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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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최북단 남양. 김일성동지께서는 비내린 뒤끝의 두만강기슭을 천천히 거닐고계시였다. 뿌리채 드러난 물황철나무가 비스듬히 자빠져있는 자갈밭, 물우에 떠가는 통나무며 온갖 허접쓰레기들, 기슭의 잡관목도 비에 젖어 번들거린다. 사품쳐 흐르는 강, 두만강 저 너머엔 그이께서 항일전의 나날 피어린 발자욱을 찍으시던 잊지 못할 가야허, 석인구, 봉오동, 마촌, 량수천자, 부암동들이 있다. 연길, 룡정, 왕청, 훈춘도 지척이다. 이 강을 건너 온성지구로 진출하시던 그날로부터 세월은 많이도 흘렀다. 이 강물의 흐름처럼 쉬임없이 흐르고 또 흘렀다. 얼마나 많은 전사들이 이 땅을 밟으며 조국광복의 기쁨에 울고 웃을 그날을 피타게 갈망했던가. 그러나 끝내 조국광복의 오늘을 보지 못하고간 전사들이 많고많았다. 광복의 오늘에도 피흘리며 싸우다 그처럼 그리워하던 조국땅을 밟아보지 못하고간 박락권도 있다. 그리도 자신의 곁을 떠나고싶지 않아하던 그, 그리도 자신께로 다시 오고싶어하던 그, 그는 갔다. 다시는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였다. 그이께서는 장화코등에까지 물이 차오르는것도 느끼지 못하신다.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오고간 그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아픔과 비애가 가슴을 적시여 시간이 흐르는것도 느끼지 못하신다. 기적소리가 울려왔다. 그이께서는 천천히 머리를 돌리신다. 중국동북과 피줄처럼 이어져있는 철길, 10만정의 무기 《황색폭약》과 상해, 산동지구의 수많은 팔로군들이 저 철길로 강을 건너갔다. 그리고 오늘은 저 철길로 주보중, 황옥청이 오게 된다. 그들과 함께 강건도 오게 된다. 그러나 박락권은 오지 못한다. 하늘을 덮고있던 구름장들이 황황히 서둘러 먼 북쪽으로 밀려간다. 바람이 분다. 두만강의 여울물소리는 더욱더 소란해진다. 자갈밭을 지나 감탕이 널린 모래밭을 계속 걸으신다. 무거운 발자국, 발자국이 찍히기 바쁘게 거기에 물이 가득 고여넘친다. 강기슭에 면한 제방길에서는 승용차가 뒤따른다. 그이께서 걸음을 멈추시면 뒤따라 멎고 다시 걸음을 옮기시면 또 굴러온다. 대여섯보 떨어져 따라서는 부관(손종준)의 발걸음소리는 거의나 들리지 않는다. 또 그의 뒤에서는 머리를 짓숙인 안길이 차마 그이를 따라서지 못하고 혁띠고리를 꽉 움켜쥐고있다. 또다시 울려오는 기적소리, 그것은 목메인 박락권의 웨침소리는 아닌가? 《장군님, 제가 갑니다. 박락권이 갑니다!》… 찌프린 하늘에서 밝은 해살이 뚫고나오다가 금시 사라졌다. 여전히 물결치는 소리뿐. 기차는 얼마후에야 나타났다. 중국당에서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하여, 동북에서의 최후승리를 위한 방책을 토의하기 위하여 그이와 두터운 친분관계를 가지고있는 주보중을 파견한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함북도내의 보안간부훈련소 제2소와 공장기업소들을 현지지도하시는 기회에 그를 남양에서 만나기로 하시였다. 강건으로부터 보고된 박락권의 희생에 대한 소식만 아니라면 얼마나 반가운 상면이였으랴. 그이께서는 걸음을 멈추고 안길을 돌아보시였다. 멀찌기 떨어져 망두석처럼 굳어져있는 안길, 그의 눈언저리는 퍼렇게 멍이 들어있는것 같다. 《갑시다.》 마침내 그이께서 말씀하시였다. 《손님들이 왔는데 늦어지겠소.》 그제서야 안길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그이께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재빨리 무슨 티라도 들어간것처럼 눈언저리를 비비는데 악문 이새로 새여나오는 신음소리만은 끝내 감추지 못했다. 그이께서는 눈길을 돌리시였다. 돌아오시는 차안에서도 무거운 침묵은 가셔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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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중도 그의 이름만은 꺼내지 않았다. 묵직한 목소리로 서둘지 않고 모택동동지와 중국공산당 중앙에서 보내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조선에서 보내준 무기와 탄약, 폭약을 받아안고 기뻐 날뛰던 팔로군전사들에 대하여, 조선경내를 거쳐 동북전장에 진출하고있는 팔로군부대들에 대하여 오래도록 말했다. 또한 길동분구사령부의 조선인사단들이 장춘을 해방함으로써 동북민주련군 주력부대들이 장춘을 거쳐 할빈, 목단강일대로 진출하게 된 과정을 세세히 설명하면서도 박락권의 이름은 꺼들지 않았다. 그와 같이 온 황옥청도 주보중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일뿐, 무릎우에 두손을 얹고 입을 꾹 다물고있었다. 주보중의 왼쪽에는 강건이 앉아있었다. 그도 지금은 주보중의 일행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도 역시 박락권에 대하여 묻지 않으시였다. 여느때나 다름없이 유심히 듣고계실뿐이였다. 이따금 옆에 앉아있는 안길에게 묻는듯한 시선을 옮기시면 안길이 조선경내를 거쳐간 팔로군부대들 혹은 렬차편성에 대하여 조용히 짧게 말씀드리군하였다. 이윽고 주보중은 모택동주석의 지시에 의하여 《료심전역》이 곧 시작되며 결정적인 공격에로 이행할 제반조건이 성숙되였다고 말했다. 오늘따라 그는 지나치게 진중하고 엄숙했다. 《존경하는 김일성동지, 이 모든 성과는 전적으로 김일성동지께서 적극 성원해주신 결과에 이룩된것입니다. 물론 아직 시련은 많겠지만 우리가 주도권을 잡게 되였다는것은 명백합니다. <료심전역>의 승리는 멀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승리를 믿어마지 않습니다.》 그이께서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자 그럼 공식적인 연설은 그만하고 걸린 문제를 의논합시다. 격식을 차릴게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더 지원하면 좋겠는지 말씀하십시오.》 《아, 아니, 그럴순 없습니다. 진운동지도 귀국의 어려운 사정에 대하여 계속 말하던데…》 《우리가 아직 넉넉치 못하다는것 말입니까. 하지만 없는 사람에겐 주고싶은 마음이 있고 또 줄것이 있지만 넉넉한 사람일수록 주고싶은 마음도 줄것도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이께서 소리내여 웃으시자 주보중은 커다란 두손을 비비적거리며 입귀를 약간 들었다. 《사실 저야 김일성동지께 한두번만 지원을 요청했습니까. 지난시기 어려울 때마다 전투경험이 많은 용감한 싸움군들을 보내달라, 지휘관들을 보내달라 또 직접 오시여 좀 도와달라, 무기를 달라… 정말 하나하나 꼽자면 끝이 없을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보중동지, 그때는 항일련군지휘관으로서 부탁했지만 지금은 중국당을 대표하고있지 않습니까.》 그이의 말씀에 주보중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눈길을 떨구고 잠시 생각하는듯 했으나 끝내 강건에게 눈길을 옮기는것이 그에게 부탁하는듯 했다. 강건이 그를 대신하여 말씀드렸다. 《장군님, 지금 민주련군부대들은 군복과 의약품이 부족하여 곤난을 겪고있습니다. 특히 의약품이 부족하여 수많은 부상병들이 생명을 잃고있는 형편입니다.》 《해결해봅시다. 군복천과 의약품… 안길동무, 시급히 방도를 찾아봅시다.》 《예, 알겠습니다. 장군님.》 안길이 수첩에 재빨리 적어넣는것을 스쳐보며 그이께서 또 물으시였다. 《그 다음 또 없겠습니까?》 《아니 김일성동지, 인젠 됐습니다. 더는 없습니다.》 《그럼 인젠 제가 좀 부탁할가 합니다.》 그이의 이 말씀에 주보중은 반색을 했다. 《예, 어서 말씀하십시오. 김일성동지.》 김일성동지께서는 즉시 말씀을 잇지 않으시였다. 손에 들고있는 연필을 뱅뱅 돌리며 차츰 굳어져가는 주보중과 황옥청을 묵묵히 지켜보시였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크지않은 목조건물이여서 창문은 작았다. 그러나 거기서 마음의 문을 활 열고서 물결쳐 흐르는 두만강 저너머 멀리 포연이 자욱한 전장을 보고계시였다. 박락권이 희생된 장춘, 그가 무은 대대와 중대들이 지금도 피흘려 싸우는 동북땅… 하고싶은 말씀은 많았건만 불현듯 목이 잠기는것을 어쩔수 없으시였다. 이윽고 창가에서 돌아서시였을 때 그이의 음성은 갈려있었다. 《주보중동지, 저의 부탁은… 인제는 동북에서 공세에로 이전하고 승리가 명백해진이상 우리 동무들을 소환할가 하는데…》 순간 주보중은 무엇인가 목에 걸린것을 꿀꺽 삼키는듯 했다. 자리에서 움쭉 장대한 체구를 일으키며 그는 말을 떠듬거렸다. 《김일성동지, 전… 정말이지… 무어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이번엔 그이께서 저으기 놀라신 표정이였다.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김일성동지, 전…압니다. 김일성동지께서 얼마나 아프신 마음을 안고계시는가 하는걸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시는줄… 압니다. 박락권, 그 사람을 잃고… 온밤 잠못드셨다는 얘길 저도 들었습니다. 이제 더이상 가슴아픈 희생을 내고싶지 않아 마음쓰시는줄… 다 알고있습니다.》 《…》 그이께서는 침통한 표정을 짓고있는 그를 잠자코 바라보시였다. 주보중, 체대가 크고 말상인 그는 과묵하고 배짱이 드센 사람으로서 거의나 눈물과는 인연이 없었다. 운남성의 백족이라면 중국에서도 158개 종족중 제일 고집이 세고 괴벽하여 애당초 접촉을 말라고 한다는데 주보중이야말로 운남성백족의 전형적인 대표자라고 할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두눈에서는 눈물이 끓고있다. 하얀 두볼이 푸들푸들 떨리고 부르쥔 주먹도 떨고있다. 《사실 전…》 그가 계속하는 말이였다. 《김일성동지를 만나뵐 면목이 없어 이번 걸음을 진운동지에게 또 떠넘길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오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내 생명의 은인이며 우리 중국혁명의 특등공신인 박락권을 잘 돌보지 못한것을… 빌고싶었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주보중동지.》 《아닙니다. 그 사람을 떼여간게 누굽니까. 김일성동지곁을 떠나고싶지 않아 눈물흘리는 그 사람을… 그리고도 계속 고생만 시키다가 이렇게 나 혼자 왔으니 면목이 없습니다. 김일성동지!》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가 후들후들 떨고있는 그의 두손을 꽉 잡아주시였다. 《주보중동지, 안됐습니다. 그만 아픈 마음을 제가 건드렸나 봅니다.》 《김일성동지!》 끝내 박락권의 이름이 불리워진이상 가슴에이는 아픔과 슬픔을 감출 필요는 없다. 그이께서는 남달리 인연이 깊은 중국의 오랜 혁명가, 친근한 전우이며 벗인 주보중의 손을 뜨겁게 부여잡고 이윽토록 놓지 못하시였다. 귀중한 전사를 잃은 아픔을 서로의 뜨겁게 맥박치는 피줄의 박동으로 나누시였다. 이럴 때엔 말이 필요없다. 진정한 슬픔과 아픔은 말로써 표현되는것이 아니다. 강건도 안길도 황옥청도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떨구고있었다. 혁명에 충직한 전사 박락권의 희생은 이렇듯 경건히 추모되고있었다. 그들은 다같이 포차에 실린 령구를 따라나선 수천수만에 달하는 사람들의 비통한 흐느낌소리를 듣고있었다. 장춘의 하늘가에 메아리치던 조총의 일제사격소리를 듣고있었다.… 얼마나 많은 열혈의 혁명전사들이 이렇게 갔던가?…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추억속에 살아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동북전장에서 피흘려 싸운 수많은 전사들에 대하여 자주 말씀하시였다. 《…강건은 동북에 가서 분구사령관을 하고 최광, 박락권, 남창수는 각각 련대장을 하였습니다.》 계속하여 그들의 투쟁과정에 대하여, 박락권 등의 영웅적최후에 대하여 추억하시며 이렇게 계속하시였다. 《그때 우리 동무들이 조직한 무장대오가 그후 동북해방작전은 물론 우리 나라 군건설에도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수십년세월이 흐른뒤에 있게될 일로써 아직 동북의 전장에서는 류혈적인 격전의 총포성이 그치지 않고있었다. 회담은 계속되였다. 중국동북해방과 관련된 정치적 및 물질적지원문제가 구체적으로 토의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