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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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우에 기여오르는 놈을 맨처음 발견한것은 곽일무였다. 날이 흐려 어둠이 짙었으므로 곽일무는 두명의 신대원들을 데리고 순번외 순찰에 또 나섰다. 김정숙동지께서 가르쳐주신대로 대원들에게 어둠속 갖가지 음향을 가려듣도록 주의를 주며 소리없이 초소를 돌고있었다. 바람소리, 가랑잎날리는 소리, 행인들의 발걸음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개짖는 소리에도 귀를 강구었다. 11시 20분경이였다.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선 곽일무는 뒤따르는 두 대원에게 손을 들어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는 아주 낮은 속삭임으로 무슨 소리를 듣지 못했는가고 물었다. 두명의 대원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순간 곽일무는 손을 입가에 가져다대며 《쉿!》 하고 바람새는 소리처럼 낮게 속삭였다. 《잘 듣소. 어떤놈이 다가오고있소.》 한 대원이 총부혁을 벗긴다는것이 그만 쇠붙이소리를 내였다. 그 순간 둔덕쪽에 면한 담장에서 검은 그림자가 언뜻거렸다. 《누구얏!》 곽일무가 소리쳤다. 어둠을 찢어발기는 비수같이 날카롭고 새된 웨침이였다. 그러자 머리우의 느티나무에서 가지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무에 기여오르던 놈이 곽일무의 웨침소리에 놀라 허둥거렸던것이다. 급기야 담장에서 얼씬거린놈의 그림자로부터 나무우에로 총구를 돌린 곽일무는 소스라쳤다. 나무가지들사이로 두다리를 걸치고있는 검은 형체를 발견하였던것이다. 땅!-총소리가 울렸다. 윽-하는 비명, 시꺼먼 형체가 나무가지들을 꺾으며 떨어져내렸다. 그러나 그것을 살펴볼새가 없었다. 어느새 검은 그림자가 얼씬거리던 담장쪽으로 달려가며 그는 두대원에게 《날 따랏!-》 하고 웨쳤다. 그쪽에서 자동총사격이 날아왔다. 담벽을 허비며 불꽃을 튕기는 총탄의 아츠러운 소리가 귀전을 지져댔다. 바로 그때 현관문을 열고 뛰여나온 강상호가 《곽일무, 추격하라!》 하고 소리쳤었다. 경위대원들이 병실쪽에서 총을 들고 달려나왔다. 그때 곽일무는 벌써 둔덕쪽으로 길복판을 꿰질러내빼는 세명의 그림자를 쫓아 내달리고있었다. 달려가며 연방 권총을 갈겼다. 김정숙녀사의 가르치심을 받으며 밤이고 낮이고 사격술을 련마해온 그였다. 그러나 지금은 먹물속같은 어둠을 헤쳐 숨이 턱에 닿아 달리며 총을 쏘아야 했다. 도망치는 놈들이 자동소총과 권총으로 마구 총질을 했다. 이따끔씩 머리우로 새된 휘파람소리를 지르며 총탄이 날기도 하였다. 멀리 뒤쪽에서 강상호가 경위대원들에게 구령치는 소리가 어슴푸레하게 들려왔다. 《빨리 소대장을 따르라, l분대 우측으로, 2분대는 날따랏!》 놈들은 서문재쪽으로 도망치고있었다. 개짖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개자식들, 급살을 맞을 놈들, 뛰여야 벼룩이지.》 다행히 인적드문 한밤중이였다. 곽일무는 더이상 총을 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자동소총 사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기로 내달려 놈들을 쫓았다. 헛된 총질로 탄알을 허비할것이 아니라 면바로 쏴갈겨야 했다. 또다시 머리우를 스쳐가는 총탄의 휘파람소리, 어느 집의 기와장이 부서지고 우체통이 짱!-하며 나딩굴었다. 개짖는 소리가 더더욱 극성스러워졌다. 금시 닫긴 대문안에서, 퇴마루밑에서 기여나온 개들이 왕왕- 컹컹- 극성스럽게 짖어대고 어떤 집들에서는 겁에 질린 사람들이 덧문을 빠금히 열고 밖을 내다보기도 했다. 불을 켜는 집들이 많았다. 어느 집부엌에서 머리를 내밀던 아낙네가 《에그머니!-》 하고 기겁한 소리를 지르며 들어갔다. 검은 그림자들이 그 집울담을 타고넘었던것이다. 《땅!-》 곽일무가 쏜 총에 울담을 뛰여넘던 놈하나가 쓰러졌다. 손톱으로 울담을 허비며 쿵- 하고 넘어졌는데 그 밑에 장독이 깨여져 박산나는듯 했다. 그러나 나머지 두놈은 어느새 골짜기로 사라졌다. 곽일무는 쓰러진놈의 잔등을 밟고 골목길로 뛰여들었으나 잠시 목표를 잃고 당황했다. 쓰라린 분노와 미칠듯한 초조감,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무작정 앞으로 뛰여갔다. 별안간 멈춰섰다. 골목길 저쪽에서 《서라, 서라!》 하는 웨침소리와 총소리가 몰방으로 터졌던것이다. 강상호가 경위대원들을 이끌고 놈들을 앞질러왔다는것이 어렴풋이 짐작했다. 도망치던 한놈이 길바닥에 나딩굴며 《대장, 나 좀- 도와주-》 하고 비명소리처럼 부르짖고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남은 또 하나의 그림자는 벌써 고양이처럼 날쌔게 골목길이 굽어지는 가운데에서 어느 집 담장을 뛰여넘고있었다. 솟을대문에서 방울소리가 절렁거리고 미친듯 짖어대던 개가 발길에 채운듯 캥캥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끙끙- 모지름쓰며 구석쪽으로 기여드는 개의 턱주가리에서 피덩이 같은것이 느침처럼 흘러내리고있었다. 달아빼는 놈이 어지간히 날쌔고 사나운것같았다. 그러나 안될것이다. 산판에서, 철길우에서 뼈대가 굵은 《도끼모태》 곽일무이다. 왜놈십장의 쇠테를 씌운 지팡막대기도 단숨에 꺾어버리던 곽일무이다. 《서라!-》 곽일무도 날쌔게 담장을 뛰여넘었다. 또 담장… 순간 권총쥔 손을 내뻗치며 담장우에서 사라지려는 놈의 다리를 겨누어 갈겼다. 그리고는 훌 날아넘듯 담장우로 뛰여올랐다. 어느 집 뜨락… 그 저편엔 말라버린 담쟁이넝쿨이 한벌 뒤덮여있는 키높은 널바자, 다리를 얻어맞은 놈이 그 널바자까지 한다리를 질질 끌며 다가갔으나 그만 《아!-》 하고 미친듯 울부짖으며 담장우에서 뛰여내린 곽일무에게 달려들었다. 그자의 손에서 비수가 펀뜩이였다. 거품을 문 입을 쩍 벌리고 사납게 으릉거리며 바로 곽일무의 가슴팍으로 비수를 겨누고 달려들었다. 그것은 악에 받친 단말마의 몸무림이였고 최후의 절망적인 모지름이였다. 번개같이 몸을 피한 곽일무는 손에 쥔 권총으로 그자의 무섭게 생긴 낯판대기를 힘껏 쳐갈겼다. 무엇인가 으깨여지는 소리와 함께 피거품을 왈칵 쏟으며 비틀거리는 놈의 배허벅을 또 발길로 걷어찼다. 《윽-》 하는 비명과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천천히 허리를 꺾고 비틀비틀 두세걸음 앞으로 나서던 놈이 푹 꼬꾸라졌다. 그 순간 집안사람들이 불을 켜고 문고리를 벗기는듯 했다. 곽일무는 쓰러진 놈의 뒤덜미를 와락 당겨 피거품을 가득 문 입안에 권총을 들이댔다. 《총은 어쨌어, 개자식. 어서 내놔!》 《초- 총… 은 없소. 초- 총알이 떨어져서… 내버렸소.》 열려진 문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그자의 피범벅이 된 낯짝을 환히 밝혀주었다. 곽일무는 놀라서 부르짖었다. 《서경팔?… 네놈이였구나.》 으깨여진 그자의 턱에서 뼈가 으드득거렸다. 그랬어도 그자는 피거품을 우그그 물고 시꺼먼 두눈을 번뜩이더니 악에 받쳐 부르짖었다. 《나도 네놈을… 아- 안다.》 왼쪽볼따귀에 난 칼자리가 움씰움씰하며 피방울들을 떨구었다. 지난해 가을 평양역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이제 꼭 만나게 된다고, 자기를 살틀히 대해준 사람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씨부렁거리던 서경팔, 이렇게 또 만났다. 그날 서로 으르렁대며 다짐한대로 또 만났다. 《쏴라, 고-공산당떨거지야.》 서경팔의 입안에서 피거품과 함께 부러진 이발이 튀여나왔다. 악을 쓰며 입에 가득 문것을 내뿜으려했다. 순간 곽일무는 무쇠같은 주먹으로 놈의 면상을 들이쳤다. 《덤비지 말아, 개자식. 그건 바쁘지 않아.》 한대 또 한대 연거퍼 피가 랑자한 낯짝을 쥐여박았다. 《네깐놈이 감히… 여기가 어덴줄 알구 기여들어? 이 벌레같은 놈!…》 턱주가리에, 울대뼈에, 가슴팍에 그리고 또 코잔등에 쇠망치같이 그러쥔 주먹을 안기며 그는 자기가 알고있는 온갖 욕설을 다 퍼부었다. 그 이상 더 퍼부을 욕설이 없는것이 유감이였다. 《네놈에겐 총알두 아깝다. 씹어놓아도 시원치 않을 이놈아!》 그는 놈의 코잔등을 짓부시고 눈두덩을 찢어놓으며 영영 알아볼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어놓았다. 자기를 찾는 강상호의 웨침소리가 가까와올 때까지 숨을 벌떡거리며 계속 매질하고 부르짖었다. 경위소대장으로서 이렇게 하는것이 옳은것인지 그른것인지도 생각치 않았다. 이같이 극악한 원쑤에게 무슨 법도를 론하겠는가. 갈가리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것 같았다. 《곽일무동무, 어데 있소. 그놈을 잡았소?》 널바자 저쪽에서 강상호가 웨치고있었다. 그는 뼈마디들이 죄다 물크러진듯 기신없이 축 늘어져버린 그자를 개처럼 질질 끌어가기 시작했다. 그때에야 비로소 집안에서 열려진 문으로 머리를 내민 사람들을 알아보았다. 지금껏 숨을 죽이고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고있은것 같았다. 그가 서경팔을 잡아끌며 대문가에 이르자 집주인인듯한 사나이가 황황 달려나와 빗장을 벗기고 문을 열어주었다. 찌쿠덩! 하는 대문소리. 무엇때문인지 와들와들 떨고는 집주인앞을 지나 그는 붙잡은 놈을 끌어내갔다. 강상호와 경위대원들 여럿이 뛰여왔다. 《어떻게 됐소. 죽었소?》 강상호가 소리쳐묻는 말에 그는 기진한듯 놈을 내던지며 중얼거렸다. 《모르겠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얼마후 서경팔을 보안국으로 끌어갔다. 놈들이 사용한 자동소총이 미국제이며 얼마전 서울에서 보내여왔다는것을 서경팔이 실토했다. 이날의 테로작전도 서울의 긴급지령이였다고 한다. 서울에서 아써 번즈라고 하는 미군정청 비밀요원이 직접 조작한 테로작전들중의 하나였던것이다. 서경팔은 자기가 홍근수목사를 살해했다는것도 고백했다. 홍목사가 저들의 테로계획을 눈치채고 전화로 알리려했기때문이라고 했다. 다음날 날이 밝기전부터 곽일무는 서경팔이 내던진 권총을 찾기 위해 소대원들을 이끌고 간밤에 놈들을 추격하던 골목길과 집들의 뜨락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그로서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놀라운 일에 부닥치게 되였다. 아니, 그저 놀라운 일이 아니라 괴이하고도 무서운 일이였다. 꿈에도 예견치 못했던 그런 곳에서 홍금옥을 만나게 되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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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까지 곽일무는 늘 그 처녀와 만날 기회를 바랐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기다렸건만 정작 만나기만 하면 대수롭지 않게 그리고 좀 딱딱하고 거칠게 몇마디 하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뜨군했었다. 그리고는 후회했다. 모질게 자기를 경멸하고 꼬집었지만 어쩌다 또 만나면 역시 그 모양이였다. 그는 자기가 처녀의 얼굴모색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처녀의 말쑥한 얼굴에 대한 어렴풋한 인상만이 남아있을뿐 가끔 눈을 감고 그려보려면 아무리 애써도 작은 입과 수줍게 웃는 눈과 코마루며 기타 여러가지 세부를 도무지 떠올릴수가 없었다. 그저 아련하고 조용히 웃고 까닭없이 숫저워하는 얼굴이 안개속에 가리워진듯 희미하게, 아리숭하게 떠오를뿐이였다. 지어는 작은 입언저리에 팥알만한 기미가 있었던것 같기도 하고 전혀 없었던것 같기도 했다. 그는 처녀가 자기를 좋아하는지 그저 아는 사이로 반겨주는것인지, 누구에게나 다 골고루 선물하는 미소였을따름인지 그것도 딱히 찍어말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금옥과 자신을 결코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었다. 어느때든 처녀가 자기한테서 멀어질수 있다는것을 그는 상상할수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처녀와 어떻게 교제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는것이 더욱더 가까와지는 길인지 그것도 알지 못했다. 어떤 쓸개빠진 사내들은 자기가 눈독을 들이는 처녀한테 쉴새없이 시부렁거린다. 시시한 말로 끝없이 춰올리고 조금씩, 로골적으로 뜨거운 입김을 가까이 퍼부으며 소금녹이듯 한다. 그런 녀석들을 그는 경멸했다. 그런 시시한 말들에 귀기울이기 좋아하는 처녀들도 경멸했다. 홍금옥이 그런 처녀들과 다른것이 그를 기쁘게 했다. 처녀가 수다를 떨거나 의미있게 눈을 빨며 교태를 부리지 않으며 소박하고 진실하다는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처녀의 아버지 홍근수목사한테서 모욕을 받고 모질게 앙갚음을 하고나서부터 모든것이 달라졌다. 아니 뒤집혀졌다. 처녀를 만나는것이 괴로와졌다. 홍금옥을 만나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런지 알수 없었다. 만나는것이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후 홍목사가 살해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반동놈들이 그를 유괴하여 무참히 살해했다고 한다. 그때부터는 또 속을 썩이기 시작했다. 자기의 도끼날같은 성미와 몰풍스러운 언행을 부끄럽게 여겼고 처녀와 만날 기회를 애써 찾았다. 처녀를 위로하고 자기의 잘못을 사죄하고싶었다. 죽어도 잘못했다는 말은 하고싶지 않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진심으로 잘못을 빌고싶었다. 그렇다. 흔히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관대해지는 법이다. 처녀의 아버지가 총멘 사람은 절대 집에 들일수 없다고 하던 말을 생각하면 여전히 이가 갈라고 그가 목사라는것을 알자 처녀까지 멸시하던 곽일무였지만 지금은 그에 대한 련민의 정이 더 컸다. 홍목사가 불쌍하고 처녀가 가엾었다. 이제 그 처녀를 만나면 전날과는 달리 따뜻하게, 좀더 친절하게 대해주고싶었다. 드디여 그날이 왔다. 이렇듯 갑자기 전혀 예기치 못했던 때와 장소에서 처녀를 만나게 될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안개 낀 장대재에서 종소리가 울릴 때였다. 차고 눅눅한 아침안개가 소리없이 고요히 그리고 빈틈없이 처마를 맞대고 둘러앉은 집들과 골목길을 감싸고있었다. 슴슴하고 아늑하기까지 한 그 안개속에서 울려오는 종소리도 은은하고 부드러웠다. 처음 곽일무는 그것이 장대재의 례배당에서 울려오는 종소리라는것을 알지 못했다. 서경팔이 내던졌다는 권총을 찾아헤매며 이른아침 웬 종소리일가 하고 무심히 돌아보았을뿐이였다. 웬 처녀가 옆구리에 책을 끼고 종종 뜀뛰듯 오고있었다. 흰 당목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받쳐입었는데 웬일인지 무던히도 낯익어보였다. 털실로 뜬 감색목도리도 그의 눈길을 끌었다. 하얀 버선발이 사붓사붓 안개속에서 얼씬거렸는데 마치 종소리에 실려오는듯 했다. 갑자기 처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어마나!》 그제서야 홍금옥이라는것을 알아보았다. 금옥은 비칠했다. 실장갑을 낀 손으로 저고리고름을 잡아당기며 어줍게 웃었다. 곽일무는 제풀에 벙글써 웃으며 물었다. 《어델 그렇게 급히 가오. 아침 일찍!》 《예, 저…》 처녀의 대답이 중요한것이 아니였다. 별스레 더 아릿다와보이는 처녀앞에서 벌써 주눅이 들어버린 곽일무는 혀가 잘 돌아가지 않는듯 갑자르며 아무렇게나 생각나는대로 또 물었다. 《학교엘 가오?》 《…》 《아, 그건 아닐게구. 그럼 어델 가오?》 서로 눈빛이 마주쳤다. 웃고있는 눈빛이 아니였다. 금옥은 곽일무가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하거나 매물스럽게굴 때에조차 조용히 미소어린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군 했었다. 그러면 좀 열적어진 곽일무는 《그저 그래본거지 뭐. 난 본래 덜돼먹었거든.》 하고 사죄하듯 말하군 했다. 그러면 금옥은 《그게 더 좋아요. 점잔을 빼선 뭘해요.》 하는 속삭임소리로 그의 자존심을 어루쓸어주었던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판판 달라졌다. 곽일무는 처녀의 눈에 비낀 불안과 초조감 그리고 무어라고 딱히 찍어말할수는 없어도 분명 어서 자리를 피해가고싶어하는 애원의 빛을 발견하였다. 그것이 그를 불안하게 하고 노엽게 했다. 《왜 말못해. 싫으면 관두지 뭐.》 《저… 그런건 아니구.》 《그건 무슨 책이요? 왜 자꾸 감추는거요?》 《…》 그따위나 따지고싶은 생각은 꼬물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처녀를 만나면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하려던 종전의 생각을 다 잊은듯 또 한마디 했다. 《오늘따라 참 별나졌구만.》 《미안해요.》 처녀가 말했다. 《사실 이건 성경책인데…》 《오, 성경!》 곽일무는 마치 아름다운 시구절이라도 외우는듯 그 말을 받았으나 다음순간 놀라서 중얼거렸다. 《가만, 이자 뭐라구 했소. 성경책이라구?…》 《…》 처녀는 눈길을 떨구었다. 곽일무가 또 숨이 찬듯 다우쳐 물었다. 《그러니 지금 례배당에 가던 길이요?》 《…》 처녀는 하얀 버선을 신고있는 그토록 귀여운 발로 땅바닥만 허비고있었다. 《그러니… 아버진 목사구 딸은 또…》 혀가 잘 돌지 않았다. 그리도 슴슴하던 안개를 불연기라도 삼키는듯 숨을 헐떡이였다. 《그래 말해보- 예수쟁이라구?》 《…》 처녀를 대신하여 례배당의 종소리가 《그럼, 그럼.》 하고 은은한 울림소리로 대답했다. 사위스러운 그 종소리… 곽일무는 헉하고 단숨을 내뿜으며 몸을 홱 돌렸다. 그는 비록 그리스도교를 알지 못했고 례배당에 들어가본적도 없지만 어렸을 때 그가 겪은 하나의 일만은 잊지 않고있었다. 한 외국인 전도부인이 홍역에 걸린 마을어린이 셋을 격리시켜 치료했는데 웬일인지 모두 죽어나왔던것이다. 죽은 어린이들의 부모들이 《서양년》을 저주하며 밀려갔는데 그 전도부인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또 한종삼이 추격하던 암파란 놈도 해주에서 례배당에 몸을 숨겼다가 도망쳤다고 하지 않았던가… 곽일무가 아는 그리스도교는 바로 그런 미궁과 같은것이였다. 그 미궁속에 홍금옥마저 빠져있다는것을 그는 참을수 없었다. 《예수쟁이!》 하고 그는 부르짖었다. 《그런덴 뭣하러 가? 그런 더러운데를!…》 《예?!》 처녀가 흐느끼였다. 금시 솟구쳐오르는 오열을 틀어막는듯 손으로 입을 싸쥐며 몸을 홱 돌려 종종걸음을 쳐갔다. 찬바람이 휙 불며 처녀를 날려버린듯 했다. 하여 꿈은 사라졌다. 지금까지 그의 가슴속에서 은밀히 움트고 자라던 싹도 짓이겨졌다. 그는 진저리치며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돌덩이같이 무겁고 차고 딴딴하게 응어리지는 울분과 느닷없이 솟구치는 분격을 참고 이겨낼수 없었다. 1분대의 우상규라는 대원이 달려와 큰소리로 보고해서야 머리를 들었다. 《소대장동무, 두부장수할머니가 그걸 주었습니다. 그거말이예요.》 《그거라니?》 《아 권총, 권총을 찾았시요.》 소대원들이 두부함지를 인 할머니를 앞세우고 왁작 떠들며 오고있었다. 《할머닌 참 눈도 밝으시군요.》 《오래 사실거예요, 할머니.》 《눈이야 아직 밝지. 바늘귀두 내 손으루 다 꿰여!》 《어이구, 이 할멈을 우리 분대에 받는게 어때. 난 바늘귀를 제대루 꿰지 못해 애를 먹는데.》 《그럼 소대장동무한테 제기합세. 할머닐 입대시키자구.》 할머니도 기분이 흥거로와 호하호하 웃어대고있었다. 곽일무는 두부장수가 가지고온 권총을 깐깐히 살펴보았다. 아니,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며 뒤집어보고 당겨보고 하다가 품속에 찔러넣었다. 《고맙습니다, 할머니.》 《원, 무슨 소릴. 난 어제밤 되우 혼났당이. 전쟁이 붙은가 했지. 그래 그 총은 임자네들이 떨군건가?》 《예. 아니, 반동놈들이 내깔렸지요.》 《오-》 할머니는 말꼬리를 길게 끌며 이상한듯 물었다. 《그런데 임자, 보아허니 대장같은데 어째 성이 났나. 이발이 쏘는가부지?… 내가 하라는대로 한번 해보겠나? 그럼 앓던 이가…》 《아, 됐어요, 할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곽일무는 대원들에게 사방 흩어져있는 사람들을 전부 모이게 했다. 난생 처음 간밤에 총격전을 벌렸고 반동놈들을 다 잡아족친데다가 신식권총까지 로획했지만 그의 기분은 흐리터분했다. 께름직하고 화가 나고 목이 타들다못해 가슴가득 쓰린 연기를 들이킨것처럼 답답해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날이 완전히 밝았으나 안개는 인차 가실것같지 않았다. 대원들은 소대장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대렬을 지어 걸어갔다. 그렇게 얼마쯤 걸어갔을 때였다. 대렬옆에서 입을 꾹 다물고 걷고있던 곽일무는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멀리 둔덕길에서 머리를 푹 떨구고 울고있는 홍금옥이 눈에 띄였던것이다. 하얀 버선신은 발로 땅바닥을 조심히 긁고있는데 그 앞에는 안길이 서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대렬을 바라보는 안길의 표정은 돌덩이같이 굳어져있는듯 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처녀가 여기로, 안길동지를 찾아 달려온것일가. 곽일무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안길이라는것을 알고 달려와 고해바친것일가?… 그러나 곽일무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리는 없다. 예수쟁이라는것을 알고 사납게 모욕적으로 그를 자기 생활권내에서 지워던지긴 했어도 홍금옥은 그런 처녀가 아니다. 자기의 불행을 하소연하고 모욕을 받았다고 그 누구에게 고해바칠 어리석은 녀자는 아니다. 그런 녀자이라면 애당초 침을 뱉고 돌아섰을것이다. 곽일무는 평양역으로 가는 길이 바로 자기들이 가고있는 그 길과 이어져있다는것을 생각하였다. 아마도 울며가고있는 그 처녀를 띠여보고 안길이 멈춰 세웠을것이다. 일은 별나게 되였다. 그러나 곽일무는 다음순간 벌써 머리를 곧추 들고 조금 앞서간 대오를 따라 걸음을 빨리 하고있었다. 거울은 깨여졌다. 홍금옥이라는 아련한 처녀를 비쳐주던 꿈의 거울은 이미 산산쪼각이 나버렸다. 누구도 그것을 본래의 모습대로 붙여놓지는 못할것이다. 속담엔 제 얼굴 못나서 거울만 깬다 했지만… 아니, 아니, 아니다. 예수쟁이처녀가 비쳐있는 거울을 박산냈는데 누가 뭐라 한단 말인가!… 그에겐 그런것이 필요없었다. 그는 우정 걸걸하게 《동무들, 우리가 뭐 산보를 나왔는가. 2분대장 노래선창을 떼오!》 하고 소리쳤다. 기다렸던듯 대오에서 《동무들아 준비하라 하나 둘-셋》 하는 웨침이 울려나왔다.
동무들아 준비하라 손에다 든 무장 제국주의침략자를 때려부시고
힘찬 대렬합창에 맞추어 활개치며 나가던 곽일무는 안길의 앞에서 멋지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안길은 얼결에 손을 올렸으나 다음순간 화가 난듯 팔을 홱 내저으며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벌써 곽일무는 그의 앞을 지나갔다. 아직 제국주의침략자들은 때려부시지 못했어도 급살을 맞을 그 주구들-반동놈들과 자기를 유혹하던 허망한 꿈을 박산내고 짓뭉개버린 그여서 머리를 높이 들고 결기에 넘쳐 힘차게 걸음을 옮기고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