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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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고 눅눅한 땅의 입김이 그를 정신들게 한것 같았다. 어데선가 싱그러운 숲의 향취- 송진내며 가랑잎썩는 냄새가 실려왔다. 여기가 어디인가. 내가 지금 어디에 와있는것일가. 숲속인가, 우리 마을 뒤산인가?… 눈을 떴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려볼수 없다. 캄캄한 어둠속, 잔등을 적시는 습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꼼짝할수 없었다. 두팔을 등뒤로 가져다 꽁꽁 묶어놓았던것이다. 게다가 두툼한 헝겊뭉치가 그의 입을 틀어막고있었다. 그는 발뒤꿈치로 땅을 밀어보았다. 그러나 석탄재와 모래, 나무껍질들이 짓이겨진 질척한 땅이여서 도무지 힘을 쓸수가 없었다. 비로소 자기가 통나무에 묶이워있으며 등뒤에 산더미같은 목재무지가 쌓여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목재무지 저너머쪽에서 부잇한 외등이 가물가물 졸고있을뿐 사위는 조용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해방이 됐는데 아직도 왜놈들모양 극악한 짓을 하는 놈들이 있단 말인가?… 그는 모지름 쓰며 또 움쩍거리다가 그만 다리를 가드라뜨리며 굳어져버렸다. 두런두런하는 말소리들이 가까와오고있었다. 구원의 말소리, 발자국소리… 순간 몸서리치며 귀를 강구었다. 누군가 암파를 찾고있는것이였다. 《암파, 이런 일은 왜 해야 하우?》 《잔말 말앗. 서울의 지시야.》 《그러다 들키면…》 《오늘밤 당장 떠난다지 않아. 서울에 가면 묵돈을 받게 돼.》 삐걱거리는 물초롱소리, 누군가 목재더미우로 기여올라가는것 같았다. 《헌데 …저 자식은 어떻게 할가요. 그러다 불에 타죽으면…》 《불에 타죽으라지.》 《암파, 그건 너무하지 않소?》 《제밀헐, 무슨 말이 그리 많아?… 그자식이 월순이때문에 계속 우릴 쫓아다녀보라구. 우리 일이 재미없을수 있어.》 물붓는 소리가 났다. 목재더미우에서 물초롱을 들고 휘뿌려대고있는것이다. 아- 아니, 물이 아니라 휘발유나 석유일것이다. 《빨리, 빨리!》 암파가 재촉했다. 목재더미우의 놈이 뛰여내렸다. 성냥을 긋는 소리, 픽- 하는 소리와 함께 시퍼런 불길이 목재더미를 단숨에 휘감았다. 뒤미처 확 타번지는 불길, 시꺼먼 두 그림자가 후닥닥 뛰쳐 달아나는것이 보였다. 《불이다. 저놈들이 불을 질렀다!-》 종삼은 몸을 뒤틀며 미친듯 고함치려 했으나 헛된 일이였다. 가슴속이 싸늘해지고 무서운 공포와 절망에 온몸이 얼어들었다. 어느덧 황황 치솟는 불길이 어둠을 짓태우며 밤하늘로 솟구쳐올랐다. 재티들이 날려와 그의 얼굴을 덮었다. 이렇게 죽는것인가. 에익, 망할것들, 짐승같은 놈들!… 그는 젖먹던 힘까지 다 내여 땅바닥을 밀며 움쩍거렸다. 그를 비끄러매놓은 통나무가 조금 끌려오는듯 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나 아직 누구도 통나무더미아래에서 모지름쓰고있는 한종삼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기겁한 소리를 내지르고 어쩔바를 몰라 덤벼치며 불타는 목재더미만 바라볼뿐이였다. 아우성소리, 누군가를 소리쳐 부르고 구령을 치는 엄한 소리가 울렸다. 바람이 불면서 화염은 더욱 성난듯이 타올라 주위는 대낮같이 밝아졌다. 물통을 든 사람들이 어떤 사람의 구령에 따라 불길속으로 뛰여들었으나 뜨거운 화염이 룡트림하듯 타래지어 덮치자 황황히 물러서고 말았다. 바로 그때 한종삼이 통나무를 끌며 화염속에서 솟구쳐 일어섰다. 무슨 힘으로 어떻게 두손을 결박당하고 통나무에까지 비끄러매인 그 몸을 끌며 일어섰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군중속에서 비명소리같은 웨침이 터졌다. 《저게 사람이 있소!-》 시뻘건 화염속에 솟아오른 한종삼은 불과 연기에 질식되여 비틀거렸으나 용케도 버티여냈다. 그리고는 모여든 군중이 깜짝 놀랄정도로 뒤에 매달린 통나무를 끌며 움찍거렸다. 순간 그를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벌써 한종삼의 온몸을 휘감기 시작한 불연기속으로 뛰여들더니 칼을 꺼내여 통나무에 비끄러맨 바줄을 뭉청 잘랐다. 그리고는 헝겊뭉치를 입에 문채 버둥거리는 그를 힘껏 떠박질렀다. 드센 그 타격에 종삼은 땅바닥에 코를 박으며 어푸러졌다. 뜨거운 불과 연기로 타던 가슴이 열리며 차고 눅눅한 땅냄새가 페장으로 스며들었다. 이윽고 그는 자기를 질질 끌어내는것을 의식했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의 입에서 헝겊뭉치를 빼내주고 두손을 결박한 바줄도 풀어주었다. 이제는 누구도 불을 끌념을 못했다. 《소방차, 소방차를 부르라!》 하고 웨치던 목소리도 기여들었다. 그대신 기신없이 누워있는 한종삼에게로 욱 몰려들어 벅적 끓었다. 마치 그가 달나라에서 떨어져내리기라도 한것처럼 저저마끔 소리쳐 물으며 밀치고 닥치고 했다. 한종삼은 기슭에 내던져진 물고기모양으로 입만 벙긋거리고있었다.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자기를 끌어내온 그 청년을, 감때사나운 눈빛을 번뜩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이라 소리치고있는 군복을 입고 어깨에 총까지 메고있는 그 청년을 선망의 눈빛으로, 감사의 념과 더불어 일종의 공포심어린 심정으로 바라보고있을뿐이였다. 별안간 웅성거리던 소리가 뚝 그쳤다.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이번엔 다른쪽으로 쏠렸다. 한종삼을 불속에서 끌어낸 그 청년도 몸을 일으켜 그쪽으로 달려갔다. 굵직하고 엄한 목소리가 그 쪽에서 울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통나무더미에서 거센 화염이 회오리치고 무섭게 탁탁 튀는 소리와 함께 재개비가 흩날렸다. 어데론가 뛰여갔던 총멘 청년이 되돌아오더니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있는 한종삼을 잡아일으켰다. 아무말없이 덜미를 잡아끄는데 마치 오라를 지은 중죄인을 형장으로 끌고가는듯 했다. 드디여 몸이 다부지고 눈섭이 시꺼먼 어떤 사람앞에 그를 세웠다. 《이 사람입니다, 파견원동지.》 총멘 젊은이가 소리쳤다. 순간 한종삼은 대낮같이 환한 화재의 불빛에 비쳐진 그 사람이 사납게 미간을 찡기고있는것을 보았다. 더부룩한 눈섭밑에서 가늘게 쪼프린 두눈이 숯불처럼 타고있었다. 《어떻게 된거야. 누가 동물 거게다 묶어놨어?…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 《그럼 누가 불을 질렀는지 그건 알겠지?》 《…》 여전히 한종삼은 아무말없이 후들후들 떨고만 있었다. 모든것이 꿈만 같았고 뒤죽박죽이였다. 심장만이 활랑거릴뿐 무엇인가 생각하는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러자 마주서있던 사람이 총멘 청년에게 사나운 눈빛을 던졌다. 《여 곽일무, 데리구 가서 차근차근 물어보라구. 제정신이 아니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곽일무라고 불리운 청년이 또 그를 끌고갔다. 어데로 가는것인지?… 너울거리는 불빛이 정거장건물이며 숨죽이고 서있는 기관차 등을 비쳐주었다. 그런즉 한종삼 그는 정거장근처에 버려져있었고 화재는 바로 역에 쌓아놓았던 목재더미에서 일어난것이였다. 급기야 그는 와뜰 몸을 떨며 멈춰섰다. 《육실할것, 그놈들이 내뺄수 있어. 기차를 타구서… 빨리 가서 말해주.》 그가 부르짖자 곽일무도 소리쳤다. 《젠장, 그놈들이란 어떤것들이야. 무슨 소릴 하는거야. 응?!》 《이자… 그 어른 뉘기오? 가서 말해주. 빨리! … 놈들이 기차루 …》 보매 곽일무는 불같이 성급한 사람 같았다. 《젠장, 무슨 소린지 알아듣겠어? 어떤 놈들이 기차를 탄다는거야. 기차는 아직 뛰는게 없어. 저기 저 기차루 목재를 실어가려구 했던거야. 그런데 몽땅… 에익, 쳐죽일것들, 어떤 놈들이 불을 놨는지 알구 있으면 빨리 말해!》 《불을 놓은건… 암파요.》 《암파?》 《그렇소. 암파란 말 못 들었소?》 《젠장!》 곽일무는 암파를 모르는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을 끌지 않고 성급하게 한종삼을 잡아끌었다. 《가서 최현동지한테 말해. 아는대루 다!》 《그게 뉘긴데?…》 《이자 동무가 만났던 그분 말이요. 강계지구파견원!》 파견원이란 또 뭔가?… 곽일무에게 끌려가며 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해방이 되면서 처음듣는 말들이 많았다. 자위대, 공청, 청년간사, 파견원… 그 파견원이란 사람도 군복을 입고있던것으로 보아 보안서나 자위대 같은것을 지도하는 간부일것이다. 불은 아직도 기세를 올리고있었다. 산더미같던 통나무며 각목들이 이글거리는 불덩어리가 되여 화염을 솟구쳐올리고 무수한 불찌들을 휘뿌리고있었다. 그 불빛에 비쳐진 최현의 얼굴은 근엄하였다. 이마전에 올려붙은 숱진 눈섭이 흠칫거리고 꽉 악문 이새로는 신음소리같은것이 새여나왔다. 그는 한종삼이 떠듬거리며 두서없이 엮어대는 말을 한번도 막지 않고 귀담아 듣고있었다. 아니, 전혀 듣고있지 않는것 같기도 했다. 이글거리며 화염을 내뿜는 불더미에서 한번도 눈길을 떼지 않고있는데 그 눈빛은 무서웠다. 드디여 한종삼이 입을 다물자 느닷없이 물었다. 《그래 약혼녀 이름이 뭐라구?》 《예, 월순이라구 해유.》 《흠-》 최현이 신음하듯 말했다. 《암파란 놈은 도망쳤소. 곡마단을 끌구… 왜놈들한테 붙어먹던 놈이 지금은 미국놈들한테 가붙었거든. 정주에서도 곡마단이 떠나는날 량곡창고에 불이 났다고 해. 우리가 뒤를 캐는걸 눈치채고 달아났어.》 입술을 악물고 잠시 생각하더니 곁에 서있던 사람(그 역시 총을 메고있었다.)에게 번뜩이는 눈빛을 돌렸다. 《그놈이 언제 달아났다구?》 《예, 한시간전입니다.》 《모다카를 내준건 누군가?》 《역장이 내주었다고 합니다.》 《음- 그 반동놈과 역장이 내통이 돼있을수있소. 어제까지 다 싣게된 통나무를 끝내 싣지 않았거든, 견인기수리요 뭐요 하면서… 당장 가서 역장을 체포하오!》 종삼은 흠칫 몸을 떨었다. 《체포》라는 말과 함께 자기에게로 돌려지던 때의 최현의 눈빛이 서슬푸르게 느껴졌기때문이였다. 총멘 사람들이 달려갔다. 그러고보니 총멘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군복입은 젊은이들은 더 많았다. 그들모두가 최현이 한마디만 하면 즉시 달려갈 태세로 긴장하여 서있었다. 《동문 이름이 뭐랬드라?》 최현이 묻는 말이였다. 《예, 한종삼이예유.》 《음- 힘꼴이나 쓰게 생겼는데 그게 뭐야. 얼뜬해서.》 그가 무엇을 두고 핀잔하는것인지 알수 없었다. 힘꼴이나 쓰게 생겼는데 곡마단패들한테 뭇매질을 당했다는것인지 아니면 지금도 꼴기가 없이 후주른해서 몸을 떨고있는것이 민망스럽다는것인지… 《청년학교로 데리구 가서 몸도 씻구 식사도 시키라구. 곽일무, 동무가 맡소.》 《알았습니다.》 곽일무가 그의 팔을 당기는것을 종삼은 뿌리쳤다. 《일없어유, 난…》 그다음 말은 마른침과 함께 꿀꺽 삼켜버리고 말았다. 언짢게 치떠보는 최현의 눈빛에 주눅이 들어버린것이였다. 《시키는대로 하라구.》 최현이 말했다. 《지금 어떤 몰골을 하구 있는지 알기나 해? 두억시니같이 해가지구.》 하는수없이 종삼은 성급하고 매몰스러워보이는 곽일무를 따라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청년학교는 열병에 뜬것 같았다. 하나같이 끌끌한 청년들이 더러는 군복, 더러는 학생복 혹은 집에서 입던 옷차림 그대로였는데 밤새 잠들지 못하고 반동놈들이니 계급적원쑤들이니 암파니 하고 떠들었다. 역전에 쌓아놓았던 산더미같은 통나무며 각목들이 평양에 보내려던 적산물자라는것을 종삼은 그들의 말을 통하여 알게 되였다. 창끝같은 눈섭을 곤두세우던 최현이 김일성장군님 항일빨찌산의 유명한 맹장이라는것과 그가 장군님의 령을 받고 평북도에서도 산간오지로 유명한 강계지구에 파견되여왔으며 그가 청년학교를 조직하고 수많은 청년들을 모아 글을 배워주고 군사훈련도 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적위대, 청년학교, 생산훈련대 등이 있는데 이들모두가 글을 배우고 군사조련도 하고 생산활동도 벌리면서 앞으로 나라를 지킬 군대로 준비되고있다는것이였다. 벌써 수백명이나 모여왔거나 오게 된다고 했다. 더더욱 놀라운것은 곽일무도 장군님의 령을 받고 평양에서 온 청년이라는것이였다. 그 새파란 청년이 왜 그렇듯 틀져보이는가 했더니 장군님을 모시고있는 경위대원이라는것이였다. 그래서 눈빛도 칼날 같은것인지… 하지만 곽일무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평양에서 적산물자들을 접수하여 호송해갈 임무를 받고왔는데 급살을 맞을 반동놈들이 불을 놓았다고 가슴을 치며 분해할뿐이였다. 다행히 적산물자쌀 두방통은 무사하여 일본놈들한테서 압수한 다른 물자들과 같이 래일 기차로 싣고 떠나게 된다고 했다. 종삼은 귀가 번쩍 트이는듯 했다. 자기도 같이 가게 해달라고 조르자 곽일무는 놀란 표정이였다. 《평양에 가려구?》 《아 아니, 난… 곡마단을 찾아… 기어이…》 곽일무는 머리를 기웃거렸다. 《또 졸경을 치르려구 그래?… 차라리 여기서 청년학교에 드는게 어때? 내 평양에 가서 보안서에 말해줄테니. 그러지 않아도 최현동지가 사처에 전화를 걸었다는것 같더구만. 암파란놈을 잡으라구.》 종삼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월순이를 찾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발편잠을 잘수 없는 그였다. 세상끝까지라도 쫓아가 빼낼 생각이였다. 그의 말을 들은 곽일무는 화를 냈다. 《그것들이 남포로 갔는지 해주로 갔는지 어떻게 알아? 서울로 내뺄건 틀림없는데 지금 서울선 미국놈들이 왜정때보다 더 살판친다는거야. 그런 말 못 들었어?》 《아-니, 우리 말 장로령감 하는 말이 미국은 해방자구 또 거 뭐라든지, 자유와…》 《에익, 미물같은거!》 곽일무는 한팔을 홱 내젓고 말았다. 《무슨 예수쟁이 장로령감소리야. 최현동지 하는 말 못들었어? 암파란 놈이 미국놈들 끄나불이라던 말을!…》 그러나 한번도 보지 못한 미국놈들을 그토록 이를 갈며 증오할 까닭을 한종삼은 찾을수 없었다. 아침엔 최현이 그를 불렀다. 《인젠 어떻게 하겠나?》 종삼은 그가 김일성장군님 수하장수들중에서도 손꼽히는 장수라는 말을 들었으므로 더더욱 혀가 굳어지는듯 했다. 가까스로 약혼녀를 기어이 빼내여올 생각이라고 혀아래소리를 했다. 《군대가 될 생각은 없구?》 《예.》 《그건 왜?》 《…》 그는 선뜻 대답을 못했다. 본래부터 총멘 사람들을 싫어했다고 할수는 없었다. 고향에서도 병쇠아저씨(리인민위원회 위원장)가 그더러 끌끌한 젊은이들을 골라 자위대를 하나 뭇자고, 요새 반동놈들이 사방 날뛰는데 마을사람들을 지켜야 하지 않는가고 했을 때 《싫어유, 해방이 됐는데 총은 해서 뭣해유. 왜정때 <자경단>놈들처럼 동네늙은이들한테까지 곤대짓을 하라는거예유? 난 싫어유. 전연!》 하고 딱 잘라맸던 그였었다. 《해방이 됐는데 인젠 우리가 나라를 지켜야지. 안 그런가?》 최현의 그 말에 그는 도리질을 했다. 《난… 농사나 짓겠어유.》 《흠-》 최현은 엄하게 미간을 찌프렸지만 언젠가 병쇠아저씨가 손에 쥐고있던 곰방대를 토방돌에 내려치며 고함을 치던것처럼 대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쓰겁게 웃으며 나직이 말했다. 《할수 없지. 그럼 가구 싶은데루 가봐. 그렇지만 잊지 말라구. 아직도 원쑤놈들이 많아. 모가지를 비틀어야 할 놈들이. 그것들은 우리가 제 나라, 제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걸 바라지 않아. 그것들과 또 싸우게 될텐데 임자같은 청년들이 총을 메지 않으면 누가 나라를 지켜주겠나. 아무때든 마음을 고쳐먹으면 찾아오라구.》 머리숙여 인사하고 거리에 나섰을 때엔 해가 중천에 솟고있었다. 맑은 하늘, 활기 띤 거리, 점포의 덧문들이 활짝 열리고 사람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프랑카드를 든 청년들이 대렬을 지어 노래를 부르며 가고있었다. 지게군, 행상군, 세라복을 입은 녀학생들… 그들속에 이 나라, 이 사람들을 위협하는 원쑤놈들은 있을상 싶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원쑤는 있다. 지금 한종삼의 유일한 피맺힌 원쑤는 암파놈이였다. 그놈에게서 월순이를 빼내오기 위하여 그는 또 길을 떠난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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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거장대합실은 독한 담배연기로 꽉 차있었다. 때국이 오른 버들고리짝과 네귀가 터져있는 트렁크며 크고작은 보퉁이들을 옆에 끼거나 무릎우에 올려놓은 사람들이 구석쪽의 의자우에 비좁게 앉아있고 몇사람은 손바닥만한 역무실구멍에 머리를 붙이고 둥글모자를 쓴 운전조역에게 저저마끔 소리쳐 묻고있었다. 《려객차는 아직 미정입니다. 래일 또 와보시오. 남행차건 북행차건 오늘은 없습니다.》 운전조역이 소리치는 말이였다. 한종삼은 그쪽으로 덤벼치며 가다가 바닥에 덕석을 펴고앉아있는 늙은이를 짓밟을번 하였다. 령감이 물고있는 장죽끝의 백통고불통에서 지글지글 대진이 끓는 소리가 났다. 입을 잔뜩 오무리고 담배를 빨고있는 령감의 여윈 두볼에 구멍이라도 뚫린듯 했다. 《젊은인 왜 또?》 하고 령감이 증을 내며 말했다. 《따오기 샘구녕 들여다보듯 자꾸 들여다보문 뭘해. 기차가 없다는데.》 그러나 종삼은 지금 곽일무를 찾고있는것이였다. 그가 적산물자를 실은 기차를 호송해간다는것을 알고있으므로 우선 평양까지 따라갈 생각이였다. 암파와 곡마단을 쫓으려면 그길밖에 없다. 암파가 남포나 해주를 목표로 달아났다고 하니 우선 남으로 가는 기차에 오르고볼 판이다. 마침 어깨에 총을 멘 곽일무가 역무실에 들어서는것이 보였다. 한종삼은 사람들을 비집고 유리창에 얼굴을 바싹 대였다. 그러나 곽일무는 한번도 이쪽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운전조역에게 성이 난듯 말하고있었다. 《왜 출발시키지 않소. 급수랑 다 됐는데.》 운전조역이 뭐라고 말하자 그가 또 소리쳤다. 《역장은 반동이요. 벌써 총살됐는지 알게 뭐요. 그를 기다릴 필요는 없단 말이요!》 운전조역은 두눈을 흡뜨고 굳어져있다가 돌연 머리를 까딱하고나서 페색전화기를 당겨 뭐라고 말했다. 이윽고 두사람은 밖으로 나갔다. 한종삼은 대합실을 나와 개찰구쪽으로 달려갔다. 다섯개의 방통을 단 기관차가 저쪽에서 칙칙 증기발을 내뿜고있었다. 지붕을 씌운 유개방통이 둘, 무개방통이 셋이였는데 어느새 숱한 사람들이 무개방통에 올라있었다. 대합실에서 한정없이 기다리고있는 사람들은 결국 늙은이나 애기가 달린 녀인들뿐이였다는것을 종삼은 깨달았다. 그가 달려오는것을 본 곽일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최현동지가 뭐라지 않던가?》 종삼은 머리를 저었다. 《모를 소리.》 곽일무는 가늘게 눈을 좁혀뜨고 그를 훑어보았다. 《동무를 맘에 들어 하던데.》 《누가 말이여. 동지라는…》 《최현동지.》 곽일무가 그의 말을 시정시켜주었다. 《임자같은 사람들이 군대가 돼야 한댔어.》 《군대는 뭣하러. 난 싫다구 했소.》 《허!》 곽일무는 토막웃음을 내던지고 몸을 돌렸다. 명백한 멸시의 표시였으나 종삼은 탓하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는대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곽일무는 무개방통에 가득 올라탄 사람들에게 거기에 실은 기계들을 절대 다쳐선 안된다고, 그런 놈이 있으면 반동놈의 새끼로 보고 당장 쏴갈기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차에 오른 사람들이 와 와 웃으며 응수했다. 자기들이 지켜줄테니 념려말라고, 총을 쏠일은 절대 없을터이니 가서 기관사가 제대로 차를 몰아가는가나 잘 살피라고 했다. 곽일무는 두개의 유개방통문짝이 열리지 않나 밀어보고 봉인한것을 세세히 살펴보았다. 그 두개의 방통엔 쌀이 실려있다는것을 종삼은 알고있었다. 목재는 다 타버렸어도 다행히 쌀은 남아있다고 하던 말을 들었던것이다. 꽤-액! 기적소리가 울렸다. 곽일무가 기관실쪽으로 달려가자 한종삼도 뒤를 쫓았다. 곽일무는 그가 기관실로 올라설 때 손을 내밀어 당겨주기까지 했다. 《이름이 뭐랬드라?》 《한종삼.》 《아, 그랬지, 바보 한종삼.》 한종삼이 시쁘둥해서 주먹코를 벌름거렸으나 그는 벌써 기관사쪽에 머리를 돌리고있었다. 《떠납시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기관사는 가감변을 당기며 꽤-액! 하는 거세고 사나운 기적소리를 울렸다. 드디여 기차는 출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