹을 면상에 안겼다. 그리고도 모자라 그는 얼굴을 싸쥐고 비틀거리는 그 녀석을 끄당겨 화차벽에 머리를 짓쪼아 쓸어뜨렸다. 《또 어느 놈이야, 맞서볼 놈이?… 뭐 까마귀4촌이 어쨌다구? 쇠똥벙거지가 어쨌어?》 그는 어깨에 메였던 총을 벗어 한손에 들고 땅바닥에 쓰러져 울고있는 처녀를 잡아일으켰다. 《일어나오. 무서워말구. 나요, 나. 일무.》 아까부터 그가 찾고있던 처녀 홍금옥이였다. 처녀는 시꺼먼 검댕이칠을 한 그를 쳐다보더니 급기야 헉- 하고 흐느끼며 매달렸다. 《저런!》 하고 녀석들중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년놈들을 가만 놔둬? 시라소니같은것들, 모두매를 앵겨라!》 그자의 선동질에 정신을 차린 녀석들이 살기띤 눈빛을 번득이며 일시에 다가들었다. 씨근벌떡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으르듯이 커지고 가까와졌다. 곽일무는 자기한테 매달린 처녀를 꽉 부여안으며 상서롭지 못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예감에 으시시 몸을 떨었다. 그 순간 등뒤에서 칼날이 번뜩이더니 어깨죽지가 선뜩해났다. 급기야 몸을 홱 돌리는것과 동시에 그는 고양이처럼 날아든 한녀석의 사타구니를 힘껏 걷어찼다. 윽- 하는 비명, 녀석이 허리를 꺾으며 주저앉더니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마구 허비였다. 또 한놈이 날아들려고 했다. 곽일무는 바로 그 녀석의 이마빡에 총부리를 내대였다.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면서 이제 시작될 죽음과 류혈의 참극을 상상해보았고 웬일인지 빙긋이 웃었다. 한순간 모든것이 숨을 죽였다. 거친 숨소리도 멎고 어깨죽지의 타는듯한 아픔도 마주선 녀석들의 눈동자들도 멎었다. 그들의 뒤쪽에서 무료하니 편자신은 발을 투덕거리던 말과 방울소리를 절렁거리던 소들 그리고 우차군들이 뻐금뻐금 빨던 담배불마저 멎고 숨죽이고 꺼져버린듯 했다. 바로 그때였다. 굳어져버린 녀석들의 뒤쪽에서 《무슨 짓들이요?》 하는 나직하나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중절모 쓴 사람이 급히 걸어왔다. 《다들 비켜섯!》 그가 엄하게 말했다. 《동무도 그 총을 내리구.》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아귀센 줌안에 든듯 꼼짝하지 못했다. 《비켜서지 못할가!》 그가 어성을 높이자 녀석들이 와뜰 놀라며 물러섰다. 곽일무도 총을 내렸다. 그가운데로 중절모 쓴 사람이 들어섰다. 김책이였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상호등이 쳐들리고 전지불들이 껌벅이는 가운데 《빨찌산이다!》 하는 겁에 질린 속삭임이 사람들속을 바람처럼 스쳐갔다. 《동무가 곽일무지?》 김책이 물었다. 《예.》 《그런데 왜 싸우고있는거요. 이 사람들은 또 뭣때문에 와서 야단이요?》 《예, 이 사람들은》 하고 나선것은 둥글모자였다. 《쌀을 실어가겠다면서… 증명서도 가지구 왔습지요.》 역원이 내민 종이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김책이 또 물었다. 《누가 쌀을 실어간다는거요, 누가?…》 지금까지 날치던 녀석들은 김책의 엄한 눈빛에 모두 얼어붙은듯 했다. 《이게 어떻게 가져온 쌀이기에 감히 여기에 손을 댄단 말이요. 엉? 왜 말이 없소?》 그제서야 한 사람이 녀석들을 비집고 나섰다. 새까만 홀테바지에 역시 새까만 운두 높은 모직모자를 쓴 중년의 사나이였다. 빼빼 마른 키다리로 왼쪽 볼따구에 칼자리가 나있는것이 첫 눈에도 음험하게 보였다. 그는 김책의 눈앞에까지 이르러 정중히 인사하고 빙그레 웃었는데 볼따구의 칼자리가 벌레처럼 꿈틀했다. 《용서하십시오. 김책동지, 우리 애들이… 아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김책은 놀란 눈빛이였다. 《당신은 … 나를 아오?》 《알다뿐이겠습니까. 김일성장군님 휘하의 유명한 빨찌산출신 간부분을 왜 모르겠습니까. 참 실례했습니다. 제 소개를 미처 못드려서… 전 <희망단> 단장 서경팔이올시다.》 《그러니까…》 《예, 조만식선생의 지도를 받는 청년단입지요.》 《음… 그래 말하자는게 뭐요?》 《약간의 오해가 있었습니다. 김책동지, 조만식위원장님께선 적산물자량곡을 평양시안의 빈곤한 교인들에게 공급하라고 저희들을 파하셨는데… 이 량곡이 공산당에서 애써 마련한것인줄은 몰랐습니다. 철도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 통보를 해서…》 말을 하면서 그는 시종 묘하게 웃고있었다. 그러나 가늘게 좁혀 뜬 두눈만은 웃지 않았다. 싸늘한 랭기가 번뜩이는 눈길을 곽일무쪽에 돌리며 그는 계속했다. 《이 사람이 그런 사정을 한마디만 비쳤어도 이런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을텐데…》 그는 의도적으로 땅바닥에 구겨박혀 끙끙거리는 녀석들에게로 김책이 주의를 돌리도록 했다. 눈치빠른 녀석 하나가 화차벽밑에서 터진 머리를 싸쥐고있는 피투성이를 잡아일으켰다. 때늦지 않게 상호등불빛이 쳐들리며 피가 랑자한 그자의 얼굴을 환히 비쳐주었다. 김책이 날카롭게 물었다. 《동무가 이렇게 했소?》 《…》 곽일무는 아무말없이 혀를 깨물었다. 경위대원으로서 김책이 차지하는 위치를 잘 알고있었지만 입을 열수가 없었다. 얼음장같이 랭랭하고 무거운 침묵, 다음순간 돌연 홍금옥이 머리를 쳐들었다. 《아닙니다. 저 사람들이 먼저 싸움을 걸었습니다. 차를 들이대구 무작정 쌀을 실어가겠다면서… 모욕하구… 그래서… 그래서… 》 칼끝같은 시선으로 처녀를 노려보던 서경팔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또 소리없이 웃었다. 《옳습니다. 이 체네 말이… 우리 애들이 먼저 싸움을 걸었습지요. 제가 잘 신칙하지 못해서… 정말 이 사람한텐 죄가 없습니다. 정당방위라 할가…》 그는 여전히 묘하게 소리없이 웃으며 새파란 빛이 내뿜는 눈길을 곽일무와 홍금옥에게 비수처럼 내던졌다. 《이 사람들은 탓할게 없습니다. 대신 내 이제 우리 애들을 단단히 신칙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김책동지, 일이 이렇게 된바치고 저 방통의 쌀을 저희들이 다 부리도록 해주십시오. 화물창고에 넣으면 되겠습지요?…》 그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제편녀석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때를 기다리고있었던듯 그의 등뒤에 호위병처럼 붙어서있던 우악스럽게 생긴 자가 이발새로 휘파람을 홱 불었다. 《쌀을 부리자. 다들 이리와. 얼뜬 나서서 공산당을 돕자. 불이 번쩍나게!》 녀석들이 우르르 유개화차에 밀려올라갔다. 문짝을 활 열어젖히고 쌀가마니들을 지여나르기 시작했다. 자동차운전수들과 우마차군들도 다 몰아왔다. 녀석들이 하는 짓거리를 쓰겁게 보고있던 김책이 곽일무를 돌아보았다. 《동무, 수고했소.》 뜻밖이였다. 무서운 추궁이 있으려니 했던 곽일무는 시꺼먼 두손을 바지혼솔에 대고 비비적거렸다. 그리고는 아무 의미없이 목단추를 풀었다가 또 황급히 그것을 채웠다. 《도중에 별다른 일은 없었소?》 《예,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 작자들이 어떻게 알았을가. 기차에 쌀을 싣고온다는걸.》 《저… 오는도중 순천역에서 오래 지체했습니다. 차에 실은것을 어딘지 전화로 알리고서야 차를 출발시켰습니다.》 《음-》 김책은 잠시 생각하더니 보초설 사람들을 보내줄 때까지 쌀창고와 기계설비들을 지키라고 했다. 기계설비들은 부리지 말고 평천병기공장에 가져갈것이라고 일렀다. 《예, 알았습니다.》 《그리구》 김책은 나직이 계속했다. 《동문 경위대원이야. 이걸 잊지 말아야 해. 오늘 있은 일을 잘 생각해보고 래일 찾아오시오.》 《예.》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하고나서 곽일무는 머리를 떨구었다. 《희망단》패거리가 쌀을 다 부리우고 화물원이 쇠를 잠글 때 서경팔이 곽일무를 찾았다. 《님자주먹이 꽤 세더군.》 《?…》 곽일무는 흥흥 코를 불었다. 《그 총은 누가 메여주던가?》 《…》 어둠속에서 새파란 빛을 뿜고있는 그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뿐 이번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우리와 같이 일해볼 생각은 없나?… 난 용감한 사람들을 존경해, 왜 싫다?…》 《…》 여전히 입을 다물고 소리없이 웃고있는 그자를 노려보았다. 칼자리가 나있는 그 낯짝을 주먹으로 또 한번 짓이겨놨으면!… 하고 생각하며 거칠게 숨길을 내뿜었다. 《그럴줄 알았어.》 서경팔이 또 빈정거렸다. 《우리 하군 길이 다르니까. 그렇지만 우린 또 만나게 돼. 잊지 말라구 곽일무. 나는 기억력이 아주 좋아. 더구나 우릴 살틀히 쓸어준 님자야 왜 잊겠나. 잊지 못하지. 절대로!》 《나두 그렇소.》 하고 곽일무는 눈시울이 아프게 떨리는것을 느끼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절대 잊지 않겠소. 또 만납시다.》 《좋아, 그 배심이 맘에 들거든.》 서경팔은 아주 친절한 사이처럼 그의 잔등을 툭툭 쳐주기까지 했다. 《저기서 체네가 기다리는군. 그럼 난 가겠어. 잘 있게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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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책은 보안서원 두명을 쌀창고와 기계설비 경비로 보내주었다. 그들에게 깐깐히 인계해주고 홍금옥이 기다리는 화물역밖으로 나섰을 때에야 곽일무는 어깨죽지가 저려나는것을 느꼈다. 처녀에게 상처를 봐달라고 부탁했다. 홍금옥이 그를 역사앞 외등까지 끌고가더니 칼에 째진 천을 헤집어보고 기겁한 소리를 내질렀다. 《에구마, 이런 끔찍한 일이… 피가 엉켜붙었어요. 시꺼먼 피가!》 《내 피는 원래 시꺼매.》 《안되겠어요. 당장 병원에 가요.》 《무슨 소릴. 난 경위대로 가야 해.》 옥신각신했다. 흔히 젊은이들은 처녀들앞에서 괜히 엇드레질을 하고 트집을 잡고 심술을 부려보기가 일쑤이다. 곽일무도 다를바 없었다. 처녀가 안타까와 할수록, 자기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것을 느낄수록 더 엇서나가며 야릇한 기쁨을 맛보는것이였다. 결국 황금정네거리뒤쪽에 있는 처녀의 집에 들려 상처를 싸매기로 했다. 필요되는 약들도 있고 홍금옥이 간호원들 못지 않게 처치할줄 안다는 장담에 집도 구경할겸 잠간 들리기로 한것이다. 아직 추위는 시작되지 않았으나 11월의 밤은 어지간히 쌀쌀했다. 황금정에 주런이 처마를 잇대고있는 전골집, 선술집, 미용원, 양화점들에서는 아직도 맑고 따스한 불빛들이 흘러나왔다. 그 불빛에 비쳐진 가로수들에서 황이 든 잎사귀들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무슨 말이든 좀 하세요.》 참다 못해 홍금옥이 말했다. 《무슨 말?》 《아무거나.》 《난 말할줄 몰라.》 《아이참, 아직 거기선 부모형제들 얘기도 한적이 없지요?》 그랬었다. 처녀와 사귄지 한달이상 지났지만 그는 한번도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한적이 없었다. 김일성장군항일유격대의 지하공작원이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들은 일찌기 왜놈들에게 체포되여 무참히 학살당했었다. 그에게는 친척조차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한다. 아저씨로 부르는 항일혁명투사 안길동지가 있을뿐… 한때 열병에 걸려 생사기로에서 헤매던 안길을 그의 부모가 집에 숨겨두고 극진히 병구완을 했었다. 그때 병이 옮아 곽일무의 녀동생이 죽고 어머니 역시 중병에 신고했었다. 오래전 일이다. 그후 안길은 그의 가족을 찾기 위해 할수 있는껏 수소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생명의 은인들은 이미 오래전에 소문도 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리고 남은것은 곽일무 하나였다. 그 시절 곽일무는 무슨 일인들 안했으랴. 지주집 꼴머슴으로부터 금전판, 토목공사, 목재소의 처서판, 철도선로공… 해방이 되여서야 안길을 만났다. 아니 안길이 끝내 그를 찾아냈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잊을수 없다. 궤간자며 함마 등을 둘러멘 철도로동자들이 점심때가 되여 돌아오던 라진역홈에서 있은 일이였다. 그날 쏘련군인들이 호송하는 일본군패잔병무리를 가득 태운 기차가 방금 들어섰는데 갑자기 소동이 일어났다. 일본군병졸 몇놈이 열려진 유개화차문에서 뛰여내려 엿장수늙은이의 광주리를 나꿔챘던것이다. 늙은이가 울부짖고 홈에 나와섰던 사람들이 분격하여 떠들었지만 쏘련군호송병은 두팔을 쩍 벌릴뿐이였다. 굶주린 놈들이여서 별수 없다는것인지 아니면 놈들을 저혼자로서는 당할수 없다는것인지. 바로 그때였다. 광주리를 가운데 놓고 법석 끓고있는 일본군패잔병무리속으로 곽일무는 날아들었다. 웬 녀인의 물통멜대를 거머쥐고 닥치는대로 후려쳤다. 아츠러운 비명소리와 기겁한 울부짖음소리가 터지고 피방울들이 튀였다. 그의 벼락같은 돌입과 갈범같은 기상에 질겁한 놈들이 쓰러져 딩구는 놈들을 내버리고 화차안으로 뛰여들었다. 뒤늦게야 달려온 쏘련군 호송군관이 그의 손에서 물통멜대를 빼앗고 따발총을 든 쏘련군병사에게 그를 체포하여 끌고가라고 명령했다. 사람들이 항의했으나 그들은 알아들을수 없는 말을 웨쳐대며 그를 끌어갔다. 곽일무의 결의형제들인 선로공들이 격하여 웨쳐대며 뒤따랐다. 쏘련군관이 그를 수화물창고에 가두어넣고 어디엔가 전화를 했다. 성이 나서 고아대며 《까구일무, 까구일무》 하고 몇번이나 곱씹더라고 했다. 두세시간이 지나서 역에 나타난 사람이 곽일무를 찾았다. 이름을 확인하고 벌어진 일에 대해 묻고는 조용히 말했다. 《날 모르겠니?》 곽일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안길이다.》 《…》 《왜 말이 없니, 넌 그때 열한살이였지?》 《…》 곽일무는 고집스럽게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말고있는 그의 얼굴을, 슬픔이 어린듯한 이상스러운 표정을 지꿎게 쳐다볼뿐이였다. 《얼마나 찾았다구…》 안길이 계속했다. 《네가 떼군으로 일한다는 말을 듣고 토장에 가려던 참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만날줄이야… 한대 피우겠니?》 그가 내밀어준 담배를 받으면서도 입은 성문처럼 꽉 닫고있었다. 《그래 그동안 어떻게 살았니. 그런데… 참 이상하구나. 너 정말 내가 생각나지 않니?》 《생각나오.》 처음으로 그가 불쑥 내던진 말이였다. 두번째 담배를 말던 안길의 손이 굳어졌다. 얼굴은 해쓱하니 질리고 입술의 귀재기가 바르르 떨렸다. 《그런데 어째서?…》 곽일무는 몇초동안 그를 쏘아보다가 급기야 물동의 물목이 터진듯 격하게 부르짖었다. 《그래두 날 찾았다구요. 그런 말이 그렇게 쉽게 나가오?… 내가 부모동생 다 잃구 혼자서 비럭질할 때… 날 생각이나 했어요? 그래두 난… 아저씨라두 만날가 해서 사방 떠돌아다니면서… 그러다 병이 들어 죽어갈 때에두… 아저씨 이름을 부르면서… 울었는데… 기별조차 없더니 그래두 얼마나 찾았는가구요?》 안길이 벌떡 일어섰다. 물기에 젖은 눈을 번뜩이며 두두룩한 가슴을 풀떡이더니 그를 덥석 그러안았다. 《일무야, 내가… 내가 잘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미욱한 짓이였으랴. 그러나 안길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자고 먹으며 그림자처럼 붙어다니게 하더니 하루는 《최용진동지 앞》이라는 소개신을 써주면서 그를 평양에 올려보냈다. 그리하여 번화한 평양에 나타난 그가 처음 만나 친절한 길안내를 받은것이 인연이 되여 홍금옥을 사귀게 되였고… 끝내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스적스적 걸음을 옮기며 오고가는 행인들과 전차쪽을, 그리고 잎 떨어지는 가로수들을 새삼스레 둘러본다. 겨울이 오고있지만 마음은 흥거롭다. 처음 평양역에 내렸을 때에도 지금처럼 홍금옥을 따라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청사를 찾아갔었다. 그때는 사방을 두릿거리며 처녀가 묻는 말에도 왕청같은 대답을 하군 했었다. 그러던 그를, 시골청년에 감때사나운 눈빛을 가지고 가무잡잡한 얼굴을 고통스럽게 찡기고있던 쇠꼬챙이같은 자기를 이 처녀가 가까이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에게서 그 무슨 남다른 점이라도 발견했단 말인가?… 남다른 점이 있다면 고집불통에 격한 성미를 가진것이겠는데 산뜻하고 교양도 있어보이는 홍금옥이 그런 매몰스러운 점에 정을 느끼기는 만무한것이다. 그러면 무엇이겠는가?… 그날 평양역에 처음 내렸을 때의 일만 해도 그렇다. 안길이 써준 소개신을 들고 붐비는 사람들속을 헤집고나오다가 그만 편지를 잃었다. 주소와 략도까지 그린 소개신이였는데… 정신없이 돌아치며 서로 붙안고 울고 웃는 사람들, 누군가를 부르며 뛰여다니거나 헤매는 사람들의 발길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이 처녀, 귀엽게 보조개를 파며 웃고있는 홍금옥을 만났다. 《이걸 찾으세요?》 처녀의 손에 들려있는 편지, 곽일무는 난데없이 불쑥 눈앞에 나타난 처녀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그게 어떻게?…》 처녀는 대답대신 겉봉을 훑어보았다. 《북조선공산당… 최용진동지?… 참, 나도 이분을 아는데…》 곽일무는 편지를 나꿔채듯 하고 을러메였다. 《다치지 마오. 이건 안길동지가 쓴 편지요.》 《안길동지?》 처녀가 부르짖었다. 《그분도 알아요.》 《거짓말! 누굴 놀리는거요?》 《안다니까요. 평양에 오실 때 가실 때 내가 안내해드린걸요.》 《그렇소?》 곽일무는 안길에게서 그새 평양에 두번 갔다왔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럼 날 좀 도와주. 어데로 가야 하는지.》 그리하여 처녀를 따라갔다. 처음 주도일부관이 나오고 인차 뼈대가 굵고 눈섭이 시꺼먼 최용진이 나왔다. 선자리에서 편지를 읽고나서 그는 소리쳤다. 《그러니 네가 곽봉기동지 아들이란 말이지?》 그는 억센 두팔로 곽일무를 끌어안으며 별안간 갈린 목소리로 속삭이였다. 《안길동지가 끝내 찾아냈구나, 끝내 이렇게…》 그때 곽일무는 길안내를 해준 친절한 홍금옥은 감감 잊고있었다. 그를 붙안고 들어가던 최용진이 소리쳤다. 《가만, 체네한테 고맙다는 인살 해야지.》 그제야 처녀가 그자리에 서있는것을 보았다. 급히 다가가 불쑥 말했다. 《이름이 뭐요?》 최용진과 주도일부관은 물론 좀 멀찍이 서있던 보초병까지 소리내여 웃었다. 처녀의 수줍음 타는 표정과 사람들의 웃음에 골이 난 그는 얼굴이 벌개져 중얼거렸다. 《그런건 물으면 안되우?》 《…》 또다시 터진 웃음소리, 곽일무는 어성을 높였다. 《난 도끼모태요. 밤낮 도끼날에 맞는 놈이라구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더구만. 도끼모태 곽일무.》 《전… 홍금옥…》 이렇게 알게된 사이였다. 특별한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나 처녀의 단아한 모습은 늘 그의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역에 나가는 기회만 생기면 처녀를 찾아 자기의 판 달라진 모습을 뻐기며 멋없이 우둘렁거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녀의 이름 석자밖에 더 아는것이 없다는것도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하지만 처녀가 자기를 반갑게 맞아주면 그만, 가족 친척을 알아선 무엇하며 어떤 학교를 다녔는가 하는걸 알아선 또 무엇하랴. 계속 사귀느라면 저절로 죄다 알게 되는것이고 정이 깊어지면 그만인것이다. 따져볼것도 없고 저울질해볼 필요도 없다. 그따위짓은 부자집 도련님들이나 하는 숨박곡질이다. 드디여 처녀의 집앞에까지 다 왔다. 벽돌담장에 높직한 솟을대문이 위엄있게 막아 서있다. 곽일무는 주춤거렸다. 홍금옥이 이렇듯 큰 집에서 살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그였다. 《왜 그러세요, 일없어요. 우리 아버진 늦게야 들어오시구.… 어머닌 한번두 날 탓한적 없어요.》 그때 곽일무는 문패에 써있는 《홍근수》라는 이름을 새겨보며 추위를 타는듯 몸을 옹송그렸다. 《자 어서요.》 금옥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빨리 상처를 봐야죠. 세수도 하구.… 아이참, 지금 얼마나 험상궂게 보이는지 아세요?》 우리 나라의 그 어느 시골이나 도회지에 가든 모든 대문들은 안으로만 열린다. 솟을 대문이건 일각문이건 다름이 없다. 홍금옥이 조심히 대문을 밀어여는데 돌연 등뒤에서 《어험!》 하는 소리가 났다. 홍금옥이 머리를 피끗 돌려보더니 《아버지!》 하고 가늘게 부르짖었다. 단장을 든 양복쟁이 늙은이가 서있었다. 《음- 금옥이냐? 헌데 이 젊은인…》 《예, 저와 친한… 아니 잘 아는…》 하고 금옥은 잡고있던 손을 놓으며 당황하여 속삭이듯 얼버무렸다. 《급한 일이 있어서…》 《손님을 데려왔으면 어서 안으로 모셔야지.》 그는 키가 크고 강마른 몸에 웅근 목소리를 가진 점잖고 친절한 늙은이였다. 검은색 두루마기에 역시 검은색 털실로 뜬 모자를 쓰고있는데 너무 때이른것이긴 하나 늙은이의 정중한 몸가짐엔 잘 어울렸다. 대문안에 들어서자 정지간의 불빛이 세살문창호지를 뚫고 흘러나왔다. 늙은이는 그 불빛에 비쳐진 곽일무를 피끗 돌아보았다. 다음순간 그는 몸서리치는듯 했다. 《첨 뵙겠습니다.》 곽일무가 무척 늦어진 인사말을 어줍게 했으나 늙은이는, 금옥의 아버지 홍근수는 목에 경련이 이는듯 울대뼈를 움씰거리고 있었다. 희슥해진 눈시울을 실룩거리며 별안간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아버지?!…》 겁에 질린 금옥의 가는 속삭임, 홍근수는 흠칫했다. 그디여 이상한 목소리로 그는 중얼거렸다. 《아니, 그래선 안돼, 절대루… 안돼.》 《아버지, 웬일이세요. 예?!》 《안돼!》 떨리는 목소리로 그는 계속했다. 《우리 집에 총멘 사람은… 안돼!》 《아버지!》 홍근수는 팔소매에 매달리는 딸을 사납게 뿌리쳤다. 열병에 뜬것처럼 몸을 떨며 손에 쥔 단장을 쳐들었다. 《미안하지만… 나가주시오. 난 총멘 사람이… 질색이요, 그가 누구든… 이 집엔 들일수 없소.》 그제야 비로소 곽일무는 벌어진 사태를 깨달았다. 악몽에 가위눌렸을 때처럼 숨이 막히고 답답해났다. 구역질과 비슷한 혐오, 구린내가 목구멍을 틀어박는듯 했다. 다음순간 미칠듯한 분노의 발작이 온몸을 짓태웠다. 금시 쏟아지려는 껄낏한 욕지거리를 씹어삼키려니 이를 가는 부드득소리가 새여나왔다. 얼어붙어버린 금옥이쪽을 무섭게 스쳐보고나서 찢어진 목소리로 거쉬게 내쏘았다. 《그러니 날… 내쫓는거오다?!》 《미안하지만 제발…》 순간 곽일무는 총부혁을 꽉 움켜쥐며 문을 차고 뛰여나왔다. 어떻게 거리바닥을 내달렸는지 알지 못했다. 목재소에서 왜놈십장을 때려눕혔을 때에도 이처럼 미친듯이 달리지는 않았었다. 놈들에게 붙잡혀 뭇매질을 당할 때에도 이렇듯 분하지는 않았었다. 누린내나는 노새같은 그 늙은이한테서 받은 모욕과 성풀이를 하지 못한 분함때문에 두눈에서는 차디찬 눈물이 찔끔거렸다. 청사에 이르렀을 때에야 털썩거리며 걸음을 늦추었다. 불밝은 현관앞 느티나무아래에 김책이 서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