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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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락권의 부대는 어언 2만명으로 늘어났다. 련락병들도 왕진을 포함하여 4명으로 불어났는데 늙수그레한 마사원 리복만까지 붙어있었다. 왕진은 련대장을 그림자처럼 묻어다니며 부관격으로 행세했으나 사실상 전투상보를 비롯한 온갖 사무처리는 전적으로 무선수 정희의 사업범위에 들어있었다. 새로 증편되면서 참모부성원들은 말할것도 없고 련락병들과 마사원까지 정신 차릴새없이 돌아치지않으면 안되였다. 특히 4명의 기마련락병들은 수시로 변동되는 정황과 보고, 명령을 전하기 위하여 관하의 대대 및 독립중대들로 말을 달리군하였다. 세개의 보병대대와 포병중대, 기병중대외에 독립적인 공병, 통신병, 위생병, 치중병구분대들이 있다. 동북각지에서 살던 수많은 조선인청장년들이 모여들었는데 특히 연길, 화룡, 돈화, 무송 등지의 동만사람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였다. 그곳은 바로 김일성장군님께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시던 시기의 중요근거지들로서 혁명적으로 각성되고 단련된 인민이 살고있는 지역이였다. 장군님께서 파견하신 림춘추의 활약도 컸다. 그는 연변지구정권기관의 총책임을 진 연변전원공서 전원으로서 동북을 지키는것은 곧 조국을 지키는것이라고 사람들을 불러일으켰다. (사실상 그들의 시점에서는 동북해방전이 아니라 동북방위전이였다.) 지금 박락권의 련대지휘부는 해룡에 있다. 이전 경찰관주재소의 2층짜리 벽돌건물이였다. 해가 잘드는 2층 가운데방이 련대장의 방이였으나 그는 거의나 방을 비우고있었다. 대대와 중대의 지휘관들이 전투상보를 가지고 와도 밖에서 지도를 펴놓군하였다. 말안장을 내려놓고 그우에 앉아 땅바닥에 펴놓은 지도를 들여다보며 묵묵히 보고를 듣고 즉시 짤막하게 명령을 내리군했다. 저녁무렵이였다. 물초롱멜대를 멘 정희가 뒤뜰안에서 나오다가 비틀거리는것을 보고 말배띠끈을 조이고있던 왕진이 급히 달려갔다. 《그걸 인줘요.》 왕진이 멜대를 빼앗는것이 보였다. 박락권은 그쪽에 얼핏 눈길을 주었으나 다시 땅바닥에 펴놓은 지도를 들여다보며 대대참모장의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대대는 왕청문일대에서 국민당군의 동만진출을 저지시키고있다. 《통화사변》(국민당군 특무들의 사촉을 받고 일본군패잔병들이 일으킨 무장폭동)때 팔로군의 위기를 막아준 그날로부터 줄곧 통화이북에서 활동하고있다. 《왕청문은 내주어도 되오.》 박락권은 지도를 짚으며 말하였다. 《중요한것은 철도요. 국민당놈들이 절대로 통화, 해룡으로 오가는 이 철도를 리용하지 못하게 숨쉴새없이 답새겨야 해. 철도만 장악하면 놈들의 목줄띠를 물고 늘어진것이나 같소. 무슨 말인지 알만하오? 언제든 우리 장군님께서 가르쳐주신 전법대로 싸워야 해. 정규전과 유격전의 배합, 이게 바로 우리 식이요. 대대장에게 그렇게 말하오.》 《알았습니다, 련대장동지!》 대대참모장은 두명의 대원들과 같이 왔었다. 그들이 말잔등에 오르려는것을 박락권이 막았다. 《밥시간이 다됐는데 그냥 가겠소?》 《괜찮습니다. 련대장동지.》 대대참모장이 히죽 웃었다. 《로획한 건빵봉지들이 있는데 가면서 먹겠습니다.》 그새 배불리 먹은 말들이 세차게 투레질을 했다. 박락권은 말탄 기수들이 멀리 사라져갈때까지 한자리에 그냥 서있었다. 그도 말을 달리며 전장에서 싸우고싶었다. 그러나 2만명의 대오로 늘어난 련대(실제로는 사단이상의 무력이였다.)를 지휘하는 그여서 무모한 객기는 삼가해야 했다. 가능한 장군님의 가르치심대로 정규화된 대대와 중대의 지휘관들을 실전에서 잘 키워야만 했다. 왕진이 누빈 솜옷을 들고나왔다. 지난해 겨울 련대장이 고열로 신음하던 때부터 특별히 그의 건강에 관심을 돌리는 왕진이였다. 련대장이 낯을 찡기며 기침소리만 내도 왕진은 낯색이 하얗게 질리군 했다. 박락권은 그가 내미는 솜옷을 어깨에 걸치며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요새 무선수가 왜 그 모양인가. 눈이 떼꾼해지지, 밥도 잘 안먹지. 앓는게 아닌가?》 왕진은 대답에 앞서 가느다랗게 한숨부터 지었다. 《련대장동지, 그건 병이 아니구…》 《그럼 뭔가?》 《저…》 왕진은 얼음을 들쓴듯 어깨를 옹송그렸다. 《그건… 그건 잘 … 모르겠습니다.》 《련락병! 동문 알구있지?… 둘이서 수군거리군 하는걸 내가 모르는줄 알구. 어서 말해봐. 무슨 일이 있는게 아니야? 무선수가 병을 숨기구있지?》 《아 련대장동지!》 왕진은 뒤걸음쳤다. 어린 나이에 늙은이같이 가는 주름살이 덮인 이마살을 찌프리며 안타까움과 원망에 찬 눈빛으로 련대장을 쳐다보는데 금시 눈물이 나올것 같았다. 그때 앞길에서 말발굽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피끗 머리를 돌린 박락권은 토벽집들이 줄지어 늘어선 거리로 달려오는 마차와 말탄 사람들을 보았다. 전날의 항일련군시절 복장을 하고있는 사람들. 먼지발이 뽀얗게 일었다. 한순간 박락권은 마차우에서 팔을 내젓고있는 사람을 알아보았다. 《전윤필?!…》 마차가 열려진 대문안으로 들어서자 전윤필이 뛰여내렸다. 《박락권!》 그가 소리쳤다. 《잘 있었나?》 박락권은 말없이 다가갔다. 빙긋이 웃으며 마주보고는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또 마주 보았다. 《나는 또 부의황제라도 행차하는가 했군. 숱한 기병들을 거느리구.… 무슨 도깨비바람이 불어 여기까지 왔나?》 《숨부터 좀 돌리구 말하세.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네.》 《원 저런! 사령부는 못사는구만》 박락권은 왕진에게 빨리 정희를 도와 저녁을 차리라고 하고 마사원 리복만과 다른 련락병들은 같이 온 사람들과 말들을 봐주라고 일렀다. 서로 껴안다싶이 하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전윤필은 길동분구사령부의 부사령관겸 정치주임이다. 오래전 김책과 같이 지하활동을 하다가 김책의 권유로 일본에 공부하러 갔었다. 그때 김책은 조국광복의 그날이 멀지 않은것으로 보고 광복된 래일을 위해 경제를 전문하는 일군을 키우기로 마음먹었던것이다. 일본에서 전윤필은 경제학을 공부하는 한편 일본공산당 조선지부에서 출판선전부문을 담당했었다. 그러던중 역시 일본공산당에서 활동하던 김천해와 같이 체포되여 북해도의 아시바리감옥에 갇히였다. 아시바리감옥은 오호쯔크해쪽 절벽에 있었는데 한번 들어가면 다시 살아오지 못한다는 《몽떼 그리스또백작》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이프성새 같은곳이였다. 거기서 그는 김일성장군님께서 파견하신 한 공작원을 알게 되고 《조국광복회10대강령》도 받아안게 되였다. 그것이 꺼져가던 그의 생에 불씨를 심어주었다. 기적적으로 감옥을 탈출하자 장군님을 찾아 동북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박락권을 만나 그의 전우로 되였다. 그러나 그는 어느모로 보던지 싸움군이라기보다는 조직자형의 활동가였다. 현재 남창수련대의 전신인 화룡중대의 조직자도 바로 그였다. 전윤필은 강건의 특별지시를 가지고 왔다. 무선통신으로 알릴수도 있었으나 제기된 문제의 중요성에 비추어 강건은 전윤필을 직접 보냈던것이다. 《지금 심양, 금주, 사평에서.》 하고 그는 절대 서둘지 않는 자기의 성미 그대로 느릿느릿 말했다. 《팔로군과 국민당군대간에 결전이 벌어지고 있네. 여기서 팔로군이 적들의 사등뼈를 꺾어놓는가 못놓는가에 따라 이후 주도권을 쥐는가 계속 밀리는가 하는게 결정된다고 쌍방이 다 생각하는가 보네. 그래서 중국당에서는 우리 장군님께 지원을 요청했다네.》 《지원?… 장군님께 말인가?…》 《응. 상해지역과 산동군구의 주력부대들을 배로 수송하여 우리 나라 남포, 해주항을 거쳐 동북에 이동시키는것과 10만정의 무기를 달라고 했다는걸세.》 박락권은 너무도 뜻밖의 일이여서 입을 벌린채 굳어져있었다. 《지금 그 무기들이 들어오고 있네. 해상으로 이동하는 부대들도 곧 도착할 예정이라고 하네. 그렇게만 되면 동북에서의 승패는 결정된것이나 같지. 큰 전쟁이 터지고있네. 수백만 군대가 동북땅에서 서로 피의 결전을 벌리게 된단말이네.》 박락권은 꿈을 꾸는듯 저녁노을이 불타고있는 창가를 멀거니 보고있었다. 큰 전쟁이든 작은 전쟁이든 그는 놀랍지 않았다. 한생 전장에서 싸우며 끔찍한 변도 수없이 겪었고 피와 죽음에 습관되여 온 그였으므로 전윤필이 강조하는 《결전》도 꿈만 했다.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수천수만(아니 수십수백만인지도 모른다.)에 달하는 중국사람들도 조선땅을 밟으며 오고있는데 그는 가지못하고있는것이다. 수천수만리를 헤쳐왔건만 아직도 조국으로, 장군님께로 가는길은 멀고 또 멀다. 그는 전윤필이 그 무슨 전보에 대하여 말할 때에도 다른것을 보고있었다. 가늘게 쪼프린 눈속에서 빨간빛이 뛰놀았다. 즐거운 추억, 아니 추억이 아니라 꿈이였다. 꿈, 꿈이란 얼마나 좋은것이랴. 그는 조국의 바다기슭 모래불을 뛰여가는 자기와 정희를 보고있었다. 오늘의 그와 정희가 아니라 아주 죄꼬만 더벅머리사내애와 계집애가 서로 손을 잡고 달려가는것을 보고있었다. 처절썩이는 파도, 따가운 모래불, 한번도 보지못한 바다였지만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보고있었다. 《여보게 듣나?》 전윤필이 그의 팔굽을 건드렸다. 《응, 듣네.》 《동북민주련군사령부에서는 우릴 장춘해방전투에 진입시키기로 했네. 그들은 전투력이 강한 길동분구사령부의 2개사단을 장춘해방전투에 진입시킬것을 모택동동지에게 제기하고 비준받았다네. 자네 박락권과 최광동무의 두개사단말일세. 그들은 2만명에 달하는 우리의 련대들을 사단으로 알고있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나?… 모를테지. 그럼 들어보라구. 귀가 번쩍트일 그런 소식을 내 말해주지.》 박락권은 두눈을 잔뜩 좁히며 그를 노려보았다. 《빙빙 에둘지말구 빨리 말하게.》 《너무 조급해말게. 귀한 선물일수록 포장이 많다네. 철함속에 나무함이 있고 나무함속에 또 자기박이함이 있고 비단보자기를 또 몇겹 풀어야 진주보석을 볼수 있는법이야.》 《젠장!》 《그럼 들어보라구.》 전윤필은 그 누가 엿듣기라도 할가봐 겁내는듯 박락권의 귀전에 입을 가져가며 속삭이였다. 《얼마전에 모택동동지의 특사가 우리 장군님을 만나뵈왔을때 장군님께서 말씀하셨다더군. 조선경내로 팔로군의 대이동을 보장해주겠다, 10만정의 무기도 보내주겠다, 그대신 장춘, 할빈, 사평 등 대도시들을 장악하고 공세에로 이전하게 되면 우리 사람들을 소환하겠다, 강건, 박락권, 최광, 공정수, 남창수 그리구 나 전윤필의 이름도 꼽으시며 우리의 군건설이 이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있다, 우리의 의사를 모주석과 당중앙에 보고해달라, 이렇게 말씀하셨다는거네.》 《?!…》 박락권은 꿈을 꾸는듯 했다. 어인 일인가. 정녕 오늘은 꿈을 꾸는 날인가!… 전윤필의 두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거친 숨소리를 퍼부었다. 《그러니 장춘해방전투만 끝나면… 간다는거지. 응, 그렇지?》 《아 이런!》 전윤필은 손을 내저었다. 《내 말하지 않던가. 장춘, 할빈, 심양, 금주, 사평하고 말이네. 그렇지만…》 《같은 말이네!》 박락권이 소리쳤다. 《아무튼 조국으로 돌아갈날이 눈앞에 왔다는거지. 안 그런가?》 《응.》 《됐어, 됐어. 당장 장춘을 공격하세. 당장!》 터질것같은 흥분을 가라앉히기까지 적지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박락권의 두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전윤필이 말했다. 《지도가 있나?… 꺼내놓게. 련대의 진출로정을 말해주지!》 그리하여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들여다보기 시작하였다. 지금 박락권이 틀고앉은 해룡과 장춘, 사평은 정삼각형으로 그릴수 있었다. 삼각형의 두 점은 장춘과 사평이였고 나머지 한점은 해룡이였다. 지금 팔로군의 14개 사단이 국민당군 20여개 사단과 결전을 벌리기 위해 금주, 심양, 사평으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장춘해방전투는 보조방향으로써 적의 력량을 분산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조직된것이다. 박락권련대의 진출로정은 철도가 아닌 원시림과 새초숲 우거진 평원지대로 그어졌다. 장춘해방전투의 주공방향은 박락권의 제1련대에, 보조방향과 엄호는 최광의 제2련대에 주어져있었다. 박락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벌써 귀청을 찢는 총포성과 공격의 나팔소리를 듣고있었다. 심장은 들뛰고 호흡은 거칠어졌다. 시커먼 얼굴의 우묵하니 패여 들어간 두볼을 흠칫거리며 그는 말했다. 《이제 곧 부대들에 명령을 내리겠네.》 대대와 중대들에 즉시 련락병들을 띄웠다. 래일 아침 8시까지 반석에 집결하라는 명령이였다. 방에 돌아 왔을때 전윤필은 밥그릇을 놓고 정희와 무슨 이야기인가를 나누고있었다. 그런데 정희의 얼굴이 새파란 빛이 돌만큼 해쓱해져 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박락권이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없이 나가버렸다. 박락권은 마치 자기의 그림자라도 잃은듯이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앉게.》 전윤필이 말했다. 《이제 더는 시장기를 못참겠어. 배속에서 뭔지 막 허벼대는 판일세.》 그는 성급하게 좁쌀보리밥과 짠무우쪽을 그리고 정희가 특별히 준비한 두부와 콩찌개 등을 닥치는대로 입에 쓸어넣고 나서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무선수가 어떤가?… 똑똑하구 착실하구 귀여운데두 있지. 안 그런가?…》 박락권은 혀가 굳어진것처럼 갑자르며 대답했다. 《응, 그-그래.》 전윤필은 여전히 배를 채우는데 급급했다. 이쪽은 보지도 않고 볼이 미여지게 입에 떠넣은것을 씹어 삼키며 또 말했다. 《이번에 도루 데려가겠네. 강건사령관이… 꼭 데려오라면서… 대신 한사람을… 거 목이 기다란 청년을 봤나?… 그가 바로 대신 온 무선수일세.》 정신없이 퍼먹느라고 전윤필은 이쪽에서 저가락을 거꾸로 쥔채 굳어져 버린것을 보지못했다. 박락권은 무엇인가 가슴 한끝을 뜨끔하니 깨무는 아픔에 숨도 제대로 쉴수가 없었다. 눈앞의 그릇에서 무엇인가 집으려 했으나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허덕이듯 낮고 거칠게 물었다. 《왜 데려가나?》 《룡정에 군정대학을 내왔네.》 《군정대학?… 아니 싸움판에 대학이란건 또 뭔가?》 《가만 있게. 내 말을 마저 들으라구. 장군님의 군건설방침을 받들고 여기서도 간부들을 키워야 할게 아닌가!》 《장군님께선 전투에서 단련된 좋은 지휘관감들을 많이 키우라고 하셨네. 나한테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다니까!》 어떻게 하든 박락권은 자기의 무선수를 데려갈 리유를 부정하려는것이였다. 《그야 물론!》 전윤필이 대답했다. 《실전에서 단련된다는거야 아주 좋은 일이지. 허지만 탄도학이랑 군사지형학, 포병관측 같은걸 주먹구구로 할수야 없지 않나. 통신기술은 더 말할것도 없구. 이런걸 과학적으로 배워야 하지. 그러자면 수학, 기하학도 알아야겠지?… 그래서 정희동무가 필요된거네. 기초과목을 배워줄만한 사람들이 얼마 없거든. 헌데 이사람, 왜 들지 않나. 같이 들자구. 시간이 급한데…》 《…》 박락권은 여전히 굳어진 모양 그대로였다. 별안간 아무 생각없이 밥만 퍼먹고있는 자기의 친구 전윤필을 둘러메치고 싶은 생각이였다. 거친 숨소리가 새지않게 입을 악물며 눈섭을 흠칫거렸다. 그러나 다음순간 정희를 위엄한 전쟁판에 계속 끌고 다닐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앓고있다. 무슨 병엔가 단단히 걸린것 같은데 그걸 숨기고있다. 왕진이 그 녀석은 아는것 같지만 내게는 숨기고있다. 여기서 박락권 자기곁에서 쫓아버릴가봐 정희가 부탁했는지도 모른다. 드디여 전윤필은 숨이 좀 나가는듯 했다. 머리를 들고 웃으며 그가 말했다. 《그 동문 떠나기 싫은가봅데. 한마디 말도 없는게… 그새 여기 사람들한테 정이 들었겠지. 아무렴, 그럴수밖에.》 《…》 끝내 박락권은 아무말도 하지않았다. 말을 하고싶어도 할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저릿저릿한 아픔과 함께 미적지근한 느낌이, 일종의 안도감 같은것이 겹치여 머리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였다. 밖에서는 행군준비로 소란스러웠다. 말들이 사방으로 뛰여다니고 공급중대의 마차들이 왈가당거렸다. 그들은 밖으로 나갔다. 혁띠를 졸라맨 정희가 다가왔다. 《그래야지.》 전윤필이 말했다. 《자기를 키워준 련대장인데 작별인사를 해야지.》 그는 말을 메우고 있는 마차쪽으로 걸어갔다. 박락권은 정희의 얼굴이 그리도 태연한데 놀랐다. 《가겠소?》 《예, 가야죠, 상급의 지시이니까요.》 락조의 여광이 정희의 얼굴에 불그레한 빛을 던졌다. 정희는 짧게 자른 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기고 옷주머니를 더듬었으나 무엇인지 찾지못하고 부스대더니 피기가 싹 가셔진 얼굴에 좀 애처로와 보이는 웃음을 띄였다. 《배낭에 속옷이랑 양말이랑 넣었어요. 아직 채 마르지 않은것도 있는데… 아무튼 몸을 잘 돌보세요. 손발이 차지 않게… 그리구 전투때 너무… 됐어요. 제 말을 들을게 뭐람.》 《내 꼭 찾아가겠소. 전투를 끝낸 다음… 기다리겠지?》 어인일인지 정희의 눈에서 가냘픈 미소마저 사라졌다. 《제발 부탁하는데… 몸조심하세요.》 그리고는 몸을 홱 돌려 마차있는데로 뛰여갔다. 전윤필이 손을 내밀어 그를 들어올렸다. 박락권이 소리쳤다. 《잘 가오!》 말들이 코를 울리고 메마른 땅을 편자 박은 발로 투덕투덕 굴렀다. 서로 웨치는 인사말속에 채찍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움직이자 호위하는 기병들이 고삐를 나꿔채며 앞질러 혹은 뒤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서쪽하늘을 물들이던 락조의 여광마저 스러져갔다. 어둠이 깃들며 불시로 추워지기 시작했다. 박락권은 고열로 신음하던 때처럼 후들후들 몸을 떨며 안장을 얹어놓은 자기 말께로 걸어갔다. 두필의 말고삐를 잡고있던 왕진이 그를 멈춰세웠다. 아니, 눈물에 젖어있는 그의 늙은이 같은 얼굴이 그를 멈춰서게 하였다. 《련대장동지, 왜 보냅니까. 예?》 그가 부르짖었다. 《그렇게 무정하게… 어쩌문 그럴수 있습니까. 련대장동지?!》 《왜 그래, 그건 무슨 소린가?》 《가고싶어하지않는 사람을… 정말 련대장동진 너무합니다.》 박락권은 버럭 성을 내였다. 《나는 뭐 보내고싶어 그러는줄 알아? 그는 앓고있어!》 《예? 앓는다구요?》 왕진은 억이 막힌듯 신음소리처럼 내뿜었다. 《누가 앓는다구 그럽니까. 련대장동진 정말… 그것도 모릅니까? 나두 아는데…》 《도대체 뭘 안다는거야?》 여느때 같으면 왕진의 그 무엄한 태도에 눈이 휘둥그래 졌을것이다. 감히 련대장앞에서, 자기가 그처럼 존경해온 상급앞에서 제멋대로 뇌까리고 지청구를 하는 련락병을 가만두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지금 박락권은 그런것에는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괘씸하기 짝이 없는 왕진이 녀석을 무섭게 쏘아보며 그는 재차 소리쳤다. 《왜 말을 못해. 엉?!》 《련대장동지, 이건 정말… 난… 난 다 아는줄 알구… 알면서도 모르는체 하는줄 알구.… 우리 어머닌…》 《왕진이! 어머니가 여기 무슨 상관이야?》 마침내 왕진은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어머닌… 아홉남매를 낳았습니다. 내뒤에두 다섯이나 더… 났어요. 다 죽긴 했지만… 그래서 난… 아는데… 련대장동지두 그런거 다 아는가 했습니다.》 《?!…》 무엇인가 가슴을 찌르는것이 있었다. 박락권은 갑자기 왕진의 어깨를 꽉 그러쥐며 눈물에 젖어 몽롱해진 그의 두눈을 불을 뿜는듯 들여다보았다. 《그게 정말이야. 응?!》 《…》 더 물을 필요가 없었다. 살을 지지는듯한 아픔이, 뜨거운 아픔이 전신에 퍼져가는것을 느꼈다. 맥없이 손을 놓고 멍청하니 섰다가 숨이 꺽 막혀 몸을 떨었다. 눈앞에서 반짝이는 무수한 불꽃, 심장을 쑤시는듯한 아픔… 별안간 그는 왕진이 쥐고있던 고삐를 나꿔채고 말에 뛰여올랐다. 놀란 말이 앞다리를 들며 허궁 몸을 솟구쳐 하마트면 굴러내릴번 했으나 잽싸게 몸을 가누며 말배때기를 발로 세게찼다. 아츠러운 채찍소리를 울리며 어둠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날카롭고 새된 바람소리가 그의 귀전을 지져댔다. 련락병 왕진이 뒤따르는것도 알지 못했다. 눈앞에 보이는것은 오직 가냘프게 웃음짓던 정희의 해쓱해진 얼굴뿐이였다. 속으로 부르짖고 발로 걷어차며 《백전마》를 미친듯 몰아대였다. 그 어느 전투장에서도 이렇듯 사납게, 열병에 뜬듯 정신없이 달려본적은 없었다. 읍거리를 멀리 벗어나서야 앞서간 마차와 그를 호위하는 병사들을 따라잡았다. 뒤따르는 사람이 그처럼 무섭게 말을 몰아 쫓아오는것을 보고 그쪽에서 먼저 마차를 세웠다. 박락권은 말에서 뛰여내리며 숨이 턱에 닿은것처럼 거칠게 소리쳤다. 《정희!》 순간 마차우에서 몸을 일으키던 정희가 소스라치며 《련대장동…》하더니 길바닥에 뛰여내려 날듯이 달려왔다. 박락권이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정희, 난 동무가 앓는줄만 알구.… 에익, 못난것!… 인젠 안 놔주겠소. 동문 온 련대가 다 아는 내 사람… 영영 내곁을 떠나선 안돼. 절대로… 안돼!》 그가 들은것은 품에 안긴 정희의 흐느낌소리뿐이였다. 그밖의 무엇도 그는 듣지 못했고 보지도 못했다. 《백전마》가 코김을 흥흥불며 가까이 다가왔다. 오직 그것만이 아무 꺼림낌없이 주인과 울고있는 정희를 머룩머룩한 눈으로 들여다보고있었다. 그는 정희를 말잔등우에 올려주었다. 이어 어둠속에서 고삐를 찾으며 마차에서 내려선채 움직이지 않고있는 전윤필에게 팔을 내저었다. 《잘 가게. 여기서도 수학이랑 배워야겠네.》 그쪽에서 한숨을 내뿜는것이 알렸다. 《원 사람두,… 그럼 그렇다구 미리 말할게지.…》 박락권이 말에 오르자 전윤필이 소리쳤다. 《전투가 끝나면… 차립세, 결혼식상은 내가 맡겠네.》 아무말없이 또 팔을 내젓고나서 박락권은 고삐를 당겨 말머리를 돌렸다. 울고있는지 웃고있는지 알수없는 왕진의 앞을 지나 천천히 말을 몰았다. 서두를 필요가 없는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스물여덟살 그 나이까지, 질풍처럼 쉼없이 달리고 또 달려온 그였다. 다음날 아침 반석현의 숲속에 집결한 련대는 식사를 하고 구분대별로 모임을 가졌다. 세시간후엔 장춘을 목표로 행군을 시작했다. 포차들은 덜컹거리고 공급중대의 마차들이 찌국거렸다. 박락권은 끝이 보이지않게 늘어선 대오의 중간에서 말을 타고갔다. 다섯명의 련락병들과 정희가 그의 앞뒤에서 걸음을 맞추고있었다. 시큼하고 떫은 냄새가 숲속에서 풍겨왔다. 태양은 밝게 빛나고 하늘은 유리알같이 맑고 투명했다. 대대장이 말을 달려와 소리쳐물었다. 《련대장동지, 노래를 불러도 됩니까?》 《아무렴, 천하가 들썩하게 불러보오.》 장춘까지는 멀다. 그리고 이곳은 인적이 드문 숲속에 난 길이다. 설사 적들에게 발견된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2만명의 용감한 싸움군들이 행군해가고 있는것이다. 앞서간 보병들이 먼저 노래선창을 떼자 말잔등에 올라앉아 기병총을 건들거리던 전사들도 목청껏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북의 광활한 대지우에 조선의 젊은이들 행진한다 하나 둘 셋 발 맞추어 전진 전진 총을 메고 부르자 김장군의 노래를 …
후날 박락권련대의 용맹한 전사들이 조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잊지못해 부르던 노래였다. 박락권은 노랠 부를줄 모른다. 그의 목소리는 결전장에서 구령을 치기엔 제격이였으나 노래에는 전혀 맞지않았다. 그러나 그는 머리를 끄덕거리며 속으로 따라불렀다. 정희와 왕진의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빙긋이 웃기도 했다. 얼마나 좋은 노래인가. 누가 지은 노래인지는 모르나 진정 그들의 마음을 그대로 옮긴 노래이다. … 우렁찬 우리 대포 천지를 진동 넘어뜨렸다. 적진포대를 검은 연기야 전해 다오 우리 부모에게 승전의 기쁨을 …
전해다오, 나의 조국에, 우리 장군님께 승전의 기쁨을!… 박락권은 여전히 웃고있었다. 승리의 그날이 멀지않았다. 조국으로 돌아갈 그날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것을 그는 보고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