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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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근수목사가 장군님께 긴히 여쭐 말씀이 있다며 전화를 걸어온것은 보름전이였다. 서기가 전화를 받았다. 홍목사는 외람된짓인줄 알면서도 전화를 걸었노라고 죄스러워하며 말했다. 서기는 장군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를 지도하고계시니 저녁때쯤 아니면 래일아침 다시 전화를 걸라고 하였다 홍목사는 그리하겠노라고 대답했고 서기는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다. 그날 김일성동지께서 북조선민주주의 정당, 사회단체, 행정국, 인민위원회대표협의회에서 《목전조선정치정세와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의 조직에 관하여》라는 력사적인 보고를 하고계시였다. 그날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고 김일성동지께서 위원장으로 추대되시였다. 비로소 북조선에 중앙주권기관이 세워진것이였다. 새 민주조국건설을 위한 사업에 몸바칠 각계층 인사들이 주권기관의 책임적인 위치들에 임명되였다. 강량욱목사(림시인민위원회 서기장), 정준택(산업국장), 리봉수(재정국장), 한설야(교육국장) 등 정견과 신앙, 당파에 관계없이, 지난날의 출신과 경력에 관계없이 모두가 장군님의 건국사상을 받들어 힘껏 일하기로 마음다졌다. 그날 김일성동지께서는 밤이 깊도록 짬을 낼수 없으시였다. 홍목사도 아마 그러한 력사적사변에 대한 소식을 듣고 전화하기를 삼가했는지 모른다. 그일은 곧 잊혀졌다. 서기도 제일 바쁜 나날을 보내고있었으므로 그 일을 스쳐보냈다. 그런일까지 분망하신 장군님께 보고드릴수 없었던것이다. 만약 그때 홍목사가 그저 《긴히 여쭐 말씀이 있다.》고만 하지 않고 마음속 불안과 초조감을 조금이라도 드러냈다면, 그리고 그러한 사정을 서기가 장군님께 보고드렸더라면 모든 일은 달리 되였을런지도 모른다. 보름이 지나서야 홍목사가 행방불명되였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시보안서에서 좀 알아볼 일이 있다면서 홍목사를 데려간이래 열흘나마 소식이 없으므로 목사의 딸 홍금옥이 사방 수소문하던끝에 보안국장에게까지 그 일이 알려졌던것이다. 시보안서에서는 홍목사를 데려간 일이 없었다. 보고를 받으신 김일성동지께서는 홍금옥을 부르시였다. 보안국장인 최용건이 홍금옥을 데리고왔다.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오른 홍금옥은 장군님을 뵙자 쓰러질듯 비틀거리며 오열을 터쳤다. 《장군님!-》 그이께서는 처녀를 진정시키며 벌어진 일을 자세히 알아보시였다. 《그날 웬사람들이 총을 메구 왔댔습니다.》 홍금옥이 흐느끼며 말씀드렸다. 《시보안서에서 왔다며… 증명서도 내보였습니다. 아버지가 보안서에서 나를 왜 찾는가 하고 따지자 한사람이 서울에 갔다왔으니 좀 알아볼게 있다고 했습니다. 아버진 날더러 곧 돌아오마 하고 나가셨는데… 여러날 지나도록 아무 소식도 없었습니다. 장군님, 나쁜놈들이… 아버질 끌어간것 같습니다. 그때두 어쩐지 이상했습니다.》 최용건이 자기 생각을 말씀드렸다. 《조만식의 <희망단>패거리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그자들을 추적하고있습니다.》 《<희망단>?》 《예. 그건 겉에 내건 간판이고 원래는 서울과 맥을 잇고있는 <따벌떼>라는 테로조직이였습니다. 조만식이 앉아있을 때 자주 날치군 했습니다.》 《음-그래 그 <희망단>패들이 지금도 활개치고있단 말이요?》 《아니 조만식이 실각한 후론 다 숨어버렸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심각한 표정이시였다. 지금 최용건은 보안국장인 동시에 민주당 당수이기도 하다. 조만식이 실각하자 《희망단》패거리가 숨어버린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자들이 숨어서 못된짓을 일삼는다는것은 홍목사의 신변이 무사치 못하리라는것도 말해주는것이라. 그이께서는 눈물에 얼룩진 홍금옥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오. 이제 곧 아버지의 행처를 알아보자구. 그런데… 손에 든건 뭐요?》 《아버지가 쓰시던 수첩입니다. 장군님께 보여드리자구 우정 가지고왔습니다.》 《그래?… 그런데 아버지가 쓰신 글을 남들이 봐도 일없겠소?》 《장군님, 거기엔… 서울가서 쓴 일기도 있는데… 그걸 보면 아버지가 뭣때메 끌려갔는지 짐작되는것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렇다.-》 그이께서는 수첩을 받아들고 최용건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홍목사를 찾으라고, 가능한 모든 조치를 다 취하라고 이르시였다. 최용건과 홍금옥이 물러간 뒤 그이께서 홍목사의 수첩을 펼쳐드시였다. 양피지로 뚜껑을 한 보기드문 수첩이였는데 아마도 어느 외국인목사한테서 기념품으로 받은것 같았다. 놈들이 목사를 유괴한것이 이 수첩과도 관련되여있는것일가?… 목사의 딸은 그렇게 짐작할만한 근거가 수첩에 적혀있다고 말했었다. 수첩을 번지자 첫머리에 한자로 크게 써넣은 시 한수가 특히 의미깊게 느껴지시였다.
男兒生死義之歸 (사나이 살고 죽고 의를 위하야 끝장을 봐야하리)
한생을 그리스도교에 몸을 적시고 살아온 홍목사, 배일감정도 깊었던 량심적인 이 종교인은 무엇을 의(옳음)로 알고 어떻게 끝장을 보려한것인가?… 그이께서는 주의깊게 수첩장을 한장한장 번지시였다. 1945년 12월 5일. 서울에 도착했다. 해방된 내 나라의 서울, 감회깊다. 서울대교수 안호상댁에 려장을 풀었다. 부인이 반갑게 맞아주어 기쁘다. 안호상씨는 저녁 늦게야 들어왔다. 서울인상이 어떠냐는 물음에 나는 대답했다. 《우선 두가지에 놀랐습니다. 총독부지붕앞에 아메리카성조기가 높이 세워져있는게 첫째요, 둘째는 간판의 천국에 왔다는 느낌이였지요. 어느 담벽, 어느 전주대, 어느 건물 할것없이 무엇인가 써붙였더군요.》 안호상씨의 말도 기지있었다. 《모두가 웨쳐대고있지요. 두사람만 식탁에 마주 앉아도 무슨 회요, 그룹이요. 정당을 뭇거든요. 그러니 간판들도 많을수밖에요. 그걸 다 읽자면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해야 할겁니다.》 즐거운 웃음속에 술을 마시며 회포를 나누었다.
12월 6일.
고당(조만식)이 리승만박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할 방도를 안호상씨와 의논했다. 안씨가 제가 전하겠다는것을 거절했다. 고당은 편지를 읽고 우남(리승만)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세세히 살펴달라고 부탁했기때문이다. 안씨는 자기가 미국무성에서 파견한 로버트 올리버박사(리승만과 자별한 사이), 노블박사(미국무성촉탁, 미군정청 정치고문), 버취(하지사령관의 정치고문), 아써 번즈박사 등과 인맥이 있다는 자랑을 오래했다. 그때의 내 생각-(그것이 리승만을 만나는것과 무슨 상관인가?) 서울대철학과 주임교수이며 박사인 안호상씨가 경남 선령에서 《돈을 자갈쓰듯 한다》고 해 《안자갈》로 불리웠던 안석재씨의 5대독자로 도꾜정칙영어학교, 상해동제대예과를 나오고 이어 도이췰란드 예냐대학 류학을 했으므로 영어, 일어, 중어, 도이췰란드어 등에 능통한것이 우의 아메리카인물들과 친교를 맺게 한것 같다. 안씨의 안내로 돈암정의 리승만을 찾아갔으나 문전거절 당했다. 올리버박사, 노블박사 등과 밀회를 한다고 한다. 비로소 안씨가 미국인들과의 친교를 자랑한 까닭을 알게 되였다. 그들의 주선이 없이는 만나기 어렵다는 뜻일게다. 안씨가 말했다. 《며칠 푹 쉬면서 기다리십시오. 내 꼭 알선해주리다.》 나보다 14살이나 아래인 그였지만(지금 43살) 정치적감각에서는 마쯔오까(전 일본외상)도 릉가할거라고 생각했다.
12월 7일.
날이 흐림, 관절염이 도져서 종일 낡은 신문들과 씨름했다. 박인덕목사와 련계를 가졌다. 전국적인 그리스도계 회합은 취소되였다고 한다. 언더우드(연희전문학교 교장, 선교사)씨가 본국에 가있으므로 연기되였다고 한다. 그리스도교도들도 아메리카의 지령이 있어야 만나는가?… 기분이 울적하여 안씨부인이 본정의 장거리에 같이 나가보지 않겠는가 청하는것도 병을 핑게로 사절했다.
12월 8일.
안호상씨가 억지로 끌기에 조선호텔로 갔다. 아메리카인들의 좌관급숙소로 리용된다는데 병영겸 려인숙이였다. 불결했다. 호텔앞에 세워둔 석대의 찦차마다 기관총이 설치되여있는것이 나를 놀라게 했다. 아써 번즈박사와 버취(두사람 다 미국무성에서 하지사령관에게 고문자격으로 파견했다고 한다)를 만났다. 버취는 조폭하고 무례해보였으나 번즈는 사교성있었다. 안씨는 미리 나에게 버취가 하지중장의 정치고문으로서 《미군정청의 마캬벨리(폭력군주론을 제창한 이딸리아 정치가, 철학가)》로 불리운다는것, 지금 조선공산당 분렬과 좌우량익의 온건파를 떼여놓는 모략전을 벌리고있다고 했다. 번즈박사는 《수수께끼인물》이라고 했다. 번즈는 자기가 그리스도청년회의 보급에 전력한다면서 상봉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했다. 좋은 인상을 주는 인물이다. 조선말을 류창하게 하여 나는 영어뜯개말때문에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였다. 그들은 북조선의 정치정세와 쏘련군대의 형편에 대하여 커다란 관심을 표시했다. 내가 자기들보다 아는것이 적다고 유감스러워했다. 버취가 고당의 편지를 보여줄수 없는가 하는것을 거절했다. 버취는 로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으나 번즈박사는 조선말로 나만 듣게 《실례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헤여질 때에도 그는 굳게 악수하며 일체 편의를 봐드리겠다고 약속했다. 리승만이 아니라 트루맨대통령이라도 만나게 해줄수 있다고 웃으며 덧붙였다. 돌아올 때 안씨는 말했다. 《지금 리승만은 저 사람들 손탁에서 놀고있습니다. 그까짓 편지같은게 뭐라구 감추시는거예요? <나무는 하늘까지 자라지 않는 법> 이게 누구의 말이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갇혀있던 서대문감옥이 눈에 띄여 음울해졌다. 집에 와서는 또 신문들을 뒤적거렸다.
12월 10일.
이제는 어느정도 서울과 이남의 정치현황을 분별해보게 되였다. 며칠동안 신문과 담화 등에서 종합된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943년 12월 1일 까히라선언에서 련합국은 우리 나라의 독립을 약속했으나 어떤 구체적인 내용은 정해놓지 않은채 태평양전쟁은 마무리되여갔다. 해방후 남에서는 어느 지도자도 민중도 행동방향을 알지 못해 갈팡질팡했다. 우선 국내의 지도자들인 송진우와 려운형이 일본총독의 정권이양교섭문제에서 의견을 달리했다. 총독부는 80만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 20여만군대의 해체, 본국귀환 등 일본항복후의 사태에 대비할 준비를 무조건항복 열흘전에 모의했다. 그리하여 총독부는 쏘련군대가 북조선에 진주하던 그때에 먼저 송진우에게 행정권이양교섭을 벌려 행정위원회같은것을 만들어 독립준비에 착수할것을 요청했으나 송진우는 이 제의를 거절. 《중경에 있는 림시정부를 독립조선의 정통정부로 맞는게 순서이다.》고 했다. 그러나 려운형은 1944년부터 《조선건국동맹》을 지하에서 지도하다가 8월 15일 당일 표면에 나타나 활동을 개시했다. 그는 미군진주이전에 행정권을 총독부에서 인수받아놓는것이 급선무라고 했다. 그리하여 려운형은 8월 15일 정치범의 석방, 3개월간의 식량확보, 치안유지 및 건국운동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총독부와 합의를 보고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항복과 때를 같이하여 《건국준비위원회》의 발족을 선언, 려운형씨 자신 위원장에 취임했다. 총독부는 합의에 따라 정권기관, 방송국, 언론기관 등을 이양하기 시작했으나 8월 l8일 하오신문사와 학교 등을 다시 접수하려했다. 그무렵 《건국준비위원회(<건준위> 또는 <건준>으로 략칭)》의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산, 8월 31일까지 144개의 지부를 헤아리게 되였다. 그러나 《건준위》의 우파인 안재홍 등이 9월 l일 조선국민당(9월 24일 국민당으로 개편)을 결성하고 여기서 탈퇴, 그대신 허헌이 들어감으로써 건준은 좌익적결집체로 두각을 나타냈다. 《건준》은 9월 6일 전국대표자회의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을 만들것을 결의하고 부주석 려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귀국전), 외무 김규식(귀국전), 문교 김성수 등의 조각을 끝내고 미군 진주후에도 과도정부로 행세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미극동사령부는 9월 7일 남조선전역에 군정을 포고하고 8일 인천에 상륙하자 《38°선 이남의 조선에 있어 미군정은 유일한 정부이며 다른 정부는 있을수 없다.》고 포고했다. 10월 10일 아놀드미군정장관은 《인민공화국》을 부인해버렸다. 이렇게 되자 려운형은 10월 23일 중간좌파의 인민당을 조직, 그 당수로 되였다. 그간 서울에서는 김일성장군께서 서울에 개선하신다는 소식이 퍼져 온 서울시가가 끓어번졌다. 홍명희, 허헌, 려운형 등의 발기로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홍명희가 위원장중임을 맡아 그 조직사업에서 맹활약, 프랑카드와 꽃다발 등을 든 수십만군중이 매일 서울역에 밀려들어 인산인파, 남대문에 이르기까지 발들여놓을 자리가 없었다. 9월중순부터 10월초까지 객차이건 화차이건 북에서 나오는 차이면 빠짐없이 나가 기다렸다. 참다운 지도자, 민족의 령수를 맞고저하는것이 서울과 이남민중의 피타는 갈구이며 절절한 희망이였다는 눈물겨운 이야기이다. 이때엔 좌익, 우익, 중간파를 막론하고 저마끔 김장군님환영에 떨쳐 나섰다.(《김장군입경환영준비》라는 말로 통했다) 한편 총독부의 정권이양교섭을 거부했고 《건준》이 한창 기세를 올릴 때에도 그와의 협동에 응하지 않고 중경의 《림정》을 지지하여 사태를 지켜보던 송진우, 장덕수 등 민족주의자들은 드디여 《건준》에 대항하여 9월 1일 《림정환국환영회》를 결성하고 다시 김성수, 장택상 등을 포섭한 《국민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림정》의 법통을 지지하면서 9월 16일 민주당을 내오고 수석총무에 송진우를 내세웠다. 이 송진우, 김성수파가 미군정과 제휴하게 되자 려운형 등과의 대립이 짙어져 정계는 좌우로 갈라져 치렬한 싸움을 벌리게 되였다.(이밖에도 좌우의 각종 정당, 사회단체들 50여개). l0월 16일 리승만이, 11월 23일엔 김구, 김규식 등 《림정》요인 제1진 15명이 귀국하자 정치분쟁은 사회적혼란을 더욱더 가증시켰다. 귀국당초부터 미군정에 의해 《개인자격》으로만 입국할수 있다고 언명된 김구, 김규식등은 《림정》을 중심으로 과도정권수립에 전력했으나 미군용기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리승만은 당일 미군정청 1회의실에서 가진 기자회견때 《…내가 싫어하는것이 권력과 지위다. 그러나 나를 내세운다면 모든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겠다.》고 로골적인 정치권독점야심을 드러냈다.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지?…
이러한 정치동란의 와중에 나는 들어와있다. 내 누구를 지지하고 무엇을 타개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제3장 15절엔 이렇게 씌여져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할지어라. 이같이 하여 우리가 모든 의(옳음)를 이룸이 합당하느니>…》 예수께선 결국 모든것을 《허락》하라고 하시였다. 모든것을, 일체를!… 밖에선 눈이 내리고있다. 나는 잠들것 같지 않다.
12월 12일.
눈덮인 독립문을 보았다. 기관총을 건 미군찦차들이 눈바람을 일쿠며 내달리였다. 이 석조의 독립문은 1896년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얻어 건립한것이다. 일본통치 40여년에서 벗어난 지금은 무엇을 세워야 할가?… 아이로닉크한 느낌, 왜말로는 히니꾸(비꼼, 야유)하다고 할가. 독립문이 나를 아프게 할줄은 몰랐다.
12월 13일.
돈암정의 리승만을 만나러 갔다. 무장경관이 대문을 열어주었다. 련못과 분수가 있는 넓은 뜰 가운데서 무장경관들에게 둘러싸여 오래 기다렸다. 다음 잘 손질한 둔덕길을 올라 가 채색을 새로 한 절간을 거쳐 양풍의 방으로 들어갔다. 리승만과 아써 번즈 그리고 낯선 미국인(노블박사라 한다.)과 키큰 조선사람이 있었다. 리범석이라고 한다. 올해 70살을 넘긴 리승만은 말라빠지고 머리칼이 거칠어보이는데 거의나 눈섭이 없없다. 눈확이 움푹 빠져들어있어 그런지 졸고있는것처럼 보였다. 미이라 같은 늙은이였다. 조만식의 편지를 읽고나서 그는 말했다. 《고당은 애국자야. 내가 그 사람을 국무총리로 인선하려한건 사실이지. 그러나 그는 남쪽에 기반이 허약해.》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조만식의 편지내용을 짐작할수 있었다. 리승만은 키가 크고 사나와 보이는 리범석을 오래 칭찬했다. 《철기(리범석의 호)같은 사람이 내겐 필요해. 청산리대첩에서 맹위를 떨쳤고 광복군지대장으로 유명해졌거든. 지금은 귀국하자마자 민족청년단의 조직과 용인에 솜씨를 발휘하고있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제일 중요한 일은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없애는거야. 다시 말해서 최선의 과제는 공산주의와의 투쟁인데 지금 거론되고있는 인촌(김성수)이나 고당(조만식)은 다 정치기구를 구축하는 투쟁의 선두에 내세울 재목이 못돼. 철기가 제일 합당해. 미군정의 후원도 있으니까.》 그 마지막말엔 노블과 번즈도 머리를 끄덕거렸다. 리승만은 하와이계 조선사람들이 하는 된발음의 귀에 선 조선말과 영어를 섞어가며 《공산주의 역병》에 대해 한바탕 력설했다. 그는 맥없이 느릿느릿 말했지만 그럴 때엔 조는것같던 그의 두눈이 심술궂게 보였다. 나는 하지사령관이 조선사람이나 일본인이나 다 같은 《고양이 족속》이라고 했다는 말이 생각났다. 안씨가 그 말을 했을 때엔 의분이 끓어올랐지만 리승만에 한해서만은 그 말도 맞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승만은 철기를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임명할 생각이라고 내놓고 말했다.(이번에도 두 미국인은 동감을 표시했다.) 《지금 철기는 200명의 끌끌한 젊은이들로 <족청(조선민족청년단)>을 조직하고 훈련주고있지. 반공기세가 나의 <8.8구락부>팀보다 더하다는데 좋은 일이야. 미국사람들이 <군사영어학교>에서 군의 중추가 될 간부들을 육성하고 <국방경비대>를 확장하는데 발을 맞춰야 해. 우리가 직접 키운 반공남아들이 군의 맹주가 되여야 이북의 공산당을 쳐없애고 나라를 다스릴수 있어. 미국의 총과 대포에 우리의 <화랑도>가 재워져야 민주주의화할수 있다는게 바로 나의 지론이야. 그러니 이북에서도 반공세력부식에 매진해야 돼. 돌아가면 고당에게 말해주라구. 재무지속의 불찌가 꺼지기전에 한번 반짝 빛을 발하듯이 공산당도 망하려니까 광기를 부리는거라구. 북에서 자꾸 소요를 일으켜야 해. 우리 사람들을 많이 보내주는데도 원초적인 기틀이 허약해서 큰일을 못추거든. 북의 정치풍토에서 요령껏 헤염칠 생각만 말고 그 나름으로 맹위를 보이라구 해. 후날 나의 정권기반을 뒤받침해줄 재무부장관이나 부통령으로까지 인선할수 있어.》 그는 오래동안 끝없이 설교하고 훈령을 주듯했다. 도중에 중년부인 임영신(실은 49살이라고 한다)이 들어와 주전자에서 소주를 부어 매 사람에게 권했다. 아써 번즈가 내귀에 대고 아직 미국에서 오지 않은 프란체스까(리승만의 처)대신으로 여기서 함께 살며 리승만의 조락하는 늙은이의 애욕을 개처럼 핥아준다고, 리승만은 또 그대로 임영신을 래일의 상공부장관자리에 점찍고있다고 했다. 《이건 항간에 떠도는 류언비어가 아니요.》 하면서 그는 나에게 눈을 꿈쩍해보였다. 나는 피곤했다. 실망하고 분개하던 나머지 참을수 없이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늙다리의 낯짝에 침을 뱉고 나오고싶었지만 입을 꼭 다물고 새파란 눈으로 계속 나의 표정을 엿보고있는 노블이 두려웠다. 그처럼 싸늘하고 매서운 눈을 가진 사람을 여태 본적이 없는것 같다. 아써 번즈박사가 우리 조선사람들에 대한 참된 애정을 품고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반면 노블은 지독한 멸시와 증오심을 품고있는것이 알렸다. 이러한 미국인들때문에 미국의 자유원리와 민주주의정신이 가끔 오해되고 훼손되고있다는것을 생각하니 서글픈 감을 금할수 없다. 돈암장을 떠나올 때 아써 번즈가 따라나와 바래주었다. 그는 내가 언짢아하는것을 보고 리승만은 결코 파시스트가 아니라고 장담하면서 단지 순수한 부르봉파(프랑스최초의 왕조-전이하여 극단한 보수파를 부르본니즘이라 함)라고 했다. 그는 리승만이 조선독립을 갈망하나 그가 바라는 조선독립은 봉건국가의 그것이며 자유와 남북의 통일을 주장할 때 그는 지주이외의 그 누구도 아니라고 했다. 들리는 말에 리승만이 리씨왕족의 자손으로서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황해도 평산 대지주의 아들로 태여났다고 하니 그 말을 믿는다면 번즈의 주장도 일리가 있는것 같다. 번즈는 말했다. 《그는 토지개혁도 결단코 반대합니다. 그뿐만아니라 일체 사회개혁, 인권의 자유까지도 반대하는 다분히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고집불통에 지나지 않지요. 공산당이 주장하는것은 다 그의 내장을 뒤집어놓는것이니 파시스트적인 폭언이 나오는것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나는 그러한 늙다리를 미국이 뒤받침해주고 적극 중용하려하는 리유는 무엇인가고 물었다. 번즈는 딱해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는 또 그대로 미국이 간지러워 하는데를 개처럼 핥아주고있습니다. 그런 개는 귀염을 받기 마련이지요.》 《귀염을 받기엔 너무 늙어빠지지 않았을가요?》 나의 비꼬는 말에 번즈는 생색을 냈다. 《늙을수록 좋습니다. 경험이 중요하거든요.》 그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두고두고 생각해보아야 할 의미깊은 말이다. 나는 그가 내준 찦차를 거절하고 뻐스를 타고왔다. 그 찦차에 걸려있는 기관총이 나를 몸서리치게 했던것이다.
12월 15일.
안호상씨를 따라 보성전문근처에 있는 리응준댁을 방문하였다. 처음 안씨는 리응준이라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구조선말기의 무관학교출신 항일독립군투사 추정 리갑선생의 따님 리정희가 초청한다고만 했다. 나는 리갑선생과 같이 독립군에서 싸우던 석진하(우리 딸 금옥이의 친아버지)의 불굴의 기개를 옥살이할 때 체험했고 석진하씨의 옥중차입을 도맡아 오가던 리정희부인과도 면식이 있기에 선뜻 동의했다. 부인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석진하씨의 딸 석금옥을 양딸로 맡아키웠다는 얘길 들었다면서 아버지 추정의 이름으로 거듭 사의를 표했다. 그러나 그의 남편 리응준과는 적의를 품고 만났다. 그의 경력을 보기로 하자. 그는 안주태생으로서, 구조선말기의 무관학교 출신으로서 일본륙군사관학교 제26기생으로 위탁류학, 동기류학생들인 리청천, 홍사익, 박승훈, 신태영, 김석원 등과 함께 정규과정 마치고 일본군소위로 임관, 30년세월 일본군에 복무하며 대좌로 승진, 원산에서 8.15를 맞고 8월하순 서울로 와서 미군정청 군사국 차장 아고대좌의 청탁으로 군사국고문직 수락, 국방경비대창설의 산파역담당, 현재 국방경비대에서 탈바꿈한 륙군을 명실상부한 주력군으로 육성하는데 전력… 이상이 내가 들은 리응준의 전모이다. 친일파 매국역적이 미국의 식탁에서 빵부스러기를 주어먹으며 대령이랍시고 우쭐렁거리는 꼴… 구역질이 치밀고 허무한 생각에 슬프기 그지없다. 나를 초청한 진의도는 무엇일가?… 오늘은 리응준 생일, 일본륙사고참자들인 김석원, 신태영, 리태영, 백홍석, 류승렬 그들 후배인 채병덕, 리종찬, 일본경찰경력자 리익흥, 전봉덕… 게다가 중국 국민당군 소장이였던 김홍일, 광복군계의 오광선, 리준식, 안춘생, 장흥 등이 가득 모여들었다. 대개가 대령들… 어제날 피를 물고 싸우던 적수들이 닛뽄도를 미국제권총으로 바꿔차고 《공산주의박멸》이라는 새 리념을 술잔에 가득 채워마시고있었다. 참을수 없는것은 거림낌없이 왜말로 멱따는듯 일본군가를 불러댄 그것이다.
와까이 짓쇼노 요까렌노 나나쯔보당와 사꾸라또 이까리 (젊고 피끓는 해병사관생도들 일곱개단추는 사꾸라와 닻이다.)
태평양전쟁말기에 열광적으로 불리우던 일본군가이다. 특히 특공대원들이 죽음을 앞두고 떠나며 부르는것으로 유명해졌었다. 그렇지만 오늘 저네들은 무엇이 장하다는것인가. 어깨우의 계급장이 장하다는것인가. 아니면 아메리카성조기의 별들을 어깨에 달아 장하다는것인가?… 내가 문을 차고 나오려하자 역적들(모두 같은 놈들이다.)이 눈을 부라리며 막아섰다. 리응준이 호통쳤다. 《여기 모인 분들은 다 국군의 맹호들이요. 아직은 대대, 련대에 불과하지만 이제 곧 증편될 려단과 사단의 주인들이란 말이요. 이 분들을 모욕했다간 뼈다귀도 못추릴줄 아시오.》 《옳소. 옳소!》 하고 개들이 짖어댔다. 김석원의 말:《리응준대령은 미군정에서 특채되였소. 미구에 참모총장으로 승진할것이요.… 또 여기 이 사람, 제일 젊어뵈지만 잘 봐두시오. 미군사고문단에서 총애받는 소령 채병덕, 역시 참모총장이나 국방부장관 후보리스트에 올라있소. 나는 주력군장성이 될 사람이요. 알겠소? 공산당과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하는게 내 소원이란 말이요. 그러면 다야!》 그때 나는 영국철학가 랏쎌이 길거리에서 개들이 싸우는것을 보고 저것들은 왜 미친듯 으르렁거리며 싸우고있을가. 본능이외의 그 어떤 고상한 목적이 그들을 싸우게 하는가? 하고 생각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러면 이 개들은 무엇때문에 으르렁거리는가. 공산주의가 그들의 빵부스러기를 빼앗을가봐 겁냈기때문인가?… 결국 8.15전에 서로 으르렁거리던 개들이 오늘은 먹이를 주는 다른 주인을 쫓아 공산주의라는 알수 없는 형체를 향해 짖어대는것이다. 개들이란 보름달을 보고도 무엇때문인지 노염을 타며 왕왕 짖어대는것 아닌가!… 나는 참을수 없어 그들에게 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가, 너희들때문에 나라의 분단이 고착되면 력사앞에 민족앞에 그 책임을 지겠는가. 왜놈들의 개노릇하던것들!… 하고 소리쳤다. 개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옷을 찢고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리정희부인과 안호상씨가 겨우 뜯어말려 나를 마차에 태워왔다고 한다, 안씨가 나를 나무랬다. 《참, 깜깜도 하시지. 머지않아 큰 싸움이 붙게 된다는걸 과연 모르시오? 미국과 로씨야, 남과 북, 공산주의냐 자유민주주의냐 하는 판가리가 있게 된단말이죠. 그런데 목사님은… 그게 무슨 추태입니까. 개들이라니… 한참 열을 올려 공산주의를 소탕할 무력건설에 매진하는 사람들께 성서에도 씌여있지요. 모세가 했다는 말, <마당질하는 소의 입에 굴레를 씌우지 말지어라.> 그런데도 괜히 그네들을 건드려가지구…》 《그것들이 나를 왜 청했소?》 《공산치하의 이북엔 총이 얼마나 있는지 알고파서 찾았겠죠.》 나는 피가 섞인 가래를 내뱉었다. 《더러운 개들!》 안호상씨는 리승만의 《8.8구락부》요 《소년단》이요 리범석의 《족청》과 김구의 《광복단》, 려운형씨의 《조선국군학교》 등 모든것들이 국방군창설의 준비단계라고 력설했다. 나는 려운형씨까지 그 일에 말려들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모든것이 악몽같기만 하다.
12월 18일
이틀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소식을 듣고 아써 번즈박사가 문안을 왔다. 그는 미국에서 언더우드가 곧 돌아온다며 그리스도교인들의 대회합에 꼭 참가하라고 했다. 후날 로자문제는 자기가 맡아주겠다고까지 했다. 참으로 인정깊고 사교성있는 사람이다. 미국무성에서 노블이나 버취같은 조야한 인물들이 아니라 이런 사람들만을 골라 파견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것인가!
12월 20일.
계동에 있는 몽양 려운형씨를 방문했다. 장골에 풍채가 좋은 사람이 반갑게 맞으며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뵈웠는가 하는것부터 물었다. 내가 장군님을 만나뵙던 이야기를 하니 흰 나비수염을 연신 비다듬으며 흥분하였다. 자기도 이제 곧 평양행차를 하여 장군님을 만나뵙겠다고 했다.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는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품고있다. 미국은 해방자의 탈을 쓴 침략자라고 하면서 그 실례들을 무수히 들었다. 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한때 일본천황이 그를 구슬리기 위해 권하는 대만총독자리까지 차버린 강직하고 도고하고 배심있는 인물답게 그는 국제국내정세분석과 판단이 날카롭고 특이했다. 지난 9월과 10월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 발기인의 한사람이였고 서울대학교운동장에서 있은 시국연설때 《장차 이 나라를 이끌 령도자는 누구인가. 당신인가?》 하는 질문에 《나도 아니고 리승만도 <림정>요인들도 아니다. 오로지 김일성장군님이시다!》라고 말해 군중을 끓게 했던 몽양… 그런데 그가 조직한다는 《조선국군학교》란 무엇일가?… 그는 나를 차에 태우고 한때 일본놈들이 《청년훈련소》로 쓰던 건물(덕수궁뒤쪽)로 갔다. 해방후 갓 조직된 인민위원회와 진보적정당, 단체, 기관들을 미군들과 테로분자들로부터 보위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저 학교를 내왔는데 미국놈들(그는 꼭 그렇게 말하군 했다.)의 압력때문에 얼마 가지 못할것 같다고 했다. 약 200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있었다. 조선력사, 지리, 외국어과목들과 군사, 체육과목들이 있다. 정치에서는 국내외정세와 사회발전사 등을 취급하는데 몽양자신도 자주 출연한다고 한다. 《김일성장군의 조국개선》, 《미국의 대남조선정책》, 《쏘련의 10월혁명과 레닌》, 《북조선공산당중앙조직위원회의 정치로선》 등 제목들을 보면서 이것이 서울에 있는 학교라고 믿기 어려웠다. 몽양은 말했다. 《좋은 청년들을 골라 모집했는데 아무래도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이북에 보내야 할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매일 학교간부들이 체포되거나 랍치당하고있는데 조만간 전체 학생들을 감옥소에 끌어갈것입니다.》 몽양은 침통한 표정이였다. 나는 그의 아픈심정이 리해되였다. 그러나 그를 위로해줄 말을 찾을수 없었다. 그는 평양에서 또 만나자고 하면서 내 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12월 22일.
안호상과 다투었다. 일인즉 그가 《학도호국단가》라는 가사를 보여준데서 시작되였다. 그 가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평양 큰물기슭 대륙동녘에 우뚝 솟은 백두산, 민족의 정기 화려한 금수강산 이루었으니 하늘이 주신 내 나라 지켜나가세. 우리들은 삼천만민족의 태양, 피끓는 호국단 학도호국단.》 이건 뭣하는건가고 물으니 백두산정상에 태극기를 꽂을 때까지 싸워갈 열혈학생들의 조직 《학도호국단》을 자기가 발기하고 뭇게 된다는것이였다. 학생들에게 학문탐구가 아니라 반공의 몽둥이를 쥐여준다는것이다. 나는 꿈쩍 놀랐다. 철학교수가 《학도호국단》이라는 무쇠방망이로 공산주의와의 혈투에 나서겠다고 하니 이 아니 변괴인가. 도대체 이곳 남조선땅을 휩쓰는 《반공》의 회오리바람은 어데서 무엇때문에 시작된것인가? 모두 반공병에 미쳐버린것 같다.
12월 24일.
김성수계의 인천방직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동아일보》, 《서울신문》 등이 벅적 떠든다. 공산당계렬의 선동이라며 경찰투입, 미군이 10여명 경찰의 부상을 구실로 총을 란사, 피에 젖은 공장…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사실여부를 확인하려하니 그쪽의 말. 《당신은 뉘신지? 미군정에 가서 확인하시죠. 그네들 허락없이는 한 글자도 내보내지 못하는 우리인데요.》 안호상부인은 나더러 제발 그런일 상관말라고 한다. 《아직두 모르시겠어요? 미국사람들 눈밖에 나면 목숨이 위태로운걸요. 소식을 들으셨죠? 남창리농민들이 무슨 쟁의를 벌렸다는 얘길요. 아유 무서워!… 글쎄말예요. 그 마을 주민들을 다 학살했다질 않아요… 못들으셨다구요? 그러실테죠. 그런건. 메스콤(출판보도)도 취급하지 못하게 돼있지 뭐예요.》 정말 무서운 일이다. 번즈박사를 만나 사리를 따져봐야겠다.
12월 26일.
드디여 오늘 오후 아써 번즈를 조선호텔에서 만났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로 미군중좌 하나가 그와 무슨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있었다. 번즈는 례의 인상좋은 웃음을 지으며 중좌에게 나를 소개했다. 《제가 말하던 홍근수목사입니다. 고정한 분이지요.》 중좌의 이름은 캬농이라고 했다. 잭크 캬농, 일본에서 서울미군정청의 요청으로 왔다. 맥아더사령부의 월로우비준장이 거느린 정보국의 《캬농기관》책임자라고 한다. 그의 이름을 딴 《캬농기관》… 나도 풍문에 그것이 유명짜한 정보기관이라는 얘길 들은것 같다. 그래서인지 불쾌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번즈역시 정보활동을 하는 사람이 아닐가?… 미국무성의 촉탁이였다고 함은 위장을 위해 내돌린 말이나 아닌지?! 번즈는 내가 찾아온 사유를 듣고 웃으며 말했다. 《군대가 아닙니까. 군대란 제가 쏘지 않으면 제가 죽는다는 사상으로 교육되였습니다. 그러니 반항하면 쏘기 마련이지요. 뭐 별로 놀라울건 없습니다. 무서운건 공산주의역병입니다. 그것들이 부식되면 우리 자유세계는 지옥으로 되고맙니다. 이걸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권고하는바이지만 자중하십시오. 리승만이라는 개의 입을 빌어 말하는것입니다. 핫하하… 내가 일전에 말했지요. 미국이 간지러워하는데를 그가 개처럼 핥아준다고… 하하하… 리승만박사가 들으면 몹시 노엽겠지만 할수 없지요. 이건 진실이니까요.》 그는 변했다. 아니 비로소 자기를 드러내놓은것 같다. 나는 내가 믿었던 미국, 《자유의 천국》에서 온 미국군대가 어떻게 광복된 나라의 평화적주민들을 총으로 쏠수 있는가. 우직한 미국의 일부 장교들때문에 아메리카의 성조기에 피칠을 하게 되지 않았는가. 미국은 이에 대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 사죄해야 한다고 흥분하여 말하였다. 번즈는 여전히 히물히물 웃으며 캬농중좌에게 눈짓했다. 캬농이 말했다. 처음부터 조폭한 어투였다.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여기서는 마음대로 혀바닥을 놀려도 무방하지만 평양에 돌아가선 얌전하게 구는게 좋습니다. 알겠습니까? 이제 우리 사람들이 찾을수 있는데 고분고분 시키는대로 하시오. 우리가 아니면 공산주의자들이 당신목을 매달것이요. 당신에겐 딴 길이 없소. <주사위는 이미 던져 졌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미칠 지경이다. 그자들은 나를 스파이로 만들 생각인것 같다. 조선호텔을 나와 안씨댁을 찾는다는게 부청앞 광장에서 태평로반대쪽인 이전 총독부가 보이는 세종로를 헤매였다. 음산한 서울, 찢어진 광고쪼각들이 찬바람에 휩쓸려 덕수궁의 울담곁에 가득 쌓여있었다. 나는 서울시가를 둘러싼 인왕산, 북악산, 삼각산, 남산들이 나를 옥죄고 짓눌러놓는듯 숨이 막혀 허우적거렸다. 저녁늦게 들어온 안씨가 하는 말. 《번즈박사는 목사님이 자유세계를 위해 싸워주길 바란답니다. 내게 특별히 이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하더군요.》 나는 기가 막혔다. 말할 생각도 없었다. 누가 말했던가, 감옥에 갇혀서 감옥의 영예를 위해 싸운 바보는 없다고! 이 말을 번즈에게 하지 못한게 후회된다.
12월 28일.
언디우드고 뭐고 그리스도교인들의 회합이고 뭐고 내겐 하등 상관이 없다. 한시바삐 서울을 떠나고싶은 생각뿐… 마지막으로 독립문앞에 서서 자문하였다. 독립문은 왜 세웠나? 이젠 또 무슨 문을 세울가보냐? 지옥문을 세우는게 합당하지 않을가 한다. 예수님, 대답해주십시오. 《이제 허락할지어다. 이같이 하여 모든 의(義)를 이룸이 합당하느니…》 여전히 그 말씀뿐이오이까?…
12월 29일.
수원에 사는 고모님댁을 찾아떠난다. 잘 있으라 서울, 아무런 미련없이 나는 간다. 오래간만에 고모님댁에서 려독을 풀고 설도 쇠고싶다. 북행길은 아직 미정이다. 한시바삐 가고싶지만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마음 달랠 길이 없다. 죄많은 이 몸, 이제 장군님께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가보냐. 장군님의 선견지명을 눈이 어두워 볼수 없었고 장군님의 웅도에 어굿나는 죄될 말씀을 함부로 무엄하게 올렸으니 이제 무슨 낯으로 장군님을 대할가 보냐… 생각해보자, 깊이 반성해보자, 아무튼 가야 할 길, 가지 않으면 안되는 그 길…
사나이 살고 죽고 … 용서를 빌며 가자…
이날 저녁무렵 김일성동지께서는 상수구의 하수도구멍에서 홍목사의 시체를 발견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시였다. 칼로 얼굴을 란탕쳐서 겨우 확인했다고 한다. 그이께서는 이윽토록 아픈 심정을 누를수 없으시였다. 누가 무엇때문에 그를 그토록 잔인하게 살해했는가. 고정하고 량심적인 목사를, 그 누구와 주먹질 한번 해보지 않은 사람을?… 그는 미국에 대한 환상에서 깨여나고있었다. 미국을 《자유》와 《민주》의 천국으로 보았고 조선의 《해방자》로 믿고있었으나 무엇인가 그 믿음에 금이 가고 한순간 질그릇처럼 깨여져버리는것을 느꼈었다. 아마도 그때문에 놈들의 음모에 가담하기를 거절하고 그 내막을 전화로 알리려 했을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오래도록 수첩을 번지고 또 번지시였다. 민주의 새 조선을 위해 량심껏 협력할수 있었던 한사람이 살해되였다. 놈들은 그의 량심을 영영 시궁창속에 처박아두려고 했다. 새로운 정의와 량심이 싹터나지 못하게 짓이겨버리려 하고있다. 그이께서는 최용진에게 전화를 거시여 홍목사를 살해한 놈들을 끝까지 찾아낼데 대하여, 테로분자들의 준동을 철저히 짓부실데 대하여 명령하시였다. 이윽고 안길을 불러 홍목사의 장례를 잘 치르도록, 그의 유가족들을 잘 돌보아주도록 이르시였다. (안길은 지금 평남도당책사업도 하고있었다.) 그리고는 그의 양딸 홍금옥(본명 석금옥)에 대하여 알아보시였다. 독립군렬사의 딸이며 량심적인 종교인의 양딸인 그 처녀가 두 아버지의 뜻을 잇도록 하시려는것이였다. |